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이사야 54:9-10 / 하나님의 기억 본문
148강-사54장,9-10,(하나님의기억)-isa08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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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기억
2008년 7월 9일 이근호
본문 말씀: 이사야 54:9-10
(사 54:9) 『이는 노아의 홍수에 비하리로다 내가 다시는 노아의 홍수로 땅 위에 범람치 않게 하리라 맹세한 것 같이 내가 다시는 너를 노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너를 책망하지 아니하기로 맹세하였노니』 (사 54:10) 『산들은 떠나며 작은 산들은 옮길지라도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은 옮기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을 알려면 하나님이 남기신 사건을 통해서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건들을 이 지상에 터뜨리시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기에 심히 좋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좋았던 세계가 요한계시록 끝에 가면 멸망당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왕 있게 하신 세계를 계속 존재하도록 하시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왜 ‘좋았다’고 하시면서 스스로 파괴하시려 하는가? 여기는 우리는 무엇이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무엇이 있었는데 그것이 왜 없어질 수밖에 없느냐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파악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점을 모르고 무엇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다고 신에게 예배를 드릴 줄 알면서도 막상 그 있는 것이 없어질 때면 신에 대한 원망이 마음에 가득히 넘칩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있다가도 무엇 때문에 없어지느냐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뭐든지 없어지면 그 원인을 자기와 결부시키는 경향이 높습니다. 즉 ‘내가 제대로 살았으면 안 없어질 것인데’라고 미련을 둡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이런 생각이 옳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는 본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있는 것을 없게 하시는 이유는, 정작 하나님W쪽으로 보여줄 분이 따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들은 이 세상의 변화를 신과 인간 자신들과의 대화로 푸는 줄로 알지만 실은 제 3자가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분을 세상에 자랑하고 싶어하십니다. 그 분의 영광을 위하여 이 세상 자체가 준비되었습니다. 창조도 그 분을 위해서요 세상이 멸망해도 그 분을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노아 홍수를 기억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다시는 물로서는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맹세한 것처럼, 내가 너희를 반드시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 주겠다”고 하십니다. 이 말의 취지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홍수가 지나온 시대에 왜 다시금 홍수 이야기를 왜 끄집어내느냐 이 말입니다.
이왕 용서해주었으면 두 번 다시 지난 일은 안 끄집어내어야 앞뒤가 맞는데, 하나님께서는 다시 물로서는 멸망 안 해주겠다고 언급한 그 사실을 새삼 강조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강조하시는 취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노아 홍수 심판이 결코 인간의 반응에 따라 내린 조치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홍수 이후에 사람들이 정신차리고 제대로 신앙 생활 잘 하리라 기대하시고 ‘다시는 물로서 심판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람을 의식하지 않으시고 처음부터 내다 보신 일이 따로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악해서 지금이라도 물로 싹쓸이 해도 인간으로서는 할 말이 없을 지경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물로서는 심판하지 않겠다’는 것은 ‘심판이 없다’는 말도 아니요 더 센 심판이 주어진다는 말도 아닙니다. 다른 사실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염두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을 통해서 확고하게 굳어진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 내용을 품고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다시는 물로서는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맹세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상황설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황설정이 우선이고 이 설정을 빛내기 위해서 필요한 조치들을 하나님께서 이 우주를 동원해서 우주 안에 터뜨리시는 겁니다. 상황설정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인간이 할 수 없습니다. 마치 연극에 있어 무대장치 같은 것은 연출가의 몫이지 배우가 할 일이 아닙니다. 주제넘게 무대 장치에 대해서 자신의 의견을 개진 할 입장이 있지 않습니다.
배우는 주어진 역에 충실하면 그만입니다. 이와마찬가지로 노아는 자기 역에 충실했습니다. 노아는 자신이 만든 방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방주라는 것은 그 시대에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신 상황설정일 뿐입니다. 정작 노아가 구원받은 것은 믿음 때문인데 그 믿음은 방주를 믿는 믿음이 아니라 방주를 한낱 증거로만 머물게 한 그 보이지 않는 실체로 인하여 구원받은 것입니다.
즉 히브리서 11:1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지난 노아 홍수 때에 내린 맹세를 지금 유다 민족에게 다시 거론하시는 것은 자비와 긍휼의 근거가 노아 홍수의 맹세와 같은 입장에서 주어진다는 겁니다. 따라서 노아 홍수의 맹세를 알지 못하면 장차 하나님이 하실 일을 비켜가며 사는 자입니다.
노아 홍수 때의 맹세란, 인간이 자기 구원에 대해서 하나님께 의견을 개진할 입장에 있지 못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어주셨습니다. 그 제자들 속에는 가룟 유다도 포함된다는 것을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가룟 유다가 발 씻음을 받고 난 후 세상 사람들을 만나면서 자랑하기를, “우리 주님이 말씀하시는데, 발만 씻어도 전신을 씻음 받은 자와 같다고 하셨어. 나 죄 용서받았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분명히 그는 발씻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 사람은 구원받았습니까? 아닙니다. 지옥갔습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가룟 유다에게 발 씻어주었습니까? 그것은 그런 일을 통해서 진정 바라봐야 할 하나님의 일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 하나님의 일은 인간을 배제하고 오직 하나님과 아들 사이에만 성사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다시는 물로서 심판하지 않겠다’는 맹세의 의미도 인간을 전적으로 배제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얼마나 큰 확신을 갖고 계신가 하는 것은 하나님이 제시한 예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산 뿌리의 견고함입니다. 여러분들이 산을 밀어 보세요. 밀립니까? 끄떡도 안 하지요. 그렇다면 인류가 다 동원해서 산을 밀어보지요. 그래도 끄떡도 없지요.
이와 같은 원리로서 개인이나 온 인류에 그 어떤 변화의 조짐과 예상 못할 사태가 일어나도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은 변동이 없으시다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의 얼마나 사랑받을 짓을 했느냐 하는 것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 즉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안도감 속에서 종말을 맞이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실수보다 하나님의 맹세가 더 세다는 것을 인정하고 기쁨으로 그 안에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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