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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이사야 1:1 / 이사야의 시작 (2005년-2009년)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이사야

이사야 1:1 / 이사야의 시작 (2005년-2009년)

정인순 2013. 11. 1. 10:08

001강-사1장,1,(이사야의,시작)-isa05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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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의 시작

2005년 9월 7일

이근호

 

본문 말씀: 이사야 1:1

 

1:1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라

 

 

사도행전을 끝내고 이사야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문점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는 과거 이야기인데 지나간 이야기를 우리가 새삼스럽게 언급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적용하시는 그 원리를 오늘날에도 취소하지 않으시고 일관되게 적용하시면서 일하시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사야 6:10에 보면,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 바울이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 이사야 53:5-6에 보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하면서 이 이사야 구절의 내용이 함유된 십자가 인지를 검토해 봐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엉터리 십자가를 믿고 있는 바가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제시하신 그 원리를 중도 포기없이 지속적으로 되풀이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이사야에게 특별한 계시를 내려주시는가요? 그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우발적인 사건이 없으면 항상 환상 속에 무한히 빠져 들어가게 됩니다. 즉 인간은 사실 아무 것도 아는게 없습니다.

 

 

세상에 대해서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아는 바가 없는채로 그냥 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뭔가 자꾸 환상을 생산해 내게 됩니다. 깊은 착각 속을 늘 헤매는 것이 인간들입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올 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늘 자기 편이 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그들을 물 없는 곳으로 몰아넣었을 때, 그들은 쉽게 당황하게 되었습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께서 홍해 바다를 갈라지게 하신 그 놀라운 기적과 물없는 곳으로 의도적으로 인도하시는 그 놀라운 기적을 같이 연결시켜 줄 안목이 없었던 것입니다. 홍해를 갈라지게 한 일이나 물없는 곳으로 인도하시는 일이나 모두 한 하나님에 의해서 동일한 맥락에서 이루어진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둘 사건을 상호 연결하기가 난처했던 것입니다.

 

 

이런 경우도 또 있습니다. 룻기에 보면, 보아스는 남편과 든든한 아들 둘을 데리고 모압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기둥같은 남편이 죽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마음이 없었던 것은 든든한 아들 둘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마저 죽자 나오미는 결국 이스라엘을 도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오미는 자신이 고향을 떠난 일과 다시 돌아오는 일 모두를 '전능하신 하나님'의 전능하신 사랑으로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일반 사람들은 모든 일을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기적으로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처음 교회 나와서 예수님을 믿을 때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줄 알다가 갑자기 자기 사업이 부도가 나면 그것은 하나님이 일으킨 사랑의 일이 아닌 줄로 압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어떤 우발적인 사건을 터뜨리면, 사람들은 그 사건에다 자신의 밑바닥부터 올라오는 욕심과 온갖 욕구를 그 사건에다 다 적용시켜 새로운 자아상을 창출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해서 멋지게 만든 현실을 우상처럼 신봉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가만 두지를 않고 그 환상을 깨는 쪽으로 새로운 우발적인 계시적 사건을 일어나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유다 왕'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사실 유다 왕이라는 말이 상식적으로 성립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유다란 이스라엘의 13지파 가운데 한 지파에 불과한 것입니다. 즉 유다 나라가 전체 이스라엘을 대신한 하나님의 나라가 될 줄은 이스라엘이 처음 애굽에서 나와 형성될 때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때가 되어서는 유다 나라로 쪼그라들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바로 그동안 이스라엘 내부에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그 범죄의 실상은 딴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새로운 사건에 대해서 그들이 기존 갖고 있는 선입견으로 대들었기에 발생된 범죄입니다.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지만 핵심되는 한 가지 일은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선택한 다윗에 대해서 이스라엘 여타 지파들이 대들었던 일입니다. 다른 10지파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유대 지파를 선택해야만 하는 취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한 것은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은혜로 남은 자를 건진다는 취지에게 다윗에게 특별히 선택하셔서 그를 통해 하나님의 처음 이스라엘을 생각하신 뜻을 이루어나가시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 어떤 인간도 다윗을 선택한 그 선택의 은혜에 합류되지 않고서는 구원될 수 없는 실정임을 분명히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신약에서 소경이나 문둥병자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불렀던 것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로 다윗을 선택한 그 은혜가 신약에서도 구원하는 원리 원칙으로 작용하는 겁니다. 즉 누구든지 다윗의 자손되시는 분의 선택적 은혜를 입지 않고서는 구원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이사야 9:6-7에 보면,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라고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라는 왕들은 모두 장차 오실 다윗의 자손과는 결코 비교조차 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할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사야를 통해, 이사야가 지적하는 그 죄인의 자리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오직 다윗의 자손에게만 기대거는 백성이라고 드러날 수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늘 우발적인 하나님의 사건이 터져서 우리가 왜 죄인인가를 깨우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