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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나훔 3:1-7 / 마술의 뿌리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나훔

나훔 3:1-7 / 마술의 뿌리

정인순 2013. 1. 21. 14:57

 

 

마술의 뿌리

음성      동영상


이근호
2013년 1월 20일                           

 

본문 말씀: 나훔 3:1-7

(나훔 3:1, 개정) 『화 있을진저 피의 성이여 그 안에는 거짓이 가득하고 포악이 가득하며 탈취가 떠나지 아니하는도다』

(나훔 3:2, 개정) 『휙휙 하는 채찍 소리, 윙윙 하는 병거 바퀴 소리, 뛰는 말, 달리는 병거,』

(나훔 3:3, 개정)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죽임 당한 자의 떼, 주검의 큰 무더기,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나훔 3:4, 개정) 『이는 마술에 능숙한 미모의 음녀가 많은 음행을 함이라 그가 그의 음행으로 여러 나라를 미혹하고 그의 마술로 여러 족속을 미혹하느니라』

(나훔 3:5, 개정) 『보라 내가 네게 말하노니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 치마를 걷어 올려 네 얼굴에 이르게 하고 네 벌거벗은 것을 나라들에게 보이며 네 부끄러운 곳을 뭇 민족에게 보일 것이요』

(나훔 3:6, 개정) 『내가 또 가증하고 더러운 것들을 네 위에 던져 능욕하여 너를 구경 거리가 되게 하리니』

(나훔 3:7, 개정) 『그 때에 너를 보는 자가 다 네게서 도망하며 이르기를 니느웨가 황폐하였도다 누가 그것을 위하여 애곡하며 내가 어디서 너를 위로할 자를 구하리요 하리라』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이 어떤 모습일까요? 구원의 형태가 일률적이지는 않습니다. 사람마다 구원받는 방식이 다 틀리고 다릅니다. 특정 인간을 모델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구원을 받게 되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보시는 안목과 같이 세상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말은 곧 하나님과 함께 있기에 구원받는 자의 특징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가지고 구석구석 세상을 쑤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평소에 세상을 구축하는데 있어 큰 도움이 되었다고 여긴 자들도 말씀 앞에서는 일종의 속임수를 써온 셈이라는 것이 발각 당하게 됩니다.

이러한 안목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안목과 함께 공유하기에 생겨나는 현상입니다. 사람의 눈은 세상을 아무리 흝어 봐도 일일이 다 살펴볼 능력은 없습니다. 그냥 대충 보는 식입니다. 그리고 그 본 것도 다 기억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너무나도 작은 정보량으로 조립된 엉성한 세계관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환상’입니다. 자기 나름대로는 자꾸만 ‘현실’이라고 우겨대지만 실은 조작된 환상에 불과합니다. 이런 환상을 가지고 인간들은 먼 미래를 바라보면서 꿈꾸기 시작합니다. “나는 커서 이런 사람이 될거야”라고 일방적으로 기대를 갖게 됩니다. 그러니 인간이란 항상 내다보는 방향이 먼 미래 쪽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을 가지고 세상을 보는 방향은 인간들의 기억과 의식에 의해서 추슬러진 그런 세상관이 아니라 이미 단정적으로 확정적입니다. 창세기 9:3-5에 보면,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 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인간이란 아무리 무슨 짓을 하며 살아도 이미 하나님 말씀에 의해서 규정받는 존재입니다. 즉 “너는 이렇게 살아서는 아니되는 존재”라고 이미 단정적으로 평가받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아무리 자신의 꿈과 이상을 쫓아가면서 살고 싶어도 마지막 평가는 하나님 몫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평가는 말씀을 통해서 비쳐 나오기에 말씀을 버리면 그 사람은 구원받는 자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뜯어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즉 인간은 현재에서 미래의 희망을 바라보면서 살지만 하나님께서의 미래는 이미 확정되어 버린 겁니다.

이 미래상에 부합되는지 아니 되는지만 하나님께서 나서서 측정하실 뿐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피 성’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피 바다가 될 성을 인간들이 대단한 성이라고 으스대면서 그동안 앗수르 나라는 버터 온 겁니다. 인간은 이러한 미래상을 도저히 상상치도 못할 겁니다.

도리어 반대로 나아갑니다. 누구든지 부러워하고 잘 사는 나라라고 그 당시 소문에 소문의 꼬리를 물었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미국은 왜 그리 잘 사는거야? 나도 언제 미국에서 살아볼꼬”하는 식입니다. 모든 주변 나라로부터 부러움과 선망의 대상이 된 나라가 실은 하나님께서 정해놓은 미래상으로는 피바다가 될 지역입니다.

바로 이런 지경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겠지요.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못되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북이스라엘 나라가 이 앗수르를 부러워하므로서 북이스라엘도 이 나라에게 망하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 앗수르나라의 최후를 미리 알려주시는 겁니다.

뜯어낸다는 것은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언덕받이 재개발지역은 온통 쓰레기 천지가 되어 있습니다. 가까이 가보면 지붕은 포크레인에 의해서 이미 날아가 버리고 더덕더덕 벽지만 바람에 나부끼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동안 노출되지 않은 아이들 방 한 구석에 이런 낙서한 것이 눈에 들어올 겁니다. “엄마 바보”라고 말입니다.

그동안 집이 뜯기기 전에는 아이의 마음에만 기억하고 있던 말일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게 뜯겨나가고 있는 입장에서 그만 멀건 대낮에 사방팔방으로 다 공개되고 만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앗수르 나라의 멸망의 정경은 마치 여인이 대로상에서 자신의 치마를 머리까지 끌어오려다 보니 하체가 공개된 형상이라는 겁니다.

일종의 아이스께끼입니다. 그동안 앗수르의 장점이요 번영이라고 여겼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안목에서 보면 위선과 허세와 덕지덕지 죄들이 눌려붙은 것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가 유발하는 요소들이었던 것입니다. 주변 나라 사람들은 그것을 그렇게 부러워한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마술’이라고 표현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전부 ‘속임수’의 남발로 하루하루가 이어져나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보다 본인들이 더 확대된 이미지를 부여하면서 자기 환상에 매료되곤 합니다. 그것은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던 자기 환상과 맞아떨어졌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기를 당하는 것도 은근히 야망에 들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자아상을 갖기 못하기에 자꾸만 허황된 꿈으로 자신의 허술함을 감추려고 시도하게 됩니다. 바로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게 됩니다. 뜯어내시는 하나님의 작업에서 얼굴을 돌려버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히브리서 4:12-13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뜯겨나가면서 인간은 자신이 찾지 못했던 진정한 자아상과 마주칩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져라” 마태복음 16:24의 말씀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차라리 우리의 실상이 공개당하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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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이한례

7강-나3장1-7(마술의 뿌리)13012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나훔 3장 1절에서 7절 말씀입니다. 구약성경 1300페이지입니다.

나훔 3:1-7

“화 있을진저 피의 성이여 그 안에는 거짓이 가득하고 포악이 가득하며 탈취가 떠나지 아니하는도다 휙휙 하는 채찍 소리, 윙윙 하는 병거 바퀴 소리, 뛰는 말, 달리는 병거,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죽임 당한 자의 떼, 주검의 큰 무더기,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이는 마술에 능숙한 미모의 음녀가 많은 음행을 함이라 그가 그의 음행으로 여러 나라를 미혹하고 그의 마술로 여러 족속을 미혹하느니라 보라 내가 네게 말하노니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 치마를 걷어 올려 네 얼굴에 이르게 하고 네 벌거벗은 것을 나라들에게 보이며 네 부끄러운 곳을 뭇 민족에게 보일 것이요 내가 또 가증하고 더러운 것들을 네 위에 던져 능욕하여 너를 구경 거리가 되게 하리니 그 때에 너를 보는 자가 다 네게서 도망하며 이르기를 니느웨가 황폐하였도다 누가 그것을 위하여 애곡하며 내가 어디서 너를 위로할 자를 구하리요 하리라 하시도다”

원래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죠? 남의 나라 간섭 안 하는 하나님으로 그렇게 소문났는데 여기 나훔에 오면서 이스라엘이 멸망하면서 하나님의 관심사는 그 이스라엘을 멸망케 하게 된 이유를 찾는 작업 중에 하나가 다른 나라에서 이스라엘을 미혹 할 수 있는 요소가 있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주변 나라를 부러워했는데 그 부러워할 만한 그것들이 주변나라 강대국에 있었습니다. 그 주변나라의 끝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미리 알려줍니다. ‘너희들이 그렇게 부러워한 나라가 저렇게 처참하게 망가졌는데 이래도 다른 나라가 그렇게 좋으냐?’라고 따지시면서 그렇게 나오시는 겁니다.

여기서 다른 나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그런 안목을 가지고 우리가 보려면 다른 나라가 이렇게 멸망당하는 그 모습을 우리가 남의 일로 여기지 말아야 됩니다. 왜냐 하면 성경을 이렇게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 어떻게 일을 하는지를 우리가 알려면 항상 하나님 쪽에 딱 붙어서 살면 되겠죠. 내 하는 일을 알려면 내 하는 일에 붙어서 있으면 되지만,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 편에 딱 붙어서면 하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알 수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살아가는 것, 말씀을 듣지 않고 살아가는 것,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같이 붙어서 보게 되면 주의 뜻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사람이 구원 받는 방법이요? 내가 납득이 되는 식으로 구원받을 필요 없어요. 사람들의 구원방법은 다 달라요. 그래서 내가 모델이 되고 내가 기둥이 되면 그건 위험한 발상입니다. 그러나 공통점이 하나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말씀을 버리지 않는다는 거예요.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은 말씀을 멀리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말씀을 멀리하면서도 구원받는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세상에 아직도 일을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딱 붙어서 살아야 된다 이 말 이예요. 하나님이 뭘 하든 나는 내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딱 붙어서 살면 그 붙어서 산다는 말은 말씀 안에서 어떻게 말씀하시는가를 같이 자리에 있게 되면 어떤 식으로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소관이지만 하나님의 안목 시선은 우리가 찾아낼 수가 있는 겁니다.

우리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이제는 사람 편에 서지 말고 하나님 편에 서서 오늘 이 말씀을 한번 봅시다. 3장 1절에 보면 “화 있을찐저 피 성이여” 라고 돼 있어요. 성인데 거기에 피가 가득 나타날 그런 성채, 영어로 Castle(캐슬) 성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피로 만든 성이라. 이것부터가 상당히 어려운 이야긴데요. 이 어려운 말을 쉽게 하기 위해서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이 애들한테 농담 삼아 그냥 묻죠. ‘너 커서 뭐될래?’ 이렇게 묻죠. 네가 지금 작은데 커서 뭐될래? 방향이 작은데서 점점 크게 되어서 나중에 장차 뭐가 될래? 인간들은 이렇게 묻죠. 지금 12살인데 나중에 서른 돼서 뭐할래? 이렇게 묻는 거죠. 그럼 방향은 12살에서 서른 살 쪽으로 방향을 이렇게 보면서 바라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안목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들의 안목 이예요.

하나님의 안목은 뭐냐, 12살 보고 ‘얘, 너 2살 때 뭐했지? 2살 때 어떻게 됐지?’ 이렇게 묻는 겁니다. 방향이 반대가 돼 버려요.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항상 지금보다 미래를 지향하는데 주님께서는 이미 미래가 장착돼 있어 미래가 거꾸로 우리에게 방향을 반대로 틀어서 반대로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한다 하면서도 이 방향을 그냥 유지하게 되면 아무리 말씀 공부 많이 했어도 우리는 하나님의 시선과 정반대되는 시선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창세기 9장 5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새로운 땅을 허락해 줬는데 그 땅에서 당부하는 그 법이 뭐냐 하면 이 땅을 피바다로 만들지 말라 그겁니다. 만약에 이 땅에 피를 흘리면 나는 그 인간의 피를 도로 찾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열심히 살아라, 성공해야지, 부지런히 하면 네가 부자 될 거다.’ 이런 좋은 이야기,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 피를 흘리면 그 피 값이 너한테 주어질 것이다.‘라고 하나님께서 이야기를 한다 말이죠.

우리가 하나님과 딱 붙어서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볼 때 방향이 어떤 식으로 보느냐, 딱 보자 말이죠. 보면 인간은 결국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쪽에서 이미 그것을 먼저 그걸 단정을 져놓고 거기서 솔솔 뽑아내면서 ‘그러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지, 내가 뭐라 해? 내가 너한테 벌써 그렇다고 너한테 이야기했잖아. 그래, 네가 그렇지 뭐, 네가 별수 있겠어?’라는 식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희망을 품고 지금보다 다른 나, 지금보다 더 나은 나, 지금은 이렇지만 나중에는 멋지게 되는 나, 항상 우리는 꿈과 희망을 크게 세우면서 야심을 갖고 있으면서 어떤 기대를 가지고 보시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단정을 져버렸어요. 바로 그 시선! 그 안목을 가지고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그걸 배워야 된다 이 말입니다. 해도 소용없다는 거예요. 해도 소용없는데, 네 인생은 벌써 이미 나 버렸는데 무슨 딴 엉뚱한 꿈을 꾸고 있느냐, 네 인생만 힘들고 네가 환상에 매어 있다는 네가 비참하게 될 게 뻔한데 이렇게 나온다 이 말이죠.

심리학자, 과학자들이 연구했는데 인간은 1초에 5번 깜빡 거린다는 거예요. 5번을 깜빡거린다는 말은 뭐냐, 이게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사진을 5장 찍는 거예요. 5초마다 사진을 5장 찍는데 그 중에 찍은 사진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보통 사람들은 2장~2장 반 이랍니다. 그러면 나머지 자기가 본 현실과 상황가운데서 3장은 이미 제쳐놔 버린 거예요. 자기가 기억하는 1초에 스냅 사진을 5장 찍었는데 2장만 딱 찍고 난 뒤에 2장 가지고 뭘 만드느냐, 현실이라는 걸 구성해 내는 겁니다. 현실!

그러니까 인간의 구성하는 현실이라 하는 것은 이미 3장이 날라 간 거예요. 그러면 그건 현실이 아니고 환상이죠. 인간은 각자 환상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 찍었던 사진을 근거로 해서 세상을 의식하게 되거든요. 의식하니까 사실은 인간은 자기가 미처 알지 못했던 3장짜리, 사실 찍은 게 5장이지만, 못 찍은 거 계산하면 엄청나잖아요. 찰칵, 찰칵, 찰칵, 하는데 저쪽에서 ‘나는 안 찍나?’ 하면 이쪽은 아예 포기한 겁니다. 버려둔 거예요.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내가 결국 찍은 거 5장, 그것도 3장은 포기하고 나머지 2장만 쥐고 있는 것 가지고 ‘이게 현실이야, 나는 이렇게 살아야 돼.’ 하고 인생관을 다잡아 봤자 우리가 놓쳐버린 3장부터, 3장보다 더 많은 부분에서 우리를 뒤에서 떠밀어 버리면 우리는 자빠지는 겁니다. 그 자빠질 때 우리의 환상도 같이 깨져 버리는 겁니다.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나는 착한데 왜 내 인생은 불행하냐? 네가 착하다는 그 근거가 뭔데? 그냥 착해지고 싶어서, 어릴 때도 착했거든. 어릴 때부터 시작해서 이 착한 내가 나중에 성인이 되면 훌륭하게 될 것이다. 왜, 너무 착하니까. 복 받아 잘 될 것이다, 이렇게 기대하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어있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는 안목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자기 나름대로의 환상을 꿈꾸는 거예요.

어릴 때 보세요. 전부 다 자기애는 천재고, 똑똑하고 예쁘고, (태민이 언제까지 예쁜가 보자.)전부다 귀엽고 그렇습니다. 어린애치고 안 예쁜 애가 어디 있어요? 다 예쁘죠. 그런데 그 예쁜 애가 사고치고 학교에서 문제 일으킬 때는 인간이 갖고 있던 의식 말고 대부분의 90% 차지하는 무의식의 인간이 그 애를 밀쳐버리면 그 애는 아무리 착하고 싶고 발버둥 쳐도 대세가 그렇게 밀려버리면 그는 자빠지게 돼 있고 휩쓸리게 돼 있습니다.

유치원 애들이 언제 ‘엄마, 나 크면 담배 피울래.’ 이렇게 외치고 돌아다니는 애 없잖아요. 그런데 그 애가 중학교 가더니만, 고등학교 가더니만 몰래 담배 피운단 말이죠. 그럴 때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젠 그걸 뜯어내는 거예요.

바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뜯어내시는 하나님! 철거시키시는 하나님! 언덕 위에 재개발 지역에 이렇게 한번 화면이나 현장이나 가볼 일 있으면, 거기에 지붕부터 뜯어내기 때문에 뭐가 노출되느냐 하면 애가 자기 방에서 엄마 원망했었던 벽지의 낙서 있잖아요. ‘엄마 바보’ 이런 거. 그런 글씨가 칸막이부터 다 뜯어내니까 비로소 발각되는 겁니다.

요번 수련회 때 그렇게 이야기했거든요. 율법은 그 율법을 잘 지키라는 것이 아니고, 율법은 잘 들키라고 준 거예요. 우리는 말씀을 받은 것은 잘 들키는 거예요. 어떻게 들키느냐, 나한테 이런 일방적인 환상 속에서 날마다 환상을 조작하면서, 구성하면서 가장 나만 생각하면서 세상의 전부가 나 위하라고 돌아가는 것처럼 여기는 그것을 하나님이 아니면 누가 뜯어내 주십니까? 누가 그걸 재개발 해줄 수 있어요? 하나님이 아니면 누가 하겠습니까? 부딪히고 만나고.

그것이 오늘 본문 2절에 보면 “휙휙하는 채찍 소리, 굉굉하는 병거 바퀴소리, 뛰는 말” 이 말이 굉장히 어려워서 다른 번역에 보면 “휙휙하는 채찍 소리, 윙윙하는 병거소리” 이런 것도 있어요. 굉굉하는 병거 소리, 이건 전차가 지나가는 소리 아닙니까? “휙휙, 뛰는 말, 달리는 병거, 충돌하는 기병“ 이 사람들 전부 다 이거 망하는 니느웨 사람들이 지금부터 자기나라가 잘 되기 위해서 디너 쇼 해서 초청한 사람들입니까? ‘자, 디너 쇼합니다. 밥상 쇼를 하는데 이런 디너쇼를 할 테니까 이런 휙휙 하는 분, 오셔서 같이 잔치 합시다.’ 이랬던 결과였습니까? 이건 초대받지 않고 초청받지 않은 그야말로 우리 의식되지 않은 무의식에서 날라 오는 것들, 쏟아지는 것 들 이예요. 나는 원치 않은 내가 계획 잡지도 않은 나는 이렇게 되리라고 예상도 못한 그 예상 너머에 난데없이 쳐들어오는 나 바깥의 엄청난 힘들, 이건 미처 내가 예상 못한 내가 생각했던 그 현실의 욕구 속에서 우리는 배제해 놓은 건데, 그것도 또 하나의 현실의 실제적인 현실이라서 쳐들어온 겁니다. 철거작업, 철거반, 뜯어내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있다는 것은 이렇게 매일같이 우리가 우리를 가렸던 그 지붕이나 벽지나 이런 것이 뜯겨져 나감으로서 진정 하나님의 원래 생각했던 나의 진면목을 노출시키는 작업을 주께서 하시는 그분이 바로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신학교 졌다면 신학교 다 해체하게 만들고 교회 됐다면 교회 다 해체하게 만들고, 그 안에 내가 있다면 나도 해체하게 만들고, 다 뜯어내는 거예요.

4절에 봅시다. “이는 마술에 능숙한 미모의 음녀가 많은 음행을 함이라 그가 그의 음행으로 여러 나라를 미혹하고 그의 마술로 여러 족속을 미혹하느니라 보라 내가 네게 말하노니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 치마를 걷어 올려 네 얼굴에 이르게 하고” 치마 끝을 잡아서 얼굴에 올리니까 속옷도 안 입은 모양이라. “벌거벗은 것을 열국에 보이며 부끄러운 곳을 열방에 보일 것이요” 이렇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요, 이런 작업에 동원된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가리는 가면이나 철판용이 아니에요. 반대입니다. 히브리서 4장에도 있잖아요. 우리의 골수를 쪼개고 우리를 벌거벗은 채 다 드러나게 하심이라. 그래서 말씀을 전하는 데에는 사람들이 안 오는 거예요. 자기를 감추고 자기의 모든 것을 좋게 생각하는데 그 얼마나 공들였겠습니까? 그 공들였던 것을 한 몇 시간동안 다 뜯겨나가면 도대체 내가 나다운 게 없다는데, 내다운 게 없다는데 갈기갈기 찢어지는데 그 자리에 왜 가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찬스였어요. 그게 사실은 그게 자기가 살길이었습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그냥 피였습니다. 그냥 피 성에 살고 있는 피 주민, 우리는 그냥 핏덩어리에 불과한 거예요. 내가 살기 위해서 남을 피를 쏟을 수밖에 없는, 결국은 피를 흘리는 현장을 내가 있음으로서 그것이 발생되는 그 원인 제공자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이 말 이예요.

4절에 보면 “이는 마술의 주인 된” 마술이라 했어요. 마술을 보면서 보는 관객들이 제일 궁금한 것은 뭐냐 하면 마술을 했던 결과를 거꾸로 한번 돌려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 거예요. 분명히 사람들이 손을 잡고 커다란 탱크 하나를 둘러서 있습니다. 그리고 천막을 이렇게 하고 거기에 스포라이트를 비추니까 거기에 여전히 사람들이 탱크가 있고 여전히 사람이 들어서 있어요. 드디어 스포라이트를 끄고 하나, 둘, 셋, 하고 천막을 제치니까 사람들이 강강술래처럼 손잡고 있는데 그 안의 탱크는 사라져 버렸어요. 어떻게? 세상에 이런 일이. 카퍼필드란 사람은 세상에 중국 가서 만리장성을 통과해 버렸어요. 위로 가야 될 만리장성을 위로 안 가고 그 두꺼운 벽을 통과해서 저쪽에 나타나 버렸습니다. 어떻게? 어떻게 저렇게 되지?

사람들에게 마술사가 안 가르쳐 주죠. 그게 생계수단인데 그걸 가르쳐주면 장사가 안 되잖아요. 그런데 그 신기한 것을 사람들은 놀라고 그것에 매료됩니다. 이걸 가지고 오늘 본문에서는 ‘미혹되었다.’ 미혹되면 어떻게 잘 살지? 일본은 어떻게 잘 사는 거야? 북한은 미사일을 궤도까지 어떻게 올린 거야?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가까운 예로서는 박 근혜라는 그 아가씨는 어떻게 해서 대통령 되었지? 사람들이 찾는 것은 바로 미혹될 것만 골라서 어떻게든 거기에 가까이 가게 되면 무엇을 잃어버리느냐 하면 자기가 피투성이에 불과한 것, 하나님이 다 들춰내면 결국 피투성이밖에 안 된다는 그런 것을 잠시 잊어버리고 자꾸 가다보면 그쪽으로 가 있는 거예요.

어릴 때 중학생, 고등학생 같으면 ‘쟤는 어떻게 담배를 빨리 피워서 어떻게 같은 나이에 어른스럽지? 쟤는 어떻게 겁도 없이 교복입고 술집에 가지? 야, 참 용기 있다.’ 어린 애들은 그들이 용기 있는 거예요. 그게 어른스러워 보이는 거예요. 우리 고등학교 때는요 어떻게 학생이 교복을 입고 빵집에 갑니까? 빵집에 가는 것도 나쁘지만 어떻게 여학생을 빵집에서 만납니까? 이거 죽으려고 환장을 했지. 우리 클 때 그게 어른스러웠던 거예요. 지금 초등학교 애들은 빵집에서 여학생 만납니다. 전혀 어른스럽지 않아요. 우리 어렸을 때는 방송국에서 어린애가 나오면 반드시 동요 불러야 돼요. 그런데 요새 6살 먹은 애가 ‘청춘을 돌려다오.‘ 유행가를 부르니, 어떻게 방송에서 그게 방송이 됩니까? 애들이 점점 더 어른스러워지는 거예요. 빨리 어른스러워지려는 것은 그만큼 성인들이 유혹을 많이 하고 마술을 많이 부린 거예요. 마술을!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마술은 없다는 거예요. 탱크는 했지만 그거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카메라 조작이었습니다. 그 마술이 그렇게 신기했는데 막상 마술의 그 내막을 알고 보면 그 허탈함, ‘에이씨’ 하고 고만 진짜 돈 물어달라고 하고 싶은 그 허탈함, 속았다는 것, 허무감, 이런 게 찾아온다 말이죠.

그래서 잠언 서에 보면 노인들을 무시하지 마라. 왜. 그들은 세상 모든 것이 하나의 허황된 마술인 것을 알기 때문에. 노인의 지혜는 딴 게 아니고 이겁니다. 다 하면 뭐하겠노, 좋~다고 소고기 사먹겠지. 해보니 뭐하노, 세상의 모든 것은 결국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요번 여름 수련회 할 때 주제를 전도서를 할 겁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제 슬슬 십자가 마을도 단체로 갈 모양이라. 잔치 집에 가지 말고 초상집에 가라. 그게 네 마지막 모습이다. 전도서 할 거예요.

주님께서는 이미 알고 뜯어내는 겁니다. 뜯어줄 때 고마운 줄 알아야 돼요. 왜 더 이상 미혹될 이유도 없고 그리고 누구한테 돈 떼이고 그렇게 사기당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사기당하는 이유는 자기가 이미 미혹당하고 싶은 마음준비가 돼 있기 때문에 그거 보고 사기당하는 거예요. 지금도 하루 종일 몇 통씩 와요. 부동산, 좋은 땅 있다고. 그렇게 오는 거예요. 그런 전화가 온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이 많이 평소에 꼬이고 싶어 환장했다 이 말이죠.

사람은 모두 다 치마를 걸치고 있습니다. 진짜 자기 모습은 누군지도 모르면서 일단은 감춰놓고 남 보여주는 제 2의 자아상을 남한테 밑지지 않도록 그걸 갖추는데 노력을 다해요. 그러다 보니까 말씀은 우리를 노출시키는데 필요하고, 세상은 내 원하는 것을 채워주기에 필요하고, 그러니 어느 쪽에 가겠습니까? 말씀을 버리고 점점 더 세상으로 갈 수밖에 없죠. 그러니까 그것은 피 성이라. 모든 그런 인간들은 다 집결된 곳.

사람이 좋다는 것, 그래서 방송을 봐도 항상 지방방송 인사이동을 해도 꼭 해주는 게 있어요. 경찰 고위층 인사이동, 검찰청 인사이동, 그리고 시 인사이동, 꼭 알려줘요. 그런데 초등학교 교사 인사이동 이건 매일신문 제 25면 맨 끝에 나와 있고 이런 건 시시하고, 사람들이 왜 방송을 하느냐 하면 사람들이 그걸 소원하고 그게 관심이 있는 거, 거기에 초점을 모아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음행이고 그게 마술이고 그동안 사람들을 속여 왔던 가상현실에 불과하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해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끝으로 “휙휙하는 채찍 소리, 굉굉하는 병거 바퀴소리 뛰는 말, 달리는 병거, 충동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살육 당한 떼,  큰 무더기 주검, 무수한 시체, 이걸 유발시키는 그 인간들은 뭐냐 이 말이죠. 그러니까 니느웨나 앗수르 나라거든요. 609년에 망하는데 609년에 망하게 하는 나라가 바벨론과 메대 연합군들이 쳐들어와서 망합니다.

그렇다면 바벨론과 메대, 그건 또 뭐냐, 너희들은 뭐냐, 그들은 539년에 똑같이 또 망해요. 그러니까 세상은 망한데다 망하고 망한데다 또 망하고, 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게 그리워서 또 그거 하고, 대통령 돼도 떨어지고, 떨어졌는데 또 되려 하고, 또 떨어지면 또 되려 하고, 국회의원 떨어지면 또 하려 하고, 하지만 또 하려 하고, 자기를 걸치고 속이는 그 행동 이외는 하루 종일 딴 생각을 하지 않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나의 수치를 속일 수 있을까? 그것만 연구하는 것이 인간들이 하루 24시간 일과예요.

차라리 치마를 스카치테이프로 들어 올려서 이마에 갖다 붙여 버려요. ‘나 이런 인간입니다.’ 하고 다니면 그것이 바로, 그런 식으로 오신 분이 누구냐? 사람이 된 하나님이십니다. 너희들이 가장 부끄러워하는 것을 나는 오히려 노출시켜서 내가 다 보여줄게. 그리고 십자가 돌아가셨습니다. 그게 십자가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 치마를 훌렁 올려서 자기 머리까지 스카치테이프로 붙여서 다 보이게 하면서 나를 따라오너라.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그게 무슨 소용 있느냐, 그렇게 노출시켜주는 하나님이 노출 시킬 때 그게 바로 하나님과 딱 붙어있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도 유혹하고 있고 우리가 유혹받고 싶어 환장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가난한 것은 버리고 내가 원하는 좋은 것은 차지하고 싶은 치열한 경쟁 마당에서 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우리의 모습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말씀은 멀어졌고 세상은 가까워졌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위선이요, 치장이요, 가면인 것을 주께서 우리를 바라보는 우리의 진면목이 아닌 것을 가상의 세계인 것을 저희가 느끼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