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히 3:7-14) 무엇을 잡나? 본문
이근호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히브리서-2001/09강-히3장,7-14(무엇을,잡나)-heb010826.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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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잡나? (히3:7-14)
2001년 8월 26일 오늘 본문: 히브리서 3: 7-14 3:7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3:8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3:9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3:10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3:11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3:12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3: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3: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오늘 본문에 보면, 광야라는 길쭉한 지역이 나옵니다. 그 지역은 애굽이라는 곳에서 벗어나는 것부터 시작이 되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으로 끝이 되는 곳입니다. '애굽에서 나와 광야 지나서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라는 스케줄을 확정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시작과 끝이 있는 계획을 수립했다는 것은 우리 인간들에게 대단히 기분 나쁘게 들릴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시작과 끝이 있는 일을 만드셨는가 하는 것 때문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영원한 세상이었으면 하고 내심 바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사는 법만 열심히 익히고 배워오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시작이 있고 구원이라는 것이 있고 마지막 심판이라는 것이 있게 되면 우리들 각자가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을 위하여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강요받게 됩니다. 이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심적으로 부담이 되는 일입니까. 흔히 교회에서 하나님을 믿겠다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늘에서 복이라도 따내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계획이 이렇게 확정되어 있으면 이런 기대마저 자진해서 포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이 이미 있다면 그 앞에서 우리 나름대로 계획 잡은 놓은 인생 설계가 무의미해 지는 겁니다.
오늘 본문은 이 점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완전히 협박이고 공갈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면서 익혀온 바는, 사람들 사이에는 편하고 사이좋게 사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무리 이웃 간에 그리고 조직 사회 속에서 인정을 받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안식에 못 들어가게 되면 우리네 인생은 끝장이라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그치고 계신 겁니다. 이게 얼마나 우리를 기분 나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땅에서 복 받기 위해 우리는 지금 교회에 와서 하나님을 잘 섬기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이러한 성의도 무시하고 하나님은 막무가내로 "이러 이러하면 내 안식에 못 들어오리라"라 했으니 얼마나 하나님 말씀 자체가 우리에게 심적 부담을 주는 겁니까. 그렇게 되면 비록 교회는 안 가도 착하기 그지없는 내 엄마 내 아빠의 말로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가차없이 지옥행이라는 말입니까? 은근히 부하가 치밀어 오르지요.
단적으로 이야기해서 지금 한국 땅에서 예수님 제대로 믿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1000만 신자라고 하지만 하나님 기준에 따르면 다 떨어지고 그 중에 몇 명밖에 구원 못 받을 지도 모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이렇게 생각하시기를 "교회 열심히 다니면 천국 넣어주겠지요"라고 하시겠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실제로 애굽에서 탈출해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모두들 여호와를 찬양하며 감사했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눈으로 직접 목격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들을 행하여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대하면서 "애라. 누가 하나님을 안 믿어서 답답할 일이 있나 나중에 안식에 들어 갈 나이쯤 되어서 열심히 믿지. 맨 날 하나님한테 코 꿰어서 살 이유가 뭐가 있나"라고 오기를 부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옛날 광야 때, 사람들의 모습도 꼭 이러했습니다.
여러분, 모세 인격이 대단한 인격이라고 상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세는 단지 뭘 붙잡았을 뿐입니다. 훌륭한 자질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 마저 하나님 앞에 포기해 버린 자가 신앙 인입니다. 자신의 훌륭함을 고양하기 위해서 교회 나오신다는 그 사람은 얼마 안 가서 제 풀에 제가 지치게 됩니다. 자기 인격에 스스로 실망해 가지고서 "하나님 미안하지만 좀 쉬렵니다"라고 뒤로 물러서게 됩니다.
오늘 본문 14절에 보면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 한 자가 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 말이 아닙니다. 얼마나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안식에 못 들어가고 천국에 못 들어간 사람은 무엇인가? 주님의 것을 붙잡아야 되는데 주님의 것을 붙잡지 못하고 자기만 들여다보고 사는 것이 원인입니다. "내가 얼마나 인격적으로 대단한 사람이며 내가 그동안 얼마나 훌륭하게 변모되었는가." 하면서 양심에 대한 수지 타산을 헤아리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근본적으로 신앙을 재정립해야 합니다. 어디서부터 정리해야 합니까? "내가 열심히 하면 천당 가겠지"라는 생각을 완전히 버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소시지 아십니까? 길쭉한 소시지 말입니다. 저는 그 소시지가 끝과 끝이 짤똑하게 끊어져 있다는 점이 참 좋아요. 우리 마음 같으면 각자의 인생이 천 년 만 년 끝이 없이 이어졌으면 좋겠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끝을 주십니다. 우리는 끝을 모르는 척 하며 삽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이 말씀한 바와 같이 무엇을 붙잡아야 합니까? 영원 하려는 우리 자신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계획 잡은 놓은 소시지 같은 실제 상황을 붙잡아야 하는 겁니다.
저는 문뜩 이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내가 눈을 감아도 세상은 존재한다". 저의 느낌에는 내가 눈감으면 세상도 같이 눈감고 죽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죽어도 해는 뜨고 달은 지고, 나 죽는 것을 전혀 애도하지 않습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세상은 꿈쩍도 않고 그냥 제 자리를 지키게 됩니다. 이 얼마나 원통하고 절통한 이야기입니까. 내가 죽으면 세상도 같이 무너져야지요. "건방진 세상, 미워, 미워, 미워!" 내가 죽어도 세상도 지붕 내려앉듯이 무너져야 하지 않습니까? 내가 죽는데도 세상이 꿈쩍도 않는다면 그렇다면 나는 이 세상에서 무엇입니까? 나는 무엇 때문에 사는 것입니까. 내가 사는 이유는 요? 세상은 나를 향하여 "있으나 마나"하다고 쏘아붙이고 있는데 왜 나는 아직도 더 살고자 몸부림치고 있는 겁니까. 부인이 죽어봤자 남편들은 조의금 거두기 바쁩니다.
이처럼 세상은 시작이 있었고 끝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 전체를 알 수 없지 않습니까. 누가 이 사실을 미리 알려주면 좋겠다고 바라지요. 실제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매일 아침마다 거울만 들여 다 보지 마시고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비쳐 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앞에 나서면, "아, 나는 이 세상에 죄인으로 태어났구나. 저 분이 죽는 것은 곧 나의 실체요 나의 모습이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죽으신 것이 하나님의 계획인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비로소 자기 계획을 버릴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 붙잡힌 바 된 사람입니다. 이 사람, 신자 맞습니다. 성도 맞습니다. 자신이 죽어도 세상이 울지 않는 이유를 아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통해서 보니 죄인으로서 당연히 죽을 자가 죽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교회에서 목사가 설교나 성경 말씀을 전달하면 그 지식을 가지고 지키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입니다. 제가 아침마다 운동하는데 하루는 제 옆에 자전거를 끌고 가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원래 자전거는 타고 가야 빨리 가는 건데 끌고 가니까 저 보다 너 늦게 가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말씀은 원래 타고 가라고 주신 말씀인데 이것을 끌고 가고 있더란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본인도 인간 안되고 날이 갈수록 하나님의 말씀도 짐이 되어 싫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는 옆에서 십일조 왜 안 하냐고 닦달 내지요, 본인은 지켜도, 지켜도 하나님의 말씀은 안 지켜지지요, 이게 무슨 황당한 사태입니까.
오늘날 교인들의 신앙 생활이라는 것이 고작 이 정도입니다. 자전거는 보다 오토바이 끌고 가 보세요. 더 힘들지. 사람들이 왜 말씀을 끌고 가려고 하는 겁니까? 그것은 혹시나 저주를 덜 받고 가상하다고 보너스 축복을 받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겠지요. 여러분 출발이 잘못된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방법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건을 나의 사건으로 붙잡는데 있습니다. 분명 내 아이디어에서 안 나오는 사건인데도 불구하고 난데없어 터져 버린 사건 같은 식으로 하나님은 일을 벌리십니다. 이러한 사건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바구니입니다. 과연 그런 사건들이 어떤 사건일까요? 9절을 보겠습니다. "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여기에 보면, '나의 행사를 보았느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광야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광야에서 분명 어떤 사건이 벌어졌는데 그 당시 사람들이 그 사건을 외면해 버리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를 못했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이 무슨 사건이 터지게 했는가를 아는 것이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붙잡아야 되는가를 아는 것과 일치되는 사항입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 출애굽기 17장이 보시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쁘게 애굽에서 탈출했는데 막상 사막을 지나치게 되니 먹을 양식이 없고 마실 물이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가볍게 상상하기를, 그들이 어지간히 하나님 말씀을 안 지켰구나 하시겠지만 그러나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 그들은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아서 그 코스를 이탈하지 않고 모세를 따라 사막 길을 간 겁니다. 그런데 양식도 없고 물이 없더란 말입니다. 백성들은 참다, 참다 자신들의 본심을 도저히 숨길 수 없어 하나님에게 대들었고 모세에게 대들었습니다.
여러분 정말 대들만 하지 않습니까? 산다는 게 뭡니까? 먹고 마시는 것이 기본이 되어야 되는 거잖아요. 그것 없이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따라서 이런 상식에 근거해서 그들은 하나님에게 대들었던 겁니다. 하나님께 대드는 것이 취미이고 재미나 나서 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러한 정당한 항의 안에 뭐가 들어있었는가를 우리는 출애굽기 17장의 한 본문에서 발견해 봅시다. 6-7절입니다.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그가 그곳 이름을 맛사라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더라"
분명히 '반석을 치라'라는 명령한 그 바위 위에는 하나님이 서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런 명령이 주어진 겁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신가, 혹은 아닌가'하고 여겼다는 겁니다. 지금 먹고 마시고 가 문제가 아닙니다. 즉 살고 죽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 더 큰 문제라는 겁니다. 이 이야기가 쉽다고 하는 분들도 있고 이 이야기가 어렵다고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쉽다고 여기는 분을 보면 참 신기합니다. "어떻게 저렇게 믿음이 좋지?" 그렇다면 그 사람이 이렇게 대꾸 할 것입니다. "목사님, 이 말씀이 뭐가 어렵습니까. 아니 물 없어도 하나님이 계신 것이고 양식 없어도 하나님이 계신 거지. 이 사실이 뭐가 어렵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믿음 없는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니, 양식 없는데 무슨 힘으로 하나님 섬기고 물도 없는데 무슨 재미로 교회 나옵니까?" 그러면 제가 이 사람보고 말하지요. "당신 정상입니다." 죄인으로 태어난 주제로서 정상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터진 것이 바로 '므리바'라는 지명이 말하듯이 이러한 정상적인 인간이 하나님과 다투게 된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이 '다투었다' 이 자체가 곧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가 될 수 있는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 경우로 예를 들면,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에 나타났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네가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냐?"라고 대들게 되어서 터져 버린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님이 죽었으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게 맞잖아"하고 믿음 있는 자들을 말하게 됩니다. 반면에 믿음 없는 사람은 말하기를, "예수는 스스로 과대망상증 환자로서 자신이 이 어려운 시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정치적으로 대들다가 질서 문란 죄에 걸려 죽은 것이지 그것이 무슨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명하는 구원 사건이냐. 도대체 답답해 미치겠다. 그렇게 자신 있거든 좀 납득이 되게 설명해 봐라"라고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 있는 사람은, 모세와 백성들이 다투게 되었으니 이것이 하나님의 살아 계신 증거라고 주장하는 반면에 신앙 없는 사람들은, "아니, 하나님이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살아있다면 가는 곳마다 생수가 펑펑 솟아나고 음식도 풍성해서 자장면, 만두, 팔보채, 돈까스가 하늘에서 마구 떨어져야 그래야 하나님이 살아 계신 증거가 되지 어떻게 해서 '다투었다'는 것 자체가 어떻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의 증거가 될 수 있느냐?"라는 겁니다.
"아니, 정말 하나님이 계시다면 스데반 집사님을 오래 살게 해서 많은 설교를 해주고 목회 성공하도록 해야지 어떻게 설교 한 번하고 돌에 맞아 죽게 되는가? 죽음은 곧 낭패본 것이지 어떻게 그 죽음이 하나님이 내린 축복이 될 수 있느냐"하고 불신자들은 주장합니다.
신학교 처음 입학해서는, 나중에 교인 수 백 만 명에다 예배당 크기는 서울 강남에 있는 고속 터미널보다 더 크게 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로이드 죤스 목사님의 로마서 강해를 읽어보니 성경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십자가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정했다'는 말씀이 나왔습니다. 이 더러운 세상에서 하나님은 무엇으로 죄인을 건지시느냐 하면 바로 오로지 십자가 사랑으로만 건진다는 겁니다. 이 말씀에 전혀 모든 것이 바꾸었습니다. "교회가 아니라 이제부터 십자가이다!" 여러분 예배당 크게 하고 백만 명 모으면 그것으로 저와 여러분의 죄가 사해집니까? 여러분의 죄는 십자가의 피로만 사해집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하나님의 기적을 어떻게 해석했습니까? 예수님의 광야에서 마귀로부터 시험받을 때에 돌이 떡 되게 하지도 안 했습니다. 성전 꼭대기에 뛰어내리지도 안 했습니다. 세상 부귀 영화를 위해 고개 숙이지도 안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와서 :"당신이 메시야 인 것을 증명하는 기적을 베풀어 봐라"했을 때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보여줄 기적은 요나의 기적, 즉 십자가 기적 외에는 보일 기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왜 예수님은 맥없이 그냥 돌아가신 겁니까?
장기 알 가지고 퉁기는 게임, 즉 알까기 게임해도 참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원래 장기 알은 그런 알까기하라는 알이 아닙니다. 장기라는 규율에 맞도록 만들어진 겁니다. 이처럼 세상은 내 만족으로 돌아가라고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름대로 율이 있습니다. 맛있는 음식 먹는 것도 사는 재미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맛있는 음식이 우리를 구원해 줍니까? 이 세상에 모든 존재와 움직임은 하나님의 안식을 위해서 있는 겁니다.
히브리서 1:10-11에 보면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 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율에 따르면 우리가 지금 탐내고 싶고 소유하고 싶은 것은 모두 멸망할 거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규칙에 따라 세상은 움직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기껏 소모성 행위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붙잡아야 될 것은 소시지, 즉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러니까 스데반 집사나, 예수님이나 모세나 사도 바울들은 슬그머니 이 세상을 빠져버립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하심을 증거 했습니다. 자.. 여러분은 우리는 무엇을 붙잡아야 합니까? 무슨 사건을 붙잡아야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우선... 우리가 태어나면서 상상한 것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요한 복음 15: 16에 보면, "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소시지 계획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을 믿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도 포함이 되어 있다는 겁니다. 붙잡힌 바 된 것을 붙잡는 겁니다.
빌립보서 3:12절의 말씀처럼 말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믿는 자에게는 더 이상 구원받는 것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교회 와서 무엇을 더 원하겠습니까? 이제부터 우리를 계속 붙잡아 인도하시는 그 십자가의 사랑의 깊이를 더욱 알기를 원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무엇이 신앙인가를 알게 해주시고 또 잘못된 신앙을 버리고 십자가만을 자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구득영 9. 무엇을 잡나?(히 3:7-14)
----------------------------------- (히 3:7)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히 3:8)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히 3:9)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히 3:10)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히 3:11)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히 3:12)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히 3: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히 3: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
시작과 끝을 만드신 하나님 !!
오늘 본문말씀을 보면, ‘광야’ 라고 하는 길쭉한 지역이 나오는데, 그곳은 애굽이라는 곳에서 벗어나는 것부터 시작되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으로 해서 끝이 납니다. 즉 “애굽에서 빠져 나와서 광야를 지나서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 라고 하는, 그런 스케줄을 확정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처럼 시작과 끝이 있는 계획을 수립했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우리 인간들에게 매우 기분 나쁘게 들릴 수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왜 시작과 끝이 있는 일을 만드셨는가?” 것인데, 왜냐하면 우리는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영원한 세상이었으면 하는데, 즉 “영원한 곳에서 살았으면 좋겠다” 라고, 그렇게 내심 바라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시작이 있고 구원이라는 것이 있고 마지막 심판이라는 것이 있게 되면, 우리는 어떤 부담을 느끼는고 하니, 우리들 각자가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끝을 만들고 심판을 만드신 하나님의 계획을 위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강요받게 됩니다.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심적으로 부담이 되는 일이냐는 겁니다.
교회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믿겠다고 하는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정말로 하나님의 이러한 계획이 너무 좋아서, 거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믿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하늘에서 복이라도 따내기 위해서 믿습니까? 하나님의 계획보다는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믿는다는 말이죠.
당연히 우리는 복을 바라고 있는데, 그런데 하나님의 계획이 이렇게 확정이 되어있으면, 그런 우리의 기대마저 자진해서 포기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이 이미 있다면, 그 앞에서 우리 나름대로 계획을 잡은 놓은 인생설계가 다 무의미해진다는 말이죠.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
오늘 본문은 이 점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데, 11절에 보면,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라고 하시는데, 이것은 완전히 협박이고 공갈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면서 익혀온 바는 사람들 사이에는 편하고 사이좋게 지내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히 3:11)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그러니까 우리가 아무리 이웃 간에 인정을 받고, 그리고 조직사회 속에서 인정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면 너희들의 인생은 끝장이다” 라고,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그치고 계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게 얼마나 우리를 기분 나쁘게 하는 이야기냐는 말이죠.
우리는 이 땅에서 복을 받기 위해서 지금도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을 잘 섬기려고 하는데,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의 성의도 무시하고, 그야말로 막무가내로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한다” 라고 하시니, 그러니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우리에게 심적인 부담을 주느냐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비록 교회에는 다니지 않아도 그야말로 착하기 그지없는 우리 엄마와 아빠의 마지막은 어떻게 되느냐는 말이죠. 자기에게 잘 해주는 삼촌도 있는데, 그들이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가차없이 지옥행이라는 말인데, 그러니 당연히 부하가 치밀어 오른다는 겁니다.
단적으로 이야기를 해서, 지금 이 대한민국 땅에서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아무리 1000만이 넘는 교인들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의 기준에 따르면 모두가 다 떨어지고, 그 중에서 몇 명밖에 구원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한다” 라고 했으니 말이죠.
혹시 여러분 중에서, “그래도 교회에 열심히 다니면 천국에 넣어주겠지요” 라고 할지도 모르겠는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실제로 애굽에서 탈출해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모두들 여호와를 찬양하면서 감사했던 자들인데, 하나님의 기적을 눈으로 직접 목격했던 자들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오늘날 교인들보다도 더 하나님을 가까이 했던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향하여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라고 하시는데, 그러니 이런 위협적인 말이 어디에 있느냐는 겁니다. 한국에 3만 5천개의 교회가 있고, 교인수가 1,200만이라고 하는데, 물론 교인수는 완전히 뻥튀기인데, 약 500만 정도가 되지 싶은데 말이죠. 하지만 그 숫자도 결코 적은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이 매주일 성경찬송가를 옆에 끼고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면서 천국에 가겠다고 하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이렇게 나오신다면, 즉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라고 말이죠. 그러면 그렇게 열심히 교회에 다닌 것이 도대체 무엇이 되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대하면서 “에라, 누가 하나님을 안 믿어서 답답할 일이 있나? 나중에 안식에 들어갈 나이가 되어서 열심히 믿으면 되지. 맨 날 하나님한테 코를 꿰어서 살 이유가 뭐가 있나? 내가 무슨 로봇도 아니고, 그러니 내가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나름대로 착하게 살면 되지 뭐?” 라고 하면서 오기를 부리게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런 모습이 있을 때, 사실은 그게 오히려 다행스럽다는 말이죠. 옛날의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오늘날 우리들이나, 사실은 인간이 별반 다른 것이 아닌데, 오늘날 우리의 이런 모습처럼, 광야 때도 그들이 꼭 그러했다는 겁니다.
모세는 단지 무엇을 붙잡았을 뿐 !!
아까 장로님이 광고시간에 참 좋은 말씀을 하셨는데, “이근호 목사의 인격은 별 개 아닙니다. 복음이 중요합니다” 라고 말이죠(ㅋㅋ). 제가 하고 싶은 말이 곧 그것인데, 모세가 대단한 인격의 소유자라고 상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보다도 더 뛰어난 것이 아닌데, 모세는 단지 무엇을 붙잡았을 뿐인데, 그러니 훌륭한 자질은 신앙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마저도 하나님 앞에서 포기해 버린 자가 바로 신앙인인데, 그러니 자신의 훌륭함을 고양하기 위해서 교회에 나온다면, 그런 사람은 얼마 안 가서 제 풀에 지치게 됩니다. 자기 인격에 스스로 실망해서, “하나님, 미안하지만 좀 쉬렵니다” 라고 하면서 뒤로 물러설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말이죠.
오늘 본문 14절에 보면,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라고 되어있는데, 즉 붙잡으라는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라고 하는데, 이게 제가 한 말이 아니고 분명히 성경에 있는 말씀인데, 이 얼마나 간단한 이야기입니까?
(히 3: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그렇다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은 그 원인이 무엇이란 말인가요? 주님의 것을 붙잡아야 되는데, 주님의 것을 붙잡지 못하고 자기 것만 들여다보고 사는 것이 그 원인이라는 겁니다. “내가 얼마나 인격적으로 대단한 사람이며, 내가 그동안 얼마나 훌륭하게 변모되었는가?” 라고 하면서, “지난주에 내가 착한 일을 몇 번이나 했지?”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렇게 우리는 자기 자신의 행동과 양심에 대한 수지타산을 헤아리면서 살아가는데, 그러니 우리가 근본적으로 신앙을 재정립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정립을 해야합니까? 먼저 “내가 열심히 하면 천당에 가겠지” 라는 생각은 완전히 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소시지를 아십니까 !!
여러분, 소시지를 알지요? 소지자가 길쭉한데, 이번에 책을 구입하려고 서울에 갔다오면서도 소시지를 하나 사서 먹었는데, 맛이 참 끝내준다는 말이죠. 그런데 저는 맛도 맛이지만, 그 소시지를 보게 되면 끝과 끝이 짤똑하게 끊어져 있다는 점이 정말 마음에 든다는 겁니다.
우리의 마음 같으면 우리 각자의 인생이 천년 만년 끝도 없이 이어졌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끝을 주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끝을 모르는 척을 하면서 살아가는데, 그러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이 말씀한 바와 같이 무엇을 붙잡아야 합니까? 영원히 하려는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하나님께서 계획을 잡은 놓은 소시지와 같은 실제 상황을 붙잡아야 한다는 겁니다.
내가 눈을 감아도 세상은 존재한다 !!
저는 문뜩 이런 생각을 해봤는데, “내가 눈을 감아도 세상은 존재한다” 라는 겁니다. 저의 느낌에는 제가 눈감으면 세상도 같이 눈을 감고 죽을 것 같은데, 그런데 그게 아니라, “내가 죽어도 해는 뜨고 달은 지고, 나의 죽음을 전혀 애도하지 않는다” 라는 겁니다. 마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이 세상은 꿈쩍도 않고 제 자리를 지키는데, 그러니 이 얼마나 원통하고 절통한 이야기입니까?
자기가 죽으면 세상도 같이 무너져야 하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그래서 “건방진 이 세상, 미워, 미워, 미워!” 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자기가 죽으면 이 세상도, 마치 지진에 지붕이 내려앉듯이 그렇게 무너져야 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이 세상이 꿈쩍도 하지 않는다면, 그러면 “나는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 나는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인가? 이 세상은 나를 향하여 ‘있으나 마나하다’ 라고 쏘아붙이고 있는데, 왜 나는 아직도 더 살고자 몸부림치고 있는 것인가?” 라고 하면서, 그렇게 외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혼자 가치가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것이죠. “내가 없으면 이 세상은 무너질 거야. 가족들은 내가 없으면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어” 라고 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남편이 죽어도 여자는 울면서도 조의금을 거두기에 바쁜데, 죽은 사람은 죽은 것이고, 남은 가족들은 먹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죠.
아무튼 이 세상은 시작이 있었고 끝이 있는데, 그런데 우리가 세상 전체를 알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그러면 우리는 당연히 누군가가 이 사실을 미리 좀 알려주었으면 좋겠다고 여기게 되는데, 시작이 있으면 그 끝이, 즉 심판이 있다는 것을 말이죠.
십자가가 이 세상의 전부 !!
실제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세상의 전부를 알려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라는 겁니다. 그러니 매일 아침마다 거울만 들여다보지 마시고,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비추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앞에 자기를 세우면, “아하, 나는 이 세상에 죄인으로 태어났구나. 그분이 죽는 것이 곧 나의 실체이고 나의 모습이구나. 내가 죽어야 하는데 그분이 대신해서 죽으셨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하나님의 계획인 것을 아는 사람이라고 하면, 그런 사람이 비로소 자기의 계획을 버릴 사람이고, 그리고 하나님에게 붙잡힌 바가 된 사람이란 말이죠. 이런 사람이야말로 신자가 맞고 성도가 맞다는 겁니다. 즉 십자가 앞에서 자기 존재를 다시 한 번 재정립하게 된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야말로, 자신이 죽어도 이 세상이 울지 않는 이유를 아는 자라는 말이죠. 십자가를 통해서 자기를 바라보니까, 그것은 죄인으로서 당연히 죽을 자가 죽는 것이기 때문에 말이죠. 이것이 바로 십자가에 의해서 붙잡힌 바가 된 사람이라는 겁니다.
흔히 교회에서 목사가 설교를 하면, 교인들은 그것을 지식으로 받아서 들여서 자기가 착하게 살려고 하는데 이용하려고 하고 지키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잘못입니다. 제가 아침마다 운동을 하는데, 하루는 제 옆에 자전거를 끌고 가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자전거는 원래 타고 가야 빨리 가는 것인데, 그런데 끌고 가니까 저보다 더 늦게 가더라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의 말씀은 타고 가라고 주신 말씀인데, 그런데 우리는 끌고 가고 있더라는 말이죠. 그러다가 보니, 자기도 인간이 안 되고 날이 갈수록 하나님의 말씀도 짐이 되고 싫어진다는 겁니다. 매일같이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는 말이죠. 목사는 옆에서 십일조를 왜 하지 않느냐고 닦달을 내고, 자기는 지켜도 지켜도 하나님의 말씀은 지켜지지 않고, 이게 무슨 황당한 사태냐는 겁니다.
오늘날 교인들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고작 이 정도인데, 그러면 자전거보다도 오토바이를 끌고 가보세요. 더 힘이 드는데, 그런데 사람들이 왜 말씀을 끌고 가려고 하는 겁니까? 그래서 “오늘은 기도를 30분밖에 못했구나. 성경말씀도 2장밖에 읽지를 못했네” 라고 하는데, 그것은 저주를 덜 받고 가상하다고 보너스로 축복을 받으려는 기대 때문인데, 하지만 이것은 그 출발이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벌리신 사건 !!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방법을 말씀해주고 있어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 쪽에서 제시한 사건이 있는데, 바로 그것을 자기의 사건으로 붙잡는데 있다는 겁니다. 분명 자기의 아이디어에서 나오지 않는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난데없어 터져 버린 사건, 그런 식으로 하나님은 일을 벌리신다는 말이죠. 그래서 14절에 보면,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아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히 3: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그러면 과연 하나님이 벌리신 사건들이 어떤 사건일까요? 이런 사건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방주이고 구원의 바구니인데, 여기서 오늘본문 9절을 보겠습니다.
(히 3:9)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여기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면 광야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광야에서 분명 어떤 사건이 벌어졌는데, 그런데 그 당시 사람들이 그 사건을 외면해 버리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를 못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무슨 사건이 일어나게 했는지를 아는 것, 그것이 곧 오늘날 우리는 과연 무엇을 붙잡아야 되는지를 아는 것과 일치되는 사항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광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게 시편 7편에 나오는데, 또한 그것은 출애굽기 17장에 나오는 내용이고 말이죠.
(시 95:7)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을 듣기를 원하노라 (시 95:8) 이르시기를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 맛사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말지어다 (시 95:9) 그 때에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며 나를 탐지하고 나의 행사를 보았도다 (시 95:10) 내가 사십 년을 그 세대로 인하여 근심하여 이르기를 저희는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도를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시 95:11)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시키는 대로 다 했건만 !!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시편 95편이 아니라 출애굽기 17장을 보겠습니다. 거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고 하니, 이게 참 재미가 있는데 말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쁘게 애굽에서 탈출을 했는데, 그런데 막상 사막을 지나치게 되니 먹을 양식이 없고 마실 물이 없더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가볍게 상상하기를, “그들이 어지간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구나. 하나님께서 가라는 길로 가지 않고 자기들 편안한 대로, 자기들 마음대로 갔구나” 라고 하게 되는데 말이죠.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가 않아요. 결코 자기들 마음대로 가지 않았다는 겁니다. 분명히 그들은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함을 받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아서, 그 코스를 이탈하지 않고 모세를 따라서 광야의 길을 갔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식도 없고 심지어는 물도 없더라는 것이죠.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도 말이죠.
이것은 마치, 자기가 교회에 다니기 전에는 사업도 잘되고 행복하게 살았는데, 그래도 천국에는 가고 싶어서 교회에 나왔더니만, 그때마다 하는 일마다 부도가 나고 꼬인다는 겁니다. 그러면 과연 기분이 좋겠습니까? 하나님을 원망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겠느냐는 말이죠.
바로 이런 상황과 다르지 않는데, 이것이 바로 출애굽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참다가 참다가 자신들의 본심을 도저히 숨길 수가 없어서 하나님에게 대들고 모세에게 대들었다는 겁니다. “모세야, 우리를 통째로 광야에서 죽이려고 하는가? 이게 무슨 짓이고?” 라고 하면서 말이죠.
여러분, 이게 정말로 하나님에게 대들만 하지 않습니까?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먹고 마시는 것이 기본인데, 그것도 없이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이런 상식적이고 본능적인 것에 근거해서 대들었던 겁니다. 그렇게 대드는 것이 취미이고 재미나 나서 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말이죠.
하지만 그들의 이러한 정당한 항의 안에, 거기에는 무엇이 들어있었는지를, 그것을 우리는 출애굽기 17장의 본문에서 발견해보자는 겁니다. 6절과 7절입니다.
(출 17:6) 내가 거기서 호렙 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출 17:7) 그가 그곳 이름을 맛사라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더라
므리바 - ‘하나님과 다투다’ !!
일이 그렇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뭐라고 하십니까? 하나님 자신이 반석 위에 서있을 것이니, 그 반석을 지팡이로 치라고 명명을 하십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신가? 혹은 아닌가?” 라고 여겼다는 말이죠. 이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 먹고 마시고 것이 문제가 아닌데, 즉 살고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지 않는다”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 더 큰 문제라는 겁니다.
이 이야기가 쉽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고 어렵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쉽다고 여기는 분을 보면 참 신기한데, “어떻게 저렇게 믿음이 좋지?”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이렇게 대꾸하지 싶은데, “목사님, 이 말씀이 무엇이 어렵습니까? 물이 없어도 하나님은 계신 것이고, 또 양식이 없어도 하나님이 계신 것이 맞는데, 이 사실이 무엇이 어렵습니까?” 라고 말이죠.
그런데 믿음이 없는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니, 양식이 없는데 무슨 힘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더욱이 물도 없는데 무슨 재미로 교회에 나옵니까?” 라고 말이죠. 그러면 제가 이런 사람에게 “당신이 정상입니다” 라고 말을 하고 싶어요. 죄인으로 태어난 주제에, 그러한 이야기가 입에서 나오는 것이 지극히 정상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없는데, 그런데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그만 착각해서 모여서 교회를 만들었어. 그러니 하나님은 사람들이 지어낸 관념적인 상상물에 지나지 않는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사실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래서 무엇이라고 이야기를 합니까? “광야에 만나가 떨어진 것도 자연적인 현상이고, 그리고 바위를 쳐서 물이 나온 것도 하필이면 거기에 수맥이 흘러서 그렇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모세가 그런 곳을 골라서 쳤다는 말이죠. 즉 “아무튼 하나님이 없는 것만은 너무나 분명하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터진 사건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므리바’ 라는 지명 자체가 말해주듯이, 이런 정상적인 인간이 하나님과 다투게 된 하나님의 사건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렇게 ‘다투었다’ 라는 것 자체가 곧 “하나님이 계시다” 라는 증거가 될 수 있는 사건이라는 말이죠.
이게 바로 예수님의 경우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에 나타났다” 라고 주장하는 반면에, 사람들은 “당신이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냐?” 라고 하면서 대들어서, 그렇게 해서 터져 버린 사건이 곧 십자가 사건이란 겁니다. 또한 그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죽었으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살아있는 게 맞잖아?” 라고 하는 것은 믿음이 있는 자들이라는 겁니다.
반면에 믿음이 없는 사람은 말하기를, “예수는 과대망상증 환자로서, 자신이 이 어려운 시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정치적으로 대들다가, 그만 질서문란 죄에 걸려서 죽은 것이지, 도대체 그것이 무슨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구원사건인가? 도대체 답답해 미치겠다. 그렇게 자신이 있거든 납득이 되게 설명해 봐라”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신앙이 있는 사람은, “모세와 백성들이 다투게 되었으니, 이것이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다” 라고 주장하는 반면에,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있었다고 하면 다툴 필요도 없이, 가는 곳마다 생수가 펑펑 솟아나고, 음식도 짜장면, 팔보채, 돈까스 등이 하늘에서 마구 떨어져야지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가 되는 것이지, 어떻게 해서 다투었다는 것 자체가 증거가 될 수 있는가?”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스데반 집사니의 경우로 이야기하면, “정말로 하나님이 계시다면 스데반 집사님을 오래 살게 해서 많은 설교를 해주고 목회성공을 하도록 해주어야지, 어떻게 설교를 한 번하고 돌에 맞아 죽게 하시는가? 죽음은 곧 낭패본 것인데, 어떻게 그 죽음이 하나님이 내린 축복이 될 수 있는가?” 라고, 그렇게 불신자들은 주장한다는 겁니다.
반면에 신자들은 “그러니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이야.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어” 라고 하고 말이죠. 그러면 불신자들은 “이게 미쳤나?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고?” 라고 하겠지요.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하면 기적을 베풀어주셔야지, 십자가에 죽은 것이 무슨 기적이냐는 말이죠. 그것은 낭패를 본 것이고 절망한 것이 아니냐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제가 신학교를 처음 입학해서는 나름 거창한 꿈이 있었는데, 시골에 조그마한 교회를 짓고 사는 것이 아니라, 교인수는 적어도 백만 정도이고, 예배당 크기는 서울의 강남에 있는 고속터미널보다 더 크게 짓고자 했다는 말이죠. 그 정도는 되어야 그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증거라고 보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1학년말에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로마서 강해’를 읽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한 마디에, 즉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정했다” 라고 하는 말씀에 모든 것을 다 포기하게 되었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예배당이 아니고 십자가구나. 목사가 아니고 장로가 아니고, 십자가의 피만이 나를 살리는구나” 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죽으셨는데, 우리의 죄 때문에 말이죠. 결코 예배당을 크게 지으라고 죽이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 더러운 세상에서 하나님은 무엇으로 죄인을 건지시느냐 하면, 바로 오직 십자가 사랑으로만 건진다는 말이죠. 이 사랑이 아니면 아니라는 겁니다. 바로 이 말씀으로 인해서 저의 모든 것이 다 바꾸어졌는데, 즉 “교회가 아니라 이제부터 십자가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여러분, 예배당을 크게 짓고 백만 명을 모으면, 그것으로 저와 여러분의 죄가 사해집니까? 과연 그런 겁니까? 우리의 죄는 오직 십자가의 피로만 용서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여러분은 하나님의 기적을 어떻게 해석했습니까? 십자가로 보았느냐는 말이죠.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로부터 시험받을 때에 돌이 떡 되게 하지 않았는데,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지도 않았고, 세상의 부귀영화를 위해서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와서 “당신이 메시야인 것을 증명하는 기적을 베풀어 봐라” 라고 했을 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내가 보여줄 기적은 요나의 기적, 즉 십자가 기적 외에는 보일 기적이 없다”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마 16: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자꾸만 자기를 숨기시는 겁니까? 그리고 왜 맥없이 그냥 돌아가신 겁니까? 물론 부활을 하셨지만, 왜 그렇게 하셨느냐는 말이죠. 요즘 ‘알까기’ 라는 것이 유행인데, 바둑알이나 장기알을 가지고 퉁기는 게임인데, 해보면 참 재미가 있어요. 그러나 원래 바둑이나 장기는 그런 용도가 아닌데, 나름대로 규칙에 맞도록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이처럼 이 세상은 우리의 자기 만족으로 돌아가라고 움직이고 있는 게 아닌데, 나름대로 룰이 있다는 말이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사는 재미 중의 하나이지만, 그러나 맛있는 음식이 우리를 구원해 줍니까? 이 세상에 모든 존재와 움직임은 하나님의 안식을 위해서 있다는 겁니다. 그럴 필요가 없을 경우에는 꺼져버려야 한다는 말이죠.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
히브리서 1장 10절과 11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라고 하는데, 왜 그렇습니까? 이 세상은 하나님의 법칙에 의해서 움직이는데, 그것이 시작과 끝이 있는 소시지와 같다는 말이죠. 그 룰에 따르면, 우리가 지금 탐내고 싶고 소유하고 싶은 것은 모두가 멸망할 거리에 지나지 않다는 겁니다.
(히 1:10)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히 1:11)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그런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열심히 하면 다 자기 것이 되는 줄 알고 있는데, 그러니 지금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기껏해야 소모성 행위에 불과하다는 말이죠. 우리의 하루일과가 어떠합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겁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이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말이죠.
우리가 붙잡아야 될 것은 소시지, 즉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멸망을 당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모세나 스데반 집사나 사도바울은 슬그머니 이 세상에서 빠져버립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하심을 증거했다는 말이죠. 그게 곧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합니까? 자꾸만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해결해주는,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모셔오고 예수님을 모셔온다는 말이죠. 그저 자기 것을 채우려고 하는데, 그래서 자기 교회가 백만 명이 되었으면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모세나 스데반 집사나 사도바울이 여기에 동참합니까? 예수님이 함께 하십니까? 전혀 그렇지 않은데, 그만 슬그머니 빠져 버린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획은 따로 있기에, 그래서 여기에 동참할 수가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을 원망하는데,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왜 우리를 광야에서 죽게 만듭니까? 살려주시려고 하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요” 라고 말이죠.
그렇게 우리는 객기를 부리는데, 그래서 죽음을 앞두고 자식들을 불러놓고 무엇이라고 합니까? “내가 죽으면, 첫째 너는 돈이 많으니 한 달에 두 번씩 제사를 지내고, 둘째 너는 가난하니 한 번만 지내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끝까지 그렇게 나간다는 겁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자기 중심인데, 오로지 자기만 안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죄이고, 바로 이것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붙잡아야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게 바로 하나님의 계획인데, 즉 소시지라는 말이죠. 그래야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데, 그러니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상상한 것을 다 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
오늘본문 14절에 보면, 조금 전에도 살펴보았지만,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아라” 라고 했는데, 그게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나옵니다. 16절입니다.
(요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라고 하는데, 그러니 하나님의 소시지 계획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을 믿게 될 수밖에 없다는 내용도 역시 포함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르는데, 즉 붙잡힌 바 되었다는 겁니다. 빌립보서 3장 12절의 말씀처럼 말이죠.
(빌 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 !!
그러니 십자가를 믿는 자에게는 더 이상 구원을 받는 것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는 걱정할 것들이 많이 널려있지만, 사실은 그런 것도 걱정하면 안 되는데, 적어도 구원문제에 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믿는 자에게 주어진 특권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하늘나라의 소시지에 포함이 된 것인데, 그러니 우리가 교회에 와서 무엇을 더 원하겠습니까? 돈벼락을 맞기를 원하겠습니까? 백만 명의 교인을 원하겠습니까? 이 은혜, 이 사랑, 우리를 계속 붙잡아 인도하시는 그 십자가의 사랑이 있는 이상, 우리가 더 이상 무엇을 원하겠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하루가 멀다하고 부부싸움을 하고 화를 마구 내면서, 자기 성질대로 살아가는데, 그런데 그럴 때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감사살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런 인간도 이미 사전에 조치를 다 하셔서 예수님을 믿게 해주시고, 구원을 받게 해주시니 말이죠.
이것이 바로 세리와 창기의 고백이고, 거지 나사로의 고백이고, 그리고 성도의 고백이고, 또한 성도의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살아가면서 걱정일랑은 다 주님께 맡기고, 주님이 주신 사랑의 깊이를 더욱 더 알아가면서 감사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어떻게 노력해서 구원을 받겠다는 것이 그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 깨닫게 하옵소서. 우리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선택해서 세우셨을, 그래서 그 사랑을 항상 찬양하면서 살게 하옵소서. 그래서 날마다 우리의 잘못된 신앙을 버리게 하시고, 날마다 십자가만을 자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6,12,24 오후 2시에 마침. - 녹취 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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