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22강 / 마 10:21~33 (환경속의 인간) / 111124 본문
마태복음22강 / 111124
녹취:공은주 대전111124b-마10:21~33(환경속의 인간) 22강-이 근호 목사
마태복음10:21~33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마태복음10장21절부터 하겠습니다.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리 돼 있지요. 우리가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되느냐? 물으시면, 내 쪽에서 바로 말씀으로 가면 안 돼요. 다시한번 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 우리가 있잖아요. 우리가 말씀을 지킬 능력이 있으면 바로 가도 되는데, 우리는 반드시 말씀 앞에서 뭐 해야 한다 했어요? 회개를 해야 돼요. 왜냐하면, 우리라는 것은 우리만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구와 함께 있느냐 하면 환경과 함께 있어요. 환경. 환경이 있으니까. 다른 말로 하면, 삶의 구조라 하는 겁니다. 우리는 이 구조의 일부로서 평소에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평소에 움직일 때는 환경 때문이고, 구조 때문이고, 나는 나다. 라고 하는 주체를 만들고 오해를 하는 거예요. 그 자식이 잘못 됐을 때 ‘호적 파 가라!‘ ’넌 내 자식 아니다.’ 그렇게 하지만 구조 속으로 들어가면 결국은 합의금 누가 냅니까? 자기 엄마가 내잖아요. 엄마, 아빠가 내잖아요. 이것은 아무리 내 맘에 안 들어도 다져진 환경을 우리가 부정할 수 없다 이말 입니다. 부정할 수 없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교회 나오는 것도 안 바쁘면 교회 나오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주로 있는 환경은 교회가 아니고 내 나름대로 환경을 따로 이미 갖추어져 있고 그 엮여진 관계를 내가 그거 다 잘라 버리고 교회 후딱 갈수 없다 이말 입니다. 다시한번 해 봅시다.
인간의 몸이라 하는 것은 그냥 있는 것 같지만 중간에 뭐가 있습니까? 주변에 환경이라는 게 있습니다. 환경. 상황. 환경과 더불어 몸이 있으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는 자신이 몸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인간은 이걸 자유가 있다. 자율적이다 이렇게 말 하는데 자기는 자율적이 아니 예요. 지는 환경이 시키는 대로 굴복하면서 그 때 그 때 모면하면서 또는 적응하면서 눈치 보면서 남의 안면 안 받치는 입장에서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환경을 무시하고 그리하면 안 된다 그 말 이지요. 어떤 행동을 할 때 ‘아! 나는 귀한 집 자식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함부로 오줌 누면 안 되지.‘ 이게 어릴 때 교육환경이 다 있잖아요. 그래서 나라는 것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환경 속에 ’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것을 다 아시거든요. 니가 있는 환경에서 만약에 성령이 너희 속에 들어가 버리면 너는 다른 사람과 마주친다고 생각하지 말고 니가 그 전에 몸담았던 환경과 대적하고 환경과 싸우고 환경과 부딪친다고 생각하라 하신 말씀이 아까 읽었던 말씀 이예요.
아비가 자식과 싸우고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고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돼 있고, 이게 뭐냐 하면, 이러한 가정불화 가정에 피 티기는 이런 투쟁이 생긴 이 요인이 어디 있다고 합니까? 20절에 보면,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고 너희 속에 뭐가 있다? 성령이 함께 있다. 함께 있으면 이러한 환경 자체가 성령은 내 몸에 성령이 오는 것이 아니고 성령 나름대로의 새로운 환경을 몰고 와요.
그러면 나와 니의 싸움이 아니고 성령이 속한 환경과 기존에 내가 몸담고 있던 환경과의 치열한 싸움이 벌어진다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그런 환경이 눈에 안 들어오고 뭐만 들어옵니까? 평소에 내가 했던 버릇. 내가 여기서 유리할까? 불리할까? 그것만 생각하게 되지요. 사실은 내가 유리하다 불리하다 생각하는 것도 이거는 내 생각이고 기존에 몸담았던 환경에서 우리는 그렇게 교육 받아왔죠.
‘니는 니 몸하나 다 챙기면 다 된데이.’ ‘세상이 어떻게 되던, 나라가 어떻게 되든 걱정하지 말고 니만 이익되면 되는기야.’ 나라가 어떻게 되든 간에 내가 투자한 돈만 이윤이 높아져 받아내면 내 배만 채우면 나라가 어떻게 되든 관계없이 된다. 이말 이지요.
옛날 유럽에서 식민지전쟁 할 때 인도의 운명 눈에 들어오지도 않아요. 프랑스에선 베트남 같은 경우에 네덜란드나 미국 같은 경우는 필리핀 다 식민지전쟁 했잖아요. 보아전쟁이 뭔지 알아요? 네덜란드 사람이 먼저 아프리카 갔는데 나중에 하다 보니까 금광 다이아몬드가 발견된 거예요. 그걸 늦게 본 미국, 영국이 와서 미리 온 네덜란드 사람과 싸움하는 것을 가지고 보아전쟁이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돈 앞에는 진짜 형제건 눈에 보이는 게 없어요. 사람의 본색이라 하는 것은 돈과 죽음과 관련되어 있거든요. 돈 없으면 죽으니까. 죽음의 직전에 들어서면 본색 다 나옵니다. 그 본색이 뭐냐 지가 평소에 지가 살아왔던 환경이 아울러 같이 나온다는 것. ’나, 이런 환경에서 살아왔어.‘ 자기 본때를 다 보이는 겁니다.
요사이 애 들이 학생들이 욕을 많이 한다잖아요. 그러면 그 가정에서 그렇게 된 거예요. 그래서 진짜 좋은 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화가 났을 때도 욕이 안 나와요. 왜 자기 집에서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환경 있어요. 들어 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이럴 땐 어떻게 표현하지? 욕이 안 나온다니까요. (욕을 한 번 하면 속이 후련하잖아요.) 그런데 그거는 만화책에서 봤던지...욕은 그냥 하면 안 후련하고요. 주고받을 때 후련하지요. 그래서 술 먹을 때 많이 하잖아요. 그 땐 용납이 되니까. 그 환경자체가. 환경이 자기 환경에 딱 맞으면 욕이 나와요. 자기한테 맞는 환경 속에 있을 때는 친숙해져요. 굉장히 친숙해져요.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은 누구와 함께 있느냐 하면 예수님을 모시는 예수님 중심으로 환경이 오게 되면 주변에 있는 귀신의 환경이 가만 두질 않고 핍박하게 되니까 부모와 자식 간, 자식과 부모 간 싸우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23절에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이 말은 내가 의도적으로 내가 너희를 구원하기 위해서 조성한 환경이다 이말 입니다. 할 때 너희들이 그 환경을 너무 탓하지 말고 이상스럽게 여기지 말고 필연적이다. 란 말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믿는 자들이 반드시 그러한 수모를 당하게 되는 필연적 절차라고 보면 됩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우리가 정리할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 나라가 뭐냐? 하는 겁니다. 더 알기 쉽게 말하면, 하나님나라와 세상나라가 연결될 때 연결고리가 어떤 모습이냐 하는 겁니다. 방금 나왔죠. 진짜 하나님나라가 지상에 임하게 되면 임한 자리에는 어떤 , 모습이냐 하면 핍박, 도피, 미움, 죽음 요런 모습으로 하늘나라와 그 지역과 비로소 제대로 연결되었구나! 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너는 세상에서 미움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미움 받는 그것이 하늘나라가 속했다는 증거란 말입니다. 왜 하늘나라 환경이 왔기 때문에. 그렇다면 세상의 환경은 부합될 수 없는 서로 충돌하는 이질적인 완전히 질이 다르죠. 그렇다면 이 세상은 심판의 대상이고, 멸망될 대상이다. 라는 것을 너희를 통해서 증명 된다. 이말 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피조물들을 그냥 가만두지 않고 철저하게 이용을 해요. 우리를 그냥 미끼로 사용해 가지고 그러니까 세상은 멸망해도 싸지! 하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표내기 위해서 가여운 우리를 가지고 앞으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 다음에 봅시다.
24절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이 말은 너희들은 나한테 나는 너희에게 선생이고, 나의 학생이니까 나의 종이니까 종은 종의 법이라 하는 것은 선생님의 범위 안에 있는 걸로 고만 됐다 더 이상 욕심내지 말라 이말 입니다.
선생이 만들어준 환경이 곧 구원의 환경이고 그것이 천국이니, 그 안에서 선생님이 당했던 것을 같이 당하면 영광인줄 알아라. 이것들아! 하는 그런 이야기예요. 이이고~ 영광스러워라~~ 우리가 주님 당하신 고난을 함께 당하다니 세상에 이런 복이 어디 있느냐? 그렇게 생각하란 말입니다. 그 이야기가 사도바울이야기에도 나오죠. 내가 달려갈 길을 다 달렸으니까 생명의 면류관 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생명의 면류관 줬으니까 달려가라 이말 입니다. 달렸으니까 받는 것이 아니고, 이미 받아 챙겼으니까 받아 달릴 수밖에 없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은혜를 되갚아 주면 그건 은혜가 아니 예요.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받으면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이런 식으로 나와야 돼요. 반응이. ‘은혜를 받았으니까 나도 은혜를 갚아 줘야지.’ 이것은 지금 장사하고 흥정하자는 거예요. 주님하고. 이건 은혜 받은 게 아니고, 세상의 사랑관계를 그냥 은혜라고 쳐준 건데, 진짜 은혜 받은 사람은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이렇게 되지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또는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이렇게 나오지요.
받았으니 나도 한번 보세요, 나도 받은 거 갚아 드리겠습니다. ‘누가 니하고 사업하나? 지금.‘ 장기 둡니까? ’족합니다. 이렇게 고생해도 이렇게 굶어죽어도 족합니다.‘ 이렇게 돼야지 ’거지가 되어 죽더라도 예수님의 증인된 것 만 해도 황공무지로소이다.‘ ’저 같은 주제에 무슨 예수의 증인 되겠습니까? 야, 말도 안 되는 혜택에 받았으니 이는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뭐가 되던 감사합니다.’ 이렇게 범사에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이게 은혜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은혜 받아 놓고 돈 안내고 이것들!‘ 이런 거 없어요. 교회에서 하는 소리입니다. ’은혜 받아 놓고 입 닦고 말이야.‘ 어떻게 집사에서 장로로 은혜 받아 놓고 돈도 안 내고. 작정헌금도 안 내고. 도둑놈 심보다 하고 말이죠. 그렇게 은혜 받아 놓고 십일조를 안 내.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은혜 받았으면 ’죄인입니다.‘ 해야지 은혜 받아 놓고 십일조내면 이건 개평이지. 돈 많이 땄으니까 내놔라 하는 식입니다. 고스톱 칠 때 나오는 이야기. 주님하고 우리하고 고스톱 칩니까? 지금. 받아 쳐 먹었으면 십분의 일 좀 내야지. 이거 지금 개평 뜯는 것도 아니고 뭐예요. ‘주여, 뭐든지 난 죄입니다.’ 이리 나와야 됩니다.
10장 25절 “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이 말은 너희와 나는 같은 집에 산다는 뜻이 예요. 영광인줄 알아라, 이말 입니다. 주인이 욕 얻어 먹거던 반드시 나도 욕 얻어먹을 때가 됐는데 하고 각오를 생각을 그렇게 먹어라 그 말 입니다. 예수님은 욕 얻어먹는데 지는 욕 안 먹는다. 이건 뭔가 하숙 치던지 자취하던지 같은 식구라는 것이 곤란하다 말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주님은 환경을 노리는데 마치 우리는 예수님이 나보고 시킨 줄 알고 우리는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 환경보고 이야기하는데 직접 나보고 이야기하는 줄 알고 있어요. 주님은 우리보고 이야기 안 합니다. 우리란 자체가 우리가 우리를 만든 환경자체가 썩었기 때문에 나도 같이 썩었죠. 환경 따로 내 따로가 아니거든요. 우리는 우리가 일상 배우고 태어나고 한 모든 것이 그 주변 환경, 집안환경에서 그렇게 배워 와서 내 속에 들은 것도 주변 환경에서 그렇게 한 겁니다.
잘 난체 하는 것도 잘난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잘 난체 하는 거죠. 못 사는 집안에서 갑자기 떼부자 돼도 그 버릇이 나와요. 항상 지지리궁상 이래요. 태어날 때 벌써 그게 몸에 베어가지고. 아끼는 것이. 그런데 좀 살던 집안에 태어난 사람은 없어도 기가 얼마나 센지. 이건 손이 큰지.ㅎㅎ
26절 환경 나옵니다. 26절 봅시다.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이 말은 꼭꼭 숨어라가 안 되는 이유가 아예 주님께서 숨어있는 자체를 이미 발각시켜 놨기 때문에 숨는다는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창3장에 보면 하나님이 뭐라 합니까? ‘아담아, 어디 있느냐?’ 하지요. 이미 알고 계시고 찾아오신 거예요. 그 전체를 알고 계시고 온다고요.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무화과나무로 팬티를 만들어 입고 있으니 가관이죠. 그걸 왜 입느냐 말이죠. 정상이 아니라서 입었어요. 정상이 아니란걸 알죠. 이미 치마를 입었다는 것은 창조할 때 그 모습이 아니지요. 본인도 정상이 아닌 거예요. 그래서 그걸 벗겨 버린 것이 아니고 가죽옷을 입혔다 하는 말은 가죽옷 안에서 인간은 영원히 정상이 아닌 것으로 자각하라 스스로 인정하라 이말 입니다.
‘주여, 정상이 아닌 인간에게 가죽옷을 입혀 놔서 감사합니다.’ ‘인간도 아닌 것에 십자가 피를 주셔서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죄인입니다.’ 하는 것을 늘 고백하란 말입니다. 환경문제입니다. 환경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정상이고 싶어도 정상인이 될 수 없어요. 내가 소속되어 있는 환경이 정상이 아닌데 어떻게 내가 정상일 수 있습니까?
썩었는데 정상인 사람은 한 사람 밖에 없어요. 누구 밖에 없습니까? 예수님 밖에 없지요. 예수님만이 죄 있는 세상에 와서 죄 없이 살았잖아요. 예수님만 그렇고 나머지는 다 죽어야 된다. 이 말은 세상이 악하면 세상의 일부가 되기 때문에 덩달아 안 악할 수가 없어요. 우리는 그냥 가만히 있어도 악해요. 부모의 죄 중에 태어난 거예요. 그냥. 그걸 새삼스럽게 죄 지었다는 말은 말이 안 되지요. 가만히 있어도, 도 닦아도 죄예요. 흉볼 것도 없어요. 그 사람이 나쁜 짓 하는 것도 그런 환경이 됐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어떤 사람은 지가 착한 줄 아는데 지가 성령을 받아 착한 줄 아는데 사람이 세밀하게 아주 감수성 있게 하면 보세요. 만약에 자기가 바빠서 앞에 여자 운전하는데 차선위반해서 앞서서 먼저 갔다 해 봅시다. 진짜 마음이 여린 사람은 두고두고 그 죄책감을 견딜 수가 없어요. 진짜 여린 사람. 우리 가운데 이런 사람 없지만. 진짜 그런 사람. ‘왜 내가 그랬지. 왜 남을 무시 했나?’ 성경에 교만하지 말라 했는데 내가 또 교만했구나! 이거는 양심에 어떻게 할 수 없어요.
그런데 그렇게 깨끗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그런 적 없었습니까? 경찰 없을 때 과속 80Km인데 85Km 안 나왔습니까? 그래 놓고 자기는 뭐라 의의 종이라고? 참~~ 아파트 아래쪽에 사는데 위에서 지는 발걸음을 함부로 굴린 적 없습니까? 아래쪽 사람이 만약 신경이 약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의자 옮겨서 죽을 수 있는데. 시끄러워서. 자기는 성령 받아 착하데. 성령 받아 행함을 갖고 있데요. 왜 이걸 무시 하냐 이거예요. 그래서 제가 글을 썼잖아요. 내 행함을 착한 행함을 안 알아주는 그 천국에는 그 사람 못 간다 이 말이죠. 왜? 자기한테 주목을 안 하니까. 다 예수님한테 주목이 가 있으니까. 그러면 목사가 외칠 게 뭡니까? ‘우리는 예수님만 주목 합시다!’ 그 이야기만 할 수 밖에 없거든요. 예수님만 주목한다 해 가지고 수십 년간 그 이야기만 했다는 게 자기는 듣기 싫다는 거예요. 다시 정리합니다.
지 탓하지 마세요. 우리는 환경의 자식 이예요. DNA는 우리 아버지, 엄마 DNA고 어쩔 수 없는 겁니다. 세포 분열하면서 반쪽씩 나눠 합쳐서 하나의 성질을 이룬 겁니다. 생리적으로.
사람이라 하는 것은 환경 속에서 자기가 으뜸이 되고 의인이 되려고 하니까 환경을 공격해 버리면 자기가 피할 곳이 없잖아요. 이게 듣기 싫은 거예요. 환경 나빠도 나는 착했다 이 이야기 좀 해 달라는 거예요. 이런 환경 속에서도 나는 고귀하게 성스럽게 구원을 유지했다 그것 좀 붙여 달라는 거예요.
주님께서 이 환경을 통째로 우리보고 죄인이라고 할 때 ‘우리는 주님께서 나 뿐만 아니고 내가 만들어진 환경까지 악하다고 생각하는구나!’ 라고 아는 그 사람이 성도입니다. 만약 환경이 잘못돼서 내가 잘못 됐다면, 자기행위에 더 이상 기대 안 해요. 이 행동 해 봐야 이 행동을 유발되게 될 때까지 그 절차 속에 어떤 아픈 것들이 섞여있는가를 내가 알 수가 없잖아요.
지금 내가 이걸 마셨잖아요. 녹차 재배한 사람이 통일교라면, 여호와증인이라면, 내가 녹차사서 먹는다. 라는 말은 여호와증인에게 돈이 들어갔단 말이고 그 돈 가지고 하나님영광 가릴게 뻔한데. 나는 결국은 본의 아니게 하나님영광 가리는 일에 협조한 셈이 된다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우리는 환경의 자식 이예요. 환경이 이러니까 나도 이럴 수밖에 없다. 라고 인정하는 사람이 성도라니까요.
이게 어려운 게 왜냐하면 구원을 할 때 나쁜 환경이 있는데 주님께서 우리보고 이야기해서 나오라 말한 것이 아니고 ‘니가 속한 환경 전체가 악하니까 너도 죄인이야!’ 이런 식으로 얘기한다 말이죠. 이런 식으로 성령을 통해서 이해한 사람은 나올 때 혼자 있겠다고 나오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면 내가 전에 환경 속에 있던 것처럼 내게 주어질 새로운 환경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면서 나오면 이 사람은 ‘예수안’ ‘십자가안’을 그렇게 좋아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나는 주님 안에 있다. 나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안’에 있다는 거예요. 그걸 오히려 기쁘게 생각하죠. 여기서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젠 주님의 종이다. 라는 것을 기뻐한단 말이죠. 그런데 평소에 있을 때 주님이 나한테 이야기 했다하는 이 사람은 나와서 혼자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이라, 이제는 나 혼자 살수 있다는 거예요. 환경이고 뭐고 나 혼자 ‘나 있음’에 만족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환경을 치니까 듣기 싫다고 사람들이 얼마나 인상을 그리는지 몰라요. 떠나 버리고. ‘당신은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당신은 악하게 됩니다.’ 말은 그 사람에게 뭘 의미 합니까? ‘당신은 아무리 착한일 해도 착해질 수 없는 불가능한 죄인입니다.’ 라는 것을 한꺼번에 소개한 셈이 되기 때문에 그 사람한테는 스스로 착하려고 설친 사람한테는 절망감을 안겨 주죠.
‘OO이 너는 죄인이기 때문에 어디에 가도 미국이든 오스트리아가든 너는 죄인이야.’ 왜 같은 세상의 환경이니까. 이게 절망적인가요? 아니라 했으면 참 좋겠어요. 이게 절망이 아니고 ‘아! 그동안 나는 나만 생각했지. 내 환경이 나쁘단 생각은 못 했구나!‘ 나는 어떻게든 내가 착하면 착해질 수 있겠다는 말 자체가 성사가 안 된다니까요. 사람이 아무리 돈 있을 때는 의지를 보여도 돈 없을 때는 완전히 짐승 돼 버립니다. 그러니까 환경자체가 그 사람을 그런 식으로 굴욕적이고 저질로 만들어 버려요.
옛날 젊었을 때 창녀 했던 사람들의 인터뷰를 들어 보세요. 미장원 기술 가르치고, 공장소개 해 줘도 안 다닙니다. 도로 튀어 나와요. 도로 사창가 옵니다. 왜 그러느냐 창녀 짓이 노동에 비해서 돈이 많이 들어와요. 그 사람들이 처음에는 양심에 가책이 있지만 지금 문제는 내가 살아야 된다는 것이 급선무 되어 버리면 적게 일하고 돈은 많이 하면 그 희한한 직업을 왜 미쳤다고 버립니까? 양말 공장가서 포장해 봐야 얼마 받습니까? 여자는 하루일당 50,000원 주면 많이 줘요, 남자는 60,000원 80,000원 주지만 여자는 그것밖에 안 주잖아요. 그거 해가지고 손님 둘만 받으면 될 문제를 그거 해 가지고 퇴근해서 집에 들어오면 파김치 되어 아무 일도 못 하고. 그거는 살아도 사는 게 아니 예요. 약 먹고 자살하는 게 낫지. 그 환경이 사는 게 아니고 죽는 거지. 그 꼴을 왜 하느냐 그 말입니다.
그 다음에 환경을 염두에 두세요. 28절에 봅시다. “몸은 죽여도” 사람은 환경 속에서 못 빠져 나온다 이야기 했고, 숨어있어도 숨지를 못한다. 왜 주님께서 뭘 보기 때문에? 환경자체를 보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그랬어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무슨 말입니까? 사람이 뭘 보고 겁내게 되어 있어요? 자기 따로 환경 따로 이리 하니 겁나지요. 자기 따로 있고 환경 따로 있는데 환경에서 어떤 사람이 나를 죽이려 한다. 내가 살려면 어떻게 대치하여야 하는가? 사실 그 환경이 지 환경이고 똑같은 환경인데 독자적으로 자기를 따로 생각해 가지고 어떻게 내가 살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뭐가 생깁니까?
저 사람은 어떻게 되든 나만 살아야 되겠다는 두려움이 생기겠지요? 이미 죽었는데 새삼스럽게 안 죽었다고 생각하니까 두려움이 자꾸 생기는 거예요. 이미 죽었는데 우리가. 이미 죽은 우리를 새로운 환경 주님이 와서 매일같이 살려주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살려주는 환경을 안다면, 우리를 죽이는 환경은 겁나지 않지요.
나사로 오빠가 죽었을 때 마리아, 마르다가 실망했잖아요. 그 때 예수님이 뭐라 했습니까?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이걸 니가 믿느냐? 다른 말로 하면 이런 환경이 들이닥친 것을 니가 믿느냐? 이말 입니다. 니가 열심히 믿으나, 2시간 믿으나, 3시간 믿으나, 그게 아니고 지금 믿음 자체가 환경으로 온다니까요.
아, 이해하셔야 되는데. 믿음 자체가 박스로 온다니까요. 우리는 박스안에 들어있고. 그러면 그 안에서 그 안에 들어있는 자체가 뭐냐 하면, 믿음이고, 영생이고, 부활이고, 생명이다 이말 입니다. 자체가. 박스안에서 이미 살았다 이말 이죠. 그러니까 오빠가 지금 죽었습니까? 살았습니까? 죽었는데 살았다 이말 입니다. 죽은 거 맞아요. 그런데 사는 거예요. 못 믿는 거예요. 어떻게 죽었는데 살았느냐? 기존 환경으로 봐선 죽은 거죠. 그런데 예수님환경에서는 지금 살아있어요. 예수님과 함께 있는 거예요.
못 믿으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무덤 열어라 해 놓고 불러내니까 죽은 지 나흘 만에 나와서 고생하고 몇 년 살았잖아요. 사나 죽으나 우리는 누구의 것이다? 주의 것이다. 란 말을 내가 단독적으로 굳세게, 굳세게 믿으란 말이 아니고, 사람이 굳세 봐야 지가 아침에 꿈에도 굳셉니까? 딴 짓하다 보면 다 잊어버리는데. 굳세게 야무지게 악착같이 믿어라 이 말이 아니고, 결심 결심이 아니고, 독자적이고, 단독적인 것은 소용없는 것이고, 환경이 그런 환경 속에 이미 들어와 버린 겁니다. 용서란 환경. 부활하는 환경, 생명의 환경, 나보다 더 넓은 분은 예수님이고, 나는 그 넓은 예수님 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얼마나 쉽습니까? 정말 간단하지요. 여기에 무슨 행함이 없지요. 무슨 행함이 있습니까? 박스채로 들어와 있는데. 행함이라 하는 것은, 새 집 들여놓고 바닥공사 새로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다 뜯어서 이테리 수입 타일로 다 바꾸고 그 짓하고 똑같은 거예요. 멀쩡한 집을 다 이루었다한 멀쩡한 집을 다 뜯어 가지고 자기 존재의 흔적을 거기에 남기는 겁니다.
‘다른 집은 다르지. 우리 집은 대리석이다! 왜? 내가 손댔거든.’ 꼭 지가 찜을 해야 비로소 자기 집 되는 줄 알고 있어요. 사람은 주님의 나라를 자기 나라로 만들어야 속이 만족하는 인간입니다. 얼마나 악마적입니까? 우리 속에 악마 있어서 항상 주님의 것도 내 것으로 만들어야 속이 시원하잖아요. 십일조 내 줘야 십에 구는 안 내도 되는 내 것이라고 여기는 거예요. 십일조 자체가 얼마나 나쁜 짓 이예요. 십에 구는 지거 되니까. 아이구 줘 버려라, 아깝지만 나머지는 지거 되니까.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28절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되어 있지요. 여기는 사람들의 환경에서는 제일 겁나는 게 죽음이 제일 겁나지요. 예수님의 환경이 오게 되면 죽음의 개념이 확산돼 가지고 어디까지 퍼집니까? 눈에 보이는 세상이 끝이 아니고 어디까지 확대 시킵니까? 지옥까지 확장시켜 버리죠. 죽음 뒤까지 심판 받는데 확장시켜버리면 지옥에 간다는 그것이 진정한 죽임이란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니 죽을래? 살래?’ 이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니 천당 갈래? 지옥갈래?’가 더 무섭다는 거예요. 주님은 강도예요. 우리 목에다가 칼을 대고 ‘니 천당 갈래? 지옥갈래?‘ 이거와 똑같은 거예요. ’니 교회 믿을래? 예수 믿을래?‘ 와 똑같은 거예요. ’니 피 믿을래? 니 행함 믿을래?‘와 똑같은 거예요. 지금 매일 성도에게 그렇게 들이대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을 더 경외하게 돼요. 두려워하게 돼요. 나한테 무서운 분이 있으면 세상은 아무것도 무서움의 대상이 될 수 없어요. 내게 진짜 무서운 분이 있다면, 한번 이렇게 해변에 가면 얼굴 시커멓게 타 버리면 그다음부터는 얼굴 타버리는 거 겁나지 않아요. 원래 시커멓게 타 버렸는데. 이미 버린 몸인데. 이미 한번 죄인 되었으면 그 다음부터는 죄라는 것은 중요한 게 아니 예요. 죄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죄를 용서하셨다는 것이 더 중요해요. 죄인인데도 불구하고 지옥가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몰라요.
그래서 진짜 주님의 기적은 병은 암에서 낫는 게 아니고 암에서 낫고 안 낫고 상관없이 나는 이미 살아버렸다는 사실을 예수님 피로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암이란 것도 더 이상 두려움도 무서움도 안 돼요. 그래서 암 걸리는 것도 사랑이고 감사가 될 수밖에 없지요.
같은 환경에서 A지점에서 B지짐의 자리는 의미가 없거든요. 시험에 떨어졌다. 합격됐다. 떨어졌다. 이 자리에서는 의미가 없고 진짜 합격은 어디에 합격되어야 합니까? 천국에 합격되어야 돼요. 천국에 합격되면 이런 불합격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거지가 죽을 때까지 거지 되는 거 생각해 보세요. 거지의 주변에 거지가 아브라함 품에 안긴 것을 봐서 이미 거지는 그 전부터 이미 아브라함에 대해서 알고 있었어요. 이유가 뭐냐 하면, 누구든지 죽었다 살아나도 나는 못 믿지만, 성경책에 있는 걸 선지자의 모세의 글을 믿으면 구원 받는다 했지요. 거지 나사로는 이미 성경을 통해서 뭘 알았어요? 아브라함의 약속을 알았던 거예요.
그래서 이미 거지는 거지된 걸 그렇게 원망스럽지 않게 왜냐 하면 아브라함을 부활을 알고, 천국을 알아 버렸으니까 거지꼴로 천당 가나 부자 꼴로 천당 가나 천국에서는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어요. 앞에 있는 부자는 부럽지 않지요. 부자는 이 사실을 하나님의 약속의 범위를 모르고 기존의 환경의 자식이 된 거예요. 그래서 다른 환경을 알려주러 온 겁니다.
29절,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참새가 떨어져요? 안 떨어져요? 떨어지지요. 떨어질 때는 그냥 떨어진다 하지 말고 새로운 환경에서는 뭘 집어넣어라 이 말입니까? ‘아, 저 참새가 떨어진 것은 지가 떨어지고 싶어서 떨어진 게 아니라 포수가 쏴서가 아니라 뭘 집어넣어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허락 하에서는 움직이는 환경에 너희가 놓여 있다는 겁니다. 누구도? 마치 참새마저도. 참새마저도 하나님의 허락 있어야 땅에 떨어져 죽는 것처럼 너희들 죽는 것도 머리카락 떨어지는 것도 누구의 허락이 있었다? 하나님의 허락이 있었던 거예요. 어떤 사람은 많은 허락을 받아 가지고 완전히 대머리 된 사람도 있어요. ㅎㅎ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사람은 하나라도 자기 것이라면 빼앗기는 것을 싫어한다고요. 그러니까 자기 몸에 남의 머리털은 관계없어요. 자기 머리털은 아까워하는 거예요. 아까워하지 말란 말이죠. 왜 니가 아까워 할 문제가 아니고 아까워도 누가 아까워해야 됩니까? 예수님이 아까워해야 지요. 예수님 자기 거니까. 니가 왜 쓸데없이 아까와 합니까? 그렇잖아요.
여기에, 머리털까지 세신바 되었다는 말은 환경 속에서 너의 것은 있을 수 있다? 없다? 환경의 것이지 너희 것이 아니라는 것을 너희가 잊어서는 안 된다. 이말 입니다.
그 다음에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게 다루어진다. 니가 니 생각했던 것 보다 더 귀하게 다루어진다. 이말 입니다. 노래가사에 이런 게 있어요. ‘내가 날 사랑하는 것보다 나보다 날 더 사랑하는 사람’ 이런 노래 가사가 있습니다. 누가 불렀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노래 있습니다. “나보다 날 더 사랑하는 사람”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이 말은 주님의 환경이 나에게 밀려와서 내가 거기에 잠겨 버렸다는 것을 인정하면 그것이 그대로 하늘나라가 된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천국 가서도 우리가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도 내가 너를 “우리는 같이 있었다하는 것을 내가 보증해 줄게” 라고 하는 겁니다. 새로운 환경에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뜻이 있어서 허락이 있어서 이렇게 말씀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었다는 것을 그것만이 복음인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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