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욕망과 충동 130304 본문
[13 대구강의 4] - [피 90] - 욕망과 충동
13,03,04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267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하나님은, 사람들의 인식(신학)과 지혜(종교법이나 종교제도와 의식과 개별적 종교규칙)와 손으로 만든 작품(종교관련 건축물이나 예술작품)에 잡히지 않으시고 스스로 자꾸만 빠져나가는 분이시다. 그러면서도 잠시도 쉬지를 않고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을 사용하셔서 다가오시는 분이시다. 시간 틀과 공간 틀에 구애받지 않으시면서 친히 시간과 공간과 인간의 몸을 사용하신다. 여기서 인간이 염두에 둔 평화는 깨어진다. 사태가 악화되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 268페이지를 보자.
** 예를 들면, 마가복음 6장 49절에서 제자들은 물위를 걸어오는 한 유령을 만나게 된다. 그분이 곧 예수님이셨다. 제자들이 어두움 속에서 얼마나 놀랐는지 …!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가한 심적 폭력이다. 이런 폭력이 없이는, 진실이란 안일한 인간들의 평화로움에 막히게 된다.
(막 6:47)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막 6:48)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막 6:49) 제자들이 그의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지르니
(막 6:50) 저희가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더불어 말씀하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시고
◈ 예수님은 너~무 평범해요 !!
예수님께서 나타나셔도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데, 그것은 바로 평소에 같은 사람들에게 익숙해져있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외계인이 나타나면 어떻게 하는가? 당장에 경찰서나 119에 신고한다는 것이다. 물론 옛날에는 우리나라의 거리에 백인이나 흑인만 나타나도 아이들이 신기해서 따라가곤 했는데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이 신기해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너무 평범해서 믿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너무나도 평범하고 보통 사람인데, 그런데 그런 보통 사람에게서 보통 이상의 능력이 나온다는 것은 우리보고 믿지 말라는 것과 똑같은 소리라는 것이다.
그래도 옷차림도 조금은 요란하고, 또 수염을 기르던지 머리를 깎든지 해야, 그렇게 남다른 구석이 있어야만 "야, 저런 사람이라면 능력이 있겠다" 라고 하면서 따라다니던지 하겠는데, 그런데 예수님에게는 그런 특징들이 전혀 보이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긴가민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분명히 보통 사람인데 계속해서 기적과 같은 것을 나타내니, 결국 그런 기적들이 계속 이어지면 믿을 것이고, 기적이 뜨문뜨문 일어나든지 일어나지 않게 되면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제자들이 예수님을 3년 동안이나 따라다녀도, 물론 제자들에게 강한 인상은 심어주었지만, 하지만 그들의 인생 속에 파고 들어오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 내 것이 너무나도 강렬해서 !!
제가 강의초반에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교회에 30년, 40년을 다니면서 예수님에게 깊은 인상은 받았지만, 하지만 결국 예수님은 자기 바깥에 있지, 자기 안에는 예수님이 없는 상황에 놓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 것이 너무나 강렬해서, 자기 안에는 자기 것만 남아있고, 자기 것이 되지 않는 것은 모두 다 추방시켜버리는 본성들이 우리에게는 작용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자기 것보다도 더욱 더 센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성령' 이라는 것이다. 성령이 오게 되면, 그 성령은 '나'의 허락도 받지 않고 우리 속에 들어와서는, 그 다음부터 매일같이 '나' 자신과 싸움을 한다는 것이다. 즉 성령은 매일 우리에게 시비를 거는데, 하지만 그것은 전혀 우리가 원하지 않았던 인생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아침에 눈만 뜨면 하는 말이 "그것은 제가 원했던 하루일과가 아닙니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하루가 멀다하고 성령이 시비를 걸어서, 그 성령과 자기 자신이 싸움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성령이 뭐라고 하겠는가? "나는 니 것을 조지려고 왔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다시 정리를 해보면, '나'의 것이 이렇게 '내' 안에 있어버리면, 그런 '나'의 것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인 곳이 있는데, 여러분도 많이 들어보았는데, 그게 곧 지옥이라는 말이다. 즉 "지옥은 나의 것으로 사는 곳이다" 라는 말이다. 부자와 나사로의 경우에, 부자가 간 곳이 그렇다는 말이다. 부자가 나사로를 위하고, 그래서 "나사로야, 니가 옳았다" 라고 하는 게 아니라, 지옥에 가서 자기 생각만 한다는 것이다.
◈ 아저씨, 천국이 있어요?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는데, 즉 "어린아이를 시험케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연자 맷돌을 매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 라고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천국에 가는 어린아이를 무시하는 것은 무엇과도 똑같은고 하니, 어린아이의 목에 무거운 맷돌을 달아서 통영 앞바다에 빠트리게 되면, 통영이 너무 얕을 것 같으면 거제도 앞바다라고 해도 되는데, 제주도는 너무 넓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그 아이는 영원히 익사하게 되는데, 그러니 이것은 마치 천국에 대해서 묻는 어린아이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천국은 없어" 라고 내뱉는 짓과 같은데, 그것은 그 아이에게 돌을 매달아서 바다에 빠트리는 것과 같이 악랄한 짓이라는 것이다.
(마 18: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리라
어떤 범죄자가 아이를 그렇게 바다에 빠트리면 당연히 국민들의 공분을 유발하게 되는데, "무슨 저런 인간이 다 있노? 저런 인간에게는 재판도 과분해. 당장 쳐죽여야 돼" 라고 말이다. 그 정도로 분노를 일으키는 것 이상으로 하늘나라에서 분노를 일으키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바로 어린아이를 실족시키는 것인데, 즉 "천국은 없어" 라고 내뱉는 짓이 그렇다는 말이다.
천국이 없다는 것은 결국 무엇도 없다는 말인가? 지옥도 없다는 것인데, 만약에 지옥이 진짜로 있다고 하면, 우리가 궁금해해야 하는데, "그 지옥에 누가 갑니까?" 라고 말이다. 바로 그런 궁금증에 대한 해답을 지금 말씀드리고자 하는데, 즉 "내 안에 나의 것밖에 없는 자가 지옥에 간다" 라는 것이다.
그러면 천국은 누가 가는가? '나'의 것만 있어야 되는 곳에 성령님이 들어가셔서, 그러한 '나'의 것을 예수님의 것으로 전환시키는 작업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나'의 것이 평소에 놀던 버릇이 있어서 그냥 가만히 있겠는가? 그것이 아니라, "내 인생은 내 것입니다.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합니다. 내 인생은 이렇게 되어야 나는 만족하고 행복합니다. 그런데 당신이 뭐기에 나만이 즐기는 이 행복을 가로막습니까?" 라고 발작을 하고 발악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인생을 산다고 하면 구원을 받은 자인데, 얼마나 복을 받은 인생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 인생이 되지를 않으니, 어떤 아이가 "아저씨, 지옥이 있어요? 천국이 있어요?" 라고 하면, "그런 것은 없는 거야" 라고, 쉽게 쉽게 나가버린다는 말이다. 지상에서는 그것이 하나의 깨어있는 삶인지 몰라도, 하늘나라에서는 천사들의 공통된 분노, 즉 공분을 일으키는 짓이 된다는 것이다.
◈ 예수님이 왜 유령인가?
다시 말해서, "구원자인 메시야가 왔을 때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가?" 라는 것에 대해서, 여기 교재 271페이지를 보니, "제자들은 물위를 걸어오는 한 유령을 만나게 된다. 그분이 곧 예수님이셨다. 제자들이 어두움 속에서 얼마나 놀랐는지…!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가한 심적 폭력이다" 라고 하는데, 그야말로 제자들이 그 얼마나 놀랐겠느냐는 말이다. 즉 "아이쿠, 간이 다 떨어질 뻔했다" 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유령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진짜의 모습을 드러내게 되면,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무자비한 분이 되는데, 일체의 자비도 아까워하시는 말이다. 즉 전혀 자비를 허용하지 않는 분으로서 나타나신다는 것이다.
사람이 누구에게 사랑을 받는 것이 이상한 것인가? 아니면 갑자기 자기를 보고 욕하는 것이 이상한 것인가? 욕을 하는 것이 이상한데, 그만큼 우리는 평소에 누구든지 자기를 만나면 사랑해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와 아무런 연고도 없는데 욕을 하고 저주하면 당황하게 되는데, 하나님은 그런 당황 이상의 당황을 제공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평소에 무엇으로 무장이 되어있기 때문인가? 나의 것으로 무장되어있어서 그렇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거의 기적을 일으키셨는데, 그런 기적들의 종류를 보게 되면 주위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드셨다는 것이다.
◈ 나는 무엇을 빠트리고 살았나?
여기서 제가 질문을 하나 던지겠는데, "사람이 죽는 것이 이상한 것인가? 아니면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이 이상한 것인가?" 라는 것인데, 질문이 너무나 유치한가요? 우리는 당연히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이 이상하다는 말이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어느 소녀가 병이 들어서 죽었는데, 그래서 유대인들이 울고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죽은 것이 아니고 잔다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을 다 내어보내고, '달리다굼' 이라고, 즉 "소녀야, 일어나라" 라는 의미인데, 물론 유족들은 엄청 기뻐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반응은 무엇이겠는가? "뭐지 이게? 내가 무엇을 빠트리고 살았나?"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막 5: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훤화함과 사람들의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막 5:39) 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막 5:40) 저희가 비웃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막 5: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막 5: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제가 어제 오전설교를 하면서, 마지막에 "젊은 사람들의 문제점이 무엇인고 하니, 잃어버리고 있다" 라고 했는데, 즉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빠트리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은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빠트린 것을 하나님께서 주워서 넣어주시는 것인데, 우리가 "내 인생은 나의 것이다" 라고 할 때는 무엇인가 빠트리고 잃어버린 것이 있다는 말이다.
◈ 구체적 인물, 33살 먹은 예수님을 위해서 !!
하지만 우리 인생은 무엇인가? 우리 인생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서, 추상적인 하나님이 아니고, 구체적인 인물인 예수님을 위해서, 33살을 먹은 예수님을 위해서 우리 인생이 있다는 것인데, 그것을 곧 우리가 빠트린 것이란 말이다. 바로 그것을 집어넣어 주신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놀라게 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인생의 자기 것으로 여기고,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검증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라고 여기는데, 그렇게 매일같이 우리는 자기의 것으로 전환하면서 살아간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나'의 것이 아니라, 자기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오히려 '나'의 것을 당황스럽게 만드는, '나'의 것으로 있다는 것을 가지고, "니는 니 것만 있으면 지옥에 가" 라고 하면서, 나무라는 것도 아니고 꾸중하는 것도 아니고,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 그런 이야기가 들어올 때, 우리는 당황스러운면서도 주님과 동행하는, 즉 자기 속에 주님의 것이 확산되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 신앙이란?
그런 의미에서 신앙은 간단한데, 우리가 빠트린 것은, 물론 그렇게 빠트린 이유는 '나'의 것밖에 없기 때문에 빠트렸는데, 그렇게 '나'의 것으로만 만족해하고 있는데, 그런 빠트린 것이 들어오면서 그것이 주인 노릇을 하고 우리는 밀려나가는데, 그렇게 말려나가면서 울고불고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울고불고 짜증내고 괴롭히는 이유가 다 무엇인고 하니, 자기의 것이 원대로 되지 않으니 울고불고 한다는 것이다. 전부가 다 그렇다는 말이다. 자기 것 때문에 말이다. 주식을 해도 자기 주식만 내리막길이고, 응원을 해도 자기가 응원하는 팀은 지고 말이다. 그렇게 자기의 것이라고 여긴 것이 부흥발전하지 않는데, 그래서 전부가 울고불고 한다는 것이다.
◈ 지옥에는 카렌다가 없어 !!
그러니 지옥에 가기 전에 실컷 울라는 것인데, 이미 지옥에 가서는 물이 없다고 아무리 찡찡거려도 천국에서 건너올 천사는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천사가 나타날 때 고마운 줄을 알아야 하는데, 아직 죽기 전에 천사가 나타나고 말씀이 있을 때 감사하라는 말이다. 나중에 지옥에 가서는, 그런 폐쇄된 공간에서 이미 안 된다는 것이다.
지옥에는 카렌다가 없는데, 제가 여러 번 강조했는데 말이다. 즉 "그래, 3월은 봄이었지" 라고 할 수가 없는데, 유황불이 훨훨 타고 있는데 봄은 무슨 봄이냐는 것이다. 봄이 있을 때 봄을 즐겨야 하는데, 등산을 가든지, 아니면 벚꽃을 보러가든지 말이다. 그러니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만끽하고 있는 것을 천만다행으로 여겨야 하는데, 언제 죽을지 모르니 말이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세월아, 네월아, 갈 때까지 가보자" 라고 하는데, 하지만 이미 우리가 그 어느 자리에 가는지, 그것은 확정되어있다는 것이다. 대학시험을 칠 때, 그것을 '수시' 라고 합니까? 수능을 치기 전에 미리 내신성적으로 미리 합격이 결정되는데 말이다. 그러니 자기는 그냥 취미생활을 즐기면 된다는 것이다.
◈ 다시, '내 것은 없어' !!
아무튼 제자들이 얼마나 놀랐는지 모르는데,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기들은 기존의 인간들의 세계관 속에 있는데, 주님이 그렇게 나오니 말이다. 하지만 주님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주님은 하늘나라에서 오셨기 때문에, 하늘에서 오신 분은 지상에 있는 자들과는 대화라든지 모든 것이 맞지 않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맞지 않는 것을 고치고 개선하면서 만나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울고불고 하는 것이 바로, 주님이 우리를 고치고 있는 작업 때문이라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것이 없는데, 자꾸만 자기 것이라고 우기니 울고불고 한다는 것이다. 자기 것이 없고, 주님이 손을 대겠다고 하는데, 하지만 우리는 손을 대지 말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평소에 우리에게 끊임없이 손을 대시고 계시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하나님은 기존의 평화를 걷어내고 그 자리에 낯선 평화를 넣어주려고 하신다. 이것이 바로 피로 인한 화목이다.
(롬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 주님의 것으로 화목하겠다 !!
우리 인간은 "나의 것은 나의 것으로, 너의 것은 너의 것으로", 그렇게 평화롭게 공존하려고 하는데, 그런 화목을 생각했는데, 하지만 하나님의 화목은 무엇인가? "나의 것과 너의 것을 다 묵살해버리고, 주님의 것으로 화목하겠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제가 엄청나고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하겠는데, 성령을 받은 자들끼리, 쉽게 말해서 십자가 마을 사람들끼리 이야기할 때, 이렇게 나오면 웃어야 하는데, 분위기가 영 아닌데 말이다(ㅋㅋ). 그렇게 "나의 것과 너의 것을 생각하지 말고,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 맞지요?" 라고, 그러한 전제를 깔고 하는 대화의 경우라는 말이다. 그것이 십자가 마을 사람들끼리 나누는 대화였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나'의 것과 '너'의 것이 전제되어있는 대화라고 하면 겁이 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가 이런 말을 하면 상대방이 "너는 왜 너의 것으로 나의 것을 치는데? 너의 것만 잘났고 나의 것은 못났다고 공격하는데?" 라고 오해할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 교재 270페이지에 들어가기 이전에 미리 정리할 것이 있는데, "성령을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그런 능력이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 있어야 한다" 라는 것이다. 주께서 성령을 괜히 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구분하는 능력을 발휘하는 재미로 !!
이것은 제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요한일서에 다 나오는데, "영을 받은 사람들은 알고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우리의 말을 모른다" 라고 말이다. 그것이 요한일서 5장(?)에 다 나오는 이야기인데, 제가 말하면 만들어낸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ㅋㅋ).
(요일 4:6)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그렇게 성령을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인데, 그것을 저는 "그런 능력이 있다" 라는 것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즉 "이러한 능력이 여러분에게 있지요? 그러면 되었습니다" 라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능력을 발휘하는 재미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능력이 있는데, 그것은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전제로 하고 인생을 한번 살아보자는 말이다. 즉 성령을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을 늘 구분하면서 살아가자는 것이다. 그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하나의 원리로서 보자는 말이다.
그렇게 될 때, 여기서 마태복음에 나오는 말씀을 살펴보자.
(마 13:24)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마 13: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마 13: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마 13:27)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마 13:28)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마 13:29)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마 13: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 잘 때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
여기 25절을 보면,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라고 되어있는데, 즉 사람들이 일할 때 원수가 온 것이 아니라 잠을 잘 때 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잠을 주시는 것은, "인생은 니가 이끄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끈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잠을 주신다는 말이다. 즉 "그 날은 그 날로서 족하다" 라는 의미인데, 인생의 주관자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잠을 잘 때, 그렇게 우리가 인식이 없을 때 주님께서는 무슨 일을 하시는가? 우리는 더 이상 자기 인생에 자기가 관여할 수 없는 입장에서, 그런 입장에서 우리 자신의 인생이 있다는 말이다. 즉 "내 인생은 전부를 다 주께서 관여하셔서 내 인생이 된 것이지, 나 자신이 관여해서 된 것이 아니다" 라는 말이다.
아무튼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고, 그래서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인다는 것이다. 이렇게 가라지도 보인다는 것은, 그 밭에 가라지도 있지만 역시 무엇도 있다는 말인가? 알곡도 함께 있다는 것이다.
◈ 왜 가라지가 있고, 또한 알곡이 있는가?
그렇다면 이렇게 알곡과 가라지가 같이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즐거운 일인가? 아니면 슬픈 일인가? 아니면 두려운 일인가? 알곡과 가라지가 다 함께 섞여있다는 것이 말이다. 그것이 기쁘고 즐거운가? 아니면 황당하고 무서운가? 아니면 그냥 무덤덤한가? 그것을 바라보는 여러분의 느낌이 어떠하냐는 것이다.
저는 그냥 놀라울 뿐인데, 만약에 이 세상이 제가 원하는 세상이라고 한다면 아예 가라지가 없도록 하지 싶은데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집안에 청소를 했는데, 돌아서서 보니 뭔가 떨어져있으면 청소를 한 사람은 기분이 더럽게 나쁘다는 것이다. 평소에 다들 집안 청소를 하지 않습니까? 저만 합니까? 장로님은 청소를 늘 하십니까? 비밀입니까? (ㅋㅋ)
자기가 청소를 했는데, 그 뒤에 누군가가 다시 휴지를 버리든지 해서 어질어버리면 기분이 굉장히 더러운데, 그러니 우리 생각에는 가라지가 아예 없어야 한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가라지가 있다는 것은, 이 세상은 신비롭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가 임의로 만들고 이끌어 가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 신비로움 말이다.
그렇게 가라지가 있으면 그 다음부터 우리의 할 일은 무엇인가? 무엇이 가라지이고, 무엇이 알곡인지, 그것을 알아차리는 즐거움이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을 볼 때, "나는 내 인생을 살고, 너는 니 인생을 살아라" 라고 하면 가라지라는 것이 없는데, 그냥 똑같은 질의 인생들이 70억이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 하나님의 무자비성 !!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성령을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는 능력이라든지, 가라지와 알곡을 구분하는, 이런 이야기들이 나오게 되면 그때부터는 우리의 할 일이 생긴다는 것이다. 즉 "가라지일까? 알곡일까?" 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우선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원수가 와서 몰래 가라지를 덧뿌리고 간 것을 하나님께서 용납하셨느냐는 것인데, 그렇게 "하나님께서 용납하신 이유가 무엇이지?" 라는 생각에, 즉 왜 용납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가라지를 용납하신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무자비성'에 있는데, 그것을 제가 조금 전에 '심적 폭력' 이라고 했는데, 하나님은 용납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죄에 대해서는 일체의 봐주는 것이 없는, 그런 무자비함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 가라지라는 게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가라지를 보고 자기가 화를 낼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 가라지가 된 것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화를 퍼붓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이 현재 가라지로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 선생님의 무자비성 ??
제가 학교에 교사로 있을 때 보면 학급에 그런 아이가 한 두 명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좀 미안한 마음도 드는데, 권사님은 어떠했는지 모르겠는데 말이다. 선생님이 유난히 미워하는 아이가 있다는 것이다. 누가 봐도 그런 티가 나는데, 얼마나 불쌍한지 모른다는 것이다. 평소에는 매우 점잖은 선생님인데, 이상하게도 그 아이만 보면 집중적으로 패든지 해서 몰아 부친다는 것이다.
선생님과 그 아이가 개인적으로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난히 미움을 받는 아이들이 학급에 한 두 명씩은 있었다는 것이다. 덜렁덜렁 거리면서 노는 아이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약한 아이를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약한 자는 어디를 가도 미움을 받는데, 왜 그런고 하니, 선생님의 입장에서는 아이들을 일률적으로 다루어야 하는데, 그런데 자꾸만 처지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너무 까불고 설치는 아이들은 지나쳐서 그런 것이니, 그냥 두어도 자립할 수 있으니 괜찮은데, 그런데 체육시간에 100미터 달리기를 하면, 달리는 것인지 걷는 것인지 구분도 되지 않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100미터를 20초안에 달려야 하는데, 목적지에 통과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말이다. 그런데 어떤 아이들은 그런 선생님의 마음도 모르고, 선생님이 시간을 재고 있는데 달리는 게 아니라 걷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선생님에게 일단 잘못 보이면 그 다음부터는 용납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 너는 예수님을 믿지마 !!
바로 그렇게 이유도 없이(?) 미움을 받는 사람, 그 사람이 곧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지금 그 사람이 나빠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런 식으로 보면 우리도 나쁘기는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게 밉상을 받아서 그렇다는 말이다. 밉상을 받았기 때문에, "니는 죽어도 예수님을 믿지마!" 라고 해서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무자비성인데, 하나님은 결코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여기 교재 207페이지에 보면 "하나님은 기존의 평화를 걷어내고 그 자리에 낯선 평화를 넣어주려고 하신다" 라고 되어있는데, 즉 거짓 평화를, 거짓 화목을 제거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다.
인간의 평화라고 하는 것은, "너의 것과 나의 것이 있으면 공존한다" 라는 것인데, 즉 '서로 침범하지 않기' 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거짓 평화가 아니라, "너의 것과 나의 것을 다 없애버리고 주의 것으로 평화하자" 라는 것인데, 그것이 곧 '화목' 이라는 말이다. 성경에 화목이란 표현이 여러 번 나오는데, 그것이 참 어렵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우리가 평소에 화목을 원하고 있기 때문에 어렵다는 말이다. 우리가 원하는 평화는, "내 것을 손대지 말고 그냥 가만히 지켜보소서. 그러면 저는 마음껏 평화를 만끽하겠습니다" 라고 말이다. 사람들이 그런 잘못된 평화를 기대하기 때문에 진짜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가 어렵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 마을 사람들만큼은 제발 "니 것과 내 것이 없이 다 주의 것입니다" 라는 입장에서 서로 마음이 통하기를 바라는데, 그렇게 할 수 있지요?
이제 교재 270페이지를 보자.
** 인간들은 자기에게 날아와서 들어 붙는 체험들을 '법' 이라는 이름으로 정돈하고 기억 속에서 보관한다.
◈ '믿음으로 의롭다' 라는 원리는?
여기에 보면 '법'이 나오는데, 무엇을 위해서 법이 이어졌는고 하니, 물론 다 알고 있겠지만, 다시금 정리하는 의미에서 반복해보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있기 이전에 원리부터 먼저 챙겼다는 것이다. 즉 "믿음으로 의롭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믿음으로 의인이 된다는 것인데, 그런데 그 믿음의 내용은 아직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말이다. 왜냐하면, 아직 국가가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믿음의 내용이 주어지게 되는데, 그것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졌고 말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아브라함의 자손을 믿음으로서 의인이 된다" 라는 것이다. 그렇게 아브라함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다는 것을 믿음으로서 의인이 되니까, 아브라함이 자기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의인이 되는 것, 그것을 얻을 수가 있다는 말이다. (녹취자 - 자손을 믿는 겁니까? 아니면 자손들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진다는 것을 믿는 겁니까?)
(창 15: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창 15: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 인간이 어떻게 미래를 믿을 수 있는가?
그렇게 아브라함이 자기 자손을 믿음으로 의인이 된다고 하면, 그 믿음의 내용을 아브라함의 자손이 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이 우리에게 어려운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믿는다고 하는 것은 항상 과거의 일을 가지고 가능한 것인데, 즉 과거에 일어난 일을 보고서 믿을만하면 믿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브라함에게 과거인가? 미래인가? 분명히 미래인데, 그래서 이게 어렵다는 말이다. 과거는 확실하지만, 그러나 미래는 확실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게 불확실한 미래이니까, 그런 미래를 믿으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된다는 것이다. 불확실한데 어떻게 믿을 수가 있느냐는 말이다.
◈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오늘 성경말씀을 자주 찾는데, 모인 사람이 적어서 그런지 몰라도 말이다. 요한복음 20장 29절을 보면,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라는 것이 과연 칭찬인가? 아니면 욕인가? 결단코 잘했다는 것이 아니라, 진실에 접근했다고 볼 수 없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요 20: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 20: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그러면 진실은 무엇인고 하니, 보고 믿는 것은 진실이 아닌데, 그러면 도마는 기분이 나빠서 이야기하지 싶은데, 물론 지금 여기서는 기분이 나쁜 게 아닌데, 아무튼 "봐서 믿지, 보지도 않고 어떻게 믿습니까?" 라고 할 때,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믿음으로 의인이 된다고 하는 원칙은, 그것이 하박국서에도 나오는데 말이다.
그것은 바로 보고 믿는 자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이 세상에서 진행된다는 것이다. 참, 그것이 아니라, 보고도 믿지 못하게 하는 일을 통해서 진행된다는 것이다. 이 대목이 중요해서 말에 실수가 있으면 안 되는데 말이다. 즉 보고도 믿지 못하는 쪽으로, 그렇게 믿음으로 의인이 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예수님이 나타나셨는데, 그래서 예수님을 떠밀고 하는데, 요즘 같으면 각 방송국에서 중계를 하지 싶은데, 그렇게 예수님을 본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라는 말이다. 제자들만 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았는데, 하지만 그렇게 예수님을 보면 볼수록 화만 나는데 어떻게 하느냐는 말이다. 왜 그리 평범하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뭔가 민중들이 원하는, 즉 자기들을 로마에서 탈출을 시켜주든지, 아니면 하늘에서 만나와 같은 것이 떨어지든지, 그렇게 눈에 보이는 뭔가를 보여달라는 말이다. (녹취자 - 지금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나타나셨는데, 그러니 그리 평범한 상황은 아니지 싶은데요?)
그런데 기껏 이야기하는 것은 자기 몸뚱아리와 말밖에는 없으니, 그러니 특별한 존재로서 믿으려고 하니, 그 재료가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도 예수님을 찾아와서는, "우리가 당신을 믿어줄 테니, 당신은 우리가 믿을 만한 기적을 지금 보여달라"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때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는가? "내가 너거들에게 보여줄 기적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 라고 하셨는데, 다른 곳에서는 병도 고치고 했는데, 정작 기적을 보여달라고 하니 그런 소리를 하신다는 것이다.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고 말이다.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진리가 무엇인가?" 라고 하니, 예수님은 말씀을 하지 않으셨는데, 개에게 진주를 던져줄 필요가 없다는 식인데, 예수님은 그런 분이라는 것이다.
(마 12:3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 다시, '인간이 미래를 믿는다' 라는 것은?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인이 된다" 라고 할 때,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질 자손의 약속을 믿는 것인데, 그런데 그 자손은 과거에서 탐색할 수 있는, 그렇게 참고도서를 가지고 공부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과거의 것이 아니기에 아무런 자료가 없는데 어떻게 공부를 하느냐는 말이다. 미래에 그렇게 되어질 줄로 믿고, 그래서 믿는다는 것이다.
물로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 그러면 우리도 미래에 될 줄로 믿고 믿으면 되지 않습니까?" 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하지만 그러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미래에 그렇게 될 줄로 믿는다고 하면, 그것은 과거를 믿는 것과 똑같은 원칙이 적용되기 때문에, 그것은 미래를 믿는다고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냥 기다려보는 것이지 믿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미래에 어떻게 되겠지?" 라고 하는 것은 기다리는 것이고, 과거의 일을 믿듯이 그렇게 미래를 믿어야, 그게 미래를 믿는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인간이 생각하는 미래는 '과거 + 알파'가 아닌가?
그것이 아니고 우리가 과거를 생각하듯이 미래를 믿게 되면, 다음과 같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 사람의 시간이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사람의 미래는 그냥 헛방으로 상상해서 믿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과거에 한 것 중에서 플러스 알파가 있는데, 즉 결핍된 것을 보충해서, 그것을 상상된 미래로 여기고, 그것을 믿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사람은 미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어디서부터 출발하는가? 과거에서 출발해서, 즉 "아하, 이것은 내가 모자랐어. 이것은 내가 잘해야지" 라고 말이다. 그렇게 과거에서 출발한 미래이기 때문에, 그것은 미래를 믿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하던 버릇대로 과거를 믿는데, 그런 과거의 끝자락에 들어 붙어있는 미래를 믿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미래는 인간의 희망이고 소망일 뿐이지, 결코 믿음의 내용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여기에 대해서 "그러면 어떻게 하라고? 인간이 미래를 믿는다는 것은, 미래에 대해서 희망을 갖는 것밖에 없는데, 그런 희망조차도 믿음이 아니라고 하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 하나님께서 살리신다 !!
어제 오전설교의 핵심은 그것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살리신다" 라고 말이다. 하나님께서 살려주지 않으면 아무도 구원을 받지 못하는데, 하나님께서 살려주지 않으면 인간은 자기의 역사를 믿는데, 자기 가정, 자기 교회 등등, 그런 자기 역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살리신다는 것은, 그냥 살려주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죄를 지적하신다는 것이다. 그게 아브라함 언약의 핵심인데, 하나님께서 의인이 되게 해서 말이다. 즉 믿음이란 것은 아브라함의 행위를 죄로 바꾸어나가면서, 행위로는 죄인밖에 되지 않는데, 그 행위를 죄인이 되게 만드는 그 작용을 믿음으로서, 즉 그 작용이 장차 올 메시야가 한 작용임을 믿음으로서, 그래서 아브라함이 의인이 된다는 것이다.
◈ 어디, 지옥에 가고 싶어?
그래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책망을 받는데, 강의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성령이 왔다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나'의 것밖에 없어야 되는데, 즉 '나'의 것에 의해서 '나'의 역사를 만들려고 하는데, 엉뚱하게도 주님이 나서서 '나'의 뜻대로 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짜증을 내는데, 즉 "하나님, 이게 뭡니까? 왜 나의 기도를 받아주지 않습니까?" 라고 하는데, 그러면 하나님은 "니, 지옥에 가고 싶어? 자기 것만 있는 놈들은 다 지옥에 갔어" 라고 나오신다는 것이다. 다만 자기 것이 주님의 것으로 바뀐 자들만 어디로 가는고 하니, 그런 자들만 천국에 간다는 말이다.
그러니 천국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천국은 만들어져 있는데, 그 만들어진 원리가 무엇인고 하니, 의인들만 갈 수 있는 곳이 천국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의인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죄인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제 오전설교에서 "아담은 두 종류이다" 라고 했는데, 첫째 아담이 있고, 또 마지막 아담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두 종류의 아담으로 만들었는고 하니, 첫째 아담은 역사를 주장하는데, 둘째 아담, 즉 마지막 아담은 거기에 개입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닌데,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아들의 나라인데, 그래서 장차 오실 예수님의 속성이 우리 인생에 개입되는데, 그것이 바로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시는데, 우리는 그냥 그렇다고 하지 말고, 그렇게 없어지고 죽어야 될 이유를 알아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의 죄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
사도바울이 자기가 바울이 되기 이전에는 하나님을 잘 믿는 의인이라고 여겼는데, 그런데 그런 의는 무엇인가? 로마서 10장 3절에 보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힘써 자기 의를 내세우기 위함이다" 라고 하는데, 바로 그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그것을 알게 되니까, 그의 모든 편지에서 이것이 바로 핵심 포인트였다는 말이다.
(롬 10: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롬 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다시 말해서, "복음은 예수님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의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의가 없으면, 즉 나의 의가 있으면 안 되는데, 즉 하나님의 의가 없으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것이 곧 사도바울이 알게 된 핵심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그것은 곧 예수님의 의니 믿어라" 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가 십자가라는 것인데, 즉 "나는 너 때문에 죽었다" 라고 하는 '십자가' 라는 말이다. 그렇게 "너 때문에 내가 죽을 정도로 너는 죄인이다" 라는 것인데, 즉 "죄가 없는 예수님께서 너 때문에 죽었다" 라고, 그렇게 바꿔치기를 한 것인데, 아니 바꿔치기를 당한 것이란 말이다.
어제 오전설교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결국 소모품입니다" 라고 했는데, 즉 우리는 예수님의 자신의 것을 만들기 위한 소모품이란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소모품으로 쓰여진 것에 대해서 감사할 뿐인데, 그러니 결국 감사만 남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우리는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 이제 '법' 이야기를 해보면 !!
이제 '법' 이야기를 해보면, 이렇게 아브라함 때에 믿음으로 의인이 되게 하는 원리가 무엇인고 하니, 지금 아브라함이 행한 그 모든 것을 경건치 않고 일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는 장차 오실 예수님의 작용,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밖에 없는 이삭을 사랑하니까, 그 이삭을 빼앗아감으로서 아브라함의 이삭에 대한 모든 사랑을 무효로 돌려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어제 설교내용을 기억하는지 모르겠는데, "아브라함의 자식은 이삭이 아니었다" 라는 말이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진짜 자식은 어디에 있는고 하니, 이삭을 잡아죽일 때 수풀에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수양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의 인생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주님께서 우리 인생을 잡아 족치는 것은, 그렇게 족치는 현장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족친다는 말이다. 그것을 아는 자들이 곧 성령을 받은 자들이고, 그런 자들끼리 알곡으로서 대화가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작업을 위해서 아브라함은 개인적으로는, 아브라함이 행하는 모든 것은 죄로, 즉 경건치 않은 것으로 드러나고, 주께서 빼앗아가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즉 "모든 것을 빼앗아 가니 참 잘했습니다" 라고 하는 것을 믿음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것이고, 그게 집단적으로 사회를 구성하고 국가를 구성할 때에 나타나는 죄를 보면, 그게 430년 이후에 하나님께서 율법을, 즉 법을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지금 제가 이 '법'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교재 270페이지에 나오는 말이다. 그렇게 되니 하나님에게 죄를 지었다는 것이 이 사회에서 보다 더 구체화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하나님에게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너에게 짓는 것이다" 라고 하는, 즉 "하나님, 저는 하나님에게는 원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좋아하는데, 그런데 저 인간은 미워합니다" 라고 할 때는, 그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는 법이 마치 케이블처럼 깔려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결국 형제만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를 미워하지 말라" 라는 법이 거기에 도달하게 되면, 그것은 누구를 건드린다는 말인가?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야고보서 2장 10절과 11절을 보자.
(약 2: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약 2:11)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 율법은 문어발 !!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율법은 단독적으로 딱 딱 끊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율법이 있는 곳에 누가 가 계신다는 말인가? 하나님이 가서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간음은 하지 않아도 살인을 하게 되면, 즉 "살인을 하면 안 돼" 라고 하는 그 자리에 피해자의 입장에 서 있는 하나님께서 곧 "간음을 하지 말라" 라는 자리에 서 있는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종의 문어발식이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에버랜드 사장은 이리 나와 봐. 나는 에버랜드 사장을 미워해" 라고 삼성전자 직원이 이야기하면, 누가 그것을 싫어하겠는가? 삼성전자 사장이 화를 낸다는 것이다. 둘 다 같은 계열사이니 말이다. 그렇게 문어발식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지숙 집사님은 참 좋은데, 현숙 집사님은 싫어요" 라고 한다면, 그것을 듣는 부모는 어떻게 되겠는가? 다 같은 자기 자식인데 말이다. 그러니 "어디 내 자식을 욕하노? 내 자식이 어떻게 했다고 말이야" 라고, 당장에 그렇게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법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마치 법이 실핏줄처럼 깔려있으니, 우리가 어디를 건드려도 다 건드리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십계명 정도가 아니라, 그 법이 더 많아져서, 심지어는 어떻게 되는고 하니, 야고보서의 말씀처럼 "니는 안개다" 라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어떤 도시에 가서 장사를 해서 이익을 보려고 하는 것도 죄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온 천지가 지뢰밭인데, 도무지 피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엇이 의로운 곳이 있느냐는 것이다. 의인이 될 구석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마음속으로 탐을 낸 것도 죄가 되는데 말이다. 그러니 지옥에 가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법에 얽매여 있기에 지옥에 간다는 것이다. 즉 "율법을 주신 것은 저주 아래에 있게 함이라" 라는 것이다.
이렇게 율법은 끝에 저주가 달려있어서, 율법은 건드리기만 하면 저주가 덮치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430년 이후에 율법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전부가 다 저주 아래에 있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래서 율법을 주셨다는 말이다.
(갈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
(갈 3: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이렇게 율법을 준 것은 저주 아래에 있도록 하기 위함인데, 그런데 하나님의 자기 택한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죄 안에 갇혀있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라는 것이다. 즉 죄를 지었을 때만 저주 아래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죄에 갇혀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구원받게 될 민족에게 주셨다는 말이다.
◈ 무지 어려운 '결핍'과 '과잉' !!
지금부터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을 할텐데,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잠시 참고 지나가면 되는데, 인터넷에서 다시 들으면 이해가 되도록 노력해보겠는데 말이다. 우리 인간에게는 두 가지 현상이 있는데, 즉 '결핍'과 '과잉'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결핍과 과잉이 있는데, 여기서 과잉은 너무 많이 주는 것인데, 그게 곧 '충동' 이라는 말이다.
충동, 즉 가만히 있어도 누군가가 마구 떠미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마구 생겨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충동은 결국 우리를 유혹하는 것인데, 그런데 이 유혹은 유혹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유인으로 이어지는데, 이 유인은 어느 특정 지점을 향해서 나아가는데 있어서, 거기서 빠져 나오지 못하도록 살살 꼬드기는 것인데, 그렇게 할 때 그냥 하면 효과가 없으니 유혹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대표적인 유혹이 바로 술, 담배, 도박, 과도한 취미생활, 스포츠광, 기도광, 전도광 등등, 이런 것들이 다 유혹이라는 말이다. 과잉인데, 너무나 할 것이 많고 넘친다는 것이다. 이미 이것은, 이것을 다른 말로 '있음' 이라고 하는데, 있어도 너~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잉의 충동, 즉 술, 담배, 도박, 부동산 투기, 젊은 아이들의 과도한 드럼 치기, 그리고 폭주족 등이 그렇다는 말이다. 오토바이로 폭주하는 아이들도 있지만, 고급 스포츠카로 대로에서 광란의 질주를 하는 경우도 있고 말이다. 그리고 나이트에 가서 밤새도록 춤추고 노는 것, 그러니 이런 것은 항상 과잉인데, 있어도 너~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이런 과잉을 즐기는 유혹도 있지만, 결핍도 느낀다는 것이다. 이런 결핍은 충동보다는 욕망에 해당되는데, 욕망은 항상 결핍을 느끼게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러와도 어떻게 하는가? 물을 길러온 충동이 있는데, 그런데 실제로는 필요한 물은 또 길러와야 되고, 또 길러와야 한다는 것이다.
◈ 과잉으로 결핍을 채우려는 인간들 !!
그러니 과잉이 있게 되면 항상 결핍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렇게 결핍을 느끼는 것을 공백, 혹은 구멍이라고도 한다는 말이다. 제가 어렵다고 미리 경고를 했는데, 조금만 참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은 어디에 해당되는가? 있음이 아니라 없음인데, 이런 없음에 대해서 인간은 가만히 있지 않고 많이 있는 과잉을 가지고 이 없음을 땜질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를 너무 많이 한다" 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뭔가 허전함을 무엇으로 때운다는 말인가? 자기에게 많이 있는 것을 가지고 그 허전함을 때운다는 것이다. 만약에 자기에게 많이 있는 것이 기도라고 하면, 그런 기도를 많이 해서 자기 속에 있는 허전함을 때우려고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기도를 했다고 해서 그 허전함이 사라지는가? "이틀만 더 했으면 37일이 되는데, 그러면 기록을 세운데, 아깝다" 라고 하면서, 그렇게 사람은 뭔가 하면 할수록, 즉 일단 움직였다고 하면 그 현장에서 결핍과 허전함을 느끼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 앉으나 서나 자식 생각 !!
특히 나이가 70줄에 접어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무슨 걱정인가? 자식 걱정에 모든 시간을 다 보내게 되는데, 그렇게 자식 생각을 하게 되면 부모 심정은 어떠한가? 자식에게 제대로 해주지 못해서 한이 맺힌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휴, 바보같이 젊었을 때 돈을 벌지 않고 도대체 무엇을 했지? 우리 둘째 놈이 지금 돈이 없어서 저렇게 쩔쩔매고 있는데, 내가 조금만 여유가 있으면 보태줄 건데. 그리고 첫째 놈은 보증을 잘못섰다고 하는데, 내가 집을 팔아서라도 해결해주어야 되나 말아야 되나" 라고, 늘 그러한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그것은 천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물론 겉으로는 "니는 니 것으로 살고, 나는 내 것으로 산다" 라고 말은 하지만, 부모마음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우리 십자가 마을 사람들도 툭 까놓고 말하면 그렇지 않은가요? 저만 그런가요?
"700억만 있으면 200정도는 그냥 떼 주어서 사업을 하라고 할텐데, 직장생활을 한다고 저렇게 코피가 다 나고 말이야. 그런데 돈 700억이 없어서 문제네. 그 정도의 여유만 있으면 첫째 놈은 200억, 둘째 놈은 150억, 그리고 나머지는 마누라와 같이 여행이나 다니면서 여생을 보내면 되는데 말이야" 라고,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ㅋㅋ).
◈ 결국, 결핍의 자리와 과잉의 자리는?
그건 그렇고, 우리 인간은 이 없음에 대해서 그냥 가만히 놔두는 것이 아니라 채우는데, 그러니 주님께서 오셔서 어떻게 해야되는가? 인간이 자기의 과잉을 가지고 만들어놓은 어설픈 뚜껑을, 즉 우물을 덮어놓은 그 뚜껑을 들어내신다는 것이다. "이게 뭐꼬? 치워라"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되니, 이 결핍의 자리는 주님의 자리가 되고, 반면에 과잉의 자리는 무슨 자리인고 하니, 이게 중요한데, 그게 곧 악마의 자리가 된다는 것이다. 악마는 결핍된 주님을 보지 말고, 항상 "니가 노동을 하면 많이 얻을 수 있다" 라는 쪽으로 간다는 것이다.
술과 담배, 도박, 스포츠 등은 무엇인고 하니, 즐기려고 하면 얼마든지 즐길 수가 있는데, 요즘 유럽의 청년들은 축구에 빠져있고, 일본, 대만, 한국은 야구에 빠져있는데, 한 달만 있으면 난리가 난다는 것이다. 야구시즌이 개막하면 말이다. 특히 부산 갈매기는 심한데, 하나의 종교라는 것이다. 부산은행에서는 롯데의 성적에 따라서 이자율이 바뀌는 상품도 만들어놓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넘치고 넘치는 것이 푹 빠지고 싶은데, 즉 과잉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 인간이 아무리 그렇게 잡으려고 해도 잡히지 않는데, 주님은 계속해서 구멍만 남겨놓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은 평소에 우리가 즐기는 것들에 대해서 뻥뻥 구멍을 뚫어놓는데, 즉 "기도를 해도 소용이 없지?" 라고, 심지어 "성경공부도 소용이 없잖아?" 라고 하시는데, 그것이 곧 주님의 자리라는 말이다.
예수님을 믿어야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믿으면 안 되는데, 마치 스펀지와 같다는 것이다. 구멍이 뻥뻥 뚫려있는 말이다. 그렇게 구멍이 있는 것을 걸레라고 하는데, 난닝구에 구멍이 나면 걸레로 사용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멍을 내놓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꽉꽉 채우려고 하는데, 자기의 것으로 말이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안정감을 느끼는데, 하지만 그 안정감이 결국 우리는 지옥에 가게 만드는 안정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지옥에 가는 자들을 천국으로 빼내주기 위해서 구멍을 뚫어준다는 말이다. 지옥에 구멍을 뚫는 것, 그것이 곧 천국이라는 것이다.
◈ 나의 역사가 아닌, 구멍 뚫린 주님의 역사 !!
그러니 이 '법' 이라는 것은, 법은 주님 쪽에서 주시는 것으로, 소위 "이만하면 되었습니다" 라고 하는 것에다가 구멍을 뚫는다는 말이다. 즉 "법적으로 너는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어" 라고, 그렇게 구멍을 뚫어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주신 그 의가 그동안 "내가 지켰습니다" 라고 하는 자기 역사보다도 궁극적으로 더 위대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주님의 의가 우리 자신의 역사보다도 더욱 더 위대하다는 믿어야 하는데, 그러니 자기 자신의 역사가 아니라 구멍이 뚫린 주님의 역사, 바로 그 주님의 의를 우리가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관계가 곧 의인의 관계이고 말이다.
여기서 에베소서 1장을 살펴보자.
(엡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 1: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 나는 누구인가?
여기서 우리는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을 생각해보아야 하는데, 다시금 자기 자신을 뒤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1번, 나는 나의 것으로 나다" 라는 것과, "2번, 피가 들어온 죄의 용서가 있는 현장이 곧 나다" 라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인가? 2번인데, 자기에게 자식이 몇 명이고, 부동산이 얼마나 있고, 학교를 어디로 나오고 하는, 그런 것이 '나'가 아니고 말이다.
주님의 예정이 들어오고, 피가 들어와서 죄사함이 일어나는 그 현장이 곧 '나' 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 현장은 주님의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손을 쓸 수가 없는데, 주님의 계획이 일방적으로 벌린 것이 말이다. 그러면 자기 자신은 주님의 일이 벌어지는 무대에 불과하고, 거기는 우리는 아예 결핍조차도 느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결핍이라는 것은 자기 것이 있다고 여길 때 나타나는 현상인데, 즉 "이것은 내 것인데, 그만 구멍이 뚫렸구나. 아쉬워" 라고 할텐데, 그런데 아예 접수가 되어버리면, 즉 우리 자신이 연극무대의 마루바닥이 된다고 하면, 거기서 주님이 뛰어 놀던지, 말 춤을 추든지, 화를 내던지 간에, 그 어떻게 되었던 간에 주님의 일로서 발산이 된다면, 그것이 곧 성경에서 말하는 성도의 진면목이라는 것이다.
◈ 주님의 피가 튀는 현장 !!
대한민국이 낳은 유명한 타악기 퍼포먼스 '난타' 라는 것이 있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15년 전에 어떤 뮤지컬을 보러가서 너무 실망을 해서 다시 그런 류의 공연은 보러가지 않는데 말이다. 그런데 '난타' 라는 연극의 동영상을 보게 되면, 연극배우가 칼을 가지고 도마를 두드리는데 그 도마 위에 물방울이 튀는 것을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 무대가 우리 자신이라고 하면, 그 우리 자신을 주님이 찾아오셔서 튀기게 되면 주님의 피가 튄다는 것이다. 그 주님의 피는 우리의 죄를 씻어주는 현장을 말하는데, 그것을 우리가 느끼게 될 때, 우리는 주님을 찬미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율법이 주어져서 우리를 파고드는데, 즉 율법과 피의 만남이란 것이다. 아브라함에게는 약속을 먼저 주고 그 뒤에 율법을 주었지만, 우리에게는 율법이 먼저 오고, 예수님과 더불어서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같이 왔기 때문에, 그 만남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아, 나 자신이 나의 것으로만 뭉쳐진 것이 아니구나. 그것이 나의 진면목이 아니구나" 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직장생활을 하든, 개인사업을 하든,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우리의 현장은 무엇인고 하니, 피와 죄와의 만남에 있어서 오직 예수님의 죄 용서를 보여줄 수 있는 장(場)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성도의 현장이라는 말이다.
◈ 다시, 성령이 온 사람의 특징은?
그러면 이제 제가 질문을 다시 하겠는데, "성령을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라는 것이다. 성령은 받은 사람은 그것을 구분하는 능력이 있어야 된다고 했는데, 질문을 강의 초반에 던져놓고 답변은 지금 하려고 하는데 말이다.
성령이 온 사람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의 모든 것은 다 죄이고, 자기 안에 창세 전에 예정된 피가 들어와서, 자기의 죄를 피가 쳐서 죄를 용서해주는 현장을 마음껏 보여주는 장(場), 그것은 오직 성령을 받은 자만이 고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알곡과 가리지가 그렇게 구분된다는 말이다.
다시 정리를 하면, 법은 죄의 과잉을 우리에게 유발시키고, 반면에 예수님의 피는 그 과잉되게 유발된 것을 주님이 어떻게 씻어주는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교리가 아니라 현실인데, 우리는 현실을 믿는 것이지, 교리를 믿어서 종교인이 되려고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종교인이 되어서 무엇을 하겠는가? 자기가 도를 닦는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그런 폼을 잡고 싶은 것인가?
우리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데, 그래서 제가 어제 설교시간에 "막 사세요!" 라고 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티를 낸다고 해서 주님이 결코 속아서 넘어갈 분이 아닌데, 그냥 살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튈 때 튀고, 칠 때 치고, 그렇게 주님께서 알아서 하신다는 것이다. 마치 촉수처럼 모든 것에 다 하나님의 법이 이미 깔려있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인간들은 자기에게 날아와서 들어 붙는 체험들을 '법' 이라는 이름으로 정돈하고 기억 속에 보관한다. 하지만 모든 체험이 법으로 정돈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 내부에는 구멍이 뚫려있고, 악의 원천과 통한다. 그 구멍으로부터 무섭게 올라오는 악은 본인들로서는 감당이 안 된다.
(막 7:15)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막 7:16)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막 7:17)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그 비유를 묻자온대
(막 7: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막 7:19)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감이니라 하심으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
(막 7:20)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막 7: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막 7: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막 7: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 인간의 내부에서 작렬하는 더러움 !!
여기 15절에 보면,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라고 되어있는데, 무엇이든지, 즉 everything 그렇다는 말인데, 이게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바로 바깥에서 온 더러움도 우리 내부에서 작렬하고 있는 더러움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정도로 우리 인간은 어떠한고 하니, 바깥에서 들어온 더러움을 이야기하기 이전에, 먼저 우리 자체부터 더럽기 때문에, 그래서 바깥에서 그 어떤 좋고 귀한 것이 들어온다고 해도 어떻게 되는가? 우리 내부에 들어오면 모두 다 죄악으로 전환이 된다는 것이다.
십자가든, 언약이든, 하나님께 영광이든, 찬양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일단 우리 속에 들어오기만 하면 죄로 변하는데, 그래서 궁극적으로 피가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나는 말씀을 알았다" 라고 해도, 신천지에서는 그렇게 교육을 받는다고 하는데, 성경을 많이 외우게 말이다. 하지만 많이 외우면 무엇을 하겠는가? 정작 들어와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피인데 말이다.
◈ 눈을 흘기지 마세요 !!
여기 21절과 22절에 보면 악한 것의 리스트가 나와있는데, 즉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 등이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심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없는가? 다른 것은 죄라고 인정을 하겠는데, 그런데 '흘기는 눈'은 어떠한가? 하나님이 너무 예민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느냐는 것이다.
특히 여고생들은 '흥', 그렇게 하는 것이 주특기인데, 그런 흘기는 눈을 했다고 지옥에 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심해도 너~무 심한데, 겨우 일곱 살 때도 소꿉장난을 하다가 째려볼 수 있는데 말이다. 그런 것으로 지옥에 간다고 하면, 우리는 지옥에 매일 가도 모자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이번 대선에서 문재인에게 투표한 사람들은 박근혜가 TV에 등장할 때마다 어떻게 하겠는가? 아예 채널을 돌리든지 눈을 흘기지 싶은데, "아니,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라니 그게 말이 돼? 우리나라 정치적 수준이 너무 엉망이야" 라고 하면서 말이다.
◈ 인간은 죄의 백화점이다 !!
그러므로 이런 것까지도 다 죄가 된다는 것은, "인간은 죄의 백화점이다" 라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없는 게 없는데, 물론 사람에 따라서 개성은 나오겠지만, 그런 개성이 있다는 것은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도 있는데 그게 주특기로 나왔다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형편에 따라서 말이다.
평범한 가정주부가 살인죄를 짓겠는가? 그럴 기회가 없는데, 남편에게 눈을 흘기는 정도이지 올레길에서 사람을 죽이고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정주부가 아니라, 공직자로 있다고 하면 얼마든지 뇌물공여와 같은 죄를 지을 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도 여성들이 직업을 가지고 난 다음에는, 점차 남성들의 범죄를 따라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 271페이지를 보자.
** 본인들은 선을 좋은 것이고 악은 나쁜 것이라고 안다는 점에서 하나님과 닮았다고 우기지만, 실은 본인의 내부는 법에 의해서 산산조각이 나 있다. 하나의 법을 지킬 때는 마치 자아가 천하제일의 의인인 것처럼 느껴지다가, 또 다른 하나의 법을 위반했음을 아는 순간 신이 내리시는 냉엄한 징벌을 예상하고, 조금 전에 행했던 의로운 업적을 동원해서 악을 무마하기에 급급하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자아의 터진 구멍으로 더러운 욕망은 끝도 없이 올라오고 있다.
◈ 충동과 욕망 !!
인간들이 선악과를 따먹었으니 선과 악을 모를 리가 없는데, 하지만 인간의 내부는 그야말로 난장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법을 어기게 되면, 그 이전에 자기가 지킨 것을 가지고 그 어긴 것을 무마하려고 하는데, 그런 식으로 자기 의를 지키기에 급급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하지만 그 순간에도 자아의 터진 구멍으로 더러운 욕망은 끝도 없이 올라오고 있다" 라고 되어있는데, 무슨 의미인가? 결핍을 메우기 위해서 욕망이 올라오는데, 그러니 충동은 골라잡는 것이 아니라 넘치는 것이고, 욕망은 결핍된 것만 찾아서, 욕망으로 그 결핍의 구멍을 메우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게 곧 욕망이라는 말이다.
물론 충동, 즉 욕심과 욕망을 서로 같은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조금은 불편해도 이렇게 엄밀하게 따지고 들어가면 다르다는 것이다. 욕망은 무엇인가를 노리는 것이고, 반면에 충동은 본성상 발산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어린아이는 욕망보다도 충동이 강하다고 볼 수 있는데, 쌍둥이 형제끼리 싸우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렇게 하면서 서서히 자아가 생기면서 충동보다는, 물론 충동도 나오지만 노림수, 즉 욕망이 나온다는 것이다. "나는 저것을 가지고 말거야"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니 동물적인 것을 욕망이라고 보면, 이성적으로 따지면서 범죄하는 것은, 즉 뭔가 환상을 환상이 아닌 것처럼 위장하겠다는 것은 욕망에 가깝다는 말이다. 그래서 종교에서 "도를 닦는다" 라는 것은, 충동이라기보다 욕망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를 아십니까?" 라고 하면서 돌아다닌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법을 모르는 인간도 없고, 그 법을 다 지킬 인간도 없고, 법을 다 지킨 인간도 없다. 늘 위법의 가능성만 지닌 자들이 들끓는 곳이 인간세계이다.
인간 사회는 늘 위법의 가능성만 지닌 자들이 들끓는 곳인데, 그 이유는 바로, 모든 법이 인간 사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은 하나의 공동체, 즉 하나의 사회인데, 하나님께서 이들 이스라엘에게 준 율법 속에는 사회가 이런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회법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사법이 주어지고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 아담이 취한 태도가 인류의 본성이 된 것이다. 바로 아담과 여자가 수치를 느낀 것, 그것이다. 이것이 후대로 전수되면서 그 '수치심'을 제거하고 모면하는 방편으로 행동에 나서게 되는 것까지 후대로 전수된다. 부부는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의 부끄러운 신체를 가렸다.
◈ 선악과와 수치심 !!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 아담이 최초로 취한 태도가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이 인류의 본성이 되었는데 말이다. 그들이 선악과를 먹자마자, 마치 독약을 먹은 것처럼 곧 바로 죽고 말았는가? 그게 아닌데, 따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했는데 말이다.
제일 먼저 나타난 현상이 무엇인고 하니, '수치심' 이라는 것인데, 이것도 좀 어려운데 말이다. 죽이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데, 아담과 하와가 자살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그래, 먹고 나니 양심에 가책이 되네. 죽자" 라고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인데, 하지만 인간에게서 선악과를 따먹은 징후, 혹은 증상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들의 하체를 덮는 것이었는데, 즉 수치감이 발생되었다는 것이다. 부끄럽다는 것인데,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방법은 하나밖에 없는데, 그래서 숨는다는 말이다. 즉 '부끄럽다', '숨는다', 그 다음에는 "나는 나다" 라는 것만 남게 된다는 것이다.
(창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 옷을 입은 인간 !!
그래서 우리 인간은 "나는 나밖에 없다" 라고 여기게 되는데, 그러므로 자기가 생각하는 하나님이나 세상이나 그 모든 것은 무엇인가? 부끄러워서 숨어있는 상태에서 모든 관심사는, 결국은 "내 인생은 내가 지킨다" 라는 것만 남게 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숨어있기 때문에 그러하고, 또 숨어있는 이유는 무엇인고 하니, 그 누구 앞에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 부끄럽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 앞에 나타날 때는 그냥 나타나지 못하고, 반드시 옷을 입는다는 것이다. 옷을 입은 인간, 그것이 의미하는 게 무엇인고 하니, 자기 밖에 모르는 인간이라는 말이다.
◈ 성도는, 성령으로 옷을 !!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옷을 입으라고 하셨는데(?), 그때부터 그 인간은 예수님밖에 다른 것은 모르는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옷안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 옷을 통해서 바깥과 소통하는데, 즉 성령께서 오셔서 성령의 옷을 입은 사람은 그 성령을 통해서 바깥과 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 구원을 받은 사람은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당장 죽이지 않고, 죽일 때 죽이더라도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한 용도로서 아담과 하와를 사용하다가보니, 그래서 아담에게 "부끄럽다, 숨는다, 옷을 입는다, 그리고 가죽옷으로 입혔다" 라고 하는 모든 것들은 아담을 살리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장차 오실 그분이 어떤 분인지, 즉 구원자가 어떤 분인지, 약속의 사람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래서 이미 범죄한 아담을 데리고 보여주신다는 것이다. 마치 선생님이 공작시간에 보여주는 것처럼, 그렇게 나열해준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바꾸어서 말하면, 현재 우리가 옷을 입고 살고 있는 것, 그리고 부끄러워서 숨고 하는 것은, 결국 "나는 나밖에 모른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예수님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그렇게 우리를 장난감으로 사용하고 계신다는 말이다.
그러한 부끄러움을 더욱 더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는 율법이 주어지게 되는데, 즉 법을 알고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그래서 우리는 더욱 더 부끄러워서 숨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예수님이 나타나셔도 예수님을 피해서 숨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 사람과 예수님에 의해서 완전히 까발려진 인생 !!
그 결정적인 사건이 무엇인고 하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잡아왔을 때 그 여인을 얼마나 부끄러웠겠는가? 그런데 그들은 그 여인을 공개시키고 말았다는 것이다. 즉 자기들은 부끄럽지 않다는 것인데, 그런데 예수님께서 땅바닥에 글을 쓰니 어떻게 되었는가?
그 쓰신 글을 보더니 자기들이 간음한 것 이상으로, 간음한 여인에게 도저히 돌로 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부끄러움을 본인들도 느끼고 하나 둘 씩 돌을 놓아버리고 모두 집으로 가고 말았다는 것이다. 주님이 쓰신 글이 얼마나 자기들에게 부끄러움을 유발시켰으면, 그 자리를 얼른 떠나려고 했겠느냐는 말이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서 말이다.
그렇게 숨는데, 그리고 남는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는데,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이 여자는 어떠한가? 자기가 부끄러운 짓을 분명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의해서 숨을 기회조차도 부여받지 못하고, 즉 사람에 의해서와 예수님에 의해서 완전히 공개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것도 역시 복음을 위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다.
(요 8: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요 8: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요 8: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요 8:6)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요 8:7)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요 8:8)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요 8:9)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 나보다 중요한 복음이기에 !!
이제 마지막으로 정리해보면, 주님께서 우리의 일을 망치는 것은 공개적으로 우리를 어떻게 사용하시는고 하니, "복음이 너보다 더 중요하다" 라는 것을, 즉 "니가 니 자신을 사랑하는가? 아니면 진짜로 복음을 사랑하는가?" 라는 것을 묻기 위해서 우리가 하는 일들을 조져놓는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니 일이 되지 않는 것이 복음을 위한 것임을 니가 믿는가?"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지금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이든지 꼬이고 잘 풀리지 않는데, 하지만 그렇게 꼬이고 장애가 생겨야 복음이 복음답게 드러나는데 대해서 동의를 하는지, 그것을 지금 우리에게 묻고 계신다는 것이다. 즉 범사에 감사하고 있느냐는 말이다.
왜냐하면, 평소에 우리는 복음을 이야기하더라도 자기 것을 더 사랑했는데, 하지만 그렇게 자기 것을 더 사랑하게 되면 지옥에 간다는 것이다.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복음을 더 사랑해야 하는데 말이다. 하지만 우리 힘으로는, 우리는 숨기에 급급해서 결코 밖으로 기어 나오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아담의 본성이, 그저 자기 것으로서 숨어있는 것을 좋아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를 밖으로 나오게 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숨어있는 안식처에다 폭탄을 터트리게 되는데, 그래서 불따구를 내면서 기어 나오는데 "누구야? 내게 폭탄을 던진 놈이, 도대체 누구야" 라고 하면, 주님께서 "왜? 내가 그랬다. 복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말이야. 복음이 더 중요한 것을 모르나?"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입에서는 어떤 고백이 터져 나와야 하는고 하니, "내 인생보다도, 내 인생 자체를 죄로 규정해서, 나를 구원해주신 예수님의 피가 들어오고, 예수님의 죄 용서가 들어오는 현장으로서의 나 자신이라는 것을 잠시 잊어버렸습니다. 나의 것이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복음답게 발산되는 무대임을 그만 놓쳤습니다. 용서하옵소서, 주여!"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인생자체가 주님이 활동하시는 무대인데,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만 잠시 그렇게 생각하다가 다시 돌아서면, 그 펼쳐진 장을 거두어 꽁꽁 묶어서 자기만의 세계, 신비의 세계, 동화의 세계를 만들어놓고, 그것이 지옥인 줄로 모르고 천국인냥 착각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복음으로 늘 까발려져서, 언제나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현장이 되도록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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