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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스가랴 3:1-5 / 여호수아와 사단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스가랴

스가랴 3:1-5 / 여호수아와 사단

정인순 2013. 10. 1. 10:50

 

 

여호수아와 사단

음성              동영상


이근호
2013년 9월 29일                        

 

본문 말씀: 스가랴 3:1-5

(3:1)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3:2)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3:3)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

(3:4)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3:5)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

또 다른 현실이 펼쳐집니다. 마치 큰 홀 중앙천장 부분에 하늘로 통한 구멍이 뚫려있고 그 구멍으로 비로소 볼 수 있는 광경 같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현실이라면 기존의 현실의 위상은 어떻게 평가되느냐라는 문제가 등장합니다. 기존에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다 이 중앙홀을 통해 파급되는 결과물에 불과합니다.

세상 안에서 눈에 들어온 것으로 세상 현상을 설명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마치 무대 세트장 같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도 계시고 사단도 있고 이 사실을 세상을 전달할 천사도 있고 그리고 여호수아라는 인간의 대표자도 거기에 있습니다. 곧 천상회의가 개최되고 있는 겁니다.

우선 사단의 생각부터 들어봅시다. 사단의 입장에서 볼 때, 예루살렘이 멸망 당해도 당연하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생각과 같은 것입니다. 실제로 예루살렘은 멸망당했습니다. 그러나 멸망을 당한 지상의 예루살렘의 사람들은 여기서 정리되지 않는 사태를 대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백성을 왜 멸망시키느냐 하는 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자가 먼저 심판주로서 나타나지 아니하면 구원자가 결코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5:22-23에서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기존의 하나님 믿는 자들의 집합이라고 자부한 이스라엘 내부에서는 결코 이스라엘이 꼭 멸망되어야 될 이유와 원인을 알아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죄악으로 인하여 형벌을 받으면서도 도대체 어느 대목에서 죄악인지를 모른다는 겁니다. 벌을 받아도 이유를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게 모르겠다는 겁니다. 붙 타버린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면서 그 누구도 그 원인과 이유에 대해서 언급할 수 없을 때에 스가랴를 통해서 천상회의 사정이 공개됩니다. 그것은 아랫동안에 말하는 죄라는 것은 죄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고 하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죄라는 것이 법이 있고 인간만 있으면 죄가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모여야’합니다.

여호와하고 사단하고 여호수아하고 천사가 모여야 죄 개념이 성립됩니다. 죄의 궁극적이 그저 인간이 저질은 일이라고 한다면, 그 책임을 인간이 전적으로 떠맡을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정 신이 온 우주를 통치하는 것이 맞다면 그 어느 한구석에서도 죄라는 것이 전혀 남아있지 않아야 마땅한 겁니다.

만약에 제 때에 죄를 처리했다면 인간으로 하여금 죄질 가능성도 다 제거되어야 마땅한 겁니다. 그러니까 그 어떤 논리라도 하나님에게 부과된 책임이 지워질 수는 없는 겁니다. 인간 혼자 죄책을 다 떠맡을 수는 없는 겁니다. 제대로 일 처리 못하는 하나님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는 것이 인간들의 생각이고 곧 사단의 생각입니다.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지 말고 강제적으로 막아서야 한다는 것이 인간들의 생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십니다. 죄라는 것은 인간 혼자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천상회의에서 다들 모여서 그 자리에서 정립되는 개념입니다. 곧 사단은 고소하는 자로서 고소를 해야하고 인간은 죄지은 자로서 마땅히 죄 지어야 한다는 겁니다.

인간이 율법이 어긴 것이 명백하므로 합당한 조치로서 저주하는 것이 하나님다운 조치라는 것이 사단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사단을 꾸짖으십니다. 어떤 자격을 가지고 꾸짖으시느냐 하며는, ‘예루살렘을 택한 하나님’의 자격으로 꾸짖어십니다.

즉 사단에게 있어 죄란 사단 본인은 빠지고 인간이 율법을 위반하는 것만을 놓고서 규정하지만 하나님에게 있어 죄란, 그런 식으로 죄를 지적하는 그 지적자 당사자까지 포함시켜서 죄를 규정하시겠다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호수아’ 곧 인간을 대표하는 구원자아 죄를 잔뜩 짊어지고 하나님의 회의석상에 나타나야 합니다.

곧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백성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서야 하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이 합류된 상태에서의 죄관이란 딴 게 아니라 ‘더러운 옷을 벗기라’는 이 조치에 반대하고 불만하는 것이 최종적 죄 개념입니다. 이 천상회의의 취지는 지상에서의 예수님 십자가 죽으심으로 구체됩니다.


욥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단은 하나님 보좌 앞에서 욥의 신앙에 의심합니다. 이는 로마서 3:10의 말씀처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에 부합되는 겁니다. 아담 안에 있는 인간이 구원을 넘본다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사단이나 하나님에게만 동일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동일한 심판 속에서 구원이 나온다는 것을 사단은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단이 사단다운 겁니다. 즉 말씀을 가지고 사람들은 지적하는 것은 교회나 세상 어디서나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지만 십자가 피의 의미를 포함시켜 죄를 규정하지 아니하면 그곳은 ‘악마의 소굴’입니다. 계속해서 악마에게 쫓기면서 살아가야 하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세상적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단의 활동이란 주기적으로 모든 지식과 기술들이 빠르게 순환하므로서 그것을 악착같이 따라잡아야 산다는 일념으로 빨려들다보니 여기서 주체가 찢어집니다. 즉 “도대체 내가 누구이며 뭣 때문에 사는 지도 모르겠다”는 식입니다. 이 찢어진 틈 사이에는 생존욕구가 발휘되는데 그로 인해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벗기시는 새로운 죄의 기준을 놓치게 됩니다.

죄를 지어서 마땅히 옷이 더러워진 상태로 인간의 대표자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천상회의에 참석하게 됩니다. 사단은 부지런히 그의 더러움을 지적하게 되지만,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그 지적함의 부당함을 보여주시기 위해 그 옷을 벗기고 갈아입게 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사단의 지적질은 소용없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는 심판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에 의해서 구원되느냐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눈에 보이는 모든 현실은 실은 오직 하나의 현실은 천상회의대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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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이한례

6강-슥3장1-5(여호수아와 사단)130928-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 스가랴 3장 1절에서 5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1315페이지입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


방금 읽었던 것이 마치 무대장치 같은데 우리가 미처 몰랐던 현실의 중심, 모든 현실은 바로 이 중앙지에서 바깥으로 구체화되면서 현실은 펼쳐진다는 겁니다. 우리가 성경을 안 봤으면, 스가랴 3장 1절에서 5절을 만약에 우리가 몰랐다면 오늘날 돌아가는 세상 현실이 도대체 어디서 출처가 되는지를 알 길이 없었어요. 본다고 아는 것도 아니지만 하여튼 우리가 믿음으로 이걸 받아들인다면 아! 이 세상에는 중앙 홀이 있고 중앙 홀에 구멍이 나와 있고 그 구멍을 통해서 스가랴는 하나님의 계시를 보았고 그 계시 안에 들여다보니까 요지경 속이예요.

그야말로 우리가 예상 못한 다른 분들이 거기 계시는 거예요. 사람만 분들인 줄 알고 사람만 사는 세상인 줄 알았는데 사단이 거기 있었고 여호와 하나님이 거기 있었고 그리고 천사도 거기 있고 그것을 전달하기 위해서 대기 천사가 옆에 또 있고 거기 여호수아가 또 인간의 대표로 거기 서 있고, 거기서 일어나는 그 논의되는 일들, 주고받던 그 대화가 우리는 거기 천상회의에 가보지는 안 했지만 스가랴를 통해서 그 회의 상황을 눈으로 목격하듯이 우리는 지금 방금 받았습니다.

이거 돈 주고도 얻을 수 없는 체험을 우리가 하고 있는 겁니다. 물론 실제라고 믿는 사람에 한해서 하는 이야깁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검찰총장 이야기, 개성공단 이야기, 오늘 비 몇 미리 오는가 하는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그러한 비오고 세상에 일어나는 그 모든 것의 출처를 가보니까 구멍 난 중앙 홀에서 들어온 그 결정된 사항이 퍼져서 이 땅을 차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럼 우리가 할 것은 검찰총장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검찰총장 이야기가 어떻게 스가랴 3장과 연관이 되느냐, 그걸 맥락을 이어보면 되는 겁니다. 그럼 검찰총장 이야기를 할까요? 아니 할 필요 없어요. 엄마 죽이고 형 죽여서 10억 보겠다는 그 이야기부터 할까요? 그거 할 필요 없어요. 왜 그 이야기 할 필요가 없는가? 지금 내 이야기하기도 바쁜데 자기 빼놓고 남 이야기하면 나는 거기서 괜찮은 사람 되잖아요.

하나님의 그 중앙 천상회의에서 일어난 일은 우리가 나쁘다고 지목하는 그런 사람들뿐만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로 거기에 같이 포함돼 있습니다. 우리의 대리자가 있는데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한테 맡깁시다. 니 이야기, 내 이야기 할 게 아니고 검찰총장 이야기할 게 아니고 여호수아한테 맡깁시다.

그 여호수아가 오늘 본문에서 뭐냐 하면 2절에 보면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그 다음에 그냥 사단에게 책망하는 것이 아니고 앞에 뭐가 붙어요.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나 하나님인데 사단 너를 책망한다. 그냥 책망하는 게 아니고 예루살렘을 택한 나 여호와가 사단아, 내가 너를 꾸짖는다.’라고 하신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어디 포함돼 있느냐 하면 예루살렘에 포함될 경우에만 이 혜택이 우리에게 주어지겠죠. 예루살렘을 대표해서 여호수아가 그 앞에 인간의 대표로 서 있습니다. 노사정 회의하는 거죠. 기업과 노동자와 정부가 나서서 이 최저 임금을 어떻게 할 것인가, 노사정 대표가 하는 것처럼 여기에 우리의 대표자가 여호수아입니다. 나중에 신약에 오면 여호수아가 이름이 줄어서 예수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뜻입니다. 그 기능은 멜기세덱 왕이고. 여호수아도 제사장이고 왕과 제사장 기능이 합해서 여호수아가 되고 그 결과로 선지자 되고 그래서 왕과 제사장 선지자가 그리스도 안에서는 세 개 다 포함된 역할이다. 그렇게 보는 겁니다.

예루살렘을 택했다. 이 속에서 우리는 직접 우리 사회악이 되는 그 사람하고 직접 하나님하고 연관시키지 말고 성경에서 말하는 스가랴 말은 우리의 대표자를 찾아서 나서야 돼요. 지금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멸망시켰습니다. 불살라 버렸어요. 불살랐을 때 그 예루살렘에 있는 거민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섬겼는데 왜 우리 도성이 불탑니까? 하나님 말씀은 이겁니다. ’니가 악하기 때문에, 죄를 졌기 때문에 그렇다.‘

거기에 대해서 유다인은 말할 거예요. ‘도대체 죄가 어디서부터 와서 우리를 이렇게 죄짓게 했습니까?’ 죄가 어디서부터 왔느냐가 아니라 그 질문이 잘못된 거예요. 죄가 어디서부터 왔느냐? 이렇게 물으면 결국 누가 죄짓게 했느냐 하면 하나님 자신이 죄를 짓는 그 주체 자가 돼 버려요.

어떻게 선한 하나님인데 세상이 왜 악하냐? 이렇게 돼 버리면 하나님이 죄를 안 져버리고 악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죄가 있다는 말은 결국은 하나님은 무능한 하나님이 되는 겁니다. 죄가 하나 있어도 죄를 처리 못하는 하나님을 우리가 믿을 수 있겠어요? 죄도 처리하지 못하면서, 죄도 제거하지 못하면서 그게 무슨 제대로 된 하나님이라 할 수 있느냐? 에이그, 하나님 무능하네. 죄 처리도 못하고, 죄 청소도 못하는 하나님이 무슨 하나님이냐, 이렇게 돼야 되고 그 다음에 죄를 처리할 수 있는 하나님 같으면 애초부터 죄가 없을 수도 있었는데 왜 죄를 방치했느냐, 라는 책임 추궁이 들어갑니다.

선악과 따먹으면 죄 생기는 걸 뻔히 알면서 선악과 왜 심어놨느냐? 그러니까 이 죄 처리를 하나님이 못했다는 말은 우리 인간이 죄 졌다고 책임을 우리 인간에게 물을 수 없다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지옥을 만든 것은 하나님의 큰 오류고 실수다 이 말입니다. 그 교단이 여호와 증인입니다. 전부 다 넥타이 매고 점잖은 신사 숙녀들이고, 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 지옥이 없다. 지옥이 있다는 걸 믿지 말고 우리를 믿어라. 이렇게 하는데 사실 기존 교회에서 지옥 이야기 잘 하지 않아요. 지옥의 하나님, 책 몇 권 팔리지도 않았어요. 제목부터가 벌써 부정적이라, 천국의 하나님 같으면 많이 팔렸을 건데 지옥의 하나님이라 하니까 생각도 안 해요. 겁나서.

예루살렘을 멸망시켰다는 이 문제에 대해서 인간들이 ‘이처럼 모든 책임을 우리 인간보고 죄 졌다고 닦달내지 마시고 죄를 허용하신 하나님 책임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구잡이로 우리를 잡아 챙기지 마시고 하나님 내가 잘못했다고 하나님도 서로 자기 반성하세요.‘ 라고 하고 싶은 충동이 그게 어디서 나왔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죄가 있느냐가 아니라 죄가 있음을 보고 거기서 아주 특이한 반응들이 나오는데 바로 그 점을 하나님이 노리신 거예요. 그것이 어디서 나왔는가? 사단에서 나왔습니다. 사단의 마음이 우리 마음 됐기 때문에 우리는 죄에 대해서 자기 책임을 내가 회피하려고 시도하게 되는 겁니다. 나쁜 일 했지만 착한 일 더하면 되잖아요. 이런 식으로 나쁜 짓 하는 것에 대해서 뭔가 피해보려는 그런 시도를 하게 되겠죠.

그 점에 대해서 우리는 이걸 생각해야 돼요. 오늘 본문을 보면서 천상회의 요 상황이 그대로 중앙 홀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대로 내려온다고 봅시다. 조금 전에 어떤 분이 십자가 마을에 질문을 올려놨어요. 성범죄가 많은데 그 성범죄에 대해서 성경은 어떻게 이해하게 됩니까?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해도 과감하게 거부함으로써 착한 일을 했는데 반면에 창기도 사마리아 여인도 구원받고 이럴 때 성경에서 성범죄를 피하라 하는 것은 옹호하면서도 또 창녀에 대해서는 ‘니 죄를 묻지 않고 그냥 현장에서 간통한 여인도 용서해 주니까 도대체 어느 장단에 발을 맞춰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뭐라고 합니까? 빠른 시간 내에 답해 달라 해서 빠른 시간 내에 답변해 줬어요.

요셉은 착한 일 한 일이 없고 창녀는 나쁜 짓 한 일이 없습니다. 그게 답변 이예요. 왜냐 하면 요셉이 착한 일 했으면 요셉은 예수 믿을 수 없고 영생 얻어야 돼요. 안 죽어야 돼요. 죽는다는 것은 요셉이 백날 착한 일 해봐야 죄 값으로 죽은 거예요. 그리고 사마리아 여인이 나쁜 짓 했다고 하는데 그것을 나쁜 짓 한 그 자체에서 만약 용서받았다면 용서받고 난 뒤에는 역시 그 여자도 안 죽어야 돼요. 용서받고 죽었잖아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착한 일 나쁜 일 이것은 누가 회수해 가느냐 하면 예수님이 회수해 가는데 회수해서 십자가로 회수해 갑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나쁜 인간이기 때문에 착한 일 하면 마치 착한 일 했다고 ‘저는 당신과 관계할 수 없습니다.’ 아주 거부했다고 해서 그걸 착한 일이라고 여길 때에 그건 흠뻑 악마의 함정에 빠진 사람 이예요. ‘하나님이여, 나는 이런 유혹도 이겼습니다. 나 참 착하죠?’ 할 때 악마의 유혹에 걸려든 거예요. 그런 사람은 천상회의에 안 가도 돼요. 지상에서 계속 나쁜 일만 피하면 돼요.

제가 언젠가 그런 이야기 했죠. 그렇게 착하던 그 수녀도 버스 타고 시내 나가면서 남이 나쁜 짓 하는 거 그냥 방관한다고. 그 사람이 진짜 착할 거 같으면 나서서 악한 일을 대적해야 되는데, 주차 위반 다 해도 쓰레기 다 주워야 되는데, 그런데 아무 소리 않고 그냥 묵주만 하다가 자기 수녀원에 가서 착하다고 데모하고 ‘국정원 회개하라.’ 하고 데모하고.

모든 행위를 주님이 회수해 갑니다. 그렇다면 요셉의 행동은 요셉의 행동이 아니고 주님의 행동이고 그 창녀의 행동은 주님의 행동이었죠. ‘주님이 나쁜 짓을 한다 이 말입니까?’ 라 할 때 ‘주님이 나쁜 짓 했습니까?‘라고 생각하는 그 판단 자체가 선악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온 판단 이예요.

모든 것은 주님이 갖고 있던 속성에서 나온 겁니다. 나는 철저하게 악을 악으로 응징할 것이고 그게 심판주입니다. 심판주이시기 때문에만 구원주가 될 수 있는 거예요. 심판을 하지 않는 분은 구원할 자격도 없어요.

요한복음 5장에서 세상의 모든 것은 이제 아버지가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심판한다. 아버지께서 심판권을 내게 일임했다. 왜 그런 말을 다 하느냐 하면 사람들이 하나님도 모르면서 자꾸 하나님, 하나님 하니까 하나님이 심판하지 않고 내가 심판해 버리면 하나님 잘 믿고 지옥 가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뭣 때문에 나타났는지를, 그 관계를 모르기 때문에 지옥 가는 겁니다. 하나님을 줄 창 믿고 있으면 하나님 쪽에서 예수님이 구태여 등장해야 될 이유를 몰라요. 나 하나님 말씀 듣고 착하게 지냈는데, 저건 뭐야? 저 인간은 뭐야? 예수는 왜 나왔지? 나 지금 착한데, 잘 믿고 있는데 예수 왜 나왔지? 하나님이 쓸데없는 짓 했네. 어쨌든 나는 모르겠고 착한 일할 거야.‘ 이렇게 돼 버리면 모든 심판이 주님한테, 예수님한테 가버려서 이제는 예수님을 공격하지 않은 것은 곧 아버지를 공격 안 한 것으로 이미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천상회의에서. 이미 끝난 거예요.

지금 오늘 본문을 보면서 ‘목사님, 여기 예수님이 안 계시잖아요?’ 예수님이 안 계시죠. 그러나 예수님의 행위는 있습니다. 뭐냐 하면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가 인간의 대표로서 서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인간으로서  아버지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앞에 서 있어야 될 이유가 뭐냐 서 있어야 이 세상의 악은, 이 세상의 죄는,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가를 출처를 밝히는 그 회의에 취지가 살게 되는 겁니다. 아! 죄라는 것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가 아니라 모여야 알 수 있는 거예요. 누가 모여야? 여호와 계시고 앞에 사단 있고 그 앞에서 죄 용서 받는 여호수아가 있을 때 죄 지었다 하는 그것이 죄고, 죄 용서를 모르는 그게 바로 죄였고 악이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모르면, 성경을 모르면, 그 자체가 바로 죄가 되고, 그것이 사단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여기서 오늘 본문에서 사단과 여호와께서 생각을 같이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 절대로 인간은 구원을 넘봐서는 안 된다는 그 점에 대해서 생각이 같아요. 사단은 ‘인간이 이런 저런 죄를 지었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라는 쪽으로 넘봐서는 안 된다는 쪽으로 이야기하고, 하나님 쪽은 사단을 포함시켜서 죄가 뭐냐에 대해서 인간이 모르기 때문에 아직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어야 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참 어렵다. 그렇죠?

하나님 생각은 예수 그리스도가 빠진 상태에서는 구원될 수 없다는 것이 하나님 생각이고, 사단의 생각은 선한 하나님이라면 철저하게 죄를 끝까지 밀어붙여야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보시기도 예루살렘이 멸망당해야 된다면, 나 사단도 예루살렘이 멸망당해야 됩니다. 라는 것을 마땅히 하나님과 생각이 같아서 마땅히 저주받아야 됩니다. 하는 그것이 뭐가 나쁩니까? 하는 것이 사단의 생각 이예요. 하나님도 그 생각이고 나도 그 생각인데 같은 생각이잖아요? 하는 게 사단의 생각 이예요.

사단이 이거 말고 다른 생각이 욥기에 또 나옵니다. ‘이 세상에 의인은 없습니다.’라는 사단의 생각이 맞거든요. 이건 로마서 3장에 나오는 말씀과 같잖아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은 반드시 뭐를 끄집어 당기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병행해서 이야기하는 것이고, 사단은 뭐만 빼면 되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빼고 하면 사단의 말은 다 맞아요.

‘잠시만요. 예수님 빼고 가실게요.’ 사단이 이러는 거예요. 사단이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느 교회 가든 예수님의 십자가 빼고 이야기하면 전부 사단의 소굴 이예요. 아이구, 이런 단어가 오랜만에 쓰니까 기분이 좋네요. 십자가 빠지면 남는 게 뭐냐, ‘똑바로 합시다.’ 그것만 남아요. 요셉처럼. 성범죄 하지 말고 똑바로 합시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사마리아 여인이 용서 받고 그 다음부터 완벽했습니까? 아닙니다. 마르다 마리아 오빠 나사로가 완벽했어요?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 완벽했습니까? 완벽하게 술을 먹을 때도 완벽하게 기도하고 완벽하게 술 먹고 완벽하게 취했고 완벽하게 팬츠 벗었고 이랬습니까? 진짜 완벽하려면 술 먹고 취하면서도 자기 하체는 가릴 수 있는 정신은 있어야 되는데 이걸 발가벗고 있으니까 아들들이 와서 ‘얼레리 꼴레리’ 한 거예요. 과연 담요를 덮을 정도로 노아가 완벽했습니까? 아니에요. 담요는 계속 덮어줘야 돼요. 그 담요 지금도 주님한테 매일같이 내려옵니다. 우리 집에 담요 50장 쌓여 있어요. 늘 이렇게 덮어 줌으로써 구원받는 것이지, 예수님 빼놓고는 도대체 복음도 아니고 기독교도 아니에요.

그러나 모든 인간은 사단의 죄도 모르면서 죄를 언급하기 때문에 사단 그 자체에 속했습니다. ‘그래, 완벽해야 돼, 빛과 소금 역할 해야 돼, 이제는 예수 믿었으니까 제대로 성화 생활 해봐야 돼.’ 맨날 이런 식으로 나가니까 그 자체가 그리스도가 빠진 상태기 때문에 죄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이단들을 옆에 두는 것은 사람이 이단이 없으면 반성이 안 돼요. 인간은 그런 겁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세상 속에서 악마의 모습이 어디서 등장하는가? 아까 교회 이야기 했지만, 세상 사람들은 교회 안 가도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악마를 아느냐 하면 현상이 이래요. 지금의 모든 세상이 빨리빨리 움직여요. 빨리빨리 움직여서 못 따라 붙이면 이 주체가 찢어집니다. 찢어지면서 그 속에 있던 악마가 튀어나오는 거예요.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이렇게 조선시대 때는요, 조선시대 국민소득이 40불, 20불 되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때는 텃밭 가꿔서 사니까. 그때는 암 보험도 필요 없습니다. 암 걸리면 그냥 죽으면 그만이니까. 텃밭 가꿔서 양식 없으면 보리 고개는 나물 뜯어먹고 살고 그래도 이게 팔자다 하고 살았던 겁니다. 그런데 엄마가 집이 8억에다 보험 한 것 해서 10억이 있고 가만히 보니까 나는 밉보여서 모든 유산은 형한테 다 돌아갈 입장이다. 그렇다면 내가 이 시대에서 사람답게 살려면 10억 정도는 있어야 된다는 이 정보는 워낙 정보가 빨리 돌아가기 때문에 본인이 그걸 탐을 낼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걸 안 주니까 이 주체가 찢어지면서 그 안에 악마가 튀어나오는 겁니다.

옛날 배웠던 기술 가지고 이 공장 있다가 누가 스카웃 돼서 저 공장가면 저 공장에서 스카웃 해놓고 나중에 말하기를 ‘그 기술 요새 안 씁니다.’ 이러면 끝나는 거예요. 요즘 모든 기술이나 모든 방법들이 너무나 빨리 교체되기 때문에 헉헉 거리면서 그거 따라가기 바빠요. 의사들도 마찬가지에요. 옛날 70, 80 먹은 할아버지는 손을 벌벌 떨면서 청진기를 가슴에 대야 되는데 귀에다 대면서 눈이 안 보인다고 하면서 ‘약 한 첩이면 끝납니다.’ 이랬던 것이 요새는 외국에서 40억, 20억 기계 들여와서 오퍼레이션 작용해서 전화해서 설명해 준다고 단층촬영이 어떻고 그러는데 옛날식으로 해서는 돈 벌이가 안 돼요. 워낙 정보가 빨리 돌아가니까 그거 따라 잡기가 힘들어요. 노래방을 해도 그렇고 어떤 가게를 해도 계속해서 따라 붙이고 공부를 해야 되니까 거기서 ‘에그, 하나님이고 예수고 돈 벌이하려면 그거 따라 잡기 바빠서 따라 잡다 보니까 십자가도 성경도 안 보고 교회도 안 나오고 그거 빨리 따라 잡지 않으면 ’이래 가지고 밥 빌어먹고 살겠니? 신입이?‘ 밥 빌어먹고 살 수가 없는 시대에요. 이 시대가.

그러니 무슨 십자가를 언제 생각하고 스가랴 3장을 언제 봅니까? 그것이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이게 바로 새까맣게 타버린 죄로 뒤집어 쓴 예루살렘!

끝으로 여호수아한테 묻는데 ‘여호수아야, 니가 옷이 더럽구나.’ 더러울 수밖에 없죠. 밥 빌어먹고 살려 하면 더러울 수밖에 없는 ‘여호수아야‘ 이 여호수아는 우리의 대표입니다. 우리도 이 형편입니다. 예수가 돈 되는 건 아니고 교회도 돈 되는 게 아니에요. 빨리 따라잡아야 돼요. 빨리 남보다 한 발짝 앞서야 되고 새벽부터 일어나야 되고 하나님의 천상회의에 참석해 보니까 우리의 대표자가 예수님이고 여호수아에요. ’옷 벗겨라.‘ 지금 사단이 보고 있습니다. 사단은 지금 약이 올라 미치는 거예요. 분명히 자기 말이 맞거든요. 죄 진 거 맞잖아요. 마음속으로 간음한 거 맞거든요 저걸 고소해서 쳐 넣을 마음인데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택한, 택했다는 오늘아침에 이야기했죠. 예루살렘을 택한 내가 이야기한다. 사단이 똑바로 보는 앞에서 ’여호수아야 옷 벗기고 옷 갈아입어라.‘ 이야기함으로써 거기에 대해서 분개하고 있는 사단이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 악과 죄의 본부였습니다.

용서 받음으로 악이 등장한 거예요. 비로소 악은 정체를 드러냅니다. 딴 거는 다 받아들이되 십자가 피로서 거저 용서받은 것은 용납 못하겠다는 이 심보, 악마의 심보입니다.

끝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이 거저 옷 벗겨서 구원받은 이것을 우리가 돈 보다 더 시답지 않게 여기는 우리의 모습, 어느새 우리는 세상을 닮아 있습니다. 아침에도 했지만 우리는 매일 분노해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의 방해물로 오늘도 사용하시는 거예요. 우리 육신을 가지고. 나는 존재한다. 고로 방해한다. 우리는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용서 피보다 옷 갈아입는 그 사랑보다도 중앙 홀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보다도 눈앞에 현찰을 더 좋아하는 우리 모습,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 말씀으로 사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눈을 다시 위로 돌려서 하늘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를 우리가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