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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증도 엘로라도 특강(차이와 타자) 1 본문

저서 & 기타(이근호)/차이와 타자

증도 엘로라도 특강(차이와 타자) 1

정인순 2012. 2. 1. 13:49

음성1   

 

녹취:한윤범

20120130 증도 엘도라도 특강 - 차이와 타자a

(강의:이근호 목사)



여기 7페이지 제목에 보면, [표상적 사유와 비표상적 사유]라고 해서 벌써 제목부터 기 팍 죽이죠. ‘표상’이라는 것은 표현이란 뜻입니다. 쉬운 말 놔두고 표상이라고 하는데 표현하는 사유와 표현될 수 없는 사유. ‘사유’란 말은 어렵죠. 표현할 수 있는 생각과 표현될 수 없는 생각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그걸 서문에 처음부터 시작하느냐? 인간의 주체라는 것은 무슨 활동을 하는데 그 활동이 8페이지에 나와 있습니다. 위에서 네 번째 줄에, “하이데거는 표상 활동을 근대성의 본질, 보다 정확히는 근대적 주체성의 본질로 내세우고 있다”


이건 뭐냐 하면, 사람이 표현을 함으로써 비로소 내가 주체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는 거죠. 가만있으면 그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잖아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자기 가방을 가져가면, “어, 내 가방” 하잖아요. 평소에 말이 없던 사람도 가만있습니까? 식당에서 남이 자기 신발을 신고가면 어떻게 합니까? 아무리 입이 무겁고 점잖은 사람이라도 “오, 내 신발” 이러잖아요. 그때 뒤돌아보면서 이렇게 이야기하세요. 표상적 주체! 표상적 주체 확실하게 알았죠?


하이데거는 표상이라는 것은, 자기 앞에 세우는 활동, 내 앞에 누굴 세워놓고 나는 저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할 때 비로소 주체가 발생된다고 보는 겁니다. 가만있으면 사람은 있는지, 없는지 몰라요. 뭔가 표현할 때 등장하는 겁니다. 그 세우는 걸 ‘대상’이라 합니다. 그러면 인간은 세우는 활동의 주관자가 되는 겁니다.


주체가 뭔가 행동을 했다는 정도로 끝일 것 같으면 어려운 게 아닌데 이제부터 내가 그 대상에 대해서 주관자가 되겠다, 지배자가 되겠다는 식으로 주체가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 근대주체사상이란 말입니다. 그냥 사람이 몇 사람 있네. 이게 아니라 각자각자 자기표현에 대해서 남한테 지배받지 않겠다는 의식을 드러내는 그것이 주체가 되는 겁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중간에 보면, 이렇게 하나의 대상으로 표상, 표현을 해버리면 그때 어떤 말로 정리될 수 있느냐 하면, 세계라는 것은 인간 앞에 세워진 그림으로서만 존재한다. 이 말은 사람마다 각자 세상을 보는 눈은, 각자 자기가 그리는 세상만 자기가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근대주체사상에 들어가면 하나의 세상이라도 열 사람이 있으면 세상은 열 개나 되는 셈이 되죠. 그리고 이 세상이란 그걸 오직 세상이라고 보는 인간에게 “정복된 그림으로서 외에는 그 어디에도 존립할 수 없다.” ‘정복’이란 말을 쓰죠. 지배하는 걸 말합니다.


그 뒤에 8페이지 끝에 보면 과학이 나오는데, 그렇다면 과학이란 뭐냐 하면, 그냥 있는 세상이 과학이 아니고 내 주체를 확인하기 위해서 내 앞에 등장해서 나의 심판을 받는 대상으로 세상을 그릴 때 그 세상이 과학적 세상이에요. 그래서 9페이지에 보면, 그걸 “지구적 제국주의”라는 말을 했죠. 제국주의란 모든 여타의 것들을 자기 수하에 둬야 마음이 흡족한 그러한 주의, 사상을 말하죠.


과학이란 다른 게 아니라 제국주의다. 안드로메다 있다. 그건 과학이 아니죠. 안드로메다에 어떻게 하면 사람을 살게 할까? 이거는 제국주의죠. 세포가 있다. 이거는 과학이 아니죠. 세포를 어떻게 이용해서 나한테 이득이 되는, 난치병을 고치는 세포로 바꿀까? 이거는 뭐가 됩니까? 과학이 되는 겁니다.


과학이란 로봇을 만든다든지, 의술을 발달시킨다든지, 암세포를 퇴치하는 것은 전부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의 세상으로 보지 않고 주체란 자기한테 소용되고, 이용되고. 활용되는 식으로 전환시키는 폭력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사고방식이 거기에 개입될 때 그것이 바로 과학이라는 겁니다. 과학주의란 다른 말로 제국주의란 뜻이죠.


진화론이란 뭡니까? 세상이 달라졌다, 변화했다는 그런 뜻이 아니고 이 세상은 인간을 위해서 있어야 된다고 확인하기 위해서 수립된 이론이 되는 겁니다. ‘진화’란 말은 발전이란 뜻이 아니고 변화한다는 뜻이에요. 원래 뜻이. 진화론의 진화란 헬라어에서 나왔는데 진화라는 용어의 원 뜻은 세상이란 신의 목적대로 움직여 가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다윈이 사용했죠.


나중에 그 용어가 바뀝니다. 어떤 목적이 없이 스스로 알아서 변화한다는 뜻에서 진화라 한 겁니다. 다른 사람은 거기다 발전 개념을 집어넣어버렸어요. 항상 어떤 변화라도 나중 변화가 전의 변화보다 발전했다. 발전했다는 말은 제국주의적 아이디어죠. 자연은 발전하는 게 아니잖아요. 나귀가 말이 되는 게 발전한 거예요? 나귀한테 물어보세요. 아니죠.


인간이 발전했다고 보는 이유는 누구한테 도움 되라고 그런 용어를 쓰는 겁니까? 인간 자기 주체에 도움이 되라고. 그러니까 이게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이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으로 할 때 과학은 그쪽으로 나갈 때 철학은 뭘 묻느냐 하면, 네가 과연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질 만한 위인이 되는가? 주체 자체를 묻는 것이 철학입니다. 과학과 철학의 차이점이 거기에 있어요.


예를 들면 학교에서 성적이 좋으면 우수한 학교로 소문나서 우수한 학생들이 입학되겠죠. 그렇게 할 때 선생님은 과학적으로 학생들을 공부를 잘 시켜야 된다. 그게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고. 철학자는 뭐라 합니까? 네가 뭔데 발전해야 되는데? 이걸 묻는 게 철학이란 말이죠. 네가 뭔데 너는 왜 퇴보해선 안 되고 발전해야 되는 이유를 내놔봐라. 이게 바로 철학이에요.


“이번에 우리학교가 과학경시대회에서 일등했습니다. 그래서 우리학교가 소문났습니다. 이제 서울대학에 많이 보냈으니까 광주에서 아주 유명한 학교가 될 것입니다.” 철학자는, “네가 뭔데? 그래서?”라고 묻는 거예요.


네가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으로 자기 원대로 세상이 잘 돌아갈 때 성공했다고 하잖아요. 성공했다는 순간에 그 사람은 뭘 잊어버립니까? 내가 성공해야 될 이유가 뭔지를 묻습니까? 안 묻지요. 그걸 묻지를 않는 거예요. 그러면 이건 뭐냐 하면, 과학이란 폭력적이고 제국주의적이란 말이죠. 일방적이고 지밖에 모르고.


언제 토끼로 실험할 때 토끼한테 물어본 적 있습니까? 쥐로 실험할 때 쥐한테 물어본 적 있습니까? 없지요. 제약회사에서 신약 개발할 때 주사 놓을 때 흰쥐한테 물어본 적 있습니까? 기껏해야 나중에 죽여 놓고 쓰레기에 넣고 위령제 지내는 그 정도.


인간은 왜 그따위 식으로 살아가느냐? 그걸 조사한 것이 바로 현상학에서 나오는데 그게 9페이지에 나옵니다. “오로지 ‘의식’으로서의 인간이어야만 한다.” 9페이지 위에서 일곱 번째 줄에. 인간의 의식은 오직 인간 만이어야 한다는 아주 일방적인 생각을 갖고 있단 말이죠. 그리고 인간 만이어야 하기 때문에 인간 외에 모든 세상은 인간의 표상이론에 의하면 그것은 하나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그것은 우리가 충분히 이용해도 저쪽은 할 말이 없는, 인간 외에 어떤 자연도 할 말이 없고 인간이 다루는 대로 다루어지고 나머지는 쓰레기로 처분되는 겁니다.


활성산소 이것이 세포를 노화시키고 인간의 암세포를 유발시킨다는데 활성산소를 제거돼야 되고 다른 산소는 유용하다는데 활성산소한테 물어보세요. 네가 뭔데 필요하다, 필요 없다고 네가 주관하느냐? 연탄가스의 주범인 일산화탄소를 내보냈다 할 때 일산화탄소한테 허락 맡고 내보냈습니까? 아니죠.


세상 돌아가는 것이 오직 인간 만이어야 하는 그런 의식에 의해서 인간은 세계를 바라본다. 정말 인간이 생각하는 그 세계가 맞느냐고 따지는 것이 바로 철학입니다. 과학은 그게 아니죠. 인간에게 이용되면 그것이 곧 있어야 될 자연으로 전부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인간 말고 많은 변화가 있고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9페이지 위에서 여덟 번째 줄에, “인간은 수많은 다양한 존재자를 자기라는 하나의 지평 위에 그러모을 수 있는 자다.” 그러모으는 자란 쉬운 말로 긁어모으는 자로 긁어모아서 자기한테 이용되는 건 다 긁어모아서 하나의 동일자로 만들었다. 똑같은 것으로 만들고 조직한 거예요. 그 조직과 구성된 것은 누구에게 봉사하기 위함입니까? 인간. 그것도 인간 중에서도 ‘나’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모든 것은 수집해서 평가를 내리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의 의식 자체는 유아적이나 그 본질에 있어서는 보편적이다. 유아적이란 자기밖에 모르는 것을 유아론적이라 하죠. 유아론적이나 그 본질에 있어선 보편적이다. 유아론적인 인간들이 한둘이 아니고 보편적이다 이 말입니다. 전부다 지밖에 모른다는 뜻이에요.


여기에서 인간의 의식이 어느 정도로 보편적이냐 하면, 인간의 개체를 뛰어넘어 전적으로 모든 보편적인 것을 하나로 동질화시킬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이 있는 게 의식인데 “의식만이 신의 나이만큼이나 늙은 우주 전체를 일순간에 가로지르며 무수한 타자를 하나의 지평 위에, 즉 의식 자신에 종속시킬 수 있다.”는 거예요.


아까 안드로메다가 멀리 있다 할지라도 “안드로메다가 저기 있네.” 그러면 안드로메다가 “까꿍” 이럽니까? 안드로메다가 저기 있다는 순간 안드로메다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안드로메다는 은하계 제일 끝에 있는 성운을 말합니다. 안드로메다 성운은 결국 누구의 표적이 됩니까? 나의 표적이 되는 거죠. 안드로메다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자기 니트에 안드로메다 도안을 해서 팔아먹고. 안드로메다한테 물어보지도 않았어.


인간의 의식은 신의 나이만큼 늙은 우주니까. 우주는 신과 더불어 늙어가고 있는데 늙어가는 중에 기껏 점 같은 존재가 인간이지만 그 점에서 나온 인간의 의식은 신의 나이만큼 늙은 모든 우주를 포괄할 수 있고 그것은 자기 위주로 동일하게 편평하게 끌어당길 수 있는 능력이 의식한데 있다 이 말입니다. 이 의식이 좋다는 말입니까, 나쁘다는 말입니까? 미쳤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햄릿은 이렇게 이야기해요. “나는 호두 껍질 속에 갇혀있어도 나 자신은 무한한 우주의 왕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다.”([햄릿],Ⅱ, 2) 호두 껍질 속의 우주라는 이야기가 유명한 천문학에 관한 책에 나와요.


“이처럼 세계를 자기가 고안한 계산을 통해 앞에 그림으로 세우는 주체의 표상 활동 뒤엔, 다자를 하나의 지평 위에 그러모을 수 있는 능력으로서 의식이 자리하고 있다.” 같은 이야기를 하죠.


그 다음에 10페이지를 봅시다. 거기에 대해서 들뢰즈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이 들뢰즈 이전에 칸트 그리고 현상학의 훗설 같은 사람의 이야기를 한 건데 칸트 이야기는 뒤에 나옵니다. 표상이란 단어에서 접두어 ‘RE-’는 되풀이란 뜻이죠. “차이를 종속시키는 동일적인 것의 개념적 형식을 의미한다.” 그래서 다시란 뭐냐 하면, 세상에 있는 것을 그냥 있다고 방치하지 않고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세상에 집어넣으면 순간에 그 세상은 내가 여기 있음에 봉사해야 되고, 나의 있음을 확인해야 될 하나의 종노릇이 돼버리죠.


예를 들어서 미장원에 아주머니들 여섯 명이 머리 깎고 있었다. 그때 백화점에서 물건 훔친 여자가 미장원에 들어와서 자기가 경찰에 쫓기니까 엉뚱한 미장원에 몸 숨기고 있다가 경찰한데 걸렸다. 그러면 경찰에선 여섯 명 다 불러요. 그중에 공범이 있는지. 졸지에 가만있다가 경찰서에 가서 조서 쓰게 돼있어요. “나는 저 여자와 관계없습니다. 공범자가 아닙니다.”


이처럼 자기를 가만있는데 인간이 쑥 들어가면, 원숭이와 개미는 인간에게 무슨 의미냐? “인간이여, 개미한테 배워라.” 해서 개미의 사회성과 갑자기 연관시켜버리고. 모든 것을 인간의 의식 속에 연관이 돼요. 그것이 인간이 자기를 주체라고 확인하고 있는 그런 과정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그런 작업들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개별자가 다 그런 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결국 인간이 모이는 사회란 것은 그런 것들이 모인 사회니까 동일성 아니면, 같은 의견 아니면 다른 것은 적으로 취급하겠죠. 그렇게 되면 자기와 같지 않은 것에 대한 핍박과 멸시와 천대가 자연히 유발되겠죠.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나와 같이 한다는 말은 나에게 필요 없는 것들에 대한 멸시를 이야기합니다.


어제 친구가 오늘은 원수가 되고, 어제의 원수가 오늘은 동지가 되는 것이 정치판이 아닙니까. 그들이 왜 적과 동지, 동지와 적을 왔다갔다하는 겁니까? 상대를 볼 때 뭐로 봅니까? 그 사람 자체로 보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을 내가 구성한 나의 동질성 속에 집어넣을까, 말까를 누가 결정합니까? 내가 결정한다고요. 같은 동질성에 집어넣는다는 말은 나한테 이득이 될 경우에만 집어넣고, 나를 해코지한다면 어떻게 합니까? 추방시키죠. 그건 너무나 자기 일방적이죠. 일방적인데도 사람들은 그걸 참 합리적이고 일을 과학적으로 했다고 이야기합니다. 다른 말로 참 이성적으로 했다.


그것이 바로 10페이지부터 11페이지에 나오는 칸트 이야기가 나옵니다. 칸트는 모든 것을 종합을 해요. 세상을 하나의 표상으로, 하나의 표현으로 뭉치는데 표상 속에 하나의 결합을 집어넣는 방식을 10페이지 밑에서 두 번째 줄에, “칸트에게서 상상력이 수행하는 ‘세 개의 종합’”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이라는 세 가지 방법을 통해서 하는 겁니다. 이걸 감성과 지성과 이성이란 말을 했죠.


결국 이 모든 것을 동원한 것이 뭐냐 하면, 이 세상이란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내 자신의 의식이 어떻게 꾸미느냐에 따라서 세상은 달라진다.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 네 세상, 내 세상 다르고 진짜 세상은 뭐냐? 물자체라 해서 물질 할 때 물(物), 물자체(物自體)라 해서 the thing-in-itself 이것은 아무도 알 수 없다.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것은 신의 영역에 속한다.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그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어떤 숭고를 느낀다면,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알 수 없는 물자체, 신의 영역 그것을 있다는 증거는 바로 우리 속에 법을 지켜야 된다는 법에 대한 무조건적인 명령, 도덕법이라 했어요. 그 도덕법을 실천하는 그것. 그래서 칸트는 말하기를 법이 있어서 지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법이 있기 때문에 지키려는 마음이 생기는데 그것은 우리가 위반함으로써 법을 법 되게 한다. 우리가 법을 위반할 때 우리가 죄인 될 수밖에 없는 우리보다 더 뛰어난 물자체, 선한 그 자체가 어디엔가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의 위반을 통해서 확인해 줄 수 있다 이 말입니다.


광주강의에서 알 수 없는 그것을 헤겔은 절대이성으로 바꾸었죠. 절대이성을 뭐라 했습니까? 하나님이 육신이 된 이걸로 끝났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헤겔이 중요한 걸 하나 까먹은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인간이 됐다 하는데 성경에는, 하나님이 죄인 되었어요. 모든 사람은 죄인 되고 싶어요, 의인 되고 싶어요? 다른 말로 지옥 가고 싶어요, 천국 가고 싶어요? 천국 가려면 의인 돼야 되잖아요. 그러면 이 말은 모든 뭐냐? 인간은 자기가 의인되고 싶어 한다 말이죠. 헤겔이 그걸 다루질 못해요.


하나님이 사람 됐다고 하지만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죄인 되었죠. 이 말은 어느 인간도 자기 자신이 죄 짓고 있는 순간에도, 사형장에 끌려가면서도 자기 우수함과 그래도 자기한테 전적으로 죄인은 아니라고 우길만한 것을 끄집어내면서 그것을 표상, 내가 대상을 아름답게 보고, 의롭게 보게 되면 반사적으로 주체가 형성되잖아요. 이런 착한 것이 있다고 착한 것을 대상으로 세우는 순간 그 대상과 연결돼있는 나는 어떻게 됩니까? 사형장에 끌려가면서도 시대를 잘못 만나서 그런 거지 사실 나도 좋은 부모 만났으면 의인 될 뻔한 요소가 이미 나한테 있다고 하는 거예요.


사형장에 끌려가면서 전적으로 죄인은 아니라고 양무리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근호 목사는 전적으로 죄인이라 하는데 전적인 죄인은 아니다. 왜? 죄에 대해서 반성할 수 있는 의로움은 있으니까. 그게 바로 칸트가 이야기하는 겁니다. 또 헤겔도 이야기하는 거고. 그래서 그들은 하나의 철학이라고 보면 돼요. 철학은 성령을 받지 않고서는 그 자체가 죄인 줄 몰라요. 왜? 철학은 인간의 한계니까.


하나님이 죄인이 되었을 때 진짜 성도가 드는 기쁨은 이겁니다. 우리는 죄인 되고 싶지 않고 의인 되고 싶잖아요. 의인 되고 싶다는 것은, 내가 세상을 바라보면서 주체를 형성할 때 나를 죄인으로 만든 주체를 형성하는 게 아니고 나를 의인화시키는 그런 식으로 세상을 다시 꾸미게 되죠. 그렇다면 내가 되고 싶어 의인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죄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의 성육신 앞에서 우리는 문제될 것도 아닌 쓸데없는 것에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 들통 나는 겁니다.


하나님의 모든 뜻은 하나님이 어떻게 죄인 되어서 구원받는지 여기에 관심 있는데 우리는 의인 못 되어서 안달이니까 우린 엉뚱한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는 엉뚱한 생각을 하다보니까 엉뚱한 생각이 자기 뜻대로 안 되니까 거기서 고민과 불평이 생기고 반항이 생기는 겁니다.


“하나님이여, 갑자기 내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어쩌면 좋아요?” 그러면 하나님은 뭐랍니까? “나, 하나님이지만 죄인 되었거든.” 뭔가 소통이 안 되죠. 다시 말해서 네 아들 죽은 것이 그게 무슨 큰 문제냐 말입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는 우리가 주체가 아니고 진정한 주체는 누구밖에 없어요? 골로새서 1장 16절에. 세상의 모든 것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위하여 주님께서 친히 만드신 세상이잖아요. 그럼 세상의 대상이 되는 것은 주님께서 볼 때만 제대로 세상이 보이지 그 대상 중에 하나인 우리가 세상을 보는 것은, 우리가 반칙을 하고 있는 겁니다. 큰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자식이 열 명 있었는데 하룻밤에 열 명이 다 죽었습니다. 보통 문제 아니죠. 있는 재산 다 날리고. 그럴 때 욥이 뭐라고 했습니까? 주체가 나한테 얼마나 이익이냐, 세상은 나에게 어떤 이득을 줄 것이냐는 쪽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주체입니다.”라는 쪽으로 이야기하죠.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신 자도 하나님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 욥을 가지고 어디까지 접근하느냐 하면, 이제는 악마가 마지막 노리는 것, 악마가 쓸 수 있는 최후의 무기가 어떤 것이라는 것을 믿음 있는 욥을 이용해서 그 최후의 무기를 발각시킵니다. 그건 고난이죠. 십자가 고난이 욥기에서 튀어나옵니다. 마귀는 장담합니다. 어떤 인간도 고난에서 하나님께 다 대들 것이다. 인간마다 주체가 있기 때문에. 사람을 건드리면 결국 마지막 주체 근원을 건드리게 되겠죠. 주체 근원이 되는 그 자리는 이미 자기가 꽉 쥐고 있다고 자신만만합니다.


그래서 악마는 그걸로 하나님과 내기를 하죠. 욥이라 할지라도 넘어갑니다. 인간의 주체는 이미 내 손 안에 있나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악마의 대결은 무엇의 대결입니까? 과연 하나님이 직접 쥐고 있는 인간이 있느냐, 없느냐 그 내기겠죠. 악마는 뭐냐? 욥이라 할지라도 내가 쥐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악마가 쥐고 있지 못하는 존재가 있을 수 있다는 게 하나님 뜻이거든요.


하나님께서 그 내기에서 욥에게 찾아옴으로서 욥이 어떻게 합니까?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죠. 그 순간 욥의 주체는 어디서 찾습니까? 자기가 회개해야 될 그분이 주체고 욥은 주님이 하시는 일에 하나의 대상의 자리에 머물게 되는 겁니다. 그 자리에서만 욥은 친구를 위해서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기도를 드릴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욥에게 고난을 주신 것은 욥이 중요한 게 아니고 욥이 앉고 있는 방석, 그 자리에게 무엇이 유발되게 한다? 하나님의 뜻에 의하면 자리에서 올라오시는 분에 의해서 죄인도, 욥의 친구도 용서가 될 수 있다는 그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바로 악마까지 동원시키는 이게 바로 지혜입니다. 세상을 만든 지혜.


이건 너무 철학만하면 은혜 없다 싶어서 중간에 이야기한 것이고. 그런 이야기는 이 책에 안 나오고.


12페이지 끝에 보면, “차이란 그 자체로는 존립할 수 없고 늘 동일성의 그릇 안에 담겨서만 사유될 수 있다.” 지금 13페이지에 나오는 것은, 인간의 주체적인 의식의 입장에서 차이라는 것은 동일성 밖으로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규칙의 지배를 받는 차이가 되는 거예요. 어떤 차이가 와서 동일성 안으로 다시 원상복귀 되는 거리에서만 허용이 되는 차이. 동질한 질 가운데서 차이가 되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미리 해봅시다. 19페이지 중간에 보면, 플라톤 나오죠. 열째 줄에, “플라톤은 개별자들에 대해 오로지 유사한 것만이 서로 다르다.” 어렵죠? 그래서 풀이를 해놨어요. “즉 기준이 되는 유사성이나 동질성을 전제하고서만 차이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키 재기할 때 높이를 측정하는 요소라는 유사성에서만, “너는 더 크고, 너는 깔창 깔았네.” 이게 성립이 되죠. 오직 유사한 것만 그렇다는 말은, 같다, 다르다 할 때는 똑같은 성질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할 경우에만, “네가 좀 낫네. 네가 못하네.” 된다 말이죠. 그래서 어떤 경상도 사람이 하잖아요. “똑같네.” 그러면 이쪽에서는 “전혀 다르거든. 봐봐. 이 티셔츠는 강남에서 입을 때는 휘우욱하고 들어가지.” 딸기와 티셔츠는 성질이 다르기 때문에 차이 자체를 말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프루스트는 말하기를 19페이지 중간에, “오로지 차이들만이 서로 유사하다.”고 이야기한다. “즉 유사성은 차이의 전제가 아니라 차이의 산물이다.” 유사성이란 차이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는 겁니다. 딸기와 귤이 차이가 난다는 말은 차이가 없다는 거죠. 왜냐하면 둘 다 과일이기 때문에. 동질성을 의식하게 되면, 귤도 과일이고 딸기도 과일인데 모양이나 색깔이 다르다 할 때는 동질성을 전제로 할 때 비로소 차이를 이야기한다 이 말이죠.


그런데 들뢰즈나 프루스트나 현대 포스트구조주의에서는 그런 게 아니고 포크와 딸기, 과일이 아니고. 과일이란 과일은 없어요. 이것 하나로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가요. 과일이란 과일은 없습니다. 딸기 같은 것을 결과로 지칭할 때 과일이라 하는 거지, 사람은 없어요. 아무개는 있지, 이름은 있지만 사람은 없듯이 같은 유사성으로 하나로 뭉쳐서 추상적인 새로운 개념을 띠울 때 과일이라 하는 겁니다.


그래서 포크와 귤과의 차이점은, 동질성이 있는 데서는 묻지를 않지요. 포크와 과일과의 차이는 묻지요. 과일은 먹는 것이고 포크는 찍는 것이다. 하나는 기계과 하나는 자연물이고 해서 차이나지만 포크와 귤과의 차이점은? 이렇게 물을 수 없지요. 왜? 같은 유사성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게 진정한 차이다. 차이란 그런 차이를 두고 해야 진정한 차이가 아니냐가 들뢰즈의 사상이란 말이죠.


그 차이들을 하나로 새롭게 해보자. 왜? 지금까지 기호나 언어라 하는 것은 같은 것끼리 모여서, 아까 인간 주체의 제국주의화, 일방적인 독재화를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그런 식으로 그걸 증명해주는 도구로써, 매개체로서 기호라는 게 있었다 이 말입니다. 그러나 기호는 그렇게 해서는 인간의 기호분석에서 스스로 옳지 않다고 보는 겁니다.


다시 13페이지 봅시다. 밑에서 일곱 번째 줄에, “다시 현재화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표상활동인데 현재화한다는 것은 후설의 현상학인데, “그 의미는 시간 의식에 대한 후설의 분석 속에서 찾아진다. 후설의 시간성 분석은 지향적 대상과 관계하는 의식의 지향적 활동의 시간성에 관한 분석이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요. “가령 내가 어떤 멜로디를 듣고 있을 때 그 멜로디를 시간성 속에서 지향하는 의식의 활동은 어떻게 가능한가?”


멜로디가 ‘도미솔~’ 할 때 ‘미’할 때 ‘도’는 끝났지요. ‘솔’할 때 ‘도미’는 없어졌지요. 하지만 ‘도미솔’할 때 그걸 듣고 있는 인간은 ‘도미솔’ 음 자체를 보는 게 아니고 ‘도미솔’을 통해서 시간화를 시켜버리면 인간의 시간 속에 ‘도미솔’이 같이 엮여있으면서 그게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거예요. ‘솔’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고 ‘솔’은 전에 있던 ‘도미’가 있었기 때문에 소리의 아름다움으로 등장한다 이 말입니다.


그렇게 구축할 때 인간의 의식이라 하는 것은 결국의 시간성을 가지고 의식을 풀이해야 되지 시간성을 빼놓고 인간이 어떻게 하나하나의 모든 사건과 변화되는 것을 시간이 어떻게 포착하는가? 이걸 놓쳐버리면 이 세상에 대해서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이 훗설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도미솔~’ 하고 이야기 끝나버렸는데 사람들은 말하기를 방금 아름다운 소리가 들렸어요. 소리는 없어졌는데. 뭐 속에 있다? 인간의 기억 속에. 그 기억도 인간의 시간성 속에 이미 ‘도미솔’이 기억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세상을 볼 때 하나의 독재적인, 제국주의적인 방식, 어떤 새가 노래한다. 물어보세요. 새가 노래하는지. 새가, “나는 가수다” 이럽니까? 지가 노래한 걸 들었어요. 전에 노래는 저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게 먼저 있었기 때문에 새가 노래하니까 일방적으로 허도 없이⋯⋯


그래서 14페이지 중간에 보면, “이 살아있는 현전, 절대적 의식은 자기 스스로를 시간화하는 의식” 속에서 자기 스스로를 시간화시키죠. 그러면 이것은 자신을 현재 주인공으로 만들죠. 그걸 두 자로 ‘역사’라 하죠. 그래서 역사는 조작된 거죠. 누구의 유익을 위해서? 자기의 자존심을 위해서. 과장되고. 그런데 개혁주의는 역사를 주장하죠. 왜? 개혁주의 자신의 신학의 정당성을 위해서. 그래서 제가 위선이라 했죠.


15페이지에 “자기와 다른 전적인 외재적 대상으로부터의 촉발, 곧 이질적인 것으로부터의 촉발이 아니라 스스로부터의 촉발, 즉 촉발이다.” 현재의 자기의식, 그걸 ‘근원 인상’이라 했는데 어려운 용어는 외울 필요 없어요. 후설은 말하기를 세상의 모든 것은 지금 내가 여기 있는 나로부터 촉발된, 야기된 그런 식으로 의식이 시간성을 구성해버리면 그 시간구성에 의해서 세상은 자기 앞에서 재구성이 되겠죠. 그걸 표현 또 표상이라 한단 말이죠. 그걸 기호라 하고.


누가 욕을 해도 기분 나쁘다는 말은 뭡니까? 상대방이 욕을 해서 기분 나쁜 게 아니고 그걸 욕으로 알아듣는 본인이 촉발돼서 “욕 맞지? 욕 맞는 것 같아. 이상하게 기분이 더러워. 너 욕했지?”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이게 바로 동일성의 시간성 또는 동일성의 획득이라는 겁니다. “대상의 객관화”라고 15페이지 여섯 번째 줄에 돼있죠. “시간의 의식 속에서 비로소 대상의 동일화가 획득”된다. 지난 시간을 보유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자기됨을 나란 주체로서 활동해도 되는 독재적인 권한이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세상 모든 것을 그런 식으로 표상을 한다.


그게 바로 들뢰즈가 공격하는 차이를 놓치고 있는 기존의 철학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 철학을 엎어야 된다. 그 동질성 철학 때문에 이 세상은 전쟁과 다툼과 그리고 중요한 유사성과 동질성에 편입하지 못한 것들을 이유 없이 미워하고 멸시하는 비윤리적 세상이 된다 이 말입니다.


-기호라는 것은, 내가 호감을 갖는 그 자체를 말하는 것 맞죠?


아닙니다. 그 기호 말하는 게 아니고 문자로서 기호입니다.


17페이지에 보면, 위에서 여섯 번째 줄에, 이걸 가지고, “자기 자신과 벌이는 고독한 축제, 자기 자신을 스스로 감동시키는 일, 곧 수음행위에 불과하다.” 자위행위다 이 말이죠.


그런데 비표상적 사유란 무슨 뜻이냐 하면, 여기 잘 설명했어요. 17페이지 밑에서 세 번째 줄에, “주관에 능력을 통해서 결코 표상될 수 없는 것과의 만남에 의해서 사유는 시작된다.” 그래서 거기서 나온 것이 기호다. 이것이 들뢰즈의 사상입니다.


내가 아는 것들만, 나한테 이익이 되는 것들만 내가 대상을 그런 식으로 일방적으로 뽑아 챙기는 식, 꽃다발에 꽃 모으듯이 나한테 유리한 것만 모아서 그것으로 표상한 것이 아니고 그러한 촉발이 오게 된 것은, 내가 어떻게 감당 못할 그리고 예측하지 못하고, 낯설기 짝이 없고, 기대치 않은 어떤 사건이 외부에서 촉발이 되어서 내가 거기서 방어하고, 내 자산을 수호하고자 하는 그런 새로운 사건이 덩달아 동반해서 일어나서 우리는 동질성을 주장하는 게 아닌지 생각해보란 말이죠.


가만있는 나를 누가 건드릴 때 “충성” 이건 방금 제대한 사람이거든요. 가만있으면 그런 짓 안 하는데. 제대한지 얼마 안 된 사람이 술 먹고 폭행죄로 파출소에서 끌려와서 순경들 지나가니까 “충성” 그게 cctv에 찍혀서 다 나왔어요.


17페이지 밑에서부터 18페이지 넘어가는데 “‘나’란 한낱 임의적으로 설정된 전제이며, 사유란 어떤 주체적 지반도 가지지 않는 익명적인 것이다.” 그래서 나라는 것은 출발점으로 삼지 말고 결과물로 보자 이 말입니다. “그리하여 코기토(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의 그 코키토)란 근원적인 지반이 아니라 한낱 익명적 사유의 활동을 통해” 그러니까 어떤 것을 설명하자 하니까 근거가 있어야 하니까 차후적으로 하나 전제로 깔아놓는 게 나라는 거죠. 이걸 “수동적 발생”이다.


나보다 나의 외부가 있는데 그렇게 해서 표상될 수 없는 이것은, 내가 애초부터 표상할 자격도 없고, 파생될 수 없는 낯선 그것을 들뢰즈는 ‘기호’라고 이야기해요. 매개체 표상 그러니까 외부가 나한테 다가올 때 기호라는 매개, 문자라는 매개로 다가와서 세상을 차이라는 것이, 네가 생각한 동질성 작업보다 더 넓은 범위가 바로 네 외부에 있는 차이성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매개체가 기호라는 겁니다. 다른 말로 쉽게 말해서 성경문자 하나하나라는 거죠. 성경문자뿐만 아니고 소설 등 모든 게 그렇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작가가 소설을 쓰면 그 소설은 작가의 것입니까? 작가의 것도 아니고 독자의 것도 아니고 소설 그 자체의 것이죠. 소설이라는 엉뚱한 것이 하나 등장한 것이죠. 작가가 자기소설을 자기가 설명하면 소설이 가만두지 않습니다. 내가 촉발해서 만들어놓은 소설을 네가 쓴 것처럼 착각하느냐? 너는 수동적 발생에 불과한데. 이런 것이 상당히 전위적이죠. 뭔가 전복되는 겁니다. 조개 말고 완전히 뒤엎는 전복.


보통 부모가 자식을 낳았다 하잖아요. 자식 입장에서는, “내가 있기 위해서 두 분이 계셨습니다.” 그러면 저녁 없지, 뭐. “가서 공부해.”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 두 분이 아니시면 어떻게 내 몸이 있을까요? 그게 진짜 부모를 높이는 것 같지만 가만히 보면 기분 더럽죠. 진짜 자식 같으면, “어머니 날 낳으시고” 소리 하지 말고 가만있어야 돼요.


이미 나라는 주체를 상정할 때 이미 부모는 나를 위한 종속된 개념들의 기호에 불과한 거예요. 내가 주인이 되고 내가 있기 위해서 여러분이 있었다는 것밖에 안 된다고. 아무리 뒤늦게 눈치 채고 효도해도 소용없어요. 그래서 어떤 동물처럼 자식 나면 피해야 돼요. 자식이 부모를 잡아먹을 수 있기 때문에.


18페이지 위에서 열 번째 줄에, “세계란 동일한 표상 활동을 통해 동일적인 것의 형식 속에서 체계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표상 활동이 어떻게도 동일성 속에 종속시킬 수 없는 파편적인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동일성 속에 종속될 수 없는 차이 나는 것들의 조각들이 동질성이라고 말해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들뢰즈가 말한 것이, “존재자들 사이의 차이란 상위의 동질성을 전제하는 ‘개념적 차이’가 아니라 어떤 상위의 개념도 전제하지 않는 ‘차이자체’가 아닌가?” ‘차이 자체’ 이게 이 강의에 제일 어려운 말이에요.


차이가 아니고 차이자체 이 말이 뭐냐 하면, 여기 귤 있고, 포도 있고, 딸기 있단 말이죠. 이걸 과일들이라 하지 말고 그냥 포도와 딸기와 귤과 차이 난다고 하지도 말고, 차이가 포도와 귤과 딸기를 만들어냈다고 봐라. 차이자체를 드러내기 위해서 포도는 포도란 동일성, 귤은 귤이란 동일성, 딸기는 딸기란 동일성이 이 땅에 등장했다. 동일성이 등장한 것으로 봐서 차이가 가장 근원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 들뢰즈의 철학입니다.


이 말은 결국 어떤 윤리를 말하는데 있어서 아까 집사님이 말하는 그대로 애가 립스틱 바르고 학교에 오나, 파마를 하고 오나 그런 것으로 기성세대가 동일한 교복에 동일한 머리카락과 동일한 단발머리 그런 인식으로 그것을 억압하지 말자는 거예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남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차이 그 자체가 차이지기 위해서 우리는 서로 달라야 된다는 그 자체를 인정하자는 거예요. 그래서 집사님 말이 이쪽에서는 맞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기성세대가 케이팝 따라 부르란 말이 아니고 그러면 기성세대를 또 누가 동질성에 복종시킵니까? 자기 세대가. 그러지 말고 차이진다는 자체를 존중하자 이 말이죠.


어떤 사람은 동성연애하고, 어떤 사람은 이성연애를 하는데 그러니까 남자, 여자가 서로 다른 성이 사람끼리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하느냐?”라고 그걸 미워하지 말자는 거예요. 왜? 그들을 미워하지 말고 인정해줘야만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고,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이것도 그들로부터 인정받을 수가 있다 이 말이죠. 오히려 차이의 다양함과 풍성함을 통해서 세상이 이 정도로 살만한 세상인 것을 더 큰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들뢰즈의 주장입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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