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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로마서 11:25-27 / 온 이스라엘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로마서

로마서 11:25-27 / 온 이스라엘

정인순 2014. 1. 26. 15:26

 

 

이근호

 

음성                 동영상

 

로마서 11:25-27    온 이스라엘

 

복음과 관련된 것에만 사는 가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단순히 일반 나라 중의 하나라고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도를 보게 되면 많은 나라들이 나타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지도의 비닐을 뜯어내게 되면 그 비닐은 지도 지면과는 분리된 또 다른 차원의 그들만의 지도가 되듯이 이스라엘이 그런 나라입니다. 일반 나라로서 설명될 수 없는 나라입니다.

 

이 이스라엘이 나름대로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과거가 있고 현재가 있고 미래가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이스라엘 나라는 현재 이스라엘이 과거 이스라엘을 거부되고, 현재 이스라엘이 미래 이스라엘에 의해서 거부될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성도 개인의 일생을 대변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성도의 현재 입장이 자신의 과거 삶을 부정(否定)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미래의 삶이 지금의 삶을 부정(否定)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 때문입니다. 복음이 뽑아내는 나라, 곧 참 이스라엘은 그 어떤 시점이나 그 어떤 구성원에 의해서도 독점될 수가 없습니다. 끊임없이 요동치는 큰 바다의 파도를 외롭고 작은 배가 다스리거나 조정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의 변화무쌍함과 더불어 성도는 자신의 교만과 위선이 뜯겨져 나가야 합니다. 과거의 자아는 현재 자아에 의해서 새롭게 부정당해야 하고 내일의 자아는 오늘의 자아를 마땅히 부정해야 합니다. 그 와중에서 드러나는 것은 참 이스라엘의 면면입니다. 참 이스라엘은 자신을 부인하면서 살아가는 자들의 집합입니다. 그것도 십자가 복 앞에서 항상 부정합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오늘도 떨어져나가야 만드는 그 활약상을 참 이스라엘은 보여주게 됩니다. 늘 자신의 역사를 부정하면서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그 이스라엘 자체보다는 복음만 증거하는 실체가 곧 참 이스라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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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이스라엘

 

2014년 1월 26일                             

본문 말씀: 로마서 11:25-27

(11: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11: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11:27)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반복해서 자주 말씀드립니다만,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봐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자기 자신의 신체의 변화와 정신적인 혼돈 상태에서 신의 뜻을 찾고자 하는데 그렇게 되면 여전히 사단의 세력 하에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나타내려, 즉 자기 백성을 찾으려 오셨습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오셨습니다.(마 10:6) 즉 인간들의 개인적인 역경이나 문제를 해결하시는 주님이 아니십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이유는, 그 귀신이 애초에 들어앉아있는 그 자리가 귀신에게 합당한 자리였다는 사실을 까발리기 위해서입니다. 즉 ‘귀신 쫓겨나면 우리 멀쩡하다’가 아니라 나 자신이 문제거리다는 겁니다. 귀신들이 선호할만한 그런 존재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쫓겨난 귀신이 다시 친구 일곱귀신 데려다가 다시 우리 자리로 되돌아옵니다.

참된 자리란 우리 몸에서 추가적이고 이질적인 요소가 나타나야 합니다. 마치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의 몸 속에서 끊어지지 않는 영생의 물이 나오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에스겔 새성전에서 물이 문지방에서 계속 흘러나오듯이 말입니다. 이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생각한 그 이상의 것이 나와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온 이스라엘’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존에 있는 이스라엘에 숫자로 채워지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비밀에 입각해서 온전해진 이스라엘’을 두고 말합니다. 이는 전에 있는 이스라엘 자체가 이미 비밀을 간직한 이스라엘였다는 말입니다. 그 비밀이 비밀답게 공개되면 참된 이스라엘이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기존의 이스라엘은 비밀을 알지 못했던 인간들이 오해한 것입니다. 마지막 비밀의 방은 ‘십자가’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 세상의 지혜들은 이구동성을 말합니다. 십자가는 어리석고 미련한 것이고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사건이다 고 말입니다. 그러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 이해할 수 없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참 이스라엘은 ‘잃어버린 양’들의 집합이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양’이라는 표현은 오로지 참된 목자만이 하실 수 있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참된 이스라엘에서는 ‘잃어버린 양’을 생산합니다. 이는 십자가 능력으로만 실시됩니다. 곧 목자의 죽음입니다. 참된 양의 등장은 양이 알아서 목자를 선택할 사항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우선 목자가 먼저 죽습니다. 그리고 그 죽은 목자에 의해서 양이 생산됩니다. 그래서 양은 목자를 알고, 목자를 압니다. 하지만 이 둘 사이의 매개는 오직 죽음입니다. 요한복음 12:24에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다’고 있습니다. 질적인 변화는 필히 죽음을 경유해야 하고 그 죽음은 인간 독자적인 죽음이 아니라 예수님과 동반된 죽음에서 일어나는 상황입니다. 쉬운 예를 들면, 어느 길 가던 여인이 갑자기 쏟아진 피를 피하기 위해, 한적하고 초라한 어느 기우려져 가는 집 처마에 잠시 몸을 숨겼습니다.

하지만 비가 더 세차게 내려 신체 하위 쪽이 다 젖자 아예 따스한 안방으로 잠시 몸을 피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 몇 개월 뒤에 그 여인은 그 집 며느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서 ‘바깥→처마 밑→안방’까지는 과정에서 그 어떤 여인에게 신분상 변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집 ‘며느리’가 될 줄은 그 여인은 비가 올 때도 상상치 못한 새롭게 등장된 추가된 요소입니다.

이스라엘이란 곧 ‘잃어버린 양’의 집합입니다. 이로 인하여 기존의 이스라엘은 결코 온 이스라엘 숫자에 합세할 그런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질적인 변화, 신분상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분상의 변화는 양이 스스로 전환할 숙제가 아니라 목자가 일으키신 그 사건에 의해서 벌어질 일입니다.

목자가 직접 양을 찾아갑니다. 그러면 그 자리에서 비로소 만드는 사실은, ‘나의 원수’, ‘나의 적’이 아니라 ‘주님의 원수’, ‘주님의 적’이 보입니다. 즉 그동안 인간들은 자신도 모르고 ‘주님의 원수’로서 구원받고자 시도해 왔던 것입니다. 로마서 5:10에 보면,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곧 예수님의 죽으심은, 자신의 양들이 하나님의 원수의 주도 하에 온갖 우상들을 섬기고 왔음을 알려주려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 곧 신을 자신을 지키는 무기로서 사용해왔습니다. 그러면서 불평을 합니다. “하나님이 왜 저를 힘들게 하십니까?”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오해는 요한복음 11장에서 마르다, 마리아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위 자신들이 살아있다고 장담하는 마리아, 마르다 편에 서 있지 않습니다. 도리어 죽은 오빠 나사로 편에 서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장례식에 참석해서 우신 것은 죽은 나사로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자신들이 살아있는 존재라고 장담하는 마리아, 마르다는 불신앙 때문에 우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제대로 ‘산 자’라고 알려주시는 겁니다.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가나 혼인잔치에서 있었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그 결혼식을 축복해주신 것이 아니라 반대로 심판하셨습니다. 포두주가 없어 결혼식 분위기가 가라 앉아 있다는 그 사실과 자신이 결혼식에 참석한 사실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물로서 포도주를 만드시는 그 결혼식말고 다른 혼인잔치를 염두에 두고 내린 조치입니다. 기존 결혼식은 그냥 죄가 확산되는 일환일 뿐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자신이 누구지도 모르는채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받고자 하는 시도를 예수님은 자신을 연결시키지 않습니다.

인간이 예수님을 붙잡았다고 여길 때,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예수님을 살해하십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죽여버립니다. 이로서 인간에게 애초부터 구원의 그 어떤 접점을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죽은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살리시므로서, 예수님을 죽인 죄악과 거기에 따른 저주와 심판을 전 우주로 보편화시켜 버리십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예수님의 자의에 의해서 ‘잃어버린 양’을 만들어내시는데 그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 ‘온 이스라엘’입니다. 이들은 일체 자기 행함의 가치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불심판을 견뎌낼 수가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 어떤 것도 내 안에서 더러워짐을 우리가 인정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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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오용익

69강-롬 11장 25-27(온 이스라엘)14011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11장 25절에서 27까지 입니다. 신약성경 255페이지입니다.

 

로마서 11:25-27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서 성경에 비밀이라고 했지요. 그 비밀을 구성하는 단어들이 나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그 비밀 자체가 비밀이고요, 그 다음에 이스라엘 자체가 엄청난 비밀입니다. 왜 비밀인가 하면, 우리조상들도 하나님 믿고 일본도 하나님 믿고 필리핀에도 다 하나님이 있어요. 그런데 그 하나님은 구원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보통 무시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아프리카인들도 각자 신이 있어요. 그런데 그 신들은 구원이 안 되는, 믿어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신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유독 구원을 해 낼 수 있는 신은 이스라엘의 하나님밖에 없다는 이야기, 물론 비밀이면서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화가 나게 만드는 거지요.

 

그 다음에 이방인이 나오는데 이방인 자체도 비밀입니다. 각자 자기 민족들이 있으면 그만이지 “너는 이방인이야. 그런데 우리는 천국백성이거든.” 이 자체가 모독적인 언사인 동시에 비밀이에요. “네가 뭔데? 대체 너희들이 뭐야? 너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인데, 네가 믿는 신이 따로 있고 내가 믿는 신이 따로 있는데 같은 인간이라는 조건에 맞춘다면 네가 믿는 신도 내가 존중해 줄 테니까 네가 존중하는 만큼 내가 믿는 신도 존중해줄 때 우리는 세계인류평화에 기여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상식이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천국백성이고 너는 이방인이라 못 들어간다.” 이렇게 한다면 처음의 조건, 너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이라는 자체가 틀어지는 거지요. 우리가 인간이라면 저것은 인간이 아니고 저것은 아예 하늘의 사람이고 외계인이지요. 별에서 온 그대고. 저쪽 이스라엘이 인간이라면 우리는 개지요. 독사의 새끼고 개가 되는 거예요. 이것도 비밀입니다. 그 다음에 “온 이스라엘” 할 때 그 “온”이라는 것도 비밀이고요, 더욱더 놀라운 사실이 나옵니다. 구원이라는 것이 비밀입니다. 왜냐 하면, 구원이 무슨 뜻이냐 하면, 구출이거든요.

 

구출이란 “이 땅에서 그대로 살아서는 안 돼. 빨리 빠져나와.” 하는 뜻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이 모든 교육이 뭐냐 하면, 빠져나오는 교육이 아니고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성공하느냐 하는 거기에 집중하는 선행학습을 하고 있어요. 24시간 모든 정보가 떠나기 위한 정보가 아니고 머물러서 출세하는 정보를 채택합니다. 유튜브에 제 동영상 설교를 띄워놓아도 별로 보지를 않아요. 주로 보는 것이 싸이의 강남스타일 같은 것, 이 세상을 어떻게 즐기는가에 관한 동영상만 뜨지 떠나자, 하는 그것은 별로 보지도 않습니다.

 

그것도 비밀이지요. 하여튼 비밀, 암호투성이입니다. 그 다음에 26절에 보면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여기서 “시온”도 비밀이에요. 시온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다윗이 있던 예루살렘의 뒤편 산 이름이 시온 산이에요. 대구 같으면 팔공산쯤 됩니다. 그 시온이라는 명칭 자체가 베이징이나 부산, 서울이나 마닐라나 홍콩과 견주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홍콩에 백날 있어봐야 구원이 안 된다는 겁니다. 구출이 안 된다는 거예요. 미국의 뉴욕에 가도 소용없고 이민 가려면 예루살렘 시온으로 가라는 식이에요. 그것도 비밀이죠.

 

그 다음에 야곱. 경주 이 씨의 시조가 이 항복이랍니다. 감나무에 얽힌 일화로 유명한 분이죠. 왜 이항복으로는 구원이 안 되지요? 이 항복이 경주 이 씨의 시조라는 것으로는 구원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구원되는 겁니다. 이것은 사람차별도 이런 차별이 다 있습니까?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여기서 야곱도 비밀입니다. 그 다음에 궁극적인 비밀이 나와요.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여기서 “죄”라는 것도 비밀이에요. 우리가 알고 있는 죄는 우리가 선악과를 따먹은 상태에서 나오는, 우리가 판정내린 그 죄를 죄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을 살인이라 한다. 그런데 나는 살인을 아직 안했기에 살인죄를 짓지 않았고 따라서 나는 살인죄에 관해서만큼은 죄를 짓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성질난다고 해서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살인죄에 해당된다.”라고 판정을 내리는 거예요. “그래서 저 사람은 살인죄에 관한한 죄인이고 살인죄에 관한한 나는 죄인이 아니다”라는 것이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죄라는 것이 얼마나 큰 비밀입니까? 우리에게서 뭔가 선악과 악을 끄집어내서 판단하겠다는 자체가 죄가 되는 겁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면서 어떤 사람은 복을 받아서 오래 살고 부자가 되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가난하게 되었다. 부자 되었으니 축복이고 가난하게 되었으니 저주다.”라고 판정내린 그 축복 관과 저주관이 선악과 따먹은 후유증에서 나온 것이기에 그것이 죄가 되는 겁니다. 제 결혼식에서 어떤 목사가 엄청난 오류를 범했어요.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가나안 혼인잔치에 가서 축복을 했다는 겁니다. 그것은 가나안 혼인잔치를 저주를 한 거예요. 그 내용을 읽어보세요. 예수님 어머니가 “예수님, 포도주 떨어져서 잔치 분위기 다 깨지게 생겼습니다.” 예수님이 하는 말이 “그거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출발점을 마리아라는 인간으로부터 출발했어요. 그러나 대꾸하기는 장차 오실 진짜 예수님만이 아는 죄, 예수님만이 아는 천국, 예수님만이 아는 축복, 그 관점에서 마주치니까 서로가 소통이 안 되는 겁니다. “포도주가 있어야 결혼식이 되겠습니다.” 예수님이 하는 말이 “그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네 결혼식을 내가 왜 축복해야 되는데?)” 사람들의 결혼식을 축복해버리면 나오는 결론은 하나밖에 없어요. 죄의 확산입니다. 결혼식은 끊어줘야 돼요. 주께서 결혼식에 참석한 것은 결혼식 자체가 죄의 확신이기에 이것을 끊겠다는 겁니다.

 

결혼식의 신랑신부 주인공에서 예수님이 결혼식의 주인공으로 바뀌는 전환지점에서 이적을 베풂으로 말미암아 신랑신부를 쳐다보지 말고 나를 보라는 그 말이지요. 내가 만든 혼인잔치가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이게 탈출이에요. 이게 구원이라고요. 왜 가나안 혼인잔치를 축복을 해요? 심판을 해야 되지요. 성질이 나서 인상이 그만 굳어지고 말았어요. 사진은 찍어대지 동영상촬영은 하고 있지, 참……, 왜 모든 것을 반대로 생각하느냐는 말입니다, 항상 반대로. 사람을 좋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그 다음에 27절에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이것도 비밀이고 암호에요. 사람이 착하면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까? 아니거든요. 착하면 천국 가는 것이 아닌 이유가 착한 인간이 이 세상에 없어요. 천심은 있지만 착한 인간은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들끼리 짜내서 상대적으로 더 착하고 의롭다든지 못났다고 결정하는 그 판정.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그 판정자체를 뭉개버렸습니다. “너희들이 착하지? 착한 사람 다 나와!” 착한 사람 1번 타자가 바리새인, 그 다음이 서기관, 그 다음 착한 사람이 사두개인, 그 착한 사람 모아서 하는 짓이 무슨 짓인 줄 알아요? “예수 그리스도를 사형에 처한다.” 그겁니다.

 

교회가 착한사람 만들기 단체지요. 그 착한사람 만들기 단체가 기껏 한 것이 뭔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형에 처한다.” 그겁니다. 보통 문제가 아니에요. 하나님에게 착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말은 아무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따라서 애초부터 구출이나 구원에 대해서 언급을 하지 말라는 거예요. 언급 안하게 되면 지금 천국 가 있는 엘리야, 모세, 아브라함, 이삭, 이 사람들은 무슨 빽으로 착하지도 않은데도 불구하고 천국에 등장하는가? 구원받는 사람은 없다면서 왜 그 사람들이 천국에 가는가?

 

그들에게 뭔가가 다가왔어요. 그게 바로 27절에 있는 ‘언약’이라는 겁니다. 노아언약, 아브라함의 언약, 이삭언약, 야곱언약,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여기에 변화가 일어나요. 아브라함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고 물체고 육신이에요. 똑같은데 육신에 추가적인 낯선 요소가 나와요. 제가 금요일에 광주에서 강의 중에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성전은 성전인데 성전에서 물이 나온다는 아이디어는 그 동안 솔로몬 성전에는 없었던 아이디어입니다. 성전에서 상수도공사 했습니까? 거기서 왜 물이 나와요? 성전에서 물이 나왔다? 수도권이 터졌나요? 왜 물이 나오지요?

 

추가적인 요소입니다. 성전을 인간이 짓되 인간이 지은 거기에 추가적인 요소가 나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물동이를 가지고 물 길러 갔습니다. 누가 봐도 물동이 가지고 우물에 가서 물 긷는다, 이것은 나도 너도 다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예수님께서 추가적인 요소를 입혀버립니다. “네 속에서 영생하도록 나오는 물이 나올 것이다.” 없네. 그럴 요소가 없어요. “내가 너를 점령하리라.” 예수님이 그 속에 들어가 버리면 예수님께서 계속 영생하는 물이 나오는 거예요.

 

아무리 거울보고 바라봐도 나의 것에서는 뭔가 추가적으로 나올 것이 없는데 주께서는 추가적인 요소를 유발시키는 겁니다. 못난 인간, 아무것도 아닌 존재, 스스로 자살하고 싶고 이대로 그냥 인생 망하고 싶은 순간이 임했을 때 비로소 추가적인 요소가 나옵니다. 요한복음 12장 24절의 말씀인데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 다음 말씀이 충격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교회는 맨 날 “그대로”에요. 전부 다 “그대로 있고” 추가적인 요소를 말할 줄을 몰라요.

 

추가적인 요소라고 기껏 한다는 소리가 “십일조 했습니다. 헌금 했습니다. 전도 했습니다. 예배 참석했습니다.” 그것은 추가적인 요소가 아니에요. 그것은 누가 흉내 낼 수 있고 모방할 수 있는 문제에요. 추가적인 요소는 뭐냐 하면, 상상도 못했던 거예요. 주께서 날마다 나를 죽이려 듭니다.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갑니다. 이런 것은 추가적인 요소에 해당돼요. “주께서는 내 기도를 하면 할수록 들어주지 않습니다.” 이게 추가적인 요소에요. 기도해서 응답받았다는 그런 것은 다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들이고 도저히 상상 못하는 추가적인 요소, 더 어렵게 이야기해서 사람이 예수님을 죽이듯이 다른 사람이 나를 멱살 쥐고 흔들어죽일 수밖에 없게 만드는 요소, 따라서 그런 발언을 하기도 싫은데도 불구하고 나와야 되는 요소, 그게 추가적인 요소에요.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할 때 그냥 고생한다고 해서 그것이 십자가고난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의 조작이 가능해요. 아프리카 같은 곳에 가서 선교한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얼마든지 내가 상상할 수 있는데 그게 아니고 나를 부끄럽게 만들고 나의 존재를 있으나 마나한 존재로 만드는 그 어떤 요소, 그게 추가적인 요소에요. 사마리아 여인이 남자를 다섯 명을 사귀었습니다. 옛날 같으면 그것이 흠 잡힐 이야기에요. 요새 같으면 대단한 여인이죠. 남자를 다섯 명 사귀어도 나올 물은 나와요. 그게 복음입니다.

 

남자를 다섯 명을 사귀었고 이미 다 헤어졌고 여섯 번째 남자를 사귀어도 영생할 물은 나와요. 사람을 일곱 명 죽였고 지금 앞으로 여덟 명 째 죽이려고 할지라도 영생 받을 자는 영생의 물이 나와요. 낯설어요. 추가적 요소입니다. 이게 복음이고 비밀이에요. 선악과의 선과 악 사이에서 갈등하고 몸부림치다 보니 본심은 악으로 다리를 잡아당기는데 남한테는 안 그런 척 하면서 교회 가서 모든 착함과 선함을 흉내 내고 모방하고 목사가 시키는 대로 따라 해서 칭찬 받고자하면서 자기의 절대가치를 인정받고자 하는 그 모든 시도, 그것은 절대로 추가적 용소가 아닙니다.

 

있는 반찬가지고 대충 한 끼 때운 거예요. 추가적인 요소가 아닙니다. 특히 오늘 26절의 이 대목,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니까 이스라엘과 구원이 연결되어 있거든요. 사람들이 구원받고 싶어서 뭐라고 자처하고 흉내 내느냐 하면, 자기가 이스라엘이라고 우기는 겁니다. 왜, 이스라엘 될 때 구원이 있고 구원된 자만이 이스라엘이라고 하니까 이스라엘 되어서 그 엮인 구원도 자기소유화하려는 시도를 하는 거예요. 여러분, 뭐든지 좋은 것도 내 소유가 되면 더럽습니다. 그러나 내 소유에서 떠나버리면 그것이 거룩이에요.

 

자식도 내 자식 되면 자식을 더럽게 만들어요. 주께서 친히 그 자식을 키우시면 거룩한 자식으로 주께서 만들어냅니다. 뭐가 문제냐 하면, 내가 문제에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뭐라고 했느냐 하면……, 사람들이 성경을 보지도 않는 것 같아요. 분명히 마태복음 10장 6절에서 예수님이 열 두 제자를 보내실 때에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6절에 보면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사람들의 아쉬움과 고난과 역경을 해결해주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혹시 집 나간 내 자식 봤습니까?” 하고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고요.

 

예수님께서 귀신 쫓아내니까 주님이 귀신 쫓아내는 전문가인줄 아는데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이유가 귀신이 문제가 아니고 귀신 유발자가 바로 너라는 거예요. 지금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데 이게 중요하다는 것도 모르고……, 주님이 귀신을 쫓아내는데 그 귀신 쫓아내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동안 그 귀신이 어디에 박혀서 살았는지를 보라는 말이지요. 바로 너 같은 존재이기에 귀신이 반드시 오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나간 일곱 귀신 도로 다 기어들어왔어요.

 

왜 인간이 자기기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안하고 그냥 귀신만 나가고 병만 나가면 자기가 인간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소경 눈뜨면 구원 받습니까? 문둥병 나으면 구원받습니까? 문둥병 열 명 가운데 아홉은 다 가버렸어요. 도로 온 사람은 오직 이방인 문둥병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주여, 내가 문둥병 걸렸을 때는 그 문둥병 낫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인줄 알았는데, 내가 문둥병 걸렸던 것이 나에게는 적절치 않은 저주라고 여겼는데 문둥병 낫고 보니 그게 적절한 조치였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그동안 나만 문둥병 걸렸다고 한스러워 그 한스러움 자체가 바로 잘못이었습니다, 하는 거예요. “제가 문둥병 또 걸려도 괜찮아요. 주님만 알게 되었다면!” 바로 그거예요. 어떻게 하면 이 가난한 집구석 부자 됩니까, 라고 했는데 막상 가난을 면하고 보니 내가 주님의 피를 쓸데없는데 도용했다는 그 죄책감은 엄청난 죄책감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우상화했구나. 내가 신이기에. 나 살려고. 이 땅에서 살려고.’ 예수님은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 너 말고, 너는 아니니 귀찮게 찾아오지 마. 내가 찾아갈 거야. 내가 불러줄 거야. 잃어버린 양이 손든다고 되는 것이 아니니 제발 손 좀 내려. 내가 직접 찾아갈 거야.”

 

주께서 직접 찾아오십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고 했으니까 잃어버린 양을 찾는데 협조해달라는 말이 아니고, “너희가 숨어 있으면 내가 못 찾지.” 이런 아쉬움도 아니고 어디에 숨어 있든지 하나님 아버지가 내게 주신 양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내가 다시 살린다고 요한복음 6장 39절에 분명히 이야기했거든요. 왜 전도하려고 합니까? 참 미치겠어요. 전도할 필요가 없어요. 전도지금 하고 있는데 왜 우리가 나서서 전도합니까? 안 믿어서 그래요. 예수를 못 믿어서 그렇습니다.

 

로마서 10장에 보면 전도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에요. 주께서 보낸 자가 있습니다. 본인이 해야 되겠다, 그게 아닙니다. ‘안할 수가 없네.’입니다. 그 뒤에 나오는 말이 “주여, 저에게 일 그만 시키시죠.” 그 이야기에요. 너무나 힘들기 때문에. “하지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하는 예수님 십자가를 다시 한 번 재현하고 반복하게 되어 있어요. 이게 전도에요.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을 보내서 전도했고 예수님은 아버지가 자기를 보낸 똑같은 방식으로만 전도해요. 그게 뭐냐,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서 어중이떠중이 천국 문 두드리는 짓을 삭제시키기 위해서, “나가!”하고 전부 다 분류시키기 위해서 주께서는 비밀, 모든 것이 비밀입니다.

 

25절에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모든 게 비밀이었습니다. 이스라엘, 구원, 죄, 언약, 비밀이 아닌 것이 없어요. 모든 게 비밀이었습니다. 모든 게 비밀인데 그 비밀의 마지막 방이 뭐냐,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십자가’에요. 십자가는 비밀의 강도가 어느 정도로 대단한가 하면, 인간의 어떤 지혜, 인간 중에 어떤 똑똑한 과학자나 철학자, 인간의 어떤 언어로도 알 수 없을 지경이며, 그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진짜 비밀에 대해서 파내고 파내다가 결국 포기하고 돌아서면서 하는 말이 뭐냐, “어리석어도 너무 어리석다.”하는 속내를 드러내게 만드는 그 마지막 단계의 방,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신학? 신학이 구원하지 않아요. 마지막 단계가 십자가에요. 십자가가 왜 비밀이 되느냐 하면, 알고자 하는 인간을 죽여 버리기 때문에 비밀이 되는 거예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더 어렵게 되는데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어떤 여자 분이 낯선 길을 가는데 갑자기 비가 막 옵니다. 시골의 어느 산길입니다. 비를 피하려고 허름한 집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해볼까 했는데 수년 후에 그 집 며느리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비를 피해서 처마 밑으로 갔고 안방으로 피해볼까 했는데 그만 그 집 며느리가 되었어요.

 

비를 피하겠다는 것은 양적인 변화지요. 비를 맞나, 안 맞나, 그것인데 그 집 며느리가 된 것은 질적인 변화지요. 양적으로 따졌던 변화가 질의 변화로 일어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비나 좀 피하려 했던 그 아가씨는 그 집 며느리가 되면서 그 때 그 아가씨는 사라져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자기 양을 데려왔을 때 그 양은 ‘내가 성경 보니 하늘나라가 있는데 그 하늘나라 가야지.’ 하고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겠다는 심산으로 ‘내가 천국가야 하는데 어느 교회로 갈까? 정통교회, 개혁주의교회가야지.’ 이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그게 신학이에요. 신학은 답습입니다. 신학은 답습이고 훈련이고 학습인 거예요. 어떤 질적 변화도 일어나지 않아요. 오히려 더 교만하지요.

 

그런데 그렇게 갔던 그 사람, ‘구원을 받아야겠다, 지옥 안가고 천국가야겠다, 난 지옥을 선택 안하고 천국을 선택할거야.’라고 자기 자유의지를 발휘해서 천국가려면 착하게 살아야 하고, 바르게 살아야 하고, 성경대로 뭔가를 지켜야 되고, 교회 봉사해야 되고, 목사 섬겨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렇게 하는 나를 주께서 죽인다는 그것이 마지막 난관이었고 마지막 돌파해야 될 비밀일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구원을 안 받겠다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겠다고 짬 내서 교회 온 우리를 주께서 죄인이라고 때려죽이겠다고 하는데 ‘어이쿠, 이 집이 보통집이 아니구나. 이 집 며느리 되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도망치기 마련이거든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하는 말이 이 말입니다. “도망쳐라. 내 백성 아니기에 도망치라는 이야기에요. 내 잃어버린 양이 아니기에 그냥 교회 생활이나 왔다갔다, 하고 하면서, 취미생활이나 하면서 그냥 살아. 어차피 지옥 갈 거.”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잃어버린 양은 그 안에 목자가 있어요. 목자와 양의 만남은 요한복음 10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어디서 만나는가? 죽음에서 만나요. 알면서 아닌 척들 하시는 것 같아서 제가 읽어봅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께서 삯군과 강도를 다 배척하기 위해서 왔음을 이야기합니다.

 

어떤 목사들은 “이 세상 모든 목사들은 강도가 삯군인데 우리 교회 목사님은 참 선한 목자로서 양을 위해서 희생합니다.”라고 하거든요. 그게 강도에요. 이 세상에 목자 없습니다. 이제야 말합니다. 밥 퍼줘요? 뭘 퍼줘요. 교회 자체가 음부의 권세,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것이 교회잖아요. 교회에 합당한 목사는 없어요. 음부의 권세보다 더 센 권세가 이 세상 돈의 권세입니다. 제가 언급하니까 여러분이 끄덕이죠. 평소에 왜 이 사실을 감추고 사십니까? 복음이요? 돈 될 때 복음이에요. 돈 빼가는 복음은 복음 아닙니다. 돈의 권세가 더 세요. 마귀가 픽 웃습니다. “네가 돈 없어도 십자가 주장할래?” 대번에 이렇게 나와요. 어떤 목자도 예수님만한 목자는 없어요. 왜냐, 목사가 죽는 수는 있는데 그 목사가 선교하러 가서 죽더라고 그것은 자기 죄 값으로 죽는 거예요. 나대다가 죽은 거예요. 중국에서 선교한답시고 가서 죽어도 그것은 나대다가 죽은 겁니다.

 

“오직 나만이 선한 목자다. 왜, 양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 이 말이 어려워요. 양이 있고 그 다음에 양을 납득시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양도 목자를 알아볼 양은 없어요. 그러니까 다 속아 넘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그 죽음의 힘을 가지고 양을 새롭게 생산해 내는 겁니다. “내가 너를 위해서 죽었다.” 버림받을 양은 “누가 죽으라고 했어요?” 그렇게 나오는데 진짜 양은 “내가 죽어야 되는데 왜 당신이 대신 죽으셨습니까?” 그렇게 나올 때 예수님 하는 말씀이 “목자는 양을 알고 양은 목자를 안다.” 이것이 십자가가 매개가 돼요. 십자가 피를 매개로 하는 거예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2장에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십자가는 비밀이고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다고 하는데 그렇게 어리석은 이유란 하나님이 하나님에 의해서 죽었다는 사실”이라고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이 구원하기도 전에 하나님이 먼저 자기를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을 죽여 버린 거예요. 하나님 모세를 애굽에 보낼 때 모세가 애굽에 도달하기도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여 버린 겁니다. 출애굽기 4장이죠. 그 때 모세의 아내가 피를 던지니까 비로소 모세가 숨을 쉬면서 살아났어요.

 

“네가 가는 것이 아니고 장차오실 예수님이 간다.”는 그 뜻입니다. 네 싸움이 아니고 장차오실 예수님이 먼저 와서 네 안에서 하는 싸움이에요. 우리의 구원은 나의 구원이 아니고 주님 자신의 잃어버린 양을 찾는 자기숙제를 풀기 위해서 우리를 껍데기로 사용하신 겁니다. 제가 광주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아담과 하와가 가죽 옷을 입었다고 하지 마세요. 아담과 하와는 가죽옷을 위한 옷걸이에 불과한 겁니다.” 주체와 객체를 바꾸지 마세요. 우리는 주의 것이지 내가 주님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과 소유된 자를 혼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고생스러우니까 내가 죽어서 좋은데 가려고 내가 예수님을 선택한 셈이 돼요. 그것을 주께서 바꾸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그 바꾸는 작업에서 이스라엘이 멸망합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이유는 그들이 비밀을 비밀로 이해 못하고 그 출발이 자기로부터 출발했기에 그래요. 옛날 이스라엘에 있어서 여호와는 하나의 무기였습니다. 무기라 하는 것은 전쟁할 때의 무기잖아요. 이스라엘은 여호와가 전쟁할 때 자기를 지켜주는 무기라고 생각한 겁니다. 사무엘 상 5장에서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자기를 지켜주는 무기라고 생각한 겁니다. 야곱은 자기를 축복하는 그 축복의 하나님이 형으로부터 자기를 지켜주는 무기라고 오해했던 겁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새끼가 하늘의 별같이 많아지도록 자식을 많이 낳는데 필요한 후원자로서의 하나님이라고 오해했었습니다.

 

자기가 자식을 죽이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이것을 바꿔야 돼요. 야곱을 처단하고 공격하는 자가 형인 줄 알았지요. 그런데 자기를 축복한 하나님이 자기를 공격할 줄이야 야곱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 우리는 예수님이 나를 구원한다고 생각했지요. 그 예수님을 내가 손잡기 전에 하나님아버지가 예수님을 쳐 죽일 줄을 우리는 상상도 못한 거예요. 내가 예수님 손잡으려고 하는데 예수님은 아버지에게 끌려가서 난도질하듯이 죽임 당했어요. 종교? 그걸 써먹을 데가 어디가 있습니까? 이 땅에서 잘난 체 할 때나 써먹지요. 교회가 아무 쓸데가 없는 거예요. 성경해석, 성경공부, 예배, 아무 쓸데가 없는 거예요.

 

주께서 그걸 충실히 우리보고 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본성이니까. 나를 지켜주는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우리는 철석같이 믿으니까. 그 이름의 교회도 서울에 있어요. 사랑의 교회라나 뭐라나. 사랑의 교회, 그게 뭐냐 하면, 사랑이 나를 지키는 무기라고 환원될 수 있다는 겁니다. 아니거든요. 하지만 그렇게 해서 우리를 자극합니다. 내가 꼬깃꼬깃 숨겨놓은 우리의 가증스런 것을 폭로시켜 냅니다. 다 들어내요. 그렇게 들어내 놓고 예수를 죽인 것은 사실은 너를 죽이기 위한, 이미 너는 죽은 자라는 조치를 통해서 예수님을 죽였던 겁니다.

 

그래서 예수와 더불어, 함께 죽은 자 만이 예수와 더불어서 함께 산다는 겁니다. 신앙생활은 뭐냐, 우리가 예수님을 죽이는 일을 하는 것이 신앙생활이에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그것이 신앙생활이 아니고 내가 하는 모든 짓들이 예수님을 또다시 되풀이해서 죽이는 짓들만 나온다는 사실을 알 때 비로소 우리 속에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가 작용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2장 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는 너희들에게 그리스도가 죽었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원한다.”

 

노바디 노바디……, 이런 노래가 있었지요. 아무것도 알지 않기를 원한다. 전도, 헌금, 수많은 성경구절이 있더라도 네 육신 때문에 내가 늘 죽고 널 살리기 위해서 내가 살아나서 널 다루고 있다는 그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온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숫자 개념의 ‘온’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우리 속에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 앞에서 견딜 수 있느냐, 할 때 그 견딤의 의미입니다. 견딤의 의미에 대해서 고린도전서 3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친 그것이 뭐냐 하면,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이고 정작 하나님께서 살리고자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고 하는 것이고 양이라 하는 것은 이스라엘에 소속되어 있어요. 이스라엘에 소속되어 있는 양을 찾으러 왔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뭐냐, 이스라엘이 뭐냐는 것은 현재 이스라엘이라고 우기는 자들이 멸망해 봐야 이스라엘이 나오거든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멸망하면 이스라엘은 없는 거예요. 바로 그겁니다. 이스라엘은 없는 거예요. 없는데서 이스라엘이 생기게 만드는 겁니다.

 

그 모든 관계가 양과 목자, 목자와 양의 관계인데 목자와 양의 관계는 오직 죽음을 매개로만 한다고 했지요. 요한복음 10장의 이야기를 했지요? 많은 이야기를 했기에 지금 정리해 드리는 거예요. 결혼식 이야기했다고 해서 그 흐름을 놓치지 마시고. 엘리야 선지자가 바알과 아세라와 누가 참된 신이가, 를 놓고 한바탕 싸움을 했을 때 죽음 속에서 끄집어내요. 물을 열 두 양동이 붓고 나서 거기에서 불이 붙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죽음이 살리는 거예요. 같이 죽을 경우에만 산다는 겁니다. 죽음에로의 초청, 함께 죽는 자에게만 함께 사는 혜택이 주어지는 겁니다.

 

제가 지난 주일에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마르다 마리아와 오빠 삼 남매가 사이좋게 지내다가 오빠가 병들어 죽었을 때 마리아와 마르다가 오해한 것이 뭐냐 하면, “왜 오빠가 죽었습니까?”라고 오해했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죽어도 살겠고”라고 해서 지금 마리아와 마르다 편에 예수님이 계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은 죽은 오빠 쪽에서 마리아와 마르다를 향해서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마리아와 마르다가 오빠 죽었다고 예수님 붙들고 막 우니까 주님의 그 방향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자기를 닦달 내는 그 마리아와 마르다를 보고 오히려 예수님이 울어버려요.

 

나사로가 죽었다고 우시는 것이 아니고 그토록 가르치고 그토록 이야기를 했건만 왜 말귀를 못 알아먹고 방향 바꾸기를 못 알아먹는가, 그 말입니다. 죽은 자가 산자고 살았다는 너희가 죽은 자라는 거예요. 진짜 미치겠다, 정말! 구원이 구출인데 구출이 뭐냐 하면, 죽은 세상에서 산 세상으로 가잖아요. 그러면 죽은 세상에서 산 세상으로 간다고 할 때 이 땅은 무슨 세상이냐 하면, 너나 나나 산 놈이 없다는 것을 명심을 해 줘야 돼요. 명심보감, 형제우애, 이런 것이 명심보감이 아니에요. 너나 나나 산 놈이 없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왜 살아 있느냐? 글쎄 그것은 나한테 묻지 말고 살려내시는 주님한테 물어야지요. 어떤 분이 그런 질문을 했어요. “하나님께서 왜 인간을 만들어서 고생을 시키고 왜 믿는 사람도 고생시키고 안 믿는 사람은 사탄의 꼬임에 넘어가서 지옥가게 만듭니까?” 할 때 제가 제시한 사적인 해답은 이거예요. “하나님이 왜 고생시킵니까, 라고 질문하지 말고 주여, 지금보다 더 저주할 수 있는데 왜 제가 이정도로 멀쩡합니까?” 그렇게 질문을 해야 된다니까요? 창세기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우리를 어디로 보냈습니까? 저주받는 곳으로 보냈지요?

 

저주받는 곳으로 보냈으면 저주의 티를 내야지요. 그러면 지금 내가 “누려!” 하고 누리고 있는 이것은 저한테 과분한 거예요. 지금 이 자리에 참석 못하고 병원에 입원한 사람 많습니다. 이 자리에 참석 못하고 암에 걸린 사람이 있어요. 여러분은 뭐가 잘나서 참석했습니까? 어머니는 뭐가 잘나서 여기 참석하셨습니까? 내 발로! 내 발 아니에요. 주님의 발이지요. 내 발로 온 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왜 그걸 자꾸 잊어버리느냐는 그 말입니다. 내 발로 왔기에 천당 가는 것도 내 힘으로 하려고 한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이게 엉터리인 거예요.

 

“주께서 오게 하셨습니다.”이렇게 해야지요. “그러면 다음부터 병원에 입원해서 아예 못 오게 한다.” “못 오게 하는 것도 저에게는 과분합니다.” 이렇게 되어야지. “그러면 가야 됩니다.” 이러면 낌새가 벌써 다르지요? 엘리야가 죽음 속에서 비로소 나의 죽음은 기정사실이고,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죽었고 예수님은 왜 죽었느냐는 그것이 지금 초점입니다. 그게 비밀이고 그게 약속이에요. “예수님은 왜 죽었는가?” 우리는 죽어도 마땅해요. 그런데 지금 살려내고 있다는 겁니다. 햇빛과 공기를 주시고. 그 살려내고 있는 그 비밀을 쫒아가 보니까 십자가의 희생덕분에 지금 공기가 와 있고 햇빛이 와 있고 날씨가 좋은 거예요. 좋다 나쁘다, 이것마저 우리가 판정할 입장도 못되지만.

 

따라서 우리 속에 주님의 은혜가, 십자가가 들어 있다는 그것을 갈라내는 작업을 주님께서는 복음을 통해서 하십니다. 그것이 고린도전서 3장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11절부터 보면 “이 닦아 둔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전부 다 불판위에 둬서 금이나 은이나 다 타버린다는 겁니다. 금이나 은은 안탄다는 그런 것은 없어요. 민수기 31장 22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인데 거기 보면 “금, 은, 동, 철과 상납과 납의 무릇 불에 견딜만한 물건은 불을 지나게 하라.”는 대목이 있거든요.

 

구약에서는 불에서 견디게 하고 신약에서는 불 대신 불보다 더 죽음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십자가의 피에다 그동안 자기의 공력을 사르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이만큼 살아가는 것도 다 내 덕입니다, 라고 하면 땡, 틀린 거예요. 모든 것이 나한테서 나온 것이 아니고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라고 할 경우만 살아남아요. 예수그리스도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다 제거하라는 그 말입니다. 그래야 천국 가서 면류관을 반납할 것이 아닙니까? 이 면류관은 주께서 쓰시는 것이 합당하다고. ‘온 이스라엘’은 뭐냐?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을 멸망시킴으로 말미암아 멸망시키는 그 자리에서만 구원자가 오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BC 586년에 멸망당해도 멸망당한 이유를 몰랐습니다. ‘70년 만에 돌아간다니까 70년만 기다려보지 뭐.’ 그런 식이에요. 멸망당한 그 자리에 두 가지의 서로 엮일 수 없는 두 개의 낯선 뿌리가 나왔어요. 하나는 뭐냐 하면, 장차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을 짐승의 나라가 튀어나옵니다. 또 하나는 뭐냐 하면, 다니엘 계통이에요. 언젠가는 주께서 십자가 피 흘림으로 구원받습니다, 하는 진짜 메시아가 온다는 계통입니다. 다니엘 같은 선지자계통, 세례요한 계통. 또 하나의 계통은 ‘우리가 멸망당했지만 정신 차리면 이스라엘은 회복될 것이다.’라는 계통이 나와요.

 

그 이스라엘이 회복된다고 주장하는 계통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주동했던 이스라엘입니다. 여기서 ‘온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이 사실을 알고 있어야 돼요. ‘아,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구원될 나라가 아니고 대표적인 짐승의 나라, 악마의 나라구나.’ 그런데 그것이 남들 보기에 가장 경건해 보이고 가장 거룩해 보인다는 거예요. 인간이 지어낼 수 있는 모든 경건과 거룩의 종결 자가 이스라엘입니다. 예수님도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그러면 ‘온 이스라엘’은 뭐냐? 바로 이스라엘은 현재 이스라엘에서 새로운 추가적인 요소가 나오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따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멸망해도 마땅합니다. 이러니 우리가 짐승의 나라에 속한 것이 당연하지요.”라고 할 경우에 그것이 새로운 추가된 요소에요.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이런 고백을 할 성품이나 위인들이 아닙니다. 그런 고백을 할 자들이 아니에요. 제가 아까 했지요. “예수여, 우리 교회를 지켜주세요. 우리교회를 부흥시키고 우리 집안을 지키소서.” 우리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어도 전부 다 우상 같아요. 전부 다 나를 지키는 무기인거예요.

 

그러나 진짜 목자가 나타나면 그 목자가 나타난 그 자리에서 나의 원수가 아니고 주의 원수가 누구인지를 비로소 알게 되는 순간이 되는 겁니다. “아, 내가 주의 원수가 내가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목사님, 그런 과격한 말을 하지 마세요.”라고 면박을 주고 싶어 하겠지만 로마서 5장 10절에 보면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이 말은 뭡니까? 그냥 후다닥 넘어갔지요. 그저 성급하게 빨리 넘어갔지요? 이게 무슨 말입니까?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 믿으려고 애쓰고 있는데 왜 원수냐는 말이지요.

 

성경은 말합니다. 그게 원수라는 거예요. 우리는 낯선 것을 싫어해요. 내가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하고 정성 다해서 하나님께 드리고 싶어 합니다. 이것은 사마리아여인이 우물에 와서 흙탕물 빼놓고 제일 맑은 물을 드리면 그것이 주님께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아니거든요. 그 여인에게 계속해서 생수가 나오게 하시는 것은 그것은 주님이 계셨기에 나오는 추가된 요소입니다. 그 추가된 요소로 하여금 내가 하는 것은 안 받는다는 겁니다. 왜, 하나님의 십자가와 불판을 우리가 이겨낼 수가 없어요.

 

뭐든지 하게 되면 돌아서면 다 내가 했다는 겁니다. 지난 대전강의에서 그런 소리를 했잖아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이것을 무슨 수로 모르게 할 수 있느냐? 기껏 인간이 하는 방식은 뭐냐 하면, 한손은 구세군에 돈 집어넣으면서 반대편 손은 칼 가지고 두뇌를 수술해야 돼요. 우뇌와 좌뇌의 정보를 교환하는 뇌관이라는 부위가 있어요. 그 뇌관을 잘라내면 그 때서야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불구자지요.

 

말씀 좀 지킨다는 사람에게 이 질문을 하고 싶어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도록 하는 방법이 있습니까?” 제가 묻고 싶습니다. “돈을 꾸일 때 거저 주라는 말씀을 언제 지켰습니까?” 묻고 싶어요. 말씀을 지킨다고요? “이래서 주의 원수였습니다.”라는 것을 고백하는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내가 이래서 원수였습니다.” 그 원수가 보이는 자리, 그 신분은 다만 비를 피해서 처마 밑에 들어가는 순간이 아니고 그 집의 며느리가 되는 자리입니다.

 

왜냐하면, 아가씨는 잠시 비를 피할 뿐이지 어떤 경우라도 그 허물어지는 집안의 며느리가 된다는 것을 상상도 못한 거예요. 저 허물어지는 집에서 인터넷이나 할 수 있습니까? 스마트 폰 사줍니까? 누가 저 허물어지는 가난한 집의 며느리가 되겠어요? 그런데 처마 밑에 있다가 비가 너무 와서 안방에 들어갔다? 거기서 사단 난거지요. 이처럼 강력한 비를 피하다 보니까, 이 세상이 너무 살기 힘들다 보니까, 교회 와서 주님의 축복받고 이젠 남은여생 편하게 살고 싶어서 피하고 피하다 십자가에 퍽, 하고 맞는 순간 자기의 과거는 사라져버리고 ‘내가 누구지? 나는 400년 전부터 살아온 선비다.’ 하는 식으로 ‘아, 나는 창세전에 이미 잃어버린 양으로 이 땅에서 살아야 될 입장이구나. 그렇다면 비가 왔다. 왜 왔지? 며느리 되도록 비가 내렸구나. 처마에 왜 피했지? 며느리 되도록 피했구나. 왜 안방까지 기어들어갔지? 며느리 되도록 들어갔구나.’

 

모든 것이 창세전에 이미 택하기로 작정된 그 코스대로 주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성경에 있는 모든 비밀이라는, 그 성경의 단어들을 밟아가면서 드디어 십자가를 이해하는, “나 같은 인간을 위해 대신 죽으신 것이 맞네요.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 외에는 일체 알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남들은 욕하지요. 왜, 이해가 안 되니까. 신학 하는 사람들도 욕하지요. 왜, 계룡산에서 내려온 무당이라고 욕하겠지요. 하지만 본인은 알지요.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다 헛짓 했습니다.” 자기를 미화했고 자기를 변호했고 여호와 하나님, 예수, 삼위일체, 그 깊은 신학이 고작해야 자기를 지키는 무기, 칼이나 총같은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는 것을.

 

그게 바로 우상입니다. 그게 바로 멸망해야 될 유사이스라엘, 흉내 내기 이스라엘, 모방해 낸 이스라엘, 가짜 교회였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시계를 봤더니 저 시계가 나를 속였네요. 저 시계가 안가는 시계였네요. 끝으로 한 말씀 하겠습니다. 내 것이 떠나는 것을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뭐든지 내 것 되면 그 고상한 것도 더러운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어도 그 예수가 내 것 되면 더러운 예수로 변질돼요. “차라리 주님이 나를 지배해서 내가 주님의 원수인데 십자가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할 때 출발점을 항상 나로 하여금 주의 원수로 하는 출발점으로 허락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주의 원수입니다.’ 해서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이 더욱 더 날로 커지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비밀을 우리가 얕잡아 봤습니다. 문제가 내게 있는데 우리는 세상 탓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미리 아시고 십자가 피 흘리셔서 더 이상 죄 씻는 제사가 필요치 않도록 피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도록 일괄 조치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