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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게임판 120618 본문

저서 & 기타(이근호)/피

게임판 120618

정인순 2012. 6. 18. 16:52

음성    동영상

 

 

[12 대구강의 12] - [피 73] - 게임판

                                                          12,06,18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왜 하나님은 인간을 직접 만나지 않는가?

오늘은 교재 227페이지부터 할 차례인데,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에 있어서 우리 인간은 그냥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어놓고 직접 만나면 되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처음부터 그렇게 만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런가? 즉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에 있어서, 우리 인간이 직접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인간이 범죄했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나주시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나기 위해서 인간을 만드신 게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계신 분을 위해서 인간이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엄마가 산부인과에서 아이를 낳게 되면 그 아이를 직접 만나게 되는데,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시고 직접 만나지 않는 것은, 그리고 그 인간이 범죄했을 때 비로소 "아담아, 니가 어디에 있는가?" 라고 하면서 찾아오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평소에 우리가 생각한, 그런 하나님과는 다르다는 것을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창 3: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 하나님은 인간을 '게임 판(板)' 속에서 !!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직접 만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날 때는 '판(板)', 혹은 더 어렵게 이야기하면 '구조' 라고 할 수 있는데', 즉 그런 커다란 널빤지와 같은 것을 계산해서 염두에 두고, 그런 가운데서 인간을 만나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그런 구조를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만나려고 하는데, 그것은 우리 인간을 만든 목적에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만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과 직접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날 때는 그 인간이 속해있는 판을 주안점으로 해서, 거기에 포함이 되어있는 인간을 만나신다는 것이다. 그것을 교재 227페이지에서는 '게임판' 이라고 했는데, 혹은 '전쟁터'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 하나님이든, 예수님이든, 그 누가 되었던 간에 자기 외곽에 있는 것들은 다 삼켜버리고, 잡아먹을 표적에 불과하다. 인간의 본심은 이런 감정들의 연회장이다. 악은 인간의 욕망을 지배하는데 그 수법이 참으로 순수하다(?). 지상의 게임판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서 심지어 자기 희생에 나선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나기 이전에 먼저 선악과가 있었는데, 즉 먼저 그런 선악구조를 만들어놓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덴동산에 나무가 두 그루 있었는데, 하나는 생명나무이고 다른 하나는 선악과라는 것이다. 이 생명나무와 선악과에 있어서, 인간이 따로 있고 나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나무가 가지고 있는 속성에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갇혀있고 포함되어있다는 것이다.

◈ 판에 발목이 잡혀있는 인간 !!

이러한 점에 대해서 사람들이 잘 알지를 못하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조금 더 쉽게 설명하면, 이렇게 우리 인간은 눈이 있고 또 코가 있어서 앞으로 내다보고 냄새를 맡고 하는데, 그런데 주님을 무엇을 보는고 하니, 여기 밑에 우리 인간이 묶여있는 판을 보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만약에 진흙이라고 하면, 그 인간이 제 아무리 "하나님, 하나님!" 라고 해도, 발은 진흙탕에 들어있어서 꼼짝도 못한다는 것이다. 찰흙이나 콜타르와 같은 것에 꽉 붙들려서 말이다. 마치 서해안의 그 갯벌에 빠져서 제대로 가지도 못하고, 그래서 넘어지면 또 다시 진흙이고 하듯이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의 뿌리, 혹은 사람의 자리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자리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로 확장이 되는데, 그렇게 모든 우주가 거기에 다 얽혀져서 확장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우주가 다 그렇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 네트워크 - '인간이 개인적으로 짓는 죄는 없다' !!

이번 수련회를 준비하면서 만든 교재에 보면 뭐라고 되어있는고 하니, "인간이 개인적으로 짓는 죄는 없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전부가 다 집단 죄의식의 일부가 되는데, 즉 자기가 죄를 지으려고 하면 다른 사람들이 자기가 죄를 짓는데 많이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다른 사람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자기는 죄를 지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죄를 짓는데 자기가 다 관여되어있는데, 서너 번의 절차만 거치면 말이다. 그렇게 모두 관련이 되어있는데, 예를 들어서, 서울에 살던 어떤 사람이 죽었다고 하면, 그것이 오늘 아침에 자기가 한 행동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몇 단계만 거치면 말이다. 

◈ 6단계만 거치면 모두가 다 !!

그것을 두고 '네트워크' 라고 하는데, 즉 하나의 '연결망' 이라는 것이다. 전세계의 인구가 65억이라고 하는데, 그 65억의 인구를 수학적으로 계산해보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5, 6단계만 거치게 되면 서로 서로 다 아는 사이가 된다는 것이다. 중국의 제 아무리 깊은 산골에 사는 농부라고 해도 모두가 다 관련이 있다는 말이다.

미국의 수학자가 그것을 밝혀내었는데, 기껏 많이 되어야 7차례이고 말이다. 즉 7단계만 거치게 되면 이 지구상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가 다 하나의 네트워크가 된다는 것이다. 사실 그것은 수학자가 밝혀낸 것이 아니라, 이미 성경에 보면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 다시 정리해보면 !!

다시 강의를 처음부터 정리해보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만드셨으니 우리 인간과 관계를 하시고 만나주실 것 같은데,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일을 저질렀을 때, 그때 비로소 만나주신다는 말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렇게 우리 인간이 일을 저질렀을 때 만나주신다는 것은, 우리 인간의 구원에 대해서는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아이가 방에서 놀고 있을 때는 전혀 관심이 없다가, 그만 방안에서 '와장창' 큰 소리가 났을 때는 엄마 아빠가 들여다보는데, 물론 보통 부모는 아이가 걱정이 되어서 열어보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아이가 다쳤을까 싶어서 염려가 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 방안에는 엄청난 귀중품이 있어서 그렇다는 말이다. 고려청자와 같은 것이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문을 열고 "니가 그것을 어떻게 했지? 사고를 쳤지?" 라고 묻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하나님 자신과 일대일로 상대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이 되려고 하면, 즉 "처음부터 인간을 인간이 되게 하는 밑바탕 위에 인간이 있다" 라는 점을 인간이 알려고 한다면, 인간과 관계가 되어있는 기본바탕이 깨어질 때 말이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그 관계의 틀이 짜부러질(?) 때, 즉 하나님의 원래 창조의 아름다운 모습이 훼손될 때, 마치 유리창이 '쨍그랑' 하고 소리를 내면서 깨어질 때, 그때 비로소 하나님은 찾아오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도 하나님께서 성도를 만나신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야, 잘 있었나?" 라고 하면서 우리의 안부를 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성도의 손에 의해 주님의 일이 훼손되고, 즉 '쨍그랑' 하고 소리를 내면서 깨어질 때, 그것을 계기로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성도에게 돌보심으로 찾아오신다는 것이다.

◈ 우리 인간은, 숨쉬는 것 자체가 '죄' !!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성도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지 않고 깨지 않고, 그렇게 살면 되지 않겠는가?"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하지만 인간은 숨을 쉬는 것이 곧 주님의 일을 깨는 것이란 말이다. 왜냐하면, 숨쉬는 것 그 자체부터가 "나는 살아야 돼. 살아야 돼. 오늘을 살 듯이 내일도 살아야 돼" 라는 것인데, 그러니 그것이 전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인간이 살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하는 것이 곧 사는 것인데, 그렇게 노아홍수 때처럼 우리 인간이 매일같이 그런 것만 생각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있는 이 덩치가 어찌 되었던 간에 살아야하니 그러한데, 바로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에 우리는 인자의 오심을 놓치게 된다는 것이다.

(마 24: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마 24:39)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 산다는 것 자체가 '와장창' !!

이러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을 '와장창' 다 깨어놓는 것인데,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햇빛과 공기와 비를 주시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살라고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런 빗줄기를 따라가면 어디가 나오는가? 그것은 먹구름이 나오는데, 그 먹구름을 따라가면 대기가 나오고, 또 태양이 나오는데, 그리고 안드로메다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안드로메다 다음에는 무엇이 나오는가? 모르는데, 우리가 언제 이런 햇빛과 공기가 어디서 나오는지 추적해본 적이 있는가? 이렇게 신선한 공기와 따사로운 햇볕을 말이다. 우리는 그냥 누릴 뿐인데,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이런 것이 어디서 어떤 절차에 의해서 나오는지, 그런 것을 추적할 생각은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일단 신선한 공기와 햇빛은 챙겨놓고, 그러한 챙긴 것을 가지고는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라고 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은 이렇게 처음 생각을 하면서부터, 사도바울이 하는 말처럼, 즉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라고 한 것처럼, 그것을 염두에 두고 주님은 우리의 눈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발을, 즉 우리의 밑둥치를 보고 계신다는 것이다.

(롬 3:10)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롬 3: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 성도는, 항상 자기 밑둥치와 관련해서 !!

그러니 성도라는 것은 다름이 아닌, 평소에는 세상을 보고 하나님을 보면서 자기를 구성하다가, 문득 어느 날 자기의 밑둥치와 관련해서 이 세상과 하나님을 관련해서 엮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을 받은 성도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인데, 그렇게 눈이 열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의 밑둥치도 보지 않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이웃은 여기에 있고, 주신 은혜도 있고" 라고 하다가, 어느 날 바깥에 있는 것을 자기가 재구성을 할 수 있고, 즉 칸트처럼 이 세상을 오성에 의해서 다시 구성해서 바라본다고 하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구성하는 것이 자기의 밑둥치에서 나왔다고 하면, 그러한 밑둥치가 문제가 있음으로 인해서 자기가 그렇게 살았다고 하는 것도 역시 죄가 된다는 것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이것이 게임판으로 변하고, 전쟁터로 변한다는 말이다.

성도라고 하면 당연히 그렇게 보아야 하는데, 왜냐하면 여기에 있는 이러한 몸뚱아리가 교회에 와서 하나님을 찾는다고 해서 자기 밑둥치가 제대로 보이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그것은 사람들의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시편 51편을 살펴보자.

(시 51:1)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시 51:2)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시 51:3)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시 51: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시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 51:6)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시 51:7)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시 51:8)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시 51:9)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시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 51: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시 51: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시 51:13)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시 51:14)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시 51:15)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시 51:16)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시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8)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시 51:19)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

◈ 시편은, 다윗 안에 예수님이 계셔서 !!

보통은 이 51편을 4절부터 중요하게 여기는데, 물론 4절부터도 중요하지만, 1절과 2절도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시편에 대해서 너무 어렵게만 생각하지 말고, 다윗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예언했다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다윗 안에 예수님이 계셔서, 즉 앞으로 예수님 자신이 하실 일을 다윗이라는 껍데기를 빌려서 했다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시편의 해석은 어렵지 않은데, 그것은 저의 주장이 아니라, 바울과 베드로와 같은 성령을 받은 사도들이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

여기 3절에 보면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다윗은 자기가 죄 속에 둘러 쌓여있다는 것인데, 이것을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 그때부터는 무엇이 날아가 버리는고 하니, 그만큼 마귀가 주는 유혹이 차단이 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가 이렇게 죄에 둘러 쌓여있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마귀로부터 매일같이 주어지는 유혹으로부터 보호막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자기는 죄가 아닌 의로 둘러 쌓여있다고 하게 되면, 그것을 백발백중 악마의 밥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개척교회를 하는 목회자가 "나는 죄 가운데 있다. 그러니 나는 무엇을 해도 죄다" 라고 하면, 교인들이 어디 한 두 명이 나간다고 해서 가슴에 통증이 오고 하겠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목사가 그것이 아니라, "나는 교인들을 위해서 열심히 심방을 하는 의인, 간절히 중보기도를 해주는 의인, 또 설교하는 의인이다" 라고 하게 되면, 교인들이 한 두 사람 오고 가는 문제로 인해서 그만 마음이 심란해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모가 되어서 자식을 보면서, 자기는 죄에 둘러 쌓인 부모라고 여기게 되면 자식을 보면서 뭐라고 하겠는가? "참으로 반듯하게 잘 컸다. 나는 너에게 해준 것도 하나 없는데, 정말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부모가 청국장과 그 온갖 것을 다 일일이 만들어서 택배로 보내주면서 키워놓았다고 여기면, 그래서 정작 부모 생일 때는 찾아오지도 않고 하면 그야말로 시험에 든다는 것이다. 집안에 자기들 사진만 덜렁 커다랗게 한 장 걸어놓고는 말이다(ㅋㅋ).

그러니 다윗이 주님의 영을 받아서 나온 고백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은 이런 분입니다" 라는 고백도 나오지만, 덩달아서 "장차 오실 예수님 앞에서 나는 처음부터 죄인이었습니다" 라고 하는데, 바로 그것이 시편에 그대로 나온다는 것이다. 즉 오직 예수님만이 의인이고, 구원자이고, 자기는 그 무엇을 해도 항상 죄에 둘러 쌓여있다는 말이다.

◈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

그러한 고백이 바로 시편 51편인데, 그리고 그 원인을 추적하면, 5절에서 뭐라고 하는가?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라고 하면서 한 걸음 더 진보된 논리가 나오는데, 즉 자기 주변에 있는 죄가 자기가 지은 죄로 인해서 깔려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는 처음부터 죄라는 캡슐 안에 들어있어서, 거기에서 출생했다는 것이다. 죄가 일종의 모심기를 할 때의 그런 모판이 되어서, 그렇게 자기는 죄에서 나왔다고 한다는 말이다. 

다윗이 그런 이야기를 할 때는, 그것은 다윗 자기만 죄인이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다 그러하다는 의미인데, 그것을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다윗의 개인적인 고백이 아니라, 성도의 보편적 고백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 다윗의 고백이 이스라엘의 고백으로 !!

바로 이러한 보편적 고백이 곧 이스라엘 전체의 고백이 되면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그 언약이 본래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데, 그런 돌출구멍 역할을 언약을 받은 다윗이 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모세도 그렇고 말이다. 그들은 그렇게 볼록 튀어나온 구멍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메탄가스가 지하실에 잠재되어있다고 하면, 그것을 뚫어주어야 가스가 빠져 나오는데, 그렇지 않으면 밑에 내려가면 죽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여기 안에 뭐가 들었어?" 라고 하면서 구멍을 뚫어주는 역할을 하는 특이한 사람, 즉 다윗이나 모세나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이 그런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특이한 구멍역할을 그들이 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에게 주목해야만 하고, 그들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존 교회의 목사들은 뭐라고 하는가? "아브라함을 본받자" 라고 설교를 하는데, 그렇게 본받자고 하면 무엇을 떼어버리게 되는가? 밑에 있는 그 밑바탕을 무시하는 것인데, "아브라함을 본받자. 모세를 본받자" 라고 하면 말이다.

◈ 아브라함도 모두가 한 통속 !!

이것은 전혀 본받을 문제가 아니라, "같은 처지에 한 통속으로 되어있다는 것을 믿어라" 라는 것이다. 즉 아브라함이 잘못했다고 해서 아브라함 혼자 잘못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관련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게 곧 로마서 5장에 나오는 것인데, 즉 인간들은 선악과를 따먹은 적이 없다고 하는데, 하지만 우리는 선악과를 따먹는데 같이 공모한 자로서 취급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롬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 다시 - '주님은 어떻게 찾아오시는가?'

강의를 다시 하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찾아오시지 않는데, 그렇다면 주님은 어떻게 찾아오시는가? "선악과를 왜 따먹었어?" 라고 하시면서, 즉 중간에 뭔가 구조를 통해서 우리에게 찾아오신다는 것이다. 판, 혹은 구조를 통해서 말이다.

예를 들어서, 시골에 가면 파출소장이 그 지역 사람들과 친한데, 가끔은 같이 고스톱도 치고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소장이 오토바이를 타고 와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자기를 친하다고 여겨서 식사라도 같이 하자고 하려는데, 그런데 그만 소장이 "당신을 절도죄로 체포합니다. 당신은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고, 또한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어쩌고" 라고 하면서 수갑을 채운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동안 알고 있던 것은 소용이 없는데, 왜냐하면 자기는 절도죄를 지었으니 말이다.
 
바로 그렇게 다윗이 체포를 당했는데, 아니 처음부터 죄의 자식으로서 동일한 죄를 되풀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우리를 체포하기 위해서 오셨는데, 물론 우리는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도 없고 말이다. 물론 묵비권도 없고 말이다. 그냥 "니 멋대로 한번 살아봐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꾸만 어떻게 생각하는가? 인간은 자기가 태어난 것으로 역사를 끝내려고 하는데, 즉 "내 이렇게 태어나서 존재하게 된다면, 더 이상 하나님께서는 일을 진척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 라는 것이다. 자기가 존재하게 되면 말이다. 

보통 도시에서 아파트를 새로 지어서 거기에 입주하는 사람들을 보면, 처음에는 앞에 펼쳐진 경치도 좋고 해서, 그렇게 아파트를 지어준 건설회사에 고맙게 생각하는데, 그런데 1년 뒤에 그만 그 앞에 큰 건물이 들어서서 조망권을 다 가리게 되면 뭐라고 하겠는가? 과연 고마워하겠는가?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말이다.

그러면 누가 착각한 것인가? 입주자의 착각인데, 즉 자기만 입주하게 되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더 이상 일을 진행시킬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데, 하지만 창세기 3장 15절은 무슨 의미인가? 뱀의 후손은 왜 나오고 여자의 후손은 왜 튀어나오느냐는 것이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제부터는 ??

사람은 자기만 존재하게 되면 그것으로 자기 입장에서는 일이 끝났다고 여기는데, 즉 "하나님, 저를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뭔가를 크게 오해한 것이란 말이다.

400m 계주를 하면서 세 번째 주자가 바통을 쥐고 집에 가면 되는가? 안 된다는 것이다. 자기가 세 번째이니 다음 네 번째에게 바통을 넘겨주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 바통이 마음에 든다고 하면서 집에 가지고 가면 그것으로 게임은 끝이란 말이다. 금메달이고 뭐고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자기의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갔다고 했는데, 그렇게 달리고 나서 그 바통을 다음 번 주자에게 전해주면 되는데, 그렇게 해서 다른 주자가 또 달려가고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이것이 자기를 위한 말씀이 아닌데, 즉 자기를 위한 경기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딤후 4: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동물의 세계도 그런 것이 있는데, 여기서 잠언서 6장을 보자.

(잠 6:6)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잠 6:7)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잠 6:8)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 개미는 두령도 없고 !!

여기 6절에 보면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배워라" 라고 하는데, 그 다음 내용을 우리가 집어넣는다고 하면 뭐라고 하겠는가? "개미는 부지런한데, 그런데 너는 왜 게으른가?" 라고 말이다. 즉 "개미를 본받아서 부지런해라"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을 굳이 개미에게까지 배울 필요가 없는데, 우리 주위에 부지런한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자들에게 배우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개미가 등장하는고 하니, 여기 7절에 보면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상당히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왜냐하면 여기 개미의 경우에는 누가 억지로 시키는, 그런 자가 없는데도 매우 부지런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도는 무엇인가? 이 세상 사람들은 주님을 믿지 않고 또 주님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면 그 대신 누구를 의식한다는 것인가? "주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 라는 것이 중요한데, 여기서 말하는 주변 사람들은 일종의 권력인데 말이다.

그러니 여기에서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다" 라고 하는 것은, 인간세계에는 무엇이 있다는 말인가? 두령도 있고, 간역자도 있고, 주권자도 있어서, 그의 눈치를 보면서 하는 척을 하면서 살고, 반면에 그 사람이 없다 싶으면 농땡이를 친다는 것이다.

◈ 성도는, 세상의 눈치를 보지 말아야 !!

성도가 아닌 자들은 그렇게 산다고 하면, 그러면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성도를 성도가 아닌 자들이 볼 때,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이 세상 주권자의 말을 듣지 않고, 또한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여기는지,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일설교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했지 싶은데, 즉 심판은 누구에게 있다고 했는가? 심판은 사람이 아닌 주님이 하시는데, 그런데 우리는 왜 심판할 권한도 없는, 그런 인간에게 눈치를 보면서 살아야 하느냐는 것이다. 같이 심판을 받아야 될 입장에 놓여있는 자에게 말이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가슴이 아픈데, 과거 조선시대에 시집온 여성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런 것이 사극에 종종 나오는데 말이다. 그래서 저는 사극을 싫어하는데, 왕이 뭐라고 고개도 들지 못하고 그렇게 끙끙거리느냐는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닌데, 자기가 심판주도 아니고 말이다. 그냥 자기 할 일을 자기가 하면 된다는 것이다.

◈ 북한의 경우에 !!

그것이 바로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인데, 즉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북한의 김정은 집단은 근대사회가 아닌데, 일종의 봉건사회라는 것이다. 정치나 사회학자들도 그렇게 말하는데 말이다.

이 봉건사회에 대해서 보통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그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봉건사회는 자기의 것이 없고 모든 것을 왕에게 다 빼앗긴 사회라는 것이다. 그래도 재산만 빼앗겼다고 하면 제가 말도 하지 않겠는데, 심지어 영혼까지도 다 빼앗겼다는 것이다.

북한에도 교회가 있고 목사도 있는데, 하지만 북한의 경우에 영혼은 김일성으로 다 대체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북한의 교회나 성당에서 설교하는 것을 들어보면, 물론 신부는 없지만 그것을 대행하는 자가 있는데, 그들이 다음과 같이 설교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즉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잘 믿고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는 것도 김일성 수령 덕분입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여기서 누가 더 높은가? 하나님께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은 누구 덕분이라는 것인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덕분이라고 해야 맞는데, 그런데 그 부분을 마치 수박을 도려내듯이 도려내고는 그 안에 김일성을 집어넣어 버린다는 것이다.

◈ 오늘날 한국교회가 곧 김일성 집단 !!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이렇게 성당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하는 것은, 우리 김일성 수령 덕분입니다" 라고 해버리면, 그렇게 되면 도대체 누구의 공로를 더 높이게 되는 것인가? 당연히 김일성인데, 바로 그런 짓을 이만희 집단이 하고 있고, 오늘날 한국교회가 하고 있다는 것이다. 순복음의 조용기가 하는 짓이 그런 짓거리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니 순복음은 순엉터리 복음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은 너무 일방적입니다. 그렇게만 말하면 안 되지요?" 라고 할지 몰라도, 하지만 예수님을 이야기하려고 하면, 말로만 예수님이 아니라, 아까 본 시편 51편에 나오듯이 예수님 앞에서 우리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반드시 죄인이 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그것을 말로만 죄인이라고 하지 말고, 우리가 교회에 다니면서 새롭게 파악된 죄가 무엇인지,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보다도 교인들의 따가운 시선과 목사의 명령과 지시를, 그런 것들을 마치 북한에서 김일성을 섬기듯이 그렇게 더 의식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목사님, 시켜만 주세요" 라고 하는데, 하지만 왜 그렇게 하는가? 지금 주님이 시키고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자리에 목사를 집어서 넣어서, 그렇게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하고 있다면, 그것 자체가 이미 엉터리 신앙생활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렇게 신앙생활도 하지 못하면서 천국에 간다고 하면 말이 되겠는가?

그런 면에서 교회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모르는데, 그렇다고 목사를 갈구수도 없고 말이다. 그러니 본인이 알아서 해야하는데, "저 놈이 바로 사기꾼이구나" 라고 말이다. 성령도 받지 않은 자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집에 가서 인터넷만 보고 있고 말이다. 그게 자칫 잘못하면 자기 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 교회 꼬라지 잘 되겠다 ??

다시 개미 이야기를 해보면, "개미에게 배워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지시하는 사람이 없다고 하면, 그 다음에 (  )로 하면 그 안에 무엇이 들어가겠는가? 그것은 당연히 "교회 꼬라지 잘 되겠다" 라고 나오는데, 사실은 그 말이 맞다는 것이다.

실제로 교회에 어른도 없고 하면 교회가 개판이 되는데, 그런데 그것을 저는 '흩어진다' 라고 말하고 싶은데, 소위 개판이 되는 것을 두고 말이다. 그런 흩어짐이 늘 있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런 것도 없이 그냥 구성되게 되면 우상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의 방법은 무엇인고 하니, 구성된 것을 흩어지게 하신다는 것이다.

◈ '흩어짐'의 원리 !!

이런 흩어지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교회 꼬라지 좋다" 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런데 그것을 다시 주님께서 말씀으로 구성하게 되면, 바로 그렇게 하는 가운데, 그 사이에는 성도는 돌아온 탕자로서, 매일같이 그러한 것을 느끼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그런 구성에서 더 버티게 되면 그만 자기 의(義)가 튀어나오게 되는데, 그러면 그 자기 의를 자기가 소유함으로서 마치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것이 얼마나 위험한 짓이냐는 말이다.

그러니 손에 잡히는 어떤 단체나 집단이 없어서 허전함을 느낀다고 하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것이 아닌데, 그러니 개미를 보라는 것이다. 개미에게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지만, 그러나 개미는 자신만이 알고 있는 매일 매일 주어지는 지시와 명령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남들이 "꼬라지 좋다" 라고 하는 소리에 너무 힘들어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전혀 심판주가 아닌데, 그렇지 않은가? 인간은 결코 심판주가 아니라는 것이다. 남들이 창문을 열고 "꼬라지 좋다" 라고 하든 말든, 그런 것에 신경을 쓰고 현혹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 왜 유혹이 되는가?

물론 현혹될 이유가 없는데 현혹이 된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선악과를 따먹어서, 그런 유혹에 한껏 노출되어있는 모습이지만 말이다. 선악과를 따먹을 때 그 유혹이 무엇이었는가? "밥 줄게. 빵 줄게" 라는 것은 유혹도 아니었는데, 유혹이라는 것은 자기가 미처 가지지 못한 것을 마귀가 제공해준다는 의미인데, 에덴동산에 바나나도 있고 파인애플도 있으니, 그런 것은 유혹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것은 모두 가질 수가 있는데, 그런데 무엇만 없는가? "나도 하나님처럼 될 수가 있는데, 철조망을 넘어서 저 선악과만 따먹으면 말이야" 라고 하는, 바로 그러한 점을 노리고 마귀가 접근했다는 것이다. 물론 철조망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ㅋㅋ).

◈ '미스 오르간'의 굴욕 !!

다음과 같은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즉 시골에 교회가 있는데 거기에서 어떤 처자가 오르간을 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연주하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든지 그 동네 총각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는데, 그래서 '미스 오르간(?)'으로 통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서울에서 여대생들이 내려와서 한 바탕 봉사활동을 하고 간 다음에는 그 처자는 그만 인물도 아니게 된다는 것이다. 동네 총각들이 "견적도 안 나온다" 라고 할 정도로 말이다(ㅋㅋ).

그러니 유혹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미처 가지지 못한 것이 유혹이 되니, 그러니 유혹은 결국 누가 만들어내는 것인가? 자기가 계속해서 미흡한 것을 만들어내면, 마귀에게 그것을 가지고 자기를 침공하라고, 그렇게 마귀에게 주도권을 넘기는 셈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 성도의 바리게이트 - '나는 죄인입니다' !!

그래서 그것을 이길 수 있는 보호막은 무엇밖에 없다고 했는가? 아예 자기 주변에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그렇게 죄인이라는 것을 깔아놓자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현재 자기가 가지지를 못했다는 것보다도, 기존의 있는 것도 감당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주신 은혜에 대해서도 감사하지 못하는, 그렇게 자기는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조차도 감사를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자기는 이기주의자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사람이 이렇게 있다고 하면, 그러면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드러난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 실체가 곧 사단인데, 다른 말로 악마, 혹은 마귀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러니 마귀는 하나밖에 없는데, 물론 그 부하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것들이 귀신들인데 말이다. 또한 옛뱀이라고도 하고 말이다.

이 사단은 예수님이 오시지 않으면 드러나지 않는데, 왜 그런고 하니, 악마는 오직 누구에게만 관심이 있는가? 예수님인데, 인간들은 원래 자기편이니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 밥이니 말이다. 그러니 누구만 나타나지 않으면 되는가? 예수님만 등장하지 않으면 되는데, 그래서 기를 쓰고 예수님을 저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광야에서도 나타나서 예수님을 3번이나 시험하고, 또한 사도바울에게도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이 전도할 때, 그때 제자들이 뭐라고 하는가? "주의 이름으로 전하니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라고 하는데,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내가 그것을 보았는데, 그렇게 귀신들이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눅 10:17)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눅 10:18)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눅 10:19)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눅 10: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 니 밑바탕을 보아라 !!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은 항상 어떤 바탕을 염두에 두고 계시는데, 즉 "제가 귀신을 쫓아내었습니다" 라고 하지 말고, "니가 속해있는 바탕이 무엇인지 알아라" 라고 하시는데, 그런 바탕이 어떠한지, 바로 그것을 다시 한번 돌아보기 위해서 사건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은 우리 자신이 속해있는, 즉 서산에 빠져서 오도가도 못하는 바탕(?),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 위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악마가 펼쳐놓은 유혹의 바탕 위에서 그렇게 하고 있는지, 그것을 돌아보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인간에게는 어느 쪽이 유혹이 되겠는가? 즉 우리 인간이 어느 쪽을 더욱 더 부러워하겠느냐는 말이다. 예수님 쪽인가? 아니면 사단 쪽인가? 역시 사단 쪽인데, 하지만 사람들은 전혀 그것이 악마의 유혹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 아, 사랑과 영혼 !!

그러면 그것을 언제 아는가? 예수님께서 우리의 발판을 지적하시면서, 그 발판 자체가 죄이기 때문에, 그 죄에서 뽑아 올리는 것, 그것이 '사랑과 영혼' 이라는 영화에 보면 나온다는 것이다. 왜 데미무어와 남자 주인공이 같이 붙어서 판을 돌리면서 도자기를 만드는 장면이 있는데, 기억이 납니까? 남자는 관심이 없어서 이름을 잘 모르겠는데 말이다(ㅋㅋ).

그렇게 판을 돌려서 거기에서 진흙을 뽑아 올려서 도자기를 만드는데, 바로 그 뽑아 올려진 것이 곧 인간이라는 것이다. 회전판에서 뽑아 올려진 것이 말이다. 그렇게 해서 봄여름가을겨울로 돌리는데, 그렇게 한 번을 돌리면 나이를 한 살 먹는데, 50번 정도를 돌리게 되면 정신이 조금 드는데 말이다. 물론 너무 많이 돌려서 79번 정도가 되면 치매에 걸리기도 하는데, 그러면 지금이 아침인지 저녁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ㅋㅋ).

아무튼 그렇게 해서 뽑아 올렸을 때, 사람들은 누구를 싫어하겠는가? 예수님이 산상설교를 하시면서 왜 모래와 반석 이야기를 하셨느냐는 말이다. 즉 밑바탕이 중요한 것이지 껍데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탕에서 뽑아 세워 올린 것이 곧 인간이니 말이다.

◈ 이근호 - '인간들은 그리스도적인 악마를 원한다' !!

그러니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밉상 덩어리인데, 지금도 역시나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교회에서도 물론 마찬가지인데, 사람들은 장사가 되지를 않으니 예수님을 무엇으로 바꾸는가? 예수님을 그만 마귀로 바꾸고 만다는 것이다. 그게 '70이레' 라는 논문에 보면 나오는데, "인간들은 그리스도적인 악마를 원한다" 라고 말이다. 그리고 명저 '복음이냐, 교회냐' 라는 책에도 나오고 말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평범한 그리스도가 아니라 능력이 있는 그리스도를 원하기 때문에, 그래서 사단이 그리스도로 위장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런 것을 증거하는 자들을 두고서 사단의 일군이라고 하는데, 그게 고린도후서 11장에 나온다는 것이다.

(고후 11:14)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고후 11:15) 그러므로 사단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아까도 말했지만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 유혹을 당하는가? 사람들은 기존의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유혹을 당하지 않는데, 그것은 더 이상 별로 내키지 않으니 말이다. 그런데 '더, 더' 새로운 것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그런 '더, 더'를 채우기 위해서는 자진해서 유혹을 부른다는 것이다. 자진해서 말이다.

여기서 잠언서 7장을 보겠는데, 26절과 27절을 한번 찾아보자.

(잠 7:1) 내 아들아 내 말을 지키며 내 명령을 네게 간직하라
(잠 7:2) 내 명령을 지켜서 살며 내 법을 네 눈동자처럼 지키라
(잠 7:3) 이것을 네 손가락에 매며 이것을 네 마음판에 새기라
(잠 7:4) 지혜에게 너는 내 누이라 하며 명철에게 너는 내 친족이라 하라
(잠 7:5) 그리하면 이것이 너를 지켜서 음녀에게,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 빠지지 않게 하리라
(잠 7:6) 내가 내 집 들창으로, 살창으로 내어다 보다가
(잠 7:7) 어리석은 자 중에, 소년 중에 한 지혜 없는 자를 보았노라
(잠 7:8) 그가 거리를 지나 음녀의 골목 모퉁이로 가까이 하여 그 집으로 들어가는데
(잠 7:9) 저물 때, 황혼 때, 깊은 밤 흑암 중에라
(잠 7:10) 그 때에 기생의 옷을 입은 간교한 계집이 그를 맞으니
(잠 7:11) 이 계집은 떠들며 완패하며 그 발이 집에 머물지 아니하여
(잠 7:12) 어떤 때에는 거리, 어떤 때에는 광장 모퉁이, 모퉁이에 서서 사람을 기다리는 자라
(잠 7:13) 그 계집이 그를 붙잡고 입을 맞추며 부끄러움을 모르는 얼굴로 말하되
(잠 7:14) 내가 화목제를 드려서 서원한 것을 오늘날 갚았노라
(잠 7:15) 이러므로 내가 너를 맞으려고 나와서 네 얼굴을 찾다가 너를 만났도다
(잠 7:16) 내 침상에는 화문 요와 애굽의 문채 있는 이불을 폈고
(잠 7:17) 몰약과 침향과 계피를 뿌렸노라
(잠 7:18) 오라 우리가 아침까지 흡족하게 서로 사랑하며 사랑함으로 희락하자
(잠 7:19) 남편은 집을 떠나 먼 길을 갔는데
(잠 7:20) 은 주머니를 가졌은즉 보름에나 집에 돌아오리라 하여
(잠 7:21) 여러가지 고운 말로 혹하게 하며 입술의 호리는 말로 꾀므로
(잠 7:22) 소년이 곧 그를 따랐으니 소가 푸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일반이라
(잠 7:23) 필경은 살이 그 간을 뚫기까지에 이를 것이라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되 그 생명을 잃어버릴 줄을 알지 못함과 일반이니라
(잠 7:24) 아들들아 나를 듣고 내 입의 말에 주의하라
(잠 7:26) 대저 그가 많은 사람을 상하여 엎드러지게 하였나니 그에게 죽은 자가 허다하니라
(잠 7:27) 그 집은 음부의 길이라 사망의 방으로 내려가느니라

◈ 기생의 옷을 입은 간교한 계집이 !!

1절에서 "내 아들아, 내 말을 지키며 내 명령을 네게 간직하라" 라고 하면서 시작하는데, 10절에 보면 "그 때에 기생의 옷을 입은 간교한 계집이 그를 맞으니" 라고 하면서, 즉 기생이 꼬드겨도 넘어가지 말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 기생이 어떻게 유혹하는고 하니,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14절에서 "내가 화목제를 드려서 서원한 것을 오늘날 갚았노라" 라고, 즉 종교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면서, 그리고 16절에서는 "내 침상에는 화문 요와 애굽의 문채 있는 이불을 폈고" 라고, 즉 애굽에서 나는 최고급 수입품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 남편은 넉넉한 여비를 가지고서 먼길을 떠났기 때문에, 아직 집에 돌아오려면 멀었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여인이 많은 사람들을 꼬드기는데, 그런데 그 집은 어떠한 집인고 하니, 27절에 나오듯이 즉 "그 집은 음부의 길이라. 사망의 방으로 내려가느니라" 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여기 이렇게 집이 있다고 하면, 그 뒤에는 절벽이 있는데, 그런데 마치 절벽이 없는 것처럼, 그 앞에 화려한 집으로 그래픽을 해놓은 것 같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름다운 천국의 모습을 이렇게 그려놓고는, 그 앞에서 꼬드긴다는 것이다. "우리, 서로 즐거운 것이 최고가 아니냐?" 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마지막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최후의 아지트가 된다는 것이다. 최후의 아지트가 말이다.

◈ 오잉, 죽변제일교회 ??

그런데 이 그림을 그렇게 묘사하지 말고, 절벽을 보니 생각이 나는데, 이렇게 절벽이 있고 그 앞에는 예쁘장한 예배당이 하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옛날 일본식 이층집이 하나 있고 말이다. 그 교회이름도 있는데, '죽변제일교회' 라고 말이다(ㅋㅋ).

이것이 '폭풍 속으로' 라는 TV드라마 세트의 한 장면인데, 실제로 죽변(?)에 가보면 해변가에 그러한 교회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 이쪽에는 사람이 살지를 못하는데, 왜냐하면 가기만 하면 떨어지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거기는 절벽이니 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입체적으로, 즉 수직적으로 그리지 말고 평면적으로 그리게 되면, 이렇게 길이 두 개가 있는데, 여기 휴게소에서 애굽의 여인이 유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음부의 길이고, 사망의 방으로 내려가는 길로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 이 세상은 고요하고 조용하지 않다는 것을 지금 제가 이야기하고 싶다는 것이다.

◈ 여기 낙원 휴게소로 오세요 !!

TV에서 날마다 방영되는 드라마나 뉴스를 보면, 그리스 위기가 어떻고 프로야구가 어떻고, 또 경제가 어떻고 하는데, 그런 소식이 매일같이 쏟아진다는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이 어떻게 하는가? 사람들의 귀를 막게 하는데, 즉 십자가로 가는 그 좁은 생명의 길을, 그것을 어디로 돌리려고 하는가?

계속해서 넓은 사망의 길로 이끌기 위해서, 그래서 여기에는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좋아했던 것들이, 즉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것들이 가득 모여있는데,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이 말이다. 여인이 운영하는 휴게소에 그런 것들이 있다는 것이다. 

(요일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시골에 한번 가보면, 젊은 청춘들이 다 어디로 가고 없는가? 모두 다 서울에 가고 없는데, 수원이나 인천 등에도 있고 말이다. 물론 그곳이 서울인줄로 알고 살고 있는데, 때로는 중국 놈에게 붙잡혀서 끔찍한 일도 당하면서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 내 아들아, 서울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라 !!

그렇다면 그 젊은이들이 왜 거기에 갔는가? 무엇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잠언서 1장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내 아들아, 그들과 함께 길에 다니지 말라" 라고 하는데, 즉 그런 것에다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고 한다는 것이다.

(잠 1:10)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좇지 말라
(잠 1:11) 그들이 네게 말하기를 우리와 함께 가자 우리가 가만히 엎드렸다가 사람의 피를 흘리자 죄없는 자를 까닭없이 숨어 기다리다가
(잠 1:12) 음부 같이 그들을 산 채로 삼키며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게 통으로 삼키자
(잠 1:13) 우리가 온갖 보화를 얻으며 빼앗은 것으로 우리 집에 채우리니
(잠 1:14) 너는 우리와 함께 제비를 뽑고 우리가 함께 전대 하나만 두자 할지라도
(잠 1:15) 내 아들아 그들과 함께 길에 다니지 말라 네 발을 금하여 그 길을 밟지 말라
(잠 1:16) 대저 그 발은 악으로 달려가며 피를 흘리는 데 빠름이니라

그런데 촌에서 목사들이 젊은 아이들을 교회당에 모아놓고 무엇이라고 하는가? "꿈을 키워라. 요셉을 보아라" 라고 하면서 매일같이 비전을 이야기하는데, 그런 비전을 이야기하니 아이들이 모두 서울로 가고 만다는 것이다. "그저 큰데, 그저 좋은데" 라고, 그렇게 하니 말이다. 그러니 비록 지금은 촌에 남아있어도, 언젠가는 친구와 서로 연락을 해서 모두가 다 가고 없다는 것이다.

시골에 산다고 해서 무시하면 안 되는데, 인터넷도 다 되고 하니 알 것은 모두 안다는 말이다. 인터넷 속도는 오히려 시골에 더 빠르다고 하던데, 사용자가 적어서 말이다(ㅋㅋ). 그리고 아침 식사시간에는 저지방 우유에다가 빵도 먹고 말이다. 

세상에서 말하는 우리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 20대는 노는 것이 목적이고, 30대는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목적이고, 또한 40대는 어떻게 해서든지 직장에 오래 붙어있는 것이 목적이고, 그리고 50대에는 건강이 최고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저 죽지 않고 질질 끌려고 한다는 말이다. 돈과 시간을 마구 거들내면서 말이다.  

◈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

성경말씀을 이렇게 볼 때, 우리 물을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는데, 즉 사망의 길은 무엇으로 구성이 되어있으며, 죽음의 길은 무엇으로 되어있는지, 바로 그것이란 말이다. 아니, 말을 잘못했는데, "생명의 길은 무엇으로 구성이 되어있으며, 또한 죽음의 길은 무엇으로 되어있는가?" 라고, 그렇게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잠언서에 보면, 생명의 방에는 무엇밖에 없는고 하니, '지혜', 즉 말씀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사망의 방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 사실 그것을 성경말씀에서 사망이라고 하니, 우리가 사망의 방일 줄 아는데 말이다. 아무튼 거기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 '월드', 즉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이 세상 전부가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 사망의 방은 너무나 일상적 !!

무슨 말인고 하니, "서울에 가면 죽어" 라고 해서 서울로 가는 사람은 없는데, 바로 그것이 곧 현실 그 자체라는 것이다. 즉 사망의 방에는 현실 그 자체가 들어있는데, 따라서 사망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일상적이고 보편화가 되어있는데, 상식적인 것이지 이상한 일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사망의 방에 들어가는 것이 말이다. 오히려 그런 사망의 길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기이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나이 겨우 20대에 복음을 안다고 하면 오히려 이상한데, 나이가 60도 넘지 않아서 어떻게 복음을 아느냐는 말이다. 그런데도 "십자가를 알고, 복음을 알았습니다" 라고 하면 참으로 기이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혜의 방으로 가는 것이 훨씬 더 드물다는 말이다. 물론 20대가 복음을 안다고 하는 것은, 복음에 대한 오해의 소지가 많은데 말이다. 잘 모르면서 안다고 한다는 것이다.

◈ 말씀이 너를 지혜가 되게 !!

이 지혜는 무엇인고 하니, "니가 말씀을 지켜라" 라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너를 지혜가 되게 한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우리가 이 세상을 버리고 지혜의 방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살면서도 얼마든지 우리의 노선이, 즉 말씀이 매일같이 우리는 먹여 살린다는 것을 알면, 그런 경우에는 우리가 생명의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조금 전에도 그러한 이야기를 했지만, 우리가 받고 있는 것에 대한 감사도 다 끄집어내기도 사실상 우리에게는 너무 벅차다는 것이다. 우리가 받고 있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받은 것은 당연하게 여기고, 거기에다가 자꾸만 세상이 주는 유혹, 즉 사망이 부르는 음성이 너무나도 듣고 싶다는 것이다. 즉 "이리 오너라. 여기가 좋다" 라고 불러내는 것인데, 그러면 거기에 그냥 끌려가고 만다는 것이다. 마치 강시처럼 말이다.

◈ '싸이렌'에 얽힌 전설 !!

혹시 '싸이렌' 이라고 아는지 모르겠는데, 민방위 훈련 때 울리는 말이다. 그것은 원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것인데, 그것이 로렐라이 언덕인지 몰라도(?), 아무튼 어떤 언덕을 가는데, 거기서 어떤 나팔 소리가 들리게 되면 그만 사공들이 노를 젓다가도 그 소리에 빠져서 그만 그곳으로 가게 되면 배가 파선되고 만다는 것이다. 자꾸만 그런 일이 일어나니 '오딧세이' 라는 영웅이 나타나서 사람들의 귀를 막게 하고는, 그 어떤 경우에도 풀지 말라고 하면서 자기 몸을 돛대에 묶어서 무사히 그곳을 통과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인간의 힘으로 이 세상의 영웅이 되는 방식인데, 그런 방정식을 신화를 통해서 과거 그리스 사람들은 후손들에게 교육을 시켰다는 것이다. 즉 "영웅이 되고자 한다면, 너는 이 세상의 유혹에서 벗어나라" 라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성경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데, 물론 그것도 역시 유혹이라는 말이다. (녹취자 - 목사님, 싸이렌 신화가 옛날부터 전해오던 로렐라이 언덕의 전설과 짬뽕이 된 것 같습니다. 그 의미도 좀 이상하고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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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은지원의 '싸이렌' 이란 노래에, "마치 넌 신화에 나오는 싸이렌처럼 날 유혹해" 라는 가사가 있는데, 이 '싸이렌' 이라는 이름은 처음인데, 신화 속에 나오는 싸이렌에 대해서 좀 알려주세요.
* 답변 - Siren(사이렌, 싸이렌, 세이렌)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바다의 요정이다. 사이렌은 날개가 달린 여자 형상을 한 바다의 요정들로, 아름다운 노래로 근처를 지나가는 뱃사람들을 유혹했다. 이들의 아름다운 노래에 넘어간 남자들은 바다로 뛰어들었고 그들은 목숨을 잃었다. 포르키스가 테르프시코레 또는 스테로페에게서 낳았다고 한다. 이들의 숫자는 두 명부터 세 명, 네 명, 그 이상으로 묘사된다. 이아손이 이끌고 콜키스로 황금양털을 찾으러 떠난 아르고 호 원정대도 중간에 이들 사이렌을 만났다. 그 원정대원 가운데 아주 훌륭한 음악인 오르페우스가 사이렌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음악을 연주해서 동료들을 지켰다. 단 한 명 부테스가 유혹에 넘어가 뛰어들었으나 아프로디테 여신이 그를 구해주었다. 트로이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가던 오딧세우스 일행도 사이렌이 사는 곳을 지나가게 된다. 오딧세우스는 사이렌에 대한 정보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부하들에게 미리 귀를 막게 해서 사이렌의 음악을 듣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아름다운 음악을 감상하고 싶은 유혹을 참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부하들로 하여금 자신을 기둥에 묶게 했다. 그리고 어떤 명령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사이렌의 영역을 지나기 전에는 절대 풀어주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렇게 해서 오딧세우스는 아름다운 사이렌의 노래를 무사히 들을 수 있었다. - 네이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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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도는, 더 아파야 !!

다시 해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유혹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낮은 자리로, 즉 예수님은 "니가 참으로 나중에 영웅이 된다" 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너는 너 자신의 과거로 있는 인생을 살고 있다" 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더 아파야 하고, 더 꼴아 박아야 하고, 더 추락해도 당연한데, 그런데도 너는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고 있다" 라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이다. 즉 "더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라고 말이다. 쉽게 말해서, "뭐라고, 지금 회사가 부도를 맞았다고? 하지만 너는 아직 멀었어"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 저 낮은 곳을 향하여 ♬

그러니 "저 높은 곳이 아닌, 저 낮은 곳을 향하여" 라고, 바로 그렇게 되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렇게 가사를 해놓으면 아무도 그 찬송가를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재미로 살아가니 말이다. 그래서 "절망 대신 열정으로, 안 될 것도 없어" 라고 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성경자체가 항상 숨겨진 두 개의 배선이 있는데, 즉 밑에 이미 보일러를 놓아서 그런 PVC를 깔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바위 위에 지은 집을 언급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너의 운명은 그것을 결정되는 것이지, 위에 근사하게 보이는, 즉 남들 눈에 근사하게 보이는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 라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아파트의 아무 집이든 벨을 눌리고 들어가면, 물론 바로 쫓겨나겠지만 말이다(ㅋㅋ). 그러면 전부가 다 '흑흑' 울면서 살아가는데, 24시간 '헤헤' 거리면서 살아가는 가정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있을 수도 있는데, 하지만 마음이 늘 맞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다시,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에 있어서 !!

다시 한번 설명하면,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에 있어서, 그냥 하나님께서는 만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유혹을 받은 적이 있을 때 만나심으로서,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인고 하니, 그 취지가 인간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인간자체에 의미가 없다면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은 왜 창조를 하셨는가? 그것은 바로 주님을 위해서, 즉 장차 오실 예수님을 위해서 인간들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 안에 있는 배선이 무엇인고 하니까, '예수님을 위해서' 라는 것이 깔려있는데, 그제야 비로소 우리 인간은 "내가 왜 존재하는가?" 라는 것을 최초로 아는 순간이 된다는 것이다. "아하, 나는 나를 위해서, 나의 행복과 나의 평안과 안식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구나" 라고 말이다.

◈ 성도의 배선 - '예수님을 위해서' !!

그렇다고 하면 목회자의 역할이 무엇인고 하니, 그리스도 위하여 만들어진 자들을 채택하고, 그것을 부르고 찾아내는, 그런 주의 흩어진 백성들을 모으는 것이 곧 목회가 되기 때문에, 목회를 위한 목회가 아니라, 복음전파만이 진정한 목회라는 것이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뭐라고 하는고 하니, "목사님, 어떤 사람은 교회에는 잘 나오는데, 말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말씀에 관심이 없는데, 즉 말씀의 배선이 깔려있지 않은 사람을 과연 구원받았다고 할 수 있을지, 그것은 정말 곤란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그러면 목사님, 말씀을 하루에 몇 시간이나 공부해야 합니까?" 라고 한다면, "글쎄요. 몇 시간을 공부한다고 해서 과연 말씀에 관심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것도 역시나 곤란합니다" 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을 성도라고 하기가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조금 전에 그린 그 평면지형에 있어서, 즉 도로가 있고 이렇게 휴게소가 있는데, 이런 지형에 가게 되면, 자기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와서 부딪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아하, 그렇구나. 그런 뜻인 줄 몰랐네" 라고 말이다. 그렇게 온 몸으로 실감나는 상황들이 늘 유발이 된다는 것이다.

◈ 반짝 반짝 빛나는 말씀의 공간에 !!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여기에 이렇게 있는 빈 공간에 갔는데, 여기에는 이미 주님께서 반짝 반짝 빛나는 말씀들을 미리 다 뿌려놓았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지만 말이다. 그런데 성령께서 오시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이전에는 아무 것도 없는 빈 공간이었는데, 이제는 성령에 의해서 움직이기만 하면 말씀에 다 걸린다는 것이다. "아하, 이 말씀이구나. 이번에는 또 이 말씀이네" 라고, 즉 "인간은 광대구나.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아야지" 라고 느끼게 된다는 말이다. 주로 교통 범칙금을 내면 그런 생각이 드는데 말이다(ㅋㅋ).

그렇게 자꾸만 일이 벌어지면서 온 손에 말씀이 와서 닿게 될 때, 그것은 감히 하나님 나라가 손에 잡힌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있었는데, 자기가 유혹을 받는 '나' 라고 지적을 받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이 눈에 보이는 세상을 자기 세상으로 여겼는데, 사실은 자기 세상은 없고 전부가 말씀의 세상이고, 즉 이미 주께서 말씀을 다 뿌려놓은 세상이라는 것이다.

◈ 목회자 - '성경말씀에 이런 이런 것이 있습니다' !!
 
그 뿌려놓은 말씀에 대해서 목회자들은 주일이 되면 압축해서 이야기하면 되는데, "성경말씀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라고 말이다. 목회자도 교인들이 어떻게 사는지 모르는데, 무슨 족집게 도사도 아니고 말이다. 권사님이 바퀴벌레 때문에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모르고, 또 우리 집의 경우에는 쥐와 3달 째 동거하고 있는데, 부끄러워서 그런지 몰라도 자기 모습은 숨기고 매일 흔적만 남긴다는 것이다(ㅋㅋ).

아무튼 목사는 그런 사정을 다 모르는데, 하지만 말씀 안에서 다시 보게 되면, 말씀이 각각 사람에게 어떻게 부딪치게 되는지를, 그것은 목사의 역할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시는 일인데, 그렇게 성령께서 주시는 각자의 몫이 모두 다 따로 있다는 것이다.

◈ 중요한 것은, '인자가 오신다' !!

그런데 그것을 종합해보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라고 하는, 그 6가지 항목에 다 포함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무엇이 중요한가? "인자가 오신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인자가 오면 진노의 날에서 너희들을 건질 것이다" 라는 것이다. 그게 데살로니가전서 1장에 나오는데, 그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을 영접하게 된다는 것이다.

(눅 17:26)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눅 17: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눅 17:28)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눅 17:29)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눅 17:30)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살전 1:9)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살전 1: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그러니 왜 선악과가 있는지 알겠지요? 선악과가 곧 우리의 바탕을 의미하는데,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말이다. 그러니 "선악과가 바탕인가? 아니면, 생명나무가 바탕인가?"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선악과를 따먹은 채로 생명나무는 안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죽고, 생명나무에서 말씀으로 새로워진 피조물이 되어야만, 그래야만 생명나무의 나라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자가 곧 어린양이신 예수님에 의해서만 구원받은 자라는 것이다. 예수님에 의해서만 말이다.

이제 교재 229페이지를 살펴보자.

** 야곱은 에서와 게임을 벌렸다. 그리고 승자가 되었다고 자신을 확인하는 순간, 자신이 영원한 패배자인 것을 발견했다. 영원히 저주받은 자임이 하나님의 사자 앞에서 폭로 당한 것이다.

◈ 이스라엘은 누구와 전쟁을 했는가?

야곱과 에서를 쌍둥이로 태어나야하는 것은, 전쟁은 상대가 있어야만 하는데, 상대가 없으면 전쟁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한번 붙을래" 라고 하려면, 그런 상대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제가 질문을 하나 하겠는데, "이스라엘이 누구와 붙었는가?" 라는 것이다. 

전쟁이란 서로 붙어야 하는데, 그런데 이스라엘이란 나라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군대' 라는 의미인데, 군대는 반드시 적이 있어야 그 역할을 제대로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적은 누구인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만들어져 가면서, 즉 모세가 전쟁을 못해서 환장해서 만나는 자들마다 쳐부순 아니라, 모세가 그렇게 전쟁광으로 등장한 게 아니라, 주께서 그때 그때마다 붙여주셨다는 것이다.

◈ '아말렉'의 등장 !!

그래서 출애굽기 15장인가 16장에 보면 아말렉이 등장하는데, (17장인데, ㅋㅋ), 이 아말렉은 광야에서 최초로 만난 적으로서 그들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못하는데, 그래서 "영원히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출 17:8) 때에 아말렉이 이르러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출 17:9)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신 23:3)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대뿐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그렇게 해서 아말렉을 만나게 되는데,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적이 아니라, 이스라엘에는 왕이 계시는데, 그 왕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덤벼드는 자들이 곧 이스라엘의 적이 된다는 것이다.

◈ 과연 이스라엘의 적은?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적은 무엇인고 하니, 이것을 쉽게 말하면,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시내산에서 모세가 누구를 만나는고 하니, 하나님을 만났는데, 그리고 난 다음에 내려올 때 빈손으로 내려온 것이 아니라,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 즉 하나님의 언약을 가지고 내려왔다는 것이다. 모세언약을 말이다.

그러면 모세가 이렇게 언약을 가지고 내려왔다는 말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 산 위에 있는 하나님께서 모세와 동행해서, 즉 산 위의 하나님께서 평지로 내려오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내려와서는 이스라엘이란 나라 속으로 그만 '쑥' 하고 들어가시는데, 그리고는 그 나라의 중앙지점을 차지하신다는 것이다.

어제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총 맞은 것처럼' 라고 말이다. 그렇게 이스라엘은 마치 총을 맞은 것처럼 가슴의 중앙이 그만 '뻥' 하고 뚫리고 마는데, 거기에는 아무나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오직 피 묻은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지 말이다. 물론 레위인들도 안 된다는 것이다.

◈ '뻥' 구멍이 뚫려있는 나라가 곧 이스라엘 !!

바로 거기에 하나님께서 좌정을 하셔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는데, 그러면 이스라엘은 어떤 나라가 되는고 하니, 이스라엘에는 왕이 없다는 말이다. 즉 왕의 자리에 그만 '뻥' 구멍이 뚫려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구멍이 뚫려있는 나라가 곧 이스라엘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교회의 머리 자리인데, 그러니 교회는 철저하게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둘러 쌓여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구멍에 당회장이 폼을 잡고서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것이다. 당회장인 지가 들어가면 그만 쥐가 되고 마는데, 고양이가 되는 게 아니고 말이다. (아니, 이것이 그 유명한 십자가 마을표 썰렁개그, ㅋㅋ)

이렇게 교회조차도 그러한데, 우리가 교회사를 공부해보면, 이 '뻥' 뚫려있는 중앙자리를 가만히 두지 않고, 교황이나 황제들이 자꾸만 들락거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지 목매한 인간들은, 인간들이 심판을 하는 줄 알고 자꾸만 여기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그런데 초대교회의 교인들은 이 중앙지점을 마치 총을 맞은 것처럼 구멍을 뚫어놓으니, 그래서 로마황제가 열을 받았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쳐라" 라고 하셨는데,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너는 저쪽 나라에 속한 존재가 아니다" 라는 것이다. 즉 신분이 다르다는 말이다.

(마 22:20)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마 22:21)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마 22:22)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기이히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 이스라엘에 내부의 적이 등장함으로서 !!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한 이유가 간단한데, 이 구멍난 자리에 누가 들어가면 되는가? 그만 사울이 들어가는데, 그러면 망한다는 것이다. 가만히 들어가기만 해도 괜찮은데(?), 그렇게 들어가서 "이 구멍은 하나님의 자리입니다" 라고 외치는 다윗을 죽을힘을 다해 죽이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의 적이 누가 되는가? 다윗을 몰아내려고 하는 사울과 그 추종하는 자들이 곧 이스라엘이 적이 된다는 것이다. 즉 내부의 적이 등장한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해보면, 이렇게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내려오시게 되면, 여기 이 중앙 성소에서 나오는 언약의 효과를 그 주변의 텐트촌에서 입게 되는데, 바로 그렇게 영향력을 입게 되는 집단을 두고서 '이스라엘'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 교회는, 생명나무 바운더리 !!

이 방정식을 그대로 오늘날에 적용시켜보면, 오늘날의 교회가 무엇인고 하니, 중앙에 십자가가 있고, 그게 요한계시록 22장에 나오는 생명나무인데, 바로 그 생명나무에서 나오는 효과를 일방적이고 공짜로 누리게 되는 바운더리(boundary), 즉 그러한 권역을 두고서 '교회'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인가? 아닌가?" 라고 하는 것은 오직 십자가 복음만 전하게 되면 드러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십자가 복음을 전했는데, 거기서 "왜 행함은 추가되지 않습니까? 사도바울은 행함도 이야기했는데, 왜 그것은 빼버립니까?" 라고 나온다면, 그것은 같은 형제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언약이 들어와서 언약의 효과를 누리게 되었는데, 그러면 그 효과를 누린 주변의 인간들은 온전한 인간들인가? 아니면 죄인들인가? 죄인들인데, 오히려 다른 이방민족들보다 더 죄인들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순수함을 비로소 맛을 보았기 때문에 말이다.

◈ 정화와 정결 !!

그래서 레위기에 보면, '뻥' 뚫린 중앙에서 나오는 효과를 두고 '정화', 또는 '정결' 이라고 하는 것이다. 서로 비슷한말인데 조금 차이는 있다는 것이다. 더러운 것을 깨끗케 하는 것을 '정화' 라고 하고, 아예 거룩하게 만드는 것을 '정결'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더러운 것을 깨끗케 하는 것은 의(義)의 상태가 아닌 무죄상태, 즉 죄가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그런데 거룩한 것은, 적극적으로 의로운 상태인데, 그러니 "흠 없는 양이 죽었다" 라는 것은, 흠 없는 양, 혹은 흠 없는 염소가 무슨 역할을 해야하는고 하니까, 정화와 정결케 하는 솜씨가 포함된 상태로 흠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냥 "나는 흠이 없다" 라고 말로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흠이 없는 재물은 죄가 있는 자마저도 정화를 거쳐서 정결에 이르기까지, 즉 깨끗함을 넘어서서 거룩함에 이를 때까지의 그 모든 능력을 자기 안에 포함시킬 수가 있는, 그러한 흠이 없는 재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용서함을 받은 성도는 메시야가 아니야 !!

참으로 복잡한데, 그러니 아무나 메시야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수녀가 결코 메시야가 될 수 없는데, 즉 용서함을 받은 성도가 메시야가 아니라는 것이다. 방금 제가 중요한 말을 했는데, 그래서 용서함을 받은 성도는 중보기도를 할 자격이 되지 못하는데, 그런데 사람들이 이런 차이를 모른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정화가 정결이 되는데, 물론 언약의 바운더리 안에서만 정화가 정결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바운드리, 즉 테두리 바깥으로 나가면 어떻게 되는가? 정화가 정결이 없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그만 심판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 거룩함과 심판 !!

이것을 조금 설명해보면, 이렇게 테두리가 있고, 그 안이 깨끗하다고 판정이 되어버리면, 그 바깥은 덜 깨끗한 것이 아니라, 아예 더러움이 되면서, 즉 이러한 깨끗함이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긍휼과 자비로서 깨끗하게 된다면, 여기 바깥의 더러운 것은 방치된 더러움이 아니라, 거기에는 심판이 감행되어야만, 그 안에는 심판이 아닌 자비라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출애굽기 33장에 나오는데, 즉 하나님께서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라고 하시는 것은, "긍휼에서 배제되기 위해서 분류되는 작업이 지금 시행중이다" 라는 의미인데, 즉 "모세야, 이제 너를 보내서 그들에게 자유를 주겠다" 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세를 보내어서, 그 모세에게 속한 쪽은 자비이고, 그렇지 않은 쪽에는 단순히 자비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그들 모두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따라다닌다는 것이다.

(출 33:1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의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출 33:18)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출 33:1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이게 곧 하나님인데, 즉 "안 믿나? 그러면 그만 두고" 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으면 진노가 따라오는데, 즉 인간은 반드시 그 마지막에 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는 것이다. 그것을 확실하게 인격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예수님의 오심이고, 곧 십자가 죽으심이란 말이다. 즉 "너거들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지? 그래,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거야"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 자기 아들마저도 죽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그 정도로 하나님의 저주가 무섭다는 것을 분명히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셨는데, 그런데 인간들은 이 십자가에서 곧장 눈을 돌려서 다시 자기 의를 찾고 자기 잘남을 내세우게 되니, 그것은 하나님의 의든 뭐든 간에, 그런 것은 무시하고 "나는 지금까지 착실하게 잘 살았습니다" 라고, 그렇게 자기 의를 자랑하는 것은 지옥에 가려고 환장한 모습인데, 사실은 그 자체가 곧 지옥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성도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사실상 사람들이 위험한데, 물론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위험하고 말이다. 즉 사람들 자체가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들에게서 들려오는 소식들이 위험하고, 물론 교회에 와도 결코 만만치 않다는 말이다.

◈ 십자가를 경유해서 !!

이것을 신약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면 되는데, 즉 어떤 사람과 어떤 사람이 만날 때,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라고 직접 말하지 말고, 십자가를 경유하면 된다는 것이다. 경유, 즉 십자가를 지나가서 바라보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간단한데, 그런데 자꾸 "나는 복음을 안다" 라고 직접적으로 나오니, 저쪽에서 "나도 복음을 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굽으면(?) 언약이 안 되는데, 하지만 십자가를 경유해서 가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십자가가 그만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만드니,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런데도 저쪽에서는 "나는 잘났다" 라고 나온다고 하면, 물론 그것은 같은 형제라고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신앙의 열매는?

그렇게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것을 두고 성경에서는 신앙의 열매라고 하는데, 신앙의 행함이라는 말이다. 즉 "나는 죄인입니다. 나 자신은 죽임을 당해도 마땅하고, 나는 거짓말을 해도 할 수 없는 놈입니다" 라고 하는 것, 그게 곧 야고보서에 나오는 신앙의 효과이고 또한 열매라는 것이다. 그게 신앙의 열매로서의 행함인데, 그런 행함이 없으면 죽은 믿음이라는 것이다.

(약 2: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약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런데 사람들이 왜 이것을 모르는고 하니, 여기 경유해야 될 자리에 십자가가 아닌 교회를 그만 집어넣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게 문제가 되는데, 왜냐하면 사람들이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해야만 하는 이유를 그만 깜박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사실은 깜박이 아닌 완전히 잊어버렸는데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이스라엘의 경우에 그 이스라엘은 어디를 경유했는고 하니, 십자가가 아니라 자기 이스라엘이 존재해야 될 이유를 그만 경유하게 되니, 이스라엘 자체가 그만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를 핍박하고 모독하는, 그런 하나님의 적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 금단지, 은단지 !!

북쪽 이스라엘인 아합왕 시대에, 물론 그에 앞서서 솔로몬왕 시대부터 문제가 생겼는데 말이다. 솔로몬의 경우에 자기 예상보다 나라가 잘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사람의 경우에, 그렇게 뭔가가 잘 되면 그것을 잊어버리기가 싫은데 말이다. 솔로몬의 경우에, 요강단지부터 시작해서 숟가락까지 모두가 다 금으로 되어있는데, 그런데 어느 날 신하가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 신하 : 전하, 계십니까?
* 임금 : 왜 불러. 나, 여기에 있다.
* 신하 : 요즘 국가 예산이 딸려서 전하의 전용 금 요강단지를 은으로 좀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 임금 : 아니, 뭐라고? 나는 오줌을 계속해서 금 요강단지에 누고 싶다.
* 신하 : 그리고 수저도 은으로 바꾸겠습니다. 그래도 식사하시는데 별 지장이 없잖아요?
* 임금 : 안 돼. 나는 밥도 계속해서 금으로 된 수저로 먹고 싶다.
* 신하 : 그것은 이제 곤란합니다. 그리고 여기 계단난간도 동으로 좀 바꾸겠습니다.
* 임금 : 아니, 이게 어디서 나를 능멸하려고 해. 여봐라 !!

그러니 이렇게 하나의 구성이 된 것이 다시 구성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우상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구성된 것은 흩어져야 하고, 다시 발생해서 다시 구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은혜로 다시 구성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자기가 한번 잘 나가게 되니, 그 다음부터는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할 줄 알라" 라는 성경말씀은 귀에 들리지도 않는데, 즉 "적어도 내 입장에서는 그렇게 먹는 것 입는 것 정도로는 안 되지. '더, 더, 더'가 되어야지. 그래야 내 품위에 합당하지" 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야곱과 에서'에 있어서, 그때 하나님께서 하신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상대를 서로 만나도록 하셔서, 그 두 상대의 만남을 통해서 뭔가 보여주시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에서가 서로 싸우는 관계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은, 이미 지상자체에서 유사 전쟁판이 벌어지고 있음을, 그게 곧 '육의 전쟁'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육적인 전쟁이 이미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6장에서 "우리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누구와의 전쟁이라는 말인가? 우리는 그 뒤의 말이 굉장히 궁금한데, 도대체 혈육이 아니라면 무엇이냐는 것이다. 쩐의 전쟁인가?

(엡 6:10)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엡 6: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만약에 사도바울이 바빠서 도중에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다고 어떻게 되었겠는가? "사도바울이 싸운다고 했는데,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우리가 보기에 사도바울이 평소에 그렇게 싸우는 것 같지는 않은데,  왜 그런 말을 했지?" 라고 하면서 엄청 궁금해했을 것이란 말이다.

그런데 다행히 그 뒤에 보면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와 싸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싸우는 대상이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 라고 하면 일단 누구는 아니라는 말인가? 사람은 아니라는 것인데, 그렇게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 무엇을 경유해야 하는가?

인간이 인간을 만날 때 십자가를 경유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십자가를 경유하지 않으면, 인간대 인간의 싸움이 되는데, 그런데 십자가를 경유하게 되면, "저 인간이 마귀에게 속했는가? 않았는가?" 라는 것에 따라서 싸움의 양상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냥 불쌍히 여기게 되는데, 즉 "아이쿠, 인간아! 복음도 모르면서 그렇게 까부나? 그래, 니가 잘났다" 라는 식으로 해버린다는 것이다.

그게 곧 성경에서 말하는 성도의 온유와 화평인데, 그런데 마치 사람에게 어떤 끝장 승부를 보겠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마치 과거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기 이전에 형 에서를 붙들고 죽니 사니 하는, 바로 그런 식이란 말이다. 

◈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

그런데 고린도전서 6장인가 7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라고 하는데, 녹취하는 분의 고생을 들어주기 위해서 직접 찾아보면(ㅋㅋ), 여기 6장 7절에 보면 그런 말씀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

(고전 6:6)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고전 6:7)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자기가 상대방에게 속아넘어가지 않기 위해서, 즉 상대방에게 지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불의를 행하는 사람을 이기려고 하는 그 자체를 사도바울은 육의 싸움에 머물러있는 인간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도바울은 불의를 행하는 쪽을 야단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불의와 싸우려는 쪽을 나무라고 있다는 것이다.

전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누군가가 나서서 형이 아버지 재산을 다 가지고 간다고 예수님에게 하소연을 하니, 예수님께서 누구를 야단치시는가?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다" 라고 하시면서 오히려 하소연을 한 동생을 나무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 어리석은 부자' 비유를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눅 12:13)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눅 12:14)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눅 12: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눅 12:16)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 이제 강의를 끝내면서 !!

이제 강의를 끝내도록 하겠는데, 말씀의 구조에 의하면 이미 사망의 길은 확정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가지 말라고 해서 가지 않을 자들도 아니고, 또한 가라고 한다고 해서 갈 자들도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미 주께서 정해놓은 데로 움직일 뿐이라는 말이다.

다만 성도가 분명히 해야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말씀의 새장 틀 속에 놓여있는데, 그러니 날개가 있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바다 끝에 가도 소용이 없는데, '저 바다에 누워' 라고 아무리 외쳐도 전혀 소용이 없는데(ㅋㅋ), 우리는 이미 갇혀있는 입장이기 때문에, 즉 "사망의 문인가? 생명의 문인가?" 라는 것은, 오밀조밀한 말씀의 구조에 의해서 갇혀있는 꼴이 된다는 것이다.  

◈ 성도 - '말씀은 이런 이런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

그러니 "나는 구원을 받았다" 라고 하는 자기 자신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덮치고 있는 말씀은 이런 이런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라고, 그렇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유해서 자기를 증거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우리의 남은 여생에 주어진 사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저 사람을 꼬드겨서 우리교회의 교인으로 만들어야지" 라고 한다면, 물론 그렇게 재주를 부린다고 해서 붙어있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그런 꼴을 우리가 어디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 말이다.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렇게 한다면, 그런 것은 우리에게 유혹이 되는데, 마치 자기의 독자작인 영역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껍데기에 불과한데, 마치 근사해 보이는 3층 양옥집과 같은 것인데, 그러니 그것을 우리가 매일같이 발로 차서 무너뜨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항상 밑바탕이 보이도록 해야한다는 것이다. 어제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인형놀이를 하는 아이들이 그 인형의 겉옷을 벗기면 속옷이 드러난다고 말이다.

◈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

시편 51편에도 나오듯이, 그렇게 우리는 항상 용서함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죄를 가지고서, 그러한 죄를 가지고 그 죄를 테두리로 삼아서, 그렇게 해서 십자가에서 먼저 돌아가신 예수님을 강도의 입장에서 만난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자리에서 말이다. 그것이 곧 예수님의 증인이고 성도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야곱이 에서를 이겼다고 착각한 것처럼, 우리도 역시나 "나는 누구누구에게 이겼다" 라고 외치지만, 하지만 우리 자신이 오히려 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날마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들의 이긴 자가 되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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