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한계시록 21 장 / 새하늘과 새땅 / 120419 본문
새하늘과 새땅 120419
녹취:이한례 가락교회120419-요한계시록21장 (새하늘과 새땅)37강a-이 근호 목사 제 37강a
요한계시록 21장입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그렇게 돼 있죠? 여기서 사람들이 큰 오류에 빠지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을 제거하니까 하나님께서 옛 하늘과 옛 땅을 제거하니 사람들이 지는 하나님이 아닌데 지도 옛 하늘과 옛 땅을 제거한 것처럼 이렇게 처신을 그렇게 한다는 그런 오류입니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을 하나님께서 치워버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준다고 하니까 건방지게 자기도 ‘나 이제 옛 하늘과 옛 땅하고 상대 안 할래.’ 이렇게 나오니까 그게 인간은 오버하는 게 되죠. 너무 인간들이 자기 주제파악을 못 해서 새 하늘과 새 땅만 쳐다보는 겁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주께서 치워버리겠다는 옛 하늘과 옛 땅에 누가 포함돼 있느냐 하면 새 하늘과 새 땅을 쳐다보고 그걸 좋다고 기다리는 그 사람이 포함이 돼 있다는 사실을 본인들이 알아야 돼요. 누가 야구를 할 때 홈런을 치니까 자기는 홈런도 치지도 못하면서 지가 덩달아서 홈런 쳤다고 좋아하거든요. 그럼 관중석에 있지 말고 니보고 나와서 쳐 보라 하면 지는 공을 치지도 못하고 피해버리죠.
그러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께 속한 말씀인데 마치 나한테 당연히 속한 것처럼 그렇게 오해들을 하지 마시라 이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이라 할 때 우리는 먼저 알아야 될 것은 뭐냐 하면 옛 하늘과 옛 땅은 어떤 원칙 속에 그동안 관리돼 왔는가를 우리가 먼저 알아야 돼요.
자, 이쪽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다. 하나님께서 처음하늘과 처음 땅이 이렇게 있으니까 여기 처음하늘과 처음 땅을 없애 버리고 이렇게 바꾼다 하니까 우리는 여기 서서 박수 치면서 ‘나 처음하늘 안 들어가고 나 여기(새 하늘) 들어갈래.’라고 나설 수 있는 여기 자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게 없는 거예요. 우리는 마치 하나님이 하시는 것에 우리가 제 3자가 되어서 하나님이 하시면 난 내 선택 여하에 따라서 이걸 선택할 수 있는 그런 입장에 있는 것처럼 오해들을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이 본문 말씀은 사실 우리 인간하고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해준다는 것이지, 우리 듣기 좋아라고 하신 말씀이 아니에요.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아무리 만들어져도 우리는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어쩌면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것은 우리하고 상관없는 것을 가지고 주님께서 우리를 약을 올리는 겁니다.
제가 멍멍이, 개고기를 못 먹거든요. 못 먹는데 만약 어떤 사람이 ‘목사님, 오늘 맛있는 거 준비했습니다.’ 그럼 나는 잔뜩 기대해서 ‘오늘 점심은 굶어야지. 그래서 저녁 때 맛있게 먹어야지.’ 일방적으로 잔뜩 해놓고 ‘그래서 뭐 했는데요?’ 개고기 탕에다가 개고기 편육에다 개고기 무침에다 개고기 회에다 전부 다 개고기로 할 때 난 뭘 느끼느냐 하면, ‘왜 나는 저분이 좋아하는 그 개고기에 난 왜 끼어들 입장도 못되는가.’ 생각을 해보죠. 그러면 그 다음에 뭐냐, 저분은 개고기 세계에서 개고기를 즐겨하는 세계라면 현재 내가 속해 있는 것은 전혀 개고기를 못 먹는 다른 세계에 내가 놓여 있다 이 말이죠.
그럼 이야기가 간단한 거예요. 다른 세계에 놓여있는 내가 저분이 좋아하는 개고기를 준비했을 때 난 거기서 건너갈 수 있다? 없다? 건너갈 수가 없는 겁니다. 바로 그게 오늘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하나님한테는 좋아요. 우리한테는 그림 속의 떡에 불과한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해석하고 이해를 해야 돼요. ‘아! 그림 속의 떡이구나.’ 왜, 우리가 현재 옛 하늘과 옛 땅에서 우리가 여기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으면 일단 빠져 나와서 준비하고 대기하고 있다가, 주께서 새 하늘과 새 땅 만들면 이렇게 들어가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우리가 헌 나라와 헌 땅, 옛 하늘과 옛 땅에서 빠져나올 도리와 방도가 없다는 거예요. 교회 나오고 뭘 해도 소용없어요. 여기서부터 빠져나올 수가 없고 옛 하늘과 옛 땅과 한통속으로 굴러가고 있는데 거기다가 ‘ 니 개고기 맛있지?.’ 해봐야 그림의 떡이지 우리와 아무 상관도 없는 거예요. 우리와 해당도 되지 않는 문제를 이렇게 주께서 언급하신 겁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제자들이 문 닫고 모여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냥 들어오셨습니다. ‘똑똑 문 열어 주세요.’ 이런 것 없었거든요. 그냥 그들이 벌벌 떨면서 아마 문을 철저히 닫아 났어요. 그런데 그들 가운데 예수님이 홀연히 등장했을 때, 제가 질문을 하나 할게요. 들어오시는 것은 주님이 들어오셨습니다. 제 질문이 뭐냐 하면 제자들이 무슨 수로 주님께서 그 현장을 떠났을 때 어떤 수로 같이 따라서 떠날 수 있는 출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없는 거예요. ‘너희들이 무서움에 떨고 있다.’라고 통보해 줬는데 주님이 창 자국, 못 자국 보여주고 이야기하시다가 가셨잖아요. 가실 때 같이 새끼로 묶어서 같이 떠나갈 수 있는 출구가 우리한테 허용이 됩니까? 안 됩니까? 허용이 없는 거예요.
주께서는 오시고 가시는 게 가능한데 우리는 오시는 주님을 영접했을 뿐인데 갈 때는 따라 나설 수 있는 그런 출구가 우리한테는 일체 허용될 수 없습니다. 교회를 50년, 목사, 장로 백날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교회란 안 되는 짓을 하고 있는 겁니다. 소용없는 짓입니다. 주님 따라 못 가는데 교회 져서 왜 그러한 이상한 짓을 하죠?
어떤 분이 결혼에 대해서 언급해서 제가 그걸 생각했다가 십자가마을에 ‘결혼의 의미’라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거기 보면 제 출발점이 그거예요. 뭐냐 하면 ‘하나님이 짝 지어 준 것을 사람이 함부로 헤어지지 못한다. 남자에게 복종해야 된다.’ 그런 걸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결혼’이라는 게 이상한 짓이라는 겁니다. 출발점이 이상한 짓이라는 거예요. 혼자서 살아왔잖아요. 혼자서 살아온 것이 습관화되고 이것이 계속 혼자 살아왔으면 앞으로도 계속 혼자 살면 되는데, 친구야 그냥 사귀면 되지, 친구는 같이 사는 게 아니잖아요. 사는 것은 식구들과 혼자 살아왔고 나중에 식구들 다 늙어 돌아가시면 혼자 사는데 혼자 사는 버릇으로 계속 혼자 사는데 왜 그것을 생판부지의 사람과 같이 살아야 됩니까?
이게 아~주 이상한 짓 이예요. 참 이상한 짓 이예요. 친구로 사귀는 것은 이해하자 말이죠. 친구는 만날 같이 사는 건 아니니까, 좋았다가 헤어지면 집에 가니까. 그런데 친구도 아니요. 가족도 아니요. 그런데 내 사는 방에 들어오고 화장실도 같이 사용하고 지가 뭔데 밥을 나한테 해주고 내가 뭔데 그한테 용돈을 주고 그분이 뭔데 내 손빨래를 지가 하느냐 말이죠. 이건 정말 이상한 짓이다 이 말이죠.
평범한 것 같으면 이상한 것이 아니고 상식 같으면 이것은 일단 결혼하고 난 뒤에 ‘잘하자’가 되지만, 안 되도 되는 일을 억지로 이상한 짓을 해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하면 헤어지지 않는 것 때문에 신경을 써야 돼요. 처음부터 혼자 사는 사람이 풍속 따라 주변의 권유 따라 강요 따라 이렇게 억지로 하나 됐으면 그 다음부터는 정상이 아니기 때문에 이상한 짓이기 때문에 혹시 언제 삐져서 ‘갈라서자.’ 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항상 신경을 써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혼을 하는 것도 신경을 쓰지만 결혼하고 난 뒤에 끝이 아니고 그 다음부터 언제 틈만 나면 갈라설까를 염두에 두고 그걸 억지로 붙잡아 매는 곱빼기 노력을 경주를 해야 되니 이건 이상한 짓에다가 이상한 노력까지 첨부를 해야 되네요.
동물들을 보면 한 가족이 이렇게 부부가 같이 사는 동물들은 거의 없어요. 대부분 새끼 낳고 일단 역할은 다 끝났으니까 서로 갈라서는 겁니다. 새끼 낳고 난 뒤에 남편은 다른 암수 만나든 수컷이 다른 암컷을 만나든 간섭하는 것도 없고 암컷이 다른 수컷을 만나서 새끼를 낳아도 수컷이 책임지지도 않고 그렇습니다. 얼마나 쿨 합니까? 시원해요.
그래서 생물학자들은 새끼 낳기 위해서 결혼한다면 오히려 새끼 낳아 주었으면 그 다음부터 서로 서로 새끼 하나, 둘 낳아 주었으면 그 다음부터 새끼 얻었으면 됐다 이 말이죠. 더 이상 나한테 간섭하지 말고 니는 니, 나는 나, 간섭하지 말고 이렇게 돼야 되는데 새끼 낳고 난 뒤에도 왜 그렇게 간섭하고 어디 가면 못 가게하고, 왜 그런가.
여기에 대해서 성경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좀 어려운 이야기 나와서 미안합니다. 좀 어렵게 해야 되겠어요. 옛 하늘과 옛 땅, 처음 하늘과 처음 땅 속에는 어떤 너희들이 모르는 잉여분의 원리가 여기에 작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아담이 범죄하고 난 뒤에는 하늘과 땅은 이런 여분의 원리 때문이 아니고 밥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리고 남자, 여자 만나는 것은 그야말로 자식 낳기 위함이고 서로 끌려서 그런 거거든요. 그럼 끌려서 결혼하는데 끌리는 이유에 대해서는 몰라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뭐냐, 틈만 나면 모세가 이야기한 이혼증서 써주고 틈만 나면 이혼증서 해서 합법적으로 하나님의 뜻이고 이혼해서 그 다음에 또 새로운 자기 욕정을 만족할 새로운 짝을 찾는 거기에 아주 예민해 있어요. 어떤 수를 쓰면 하나님 앞에도 죄가 아니면서도 내 욕구를 만족시키는 거기 신경을 쓰고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물었잖아요. ‘모세의 말한 이혼증서 써주면 되지 않느냐.’ 할 때 예수님 말씀이 ‘하나님이 짝 지은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 그러니까 그 소리 듣고 그 다음에 내가 속으로 웃었어요. 제자들이 하는 말이 ‘ 그러면 누가 결혼하려 하겠습니까?,’ 아! 참, 솔직하죠? 한 여자 하고 살 것 같으면 처음부터 그랬다면 못 헤어진다면 결혼 미쳤다고 합니까? 결혼이 그야말로 미친 짓이죠. 지가 스스로 굴을 파고 굴속으로 들어가는 미친 짓을 하고 있다 이 말이죠.
사람은 자기 선택 없이는 답답해서 못 삽니다. 자기 선택! 그래서 인간들은 뭐냐 하면 이 결혼을 내가 선택했다는 걸로 쳐달라는 거예요. 내가 선택해서 내가 알아서 내가 원해서 결혼한 걸로 하나님도 그것 좀 인정해 달라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걸 초를 쳐버리잖아요. 니가 결혼하고 싶어서 했든 발작을 했던 실수를 했든 관계없이 하나님이 짝지어 준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하나님 말씀 듣고 천당 갈 사람이 아무도 없겠다.’는 거예요.
왜냐 하면 그것은 이혼하고 안 하고 간에 마음에 아내와 남편에 대해서 이미 애정이 식어버리면 이것은 이상한 짓을 하다가도 다시 정신 차려서 제 정신으로 돌아온 거예요. 요 말이 어렵습니다. 결혼한 것이 이상한 짓이 되고 결혼도 내가 선택하고 이혼도 내가 선택하고 다시 결혼하고 이혼을 하고 결혼을 해도 내가 선택하고 이것을 우리는 정상적인 나의 욕구와 부합되는 일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부합되는 일에 주님께서 박수를 쳐줄 때 우리는 주의 말씀 듣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 주님께서 브레이크를 걸어버리니까 그 당시 제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이 화를 내면서 ‘그렇다면 누가 결혼할 수 있습니까?’ 다시 말해서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까?’ 다른 말로 하면 ‘누가 구원받겠습니까?’
주님 뜻을 그거예요. ‘그러니까 아무도 결혼 못하지.’ㅎ 이게 더 어려운 문제죠. 그러니까 아무도 결혼 못하는 거예요. 결혼을 해놓고 다른 남자, 다른 여자 찾는다는 그 자체가 이건 하나님이 짝지어 준 게 아니에요. 지가 선택한 거라고요. 하나님께서는 옛 하늘과 옛 땅 안에서는 니가 마음껏 선택하고 그 선택한 결과가 하나의 똥, 오줌 배설물로서 옛 하늘과 옛 땅을 더욱 더 지저분하게 만들어서 그것이 새 하늘과 새 땅과 교체되는 이유를 니가 짊어져라 이 말입니다. 맘껏 내놓아라, 꿍하고 있지 말고 니 속에 들어있는 니 하고 싶은 대로, 아까 뭐라 했어요? 인간의 사는 목적이 뭐라 했습니까? 자기 선택! 사업을 하던 뭐를 하든, 남이 아무리 좋은 것 갖다 줘도 처음엔 기쁘지만 나중에는 짜증나요. 아유, 내가 하겠다는 거예요. 내가. 내가 하는 거예요. 사람은 내가 할 때 나라는 정체성이 확립이 되고 나라는 존재 이유가 있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땅과 하늘 속에 아담을 만드시면서 아담이 땅과 하늘 속에서 무슨 죄들을 맘껏 발산시키고 그것이 결국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교체해야만 될 근거를 이 땅에 질펀하게 펼치는 그러한 활동들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옛 하늘과 옛 땅 속에 누가 포함돼 있습니까? 우리 자신들이 포함돼 있고 옛 하늘과 옛 땅이 망한다는 것은 결국 무슨 이야깁니까? ‘니 망해야 돼.’ 그런 이야기예요. ‘니 망해야 돼.’라는 그걸 보고 우리는 마치 제 3의 영역에 따로 빠져 나와서 ‘나 새 하늘과 새 땅 들어가야지.’ 이러고 있다 말이죠. 누구 맘대로? 참, 주제 파악도 못하고, 인간이 자기 선택하는 그 더러운 버릇이 심지어 주님의 말씀 가지고 선택하려고 하는 거예요. ‘난 처음 하늘은 싫어. 새 하늘? 나 거기 들어갈래.’ ‘누구 맘대로? 아직도 니가 선택하나?’
새 하늘과 새 땅을 인간이 선택해서 들어간다면 그 선택이라는 것은 새 하늘과 새 땅에 적용되는 원리가 아니고 어디에 적용되는 원리냐 하면, 옛 하늘과 옛 땅에서 맘껏 지가 기껏 써먹었던 옛 하늘과 옛 땅에 속한 원칙 중 일부에 포함이 돼 있는 겁니다.
그래서 21장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라는 말은 이건 사실은 인간한테는 해당도 안 되는 겁니다. 슬슬 약 올리는 거예요. ‘아이쿠, 나한테는 주어지지도 않는구나.’ 그렇게 생각해야 됩니다.
그 다음에 2절에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어디로부터 오죠? 하나님께로부터 오죠. 이게 웬 횡재예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자들에게 문이 닫혔을 때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얼마나 좋은 찬스입니까? 부활의 나라에 가기를, 주님하고 허리끈 해서 야무지게 꽉 잡고 주님 떠날 때에 꽉 붙들고 있으면 같이 타임머신 타고 부활의 세계에 같이 들어가면 좋겠는데 그게 소용없는 거예요.
그럼 주님 떠나버리면 또 어디 놓여 있습니까? 역시 옛 하늘과 옛 땅에 또 놓여 있는 거예요. 주님은 혼자 왔다갔다 다 하시는 거예요. 주님은 혼자 출입구를 아시고 혼자 출구를 아시는 거예요. 우리는 출구가 어디 있느냐를 지금 찾는데 그 찾는 방식 자체가 나의 선택과 기껏해야 옛 하늘과 옛 땅에서 회자되고 풍문에 떠도는 그런 방법들 있잖아요. 십일조, 기도, 헌금, 예배, 예수 믿기, 성령 받기, 그런 온갖 성경에 나오는 그런 것들을 이렇게 더듬거리면서 그걸 연결시켜서 조직신학 이름으로 짜임새 있게 신학을 외우기도 하고 빡세게 기도도 해보고 금식도 해보고 하지만, 그게 출구가 되느냐 이 말입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무슨 짓을 해도 출구를 허용한 적이 없습니다. 다 안 되니까 몸부림 쳐보는 거죠. 가만히 있으면 심심하니까 기도도 해보고 가만히 있으니까 나중에 예수님 재림하시면 지옥 갈까봐 겁나서 헌금도 해보고 그냥 몸부림 쳐보는 거예요. 다 씨잘 데 없는 짓이죠. 그게 출구가 아니다 말이죠.
어떤 경우는 자기가 잠시 착각할 때가 있어요. 기도하고 난 뒤에 은혜 받아서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고 찬송가 부르면서 하는데 그 5분 지나면 또 ‘여보, 당신 속도 과속했나?’ ‘왜?’ ‘구청에서 벌금 나왔네.’ 하면 새 하늘과 새 땅이 다 날아가 버리고 벌금에다 오후에 애가 ‘엄마 성적표 가져왔다.’ 하는데 보니 20등 하던 애가 25등으로 떨어져 버리면 화가 나서 새 하늘 새 땅이 아니죠. 내가 선택한 니가 왜 못 났냐고 자기에 대한 자책감을 ‘아유, 왜, 나는 이런 것밖에 선택 못해.’ ‘뭘 더 선택할 수 있는데? 니가 무슨 선택을 해봐라. 출구가 되는가.’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도 출구가 안 돼요. 왜냐, 갇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옛 하늘과 옛 땅의 특징은 우리를 가두어 놓는 하나의 잠수함, 동굴 같은 겁니다. 야무지게 가두어 둬서 어떤 인간도 거기서 탈출이 불가능한 그러한 밀폐된 용기, 그러한 그릇.
창세기 7장 노아 홍수에 보면 우리 상식에서는 비가 위에서 오게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땅의 샘이 터졌다는 거예요. 땅의 샘이 터졌다. 땅에 그리 물이 많았는가, 그런데 과학자들이 지각 50킬로미터, 2500킬로미터까지는 맨틀, 총 6000킬로미터까지는 외핵, 내핵, 여기 지각에 있는 태평양 바다에 있는 모든 바다보다 여기 맨틀 안에 있는 물이 10배가 더 많다는 겁니다. 그게 왜 그러느냐 하면 7개판들이 있는데 판들이 밀도가 높은 판이 있고 밀도가 약한 판이 들어가는데 밀도가 높은 판이 대륙판이고 아래 빠지는 것이 해양판인데 해양판들이 물을 가지고 자꾸 깊숙이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밑에는 지하수가 있는 겁니다.
이것이 확실한 증거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간에 성경에 보면 밑의 샘이 터지면서 지금은 그런데 그 당시는 우리가 알 수가 없으니까 샘이 터지면서 아래위로 물바다가 된 거예요. 이 말은 뭡니까? 무지개라 하는 것은 ‘너는 물속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이제사 알았느냐. 물속에 갇혀있지만 내가 다시는 물로서는 심판하지 않겠다.’ 무슨 말이냐 하면 갇혀 있기는 갇혀 있는데 물로 조지는 그런 식으로는 갇혀 있음을 확인시키지 않겠다. 나중에는 베드로후서에 보면 불로서 조지겠다. 그러면 결국 이 말은 뭡니까? 옛날에 노아 홍수 때는 아래위 물이 있는 것처럼 지금은 불에 갇혀 있는 꼴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은 소멸하는 불이라 돼 있죠? 항상 모든 것이 불 속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에 보면 그때가 되면 지구가 어떻게 된다? 종이에 라이터 대면 홀라당 타잖아요. 타버리면 분명히 종이가 있었는데 타버리면 종이가 없어지죠. 그때는 한마디로 없다. 불에 태워서 있는 것을 뭐로 만든다? ‘없다.’로 만드는 겁니다.
그럼 없다는 것을 비디오 거꾸로 하듯이 되감기 해봅시다. 없다는 것을 되감기 하면 있다가 되죠. 우리는 그 있음이 전부인 줄 알고 그게 영원한 줄 알고 ‘없어질 그 있음’에다 우리는 우리의 목숨과 명예와 체면과 자존심을 다 걸어버리는 거예요. 그게 어떤 원리에서 그것이 물로 보호받던 것이 불로서 태우는가, 원리가 있는데 그 원리는 상관이 없이 그냥 눈에 보이는 그거, 눈에 보이는 것에 달 있고 나 있지, 별 있지 나 있고, 그게 전부예요.
해를 품은 달이라는 드라마를 제가 한번 봤어요. 그냥 이렇게 슬쩍 봤는데, 왕이 어떤 여자를 사랑하는 그런 내용인데 그렇게 둘이 사랑해봤자 갇혀 있잖아요. 갇혀 있고 사랑할 때 얼마나 나의 선택을 우쭐대겠습니까? ‘내가 저 여자 선택하길 난 잘했어.’ 백날 선택해도 그곳의 열매와 결과는 새 하늘과 새 땅과 연결이 안 돼요. 왜, 단절이 돼 있기 때문에.
새 하늘과 새 땅은 오는 본문 2절의 말씀처럼 하늘에서 주셔야 되는 겁니다. 예루살렘이 어디서 내려온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하나님께로부터 이 세상에 내려오는 거죠. 마치 제자들이 문을 닫고 있을 때에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들이닥친 것처럼.
왜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들이닥쳤을까요? 주님께서 개구멍으로 안 오시고 왜 홀연히 나타났을까요? 자기 백성 말고 아무도 못 가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 겁니다. 입구가 없다는 말은 출구도 없다는 말이고 없는 출구에서 어떤 사람이 홀연히 사라졌다면 그 사람은 지가 알아서 찾아 간 게 아니고 누군가 데려갔다는 뜻이 되거든요. 그처럼 데려가는 식으로만 구원된다는 그것이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이 확립한 원칙이라는 겁니다. missing, 실종, 실종된 거예요.
그 다음에 두 번째로 어려운 문제 내겠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처음하늘과 처음 땅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의 그 흔적과 원리가 여기 남아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다. 없다. 이게 질문입니다. 옛 하늘과 옛 땅에 새 하늘과 새 땅의 흔적이 뭐 긁고 지나간 어떤 흔적이나 증거물 같은 것이 생겨났습니까? 안 생겨났습니까? 생겨났죠. 생겨났습니다.
그걸 제가 설명하고자 합니다. 옛 하늘과 옛 땅은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갇혀있다고 보여주면서 거기서 이미 새 하늘과 새 땅의 징후 같은 것이 여기서 나타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말하기를 ‘자꾸 지금 있는 하늘과 땅에서 얼마나 잘 됐는지, 그런 유의 기적, 흔히 교회서 말하는 복 받은 그걸 기대하지 말고 ’요나의 표적‘을 가지고 진정한 복이라 했거든요.
그럼 요나의 표적이라는 것은 죽음-> 사는 것이다. 죽음에서 산다는 이 아이디어는 이 옛 하늘과 옛 땅의 인간들은 누구나 다 그런 걸 상상해요. 그런 의미에서 죽는 것이 새 하늘과 새 땅의 흔적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어요. 왜, 인간은 살다보면 괴로우니까 ‘빨리 죽고 좋은 나라 가고 싶다.’ 이런 것은 종교 상관없이 교회 다니는 것과 상관없이 누구나 그런 본성이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엎어지면 ‘하나님’ 이고 교회 안 나가도 ‘예수님’ 부르짖으면서 어떻게 도움 요청하려 하는데, 뭐가 여기서 떠오르느냐 하면 이런 죽음 자체로서 새 하늘과 새 땅의 증거물이 될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럼 제가 방금 이야기하기를 옛 하늘과 옛 땅은 뭐를 품고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의 흔적을 품고 있다. 그러면 품고 있으면 우리는 파악하면 될 게 아니냐, 그런데 품고 있는데 우리는 그 증거를 뭐라고 오해할 수밖에 없느냐 하면, 인간이 갖고 있는 선택성이 뭘 오해하느냐 하면, 우리가 상상하는 새 하늘과 새 땅과 연결시키는 실수를 자꾸만 범하게 되는 겁니다.
요나의 표적을 보면서 ‘아, 나도 죽어서 사는구나.’라고 안심들을 하시는데 그건 소용없는 짓 이예요. 뭔가 이 세상에서 벗어난 듯한 짓들이 보이더라도 그 해석이 옛 하늘과 옛 땅의 죄악 된 습관이 거기다 스며들어서 그것 가지고 해석을 하려고 덤벼들기 때문에 결국 실패로 끝나버려요. 제대로 흔적을 흔적의 가치답게 파악할 수 있는 그것이 인간에게는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어떻게 하느냐는 요 말 다음에 말씀드릴게요. 먼저 흔적에 희한한 흔적이 있어요. 히브리서 7장 봅시다. 얼마 전에 제가 주일 오전에 요 대목을 이야기했는데 히브리서 7장에 2절에 보면 “2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3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이렇게 돼 있죠? 그냥 제사장으로 오래 한다. 이러면 될 건데 제사장과 관련됐는데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는 이야기를 왜 구태여 제사장하고 관계없어 보이는데 왜 이걸 집어넣느냐 말예요. ‘어떤 분이 제사장직을 오래합니다.’ 이러면 될 걸 가지고, ‘어떤 마을에 멜기세덱이라는 제사장이 계시는데 그분은 늙어 죽을 때까지 어릴 때부터 그렇게 했습니다.’ 하면 되는데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다는 걸 구태여 밑에 깔고 이야기를 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뭘 뜻하느냐 하면, 이것은 우리가 어디 훌륭한 도사 같은 제사장 없나, 우리가 나의 선택, 기존의 것 말고 진짜 훌륭한 제사장 없을까, 이렇게 어떤 선택을 우리가 하게 될 때 그 멜기세덱은 선택될 수 있는 대상에서 멜기세덱은 인간에게 포착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게 되면 옛 하늘과 옛 땅에 새 하늘과 새 땅의 흔적이 분명히 있어요. 하지만 그 흔적은 어떤 기능을 하느냐 하면 잡으려 하면 안 잡히는 그런 능력으로 우리 안에 역사합니다. 예수님 왔을 때 허리끈 잡고 빡세게 테이프로 아예 다리를 칭칭 감아서 ‘주님 가시는 곳에 나도 따라 가렵니다.’ 이렇게 돼야 될 텐데 ‘니는 죽어도 못 와.’ 이렇게 된다 말이죠. 같이 가는 게 아니고 뭔가 떨치고 가는 거예요. 떨치고 가야 될 이유가 ‘너는 옛 하늘과 옛 땅에 속했고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에 속했기 때문에 옛 하늘과 옛 땅에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넘어 갈 때에 그냥 넘어가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끊어질 것은 다 끊어지고 떨어질 것은 다 떨어지는 그 작용으로만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어느 인간이 살려고 죽어서 좋은데 가고 싶지, 어느 인간이 ‘나 지옥 가게 해 달라.’고 데모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없거든요. 혹시 행여 하나님이 속을까 싶어서 ‘주여 저 지옥 가도 마땅합니다.’ 하면서 속으로 ‘웃Ti, 이렇게 겸손하면 주께서 알아주겠지.’ 꼼수는 꼼수로 망합니다. 민주당이 꼼수 쓰다가 꼼수로 망한 게 민주당 이예요. 꼼수로 망하는 데 그게 다른 사람들한테는 통하지만 주님한테 통할 리가 있습니까?
그럼 어떻게 하느냐, 시편 37편 40절 “여호와께서 저희를 도와 건지시되 악인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연고로다” 구원은 어디서 건진다? 악에서 건진다 이 말이죠. 하나님께서 옛 하늘과 옛 땅에 있는, 지금까지 제가 설명한 바에 의하면 결국 옛 하늘과 옛 땅은 저한테는 개고기 먹으라는 소리와 똑같은 소리예요. 전혀 인간에게는 해당되지도 않습니다. 어떻게 예수 믿고 좋은 나라 가서 오래 살아볼까 하는 이런 꼼수는 전부 다 거절해요.
그렇다면 주께서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고 하나님의 신부가 위에서 내려왔을 때 우리를 건져 가는데 그리고 하나님께서 새 하늘을 만드는데 그럼 여기 위치를 어떻게 만드느냐 하면 주님께서 이렇게 새 하늘과 새 땅의 그 원리를 가지고 옛 하늘과 옛 땅에 들어오면 오면서 뭐로 바뀌느냐 하면 우리가 미워질 수밖에 없는 원수의 양상으로 우리에게 옵니다. 모든 내 뜻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에서 우리에게 옵니다. 바리새인의 입장에서는 사탄의 얼굴이죠. 악마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와서 우리가 미워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모습으로 와서 우리가 그분을 쳐 죽이고 그렇게 해서 그분이 주님 메시야를 기다리는 나보고 ‘니가 바로 하나님의 원수’라고 지적받는 그러한 양상을 띠는 거예요.
자, 여기에 우리가 있고 주님이 계시다 합시다. 주님이 계시는데 우리는 우리의 존재, ‘나 있습니다.’ 존재거든요. 존재와 존재의 만남은 우리가 보통 사람 만나듯이 ‘나 여기 존재해 있으니까 주님도 존재로 나타내 주시기 바랍니다.’ 이러거든요. 그런데 정작 주님께서 몰고 온 바람은 뭐냐, 존재가 오는 것이 아니고 여기 하늘나라에 합당한 개념과 언약과 분위기와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과 동감되는 하나님의 의와 전쟁, 율법, 이런 것들이 여기서 죽~ 몽고의 황사바람처럼 이런 것이 몰려오는 거예요. 몰려오게 되면 결국 이 속에 뭐냐 하나님의 원수가 포함돼 있다 말이죠.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이 덮쳐서 와 버리면 우리는 뭐냐 하면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겁니다. 원수라고 지적하는 정도가 아니고 원수다운 태도를 오신 주님 앞에 맘껏 보이게 돼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해 버리면 나는 어떻게 됩니까? 주님께서 그렇게 해버리면 ‘내 행함과 내 자존심과 내 체면 뭐가 됩니까?’ 이런 소리가 팍팍 유발되게 하는 거예요.
이건 말로 하면 어려우니까 쉬운 말로 합시다. 이건 실제는 못 봤습니다만 드라마를 예를 들겠습니다. 며느리가 바람을 피워서 도망을 갔다 합시다. 그걸 보고 시어머니가 속이 상해서 ‘니 들어오기만 해봐라. 애는 덜렁 시어머니께 맡겨 놓고 지 혼자 바람나서 젊은 애하고 놀아나는 나쁜 여자’라고 했을 때 속이 상한 거예요. 그런데 드라마니까 남자 주인공이 착한 역할 해야죠. ‘어머니, 세월이 10년 지나고 애도 엄마를 용납한다 합니다.’ 이러거든요. ‘그러니 어머니도 고만 아들을 봐서 며느리가 나가서 폭삭 망해서 빈털터리가 돼서 온다 하니까 그냥 받아 주세요.’ ‘그래, 니가 정 그렇다면 내가 용서해 줄게.’라고 하는데 점점 더 며느리가 집 가까이 오거든요. 생각은 용서를 했는데 그 오는 꼬락서니하고 머리 귀신같이 해서 거지꼴해서 들어오는 걸 보니 옛날 일로 부아가 나는 거예요.
우리가 ‘주님 믿습니다. 어려움 가운데서도 주님 믿어요.’ 하는데 막상 주님께서 들이닥칠 때는 우리가 그만 부아가 나는 거예요. 우리 속에 악마가 있기 때문에 부아가 나서 ‘주님 믿는데 나한테 돌아온 게 이것뿐입니까?’라고 부아가 나는 거예요. 그럴 때 주님께서 성공한 거예요. 니 자리를 시편 37편 40절, 원수에게서 구한다. 이 시편을 누구보고 하신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한테 하는 거거든요. 다윗의 자손 이야기니까. 이게 우리보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보고 이야기하거든요. 예수님께서 원수에게서 건져낸 그것이 예수님의 구원의 씨앗 이예요. 그것이 성령으로 주어지는 거거든요.
그러면 구원의 씨앗이 오게 되면 시편에 나오는 악인, 원수 다 누구에게 해당되느냐 하면 바로 구원받는 당사자, 우리를 악인 만들고 주의 원수 만드는 작업과 동시에 ‘우리는 정죄함이 없나니, 라고 긍휼과 자비로 구원을 시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복잡한 절차는 치우고 우리가 착한 양심, 착한 신앙인 돼서 주께서 저만치 오시기만 하면 우리는 ’기다렸습니다.‘ 라고 박수치고 환영해서 그런 식으로 메시야를 영접해서 하늘나라 가기를 원하는 거예요. 그게 누구냐, 바로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었다 말이죠. 우리 대신 앞당겨서 주님 오실 때 메시야 오기를 만만의 준비를 갖춘 사람들이 유대인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우리는 그 현장에 없다고 해서 남의 이야기라고 하지만 막상 우리가 그 현장에 가보세요. 우리는 예수님을 죽이는데 동참할 수밖에 없습니다. 구름타고 오시는 분을 기다렸지, 초라한, 만날 우리에게 죽으라고 이야기하는, 자기를 죽이고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오라. 내 살과 내 피를 마셔라. 이런 되도 않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그분을 우리는 믿을 의사 없습니다. 우리는 나의 선택의 가치가 윤기가 나고 빛이 나는 그런 협상과 타협의 대상자를 우리는 원했던 거예요.
너희가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 했거든요. 지옥 간다 이 말이죠. 그러면 바리새인이 얼마나 메시야가 오기를 자기 정당하게 요즘으로 개혁주의 성화죠. 자기를 얼마나 정갈하고 철저하고 깨끗하고 아름답게 관리해 왔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할 때 그의 아비가 누구라고? 악마죠. 악마가 그 일을 시켰다고, 주님께서 그 이야기를 안 했으면 주님도 곱게 인생이 좋을 텐데, 막달라 마리아하고 결혼해서 애 낳든지 했을 텐데, 말하는 것도 밉상을 사요. ‘어이쿠, 훌륭하다.’ 하면 될 텐데 ‘너의 애비는 마귀다. 귀신이다.’ 이렇게 하니까 아예 부아를 돋아요. 자기를 죽이라고 이렇게 분위기를 추임새를 넣는 거와 똑같은 거예요.
그들에게만 하셨겠습니까? 주님 우리 찾아올 때 우린 안 그랬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정작 우리가 주님께 돌아서고 예수를 영접한 그 순간 ‘주님이 저를 건져내지 않으면 저는 가망성이 없었습니다.‘ 주님께 피 흘리지 않으면 우리 손에 죽었던 그 피가 오히려 우리를, ’피를 흘리게 한 당사자인 우리 죄인을 그 피가 오히려 살려냈습니다.’ 그 고백, 그 고백 관계 말고는 다른 관계는 마귀가 설치는 관계죠. 그 피를 가려놓기 위해서 마귀가 설쳐대는 관계입니다.
조직 신학해서 새 하늘 새 땅 들어가려고 전략 꾸미고 이거 다 거짓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하늘나라, 새 하늘 새 땅 안 넣어 줍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유대인들이 얼마나 새 하늘 새 땅을 그리워했을까요. 어디 나오느냐, 이사야에 나오죠. 이사야 65장 17절 한번 볼까요. 왜냐 오늘 본문과 연관돼 있기 때문에 그래요. 오늘 성경 너무 찾으면 피곤한데 미안하지만 찾아봅시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그 다음에 유명한 구절 있죠? 이사야 65장 끝에 보면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또 20절에 보면 ”그때는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 백세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 받은 것이리라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것에 거하겠고 포도원을 재배하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죽 나오죠?
이 이야기를 누구도 같이 봤습니까? 그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이걸 얼마나 보고 가정마다 심방할 때 이 이야기를 했겠습니까? ‘희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저 메시야 나라는 우리의 나라입니다. 아브라함 자손에게 주어집니다. 메시야께서 오셔서 완성하시면 이거 주십니다.’라고 했던 그들이, 천국의 본 자손들이 천국에서 쫓겨나고 개 같은 이방인 백부장은 그 천국을 차지하고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습니다. 뭐 영화 반전 말하는데 세상에 성경이 엄청난 반전 이예요.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는 우리는 주님의 존재만 달랑 나하고 이야기하려고 하지만, 주님의 아우라가 있어요. 주님 주변에 태풍같이 몰고 오는 태풍이 구원받고자 하는 우리를 덮쳐 버리면 우리는 졸지에 하나님의 원수임이 발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에 나오죠. 원수 된 자를 위해서 경건치 않은 자, 죄인을 위해서 피 흘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의 의라는 작품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원수인 것을 분명히 언급하시죠. 그 하나님의 원수라서 니는 원수라서 원수 같은 짓을 해야 돼요. 원수 짓이 뭡니까? 주님을 자꾸 발로 차고 공격하고 모독하고 주님을 싫어하고 그런 짓을 유발된 이유가 너를 구원하기 위함이라니까요. 오늘 제가 올린 김 명현 목사님 설교에 나오죠? 우리를 지옥 가라고 저주한 것이 아니고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를 저주했다고요.
자꾸 존재로, 나 여기 있고 ‘주님, 제가 뭐 해야 될까요?’ 하지 말고 현재 주님이 우리 자신한테 주께서 유발시키는 일들이 있어요. 그 짜임새, 어떤 사태에 반응하는 내 숨어있는 본심, 어떤 사태가 일어났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가, 그 모든 것이 옛 하늘과 옛 땅, 망해야 될 불쏘시개가 될 그러한 성격을 유감없이 보여줍니다. 우리가 지푸라기고 우리가 불 잘 타는 우리는 휴지고 그런 불 탈 수밖에 없는 기름이 묻어 있어서 불만 가면 홀랑 타는 그런 모습을 우리는 맘껏 보여주는 거예요. 그리고 니만 그런 것이 아니고 니가 속해 있던 그 전부가 옛 하늘과 옛 땅에 흐르고 있던 하나님의 원리 원칙 질서였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배후에 누가 있겠습니까? 유황불에 들어가는 마귀가 옛 하늘과 옛 땅에 너희들과 더불어 함께 그동안 살아왔느니라.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그것은 바로 말씀이 이사야 62장에 보면 내 신랑, 신부, 그 신랑, 신부라 하는 것은 니가 자꾸 생각하지 말고 들이닥치니 신랑이고 들이닥치면 우리는 신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 되는 것도 들이닥칠 때 원수 되는 동시에 원수 된다는 그 이야기도 있지만 다른 이야기에 보니까 너는 내 신부라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부라는 이야기도 우리가 원해서가 아니라 신부됨이 들이닥치니까 신부 되었고 입혀주니 입어보니 웨딩드레스라.
우리가 우리 쪽에서 어떤 꼼수를 쓴다는 것은 말도 안 돼요. 꼼수는 꼼수로 통하지도 않아요. 구원받기 위해서 알랑방귀 뀌는 것은 소용없는 겁니다. 그냥 우리의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이 우리로 하여금 신부되기 위한 절차로서 주님께 반발하고 반항하는 옛 하늘과 옛 땅의 모습을 보여줄 때 우리는 뭘 증거 하느냐, ‘나는 옛 하늘과 옛 땅에 속하는 존재였는데 주께서 들이닥치니 주의 약속대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나이다.’라는 고백이, ‘어이쿠, 내 입에서 왜 나오지?’
새 하늘과 새 땅은 선택해서 가는 게 아닙니다. 선택이 아니고 나로 하여금 옛 하늘과 옛 땅에 속했다는 것을 확실하게 날마다 추궁하는 그 추궁의 힘이 힘을 뒤따라 가보니까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내려온 능력으로 인하여 내가 누구며,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를 까발리는 능력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겁니다.
그러니 “내가 보니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하는 사도요한은 지금 밧모 섬에 귀양살이는 이건 문제 되지도 않아요. 혼자 신났어, 신났어. 너무 기쁜 거예요. 웬 떡이요. 웬 떡이요. 왜 나한테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여주십니까? 신부거든.
우리가 주님 앞에 뭘 더 원합니까?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게 아니에요. 뭐로 삽니까? 주어진 말씀으로 사는 겁니다. 말씀 지키며 사는 게 아니고 말씀이 살려내는 그 살려냄으로 사는 것이죠. 말씀이 와서 우리를 말씀되게 만드는 그 작용으로 ‘아! 지금 살아있구나.’ 아는 겁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찾아오시면 우리의 자리를 주님의 말씀의 천으로 카펫처럼 덮쳐 버리면 우리는 나라는 것은 사라지고 예수님께서 어떻게 너희 속에 갔다가 어떻게 죽을 고생하면서 너희 속에서 탈출했는가, 그 경로를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주어지게 되면 주께서 옛 하늘과 옛 땅에 오셨다가 혼났죠? 뺨까지 맞았으니까 옷 벗기고 욕 얻어먹고 혼났죠. 열두 제자 다 도망가 버리고 얼마나 혼났어요? 그래서 주님께서 아버지한테 간절히 기도했잖아요.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했잖아요. 그 정도로 우리는 그만큼 지독하게 옛 하늘과 옛 땅 고수 파에 속한다니까요. 때려죽여도 이 땅에서 이 하늘과 이 땅에서 승부보고 복을 줘도 이 땅에서 이 땅의 것을 가지고 복을 달라는 거예요. 그래놓고 죽어서는 좋은데 가고 천국 가게 해주시고, 메시야 나라 가게 해 주시고. 그 나라요? 천국이 주님의 나라 안 되면 자기나라 돼요. 이 땅에서 원수가 천국가면 천당에서 멱살 쥐고 싸울 겁니까? 싸울 것이냐, 아니냐는 뻔히 알죠. 10분 쉽시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가락교회120419-요한계시록21장 (새하늘과 새땅)37강b-이 근호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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