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벧전5:8-14 / 보이지 않는 세계 / 120309 본문
보이지 않는 세계 120309
녹취:공은주 안양-벧전5:8-14(보이지 않는 세계)120309a-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베드로전서5장8절 보면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이렇게 되어 있지요. 마귀가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지요. 성경은 보이는 것에서 출발해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접근하는 겁니다. 그런데 과학은 보이는 것만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은 과학은 대상이 아닙니다. 대상이란 말은 없다는 말입니다. 아예 없다는 거예요. 누가 상식적입니까? 누가 제 정신입니까? 과학이 제 정신이지요. 눈에 안 보이는 거를 왜 연구해요. 말이 안 되잖아요.
용을 연구한다, 어디 용이 있어야 연구하지. 과학적으로 따지면 사람이 지어낸 거예요. 그럼 사람이 지어냈으면 용은 없는데 그 용을 지어낸 사람은 있으니까 그럼 과학은 뭐만 연구하면 되겠습니까? 용을 지어낸 사람들이 왜 용이라는 그 아이디어를 자꾸 지어낼까? 그것만 연구하면 되지요. 일단 용은 있는 거다? 없는 거다? 없는 거다. 그러면서도 인간들이 자꾸 용을 지어내니까 인간의 머리가 도대체 무슨 구조로 되어있기에 그렇게 허황된 용을 지어낼까? 그것만 연구하면 된다 말이지요. 똑같은 원리입니다.
하나님이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지요. 안 보이는 것은 과학에서 있다? 없다? 없다. 그러면 과학에서 연구할 것은 왜 인간은 있지도 않은 하나님을 끄집어낼까? 그거 연구하면 되는 거죠. 그렇지요. 방금 제가 과학이라고 했습니다. 보통사람들은 과학하면 보통 자연과학을 두고 말합니다. 지금 과학이 자연과학뿐만 아니고 과학이 우세가 되면서 모든 학문도 뒤에 과학을 붙입니다. 사회과학, 인문과학, 여기다 다 과학을 붙이는 거예요. 고고학 사회과학에 속하는 문제, 경제학 사회과학에 속할 문제입니다. 뒤에 과학이 붙잖아요. 그럼 경제하면서 수학이 동원되지요. 철학 인문과학 이지요. 신학 인문과학이고요. 문학 인문과학입니다. 그럼 문학을 따질 때 뭐로 한다? 과학적으로 따지는 겁니다. 그러면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과학, 앞에 것 떼어버리면 뭐만 남습니까? 과학밖에 남지 않지요. 그러면 결국 3가지를 플러스하면 뭐가 진리다? 과학이 진리가 되는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게요. 도덕이라는 것은 어디에 속하지요? 인문과학에 속합니다. 옛날에는 그냥 도덕이지 인문과학이 아니었거든요. 지금은 인문과학에 속합니다. 인문과학에 속하니까 방금 자연과학에서 생물학에서 과학이라 하는 것은 다윈의 진화론 나오지요. 들어봤지요. 갈수록 발달한다는 것. 그러면 도덕을 과학적으로 하게 되면 여기다 뭘 집어넣으면 됩니까? 진화개념을 집어넣으면 되지요. 도덕은 생활 따라서 시간 따라서 어떻게 진화하느냐, 그게 바로 요새 말하는 도덕이라는 거예요. 옛날에는 집단공동체주의 도덕이었는데 지금은 개인주의 도덕으로 달라졌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하나의 진리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어떤 것 하나 과학 아닌 게 없지요.
의학은 어디에 속합니까? 자연과학에 속하지요. 그런데 의학의 대상은 사람이다 말이지요. 옛날에는 사람에 대하여서는 자연과학에 속한 것이 아니고 인문과학에 속했고 인문의 사회에 속했는데 사람을 하나의 대상으로 삼으면 어렵기 때문에 질문해야 됩니다. 내가 누구냐는 어디에 속합니까? PET촬영하고 단층촬영하고 기계에 머리 내밀고 촬영하는 것 어디에 속하지요? 자연과학에 속하지요. 그러면 그 자연과학에 보면 그 안에 뇌가 들어있지요. 뇌가 있으매 사람은 생각하잖아요. 그러면 뇌를 관찰하는 그 인간의 뇌는 어디서 나왔지요? 문제가 되는 거예요. 자기 뇌를 끄집어내서 앞에 놓고 관찰하게 되면 이미 자기 뇌를 꺼내서 관찰했잖아요. 이쪽에는 끄집어냈으니 없는 거죠. 뇌가 없는데 뇌를 관찰했을 경우는 눈앞에 있는 뇌는 뭐고 내 안에 들어있는 뇌는 뭐냐 말이지요. 그러면 내 뇌 대신 다른 사람 뇌를 하겠지요. 다른 사람 뇌를 통해서 그 다음에 다른 사람 뇌를 내가 보면 다른 사람 뇌를 분석한 그것이 곧 내 안에 들어있는 뇌다 이말 이죠. 내가 분석하게 되면 ‘아하! 뇌는 이렇게 하는구나!’ 그럼 다른 사람이 ‘야, 이번에는 너의 뇌를 쪼게 보자.‘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슈퍼마켓이 어디 있습니까?’ 하면 ‘미장원 옆에.’ ‘미장원 어디 있습니까?‘ ’슈퍼마켓 옆에.‘ 이게 제자리 찾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누구 약 올리는 것 밖에 안 되잖아요. 슈퍼를 본 뒤 미장원을 봤고 또는 미장원은 슈퍼 옆에 있고 말은 맞는데 도대체 이런 게 어디 있느냐 말이에요. 우리나라에 슈퍼 옆에 미장원이 한 두 군데입니까? 모르잖아요. 두뇌를 분석하는 주인공이 두뇌고 두뇌가 두뇌를 분석해 놓고 두뇌가 이렇다고 두뇌가 결정하고 그거는 말이 안 됩니다.
마치 점쟁이가 자기 손금을 보고 자기 미래를 예측하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 보고 ‘아이고, 이 점쟁이야, 앞으로 점쟁이질 못 하겠다.’ 라고 예언하게 되면 그 사람은 진짜 점쟁이질 못 하는 겁니까? 자기 점을 치려면 다른 사람 점쟁이에게 점을 쳐야지. 자기가 믿을 수 없는 내가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삼아서 결정을 내리면 그 결정은 믿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자기가 누구인 줄 모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분석했는데 그렇게 해서 나온 결론이 자기 자신을 알게 합니까? 모릅니까? 역시 자기 자신을 모를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진리라 하는 것은 순환논리, 그냥 뺑뺑이 도는 겁니다. 이걸 뭐냐 하면, 보이는 것에서 보이는 것으로.
자, 그럼 오늘 본문 해 봅시다.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돌아다니면서 대적 마귀가 삼킬 자를 찾는데, 이 마귀가 서울 어느 동네에 나타났습니까? 이 마귀가 삼킬 자를 찾는다고 했지요. 성경 안에는 마귀가 있어요? 없어요? 있잖아요. 성경 안에는 마귀가 있다고 되어 있는데 이 마귀를 어느 지점, 지도 어디에서 찾아야 합니까? 알래스카에서 찾아야 됩니까? 아프리카에서 찾아야 됩니까? 어디서 찾아야 합니까? 없지요. 그러니까 성경은 마귀가 들어있다는 자체가 성경을 엎어버리고 갔다 버려야 될 책이 되는 거예요. 과학적으로 봐서.
왜, 여기에 마귀가 나오느냐 말이에요. 마귀가 나왔다는 말은 내가 만약에 마귀를 모른다고 치면 결국은 마귀 빼놓고 성경을 분석해 버리면 마귀를 나중에 뒤에서 집어넣었을 경우에 내 경험이 일순간에 다 거짓말이 될 공산이 큽니다. 선악과할 때 뱀이 따먹으라 했다, ‘아, 그건 안 믿어. 그건 빼고 딴 거 믿을 거야.‘ 딴 거 백날 믿어봐야 그거 빼놓은 것 때문에 나머지 가지고 했던 것 그 모든 것이 거짓말 되는데요.
십자가를 빼놔버리면 나머지 성경 가지고 보면 그거 공자, 맹자 책이 되는 겁니다. 신앙생활 내 입맛에 맞게 골라서 할 수 없어요. 마귀가 빠진 현실은 현실이 아닙니다. 그런데 과학의 세상에서는 뭐를 안 넣어준다? 마귀존재를 안 넣어 줍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는 성경 보겠다고 성경 펼치는 순간 비과학적인 존재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비과학적인 것. 그거 우리가 각오해야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비과학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성경은 뭐냐 하면, 실제로 마귀 말고 다른 실제적인 것들이 있었습니다. 십자가 죽은 것도 사실이고, 이스라엘나라가 존재한다는 것도 사실이지요. 그러니까 지금 이스라엘나라 있잖아요. 모세 이야기 있지만 모세가 시내산 걸어왔던 시나이반도 아직도 있지요. 그러니 성경을 어떤 것은 빼고 어떤 것은 안 빼고 라고 하는 것은 마치 자기 뇌를 자기가 분석하는 것처럼 해가지고 백날 빼봐야 제자리 뺑뺑 도는 것밖에 안 돼요. 이건 할 수 없고.
성경 전체를 다 믿으려하니까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이걸 빼놓을 수는 없는 일이고, 예수님 죽었다가 사흘 만에 죽은데서 살아난 것도 과학적으로 조사할 문제가 아니고 부활했다니 말이 안 되잖아요. 마리아 마르다가 예수님이 부활이야기 했을 때에 자기 오빠가 살아있다 할 때에 오빠가 살아있는 것은 맞아요.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과학에 의하면 오빠는 나흘 전에 죽었습니다. 중요한 문제지요. 예수님은 살았다고 보고 마리아 마르다는 오빠는 나흘 전에 죽어서 장례 치렀다고 하고, 누구 말이 맞습니까? 둘 다 보이는 현상이죠.
오빠가 죽고 그 자리에 옛날에 함께 있던 그 집안에서 오빠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 것, 이것은 사실이지요. 눈에 분명히 보이는 거죠. 이야기 잘 들어보세요. 분명히 눈에 보이는 겁니다. 보이는 것이 예수님 해석하고 마리아와 마르다의 해석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다르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봐야지요. 뭘 통해서? 보이는 것을 통해서. 얼마나 어려워요. 보이는 것을 빼고 보라하면 그냥 우리는 상상만 하면 돼요.
아침에 소주 아침이슬 하나 뜯어먹고 이불 뒤집어 씌고 상상하면 돼요. 왜, 믿음은 보이지 않는 거니까. 하지만 그러지 말란 말이지요. 보이는 것을 통해서 보이는 것을 믿지 말고, 보이는 것을 통해서 보이는 것을 믿지 말라 하니까 혼자 술 먹고 상상하는 것도 안 돼, 그것도 보이는 것은 보는 순간 나의 해석이 거기다가 딱 가미되니까 그것도 안 돼, 이건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말 자체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아요. 그럼 이 들을 귀 없는 것은 왜 달아났냐 말이지요. 마이크 안 나오는 마이크를 왜 달아놓겠어요? 들을 귀 없는 귀는 왜 달려 있느냐? 우리는 분명히 귀가 있잖아요. 귀가 있는데 예수님의 해석은 귀라고 다 귀가 있는 게 아니라 들을 귀 있고 안 들을 귀 있다고 보는 것이 예수님의 해석이고, 우리는 그런 소리마저 잘 들리고 있거든요. 라고 우기는 것이 우리의 해석이고 과학적으로.
그리고 우리는 어릴 적부터 과학교육을 받았고 지금도 우리 자녀들도 과학교육에 매진해서 그 기술로 밥 먹고 살고 기술 발휘해서 밥 먹고 살고 그럼 과학을 버리면 우리는 어디 취직할 때도 없고 바보 등신도 아니고 말이지요. 유치원부터 과학 배우는데. 과학 안 배워서 어떻게 밥 먹고 살겠다는 말입니까? 컴퓨터 좀 배워야 이런 것도 좀 보고 녹취도 하던지 하지. 이걸 부정하란 말입니까? 이 현실을.
부정할 수도 없고 긍정하기는 장애물이 있고 그래서 성경 해석 문제에 대해서 출발점을 어떻게 가져가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걸 지금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방금 길게 이야기했는데 이 길게 이야기한 것이 언젠가는 따지고 봐야 될 일입니다. 예를 들면 자식을 내가 낳았으니까 내 자식이라 하는데 성경은 주님의 자녀라 할 때 그럴 때 주님의 의견과 우리의 의견이 다르지요.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면 장례를 치르는 게 맞지요. 이 어려운 이야기를 결론부터 내릴 테니까 먼저 잘 들어보세요.
어떤 제자에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이지요. 아버지 돌아가신 것이 눈에 보이는 현상이지요. 우리 아버지 돌아가셨으니까. 장례를 치르려고 할 때 제자가 먼저 묻습니다. ‘예수님, 제가 아버지 장례식 때문에 예수님 따라가지 못 하겠습니다.‘할 때 그 때 예수님이 아버지 안 죽었다가 아니라 죽은 자로 죽은 자를 인정해요. 예수님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죽은 자들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하고 니는 나를 따라 오너라. 예수님의 해석은 뭐냐 하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은 너는 그걸 신경 쓰지 말고 나를 따라 오라고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사건이라는 겁니다. 이 해석을 예수님만 할 수 있지, 어느 인간이 태어나서 어느 인간이 그걸 어떻게 해석할 줄 압니까?
아버지 돌아가신 것은 ‘아! 드디어 아버지 팽개쳐라, 이 이야기야.’ 이걸 어떻게 그걸 예수님 이야기하기 전에 사전에 알아챌 수 있습니까? ‘아, 이거 가지 마라 하는구나!’ ‘예’ ‘예수님 미안합니다.’ 이게 상식이다 이 말이지요. 예수님께서 이 해석을 하시면서 ‘아버지 장례에 나중에 와서 치르고 우선 나를 따르라.’ 이렇게 한 게 아니고 죽은 자들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해서 아버지도 죽은 자고 아버지의 장례치를 사람은 예수님 따라오는 자는 산자고, 예수님 안 따라오고 ‘아버지 죽었구나!’ 하는 것은 죽은 자의 부류에 속하는 거예요.
그러면 아버지만 죽은 자가 아니고 아직 덜 죽은 인간들도 이미 죽은 자로 간주되는 겁니다. 누구의 해석에 의하면? 예수님의 해석에 의하면. 그 해석을 우리에게 성령을 주면서 우리에게 해석하라 하니까 우리는 비과학적일 수밖에 없지요. 눈에 안 보이는 천국 상상하라 하면 우리는 잠잘 때 천국 상상 잘해요. 골프치고 난리 났어요. 이건 믿음도 아니고 지 망상에 불과하고 제일 무서운 게 주께서 실제 일을 일으켰다는 거예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일을 일으켰다는 겁니다. 해놓고 그 해석 차이로 인하여 니는 믿음 있고, 없고가 결판나니 그 주님 해석 따라가려면 우리 가랑이 찢어질 판이다 말이지요. 이제는 겁나서 뭐 하겠습니까? 어떤 아들 장가보내면 ‘예수님, 아들 장가보내는데 가야돼요? 말아야 돼요?’ 죽은 자는 죽은 자들로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이리 될 수 있다 말입니다. 어디 무서워서 아들 장가보내겠습니까? 그에 대한 어떤 일관성이 있는 해석이 필요하다, 그런 뜻입니다.
이 성경이 만만치 않지요. 동방박사가 별 따라 오는 것도 참 이거는 말도 안 되는 희한한 이야기잖아요. 별이 주먹만 하다는 겁니까? 별이. 베들레헴 아기 구유에 딱 세워버리고. 상상이 안 가는 책입니다. 그걸 일괄적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풀이하느냐?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데, 만약 이런 문제점을 우리가 생각하지 않고 그냥 신앙생활 좋다 해 버리면 이것은 신앙이 좋은 것이 아니고 요령이 좋은 거예요. 과학적으로 유리하다 싶으면 유리한 쪽으로 움직이다가 좀 양심의 가책이 생기면 ‘믿습니다.’하고 너무나 지 일방적이기 때문에 그런 것을 우리가 벗어나야 됩니다.
그러면 공식을 먼저 말씀드릴게요. 존재→역사→영으로 이런 순서가 되는 겁니다. 보이는 것에서부터 예수님 해석까지 가는 절차가 무엇이냐? 존재에서부터 역사, 역사로부터 영으로 나아가는 방식을 성경은 채택하고 있습니다.
그럼 존재란 어려운 말 썼는데, 적당한 말이 없어서 제가 정리하면서 존재라는 말을 썼어요. 존재란 뭐냐, 인간 자체를 두고 말합니다. 인간자체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유사영이 나와요. 비슷한 영이 나와요. 그러면 영이 나온다는 말은 그 영은 방금 제가 뭐라 했습니까? 인간에게서 뭐가 나온다? 영이 나온다. 그럼 인간을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인간에게서 영이 나온다니까 이 영은 어디와 연결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세계와 연관되어 있지요. 이 말은 철학에서는 인간은 항상 자기 이상의 여분의 것을 생각한다. 자기보다 더 월등하고 전능하고 미래를 미리 꿰뚫어 보는 예지력있는 그런 존재를 항상 상정하게 되어 있어요.
학급에서 5등 공부한 애가 그걸로 목표 끝났습니까? ‘야! 5등 했다.’ 라는 말은 앞으로 4등할 수 있다는 여력이 생겼다. 하고 4등이라는 지금 5등이지만 4등할 수 있는 여분의 것을 상정하게 되지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고정적인 것이 아니고 뭔가 여분의 것을 향하여 추구하는 식으로 사람은 이렇게 내다보게 돼 있어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그 것! 나를 만드시고 나를 월등하게 만드시고 또 나보다 더 월등하신 분에 대한 존재, 그게 로마서 1장에 보면 “너희가 하나님을 알되” 할 때 그 하나님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제가 지금 하나님 두고 이야기하는. 용어가 하나님이라는 말은 이것은 불교신자든 아니든 신이라는 개념은 누가 안 가르쳐도 돼요. 다 알아요. 유치원 애에게 기도하자 하면 그 아이가 ‘하나님 보여주시면 기도하겠습니다.’ 이런 어린아이 없어요. 어떻게 알았는지 눈감고 알아서 기도해요. 아는 것은 인간의 본성상 영의 존재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영의 존재란 것은 내가 생각하는 항상 그 이상의 것을 생각하는 그런 존재, 그걸 성경적으로 파헤치는데 굉장히 힘들어요. 구약에서는 간단합니다. 구약에서는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는가, 육, 영, 혼 했지요. 구약에서는 영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에 내장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요소가 아닙니다. 신약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인간은 육과 영으로 되어 있다, 인간은 육과 영과 혼으로 되어 있다. 육과 영과 혼으로 되어 있는 사람이 오치만리이고, 성결교, 침례교 쪽이고, 육과 영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다른 개혁주의 또는 천주교도 이쪽인가 잘 모르겠습니다만 좀 배웠다하는 사람은 이분설이고, 그냥 무지막지로 전도하겠다하는 것은 육, 영, 혼이에요. 모든 것이 3단계로 돼 있어요.
인간의 두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제일 밑에 있는 그냥 숨 쉬는 생존에 필요한 부분이 있고 변연계라 해서 인간의 감정, 불화, 울분, 기쁨 이런 것, 변연계. 그 위에 있는 이성적으로 인간의 감성을 다스리는 이성적인 층이 피질이라 해서 피질이라 하는 것은 뭐냐, 대뇌피질은 뭐냐 하면, 주름살로 되어 있어서 공부많이하면 주름살이 많이 있어서 정보가 많이 담겨서 자기 조절이 가능하게 되지요. 두뇌피질이 활동이 안 좋으면 그냥 동물적인 것이 되지요. 동물보다 더 낮은 것은 그냥 충동적인 것. 제일 인간의 깊숙한 것은 동물에 의하면 지렁이 종류, 아무 감각이고 뭐고 없고 이걸 육이라고 본다면, 그 다음에 감정적인 것, 원숭이한테 먹는 것 빼고 개한테 사료 뺏으면 개가 왱하고 인상 쓰지요. 이거는 지렁이 쪽은 아니고 그 보다 발달한 감정 있는 거고 그래서 원숭이나 개를 조사해 보면 피질은 없고 그런 것이 있게 되고 인간만이 피질이 커진다는 겁니다. 이성적인 생각을 한다는 겁니다. 이성적인 생각을 하게 되면 죽은 자를 장례한다든지, 직립 보행하는 것도 두뇌와 관련되어 있고 도구로 사용한다든지, 불을 사용한다든지, 그런 것도 두뇌의 용량의 크기와 관련돼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같은 원래 있었던 인간의 모습에서 진화한 것을 가지고 두뇌의 피질의 용량가지고 그렇게 조사하는 방법이 있어요. 그리고 키케로와 같은 철학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육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과 영적으로 삼원설을 그렇게 나눴습니다. 키케로 방법이 쉽게 되지요. 인간이 육적인 것, 그저 동물적인 요소와 그 다음에 그것보다 교육을 많이 받게 되면 그걸 제어하게 되고 ‘안 돼, 그건 나쁜 거야.’ 이렇게 하게 되면 사회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도덕적인 것, 그 다음에 그 도덕도 뚫을 수 없는 것이 영적세계다, 하고 키케로는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어디에 해당 됩니까? 육에서 그 다음에 도덕 이 정도 되지요. 요걸 단계로 지어버리면 어린아이들은 오줌 싸고 똥 싸고 젖 달라고 울고 할 때는 그냥 육이지요. 도덕교육을 받게 되면 점차 뭐로 바뀝니까? ‘아, 이건 나쁘구나! 이거는 해서는 안 되는구나! 이건 해야 될 좋은 기쁘게 하는 거구나!’ 라고 감정이 생기면 그것이 도덕으로 되어 가지고 된다는 거죠. 그런데 키케로는 그것 가지고는 안 되고 영적인 것을 받아야 된다.
그래서 옛날 부흥사부터 육, 영, 혼이 부흥사들이 설교하기에 일반목사들이 설교하기에 멋진 거예요. 무엇을 요구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의 레벨을 높이세요.’ ‘언제까지 육적이 될 랍니까?’ ‘혼적이 되고 혼적이 영적이 되어야 됩니다.’ 라는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설교시간 그냥 넣을 수가 있다 말입니다. 모든 설교내용을 1:2:3 대로 첫 번째는 육인 것, 두 번째는 혼이면서 도덕적 것, 세 번째는 영적으로 해버리면 누가와도 내 설교 문제 있다고 하자있다고 지적할 사람 없다 말이지요. 모든 설교는. 창세기를 하든, 예배를 하든, 무엇을 하든 그 3가지를 나눠서 설교하면 땡이라 말이에요. 그렇게 하는 겁니다.
목사님도 그렇게 설교하면 아주 편리하겠지요. ㅎㅎ 뭐든지 3개로 시루떡 3쪽으로 나누면 다 되니까. 옛날에 주변에서 그런 설교를 많이 들어봤지요? 많이 들어봤을 거예요. 그래서 인간의 육, 혼, 영 3분설은 처음 교인들도 알아듣는 거예요. 왜, 알아듣는가? 이것이 인간의 존재, 존재 층이니까 알아듣는 거예요. ‘아~ 목사님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한다.’ 다른 말로 하면 ‘어떻게 내가 생각한 것과 똑같이 하느냐.’ 그 3에다가 +2를 집어넣어서 설교하면 목회 성공합니다. 이 2개가 뭐냐 하면 이것도 아주 중요한 문제인데,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은 예수 믿으면 되는 거고, 살아서 복 받는 것은 기도하고 교회 봉사하고 헌신하면 됩니다. 그 2가지가 있는 거예요.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은 뭐로 가고? 믿음으로 가고, 예수님이 중요한 게 아니고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면 되고, 살아서 복 받는 것은 내가 얼마나 행했느냐에 따라서 성과급을 받는다고 하는 거예요. 아까 3개 육, 영, 혼에다가 그 다음에 2개의 요소를 예수 믿어서 천국가고 살아서는 기도하면 복 받는다, 그거 집어넣으면 목회 땡입니다. 에브리 바디,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예요.
사모님도 할 수 있고, 이거 집어넣으면. ‘아이고, 내가 생각한 것과 똑 같아!’ 바로 그겁니다. 인간은 존재인지라 그것을 통해서 종교에서 종교로 나오는 거예요. 존재에서 종교로 나오는 겁니다. 오치만리가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왜, 사람들은 육에서 머물고 혼에서 머무느냐, 영으로 나아가자! 어떻게? ‘구원받는 것은 믿음으로 구원 받지만, 행함으로서 여러분들은 육에서 혼으로 혼에서 영으로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어렵지 않아요.’ 이리 하는 거예요. 거기에 실천적으로 후천적으로 다 받아 버렸어요. 사람들은 그게 납득이 되는 거예요. ‘그래, 나에게 희망과 나의 목표를 주신 집사님께 감사합니다.’ 이러면서 자기 목표가 생긴 거예요.
방금 5가지 요소 가운데 십자가는 어디 있습니까? 없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기적은 뭐라 했습니까? 내가 상상한 기적이 아니고 요나의 기적이지요. 요나의 기적은 뭡니까? 죽었다가 살아나는 거죠.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살아난 것처럼. 다른 기적은 없나니 오직 요나의 표적이다. 사도바울에 의하면 오직 십자가지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 가지고 눈에 보이는 자기 해석을 하다 보니까 뭐가 필요치 않았어요? 요나의 표적, 십자가가 더 이상 그 사람에게는 필요치 않은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 해석의 모든 근원은 이 5가지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 존재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자기 존재에서 나온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나는 죽었다는 거예요. 우리는 이 5가지를 고수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 어쩌라고?’ ‘고맙습니다, 죽어서.’ 내 이익은 챙겨야 되지 않습니까? 나는 나 나름대로의 포부가 있고 소망이 있는데. 나 착해지려 하는 것, 구원 받고 복 받는 것, 이 욕망도 내 욕망대로 기도해서 다져가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이 성경은 십자가만 있는 게 아니고 기도도 복 받는 게 있는데, 왜 그걸 빼느냐 하는 이야기예요.
이제 슬슬 내막이 들어 나지요. 그것이 알고 싶다. 드디어 내막이 알려지지요. 다시 정리 합시다. 인간에게서 뭐가 나온다? 영이 나온다. 그 영을 그들은 하나님으로 상정해 놓고 이것은 인간의 신자든, 불신자든 모든 인간이 은연중에 다 갖고 있는 거예요. 교회 한 번도 안간 사람도 ‘아이구, 아이구, 하나님!’ 지금 방금 동영상 됐어요? ‘으이구, 하나님‘ 이런다고요. 이게 뭡니까? 교회 한 번도 온 적 없는 사람이 어려울 때 ’아이구, 하나님! 부처님! 공자님! 살려 주세요.‘ 부처도 하나의 영적 존재이고, 공자님도 영적 존재예요.
현재 나 보다 잉여, 잉여란 말은 여분의 것을 찾음으로서 현재 문제를 해결하려하는, 그러니까 이것은 조상귀신 제사하는 거 이것도 신이라니까요. 귀신, 신이거든요. 그러니 우리가 평소에 종교생활 한다는 게 이것은 진짜 귀신 씨 나라 까먹는 소리라니까요. 이것은 교회 안 다니는 누구나 익히 아는 바에요. 이걸 뭐라 했습니까? 이게 바로 유사 영입니다. 영을 섬기고 하나님을 섬기는데 이것은 어디 존재에서? 내 존재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아까 마르다 마리아하고 예수님하고 이야기하면서 니 존재 말고 누구존재? 예수님의 존재에서 출발해야 된다. 니 존재에서 하는 모든 것 일체 인정하지 않겠다. 그거는 이방신입니다. 나 외에 이방신을 섬기지 말라할 때 어제 설교 때 진공청소기 언급 했지요.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하나님께서 다만 진공청소기 자기 백성만 빨아내는 언약만 덜렁 나오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언약이라는 보이는 형식으로 그 언약의 실체가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아까 분명히 이스라엘 있다 했지요. 지금 이스라엘이 독립해 있잖아요. 분명히 있는데, 이스라엘을 어떻게 회수할 것이냐 하면 이스라엘을 통해서 언약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하나님까지 이어져야 되는데 이스라엘 본인들은 자기 존재를 고수하고 있으니까 이게 하나님께 통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그 나라는 망해야 된다 이 말이죠.
교회머리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교회머리는 예수님이다, 하지요. 문제는 교회머리가 보이느냐, 안 보이느냐, 안 보이지요. 안 보이니까 사람들은 믿기 싫어하고 보이는 당회장목사를 눈치 보는 걸로 신앙생활을 때우려 한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존재를 죄라고 규정을 해야 되는 겁니다. 이 3+2가 죄가 돼 버리면 목사들 난리나지요. ‘그럼 이것 말고 설교 어떻게 하란 말인가?’ ‘믿음으로 하세요.’ 믿음 있어야 하지. 사람들 종교가지고 장난 쳤는데 무슨 믿음이 있습니까? 종교가지고 장난쳐 가지고 그들의 약점과 그들의 희망을 거론하면서 돈을 빼먹은 인간들이 무슨 믿음이 있어요? 없어요. 밥벌이해서 살려 하는 인간들인데. 그들은 믿음이 없으니까 어떻게 합니까? 강력하게 반발하지요. 아주 뭐 죽기 살기로 반발합니다. 십자가를.
그 다음에 역사란 뭐냐, 이 영적인 존재에 하다보니까 이게 ‘개인주의화’ 되지요. 이게 영적인 것 같으면 결국 교회 다닌다는 것이 세계평화를 위해서 교회 다니는 것이 아니지요. 그렇잖아요. 내 가정과 내 자식과 내 가족과 나 잘되기 위해서 교회 가잖아요. 그러면 교회가 자동적으로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모인 거지요. 그래서 서기2000년 동안 신학자들은 교회를 어떻게 유지하려 하는 거예요. 그러면 교회의 적이 뭐냐 개인주의가 돼 버린 거예요. 개인주의가 왔다가 교회생각 안 하고 교회 왔다가 자기 집구석으로 확 가버리면 교회는 누가 돌봅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면 개인주의로 왔던 사람을 교회 공동체로 바꿀 수 있는가를 생각한 그것이 바로 역사주의가 되는 겁니다. 뭐냐 하면 ‘여러분들은 역사적 사명을 띠고 있는데 여러분들은 가정적 사명만 띠고 교회에 왔습니다. 이 복음과 이 교회가 주님 재림할 때까지 유지해야 되는데 여러분들이 교회 올 때 여러분들의 개인적인 기복신앙과 여러분들의 개인적인 이익으로만 위해 기도해 버리면 이 교회 선교문제, 부흥문제, 존속문제, 교회운영문제, 이거 어떻게, 어떻게 할 거예요?‘ ’어떻게 할 겁니까?‘ ’그래놓고 하늘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여러분! 자기만 챙기는 사람이 천국갈 수 있습니까?‘
적어도 교회 안에 일단 들어와야 천국갈 수 있는데, 이거 칼빈 이야기입니다. 교회 밖으로는 천국 없고 교회 안에 들어와야 가는데 교회 안에 들어가는 교회가 되려면 그냥 들어오지 마시고 여러분들이 자기 집안과 자기 새끼와 자기 남편과 자기 건강만 챙기는 이기주의를 변경해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 하라는 이 사명을 띠고 교회에 와 주셔야 변화 돼야 그런 사람만 천국 갑니다. 이게 기존의 교회와 신학자들의 주장입니다. 그렇지요. 어떤 집단주의.
그래서 집단주의 쪽에서 성경을 가지고 해석해 버리면 천하 아비나 자식이나 남이나 다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다는 말을 쓰면서 그것이 내면에 소속돼 있는 그 교회를 위해서 그것을 버려야 한다는 거예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성경의 모든 구절을 교회 부흥을 위해서 다 쓴다 이 말이에요. 또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그 다음에 어디에 두라? 하늘에 쌓아두라는 말을 그걸 달리 말하면 교회 바치라, 로 다 해석하는 거예요. 왜? 중간에 교회가 있기 때문에.
교회의 역사는 초대교회부터 있기 때문에 이 교회역사를 만일 무시해 버리면 그 사람은 교회에 소속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천국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 교회주의의 주장입니다. 아~~ 참, 개인주의가 참 무서운 악마지만, 역사주의, 교회주의 요거 아주 세련된 악마지요. 지금 우는 사자와 같이 마귀 이야기 하는 겁니다.
자, 그러면 한번 생각해 봅시다. 복습하듯이 아주 어려운 이야기라서, 이 존재(개인)라는 것은 나부터 출발했잖아요. 그러면 역사를 주장하는 또는 교회주의를 찾아가는 이거는 어디서부터 출발합니까? 개인주의가 모인 집단인데 또 그거 하나 단체가 또 하나의 개인주의 역할을 하게 되겠지요. 출발점이 개인도 존재지만 역사도 역시 존재지요. 차이점이 있다면 여기(존재)는 개인이기 때문에 육과 영과 혼으로서 모든 것 설명한 반면에 안에서 육과 영혼 자기 생각하는 반면에 역사기 때문에 역사라 하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로 보는 거예요. 요거 교회주의가 과거는 이렀게 됐는데, 오늘날은 왜 이리 되었는가? 과거의 영광을 회복합시다. 그리고 앞으로 이렇게 회복하고 있으면 미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접하러 오실 것입니다. 옛날의 국가 이스라엘주의, 구약역사에서 나온 이스라엘 사고방식입니다. 이게 역사주의입니다. 여러분, 제 말이 어렵지만 어느 정도 이해가 되십니까?
여기(존재)는 개인적인 나 영적으로 내 야망과 포부와 어떻게 주께서 들어 주실까하는 개인적인 문제지만, 개인주의는, 꽃다발이 뭡니까? 꽃이 하나, 하나 모여서 꽃다발이 되잖아요. 꽃다발 모아봐야 뽑아내면 전부 다 개인주의 아닙니까? 꽃다발 모여서 교회 만들고 역사 만들어도 교회역사 주장해도 사실 뜯어보면 전부다 집단적 개인주의예요.
역사도 자기의 존재에서 출발하는 거예요. 하나님, 과거에 잘 나갔는데 과거에 고생 많이 했는데 고생 많이 해서 덕을 봐서 지금 내가 잘 돼야 될 것 아닙니까? 이 교회가. 이 교회가 살아야 누가 산다? 교회가 살아야 구원 받습니다. 이리 하는 겁니다. 존재→역사 까지가 현재 성령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해서 교회 키운 큰 교회, 그 다음에 교회가 사회에 대해서 역사적 존재 책임을 다하고 사명을 다하자, 하는 그런 교회가 바로 뭐냐 하면 조선족 교회, 탈북자교회, 소외되고 가난한 자에게 밥 퍼주는 교회 이런 교회들, 그리고 가난한 집 아이들 공부방하고 놀이방하고 쉼터해서 하는 교회, 이것은 뭐냐 하면 사회에 착한 일하고 사회에 보람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지상사명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교회 중심이기 때문에 주기도문에 보면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 이루어지다, 를 어떻게 적용시키느냐 하면, 봐라! 뜻을 하늘만 쳐다보면 안 되고, 이 지상에서 하늘나라다운 그걸 건설하는 사명을 우리에게 줬다는 겁니다.
죽은 마이클잭슨. 그가 불렀던 노래 We are the world 그 가사내용을 보면 주기도문에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할 때 그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이 준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미 받은 우리가 아프리카의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내어주는 그것이 우리를 통해서 인간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이니까 역사만이 진정한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뜻입니다. 하고 주장하는 것. 요것들도 역사에 속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나라의 한 99.5%는 이거(존재: 개인) 주장하지요. 5가지. 3+2, 육, 영, 혼과 예수 믿어 죽어서 천국 가는 것과 살아서는 믿음으로 복 받고, 행함으로 복 받는 것. 심지어 믿는 것도 구원 받고, 행함으로 구원 받는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이거는 99.5%로 한나라당 격이라면 역사는 49.5%로 민주당 격입니다. 존재는 자본가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쪽이라면 역사는 사회복지 주장하지요.
여기서 잠시 정리해 봅시다. 왜 이런 아이디어가 나왔을까요? 아까 이야기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가지고 신앙의 결과물을 찾고자 하는 거예요. 보이는 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나아가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고 보이는 것으로 출발해서 보이는 실적으로 다시 되돌아와야 내가 안심이 되는 믿음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런 불신적인 문제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면 세 번째 영은 어떻게 되는가? 이 역사가 깨집니다. 역사가 부정당해요. 이게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이여! 우리는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 저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 ‘어쩌라고’ ‘저, 성전 있어요.’ ‘어쩌라고’ ‘하나님이 친히 지으라고 하신 그 성전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성전을 깨고 자기 백성을 버리십니까?‘ ’다른 민족을 치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어떻게 여호와께서 여호와 만든 나라를 쳐버리면 하나님 자기 부정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죽이고 하나님이 자기를 살해하는 겁니다.’ ‘그게 메시아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치는 그것이 메시아에요. 구원의 자리는 그거예요. 이스라엘은 역사적으로 보기 때문에 다른 것은 다 쳐도 이것은 안 됩니다. 하고 버티고 있었던 거예요. 왜, 꽃다발이라 하는 것은 꽃들의 모임이니까. 꽃은 뭡니까? 자기부터 나왔으니까 자기가 없는 마당에 하나님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자기가 존재하지 않는데 하나님 있으나 마나 한 것이지요. 나한테 이익이 있는 조건하에 하나님이 존재하는 건데. 이게 인간 품속에 존재 속에 갖고 있는 육혼영의 악마가 지어놓은 삼분설, 이분설이란 말이지요.
원래 영이라 하는 것은 구약에서 하나님께 없는 건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관계할 때 새로 발생되는 것이 영이에요. 대구강의(예정과 게임)에서 강의했기 때문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안에 요소로서 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밖에 있는 겁니다. 우리는 그저 흙이에요. 흙이 관계 못할 때 하나님께서 언약적인 영적인 관계를 맺어주면 우리는 영 안에서 주와 교제를 하는 겁니다. 그 때 교제의 중간 매체는 영이란 말이지요. 내 영혼아, 하나님을 찬양하라. 그 때 영혼이다 말이지요.
보통 때는 그냥 쉐마, 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육이다 말이지요. 주께서 은혜 주시면 그게 영적인 아우라가 발생돼서 그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겁니다. 육으로 영광 돌리는 게 아니고 영혼을 통해서 찬양한다 이 말입니다. 내 안에 영혼이 들어있는 게 아니에요. 들어있다고 보면 존재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영에서 육영혼에서 영혼을 신비화 시켜 가지고 그것 가지고 하나님과 직접 교제에 나서려고 하는 겁니다. 이방종교의 특징이 모든 종교성, 모든 경건성 이거 다, 윤리보다 더 나은 어떤 신비로움, 이런 건 인간은 누구나 다 갖고 있어요.
교회 안 다니는 사람이 엎어지면 ‘아이고, 하나님’ 하잖아요. 보세요. 잉여 아닙니까? 여분의 것이잖아요. 도박하는 튕기는 사람이라도 어려움이 생기면 ‘아이고, 하나님’ 붙든다 말이지요. 하나 더 모자라면 부처님, 공자님, 종교 삼위일체 다 불러요. 알라신까지 불러가면서 아무거나 걸려봐라. 아무거나. 도와주는 쪽에 서겠다, 이말 아닙니까? ‘아이고, 천지신명님!’ 우리나라는 이렇게 부른다 말이지요.
기어코 역사라는 것은 결국은 내 중심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역사를 말하는 거예요. 그러면 목사님 역사에서 영으로 어떻게 간다는 말입니까? 거기에 가는 접촉선을 마련하기 위해서 주께서 이스라엘나라를 만드시고 그 역사 이스라엘나라가 이 땅에서 멸망하게 하는 겁니다. 역사를 없애는 게 아니고 왜 멸망하는가를 주목하라는 겁니다. 왜 멸망했겠어요? 그 정답은 하나뿐입니다.
원래 인간은 망하는 게 정상입니다. 왜 망합니까? 말하지 마세요. 왜 주님이 저 사업 망하게 합니까? 묻지 마세요. 망하는 게 정상이고l, 왜 죽습니까? 죽는 게 정상이에요. 니가 선악과를 따먹는 날은 어떻게 된다? 정녕 죽으리라. 잘 아시네요. 바고 그거 아닙니까? 우리 조상이 이미 따먹었을 때는 우리도 이미 죽은 겁니다. 그래서 창세기5장에 보면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애를 낳았다, 딸을 낳았다, 죽었더라, 하고 끝나버려요. 죽었더라가 우리한테 나오는 마지막 멘트예요. 우리한테 주는 마지막 멘트예요. 너는 죽었더라, 아무개 죽었더라. 중간에 생략해 버리고 처음과 끝을 이어 보세요. 아무개는 죽었더라, 그 뒤는 없었더라, 로 끝나는 거예요.
그러나 엘리야와 모세는 변화산에 나타나잖아요. 죽었다로 해야 되는데 살아났잖아요. 그렇게 해 놓고 하나님은 나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다. 하잖아요. 살아있는 자들만의 하나님이다, 말이에요. 죽은 자들은 없어지고. ‘내가 살려야 돼’ 라고 한 자에게만 하나님이 오셨다 말이지요.
이스라엘 역사는 멸망하는데 군데, 군데 팍팍 뽑혀 나오는 거예요. ‘너 살았어. 아브라함 살았어. 이리와, 엘리야 이리와. 너는 불 수레 타고 올라와. 엘리사 너도 올라와. 다윗 너도 올라와.’ 이리 되지요. ‘그 남은 칠천명도 올라와.’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대한민국이 침몰하는데 ‘아, 너 올라와, 너 구원 받았어.’ ‘나, 개인데요.’ ‘아~ 개 좋아, 멘트 좋아, 개 올라와.’ 성경의 모든 말씀이 위의 권세에서 잡아당기는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의 존재에서 나오는 것과 충돌하게 돼 있어요. 그래서 충돌하면서 구원 받을 자와 구원받지 않을 자를 하기위해서 이 이스라엘이 멸망하면서 등장한 개념이 뭐냐 바로 ‘마귀’입니다.
악마라는 것을 집어넣어요. 이미 욥기에서 그 전부터 이미 활동했지만, 본격적으로 짐승 또는 악마, 우는 사자 이런 이야기하는 것은 마지막 모든 인간이 이미 멸망하기로 작정된 것이 완전히 결정 난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하는 일을 훼방하는 역할을 맡은 것이 바로 이 세상 신, 복음의 광채를 가리는 역할을 해야 돼요. 그러니 이단 목사들이 열심히 이단 잘하는 것은 그거는 반드시 자기역할이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너무 탓하지 마세요. ‘마귀야, 니 할 일 해야지. 유다야! 가룟 유다야! 니 할 일 해야지.’ 가룟 유다는 알아요. 아, 마귀일. 다른 제자들은 남은 음식 값 계산하러 가는 줄 알고 있어요. 카운터에.
‘마귀야, 니 할 일 해야지.’ 이 말은 마귀는 마귀 일을 해야지요. 그리고 우리는 이해를 해야지요. 마귀가 우리한테 우는 사자같이 덤비는 것은 마귀 붙들고 따지지 마세요. 그것은 자기 역할이에요. 음식 쓰레기 치우는데, 아이고, 내 아까운 음식 쓰레기 왜 가지고 가나, 이것은 자기 치우는 것이 자기 할 일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경찰이 와서 ‘수고합니다. 검문 있겠습니다.’ ‘이거는 건방지게 나한테 검문을.’ 이러면 안 돼요. 자기 역할이잖아요.
마귀역할이 뭐냐, 우리를 고소하는 겁니다. 율법에 의해서. ‘얼레리 꼴레리 쟤는 죄 지었데요.’ ‘하나님 욕했데요.’ ‘베드로처럼 하나님 저주했데요.’ 계속해서 쏘아대고, 지적하고, 정죄하고, 고자질 하는 거 하라 하세요. 우리는 그 속에 들어가면서 느~긋~하게 우리는 이미 다 이루었습니다. 십자가 피 때문에! 10분 쉽시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안양-벧전5:8-14(보이지 않는 세계)120309b-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마귀로 하여금 마음껏 정죄하게 하세요. 누가 너희를 송사하리요, 누가 너희를 정죄하리요, 그것은 주님의 계획 속에 있기 때문에 주님이 짜놓은 계획을 시나리오를 우리가 연필 들고 수정하고 이러면 안 됩니다. 우리는 구조 안에 짜여 있을 뿐인데 내가 구조 밖에서 내가 그 구조를 만들어서 주인공처럼 해가지고 ‘아, 이거는 고쳐야 돼, 이렇게 고쳐야 돼, 몰래 주님나라에 금고 들어가서 내 계획서와 바꿔가지고 이거는 만화책에나 나올 일이지 있을 수 없거든요.
마귀는 자기 역할을 지금 잘 한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인정해 줘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야, 인간 되어라.’ 이게 아니고 ‘니 할 일 해.’ 하는 것처럼 우리도 이단들에게 ‘열심히 하세요. 하세요. 이단 짓을.’ 이단 짓은 뭐라 했습니까? 이단 짓은 바로 다시 한 번 봅시다. 어려운데. 이스라엘이 역사에서 멸망할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작살나지요. 인간은 가망성이 있다? 없다? 전혀 가능성이 없어요. 없으니까 이 역사 속에서 갑자기 마귀가 등장하는 이유는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마귀의 하수인으로서 예수님을 상대해 버려요. 이 말은 마귀의 정체는 예수님이 나타나야 비로소 자기 정체가 같이 동행해서 정체가 드러납니다.
복음을 전할 때는 마귀의 정체가 발각됩니다. 복음을 안전하면 우리는 서로 한 통속이라고 좋아합니다. 복음을 전하면 발작을 일으키죠. 엄마한태 복음을 전하면 그 좋은 엄마는 부들부들 떨면서 발작을 일으키고, 좋은 딸에게 복음을 전하면 ‘엄마, 그만 해라. 듣기 싫거든.’ 발작을 일으키지요. 그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영은 가짜라는 거예요. 사실은 예수님의 복음의 발작을 일으키고 있는 영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사실은 인간 속의 잉여, 여분의 것은 누구 담당이었다? 악마가 인간을 쥐고 있었다는 것이 드디어 드러나는 순간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 본문에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닌다는 것은 주님께서 그 동물원을 마귀의 짐승 동물원, 이게 요한계시록에서는 무저갱인데, 동물원의 우리를 풀어준 거예요. ‘야, 마음껏, 마음껏, 잡아먹어라.’ 잡아먹을 때 욥기에서 마귀가 욥을 잡아먹지요. 재산 다 빼앗아 가지요, 자식 열 명 다 죽지요, 온 몸에 종기 났지요. 잡아먹히도록 허락하신 거예요. 잡아먹히도록. 그런 것이 욥에서 어려운데.
욥에 종기가 났다. 할 때, ① 자연과학적으로, 욥은 여행가서 바이러스에 퍼졌다. DNA가 감당이 안 돼서 저항력을 잃어서 종기가 났다. ② 사회과학적으로, 욥이 자식 잃고 재산 잃다 보니 너무 신경 쓰다 보니 우울증 걸렸다. 그래서 심리적으로 불안해서 두드러기 났다. 이게 종기다. ③ 욥에게 그런 종기나 악청이 난 것은 원래 그런 게 아닌데 누가 교훈하기 위해서 소설을 그렇게 썼다. 이게 바로 인간들에게 가능성 있는 것들이죠. ④ 마귀가 그렇게 작용을 했다. 몇 번 입니까? ④번이지요. 그러면 1번, 2번, 3번 가만히 있지를 않습니다. 악마가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있는 것도 있는지, 없는지, 분간이 안 되지만, 하여튼 있다고 치고 ‘악마가 욥에게 어떻게 작용해서 종기가 났는가?’ 그 논리를 대면 내가 믿어줄게. 이렇게 나온다 말입니다.
결국, 역사에서 영으로 가는 것은 인간들의 모든 가능성과 지혜는 차단됐다고 제가 분명히 언급했는데도 불구하고, 인간 쪽에서는 영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 계속해서 우리가 납득될만한 것을 깔아 놔라 말이지요. 그 절차를. 그러면 우리가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영의 세계로 가겠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뭐라 했습니까? 육에서 난 것은 육이라 했건만 오늘날 교인들은 그 말 안 듣습니다. 목사님! 육가지고 어떻게 조졌더니만 영의세계 들어갔더라. 그 방법만 해 달라는 거잖아요. 철야를 하던지, 금식을 하던지, 방언을 터지던지, 전도를 많이 하던지, 그 어떤 방법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 방법을 이야기 해주면 우리가 시키는 대로 해서 우리가 영의세계에 들어가겠습니다. 자꾸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되면 무슨 요소가 빠집니까? 마귀가 인간의 영을 장악하고 있다는 이 성경의 진리가 인간들은 아예 빼버리고 시작하는 거예요.
그리고 베드로가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분명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완전히 무시하고 마귀는 뭐가 있어. 인간들이 해서 안 될 일이 뭐가 있어. 깡다구 쓰고 열심히 하면 다 되게 돼 있어. 전에는 교인들이 얘기하더니만 요새는 목사들이 주장한다니까요. 이게 같이 한 통속이 돼 가지고. 그 목사는 결국 뭡니까? 마귀 앞잡이 노릇한다고 사도바울이 이야기하잖아요. 너희들이 앞잡이다. 악마의 앞잡이로서 그렇게 전하니까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성경을 전한다. 이렇게 사도바울이 아예 단정을 내린 겁니다. 그리고 내가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라고 확정 짓지요.
마귀가 이러한 훼방 놓고 세상 신을 가지고 압력을 가했을 때 그러면 사람의 능력이 안 되기 때문에 결국은 다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리 되는 거예요. ‘우리는 실패 했습니다.’라는 선까지 우리가 가야 된다는 겁니다. 어떤 기도와 전도와 봉사와 성경공부를 해도 우리는 뭘 해도 역시 안 됩니다. 실패했습니다. 라는 자리에 역으로 마귀를 통해서 그렇게 몰아 세워주고 그 자리에서 비로소 십자가의 피가 인간의 행함과 섞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드러내지요.
그런데 제가 이리 이야기하면 그런데 그 자리에 가서라도 예수님의 십자가피를 안 믿으면 어떻게 되느냐, 이리 하거든요. 십자가 피라는 게 죽음이잖아요. 예수님의 죽음을 안 믿으면 어떻게 되느냐, 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죽음뿐만 아니고 그 죽음 안에는 자기의 택한 백성도 함께 죽이는 죽음, 함께 죽는 죽음입니다. 그러니까 그 점을 생각한다면 ‘내가 만약 안 믿으면 어떻게 합니까?’ 에 대한 질문은 어패가 있지요. 볼펜 같으면 우리 회사는 모든 사람들의 볼펜을 다 압수해서 필기도구 일체 없이하면서 회사 문을 개방합니다. 분명히 사장이 모든 필기도구 없이 합니다. 했는데 어떤 사람이 ‘어떻게 내가 써서 내가 들어갑니까?’ 똑같은 거예요. 방금 이야기가 필기도구를 뺏는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면 내가 어떻게 사인하고 어떻게 필기도구 사용하여 들어갑니까?’ 방금 한 말을 완전히 무시하고 지 주장을 대구 우기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것은 우리는 이미 죽은 걸로 간주해서 가능성이고 나발이고, 죽은 인간이 무슨 가능성이 있습니까? 죽은 놈 만질 것도 볼 것도 없지요. 그런데 내가 어떻게, 어떻게 하면 됩니까? 하는 말은 방금 이야기한 말을 들어 놓고 나와 함께 죽었다 들어놓고 또 자기는 살았다고 착각하는 거와 똑같은 거예요. 아이고~ 이 마귀하고 싸움이 수십 년 계속 되고 있어요. 진짜 말귀를 못 알아들어요. 죽었다는 말은 이건 꼼짝 못 한다는 뜻인데, 마치 에스겔 37장에 나오는 골짜기에 해골들이 있는데, 지금 해골들을 수북히 쌓아 놨어요. 여기 인자와 에스겔이 이야기합니다. ‘야, 에스겔아!’ ‘예’ ‘저 해골 살겠는가?’ ‘아이고, 제가 보기에는 가능성이 없는데요. 그러나 주의 말씀이 살아라하면 살겠지요.’ 소곤소곤 이야기하고 있는데 갑자가 해골이 ‘저요, 저요, 저 어떻게 살릴 겁니까?’ 이러면 진짜 해골이 아니지요. 그냥 바짝 마른 입장에서 그 다음에 말씀이 갑자기 임하니까 심줄이 생기면서 군대 됐잖아요.
그래서 군대가 되었을 때 군대 되어 가지고 움직이고 있는데 MBC에서 ‘실례하겠습니다. 인터뷰 하겠습니다.’ ‘당신은 어제까지 해골이었는데 어떻게 군대가 됐습니까?’ ‘주의 말씀으로 되었습니다.’ 라고 할 거 아니냐 말이에요. 우리가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인자같이 성령 받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제 논리에 문제 있습니까? 없잖아요. 이걸 못 알아듣는다니까요.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그런데 목사님 그게 제가 안 믿어지는데 어떻게 합니까?‘ 이리 이야기해요. 본인이 안 믿어진다는 말은 본인이 지금 거짓말하고 있는 거예요. 왜냐, 인간은 지가 믿는다, 안 믿는다, 결정할 상대가 못 됩니다. 남자가 여자 좋아하면, 여자도 남자 좋아하면서 특히 여자가 그러는데 남자가 용기 내어서 ’자기, 내 좋아?‘ ’싫어, 싫어, 싫어.‘ 싫다는 말이 아니거든요. 싫다는 말은 말도 안하고 픽 웃고 가버립니다. 치면서 애교부리면서 이응자 붙이면서 싫어, 싫어, 했다는 말은 좋다는 말이거든요. ‘주여! 저, 죄인입니다.’라는 말은 ‘저, 구원 받았습니다.’ 란 뜻이잖아요. 애교도 몰라. 애교도. 씨~
그걸 고지 못 듣고 매일 이 근호 목사는 죄만 이야기한다. 이런 애교도 부리란 말이지요. 그걸. 살았기 때문에 ‘저는 죽은 자입니다.’ 라는 말을 하는 거예요. 비로소. 여기서 결론 내리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영의세계는 모든 인간을 죽은 자로 간주해서 그 다음에 여기서(역사에서) 첫 번째로 부활된 분이 예수님이고, 그 다음에 첫 번째 부활되신 분이 두 번째, 세 번째 부활을 시도하는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죽어 놓고도 눈 반짝 떠 가지고 ‘예수님 어떻게 되는가, 살았네. 아, 내 차례네. 으쌰!’ 이런 거 없어요. 죽으니까 무슨 눈을 반 뜹니까? 여기서 제가 죽었다는 말은 숨을 못 쉰다는 뜻이 아니고 열심히 마귀 일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갑자기 있는 게 죽는 게 아니고, 열심히 지 까불대고 있다 말이지요. 그래서 예수 안 믿는 자식 까불더라도 희망을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바로 옛날에 저랬었었지. 복음 공격하고, 복음 조롱하고, 놀리고, 옛날에 내가 저랬었었었어. 다만 우리가 할 것은 복음을 주의 은혜로 복음을 증거 할 뿐이지요. 베드로가 바로 이 구절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봅시다.
5장 10절,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어렵지요. 그냥 부르면 되는데 왜,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말을 집어넣어서 왜, 이렇게 힘들게 하지요? 그냥 너희를 불러줬다 하면 되는데. 그냥 부르면 부름 받은 사람이 누가 됩니까? 내가 주인공 되지요. 주여! 주께서 나를 불러 당긴다! 마치 하늘의 골리앗크레인이 있어가지고 내가 여기 있는데 갑자기 고리가 툭 걸리더니만 나를 잡아당긴다, 이리 되는 거예요. 상상만 해도 얼마나 신나는 이야기입니까? 그렇게 이야기해도 되는 걸 가지고 ‘예수 안에서’ 집어넣어버리니까 우리는 죽은 자로서 올라가는 거예요. 죽은 자라는 말은 눈 감고 있다는 말이 아니고 까불락 대면서 구원받고 있다. 온갖 마귀 짓을 해가면서 구원받고 있다. 그게 예수 안에서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지, 구원 받고 난 뒤에 개과천선해서 구원받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마음대로 까불어야 돼요. 까불이, 다람쥐 하던지, 말던지 우리는 마음대로 까불어야 돼요. 우리는. 안 까불고 점잖게 있으면 뭡니까? 그것도 까부는 거예요. 점잖은 게. ‘행동 조신해야지.’ 이게 까부는 거예요. 그냥 생긴 대로 노세요. 생긴 대로. 괜히 경건스럽게 놀지 말고. 그것도 까부는 거라니까요. 가만히 있어도 까부는 거고, 경건해도 까부는 거고. 죄 저도 까부는 거고.
예수 안에서 우리를 부르사 우리를 자기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지요. 두 번째 어려운 거 합니다. 첫 번째 어려운 거 다 잊어버렸다. 어렵기 때문에 예를 듭니다. 기차가 갑니다. 붕붕 연기를 품으면서 기차가 달립니다. 자, 여기 터널이 있습니다. 터널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기차가 이제 터널을 향하여 들어갑니다. 그리고 5분 뒤에 기차가 나왔습니다. 요 터널 바깥을 보고 있을 때 기차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지요. 그러면 기차가 터널 안에서 새로 만든 거예요? 이 기차가 저 기차입니까? 이 기차가 저 기차지요. 무근 근거로 우리가 그런 주장을 합니까? 무슨 근거로. 이걸 ‘보안 효과’라 합니다.
정육면체라는 것은 면이 6개 되는 것, 우리가 볼 수 있는 면은 몇 개입니까? 3개밖에 안 되지요. 그러면 정3면체가 맞잖아요. 그런데 왜 정육면체입니까? 보안효과에 의해서 그 뒷면에 뭐가 있다? 그 뒤쪽 편에 보이지는 않지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 보안효과가 실패하는 경우가 어떤 경우냐 하면, 어떤 여자의 뒷모습이 너무나 우아하고 잘 빠지고, 앞에서 보니까 막 되어진 여자. 컨디션 먹고 난 뒤에 막 되어진 여자가 튀어나오잖아요. 이럴 경우에 일방적인 자기 선입감으로 그것을 보안효과 때문에 부분만 있어도 그것을 전체로 착각해서 받아들이지요.
보세요.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미 영광에 들어가게 하셨지요. 들어가게 하셨지요. 들어가게 하셨는데 전세금 2천, 말이 안 되잖아요. 이게 영광입니까? 이게 하늘나라예요? 말이 안 되잖아요. 영원히 들어가게 하셨는데 암 걸리고, 암이 무슨 영광입니까? 그런데 성경은 이미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거지요. 그렇다면 이것은 예수님 보시기에 보안효과 이미 끝난 거예요. 니가 병이 들든지, 아프던지, 지독하게 가난하던지, 관계없이 그거는 일종의 터널 속에 들어가게 된 셈이 되는 거예요. 터널 속에.
이미 십자가 때 영광에 들어갔고 이 세상이란 터널을 통과하고 그 다음에 영광의 나라에 나온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선 위치를 알지 못하고 그냥 칙칙폭폭 기차만 바라보니까 터널이 컴컴하잖아요. ‘아이구~ 이 캄캄한 세상! 못 사는데 자살할까?’ 할 정도로 너무나 힘들다 말이지요. 희망이 보인다 하지만 희망이 보인다 하는 희망도 뭔가 보여야 희망이지 뭐~ 보인다한지, 벌써 200년 지나도 그냥 가만히 있으면 곤란하다 그 말이지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서 그 다음에 어디 갔습니까? 바로 약속의 땅으로 갔습니까? 광야로 갔지요. 광야생활이 즐겁습니까? 애굽 생활이 즐거워요? 애굽 생활이 즐겁지요. 광야는 불가능하게 만드는 거예요. 희망을 좌절시키지만 애굽은 언젠가는 내가 정권을 뒤 바꿔 있을 것이다. 좋은 바로가 등장하면 살기 좋아질 것이다. 희망을 가질 수 있잖아요. 그런데 이 터널광야는 아예 희망조차 날아가 버리게 만드는 겁니다. 왜 날아가게 합니까? 희망을 품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자꾸 우리 시선에서는 소망 있어야 된다고 하는데, 소망 없이도 이미 주님의 소망이 우리의 소망이 되면 끝나는 거예요. 믿음, 소망, 사랑 전부다 예수님이 그냥 주는 것이지 우리의 믿음, 소망 끄집어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은 사랑에서 나오는 겁니다.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어제 선교사님이 그런 이야기해요. 선교사님이 아마존에서 아이들 가르칠 때에 말 안 들으면 머리 쥐어뜯고 마구 흔든답니다. 그래도 애들이 선교사님을 존경해요. 왜, 우리 같으면 폭력 교사인데, 애들은 알아요. 강아지도 알고, 원숭이도 알아요. 개도 원숭이도 주인이 지 이뻐하는지 사랑하는지 알아요. 어떤 손님이 왔을 때 꼬리치는 개가 있고, 영발이 있는 개는. 말이 잘못됐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영발이 있는 개는 지 안 좋은 걸 다 안다 말이지요. 애들을 보면 그렇게 폭력하면서 때리면서 인간되라고 할 때 그 진정성이 진심이 사랑으로 나온다면 그걸로 아이들은 순종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힘들다, 어렵다, 괴롭다, 주님이 날 미워하는 모양이다, 주님께서는 너무 폭력적으로 나간다, 나 더 이상 주님한테 힘들어 못 견디겠다, 라고 할 때에 십자가 사랑만 있다면 ‘아! 그것 자체가 바로.’ ‘요것 견디면 사랑해 줄게,’ 가 아니라 ‘이렇게 힘들게 흔들어 대는 것조차도 사랑에서 나온 거구나!’ 그래서 로마서5장3절에 보면, “우리가 환난 중에 기뻐하나니” 환난이 먼저에요. 환난이 없을 수가 없어요. 환난이 인내를, 인내가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 했거든요. 우리의 소망은 따로 있는데 우리의 소망은 인정 안 받고, 주님이 환난을 통해서 집어넣는 소망이 소망이지, 환난 없는 소망은 소망도 아닙니다. 그거는 자기 희망사항이지 소망이 아니지요. 그렇게 해서 우리가 그 나라에 가게 하는 거예요. 터널을 가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가듯이. 힘든 거예요.
불가능한 것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육적인 것이 우리가 까불이 하면서 매일 까불고 있는 육신이 그걸 믿지 말라고 얼마나 장난질 칩니까? 얼마나 압력을 가하는지 몰라요. 예수 믿고 얻은 게 뭐가 있느냐고 내게서 울려나오는 드럼통 같아요. 왕~왕~왕~ 울려나오는, 울리면서 매일같이 나오는 것이 예수 믿고 믿음 좋아서 된 것이 뭐가 있느냐? 고. 내가 니를 만나서 되는 일이 없어! 하고 낙엽 갖다 얼굴에 붓고. 가! 가! 가란 말이야! 하는 것처럼.
한 번 봅시다.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이 말은 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우리는 온전하지 않으며 죽을 때까지, 굳세지 못하며 금순이도 굳세지 않아요. 우리는 강하지 못하며 약하며 우리의 터는 항상 불안전하다. 이런 것을 우리에게 항상 확인시켜 가면서 예수 안에서 이 영광의 나라에 가게 하신 거예요. 그래서 주님이 알고 계시는 보안효과를 우리도 알 수 있는 보안효과로 보는 겁니다.
예수 십자가 알았으면 이미 우리에게 성령이 들어온 거고 들어왔으면 터널이 어떤 사람은 12개고 어떤 사람은 서른 할 건데 어떤 사람은 40개, 전목사님은 760개, 이런지 모르겠지만. 어떤 캄캄한 터널을 통과할지라도 그 보안효과로 인하여 이미 우리는 영광의 나라에 지금 도달되어 있다는 것. 우리 자리가 예수 안이라는 자리이지, 옛날 아담 안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환기시키는 일을 주께서 하실 것입니다. 뭐로? 은혜로. 그 대목이에요.
아이고, 힘들다. 모든 게 힘들지만, 11절에 “권력이 세세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찌어다 아멘.” 말도 왜 이렇게 어렵게 했는지 몰라~. “권력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요번 12월달에 대선 있지요. 대선 할 때 대선후보들에게 얘기 해 보세요. ‘박근O님, 박정O 따님, 권세가 영원히 있을찌어다.’ 기분 좋아한다 말이지요. 이제 권세를 이해하시겠습니까? 아주 심플하지요. 딱 알지요. 대선주자에게 뭐한다? 권세가 있을 것이다. 하면 기분 좋아서. 그렇다면 당선되고 난 뒤에 당신한테 토용사 임원하나 시켜줄게. 이러지요. 그리 나온다 말이지요.
결국, 권세라는 것은, 이건 마지막 어려운 거니까 한 번 풀어 봅시다. 인간은 첫 번째, 인간은 변한다. 두 번째, 어디서~ 어디로(방향성) 세 번째, 우리가 지향한다, 방향 한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그리워하는 권세가 있는 곳으로 간다. 따라서 권세가 우리를 잡아당긴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대구 공부할 때 거미 이야기 했지요. 거미 망을 이야기했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끌어당기면 성도고, 악마가 중심축이 되어서 잡아당기면 우리는 악마 아래에 끌려가게 돼 있습니다. 악마가 S극으로 지옥에서 기다리고 있다면, 우리는 S극을 좋아하는 S극으로 딸려 가면 같이 악마에 흡수될 수밖에 없어요. 헌금 백날하고 기도 백날해도, 권세가 당기는 힘을 우리는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서 내린 결론은 인간은 뭘 못 이긴다? 권세를 이기지 못한다. 인간은 어느 곳이든 그 권세에 종이 됩니다.
마태복음 12장 28절에 보면, “하늘나라로 왔을 때는 권세로 오는데 집주인을 묶어놓고 그 다음에 세간을 가져가도 집주인은 버들버들 떨기만 하고 아무 수한도 부리지 못하고 음~ 분하다, 음~ 분하다, 하면서 자기 가재도구 다 거덜 나는 거와 똑같이 내가 악마를 묶어놓고 그 다음에 악마한테 묶여있던 우리를 자기가 도둑처럼 가져가면서 보쌈해서 가져가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구원이 이루어진다, 라고 했거든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권세로 인하여 구원 받은 줄 알아라, 이 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구원받으면 우리는 끊임없이 권세를 지향하게 되어있어요. 나는 내 것이 아니고 값으로 산 것이 주의 것이다 할 때, 주님께서 그걸 당긴다 말이지요. 우리가 그걸 안다, 실천에 옮긴다,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실천에 옮기던 말던 관계없이 성도는 본인이 느끼던 안 느끼던 관계없이 권세가 우리를 작용해서 그 쪽이 아니야, 그 쪽이 아니야, 계속해서 잡아당깁니다. 목자가 지팡이를 들고 외부의 적도 치지만 내부의 양들을 양몰이 할 때 몰고 가잖아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목자와 함께 있으면 권세만 영원하면 다른 말로 권세가 나를 당기고 있다면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함께 하심이라. 내게 상에 넘치나이다. 그래서 ‘당신의 권세 자는 누굽니까?‘ 물을 때, 주저 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 나를 당기고 있는데 그 형편이 지금 내 인생 내 꼬라지입니다.‘ 주께서 사람마다 다르니까 이 사람은 이렇게 당기고, 저 사람은 저렇게 당기고, 빨간 옷 입은 사람 당기고, 명품 찬사람 당기는 사람 있고, 부잣집 셋째 당기는 사람 있고 다 달라요. 어떤 사람은 스마트폰 있는 사람 당기고, 어떤 사람은 휴대폰 없는 사람 당기는데. 어떻든 동일하게 당긴다. 똑같을 필요가 없어요.
제가 누누이 이야기합니다. 제발 남의 신앙을 모델삼지 마세요. 그 사람은 그 사람 모델 될 수가 없어요. 그 사람 독특한 것이고, 그 사람 개인만의 문제지, 우리 주께서 당기는 방법 따로 있는데 다른 사람 당길 때 같이 당긴다고 똑같이 된다는 것은 보장 없어요. 남편, 아내 잘 때 같이 꿈꾸는 거 아니잖아요. 다 동상이몽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당기는 방식이 다 다릅니다. 누구를 본받을 필요가 없어요. 그렇게 모델로 삼지 마세요. 이것이 지난달에 했을 때 의존교회 핵심이었습니다.
결국 변화한다는 말은 뭐가 아니다? 어제 가락강의에서 했듯이 ‘나는 고정적 존재가 아니다’를 명심해야 됩니다. 내가 나를 잡아당기면 자아도취에 빠집니다. 당겨주는 사람 없을 때는 혼자 그냥 멈춰있는 거예요. 사실은 혼자 멈춰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 어디에 멈추는가? 사회 유행 따라 가지요. 제가 여러 번 이야기해서 제 아내가 잔소리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대학 다닐 때 다른 여학생은 다 청바지 입고 다닐 때 혼자 시커먼 주름치마 여 전도처럼 입고 다니는 아가씨로 보고 아직도 40년 지났는데도 잊지를 못해요. 그 검은색 주름치마. 발목까지 오는 거 입고. 알고 보니 철학과 1학년 여학생이었어요. 아무도 그 사람의 유행을 못 따라줘요. 특히 여자들 옷 입을 때 옷 해어져서 입는 게 아니고 유행에 뒤떨어져서 옷 사잖아요. 패딩 입는 것도 유행 따라, 그러니까 인간은 자꾸 변화는 거예요.
변할 때 어디에서 어디로 당기는가? 유행에서 유행으로, 뭐 전부다 양학수술하고, 올리고, 견적내고 스마트폰으로 딱 찍어보면 어플리케이션, ‘당신의 견적은 2500만원입니다.’ 나온답니다. 그런 게 있데요. 견적비가 많이 나온 사람은 질이 떨어진 거고, 적게 나오면 고칠 게 없다는 얘기고, 그런 뜻이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어디냐? 그냥 유행 따라 사는 거예요. 인간은 가만있지를 못해요. 변하지요. 문제는 여기서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변합니까? 안 변합니까? 분명히 예수님 안 변한다 했지요. 역사속의 예수님은 변합니다. 그 질문이 십자가마을 질문 들어간 거예요. “뜻을 돌이키사” ‘주님은 안 변하는 것 같은데 왜 뜻을 돌이킵니까?’ 하는데 ‘뜻을 돌이켜서라도 죄를 따라서 추적하는 그것이 주님의 변하지 않는 일관됨입니다.’ ‘니가 노래방가면 나는 노래방 주인으로 변할 것이고, 니가 술집에 가면 나는 술집주인으로 변할 거야.’ 주님은 매일 변해. 뭐하나 변하지 않는 것 때문에? 우리의 죄를 지적해 내는데 대해서는 변함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 때 그때마다 변함을 가지고 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고 제가 답변했는데 그 답변이 이해됐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돌이킴으로서 변하지 않는 겁니다.
주님이 변하지 않는다는 말은 어떤 잘못에서는 내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나처럼 변하지 않는 주님 같으면 내가 믿겠습니다. 라는 그런 곡해에서 오해에서 비롯된 거예요. 내가 변하면 같이 따라 변해야 돼요. 어제 가락강의에서 코페르니쿠스 했지요. 별자리가 달라지는 것은 내가 같이 변했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자, 그러면 주님이 변하는데 이 말은 쉬운 예로 보름달 떴을 때 우리가 밤에 공원에 산책하면 달이 움직입니까? 안 움직입니까? 움직이지요. 그런데 실제로 보면 거의 안 움직이지요. 물론 공전자전도 하지만. 자전 공전 하는 것이 우리 눈에는 멀어서 확인 안 되지요. 하지만 걸어가다 보면 계속 따라오잖아요. 같이 따라 온다고요. 그런 점에서 계속 우리 행동 따라서 계속 따라붙는다는 점에서 권세라는 것은 우리가 유동적이기 때문에 권세도 유동적이 되어야 우리의 어떤 현장에 있던지 간에 항상 우리를 인도하실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배고플 때도 있고, 목마를 때도 있고, 예수님 오래 갇힐 때도 있고, 있는 거예요.
이게 뭐냐 바로, 묵시는 역사로 인하여 보안효과를 자아내는 겁니다. 영글어 내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 자체가 주님의 보안효과 속에 푹 젖어 있는 거예요. 어떤 것이라도 다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겁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다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거예요. 우체국에서 선물포장 할 때 그 물건 따라 포장용도가 다 다르잖아요. 각 개인마다 주께서 보안장치가 성도한테 다 다릅니다. 남에게 적용되는 보안장치를 나한테 적용시켜 버리면 이건 말이 안 되지요. 성질 급해서 말하다보니 방언 터진 걸 가지고 성질 느려터진 인간이 방언한다고 사흘 삼일씩 매달려봐야 방언 안 터집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해서 무슨 방언이 됩니까? 따따따다 해야 뭐 속살부터 튀어나와야 앞의 말발을 하다 보면 방언 비슷하게 되는 거죠. 병 낫기를 기도해야 되는데 이거는 천날 백날 아픈 사람은 10번 기도해서 1번 쥐 잡듯이 하면 하나 되는 건 되는데. 늘 건강한 사람이 무슨 병 낫기 위해서 은사를 언제 맛봅니까? 늘 건강한데.
생각해 보세요. 비가 아쉬운 사막지대에 비오라고 기도하면 이해되는데 천하에 비 오는데 무슨 비오라고 기도하면 그건 망하라고 기도하는 거와 똑같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 때 그 때마다 상황마다 보안효과가 사람마다 다 다르니까 남의 신앙을 흉내 낼 필요도 없고 지 인생 지가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댕겨주는 권세는 항상 동일하고 영원한 겁니다. 세력과 권세가 그에게 있다면, 거미줄에 나오는 그 모든 것이 있다 말이지요.
놀이동산에 보면 이런 게 있지요. 원기둥에 많은 줄이 있고 작은 의자가 있어서 휭휭 돌아가지요. 권세에서 각 사람마다 줄이 있어서 그 사람에 해당되는 보안효과들이 주어지지만 권세는 어떻게 됩니까? 중앙에서 항상 영원합니다. 그런데 여기 어려운 게 있어요. 아까 역사가 보안효과라 했지요. 이 변하지 않는 보안효과가 이 역사 속에 뭐가 됩니까? 십자가지요.
그럼 이 십자가가 미비합니까? 대단합니까? 역사 속에서는 그렇게 연약하고 미미해요. 땅 바닥에 있는 십자가 툭 차도 주님은 화내지도 않아요. 이렇게 밟히고 저렇게 밟히고 자기 백성에게 밟히고 남의 백성에게 밟히고 악마에게 밟히고 자기 백성에게 설움 받고, 너무나 미미한 십자가, 아무도 찾지 않는 십자가, 하지만 이 십자가가 역사에서 묵시로 가서 내려올 때는 ‘너, 똑바로 해!’ 라고, 역시 권세는, 십자가 권세는, 구원은 ‘죄 속에서도 구원은 능하구나!’ 하는 역사에서 묵시로 거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우리는 성령 안에 주어져 버리면 주님의 권세는 대단한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부터 권세는 뭐냐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권세의 기능은 우리에게 다양성을 주면서도 하나로 묶는다는 이야기를 방금 했습니다. 그럼 권세는 무엇이냐, 성경을 찾아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8장18절,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뭐하려고 주셨는데요? 권세는 공무원시험 합격하라고 주신 겁니까? 아니지요. 뭐하려고?
그 다음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라는 데 필요한 것입니다. 공무원 시험 합격이 아니고. 자식 장가보내고 시집보내는 게 아니라, 예수의 제자 될 사람을 제자 되게 하는 권세에요. 아직 이해 안 되실 거예요.
요한복음 17장 2절에,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그 다음이 뭘까요?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이리 되어 있거든요. 아까 마태복음에서는 약간 모호하지요. 어디 교육시키라는 말인가, 수련장 만들어서 1주일동안 수련회하란 말인가, 이런 뜻인데, 약간 모호했는데 요한복음 보니까 확실하지요.
모든 권세는 김정일이 죽고 김정은 나온 그 권세, 지금도 노래방에서 노래 부르고 있는 권세, 움직임, 지금 지하 노래방에서 노래 부르고 있는 거하고 우리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 하면, 그 사람이 노래 부르는 것이 그 어떤, 어떤, 어떤 것을 통해서라도 그것이 나로 하여금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어 영생 얻게 하기위한 조치로서 지금 지하 노래방에서 노래 부르고 있다 보면 돼요. 왜냐 하면 신자든 불신자든 권세아래 있기 때문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니까 이거는 뭐도 포함되어 있다? 악마의 움직임도 포함되어 있다. 악마마저 우리에게 영생주려고 그 짓하고 있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고물장수한테 ‘당신, 나한테 돈 빌려갔지?’ ‘내가 당신한테 돈 갚아주면 나는 개다! 저리 가! 꺼져! 가져갈 건 고철뿐이야, 빨리 가져가!’ 고철 25t 줘 버립니다. 분명히 자기는 쓰레기라 여기고 고철을 줘 버렸는데 가만히 받아보니 현찰보다 더 나아요. 분명히 핍박을 하고 악마가 조롱을 하는데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오직 세상을 버리고 누구만 쳐다보게 한다? 오직 주님만 보게 해서 환난과 인내와 연단을 삭게 하는 그런 상황들로 주어지니까 그게 바로 예수님께서 ‘잘한다, 마귀야!’ ‘마귀야, 마귀야, 그렇게 해야지.’ 결국 우리에게는 택한 자에게 영생주기위한 모든 짜임새, 모든 요소가 되고 배치가 되는 겁니다. 모든 것이.
그런데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요걸 말을 바꿔서 생각하잖아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권세아래 있다면 난 막 놀려 해요. 죄 지으려 해요. 요런 통박이 팍팍 돌아가지요. 그런데 그 차이점이 뭐라 했습니까? 진짜 성령 안 받고 난 뒤에 그런 이윤을 살짝 이용하는 사람은 결국 누구 이윤으로 돌아온다? 자기 사적인 이윤으로 돌아오지만, 성경 말씀의 모든 권세는 나는 고민할 자격도 없고, 가치도 없고, 나는 대수롭지 않은 존재이고, 뭐만 대단하다? 예수 그리스도만 대단하다는 쪽으로만 나오면 그런 현상이 나온다면 지금 한창 주님의 권세가 그 사람에게 작용하는 것을 본인이 확인하고 있는 중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모든 권세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있다는 겁니다.
권세라는 것을 다시 정리하면, 권세에 대해서 사람들은 국가권세로 보는 경우가 있고, 교회권세로 보는 경우가 있는데 이게 아니고, 국가, 교회가 자기 이기주의적존재, 자기 정당성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지요. 진짜 권세는 내가 속한 교회가 국가가 잘되는 게 권세가 아닙니다.
월드컵 예선전 벌인다, 그럼 누구를 응원합니까? 제삼자의 예수 믿는 나라가 누구를 응원합니까? 불교나라와 기독교나라가 붙었다, 누굴 응원합니까? 예를 들면 불교나라 태국하고, 기독교나라 스웨덴하고 축구 한다면 그 ‘마귀나라 조저 버려’ 이런다 말이지요. 방금 예는 가하지만.
아프리카 같은 경우에 어떤 나라에는 기독교가 많이 퍼져 있는 나라가 있고, 나이지리아 같은데, 어떤 나라는 이슬람이 90%인 나라가 있어요. 전쟁을 벌인다, 그러면 기독교 같은 경우에 어디를 원조하겠어요? 당연히 기독교 하겠지요. 그런 것을 권세라 하지 않는다 말입니다. 그런 것을 권세라 하지 않고 우리 자신이 어떻게 살든지 관계없이 ‘예수님만 아들만 전하면 저는 어떻게 되든 좋습니다.’ 하는 그런 마음가짐이 나올 때 권세가 작용하고 있다는 티가 팍팍 난다 이 말입니다. 그게 권세입니다. 청와대 아는 사람을 연결해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힘을 내어 가지고 한국에 있는 불교의 절을 다 불 질러 없애 달라는 그런 권세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 다음에 봅시다. 12절, “내가 신실한 형제로 실루아노, 다른 말로 하면 실라, 디모데하고 바울하고 동행자예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노니” 초대 교회에 이렇게 사도바울을 보좌하고 봉사한 사람이 드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같은 사람이 또 등장하는 것 보니까, 아! 인물 없다, 인물 없어. 이 사람이 그 사람이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왜 그럴까요?
그것은 이번 수련회 바울신학에서 할 건데요. 왜 그러는가 하면 지금이 사도시대입니다. 사도시대라면 계시가 성경이 완료되기 전이에요. 사도가 성경역할 다해야 됩니다. 그렇다면 사도가 성경역할 다하면 사도가 물론 자기가 계시를 만들어 낸 게 아니고 예수님이 사도를 통해서 하는데 사도를 통해서 할 때, 사도와 가까이 있으면서 사도가 하는 복음이 중요하며 사도가 하는 모든 목회가 중요하다는 것을 증거 해야 될 사람을 측근들을 하나님께서 또 세우시게 돼요. 성경이 확정이 안 됐으니까.
지금은 성경책이 인쇄가 돼 있기 때문에 교회 다닌다는 것을 몰랐는데 할 정도로, 성경 혼자 봐도 훌륭한 실루아노고 훌륭한 디모데가 되는데 그 당시는 구체적으로 움직이는 예수님처럼 구체적으로 역사 속에 움직이는 땅을 딛고 움직이는 사도가 계시에서 나오는 출처가 되기 때문에 그 사도의 말씀을 보좌하는 측근들이 있어야 돼요. 그 사람들이 편지 쓰고 대필하고 이래 가지고 교회마다 전하고 이랬다 말이지요. 성경이 인쇄되어 가지고 돈 몇 만원 주고 사는 시대가 아니고 그래서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이 숫자가 적더라도 그 사람들은 사도를 보필하기 위한 숫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많을 필요가 없다니까요. 사도 팬이 1%도 없거든요.
그 측근들은 사도가 위대해서가 아니라 사도가 전하는 그 계시, 그래서 예언과 통역이라는 말을, 그게 디모데에게는 네가 예언의 말을 열심히 전하라는 말이지요. 박 윤진 성도의 글에 나오잖아요. 예언이라 하는 것은 안 믿는 사람을 믿게 하기 위해서 한 거예요. 안 믿는 사람을 믿도록 빳빳한 것을 까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 안 믿겠어.’ 라고 튀어나오는 것이 방언이 되는 거예요. ‘나 두 번 다시 믿는가 봐라.’하고 튀어나오는 게 방언이에요. ‘나 죽어도 안 믿을 거야.’ ‘죽어도 예수님, 하나님 믿는가 봐!’라고 나오는 게 방언이다 이 말입니다. 말이 어눌한 것도 방언이지만, 도대체 이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하는 것도 방언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통역이 들어가는 거죠.
처음에 오순절날 방언이 터졌잖아요. 그 방언의 내용이 뭐냐 하면, ‘너희들은 신자가 아니었어.’ 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신자가 아닌데 방언이 터지게 했다는 말은 아닌 자를 되게 하는 작업에 하나님 쪽에서 성령을 통해서 이미 개시가 됐다는 거예요. 그래서 방언했다고 자랑하면 안 되고 통역 부탁해야 됩니다. 옛날에 성경이 완료되기까지는.
예언과 방언과 통역의 만남은 결국 뭡니까? 이 성경 말씀이 되는 거예요. 우리는 그런 절차가 이제는 필요치 않고 말씀 그대로 보고 있으니까 구태여 통하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는 그런 방언에 우리가 신경 쓸 이유가 없는 겁니다.
어떻게 말하다 나오면 속으로 생각하세요. ‘어, 내가 미친 짓하고 있네. 이거 소용도 없는 걸 내가 왜 하지? 주여, 이거 못하게 하옵소서.’ 중지시켜 버려야 돼요. 또 통역한다고 하는데 방언이 있어야 통역을 하지. 이 성경 자체가 계시로 완성되었는데 이 성경을 설명하고 해석하고 이해해주고 복음으로 말해주면 되는 거예요. 이게 통역이고, 이게 예언이고, 이게 방언이 되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은 바로 사도를 지키는 것이 사도에게 뭐가 나오기 때문에? 하나님의 확정된 계시가 나오기 때문에 그들을 도와주는 겁니다.
그 다음에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바벨론 나라 망해 버렸는데? 한나라당 바뀐 게 언제인데, 아직도 한나라당이에요. 한우리당이지. 마찬가지로. 그런데 한우리당이 한나라당이고 한나라당이 한우리당이지, 그렇잖아요. 바벨론이란 말은 뭐냐 하면 모든 나라에 대한 대표적인 닉네임이지요. 왜냐 하면 짐승의 세계이니까. 마귀의 세계이니까. 마귀가 짐승한테 설치는. 이 말은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이 시대가 어떤 다양성이 있든 언약적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을 죽여야 했던 그렇고 그런 시대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아무리 진화하고 발달해도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그 세력이 어디 갑니까? 그러니까 바벨론이라고 지칭해야 합당하다는 이야기지요. 그리고 이 바벨론에 있는 교회라고 살면서 우리도 우리교회도 바벨론에 있는 교회, 의존교회에도 바벨론에 있는 교회, 항상 어디 안에 들어있는 교회, 그렇게 보셔야 되지요.
내 아들 마가도 그러하니라. 베드로가 언제 또 장가들어서 아들까지 낳았는지. 마가. 젊으니까, 어리니까, 그리고 너무나 인간적 관계, 육적인 관계 이상이니까 친근하게 아들이라고 부른 거예요. “내 아들 마가도 그러하니라,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피차 문안하라” 사랑의 입맞춤이라 하는 것은 일종의 키스지요. 이런 것은 뭐냐 하면, 합하다. 한 몸이다. 교류가 되니까. 입 맞추는 순간에 너 따로, 나 따로, 가 아니라 전부 다 한 몸으로 살아가는 것. 그렇다고 입을 늘 달고 다니는 것은 아니고 본드 붙여 다니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입맞춤으로서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는 겁니다. 동일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다른 말로 한 권세 안에 비록 다양하지만 한 권세 안에 있습니다.
이것도 모르고 중세교회에는 입 맞추고 이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발 씻겨 줬다고 발 씻겨 주는 거 보세요. 그렇게 발 씻지 말고, 반신욕하는 게 더 낫지요. 제발 그런 것 좀 안 했으면 좋겠어요. 세족식 이런 거. 백석대학교 광고 보면 또 나와요. 발 씻겨 주는 거. 백석대학 교수가 이런 소리 했어요. 교수들 월급 깎아서 광고비 낸다고. 깊이 알려고 하지마세요. 들어가 봐야 돈입니다.
14절,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어디 안에만? 권세한테 이끌리는 사람, 그런 사람만 이 성경, 동방박사가 별 따라 온 것처럼 그들만 제발 이해하고 다른 사람은 이해할 생각도 하지 말라 이 말입니다. 다음에는 베드로후서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이렇게 대할 수 있도록 아직도 허락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야말로 주님의 허락하심이니까 우리의 자랑이 일체 나오지 말게 하옵시고 주께서 허락하신 안에서 그리스도가 이루어진 일에 대해서 권세에 복종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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