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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사랑의 정죄 121008 본문

저서 & 기타(이근호)/피

사랑의 정죄 121008

정인순 2012. 10. 8. 17:16

음성            동영상

 

[12 대구강의 19] - [피 80] - 정죄하는 사랑

                                                          12,10,08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247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세상에서는 얼마든지 나를 예뻐해 주는 사랑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랑은 창세 전의 약속에 근거한 효력이 있는 사랑이 아니다. 일시적인 감정일 뿐이다. 따라서 제대로 용서가 용서로서 효능이 발생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죄인으로 발각되어 깨어지는 그 순간뿐이다. 우리 죄를 지고 가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먼저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깨어졌다.

 

(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 죽이는 사랑과, 살리는 사랑 !!

과연 어떤 사랑이 정말로 효과가 있는 사랑인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주신다고 할 때는 개인적으로 사랑해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모든 창조세계가 합세해서 우리를 사랑해주신다는 것이다. 남녀간의 개인적인 사랑에 굳이 하늘에 떠 있는 해와 달까지 포함시킬 이유는 없는데,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창세 이후의 약속뿐만이 아니라, 창세 이전부터 있었던 약속의 효력과 관련되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주기 때문에, 사람간의 개인적인 그러한 육적인 사랑을 확대시켜서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우길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사랑을 받고 싶은 그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그 차이성을 한번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기대하는, 즉 이 세상이 주는 사랑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를 죽이지 않는 사랑인데, 살아있는 우리 자신을 더욱 크게 말이다. 그러니 자기가 살기는 사는데 더욱 더 위대하기 살려고 하는 것이고, 자기 영역이 확장되도록 도와주는 사랑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창세 전 사랑은 무엇인고 하니, 이미 이 땅에 오셔서 죽었던 예수님에게 동참시키는 사랑이고, 그렇게 그분의 운명에 합류되는 사랑이기 때문에, 즉 우리는 죽여나가는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흙에 속한 형상을 없애는 사랑이고, 그리고 그것을 하늘에 속한 형상으로 바꾸어주는 사랑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 세상의 수천 수백만의 유행가 가사에는 그런 사랑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라고 하는데, 하지만 진짜 사랑은 자기를 죽여서 그리스도인이 되게 만드는 사랑인데, 그러므로 그 어느 누가 자기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것을 두고 사랑이라고 이야기하겠느냐는 말이다. 미움이라고 여기지 말이다.

 

◈ 섬김이 있는 교회 !!

그래서 교회에서 목사가 설교를 할 때나 교인들이 모일을 할 때, 서로가 세상적인 사랑을 가지고서 교제를 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라 그만 친목단체가 되고 마는데, 즉 "저 사람이 나에게 어떤 유익을 주겠는가? 저 사람이 나를 얼마나 예뻐해 주겠는가?"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성령 안에서 만들어진 교회' 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한 친목단체가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이 은사가 되고 능력이 되고 선물이 되어서, 그렇게 모두가 다같이 부족하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오직 주님께서 살려주신 그 사랑의 덕분으로서 오늘도 살아가고 있음을, 그러한 주님의 사랑을 나누게 되는데, 그것을 '섬긴다' 라고 표현하는데 말이다. 그런 섬김이 있는 교회가 곧 사랑이 넘치는 참된 교회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인간적인 사랑에 머물게 된다면, 거기에는 구제를 해도 노림수가 있게 된다는 말이다. 저는 지금까지 노림수가 없는 구제를 본 적이 없는데, 반드시 노림수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교제 247페이지를 하고 있는데, 아무튼 인간의 사랑은 반드시 그런 노림수가 있는 사랑이고, 노림수가 있는 교제라는 말이다.

 

◈ 이제는 정말로 지긋지긋하다 !!

오 목사님의 사모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이, 얼마 전에 사모님이 다음과 같은 글을 십자가 마을에다가 올린 적이 있었는데, 즉 "십자가, 복음이라고 하면서 와서는 도대체 그 누구에게 관심을 두고 있는지, 이제는 정말로 지긋지긋하다" 라고 말이다.

 

여러분도 보신 적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원래 글이 지워지면서 댓글로 달린 글이라서 그냥 사라지고 말았는데 말이다. 제가 웬만해서는 칭찬하지 않는데, 그것은 칭찬하고 싶다는 것이다. 글을 너무너무 잘 썼는데 말이다.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왔다가는 갑자기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그런 짓거리는 십자가 마을에서는 이제 제발 그만 하자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에서의 사랑이라는 것은, 누군가가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예뻐해 주는, 그러한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죽여주시는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죽이는 사랑으로 교제를 해야하는데, 하지만 문제는 무엇인가? 교회에서 자립으로 그런 사랑을 지탱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 사람이 없다 !!

오늘 강의를 시작하지 직전에 권사님이 뭐라고 하셨는고 하니, "사람이 없다" 라고 말이다. 물론 제가 잘못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권사님, 기억이 나지 않습니까? 강의를 시작하기 10초 전에 했는데 말이다. 아마도 어떤 모임에 참석할 사람이 없다고 하는, 그런 의미였지 싶은데, 그런데 그것이 저의 귀에는 얼마나 강렬하게 들렸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정말로 그 말이 맞는데,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말이다. 그래서 성경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께서는 "내가 만들게. 니가 주님의 사랑을 품으려고 애를 쓰고 노력하고, 성경공부를 하고 예배에 참석하는, 그런 도를 닦는 식의 자신의 애씀으로 백 날을 해도, 그것은 너 자신의 위선적인 탈만 층층이 점점 더 두꺼워지게 할뿐이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런 교회는 우리 주위에 그냥도 줄줄 널려있는데, 아무리 복음으로 바르게 한다고 해도, 그런 곳에 가보면 도를 닦는 도사님들만 모여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여서 "어떻게 하면 내가 원하는 수준에 도달할 것인가?" 라는, 그런 노력들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 믿으면, OK !!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아니라 믿으면 되는데, 무엇을 믿는다는 말인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랑만 준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랑을 받기에 합당한 죄인을 만드는 작업을 주님은 지금도 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의인을 만드는 작업이 아니라, 죄인을 만드는 작업을 말이다. 그것이 곧 의인이 되게 하는 작업인데, 그것을 주님께서 계속해서 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즉 우리 쪽에서 다가가는 것과 주님 쪽에서 다가가는 방식이 달라서 사람들이 오해를 많이 하는데 말이다. 우리 인간 쪽에서 하늘로 다가가는 방법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하나님의 능력이나 은사를 받아서, 그것을 자기가 관리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게 다가가겠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방법은 무엇인고 하니까, 반드시 예수님을 경유하게 되는데,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앞장 세워서, 그렇게 해서 우리를 더욱 더 죄인으로 만들어서 의인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먼저 죄인으로 만들어서 말이다.

 

◈ 성도의 참된 모습은?

그러므로 성도의 참된 모습은 무엇인고 하니,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더욱 더 알게 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을 예뻐해 주는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불쌍히 여겨주는 사랑, 그런 사랑이 넘친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인정해주고 긍정해주는 사랑이 아니고, "주님의 긍휼이 아니면 나는 전혀 희망이 없습니다" 라고 하는, 그런 깊이와 넓이를 더해 가는 사랑이라는 말이다.

 

바로 그 사랑이 곧 예수님의 죽으심을 앞장세워서 나온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사랑이 오게 되면 주님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게 되는데, 우리가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얼마나 욕을 얻어먹는지 모르는데,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는 것이다.

 

◈ 저런 놈들은 혼내주어야 해 !!

어제 오전시간에 설교한 것처럼, 그들은 "그런 자들은 혼내주어야 한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우리는 실제로 이 세상에서 혼 줄이 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왜 십자가뿐이냐고 하는데, 즉 "관심사가 왜 십자가밖에 없는가?" 라고 하면서 공격을 한다는 말이다.

 

조금 거칠게 표현을 하면, "왜 너거들 눈가리 속의 화면에는 십자가뿐인가?"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하는 자들은, "우리들의 눈가리 속에는 십자가 말고 다른 것이 더 크게 보인다" 라는 것인데, 그러면 그 다른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자기가 주인공이 되어있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말이다. 자기가 주인공이 되어서 다른 사람을 항상 자기와 비교하고 말이다. 그런 자기 자신을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 부인이 안 되고, 자기 미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그야말로 딜레마 !!

제 아무리 성령을 입에 달고 다녀도, 십자가를 입에 달고 다녀도, 결국 관심사는 무엇인고 하니,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야말로 딜레마인데, 그러한 사람들의 마지막 소원이 있다고 하면, 이 세상에서 진짜 십자가만 바라보는 자들이 사라져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를 향한 그 관심사를 떨쳐버릴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마지막 남은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모든 인간이 다 그렇다" 라고, 그렇게 동일시하게 되면 자기 죄는 들키지 않을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런데 "십자가만 보인다" 라고 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런 인간들이 있는 한 자기는 가짜로, 즉 사기꾼으로 발각이 된 상태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방법은 하나인데, 그런 놈들을 이단시해서 죽여버리면 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겁이 난다는 것이다. 즉 "너거들은 뭔데 십자가만 보인다고 하노? 나는 아무리 보려고 해도 안 되는데, 그렇게 내가 안 되는데 너거들은 건방지게 되노?"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다. 그들이 하는 모든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라는 말이다. 늙은 조용기부터 시작해서 김성수 목사까지, 모두가 다 그런 이야기라는 것이다.

 

◈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비밀이 !!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알아야 하는데, 이 세상에는 비밀이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먼저 하나는 숨겨놓은 비밀이 있는데, 그것을 그냥 드러내게 되면 다른 모든 사람들이 믿어버리게 되는데, 그러면 큰 혼란이 일어나서 안 되니 숨겨놓은 비밀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UFO'의 경우가 그렇다는 말이다. 'UFO'는 직접 보았다는 자들이 있는데, 시속 만키로 넘는 속도로 날다가 갑자기 허공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투기가 따라가도 잡지를 못하는데, 그게 맞서면 용감하게 싸우든지 말든지 할 것인데 말이다. 그만 사라지고 없다는 것이다. 마치 허공 속에 다른 허공이 있는 것처럼, 그 속에 숨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막상 현장에 가보면 없는데, 그래서 이 'UFO'의 경우는 항상 쉬쉬하면서 감추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종류의 비밀이 아니라, 이미 다 드러냈는데, 코앞에 분명히 있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즉 공개되었는데도 무슨 말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마치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처럼 말이다. 그것을 '묵시문학' 이라고 하는데, 마카비 시대이후 B.C 2세기경부터 유행했는데 말이다.

 

그 당시에는 성전도 없고, 메시야가 올 가능성도 없고, 자기 백성들은 혼란에 빠져있고, 그래서 그때는 종교를 담당하는 전문 성직자들이 뭔가 글을 쓰는데, 그야말로 나라꼴이 말이 아니고, 메시야도 올 가능성이 전혀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계시를 받든지 해서, 그러한 글을 써서 유포를 시킨다는 것이다.

 

◈ 나는, 죽고 싶지 않아 !!

소위 '음모이론' 이라고, 사람들은 정상적인 것을 믿지 않는데, 즉 "사실은 그게 아니라 반전이 있어" 라고 하면서, 그런 반전을 엄청 좋아한다는 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심심했던 것 같은데, 연예인들의 경우에도 불화설과 같은 것이 인기를 얻고, 사람들은 항상 그렇게 뒤쪽을 궁금해하는데, 바로 그것을 캐내는 자들이 만들어낸 계시의 책을 두고서 '묵시문학'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묵시문학에는 인간의 내면에 감추어진 공포가 바깥으로 드러나는데, 그렇게 인간내부의 공포심이 뭉쳐진 것이 곧 묵시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묵시문학은 사람들에게 보여주어도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하는데, 거기서 오는 승리감이나 쾌감을 쓴 사람에게 안겨준다는 말이다. 아무튼 그 모든 것을 일괄적으로 이야기하면, "나는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이 땅에서 죽고 싶지 않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심히 수상하신 예수님 !!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야기하기를 "나는 죽는다. 그래도 너거들이 그 죽는 데까지 따라올래?"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제자들은 너무나도 황당하다는 것이다. 자기들은 살 수 있다고 여기고 예수님을 따랐는데, 어떻게 보면 길을 잘못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나는 길이다" 라고 하셨는데, 그런데 그 예수님을 따라가 보니 심히 수상하다는 것이다. 너무 음침하고 음산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킬 때는 남자만 5천명이 모였는데, 그러니 가족까지 합치면 만 명이 넘어가는데 말이다.

 

목회를 하면서 교인수 만 명을 포기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그 당시에 예수님의 팬클럽 회원수가 무려 만 명이나 되었는데, 그래서 예수님을 욕하면 댓글이 만 개는 족히 달리지 싶다는 것이다. 신천지는 거기에 비교할 바가 못되고 말이다.

 

하지만 처음에 그렇게 예수님이 좋다고 따라다니던 사람들이 슬슬 빠지더니만, 나중에는 다 빠지고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미리 다 아시고 "너거들도 가지 왜? 참으로 이상하네. 왜 나를 아직도 따라다니지?" 라고, 열 두 제자들에게 물으신다는 것이다.

 

◈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

그러자 베드로가 정답을 발표했는데, "영생의 말씀이 주님에게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것을 보고 온 것이 아니라 그 영생을 보고 왔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유일한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 메시야 사상도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조금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여기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에서 율법, 약속, 메시야 등등, 온갖 것들이 다 나와도, 정작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성령이 오게 되면, 그러한 개념 자체가, 즉 죄 개념, 심판 개념, 공의 개념 등등, 그러한 것들이 마지막에 성령이 오게 되면, 그러한 것들이 다 자기가 평소에 육적으로 끌어 앉고 있었던 개념을 억지로 굴려서 하늘의 뜻과 맞추려고 생쇼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요 6:65)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요 6:66)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요 6: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요 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요 6: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한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요 6: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요 6:71)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 가장 좋은 옷은, 임금님의 옷 !!

어제 오전에 그런 설교를 했지 싶은데, 가장 좋은 옷은 임금님의 옷이라고 말이다. 그 동화를 다 아시지 싶은데, 임금님의 옷은 우리 몸 그 자체인데, 즉 우리 몸이 기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무거운 종교를 덧입히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는 살아가는 것 자체가 주님이 만드시는 생산품으로서 살아가고 있는데, 그런데 왜 우리 자신이 하나님에게 드릴 선물을 따로 만들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자꾸만 따로 만들려고 하면 위선이 되는데, 목사도 그냥 신앙생활을 하면 되는데, 목사가 되어서 굳이 왜 교회를 가져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좋아라고 갖는 것이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갖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목사가 무슨 핑계를 대는가? "이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라고 하는데, 그러니 입에 달린 모든 고상한 성경적 용어가 자기의 흩음(?)과 공포를 가리우기 위해서, 즉 핑계로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변명거리로 말이다. 우리가 그런 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의 죄인 됨과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야기하지 않는 자들은, 아무리 "우리는 교회는 건전한 교회입니다" 라고 씨부려도, 모두가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다 주님께로 가져가야 하는데, 바로 그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곧 우리 자신이라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도저히 감당하는 것이 불가능한데, 그러니 우리는 우리 몸을 감당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여기서 어려운 것을 하나 하고 진도를 나가겠는데, 호세아서를 보자. 사람들이 이근호 목사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고 하는데, 하지만 시선을 십자가 한 곳에 두어야 하지, 다른 곳에 동시에 두게 되면, 마치 한 화면에 영화가 두 편이 동시에 상영되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러면 혼란스러워서 영화를 제대로 볼 수가 없다는 말이다.

 

호세아서 1장 9절 말씀을 살펴보자.

(호 1: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 고정된 하나님인가? 변화하시는 하나님인가?

여기에 보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라고 되어있는데, 즉 하나님은 인간들의 체제에 따라서 다양하고 변형되는 하나님으로 자기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하늘로 올라가는 입장에서 하나님을 고정된 것으로 보지만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고정되었다는 것이 과연 틀렸다는 말인가?

 

물론 틀린 말이 아닌 바른 말인데,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항상 변화를 하니 하나님은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하나님이 고정되려고 하면 같이 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게 하나님은 고정된 것이 맞는데, 하지만 하나님은 고정되었다고 믿고 있는 우리가 아침저녁으로 다르니, 하나님도 진짜 고정이 되려면 늘 변화되어야 고정이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하늘에 '정지위성' 이란 것이 있는데, 즉 고정된 하나의 장소에만 언제나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위성이 과연 정지가 되어있는가? 지구가 돌고 있으니 위성도 지구와 같이 매우 빠른 속도로 돌고 있는데, 그래서 고정되어 있다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변함이 없고 영원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처신과 변화에 따라서, 거기에 맞추어서 적재적소에 같이 변화를 해주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 성도에게는 고정된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이다.

 

◈ 성경은 비밀책이다. 그리고 !!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변화를 하는가? 우리의 변화를 다음과 같은데, 방금 한 비밀 이야기를 다시 해보면, 여기에 이렇게 성경책이 있다고 한다면, 첫 번째로 우리는 이 성경책은 비밀책이라고 하고, 두 번째로는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면 비밀도 풀린다고 하고, 그리고 세 번째로 그 비밀을 간직하자고 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1)성경은 비밀책이다 (2)그 비밀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면 풀린다 (3)그 비밀을 간직하자" 라고 한다면, 그러면 이 중에서 몇 번이 문제점이 있는가? 1번과 2번은 맞는데, 하지만 3번에서 그 비밀을 간직할 곳이 과연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을 방금 공부했는데, 또 잊어버렸지요? (ㅋㅋ)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시는데, 그런데 우리가 그 비밀을 간직하게 된다면, 그러면 "나는 그만 나의 관리 속에 들어가게 된다" 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여러분은 돌아서면 곧장 잊어버리는데,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취지가 무엇이냐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돈이라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돈을 보관할 금고를 하나님께서 또 만드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하나님의 그 금고를 우리가 만들어서, 우리가 하나님의 비밀을 간직하려고 하니, 그것이 그만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 성경해석의 대충돌 !!

그러므로 결국은 "나로부터 해서 나에게로 돌아간다" 라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모두가 다 틀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가 창세 전에 예수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 예수 안에서 나온 논리가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수거해서 도로 창세 전의 예수 안으로 돌아가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러한 과정에서 충돌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 속에서 나온 모든 이런 성경의 개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하는 것과 부딪치게 된다는 것이다. 성경해석에 있어서 예수님의 해석은 무엇인고 하니, 십자가와 부활로 모든 말씀을 해석을 하신다는 말이다. 즉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성경을 해석하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성경해석은 무엇인가? "내가 살아있다" 라는 것을 가지고서 성경을 해석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 나는 죽기 싫다 !!

예를 들어서, 어떤 목사님이 개척교회를 시작했다고 했을 때, 지금도 그런 분들을 많이 보고 있는데 말이다. 그러면 그분이 과연 관점을, 즉 교회나 이 세상이나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을 '예수님의 죽으심' 이라는 관점에서 시작하게 된다면, 그 개척교회가 어떻게 되겠는가?

 

아마 그분이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될텐데, 즉 "예수님의 죽으심의 능력이 저로 하여금 개척교회를 하게 했습니다" 라고 말이다. 그러면 개척교회를 하면서도 당연히 "여러분이 우리교회에 오신 것도 예수님의 죽으심 때문에 오셨습니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나'로부터 시작해서 개척교회를 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면 개척교회를 벗어나서, 고딕체 양식의 예배당을 가지고 있는 쪽과 현재의 자기 모습과 비교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저쪽은 몇 명이 모이는데, 지금 우리는 몇 명이다. 그러면 언제 저쪽 교회를 따라가지?" 라는 식으로 말이다.

 

목사가 그런 마음을 가지면 설교시간에 무슨 내용이 담기겠는가? 아무리 목사가 성경만 이야기한다고 해도, 항상 그 의도가 무엇이겠느냐는 것이다. "우리도 저 교회를 따라 부칩시다"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것은 출발부터가 목사 자신도 살아야 하겠다는 것인데, 즉 "나는 죽기 싫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12제자를 뽑아서 세운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제자들의 생각과 예수님 본인의 생각이 결국은 어디서 갈라진다는 것인가? 십자가 상에서 서로 갈라지더라는 것이다. 그러니 제자들 중에서 자동으로 예수님의 나라에 갈 자들이 있는가? 하지만 성령이 오게 되면 그런 제자들을 그리스도의 것으로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 '그리스도의 것'으로 !!

어제 낮 시간에 '그리스도의 것'에 대해서 설교를 했는데, 즉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아무리 보아도 자기가 살겠다고 보면 전혀 해석이 되지 않는데, 그런데 그 마태, 마가, 누가복음의 전체내용이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은 아들의 모습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러한 버림받은 모습이 아니라고 하면, 그 나라에 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가 살아가는 그 모든 모습이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아도 너무나 합당한 삶을, 바로 그러한 삶을 자기가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성령을 받은 자들의 특징이란 말이다.

 

◈ 시므온 - '이제는 종을 평안히' !!

오후시간에는 '시므이'에 대해서 설교를 했는데, 그때 그가 뭐라고 했는가? "주재여, 말씀대로 이제는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군요" 라고 했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가? 아기를 보고 나서 하는 말이, "이제는 내가 평안하다" 라고 하는데, 어디 아이가 천사의 얼굴로 평화롭게 잠을 자서 그런 말을 했는가? (녹취자 - 목사님, 시므이가 아닌 시므온입니다. 여기서 자주 에러가 납니다. ㅋㅋ) 

 

정답은 바로, 성령께서 그 아기가 곧 메시야임을 알려주심으로서, 그의 마음의 모든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되는데, 그래서 그의 마음에 참된 평화로움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이다. 성령께서 그렇게 연결을 시켜주니 메시야임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눅 2: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눅 2: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눅 2: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눅 2: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눅 2: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눅 2: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눅 2:33)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그래서 잠겨있는, 즉 문자 속에 담겨있는 비밀은 2번의 경우처럼, 물론 성경이 비밀의 책이 맞는데, 그것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게 고린도전서 2장에 나오는 것처럼 성령으로 알게 되면, 3번째가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그것을 우리가 간직하는 게 아니라, 이미 주님의 품안에, 즉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간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성도의 포지션, 즉 성도의 신분이란 말이다.

 

(고전 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고전 2: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우리 자신을 챙길 필요가 없고,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먹든지 마시든지 간에, 항상 그리스도의 것으로서, 그렇게 주님께서 성도답게 만들어 가시는데, 그러한 손길을 우리가 먹든지 굶든지 간에, 전셋집에 살든지 월셋집에 살든지 간에, 그것을 느끼도록 만드는 것을 우리가 항상 고백하고 증거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호세아서 1장 9절에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라도 범죄를 했을 때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것을 고정적인 우리 인간의 관점에서 보게 되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랬다, 저랬다 하는가?" 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 하나님 曰, '내가 후회한다' !!

그것은 목사나 교인들도 마찬가지인데, 즉 "하나님은 고정이 되었다" 라고 하는 그 고정관념이 문제가 되니, 성경에서 어떤 구절이 해결이 되지 않는고 하니, 하나님께서 "내가 후회한다" 라고 하는 표현인데, 그런 것이 실제로 성경에 나오는데, 그것을 우리 식으로 바꾸면 "내가 괜히 했어, 괜히 했어. 앞날을 미리 예측도 못하고 말이야. 그렇게 될 줄은 내가 미처 몰랐어" 라고 되는데, 그것이 곧 후회라는 말이다.

 

창세기 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듬직하고 어떤 경우에도 한결같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자" 라고, 즉 변함이 없고 한결같다는 조건이 있다는 전제하에서 하나님을 선택하기로 작심을 했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런 줄로만 알았던 하나님께서 "후회한다, 한탄한다, 근심한다" 라고 하니, 즉 "나는 더 이상 너거들과 놀지 않는다" 라고 나오게 되면, 우리가 마음을 놓고 믿을 분이 없어지지 않느냐고 하면서 삐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마저도 그렇게 변하게 되면 말이다.

 

(창 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창 6: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창 6:7)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 한번 마누라는 영원한 마누라 ??

하지만 그것은 우리 자신이 달라진다고 하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자꾸만 자기가 선택을 한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즉 과거에 있던 육적으로 선택을 한다는 습관이 그대로 남아있어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을 미치게 만들고 만다는 것이다. 

 

남자들이 환장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한번 마누라는 영원히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인데(ㅋㅋ), 그것은 요즘 들어서 여자도 마찬가지인데, 신랑도 좀 바꿔봤으면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바뀌지 않는 게 없는데, 그런데 마누라도 바뀌지 않고, 남편도 바뀌지 않고, 또한 자식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착하고 좋은 자식이라고 하면 바뀌지 않아도 상관이 없겠지만, 하지만 나쁜 자식놈도 마찬가지로 바뀌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호적을 파내려고 해도 어디 파내고 말고 할 수 있는 문제인가? 그것이 결코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사람의 자유는 한계가 없다 !!

이것을 철학적으로 매우 고상하게 이야기해서, "사람의 자유는 한계가 없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 인간이 어느 정도로 한계가 없는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도 감히 따먹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더러운 인간의 성질을 아시고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차단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인간을 신으로 만들어놓은 것이 아닌가?" 라고 하는, 라이벌 신으로 말이다. 그야말로 감당이 되지 않는,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저질적인 존재로 만들어놓은 것이 아니냐고 하는, 그런 생각이 들 정도라는 말이다. 그래서 선악과와 생명나무를 규명하는데는 상당히 그 내용이 난해하다는 것이다. 참으로 풀기 어려운 코드가 그 안에 들어있는데 말이다.

 

아무튼 바뀌지 않으니 믿겠다고 나서는 것은, 우리 자신이 과연 누구를 믿을 자격이 있는지, 그것을 검토하지 않는 상태에서 그런 주장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매일같이 바뀌면서도, 바뀌지 않는 하나님을 찾는다고 하는 것이, 그것이 전혀 우리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욕심이고 탐욕이란 말이다. 

 

◈ 그러나, 고마운 것은? 

하지만 고마운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죄를 지으면 죄를 짓는 그 자리에까지 주님은 찾아오시는데, 그렇게 죄를 짓는 현장에까지 나타나셔서 우리를 용서해주시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을 우리가 죄를 짓는 세상으로 유지가 되어야하고 말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러한 죄에도 용서를 받을 수 있는 능력이 주님의 능력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세상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조종되고 관리되고 만들어져간다는 것이다. 그것을 로마서 8장에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라고 한다는 말이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 성도 - '아하, 나는 믿을 수가 없구나' !!

물론 우리는 이 구절을 자기에게 행운이 찾아올 때 사용하려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반칙인데, 비록 낭패를 당하고 어려움을 당했을 때도, 그것마저도 선이라고 받아준다고 하면, 그런 사람은 그야말로 매일같이 획가닥 획가닥 변하는, 변화무쌍한 그런 변화 속에 같이 묻혀서 변화가 되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자기 자신임을 인정하는 자라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이 곧 성도이고 말이다.

 

물론 그런 변화가 어떤 변화인지를 알 수가 없지만, 그때그때 달라서 말이다. 하지만 그 방향은 이미 정해져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인데, 그래서 매일같이 우리의 온 몸을 덮고 있는 피부에 주름살이 늘어나고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동창을 40년만에 만나보라는 것이다. 물론 반갑기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서로가 늙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너무나도 실망스럽다는 것이다. 자기가 알고 있는 기억의 동창은 40년 전의 동창생인데, 그것만은 바뀌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막상 만나면 쭈글쭈글하게 바뀌어져 있다는 것이다.

 

◈ 죽게 만드는 환경이 누구를 위한 환경인가?

그래도 동창은 좀 괜찮은데, 첫사랑의 경우에는 그야말로 난감하다는 것이다. 만약에 40년 뒤에 첫사랑을 만난다면 그 동안의 모든 환상이 다 깨어지고 마는데,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마 8:21)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마 8:22)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그것이 무슨 뜻인가? 사람을 믿지 말고, 그렇게 사람을 죽게 만드는 환경이 도대체 누구를 위한 환경인지, 그것을 보라는 것이다. 즉 "너거들이 내 제자인가? 그러면 저 사람이 죽는 것과 나 예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보라"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아버지의 장례를 따로 하고, 또 주님을 믿는 것도 따로 한다고 하면, 그렇게 '따로' 라는 것이 안 된다는 말이다. 아버지의 장례가 자기가 이 땅에서 죽는 것과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것이 동일한 환경이라는 사실을 받아 들어야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이다.

 

그럴 때 제자라고 하면, "내가 예수님의 제자인데 어떤 이익이 올까?" 라고 한다면, 그것은 제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제자가 아닌데 제자가 되게 했다" 라고 하면 제자이고 말이다. "내 인생은 내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라고 하면, 그게 왜 큰 문제가 되는데, 왜 그런가?

 

◈ '독자적' 이란 경계가 항상 !!

그것이 '독자적' 이라는 것인데, 그러한 바운더리가 형성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독자적' 이라는 경계가 쳐지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하지만 그런 경계는 하나님이 인정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이 '독자적' 이란 경계가 문제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라고 하신 것도, "인간의 경계선을 넘지 말라" 라는 의미인데, 하지만 인간은 그것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경계선을 넘어서고 말았는데, 즉 하나님마저도 자기 경계선에 포함시키겠다고 고집을 부린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다가 된 통으로 당하게 되는데 말이다.

 

그 뒤에 하나님이 찾아오심으로서 인간은 죽음에서, 즉 흙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비로소 아담은 알게 되는데, 누가 뭐라고 해도 "인간은 죽음에서 만들어졌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뿌리는 죽음이고, 그 죽음이 인간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 안개는, 목적이 없어 !!

물론 만들 때는 은혜로 만들었는데, 하지만 그 은혜를 망각하게 되면 도로 죽음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야고보서 4장 14절입니까? (빙고!) 거기에 보면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 안개의 특징이 무엇인가? 목적을 만들어내면 안 된다는 것인데, 우리의 인생이 힘든 것은 목적이 있기 때문인데, 즉 하루일과의 목표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힘들다는 말이다. 

(약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 그러나, 우리 인생은 목적과 목표로 !!

회사에 아침에 출근해서 회의를 할 때 뭐라고 하는가? "오늘의 일정은 어떻고" 라고 하면서 목표를 정해주는데, 아니면 부장이나 과장이 자기에게 각자의 하루 일정을 써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저의 오늘 일정은 이렇습니다" 라고 적어낸다는 것이다.

 

경찰서의 경우에는, 과장이 일정을 내라고 하면, "오전에는 유치장 배식구를 검사하고(?), 또 오후에는 지난 번 사건을 정리하겠습니다" 라고 하면, 그러면 과장이 "OK, 나중에 결과보고를 하도록 해"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회사도 마찬가지인데, 즉 "오전에는 강남지점을 돌고, 오후에는 싸이를 만나겠습니다" 라고 하면, "알았어. 나중에 결과를 보고해"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것이 바로 셀러리맨들의 스트레스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분명히 어제 교회에 가서 인생은 안개라고, 그리고 그런 안개는 목적이 없다고 들었는데,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목적을 가지고 있지?"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 그러면 성령께서 !!

그럴 때 성령께서 어떻게 하시는가? 그 상사에 의해서 주어진 목표와 예수님의 십자가를 서로 관련을 시키는데, 그러면 "아하, 내 몸은 죽는 것보다 사는 쪽으로, 살아도 이왕이면 잘 사는, 그리고 영원히 죽지 않는 쪽으로 방향이 정해져있고, 그리고 예수님은 그런 죄를 대신해서 씻어주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구나" 라고,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직장 상사에게 지시를 받는 것은, 그것은 곧 우리의 몸이 품고 있던, 즉 잠재되어있던 우리의 죄를 마음껏 펼치고,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것은, 자꾸만 자기를 안개가 아니라고, 즉 "나는 목표를 가지는 정당한 존재이다" 라고, 그렇게 안개가 아니라고 우기는 그 우김이 자기 안에 잠복되어있음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가 나이가 60이 되어서 퇴직을 하게 되면, 연금이나 타고 집에서 슬슬 놀면서 성경공부나 참석을 하고 말이다. 그러면 또 다시 허무하게 되는데, 시간이 남아돌아서 미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몸의 습관이 목표를 향해서 성취하는, 그런 성취욕과 습관이 평생동안 배여 있어서 말이다. 누군가가 시키는 사람이 없으면 좋을 줄로 알았는데, 그런데 막상 그렇게 시키는 사람이 없으니 또 화가 난다는 것이다.

 

◈ 여러분, 이번에는 보성1차입니다 !!

그래서 목사는 또 노인들을 교회에 불러내어서 그런 생각이 들지 않도록 일을 시키는데, "이번에는 교회 이미지를 위해서 우리교회 주위를 청소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 일단 '우리교회' 라고 팻말을 근사해서 만들고, 그리고 회비를 내서 유니폼도 맞추어서 입고는 동네를 여기저기 헤집고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여기가 보성1차인데, 그러면 목사는 뭐라고 하겠는가? "여기를 여리고 성이라고 여기시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청소합시다" 라고 하면, 그러면 최고참 권사가 기도를 하고 나서 돌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물론 부목사가 양복을 입고 앞에서 지시를 하는데, 제가 지금 너무 실감나게 이야기를 해서 혹시나 오해를 할지 모르겠는데, 모두가 다 보았던 것이란 말이다(ㅋㅋ).

 

그런데 그렇게 해놓고 그냥 집으로 돌려보내면 안 되는데, 목회란 것이 말이다. 떡국이라도 한 그릇 맛있게 해서 대접하면 노인네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아이쿠,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보람있게 보냈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갑자기 안개가 아닌 보람이 있는 자가 그만 되고 마는데, "그래, 나는 보람이 있는 존재이다" 라고 말이다.

 

어휴, (목사님의 한 숨 쉬는 소리) 교회장사는 그렇게 해야된다는 것이다. 늘 계획을 만들어서 돌리고 굴리고 해야만, 교회에 대한 애교심이라고 할까, 그런 것이 생긴다는 말이다. 그러다가 정이 들어서 홀로 사는 장로와 권사가 눈이 맞아서 결혼할 수도 있고 말이다. 그것이 아니면 자기 자식들을 서로 결혼을 시킬 수도 있고 말이다. "그래도 믿는 사람끼리 같이 하면 좋지" 라고 하면서 말이다.
 
◈ 그래서, 십자가는 바위다 !!

그러면 교회가 그야말로 완전히 계모임이 되는데, 아무리 성경에서 인생은 안개라고 해도, 그 안개는 그만 사라지고 목표를 향해서 달려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안개라고 해도 우리는 사람인지라, 하루의 일정이 슬그머니 튀어나오는데, 그래서 여기 교재에 보면, "십자가는 바위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교재 247페이지를 보자.

** 이렇듯 십자가는 바위다. 윤리라는 이름의 미신적 행위를 산산조각 낸다. 인간들은 자기 행함을 의지하고 있기에, 용서받을 만한 행위가 따로 있다고 여긴다.

(롬 9:32)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그리고 자신은 마땅히 용서를 받을 만하다는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서, 거기에 합당한 기억들을 끌어 모은다. 이렇게 되면 자기의 행함 말고 달리 외부의 것에 전적으로 의지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미 자신이 의지할 만한 것을 내부적으로 착실하게 생산하고 있는 마당에, 구태여 하나님의 수고를 더 요청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지금 자기가 스스로 잘하고 있는데, 그렇게 잘 행하고 있는데, 구태여 주님을 또 다시 믿을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굳이 "주여, 도와주소서. 믿습니다. 주님만을 의지합니다" 라고 할 이유가 무엇이 있느냐는 말이다.

 

하나님으로부터 한번 도움을 받았으면, 그 능력을 계속해서 써먹으면 되는데, 그러니 "믿음에서 믿음으로" 라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서 행함으로"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나가면, 그것이 사람들에게 먹혀들고 납득이 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러나 믿음이란, 인간이 자신의 행함을 의지하듯이 하나님을 믿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아예 하나님께서 한 남자를 죽였다는 사실의 내막을 알아야, 그것이 믿음이다. 

 

◈ 한 남자를 죽였다 !!

나이가 든 노인네들을 모아서 쓰레기 줍기를 해서 좋은 우리교회의 이미지를 남겼다고 한다면,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되는데,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자기의 행함을 의지하듯이, "지난번에는 쓰레기 줍기를 해서 효과를 봤으니, 다음에도 또 하자" 라고 하면 되는데,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 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말인가?

 

그것은 바로 교재에 나오듯이, 하나님께서 한 남자를 죽였다는 사실의 내막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이 곧 믿음이란 말이다. 여기서 "한 남자를 죽였다" 라고 하는데, 자기가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 15년 전 그때 그것을 믿으면 되는데, 왜 계속해서 "한 남자를 죽였다" 라는 사실을 믿어야 하느냐는 말이다.

 

그 이유는 바로,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왜 그런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용서를 하실 때, 그 근거를 인간이 용서를 받을 만한 조건을 보고 용서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과는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한 남자를 죽임으로서만, 그것이 용서가 흘러나오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아파트 단지에 청소를 하고 쓰레기를 주었다고 하면, 그러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용서의 근거가 한 남자를 죽인 것, 즉 예수님을 죽인 것에다 무엇이 더해지겠는가? 자기가 개과천선을 해서 아파트 단지에서 담배꽁초를 주었다고 하는 것이 반드시 포함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 울면서 향수를 예수님의 발에 뿌려도 !!

복음서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가 울면서 예수님의 발에다 향수를 뿌렸는데, 그런데 그때 KBS 기자가 와서 "마리아님, 당신이 너무나 착한데, 그런데 주님께 용서를 받았다면서요?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라고 하면, 그때 마리아가 "제가 예수님을 너무 사랑해서 발에 향수를 뿌리고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렸는데, 그래서 용서를 받았습니다" 라고 하면, 그만 문제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눅 7: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눅 7:37)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눅 7: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예수님을 만나서 울면서 향수를 붓고 하면, 그것이 과연 자기가 용서를 받는 근거가 되는가? 전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반대로 이야기해서, 만약에 그러한 것을 내세운다고 하면 하나님은 싫어해서 "여자야, 그만 머리카락을 치워라" 라고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의 목사들은 왜 주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해서 설교를 하는가? 그러면서도 과연 교회라고 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해서 떠벌린다면, 도대체 그게 무슨 짓이냐는 것이다. 진짜 하나님께서는 오직 예수님의 피로만 용서를 하시는데,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나 간단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 오직 제물의 '피 흘림' !!

구약에서 제사장들이 용서를 받은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이 제사를 잘 지내서 용서를 받았는가? 그게 아니면 자기들이 바친 제물의 피 때문에 용서를 받았는가? 제물의 피로 인해서 용서함을 받았는데, 결코 자기 피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9장에 보면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히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그런데 그 피에 가장 근접해서 활동하는 제사장들은 늘 용서를 받아야 하는데, 그것을 우리가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남들은 "우리 제사장님은 너무 착해. 매일같이 제사를 드리고 말이야" 라고 할지 몰라도, 하지만 막상 본인들이 양을 잡을 때는, 그렇게 양을 잡는 행위로 용서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사야서 6장에서, 이 이사야가 하나님의 선지자이고 바르게 살았는데, 그런데 막상 성전에 가니 어떻게 되었는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라고 하는데 말이다.

(사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사 6:6)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사 6:7)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 이사야는 만남의 사건을 전해야 !!

그러므로 이사야는 망하는 백성 가운데 합류하게 되는데, 즉 이사야는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망하는 백성 가운데 한 사람일뿐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그들을 대표해서 이사야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천사가 와서 숯불을 가지고 이사야의 입술을 찌지는데, 그러니 이사야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사야에게 숯불을 가지고 찌졌다는 것, 그러한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사야는 결국 죄인이며, 하나님의 숯불로만 용서가 된다고 하는 것, 그러한 만남의 사건을 이사야는 백성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전하게 되면, 아니나 다를까 망하는 백성임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알았지만, 막상 전해보니 그들은 패역하고 교만하기가 짝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도 그런 줄을 알았지만, 즉 "하나님이 이렇게 용서를 해준다는 소식을 듣고도, 설마 귀를 막고 얼굴을 돌릴까?" 라고 했는데, 진짜로 그렇게 하니, 죄인이라고 하는 그 정도가 아니라, 그런 것까지도 다 가로막아버렸다는 것이다.

 

◈ 그들은 왜 나갔을까?

복음을 듣고 나간 자들을 보면 참으로 마음이 아픈데, "어떤 점에서 그들의 마음이 돌아섰을까? 과연 무엇이 그들의 심기를 건드렸을까?" 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모든 용서의 근거가 우리의 행함이 아닌, 오직 예수님의 피로만 용서하신다는 것, 그것이 그들의 마음을 건드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있는고 하니, 그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고백들이 있는데, 즉 "그렇다고 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이렇게 한 것이 도대체 무엇이 되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제가 많이 듣고 많이 보기 때문에, 그래서 "저것이 바로 결국은 성령을 받지 않았기에 그렇구나"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관심사가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가치를 잃기 싫어한다는 사실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감히 우리가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이렇게 볼 때, 용서를 받지 못할 자는 단순히 용서를 안 받겠다고 버티는 모습이 아니라, 자기의 행함을 의지하면서 하나님께서 한 남자, 즉 예수님에게 어떤 사건을 일으켰느냐에 무관심한 태도를 가질 때이다.

 

◈ 돌리고, 돌리고, 돌리고 !!

그러니 나쁜 짓을 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시선이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벗어나는 것이 곧 죄가 된다는 말이다. 강도짓을 하고 성폭행을 하는 게 죄가 아니고 말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잊어버리고, 거기에서 얼굴을 돌리는 것이 곧 죄라는 말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매일같이 죄를 짓는데, 우리의 시선이 하루가 멀다하고, 아니 몇 초도 견디지를 못하고 다른 곳으로 시선이 돌아가니 말이다.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의 시선을 돌리는데, 그래도 돌아가면 또 다시 성령께서 돌려주신다는 것이다.

 

우리의 관심사가 안철수와 문재인과 박근혜로 가면, 그들의 지지율이 어떤지 궁금해서 살피고 있으면, 그리고 싸이가 빌보드 챠트에 언제 일등을 하는지, 그런 것에 관심이 있으면, 그러면 또 성령께서는 어떻게 하시는가? 그런 우리의 시선을 돌리게 하신다는 말이다. 

 

◈ 아하, 그게 곧 '지옥 스타일' !!

제가 가락교회에서 강의를 하고 서울역으로 가는데, 그런데 서울시청 앞에서 싸이가 공연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쩔 수가 없이 차를 돌려야만 했는데, 왜냐하면 거기로 계속 가다가는 기차를 도저히 탈 수가 없으니 말이다. 그때 싸이가 십자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 자리에 섰는가?

 

그것이 아닌데, '강남 스타일'의 말춤 성공을 자축하기 위해서 모였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지옥인데, 하고 보니 말을 좀 심하게 한 것 같은데, 그것이 천국은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천국이 아니면 결국은 지옥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천국은 아니라는 것이다(ㅋㅋ).

 

◈ 소풍을 온 이 세상에서 !!

그래서 우리는 나그네 인생을, 그야말로 소풍을 온 것과도 같은 우리의 이 인생을, 원도 없이 지옥을 구경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얼마나 살지는 몰라도, 우리 권사님이 백 세를 사시면, "아하, 저게 지옥이구나" 라고, 그렇게 마음껏 구경해보시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용서를 거부하는, 즉 예수님의 죽으심에 근거해서 용서하신다는 것을 역겨워하고, 그런 자들을 혼내주려고 덤벼드는 세상, 그런 자들을 죽이려고 포위하는 세상, "누구야? 우리교회에서 십자가 복음만 전하는 놈이?" 라고 하면서, 그렇게 색출하려는 세력이 활동하는 이 세상, 물론 그렇게 주님이 지옥을 체험하게 하시는 것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이로서 성도는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보다 더 우선적으로 '그분이 죽었다'는 사실을 중요시하게 된다.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과, 앞으로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사실만이 두고두고 다가오는 소중한 현실이다.

 

◈ I am here !!

그런데 우리가 "그분이 죽었다" 라는 사실을 잊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내가 여기 있다" 라는 것만 남게 되는데, 그래서 "누가 나에게 먹고살라고 돈을 가져다주지 않는가?"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여기 있다" 라는 것만 중요하게 여기게 된다는 말이다. "I am here" 라고, 도저히 영어를 아니할 수가 없는데(ㅋㅋ), 아무튼 우리는 눈만 뜨면 "내가 여기 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김종환 씨가 불렀던 '사랑을 위하여' 라는 노랫말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아침에 눈을 떠서 당신이 거기에 있으면, 그게 곧 행복이 아니고 무엇인가?" 라는 것이다. 그렇게 "내가 여기 있다" 라는 것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침에 직장에 나가서 그 살아있는 '나'를 더 살려야 하는데, 그러면 또 매우 복잡해진다는 것이다. 환경이 곧 지옥이라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독자적으로 그것을 다 끊어버리고 무엇으로 응축되는가? "나는 살아있기에 살아남아야 돼" 라고, 그것만 생각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돈까스 집에 첫 손님이 왔다고 하면, "아이쿠, 살려주시니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 손님이 들어와서 하는 말이 "아저씨, 돈까스가 왜 이렇게 맛이 없어요?" 라고 한다면, "첫 손님부터 왜 이렇게 재수가 없지? 그만 나가세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마음속으로 말이다. 그러니 손님의 맛없는 고통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저 사람은 오늘 나를 살려줄 음식을 팔아줄 사람이 아니다" 라는 사실이 더욱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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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당을 비롯한 서비스업의 성공팁 2 가지 !!
(1) 손님은 무조건 옳다.
(2) 그래도 손님이 틀렸다고 생각하면, 1번을 다시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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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통이 없어요, 소통이 !!

그런 면에서 우리교회에도 누군가가 와서 또 따지고 했으면 참으로 좋겠는데, 진리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면 말씀 가운데 서로 소통이 되고 하는데, 그런데 교인들이 말씀 자체에는 관심이 없으니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 질문 - 사람들이 하는 말이, "용서를 받은 자는 이렇게 이렇게 살아야 한다" 라고 하면서, 왜 그것을 칭찬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공격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것에서 보람을 느끼는데 말입니다.

 

그렇게 해야 더 깊어지는데, 용서를 해주신 분에게는 관심이 없고, 용서를 받았다는 자기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가 보니, 그게 자기를 깐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그러니 용서를 받은 자기 자신을 믿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게 아니고 말이다.

 

성령으로 왔으면 예수님을 믿게 되는데, 그런데 성령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즉 육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다시 육으로 되돌아가고 만다는 것이다. 예수, 성령, 삼위일체 등등, 그 모든 것이 자기에게 귀속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성령을 받지 않았다는 의미이고 말이다. 그러니 성령을 받은 받은 자는 이러한 것이 드러나도록 더욱 더 외쳐야 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 249페이지를 보자.

** 우리 인간은 신으로부터 감동을 원했지, 정죄를 요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감동인가? 정죄인가?

우리 인간은 우리를 감동시켜주는 하나님을 원한 것이지, "너도 예수님이 아니었으면 버림을 받아야 돼. 버림을 받은 예수님을 봤지?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하게 하는 것이 진짜 아버지야. 아버지는 버린다는 말이야. 모든 인간들을 다 버리고,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받은 자들을 건지는 거야" 라고, 그렇게 나오는 아버지를 우리는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전혀 감동이 되지 않으니 말이다.

 

이것이 좀 어려운 내용인데, 자연종교가 그냥 계시종교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한 단계를 거치게 되는데, 즉 자연종교는 예술종교로 바뀌면서, 그것을 계시했다고 한다는 것이다. 자연종교는 눈에 보이는데, 그것을 상징화를 시키면 역시 눈에 보이는 예술이 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아름다운 그림이나 듣기 좋은 소리음파도 다 우리의 감각기능을 통해서 보고 느끼는데, 그게 곧 예술이라는 것이다. 즉 자연을 우리 인간이 최고로 극단적으로 승화시킨 것이 곧 예술인데, 인간은 그러한 예술을 계시라고 보면서 감동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실제 죽으심은 감동이 아니고,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판단에 대해서 책망을 하신다는 말이다.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하게 되면 그것도 하나의 예술적 행태로 나가는데, 그래서 그런 사람의 기도를 들어보면 거의 예술적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다. 기도원에 그런 예술가들이 많이 있는데 말이다.

 

◈ 예술이 아닌, 십자가 !!

하지만 성령의 탄식으로 하는 기도는 결단코 예술이 아닌데, 십자가를 근거로 해서 하신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제가 유투브에 기도에 대해서 올릴 작정인데, 지난번에 십일조와 안식일에 대해서 했는데 말이다. 혹시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앞으로 할 것이 많다는 것이다. 전도, 기도, 예배 등등 올릴 것이 아직까지 많이 남아있다는 말이다.

 

(요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 기도의 핵심은?

 아무튼 기도의 포인트는 무엇인고 하니, 주님이 하신 기도대로, 그러한 주님의 자기 작품대로 성도에게 하게 만드는 것이 기도의 특징이란 말이다. 주기도문의 핵심이 바로 그것인데, "내가 이런 기도를 하니, 너거들도 이런 기도를 해" 라고, 성령을 통해서 그렇게 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 6: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6: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그렇게 되면 차이가 나는데, 주님에게 지시를 받지 않은 기도와 말이다. 그들의 기도를 연구해보면, 즉 교회에 다니는 불신자들의 기도를 연구해보면, 그들의 기도의미가 무엇인지 성경을 통해서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 그들은 왜 하나님을 믿지 않은가?

불신자들은 말 그대로 신을 믿지 않는 자들인데, 그러면서도 교회에 나온다는 것이다. 왜 신을 믿지 않는고 하니, 그 이유가 신이 자기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신을 선택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자기가 선택을 해야 자기 것이 되는 것이지, 자기가 선택도 하지 않은 것이 자기에게 남아있다고 하면, 몸에 맞지 않은 옷처럼 자기 것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무엇인가 선택을 했으면, 그 선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것으로 정리정돈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택배로 옷을 받았으면 그냥 던져놓는 것이 아니라, 자기 옷장에 정리를 해서 넣어놓듯이 말이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다 자기 것인데, 자기 장롱에 넣어놓았으니 말이다. 혹은 그 안에 비상금도 들어있을 수 있고 말이다.

 

◈ 누가 누구를 선택하는가?

그렇게 정리를 하게 되는데, 그럴 때 "내 인생은 내가 관리한다" 라고 하는, 기본적인 버릇을 그대로 행세할 수 있는데,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창세 전에 내가 선택했다" 라고, 즉 "너거들이 나쁜 일을 하든지 좋은 일을 하든지,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나의 사랑을 받은 자는 천국에 가고, 미움을 받은 자는 지옥에 간다" 라고 하면, 그런 신은 도저히 자기가 관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를 선택한 하나님을 내가 선택할 수는 없다" 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른의 주먹이 아이들의 주먹보다는 큰데, 그래서 보쌈을 하듯이 삼킨다고 하면, 큰 어른의 주먹이 작은 아이의 주먹을 삼켰으면 삼키는 것이지, 조그마한 아이의 주먹이 큰 어른의 주먹을 삼킬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물론 대인의 관계에 있어서는 서로가 손의 크기가 비슷하기 때문에, 이렇게 잡고 또한 이렇게도 잡을 수가 있는데,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덮치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시고 난 다음에 그 주위에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를 배치해놓으셨다는 것이다. 즉 "너희는 내가 만든 것이지, 너희가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라고 의미라는 말이다.

 

그런데 인간은 "나도 독자적으로 선택할 수 있어요" 라고 하면서 선악과를 따먹어 가지고는, "하나님, 이제는 선악과가 없습니다. 그러니 나를 보고 선악과 쪽으로 간섭하지 마세요" 라고 하면서 독자적인 선언을 해버렸을 때, 뒤에서 마귀는 좋다고 박수를 친다는 것이다. "그래, 바로 그것이야. 한번 해보는 거야" 라고 하면서 나오는데, 바로 그때부터 인간의 죄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 다윗은, 시편 51편에서 !!

그래서 다윗은 시편 51편에서 뭐라고 하는가? "내가 사람에게 죄를 지은 게 아니라, 내가 죄를 지었다고 하면 오직 하나님에게만 지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의미인가? "내가 우리야 장군을 죽이고, 마누라를 겁탈하고 한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죄인이 되게 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들이었다" 라고 본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동안 자기가 번제를 드리고 제사를 드린 그 모든 것은 모두 씨잘대기 없는 짓들이었는데,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봉사를 하고 한 것들도 말이다. 하나님께서 진짜로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 인데, 즉 주님 앞에서 죄를 지어서 그야말로 탕자처럼 상할 대로 다 상해버린, 그 탕자가 집에 오듯이 그대로 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오게 되면 주의 신이 용서해주시는데, 즉 우리 손에 의해서 죽으신, 그 꺾으신 뼈를 근거로 해서 우리를 받아주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야는 무엇이면 다윗은 무엇인가? 우리야나 다윗이나 하나님의 제사라는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서 준비된 제물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곧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율법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 누가 지킨다는 말인가? 하나님께서 자기 율법을 자기가 지켜서 우리에게 공짜로 예루살렘에 성에 우리를 넣어준다고, 그것을 은혜라고 하는데, 그래서 18절에 보면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라고 한다는 말이다.

 

(시 51: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시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 51:6)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시 51:7)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시 51:8)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
(시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8)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 오직 예수님 자신의 몸에 근거해서 !!

그런 의미에서 안개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 쪽에서 만들어내는 모든 목표나 기대치는 이미 주님에 의해서 의도된 것인데, 그래서 여기 교재에도 나오듯 "우리 인간은 신으로부터 감동을 원했지, 정죄를 요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주님은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려고 오셨다는 것인데, 그런 죄인을 불러서 의인이 되게 하신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우리가 죄인이 되는 근거가 무엇인고 하니, "내가 왔습니다" 라고 하는, 즉 "내가 죄인임을 내가 잘 알고 있습니다" 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몸에 근거해서 우리를 죄인에서 의인으로 바꾸어주신다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의 몸에 근거해서 말이다.

 

그게 교재 249페이지에 나오는데, 살펴보자.

**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기대와 너무 어긋나게 실현되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방식이다.

(마 26:26)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마 26:27)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마 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 예수님으로부터 나온 떡 !!

여기에서 제자들이 받은 떡은 어디에서 나온 떡인가? 그게 카스테라인지 빵인지 몰라도, 그것이 제자들이 독자적으로 준비한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이 주신 것인가? 예수님이 주신 것이란 말이다. 보통 사람들이 장면을 마지막 만찬이라고 하는데, 새언약을 세우는 이 자리는 항상 모든 것이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떡을 주셨는데, 그러면 그 떡을 물론 그 떡을 예수님도 드시지만, 예수님과 함께 먹었던 그 떡이 제자들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그 떡의 취지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것은 내 몸이니" 라고 주셨으니 말이다. 그러면 그 단체는 새언약으로 뭉쳐진 단체가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새언약의 완성에 그들은 하나의 증인으로서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라고 하셨다면, 그렇게 되면 제자들은 '제자들의 것'으로 인해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집어넣었던 그 새언약의 피와 살을 증거하기 위해서 제자들이 구성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는 제자 스스로가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를 제자가 되게 하는 것은, 예수님의 피와 살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제자가 되지 않게 하지를 않고 반드시 제자가 되게 하는, 그러한 원동력을 갖추게 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 250페이지를 보자.

** 피가 우리 속에 들어오고, 예수님의 살점이 우리 속에 들어온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우주전체보다 크고 귀한 것이 우리 속에 들어온다는 말이다. 성도의 인생은 예수님의 피를 마시고 살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현실에서 버림받은 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쓰레기더미에서 건져 올리셨다. 사람들은 그분을 용서하지 않았지만, 우리 하나님은 그분을 용납하셨다.

 

(고후 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쓰레기더미, 즉 지옥에서 건져 올리셨는데, 그리고 사람들은 그분을 용서하지 않았지만, 우리 하나님은 그분을 용납하셨다고 하는데, 무슨 의미인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건을 통해서 드러내시는 하나님이 같다는 말인가? 다르다는 말인가? 다르다는 것이다.

 

◈ 볼트와 너트 !!

조금만 더 해보겠는데, 우리가 기계조립을 하려고 하면 볼트와 너트가 잘 연결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뭐라고 하는가? "소문난 하나님(?), 믿음이 참 좋다. 저 목사님은 세상 목사들과는 달라. 그야말로 존경을 받을 목사님이야. 저 목사님은 오직 예수님만을 생각해" 라고 하는, 암암리에 그런 유명한 목사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과거에는 저와 관계된 자들도 제법 있었는데, "교회가 이 세상에서 타락하는 것을 참으로 가슴 아파하면서 지금도 기도하면서, 그들의 잘못을 용감하게 지적하는 선지자와 같은 영혼을 가진 목사들이다" 라는, 그런 소리를 많이 듣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저는 안타까운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근본적으로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 자체를 이단으로 본다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면 무조건 이단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볼트가 다르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숨어있는데, 그런 하나님께서 나타날 때는 하나님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즉 새언약인 예수님의 살과를 피를 통해서 나타나신다는 것이다.

 

◈ 그 아버지는 그 아들만 !!

이것을 어제 오전시간에 설교를 했는데, 물론 시간상 상세하게는 하지를 못했지만 말이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다윗언약이 있고, 그 징계를 통해서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아들만 알고, 또한 아들은 아버지만 아는데, 그래서 그 사이에 우리 인간들은 전혀 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말이다. "주께서 내 주에게" 라고 할 때, 어떻게 감히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이 그 사이에 끼들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시 110:1) [다윗의 시]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그렇게 오직 아들이신 예수님만 아시는 그 아버지를, 이 세상 바깥에서 무슨 하나님을 그렇게들 많이 알아서 찾고 있는지, 그러니 볼트가 다르다는 것이다. 영성을 훈련을 한답시고, 모든 것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한다고 하면서, 그들이 무엇을 부정하지 못하는고 하니, "내가 알고 있던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여러분, 하나님 자체가 틀립니다" 라는 말을 할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그들이 하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맞고, 다만 우리가 몰라서 빠진 것이 있는데,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이란 볼트에다가 예수님이란 너트를 조립하면 온전한 신학이 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고, 다만 예수님을 몰라서 그러한데, 그러니 그 몰랐던 예수님을 알아서 합치면 성경에서 말하는 온전히 하나님이 된다는 것이다.

 

◈ 하지만, 왜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하지만 그게 아니거든요. 만약에 그럴 같으면 예수님께서 누구에게 죽어야 하는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죽어야 하는데, 하지만 예수님을 잡아죽이라고 주동한 자들이 누구인가? 예수님이 누구에게 포위되어서 잡혔는가? 그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 의해서 잡혔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울이란 자가 다메섹으로 가는데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뭐라고 하셨는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앞에 사울이 뭐라고 했는가? "주여, 뉘시오니이까?" 라고 했는데, 뭔가 칸이 비워져 있는데, 그 빈칸을 예수님께서 채워주셨다는 것이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라고 말이다.

 

(행 9: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행 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행 9: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여기서 '네가' 라는 것은 사울인데, 그 사울이 무슨 열심을 가지고 그렇게 했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열심이라는 말이다. 즉 하나님이 예수님을 핍박할 수밖에 없는 그 하나님을 신봉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인해서, 그것으로 십자가의 내용이 꽉 차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십자가를 믿습니다. 압니다"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우리가 진짜 하나님을 핍박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니 그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악마가 조작해서 심어놓은 그런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아는 하나님은 모조리 다 악마가 조작하고 상상해서 집어넣은, 그 악마의 다른 형태이고 모습입니다" 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란 말이다.

 

◈ 삼위일체의 경우에 !!

그래서 성령이 오게 되면 오직 예수님만을 앞장세우게 되는데, 하지만 성령이 오지 않으면, 하나님을 앞장세우고는 거기에 맞지도 않은 예수님을 억지로 갖다 붙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게 소위 '삼위일체' 라는 것인데, 즉 "구약의 단일신이 어떻게 삼신이 될까?" 라는 것을 연구해서 나온 결론이란 말이다.

 

그렇게 나름대로의 묘안을 짜낸 것인데, 그래서 "하나이지만, 하나가 아니고 둘이 되고" 라고 하면서 온갖 이상한 소리를 다한다는 것이다. 아다나시우스의 '고백서'에 보면 그런 것이 나오는데, 이번 여름 수련회의 녹취록에 보면 그것이 다 나와있는데, 그리고 "그러한 것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천국과 지옥은 오직 예수님의 죽으심에 근거해서만 구분이 되는 것이지, 어떤 특이한 문장을 외우고 말고 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는 자꾸만 예수님을 믿는 것을 어떤 식으로 고백하게 하고, 또한 어떤 식으로 행동하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맞다고 단정할 수 있는, 그런 기준점을 자꾸만 세우려고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것만 더하겠는데, 교재를 보자.

** 이로서 자신을 매일 쓰레기더미에나 빠져있는 자임을 고백하는 자라야, 예수님의 피와 하나님의 용서해주심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매일같이 하나님은 우리 성도를 쓰레기더미에 던지시고 매일같이 건져내신다. 이것이 성도가 알고 있는 현실의 내막이다.

(고전 4: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를 쓰레기더미에 던지시고 매일같이 건져내시는데, 즉 하나님은 매일같이 지옥을 구경하게 하시고 천국백성이 된 것을 확인시키신다는 것이다. 지옥을 구경시키고, 이미 천국백성임을 확인시키고 말이다. 지옥백성이 되었다가, 천국백성이 되었다가, 그렇게 왔다갔다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자기 백성이 이미 천국백성이기 때문에, 이 세상을 지옥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 회개는 반항이다 !!

서울의 가락교회에서 어떤 분들을 만나면서 자동차 안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회개가 무엇인고 하니, "회개는 반항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회개가 왜 반항인고 하니, 사람의 마음가짐은 그 사람의 주변을 둘러싼 환경에서 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회개를 했다는 것은, "내가 잘못되었습니다" 라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자기를 그런 식으로 가르쳐왔던 모든 자기 주변에 있는 것에 대해서 아주 강력하게 "아니, 아니야!" 라고 하면서, 그것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마치 사마리아 여인이 물동이를 던지듯이 말이다.

 

그것이 곧 회개인데, "나는 심봤다" 라고, 즉 "나는 메시야를 만났다" 라고 하면서 내동댕이를 쳐버린다는 것이다.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이전에는 내가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그러나 이제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면서 이 세상에 예수님을 증거하면서 나서는 것, 그 자체가 곧 회개에 합당한 열매이고 모습이고 행동들이라는 말이다.

(딤전 1: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 성도는, 이 세상에 반항하기 위해서 !!

그래서 회개하는 인간을 붙잡아서 "당신, 회개가 뭐요?" 라고 물으면 반칙인데, 그러한 것은 묻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 사람은 자기가 회개하는 분위기 속에 잠겨있다고,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해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회개할 수밖에 없는, 이 세상에 대해서 반항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것은 바로 그 사람 속에 이미 생명이 역사하고 있기 때문에, 생명이 아닌 환경과 생명인 환경의 차이점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반항하기 위해서 살아간다는 말이다. 그러면 어떤 식으로 반항을 하는가? 회사에 사표를 내고 하는 것이 반항이 아니라, "세상은 이래서 지옥이고, 그 세상이 나를 이런 식으로 만들었다" 라는 것을 자인하는 것, 그것은 곧 이미 성령이 함께 계시기 때문에 우리를 앞장 세워서, 이 세상에 대해서 복음을 전파하는 하나님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원하는 정다운 사랑이 아니라 너무나 낯선 사랑으로 다가왔고, 그것이 우리에게 덮쳐서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반항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가 우리의 눈동자에 가득하게 되어서, 그래서 우리는 이 몸이 우리 몸이 아닌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먹든지 마시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게 되고, 또한 그러한 천국이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살아가는 인생임을 알게 되었사오니, 그런 놀라운 역사가 주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되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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