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한계시록 16:12 / 판의 차이 111117 본문
판의 차이 111117
녹취:이한례 가락교회111117-요한계시록16장 (판의 차이)27강a-이 근호 목사
제 27강a 한번 적어 볼게요. 인간에게도 의가 있다면 구태여 예수 믿을 필요가 없죠. 그럴 필요가 없죠. 내 헌금이 의가 된다면 예수 왜 믿습니까? 자기 헌금한 것만 믿으면 되지, 내가 착한 생각을 갖고 있다면 착한 생각 믿으면 되지, 그것도 의니까 믿으면 되지, 왜 예수를 믿을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개혁주의 신학이나 천주교 신학에서는 뭐냐 하면 우리 심성이 쉽게 할 수 있는 것, 기본적인 게 뭐냐 하면 인간은 자기 외에는 안 믿거든요. 세상에 믿은 놈은 나밖에 없잖아요.^_^
믿을 놈은 나밖에 없고 사랑스러운 것도 나밖에 없고 가치 있는 것도 나밖에 없으니까 나밖에 없는 그 심성을 교회 화 시켜서 그걸 두둔해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는 시도를 하는 거예요. ‘예수를 믿으시면 여러분 착한 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착한 일 믿으시면 됩니다.‘ 이래 돼 버려요.
십자가 마을에 글 하나 지웠는데 글을 보면 뭐냐 하면 그 글에도 나와 있고 딴 글에도 나와 있지만 인터넷 보면 십자가 마을을 찾아보면 십자가 마을을 욕하는 글들이 죽 나와 있어요. 우리 교회 이 근호 목사 욕하는 글이 나와 있어요. 이 근호 목사는 인간이 행하는 모든 게 죄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 믿는 거 아닙니까? ㅎ 모든 게 죄가 아니라면 내 안에 의가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의가 있는 자기 자신을 믿으면 될 게 아니냐. 이러니 결국은 예수 믿는 것은 중간의 하나의 슬쩍 지나가는 것이고 진짜 자기의 속셈, 진짜 자기의 본성이 일치되는 것은 ‘역시 믿은 놈은 나밖에 없다.’ 그것을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옹호해 주는 겁니다. 그거 뭐 인간이죠. 그 간단한 이야기를 가지고 어려운 것도 아니란 말이죠.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죄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천국에 갈 수 없다. 그래서 예수 믿는다.‘하면 간단한 이야기를 가지고 예수 믿고 난 뒤에 그 다음부터는 우리가 죄인이 아니고 의인됐기 때문에 우리의 행동하는 것도 다 하나하나가 의가 된다. 그럼 뭘 믿겠다는 말인가? 내 행함을 믿겠다 이 말 이예요.ㅎ 진작 처음부터 지 믿고 싶어 환장한 인간이 괜히 중간에 예수 하나 거론한 거예요. 그게 무슨 신자예요? 신자 아니고 그냥 자기 자신에 대한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내가 신이라는 걸, 우기는 것뿐이죠.
오늘 요한계시록 16장인데 방금 이야기한 것도 이와 관련된 이야기죠. 쉽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심판을 할 때는 천사가 와서 심판을 할 때는 죄라고 심판을 했는데 나온 그들의 반응은 뭐냐 하면, 분노로 반응하는 겁니다. ‘ 우리가 뭐가 잘못됐느냐, 왜 이렇게 우리가 힘들게 살 수밖에 없는데?’ 라고 하는 대비, 대조를 거기에 나와 있어요.
요한계시록 16장 7절에 보면 “또 내가 들으니 제단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하더라” 8절에 보면 “네째가 그 대접을 해에 쏟으매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은 태우매 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진지라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며 또 회개하여 영광을 주께 돌리지 아니하더라” 계속 반발했다 이 말이거든요.
이 대목에 대해서 이 대목의 의미가 뭐냐 할 때 항상 여러 번, 수십 번 했습니다마는 요한계시록은 일상적인 용어, 명칭, 단어들이 아니기 때문에 제가 앞으로도 여러 번 되풀이해서 요한계시록 해석은 이렇게 되는 겁니다.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또 해드리겠습니다.
요한계시록 해석은 항상 생각할 것은 판을 새로 까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컴퓨터에서 소프트웨어를 새로 까는 거예요. 판을 새로 까는데 누가 까느냐 하면 예수님이 새로 깔아요. 예수님이 뭘 어떻게 까느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 죽으심 가지고 세상의 판을 다시 깔아버립니다. 깔게 되면 기존의 판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기존의 판이 있어요. 요게 중요한 거예요.
기존의 판은 뭐냐 하면 자연세계입니다. 자연세계 때문에 인간은 산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특히 해 같은 경우에는 하나의 모든 에너지가 태양이 있어야 곡물이 자라나니까 태양이 하나의 신앙의 대상처럼 해, 달 별 이런 것들은 신기하게 움직이잖아요. 모든 강아지라든지 강물 같은 것은 인간이 손대서 움직일 수 있습니다. 강물이 있더라도 관계시설을 해서 물을 다른 데로 움직이잖아요. 그런데 하늘에 있는 태양과 달과 별은 사람이 손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손 못 대는데 움직이잖아요. 저거 뭐 있다. 배후에 신이 작용한다고 이렇게 본 겁니다.
그러면 해와 달과 별, 이런 것들은 뭐예요? 특히 사람이 손 못 대는 것, 지진, 홍수, 이런 것들은 일종의 중보 체, 중간 매체에 관한 거예요. 해, 달, 별. 신이 있는데 신이 ‘나 여기 있어.’라고 신이 얼굴을 보여줄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신이 자기 얼굴을 보여주는 대신 인간이 볼 수 있는 해와 달과 별과 자연현상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분이 보이는 식으로 우리에게 암호와 정보와 하나님의 뜻을 전달했다고 모든 민족들은 다 그렇게 믿고 있어요. 개구리 한 마리는 다룰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개구리가 마구마구 올라와서 간섭을 할 때는 이것도 신의 뜻 이예요. 메뚜기 하나를 잡아서 구워먹으면 맛있어요.ㅎ 중국에서도 메뚜기 먹습니까? 옛날에는 메뚜기 참~ 맛있었어요. 도시락 반찬도 했는데. 그런데 메뚜기가 새까맣게 올라오면 인간의 손을 넘어서는 거예요.
인간의 손을 넘어서면 무조건 신이예요. 그럼 달래야 돼요. 뇌물 줘서 달래야 되고 뇌물로 안 통하면 인신공략 해야 돼요. 사람 몸을 바쳐야 됩니다. 이건 우리 민족뿐 아니라 마야민족 잉카민족, 다 그래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지금도 폴리네시아, 인도네시아 남쪽에 남태평양 그쪽에 가면 지금도 그렇게 해요. 아프리카는 물론이고. 부도 교라 해서 도미니카 같은 데에서는 닭의 피를 목을 비틀어서 닭의 피로 신의 노를 달래잖아요.
그리스 로마 시대가 그겁니다. 사람이 손대는 법까지는 손대되, 사람이 손대는 법까지 인간의 자유라 합니다. 인간의 자유와 신의 자유와 충돌되는 현장을 가지고 로마와 그리스 신화라 합니다. 인간이 까불다가 신에게 얻어맞는 장면, 그리고 신이 신답지 못하고 너무 설쳐서 인간이 행한 것을 억지를 부리면서 파괴시키는 것.
다시 한 번 설명할게요. 인간이 교만할 때는 누가 손댄다? 신이 손대죠. 벌주는 입장에서. 그런데 인간이 착함에도 불구하고 자연재해 입는 것, 화상 같은 것, 착한 사람이 노를 젓는데 갑자기 노가 뒤집어진다. 이건 뭐냐, 신이 너무 까분 거예요. 착한 인간을 착한 줄도 모르고, 어느 쪽이 나빠요? 인간 쪽이 나쁜 게 아니고 신 저쪽이 나빠요.
그래서 그리스 로마 신화에 보면 인간 쪽에서 나쁜 것도 많지만 신이 횡포를 놓는 것이 많아요. 신이 예쁜 여자를 골라서 애 낳고 그래서 신과 인간 사이에 영웅이 태어난 거예요. 그 영웅은 힘은 세지만 인간도 아닌 것이 신도 아닌 것이 인간의 심적이 번뇌를 묘사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도 있고 인간에게는 누구나 신적인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인간이 다룰 수 없는 무의식의 세계가 이미 인간 속에 있다는 것을 그때는 신화로서 표현한 겁니다. 그때는 무의식이란 표현이 없었지만 옛날에는 신화로서 인간의 모든 현상과 자연의 바깥의 모든 현상을 그렇게 설명 했었습니다.
거기서 나온 것이 우상이거든요. 우상이 일반 종교거든요. 다시 한 번 설명하면 요한계시록 해석은 어떻게 하느냐, 이미 기존의 판이 깔려있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이 판에서 자기의 삶의 이유를 발견합니다. ‘난 필히 살아야 돼. 난 반드시 살아야 돼.’ 왜? ‘난 가치 있으니까.’ 나는 살아야 되고 산다는 자체가 가치 있다는 뜻이고, 그것은 이 자연이 나에게 보장해 준다. ‘봐라 지난해 수익이 많았잖아. 봐라 작년에는 몸이 아팠지만 나았잖아. 그만큼 나는 가치 있는 거야.’ 모든 주변에 있는 변화를 가지고 어디로 초점을 모읍니까? 바로 나는 내가 있다는 자체가 정당하기 때문에 만약에 정당한 내가 아프다면 신이 실수한 건데 신이 실수한 것에 대해서 내가 실수했다든지 기대했다든지 내가 혹시 잘못한 것을 발견해서 회개하면 거기에 대해서 보상해 줄 때 그때 자연과 나 자연의 신과 나, 자연은 신의 대변자이니까요. 자연과 신과 나는 아주 마찰 없는 사이좋은 관계가 정상적인 관계로서 좋게 유지된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온 것이 인간들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것은 이건 얼토당토한 이야기예요. 인간의 머릿속에는 예상도 안 한 겁니다. 에베소 2장 8절에 나오잖아요. 믿음이라 하는 것은 선물이지, 인간이 어떻게 만들어서 그것 가지고 하나님 마중 나온다고 하나님이 거기에 대해서 좋다고 인정 안 해줍니다.
하여튼 예수님에 관한 모든 것, 성경에 대한 모든 해석, 모든 것은 이것은 얼토당토한 겁니다. 이것은 우리가 기본적으로 살아가는 여기 이 기본판, 기본 틀에는 이건 없는 거예요. 이건 생산되지 않는 겁니다. 낯설기 짝이 없는 거예요. 이것을 가지고 해석학에서는 둘로 이야기해요. 구성적 규칙과 규제적 규칙이 있습니다. 말이 굉장히 어렵죠? 판의 규칙에는 두 가지가 있다. 이걸 쉽게 하면 무슨 뜻인지 압니다. 바둑 알죠? 바둑 두실 줄 압니까? 바둑이라 하는 것은 바둑판이 있어야 되고 까만 돌과 하얀 돌이 있어야 되죠. 그리고 바둑 둘 때 바둑 두시는 걸 보신 적 있죠? 한 사람이 계속 두는 게 아니고 한 사람이 두고 난 뒤에 상대방이 두고, 장기도 마찬가지죠. 물론 바둑판, 바둑돌, 둘이 한 세트가 규칙은 한 사람씩 하나씩 한다. 이러한 것이 있어야 바둑이 구성이 돼요. 이 구성을 구성적 규칙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해놓고 규제라 하는 것은 이 바둑이 재미나려면 여기에 전략이 필요합니다. 이건 인간의 아이큐가 동원되는 거예요. 정박아보고 바둑 두라고 하면 시키는 대로 할 거예요. ‘니 하나 놓고 저 하나 놓고.’ 그러면 ‘예’ 하고 하나 놓고. 또 하나 놓고, 이게 무슨 바둑입니까? 그냥 우리나라 바둑 잘 두는 이 세돌, 이 창호 이런 사람들이 바둑 두는 걸 보면, 한 수 놓고 턱 고이고 이래 있죠. 중국에서는 쿵제, 구리 이런 사람이 잘 두거든요. 세계적으로 잘 두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 중에 옛날 조 치훈이는 바둑 두면서 내가 여기서 죽어도 좋다 할 정도로 신경 쓸 때 뭘 둘까 전략을 꾸미죠.
자, 그러면 이걸 실생활에 바둑이라고 생각하고 여기 봅시다. 내가 이렇게 몸둥아리가 있고 나는 말할 줄 안다. 이건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한국 사람으로 부모에게 태어났기 때문에 내가 한국말을 하고 얼굴이 한국 모습이다. 이건 구성적 규칙이죠. 그 다음에 살아가는 것은 어떻게 됩니까? 어떻게 살까 하는 것은 규제적 규칙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두 개의 규칙이 이 세상 판이 되는 거예요. 이 세상의 전부를 설명한 겁니다.
그런데 성경을 뭐라고 합니까? 이 세상 것들을 뭐하지 말라? 이 세상 것을 사랑하지 말라했죠? 요한일서 2장에. 성경 구절들이 굉장히 많은데 우리가 지킬 만한 것을 골라 찾아내서 비켜가는 법이 있는데 성경이 전체적으로 확 와보면 한 구절 한 구절을 우리가 못 지킵니다. ‘세상 것을 사랑하지 말라.’ 이건 다른 말로 하면 ‘니가 살아가는 전체가 죄니라‘하는 것과 같은 거예요. 세상 것을 사랑하지 않은 상태에서 세상을 왜 사는데요. 세상 것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이런 말 이예요. ’죽음이 다가온다.‘는 겁니다. 사람이 죽을 때 ’아! 내가 죽는다.‘ 이건 바보 같은 짓이죠. ’죽음이 다가온다.‘를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이 가질 것을 오직 죽음뿐이다. 이건 다른 것은 다 빼앗겨도 오직 영원히 가져가야 될 것은 죽음만 갖고 가요. 이 명박 대통령도 죽음 밖에 가져갈 게 없고, 죽음만 있는 거예요. 이말을 더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너는 시체다.‘ everybody 시체예요. 국회의원도 시체고 철수니 안 철수니도 시체고, 이 세상은 시체예요.
그러니까 ‘시체들아, 세상을 사랑하지 마라.’ 그 말이 그 말 이예요. 왜, 너를 시체로 만들었기 때문에. 억울하지도 않느냐, 너를 죽게 만드는데도 그게 그렇게 좋으냐 하는 거예요. 그래서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거예요.
지금 요한계시록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그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은 판을 먼저 언급하고 판에 등장하는 것이 대부분 뭐냐 자연세계 일부죠. 해 나왔죠. 달, 별 강물 나오죠. 그 자연세계를 왜 거론하느냐 하면 사람은 죽으나 사나 자연세계와 더불어서 자연세계 무너지면 같이 죽고 자연세계 유지하면 지는 시체 아니에요. 자기는 죽을 것만 있는 게 아니에요. 자연세계가 있는데 자연을 내 품에 담아야죠. 그것이 자연과 내가 운명을 같이 한다 이 말이죠. 그 자연을 품었다는 말은 자연은 무엇의 대변자였습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대변자였기 때문에 자연을 통해서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자연을 통해서 나를 살려주기 때문에 나는 그만큼 살만한 가치가 있다? 없다? 있다는 그 자부심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게 바로 판 이예요.
이것이 구성적 규칙에 의한 전략적 주체, 또는 규제적 규칙 속에 살아가는 겁니다. 그 속에서 규칙이 만들어지고 주체가 만들어지는데 규칙을 만드는 모든 규칙은 어느 판 위에서? 자연세계란 판 위에서 규칙이 올라오는 것을 내뿜는 거예요. 분수처럼, 어디 마치 땅을 파면 석유가 뿜어 나오듯이. 자연세계 어디 해도 ‘그러니까 나는 살만해. 이번에는 이런 일을 해볼까? 하니까 돈이 나오니까 그러니까 나는 살만하단 말이야. 요번에는 미국 가볼까? 미국 가서 부자가 되니까, 그러니까 나는 살만하다니까.’ 어디를 쑤셔도 나는 이 자연이 나를 도와줘서 자연이 있는 이상 나도 있다.‘ 죽는 것은 하나의 잠자는 거니까 그것은 그때 가서 문제고, 중요한 것은 내가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 지금 확인되면 그것을 위해 매진하는 이유가 된다고 보는 거예요. 그게 판이거든요. 요한계시록은 그 판을 다 이야기해요. 깔아놓고 그 다음에 그 판이 폭격을 만난다니까요.ㅎ
밑에 인간이란 판이 있다는 이 말은 이게 세 번째지만 다시 해 봅시다. 인간들의 자연세계는 보이지 않는 신의 대변자로서 인간이 손댈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나보다 자연이 더 넓으니까, 더 넓으니까 형님이고, ‘아이고, 잘못됐습니다.’ 하는 거예요. 자연과 더불어 살기 위해서 자연이 뭔가 분란을 일으키고 발작을 일으키면 달래야 하잖아요. 신을 달래고 그게 전부죠.
이 판에서 누가 죽었습니까? 이 판에서 어떤 인물이 죽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판을 유지하는 사람, 바리새인 사두개인 이런 사람들은 이 판을 유지하기 때문에 이 판에서는 누가 살아있다? 자기들은 언제든지 살아있죠. 자기는 눈이 안 감겨 있기 때문에 자기는 소경이다? 아니다? 자기는 소경이 아니에요. 자기는 죄인입니까? 죄인 아닙니까? 자기는 아브라함 자손이지 죄인이 아니에요. 자기들 아비는 하나님 이예요. 자기 아비는 악마가 아니고 하나님이라 말이죠.
그러니 이러한 판 위에서 바둑의 게임과 규칙, 또는 축구 게임 속에서 여기 예수님께서 공 차고 등장했다. 그럼 공이 몇 개입니까? 축구공은 공이 하나만 있으면 되잖아요. 두 개 있으면 축구가 안 되잖아요. 혹시 축구공이 바깥으로 나가면 심판이 ‘소톱’ 해놓고 하나를 발로 차잖아요. 그런데 공이 두 개예요. 공이 두 개라는 말은 뭡니까? 이 구성적 규칙과 규제적 규칙에 안 맞는 다른 규칙을 갖고 온 거잖아요. 그 규칙은 이 판에서는 인간들끼리 보는 규칙과 법이 있는데 새로운 낯선 규칙이 왔다는 말은 이 판과 같다? 다르다? 판이 다른 거예요. 판!!
그래서 한국교회 이단이란 말이 판이 달라요. 예배당에 십자가는 꽂혀있죠. 아무 의미 없어요. 십자가라 하는 것은 이쪽 십자가와 이 십자가는 뭐냐, ‘말 안 듣고 까부니까 죽었지. 그냥 점잖게 왔다가 도 닦는 소리하고 가면 살려두지, 왜 성전에 가서 비둘기파는 거 뒤집고, 이 집은 뭐가 아니다? 하나님의 집이 아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접선 지역이 아니라고 하니까 그 인간을 살려둘 수가 없는 거예요. 이거 참 중요한 건데, 예수는 살려 둘 수가 없는 겁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살아있으면 무슨 판이 무슨 판 돼 버려요? 우리들 판이 개판 돼 버려요.ㅎ 이런 표현을 뭐야 하면 자기를 생명으로 하면 결국은 생명을 죽임으로써 비로소 이 판은 무슨 판이냐, 죽음의 판이고 이 판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뭐가 돼요? 시체가 되죠.
이걸 신학자들이나 개혁주의에서는 이것을 모르는 거예요. 우리가 왜 죄인이냐는 거예요. 우리가 뭘 잘못하고 무슨 나쁜 짓을 했는데 우리보고 죄인이냐고, 우리가 지금 살아있는데 하나님이 살려줬는데 우리를 왜 죽은 자로 보느냐,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판이 다르니까 다른 규칙을 쥐고 있는 거예요. 그게 선악과인데. 다른 규칙을 쥐고 있는 겁니다. 사람이 행동에 따라서 나빠질 수도 있고 마음가짐에 따라서 나쁜 마음은 죄고 선한 마음을 먹으면 그런 하나님의 의가 되고 선이 된다. 이런 규칙을 계속 고수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을 때 그들이 나쁜 짓한다고 생각했습니까? 좋은 일 한다고 생각했습니까? 좋은 일 한다고 생각했잖아요. 사울이라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일 때 나쁜 짓 한 거예요? 하나님께 영광 이예요? 하나님께 영광이잖아요. 그 하나님이 어디에 속한 하나님 이예요? 그 개념이. 현재 인간의 판 속에 있는 하나님 개념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 판에서 천국을 이야기하고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예수, 메시야, 전도, 율법, 구원, 헌금... 무슨 이야기를 해도 그건 죄가 된다는 이 말입니다. 예수님이 뭐라 했습니까? ‘너희들이 전도를 해? 너희들이 땅 끝까지 전도하면서 너희들도 지옥 갈뿐더러 지옥 백성 하나추가, ’여기 밥 하나 추가요‘ 하는 것처럼 전도하면 지옥 백성 하나 추가하는 거예요.ㅎ
이 판이 바뀌었다는 사실, 이 판 속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알까요? 죽었던 분의 마음이 와야 돼요. 그걸 성령이라 합니다. 죽었던 분이 이 땅에서 설움 받고 죽었던 그 마음이 그대로 오게 되면 그 마음이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이 세상이 잘못 판단했다는 사실, 죽지 않아야 될 분을 죽어야 될 인간들이 죽지 않아야 될 분을 죽였다. 왜 그렇게 했을까, 그것은 그 인간자체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이 판 자체가 근본적으로 잘못돼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판에서 구멍이 뚫리면 위에서 (중요한 겁니다.) 하늘에서 천사들이 공격하죠. 그러면 이 자연세계에 불균형이 일어나는 구멍이 뚫리죠. 구멍이 뚫리면서 밑바닥에 숨어있던 지금까지 인간의 세계를 지배했던 악마가 구멍을 뚫으면서 위에 있는 천사의 심판과 대립 판을 벌이기 위해서 분개와 반발과 저항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회개치 아니한다고 나오죠. 가만 놔두면 점잖은데 천사가 쑤시면 그 다음부터는 ‘내가 뭐가 잘못됐는데, Why me. 왜 하필이면 납니까? 나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다고 이렇게 대듭니까?’ 하고 그동안 자기 판을 유지해왔던 보이지 않는 영적 악마적 힘이 고때 발휘되고 고때 써먹는 거예요.
이 이야기가 ‘교회는 미신이다.’라는 책의 제목 하에 쓰고 있는데 초반에 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목사가 낙도에 갔는데 아내는 중병이 들었고 딸은 낙도에서 복음 전하면서 먹고 살기 힘드니까 여상 나와서 서울서 돈 벌이 하다가 아빠 보겠다고 왔는데 왔다가 가는데 물을 건너다가 빠져죽어서 남은 것은 장화만 남았는데 목사가 죽은 딸의 장화를 새벽 제단에 던지면서 ‘하나님, why me, 내가 뭐 어쩌라고, 하나님 일 한다고 낙도까지 왔는데 내 딸 죽이고 왜 내 마누라 아프게 하고 왜 이렇습니까,’ 하고 던지는 그 장면을 그대로 올려놨어요. 악마의 종이었습니다. 마귀의 종이었던 겁니다. 고마운 줄 알아야 돼요. 내가 마귀한테 속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는데 그걸 모르고 오히려 대드는 거예요.
나는 시체란 사실을 처음 알려줬는데 알려준다고 난리예요. 마치 이것은 병원에서 의사가 ‘이 말해도 되겠습니까?’ ‘예’ ‘마음 단단히 먹으세요. 암입니다.’하니까 멱살을 붙들고 ‘어디 감히 나보고 암이래.’ 하고 멱살을 붙드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병원에서 기사가 엑스레이 찍어주니까 해골보고 ‘내가 왜 해골이냐,’하고 따지는 거와 똑같아요. 예수 그리스도와 그 종들은 모든 것이 판 자체가 잘못됐기 때문에 뭘 해도 죄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만 믿어야 돼요.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뭐 어렵습니까? 강원도 감자 캐는 할머니도 믿을 수 있는 건데 이걸 신학자들이 못 믿는 거예요. 목사들이 안 믿고 있는 거예요. 신학 가지고 장사해 먹으려고.
질문: 믿는 게 자기가 믿는 거예요? 여러 가지 자기의 속성 가운데서 그 중에 하나 대충 괜찮은 거, 대충 괜찮은 걸 뽑아서 그걸 지가 괜찮은 방 하나 만들어 놓은 거예요. 고 옆에 소망이란 방도 사랑의 방도 있고, 소꿉놀이를 해요. 전에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천주교 수도원들이 나오는 거, 특히 크리스마스 되면 특집 나오는데 천주교 수도원들, 개신교는 안 나오고 천주교만 나와요. 수녀들 나오는 걸 보면 정말 소꿉놀이 한다는 말이 정말입니다. 유아기적 퇴행, 소꿉놀이해요. 수녀 복 착 입고 때로는 기타 치면서 노래 부르면서...ㅎ 시체들!
그래서 수요일 날 이야기했죠. 인간은 자기가 몰입하는 그곳이 자기의 무덤이다. 회사 몰입하면 회사가 자기 무덤이고 낚시하면 낚시터가 자기 마지막 무덤이고, 특히 화투 패, 화투치다 그 자리에서 쇠고랑 차고 경찰소로, 등산 하는 사람은 히말라야 산에 가서 죽었잖아요. 지 무덤이라니까요. 인간은 지 무덤을 파고 가면서 사는 거예요. 시체기 때문에 말릴 수가 없어요. 세상 것을 사랑하지 말라 해도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세상 것을 사랑하는 것은 세상이 좋아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좋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왜 살아야 되고 내가 왜 죽지 않아야 되고 나는 왜 훌륭한가를 정립하기 위해서 세상 것들을 이리 쑤시고 저리 쑤시고 한다 이 말이죠. ‘아! 이만한 재주가 있었구나. 내가 이만한 능력이 있었구나. 그래서 나는 나를 무시할 수 없지, 이만큼 뛰어났으니까.’ 그걸 확인하는 재미로 산다니까요. 존재의 의미를!!
그래서 예수 믿으란 말이 무슨 말인지, 예수 믿으라 하면 이상한 말은 예수 믿음으로써 가치 있는 인간이 더 가치 ‘추가 밥이요.’처럼 가치가 보태지는 줄 알고 있어요. 돈도 되고 예수도 믿고 착하기도 하고 밥도 퍼주고 그리고 수단까지 가서 의료 활동하고 아프리카 가고, 그게 시체거든요. 그래서 수요일 날 했잖아요. 사도바울이 몰입한 무덤은 어디입니까? 십자가 안!! 그 십자가 안에서 주님을 만나서 ‘내가 사는 것은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라 했잖아요.
그러니까 이 안에서 우리가 어차피 시체가 죽을 거, 우리가 죽을 때 어디로 몰입해야 됩니까? 바로 십자가 안에서 십자가가 무덤이 돼야 십자가에서 죽을 너희 몸도 살리시리라.‘하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그쪽으로 땅겨가는 거예요. 땅겨갈 때 어떻게 땅겨갑니까? 니가 뭘 해도 죄가 된다. 그러면 땅겨갈 때 우리는 앙탈을 부리고 반항하면서 여기 성경 그대로 ’내가 왜 뭐가 잘못했는데 저처럼 인생이 아니고 나 같은 힘든 인생이냐고.‘ 앙탈을 부리더라도 그때마다 얻어맞죠. ’아! 내가 마귀자식이었구나. 내가 나밖에 몰랐구나. 내가 예수 믿는 것도 이거는 하나의 립 서비스, 이건 그냥 가면이었구나. 진짜 내가 믿는 것은 예수 믿는 것이 아니고 나 믿는 것이었구나.‘하는 것을 혹독하게 이 세상을 살면서 그걸 하게 합니다. 위에는 무너지죠. 자연세계는 무너져요.
이 자연세계에서 이게 요한계시록 16장에서 보면 둘로 나눠져 있어요. 하나는 땅의 요소와 하늘의 요소로 나눠집니다. 그런데 이 두 개가 자연세계인데 여기에 천사가 하늘에서 폭격을 내리고 땅에서도 폭격을 내립니다. 요게 여기에 나와요. 방금 한 내용이 결국 요한계시록 16장을 전체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이 반발이 뭐로 되어 지는가, 므깃도 산, 또는 아마겟돈, 아마겟돈에서 전쟁이 일어납니다. 이 전쟁은 이런 반발과 반항심에서 뭐가 배후에서 등장하느냐 하면 바로 더러운 세 가지 영, 개구리 영이라 하는데,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 요것들이 합세해서 드디어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판이 인간 판이 있고 하늘의 판이 있는데 성경에는 이 세상 판을 사랑하지 말라. 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모든 언어적 개념과 사상과 그리고 거기에 대한 규칙과 법, 인간이 납득할 수 있고 육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지 말라. 그런 것이 모아져서 예수님을 죽게 만들었으니까, 이렇게 되면 반발하게 되죠. 그런데 거기에 폭격을 하게 되고 이걸 부수면 부순다고 못 살겠다고 반발하게 되죠. 반발을 통해서 뭐가 오는가, 더러운 세 가지 영, 배후에 있는 세 가지 영들이 합작해서 한판 최후의 전쟁을 벌이는 겁니다.
그래서 이 요한계시록 16장이 성경 끝 부분이잖아요. 끝 부분에 있기 위해서는 초반에 있는 전쟁들을 우리가 놓치면 안 돼요. 초반에 있는 전쟁이 뭐냐, 여호수아의 전쟁인데 여호수아에 잘 나와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전쟁의 특징에 대해서 제가 말씀 드릴게요. 요한계시록을 이렇게 설명하고 난 뒤에 다시 여호수아를 보게 되면 그때 여호수아의 전쟁에 있어서의 그 소돔의 다섯 왕, 가나안 왕들이 있어요. 왕들과 전쟁할 때 젖먹이 아이까지 몰살시키라고 돼 있어요. 요한계시록 모르고 복음도 모르고 성경에 있는 대목들은 그 다음부터 성경을 보기가 싫어요. 아니, 어린애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여자는 물론이고 어린애와 임신한 애까지 다 죽여 버려라. 다 죽여 버려라, 진멸해 버려라. 그 진멸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바로 여호와 전쟁이라 해요.
아이들을 살려주면 안 돼요. 아이들을 살려줬으면 그 징벌을 이스라엘이 대신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걸 보면서 ‘왜 죽이십니까?’ ‘저주 받아야 되거든.’ ‘아니, 왜 저주를 받아야 됩니까?’ ‘그래야 너희들이 축복이 뭔가를 알거든.’
전쟁은 맞닥뜨려야 되는 겁니다. 맞닥뜨린다는 것을 신명기에서는 특수한 용어를 사용합니다. 이 용어를 ‘붙이시매’, 얼마나 중요한 용어입니까? 붙여주시는 거예요. 붙여주시는데 이쪽과 이쪽을 붙여주겠죠. 이것은 하나님이 붙이기 때문에 이스라엘도 어떻게 피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걸 표현한다면 이것은 결국 우리말로 하면 쌍, 짝으로 붙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짝으로 붙여주게 되면 그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이것이 두 개가 짝이 동등 되는 것이 아니고 쌍으로 붙이면 반드시 둘 중에 한쪽이 우월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고려신학의 개혁주의 신학에서 주장하는 정신이 3가지입니다. 교회중심, 하나님중심, 성경중심이거든요. 중심이 몇 개입니까? 3개죠. 이 3개라는 것이 인간 속에 그대로 동등하게 남아있겠어요? 서열이 있겠습니까? 반드시 인간은 서열이 있습니다. 그걸 그들은 속였습니다. 하나님중심, 성경중심, 교회중심이라는 것이 그들은 신학의 완벽을 기하기 위해서 어디 한쪽에 치우치지 않기 위해서 완벽을 기하는데 그들이 완벽을 취하는 방법이 같은 뜻을 쌍으로 놓는 방법을 사용해요. 그런데 이것이 인간의 사고에서는 수용이 안 되는 사고방식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어요. 둘 다 사랑하면 된다? 안 됩니다. 한쪽을 사랑하게 되면 다른 한쪽은 상대적으로 미워하게 돼 있어요. 처나 자식이나 아비나 남편이나 나보다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고, 그 뒤에 나온 말씀이 ‘너 자신도 너 자신을 사랑하게 되면 나의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했습니다. 미칩니다. 이거는 뭐 우리보고 들어오지 말라는 뜻 이예요. 다시 말해서 우리보고 시체란 뜻 이예요.ㅎ 그러니 인생이 죽어가는 인생이지, 우리보고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 전혀 어떠한 비법과 묘법도 거기서는 찾을 길이 없습니다.
사람이 자기를 부인하면 자기 부인한 자기를 사랑하게 돼 있어요. 안 돼요. 요새 개그프로에 ‘안 돼. 안 돼.’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우리에게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다고. 선한 것이 나올 수 있으면 선한 거 나오는 자기 자신을 믿으면 되지, 뭣 때문에 예수를 믿습니까? 아무리 예수님을 동원해도 결국은 최종 믿을 것은 나밖에 없다. 교회를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지가 다니는 교회를 사랑하는 거죠. 그런데 지가 다니는 교회에서 자기를 천대하면 그 다음부터는 누가 공격합니까? 지가 다녔던 그 교회를 세상에 많은 어떤 교회보다 더 맹렬하게 인터넷은 인터넷마다 다 돌아다니며 공격하겠죠. 나오자마자 글 올리고 계속 하겠죠. 왜 그렇습니까? 왜 그래요? 뭘 믿는데 너희들이 내 믿음에 동조 안 했단 말입니까? 내가 예수 믿는 믿음에 동조 안 했단 말 이예요? 그 뜻이 아니잖아요. 나는 뭘 믿는데 너희들은 왜 내 믿는 믿음에 동조 안 했잖아? 자기는 뭘 믿습니까? 자기는 자기 자신을 믿죠? 자기 자신을 믿는데 동조 안 하니까 미운 거예요. 우리가 예수 믿는데 밉다고 그렇게 미워하지는 않습니다.
파파라치 말고 진드기처럼 달라붙는 거, 스토커가 왜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왜 괴롭히는 거예요? 나는 니를 좋아하는데 왜 내가 좋아한 만큼 왜 니는 나를 안 좋아하느냐, 이 말이거든요. 그러면 그 판은 누가 만든 판 이예요? 지가 일방적으로 만들어 놓고 그 판에 상대방이 동조 안 한다고 공격하잖아요.
인간들이 예수님을 살해했고 하나님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도 예수 판을 짜놓고 예수 판에 동조 안 한다고 다 작살내고 지옥 보내는 거예요. 하나님이나 인간이나 똑같아요. ^_^ 다시 할게요. ‘누구든지 처나 자식을 나보다 사랑하는 자는 내 나라(주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느니라.‘ 어쩌란 말입니까? 들어오려면 들어오고 싫으면 그만 둬라 이 말입니다.
여호수아의 전쟁은 무슨 전쟁이냐 하면 바로 모든 종족들이 신이 있고 그 신은 오로지 자기 종족들만의 유지와 번영과 안정을 위해서 존재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신에 대해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했거든요. 그러면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게 뭐냐 하면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된다니까요. 모든 언약의 기초가. 너를 애굽에서 종 되었던 그 신만이 믿어야 되지,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럼 애굽에서 나오지 않은 사람들은 가만히 있다가 뭡니까? 당연히 저주 받아야 되죠.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주님께서 사건을 일으킨 그 사건에 들어온 사람만 구원되고 사건 바깥에 있는 사람은 어떤 경우라도 여기에 들어오지를 못한다 이 말입니다.
그럼 여기에 뭐가 쳐 있겠습니까? 차단막이죠. 화요일 날 부산 강의할 때 했잖아요. 요단강 건너 갈 때 요단강 건너간다고 약속의 땅에 가는 게 아니고 요단강 건널 때 중간에 뭐가 있죠? 언약궤가 가고 있었죠? 언약궤 안에 같이 동조하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죽음을 이길 수 없죠. 죽음을 못 이기면 약속의 땅에 가서 죽는 거예요. 홍해 건널 때 구름기둥 가지고 애굽 진영과 이스라엘 진영을 구름기둥 가지고 막았죠? 충분히 그 속도로 봐서 히브리인들을 따라잡을 수 있는데 갑자기 구름기둥으로 막으니까 말 타고 우왕좌왕 했잖아요. 그 틈을 통해서 히브리인들이 빠져나왔죠. 구름기둥이 철수되고 나니까 그들이 홍해 바다로 말을 몰았잖아요. 다 죽었잖아요. 그들은 뭘 뛰어넘을 수 없습니까? 새로운 판에 주어진 하나님의 죽음을 애굽 사람들한테는 뛰어넘을 수 없는 겁니다. 그게 영적인 안목 이예요.
그걸 21세기 서울에 그걸 우리가 적용시키자 이 말이죠. 그러면 이 요한계시록은 결국은 판과 판 사이에 하나는 구멍을 뚫고 하나는 뚫어진 구멍 사이에서 그동안 인간들로 하여금 자기가 잘났다고 우길 수밖에 없었던 그런 세 가지 영, 악한 영들,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 이 영들이 튀어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용이라 하는 용어가 어디서 나온 용어입니까? 용이라 하는 용어가 신약에 나오는 용어가 아니고 창세기 3장에 나오잖아요. 옛 뱀, 혹은 용이라 하잖아요. 뱀이나 용이나 구불구불한 건 마찬가지니까.
그렇다면 창세기 처음부터 이미 두 가지 판이 있었던 거예요. 두 개의 판이 있었는데 한쪽 새로운 판은 언약 가지고 쑤셔대고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면 안 된다. 홍해라 하는 것은 그냥 바다가 아니고 사느냐, 죽느냐 이걸 결정 내는 심판의 강이다. 니는 건너올 수 있지만 저들은 못 건넌다.’ 수시로 하나님의 언약이 개입하는 곳에 하나님의 낯선 판이 같이 개입해서 모든 것은 ‘나 외에 다른 신은 없다. 나 외에 다른 신은 없다.’ 순전히 이걸로 온 거예요.
그러면 인간 쪽에서는 마귀가 가만히 있습니까? ‘그런 신은 필요 없다. 그런 신은 꺼져라. 꺼져라.’ 계속해서 그런 신을 배척했고 이쪽에서는 배척해도 들어와서 침범하고, 심지어 나중에는 마귀가 이스라엘까지 장악하니까 이스라엘까지도 망해버리잖아요. 신약에 보면 교회까지 마귀가 들어오니까 하나님이 교회를 부숴버리죠. 그래서 천주교의 교회중심은 잘못된 거예요.
하나님이 언약중심이고 언약이란 것은 사람이 건너갈 수 없는 죽음의 바다 홍해 바다를 언약을 통해서 계속해서 과연 건너갈 수 있느냐, 과연 건너 왔느냐를 보여주는 하나의 측정이죠. 그게 새 언약이고 십자가죠. 십자가로서 계속 측정해 가는 거예요. ‘건너 왔냐?’ 아니면 십자가 안에 들어 있느냐, 언약 안에 들어 있느냐, 아니면 아직까지 그 바깥에서 어슬렁거리고 못 들어오고 있느냐,‘를 계속 묻는 거예요.
그래서 언약이라는 것은 사건인데 이 언약 사건 안에는 사람들이 아무리 다가서도 튕길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내가 이걸 표현하기를 어디서 표현했는데, 안양강의에서 했어요. 이 모습이 마치 여자의 난자주위에 정자가 모이는 꼴이다. 섬뜩하죠. 난자를 뚫으려고 정자들이 수억 개지만 수용되는 것은 하나밖에 없죠. 뺑 둘러싸고 못 들어오는 꼴들 보세요. 예수 그리스도가 수용되는 것이지, 그렇게 지 맘대로 되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이걸 가지고 두 가지로 봐요. 마태복음 13장에 허락된 자만 그리스도 안에 수용되죠. 사건 이예요. 마리아가 임신한 것이 지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고 말씀대로 됐기 때문에 수정이 가능한 거예요.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 만나려고 기다린 게 아니고 갑자가 예수님이 나타나서 ‘사울아, 니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그렇게 나타난 순간 이미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버렸어요. 이거는 자기가 거역할 수 없어요. 그냥 쳐들어 와버리는 거예요. 그냥 침투해버리는 겁니다. 빼도 박도 못하죠. 어떻게 저항할 수도 저항할 문제도 아니죠.
그 언약 사건이 언약 사건을 두 개의 천사와 지상의 판을 가지고 설명한 것이 요한계시록 16장입니다. 흐름이죠. 그래서 요한계시록 16장에 천사를 통해서 이 세상에 반격을 할 때 인간들이 왜 거기서 반항을 하고 회개는커녕 왜 대드느냐, 이것을 한번 보란 말이죠. 그동안 그들이 어디에 의지해서 살았습니까? 바로 기존의 자기들이 만든 구성적 규칙과 구성적 규칙의 토대 위에 규제적 규칙, 법이죠. 윤리 도덕이죠. 나름대로의 윤리 도덕으로 전부 다, ‘그러니까 남은 죽어도 나는 살아남아야 돼.‘라는 각자의 자기 존재에 대한 애착심, 집요한 집착, 이런 것들이 있고 자기만 그런 것이 아니고 주위에 다 그런 사람이 있고 그런 육들의 모인 곳에 주께서 오셔서 결국 그 주님을 십자가에 죽임으로써 되돌아 보냈죠. 되돌아 보낸 주님께서 다시 천사를 통해서 박살내러 오시죠. 판이 잘못됐다. 장기 둘 때 장기판을 엎어버리고 장기 둘 때 장기판을 엎어요. 엎어질 때 우루루 쏟아지면서 ’나는 시체였구나.‘하고 고백하면서 쏟아지면 되는 거예요.^_^ 10분 쉬고 합시다.
가락교회111117-요한계시록16장
(판의 차이)27강b-이 근호 목사 제 27강b 요한계시록 16장 12절에 보면 “또 여섯째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라고 돼 있잖아요? 이것을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사람들 누굴 만나면 압니까? 이걸 전도해야 되고 복음을 전해야 되는데, 요러한 용어들, 요러한 개념들, 요런 단어에 대해서 어떻게 복음을 단출하게 증거 할 수 있느냐, 그걸 우리가 알아야 되거든요. 그런데 여기 있는 단어들이 어느 영역에서 나온 단어란 말이죠. 그걸 설명해 드릴게요.
여기 나오는 단어 있잖아요. 유브라데, 세 가지 영, 개구리 영, 용, 짐승이라는 거, 여섯 대접 이런 거, 연기가 피어오르고 사람들이 반발하는 거, 이런 게 어디서 나오느냐 이 말입니다. 그걸 설명을 해야 되는데, 그걸 단출하게 설명하면 이렇게 되는 겁니다. 단출하게 하는데 어렵습니다.
공간이라 하는 것은 원래 새로운 판에는 공간이 없고 이게 특정 시간을 통해서 이것이 확대가 되면 이게 공간이 돼요. 이 공간은 특정 사건의 시간의 공간화, 이렇게 설명이 돼요. 그렇다면 여기에서의 단어, 뱀이라든지 용이라든지, 짐승이라든지 이런 단어는 기존에 있던 산에 있던 뱀이 있잖아요. 용, 짐승이 있잖아요. 이 짐승하고 똑같은 단어, 용어를 쓰는데 이 용어가 소통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됨으로 말미암아 특정 사건 시간은 기존의 이 사건의 시간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기존의 판을 벗어났다는 것은 그냥 분리되는 게 아니에요. ‘그냥 우리 방 안에 같이 살자. 아이쿠, 짜증난다. 우리 헤어져.’ 헤어지면 그만이잖아요. 그런데 그냥 헤어지는 것이 아니고 이쪽이 헤어질 때 공격하면서 헤어지게 돼 있고 그 공격에 대해서 복수 하면서 공격하게 돼 있어요. 그래서 이쪽은 뭐가 되느냐 하면 그야말로 치열한 싸움터, 의도적으로 하나님이 그렇게 치열한 싸움터가 되는 겁니다. 어디가? 현재 인간 세상의 삶의 판, 사람들이 좋든 싫든 ‘살아야 되겠다.’ 하는 이 세상 판이 영적인 싸움터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이 이 싸움터의 싸움조차도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싸움? 석유 싸움인가? 자본 싸움인가? 핵 개발인가? 이스라엘과 이란? 그래서 싸움이라 하니까 이걸 육적인 관점에서 육적인 관점밖에 해석을 못하기 때문에 기껏 나온다는 싸움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과 이슬람제국의 싸움, 이런 식으로 아마겟돈 전쟁을 설명하는 거예요. 또는 교회와 로마 시대 폭군 네로, 이런 식으로 설명해 놨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기존에 있는 용어를 가지고 기존의 것을 사용했기 때문에 여기는 뭐냐 하면 공간도 따로 있고 시간도 따로 있고 다 따로 있는 겁니다. 공간이 있고 공간의 움직임을 시간이라 해서 자기들은 인정하는데.
여기 예수님 판에서는 공간이 풍선처럼, 사건을 입으로 훅 불면 공간이 되는데 이 공간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여기 짐승, 용, 개구리 같은 용어들이 어디 모여 있습니까? 예수님의 특정 사건 안에 다 포함이 되어 있는 거예요. 포함된 걸 훅 부니까 풍선이 커지니까 사건을 품은, 사건의 속성을 담아내는 새로운 개념의 기존의 용어들 속에 새로운 개념들이 다 포함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이 요한계시록에 그대로 깔려버린 거예요.
유브라데, 유브라데라는 단어는 어디 나오느냐 하면 창세기 2장에 에덴동산에 나오거든요. 그냥 나오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뭐라 그러느냐 하면 ‘시원’ 또는 ’기원‘ 또는 ’태초‘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죠. 시원, 기원, 태초고 동시에 같이 시작점이 있고 거기에 끝점이 있어요. 시작점 옆에 끝점이 있고 끝점 옆에 시작점이 있고, 시작과 끝이 뒤섞여 있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 나오는 뱀, 이런 용어는 전부 다 시작과 끝을 설명하기 위해서 동원된 개념이다.
이러면 요한계시록이 ‘아!’ 왜 뒤죽박죽 이런 용어들이 같이 섞인 이유를 아시겠죠. 기존의 공간도 따로 있고 공간을 흐르는 시간이 있고 정돈된 인간의 이념이 완전히 싸움터로 변했다. 싸움터로 변한 것은 여기서 나온 새로운 사건이 이걸 공격하기 때문에 기존의 여기 구축돼 있는 규제적 규칙 같은 이런 것은 완전히 와해된다. 이 용어를 가지고 성경을 이해했다가는 결국 육적인 해석밖에 안 되는 겁니다. 새로운 사건에 입각해서 해야 되죠. 그 사건이 무슨 사건이겠습니까? 십자가 사건이죠.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그 안에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 담겨있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이 다 한꺼번에 담겨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담겨 있으면 입으로 풍선 불듯이 훅 불어버리면 결국 이 모든 세계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습니까? ‘예수님은 죽었다’는 의미가 모든 데에 담겨있겠죠. 그러면 창세기 2장 해석할 때 거기서 뭘 끄집어내야 돼요? 예수님은 십자가 못 박아 죽었다가 창세기 2장 에덴동산 창세기 1장 창조, 그 속에 이미 ‘예수님 죽었다’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겁니다. 판이 다르니까.
그래서 성경에서 우리가 창세기 2장에 있는 용어가 튀어나오고 또는 뱀이 막 나오더라도 우리는 놀라거나 당황하지 말자 이 말이죠. ‘어, 어떻게 그게 과거하고 미래하고 섞이지?’ 이렇게 놀라면 안 됩니다. 놀라면 지금 뭣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는 말 이예요? 기존의 시간, 공간 관을 유지하고 있다는 거예요. 기존의 시간 공간 관은 누가 판단합니까? 내 몸이 판단하는 거예요. ‘나는 어릴 때 있었고, 20대에도 있었고, 나만의 역사를 만들고 나만의 인생여정을 펼치잖아요. 그렇게 만들어서 나는 20살 때는 세례 받았고 25살 때는 집사가 되었고, 자기만의 역사가 있다 이 말이죠. 자기만의 역사에 따라서 뭐도 같이 흘러가느냐 하면, 여러분, 기차타면 뭐도 같이 흘러가죠? 기차가 움직이면 구름과 집들도 같이 움직이죠? 사람이 자기 몸이 움직이면 자기를 둘러 싼 이 대한민국이라는 환경도 똑같은 시간과 공간 관을 갖고 있다고 착각하면서 같이 움직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몸 따라 같이 흘러가는 여기에 세상을 다루는 게 뭐냐 하면 유행가 노래예요. 7080노래, 지금도 부둣가에 어떤 허름한 다방에 앉아서 비 죽죽 오는 날, 비가 와야 돼요. 비가 오고 날씨가 흐린 날, 변화가 적어지면서 시간이 정지된 느낌이 듭니다. 그러면 아스라이 과거가 생각나죠. 그래서 짙게 화장한 아줌마가 쌍화차 하나 해주면 또 최백호의 ‘낭만을 위하여‘ 아니면 ’긴 머리 소녀’ 김정호 노래 흘러나오면 옛날 20대에 기타치고 놀았던 그때가 그대로 주마등같이 흘러가잖아요. 결국 이게 뭡니까? 세상이라는 것은 내가 만든 내가 편집한 거예요. 내가 보고 들은 것만 거기에 되새겨가지, 남들이 들은 것은 다 내용에 빠져 있어요. 그래서 남자가 여자를 만나서 연애해서 결혼한다는 게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거래인지 몰라요. 서로 과거가 다르고 서로 입장이 다르고 서로 성장 과정이 다른데 그걸 어떻게 하루아침에 딱딱딱딱 끼워 맞춥니까? 평생을 살아도 이게 나중에는 안 맞아요. 틀니도 안 맞듯이 안 맞아요. 안 맞다가 60대에 이혼하고 70대에도 이혼하잖아요. 아무리 맞추려 해도 안 맞는다니까요.ㅎ
내 몸이 느끼는 시간관이 따로 있고, ‘여보 이게 내가 어릴 대 다슬기 잡던 곳이야.’ 지금도 제 아내는 의성 단 촌에 가면 그 이야기해요. 나는 그 의성 단 촌에 가본 적도 없어요. 그런데 가면 그걸 회상한다 말이죠. 그러니까 아내는 자기 과거의 역사 속에 그도 갇혀있는 거예요. 나는 내 역사 속에 갇혀있고, 부부라 해도 역사가 달라요. 어릴 때를 지우개 지우듯이 침해 걸려서, 요새 수애가 침해가 걸려서, 천년의 약속처럼, 자꾸 지워지지 않아요. 계속 심지어 단기 기억은 지워져도 장기 기억은 안 지워집니다. 심지어 침해 환자 같을지라도.
결국 세상은 어디 안에 있느냐, 내 몸 안에 있죠. 내가 아무리 세상을 봐도 내 몸과 결부된 것만 기억에 남으니까 세상이란 내가 보는 세상만 그대로 있고 니가 본 세상은 따로 있고 이렇습니다. 이러한 역사 속에서 여기에 성경 용어가 침투해 버립니다. 그러면 성경 용어가 침투해 버리면 그 용어는 우리가 쓰는 용어거든요. 뱀, 용, 쓰던 용어잖아요. 쓰던 용어니까 어떻게 영접하고 만족하게 해석합니까? 내가 기존의 시간과 공간에서 끄집어내서 마중 나갑니다. ‘아! 뱀은 기분 나쁘고 나쁜 놈, 요거 발로 확 밟아야지,’ 그렇게 본다 말이죠. 그것은 뭐냐 평소에 산에서 뱀을 보면 밟으니까 자기의 경험, 체험이 자기 몸에 각인돼 있잖아요. 그러니까 ‘뱀은 별거냐, 발로 밟으면 그만이지.’ 이렇게 하거든요.
그런데 성경에서 뱀이라 하는 것은 어디까지 연결돼 있습니까? 요 시간의 뱀(용)이라 하는 것은 뭣과 연결돼 있어요? 내 사건이 아니고 누구 몸? 예수 그리스도의 몸, 어떤 예수의 몸? 이 땅에 와서 처참하게 죽었던 몸 아닙니까? 다른 사람이 경험 못해요. 예수님만 경험할 수 있는 거예요. 제자들도 경험 못해요. 하나님 아들이면서도 사람들에게 십자가 피 흘렸던 그 몸이 쏟아낸 용 개념이고 짐승개념이다 말이죠. 그걸 어떤 수로 내 몸의 개념과 시간관에서 어떻게 그걸 해석이 가능합니까? 해석이 안 되죠. 성령이 오게 되면 해석이 됩니다.
그러면 성령이 온다는 말은 결국 뭐냐 하면 희미한 영이 오는 게 아니고, 수증기처럼 귀신처럼 오는 게 아니고 ‘너는 시체다, 너는 죽었다’ 이 말이죠. 너는 뭘 해도 죽은 자고 넌 뭘 해도 죄라는 지적을 통해서 성령이 오게 되면 내 해석은 어떤 해석도 잘못된 해석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렇다면 이 용은 뭡니까? 그동안 나를 이렇게 잘못되게 이끌어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께 ‘why me! 왜 나를 이렇게 !’ 반발하게 만든 그러한 배후세력이라는 것을 감을 잡으면서 바깥에 튀어나오는 것은 ‘저는 예수만 믿습니다.’ 그게 성령께서 그렇게 하셔요. ‘나는 십자가만 믿습니다. 십자가로 구원됐습니다.’라는 고백이 튀어나와요.
이게 오래가면 좋겠는데 요거 몇 초 안 가요. 돌아서면 라디오에서 윤 형주 노래 나오면 주 예수는 날아가고 바바리 깃 세우고 낙엽을 밟으면서 옛날에 내가 학교 다닐 때 어떠했는데, 하면서 자기 회상에 빠져요. 그러다가 가끔 우연히 자기의 첫 사랑도 만나보면 어이쿠, 말도 놓을 수도 없고 말을 높일 수도 없고 어중간하게 ‘어떻게 잘 지내시는...? 흐리는데 ’아빠‘ 하면 ’결혼 했구나.‘ 하고 ’그럼 잘 계세요.‘ 하고 그렇게 보고 싶은 사람도 만나는 것도 몇 초 만에 스쳐 지나가버렸어요. ’누고?‘ 하고 옆에 사모님이 겁나서 슬그머니 가버리죠.ㅎ 결국 아름다운 첫 사랑은 이미 늙어버렸고 나 한때 아름다움이란 것은 처음 만날 때 그때 그 사람, 그때 그 사람 이미지만 계속해서 연모의 대상이 되지, 지금은 늙어빠져서 그런 대상은 나의 사랑의 대상이 아니었어요. 결국 내 사랑이라는 것은 내가 선택했고 내가 꾸미기 나름이지, 사랑은 상대방이 사랑스러워야지, 내가 마음이 낮춰져서 사랑할 만 했을 때 내 사랑을 내가 사랑하는 거예요.
그러니 인간은 결국 나는 누굴 사랑해요? 결국 나는 나를 사랑하기로 이미 용과 뱀과 짐승과 개구리가 이걸 이렇게 부추긴 거예요. 그런데 요한계시록 16장에서는 그걸 뭐라 합니까? 이걸 두 자로 거짓 영, 거짓 영이니까 무엇이 있단 말입니까? 거짓되지 않은 성령이 있다는 이 말 아닙니까?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성령을 받은 자에게는 편히 쉴 것이다. 너희들은 성령 받은 성도, 너희는 편히 쉬어라. 성령께서 이야기하기를 ‘너희들은 편히 쉬어라.’
성령이 있다는 말은 결국은 이 세상 것은 사랑하지 말라 이 말이죠. 지옥에서 뭘 기대하느냐 말입니다. 지옥에서 뭘 기대해요? 이 건희? 정 주영? 삼성그룹? 지옥에서 백날 커봐야 그 사람은 지옥 안의 사람 이예요. 아이고, 지옥 가는 사람들 부러워가지고..... 하여튼 연속극에 빠져있는 아줌마들 보면 한심스러워요. 그게 뭐가 그리 부러운지, 그 연속극에 나오는 면면들이 다 지옥 골목, 골목들의 모습들이예요. 그거 부러운 거 하나도 없어요. 그런 사람들, 그걸 지가 선택했다는 말은 결국 지 선택을 지가 사랑한 게 돼요.
사람이라 하는 것은 자기 편한 대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게 인간입니다. 막살라 하는 것이 명령이 아니고 ‘늘 상 그렇게 살아왔잖아.’ 하는 이야기예요. 평생 그렇게 살아왔으면서 새삼스럽게 ‘막살라’ 하니까 화를 내고, 이게 마귀 짓이지 뭡니까? 막살아놓고 자기는 막 안 살았다고 우기는 걸..ㅎ
목사가 교회 열중하는 것은 자기가 파멸의 길이죠. 목사가 증거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지, 자기 역사, 자기가 만든 역사 자랑하는 교회 그런 것은 이야기하면 안 돼요. 거기다가 집착하면 안 된다니까요. 사람은 구원받기 참 쉬워요.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라 하면 구원받아요. ㅎ ‘누구든지 내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얼마나 쉽습니까? 무진장 쉽죠. 참 쉬운데, 그렇게 되려면 나의 존재 가치는 아예, 제로(0), 마이너스(-) 완전히 마귀 편이었습니다. 나는 죄만 짓는 인간임을 자기가 인정하고 ’나는 지옥의 일부였습니다.‘ 지옥을 건설하는데 나도 동원된 사람이고 나도 거기에 기여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돼요.
지옥 같은 세상에서 주님께서 죽으셨다면 그 죽으심만이 제 구원의 능력이고 그 피만이 구원의 능력이라는 것을 그 피를 통해서 우리는 발견할 수 있죠. 그 안에 바로 요한계시록 16장이 다 들어있는 거예요.
그럼 상세하게 봅시다. 11절 봅시다. 사람들이 여기 11절 “아픈 것과 종기로 인하여 하늘의 하나님을 훼방하고” 아프다는 것은 자기 몸이 아픈 거죠. 그러면 자기 몸이 아프니까 신음소리 내고 따지고 하나님께 욕을 한다. 아프니까. 우리가 사는 판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거예요. 그건 욥도 보세요. 욥도 그렇게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시는 이도 하나님이요.’ 이렇게 신앙 있는 사람 같은데, 갑자기 마귀가 뭐라 해요? 마귀가 먼저 알잖아요. ‘하나님, 한번 건드려 보세요. 좋은 소리 나오는가,’ 막상 신체를 건드리니까 욥에게서 뭐가 나와요? 원망이 나오잖아요. 하나님이 확고하게 장담했던 믿는 자라고 장담했던 그 사람 속에서 원망이 튀어나오고 ‘차라리 이럴 것 같으면 차라리 나를 죽이지, 왜 나를 살려냈습니까?’라고 했다 이 말이죠. 결국 이 아픔이라는 것은 인간은 이길 수 있습니까? 못 이깁니까? 못 이깁니다. 아픔도 못 이기면서 무슨 우리가 예수를 사랑해요?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그래서 여기서 다시 한 번 정리합시다. 우리가 예수 믿고 사랑한다는 것은 이것은 우리가 해낼 수 없는 일이다. 또 다시 우리는 성령께서 오시지 아니하면 예수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지죠.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뭐냐 하면 이 판을 멸망 받는 애굽처럼 완전히, 나중에는 바벨론 나옵니다만 멸망 받는 애굽처럼 마치 일본의 히로시마를 원자폭탄 터뜨려서 완전히 초토화시킨 것처럼 주님께서 완전히 초토화시키는데 그냥 초토화시키는 게 아니고 하나하나 대접을 끄집어내면서 초토화시켜요. 초토화시키면서 그동안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만들었던 원인들, 그리고 요인들, 그리고 거기에 대한 배후 세력들이 자기 정체의 얼굴들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방법으로 순서적으로 첫 번째 대접, 두 번째 대접, 순서를 맞춰서 ‘빨리 얼굴을 들어내 밀어. 빨리, 빨리. 숨지 말고, 소용없어, 니 본색 드러내.’ 하는 식으로 딱딱 하나님의 절차에 맞춰서 딱딱 폭격을 해대는 겁니다.
처음에는 그게 마태복음 13장에 나오죠. 돌밭에 떨어진 씨도 있지만 어떤 데는 처음에는 기뻐하다가 고난 받으면 넘어지는 것도 있지만 처음에는 기뻐해요. 나중에 돈의 유혹과 세상적인 좋아함에서 나중에 가시가 덮어서 결국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그런 게 있죠. 그처럼 이것이 이런 이야기하면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어요.
다시 한 번 하면 우리 몸은 자연의 일부거든요. 그럼 자연을 향하여 공격하는 것이 결국은 어디 공격하는 개념으로 사용하는가, 우리 몸을 공격하는 개념으로 사용한 겁니다. 이게 요한계시록 16장에서 자연을 공격하니까 누가 반발합니까? 우리 몸이 반발하죠. 그만큼 우리 몸은 자연의 일부며 자연을 의지해서 살아왔다, 이래 되는 거예요.
그러면 자연과 우리 몸이 있는데 신은 어디 있습니까? 신은 내 몸이 중심이기 때문에 내 몸을 잘해줄 경우에만 좋은 신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 몸이 11절에 종기가 나고 아프죠? 아프다면 신이라 할지라도 여기서 공격에 딱 나서게 되는 거죠. 요 공격 배후에 누가 있다? 악한 거짓 영이 들어있는 거죠. 결국 우리는 누구의 앞잡이입니까? 거짓 영의 악마의 앞잡이로 살아온 거예요. 어느 누구도 주님의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자력으로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완전히 갇혀 있어요. 그 갇혀 있는 습관이 지금도 수시로 매일같이 발산하고 있거든요. 수시로 인간은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힘들게 살게 하노. 왜 그리 내 몸은 아픈지. 남들처럼 건강하게 다니면 좋은데 나도 몸이 좋으면 옷 입으면 옷도 받쳐주고 참 좋을 텐데...’ㅎ
결국 이렇게 자연을 치는 것과 몸을 치는 것이 일치가 되고 자연을 치면 반발이 나오지만 몸을 치면 배후에 누가 있습니까? 악한 영이 있기 때문에 이처럼 뱀하고 인간하고 결부돼 있기 때문에 뱀은 짐승이잖아요. 인간은 사람인데 동물과 인간이 처음으로 접촉한 곳이 에덴동산이거든요. 그때 유브라데 강이 있었고, 에덴동산의 정황을 훅 불면 그 구석구석에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던 요인들, 이유들이 이 지상에서 하나의 정지된 에덴동산에서 튀어 오르고 정지된 파괴된 에덴동산에서 마구, 마구 솟아오르는 거예요.
에덴동산에서 벗어 난 적이 없습니다. 비록 타락한 에덴동산이지만 에덴동산의 구조에서 우리는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해석을 그렇게 해야 되는 거예요. 우리 쪽에서 ‘에덴동산 옛날 일이다. 아닙니다. 예수님의 몸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같은 풍선 안에 들어있어요. 시간은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그때 그 일이 지금 그대로 되풀이해서 반복돼서 일어나는 일이예요. 그러니 요한계시록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우리 시간과 공간 관을 완전히 부정해야 되니까. 바벨론이요? 그건 먼 나라 이야기잖아요? 먼 나라가 아니라 니가 사는 곳이 바벨론이고 니가 사는 곳이 애굽이라는 거죠. 애굽인 동시에 니가 사는 그곳이 홍해고 니가 사는 그곳이 천국이 되고. 우리의 시간 공간 안이 완전히 깨지죠. 완전히 인정받지 못하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용들의 활동을 보자 말이죠.
그 다음에 14절 봅시다.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전쟁을 위하여, 아! 이건 여호수아를 여러분들이 피곤하니까 시간 관계상 안 보려고 했는데 안 보렵니다. 안 보고 여기 유명한 구절이니까 여호수아 11장 20절, 제가 전에 여러번 인용한 건데 너무 너무 중요해요.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 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 이래 돼 있죠.
그러면 이 성경 구절이 우리 몸 같으면 우리 몸의 계산으로는 옛날이야기죠? 그때 그 이야기지 요즘 이야기 아니죠? 그런데 이게 풍선 안에서는 어떻게 무슨 이야기다? 시간의 흐름은 없어요. 모든 것이 정지죠. 정지라 하는 말은 주일 아침에 설교할 때 정지 화면 이야기했죠? 뭐 할 때 이 이 이야기했더라. 정지 화면, 스톱된 것. (문둥병이라는 것은 우리의 정지된 것을 몸으로 표현한 것이 문둥병환자입니다.)
하여튼 하나님께서는 모든 시간이 스톱이 되고 십자가 사건으로 정지돼 버렸어요. 왜냐 어떤 것도 모든 게 십자가에 예수님이 죽으실 수밖에 없는 요인들로 배치돼 있는 사건들이기 때문에,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끝까지. 그러니까 이 진멸당하는 이 사람들은 그때 예수님 십자가 안 져도 장차 십자가를 위해서 그들은 미리 진멸당해야 되는 거예요. 그럼 그들은 영문도 모르죠. 하여튼 이스라엘 사람들은 인정도 없어. 왜 어린애, 젖먹이까지 다 죽이려 하는가, 왜 죽입니까? 이 칸막이, 거짓된 것은 참된 하나님에게 허락 없이 들어올 수 있다? 없다? 없다는 거예요. 그럼 허락은 누구한테 받는가, 방금 누구한테 모세의 무슨 대로? 말씀대로. 모세의 언약의 혜택을 입는 사람은 은혜가 돼요. 언약에 들어오기로 은혜 입은 사람만 이 안에 들어와요.
그럼 은혜라는 개념이 뭡니까? 은혜라는 개념이 두 가지 개념이 있죠. 우리 몸 중심의 은혜가 뭡니까? 내 몸이 건강하고 잘 되고 편하고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도 내 혼자 천당 가도록 사는 것, 이걸 은혜로 아는데, 여기 진짜 은혜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 그 죽으심에 동참해서 사나 죽으나 이미 주의 것이 되어서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살고 죽어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 그러한 상태에 돌입하는 그것이 은혜죠. 거지 나사로 같은 사람! 살아있을 때부터 이미 아브라함 언약이 언약 속에 있어서 그것이 그대로 죽으니까 그 아브라함 품에 안기잖아요.
지금부터 우리 안에 예수님의 자리가 있어야 돼요. 갈라디아 2장 20절,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있어서 예수님이 계속해서 퍼내는 거예요. 삽질 하듯이 퍼내는 거예요. 마치 태국에 홍수 나서 각 가정마다 물 퍼내듯이 물 들어오면 물 퍼내고 들어오면 퍼내듯이 우리 안의 예수님께서 부지런히 십자가 묵시적 능력에 의해서 계속해서 세상에서 밀려오는 우리가 바깥에서 세상에서 수입해 들어오는 밖에 나가면 다 들여와요. ‘아이 좋더라. 저거 좋더라.’ 해서 들여오면 계속해서 퍼내는 거예요.
누구든지 나보다 사랑하는 합당치 않다.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뭘 받으리라? 저주를 받으리라. 그 말씀 가지고 그 말씀 기준해서 계속 퍼내는 거예요. 퍼내면 또 들여오고 퍼내면 또 들여오고, 퍼내면 우리는 또 집어넣고, 왜 우리 습관이 몸의 습관이 있기 때문에 옛날에 나를 살게 했던 것들이 없으면 내가 못 삽니다. 왜냐 하면 나는 과거의 산물이기 때문에, 내가 과거를 보낸 것이 아니고 과거가 만들어 낸 것이 지금의 나가 됐기 때문에 나는 항상 과거의 인연과 안 끊어집니다.
입맛도 새로운 거 고급 음식도 입맛에 안 맞아요. 옛날에 먹던 칼국수나 만두 먹어야 맛있다 하지, 새로운 고급 음식 먹어야 맛도 없어요. 왜냐, 내 입술 하나, 세포 하나, 내 두뇌 하나 전부 다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과거의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과거가 만들어요. 과거 주변 환경이 만든 거예요. 사람의 몸은 전부 다 환경이 만들어 낸 거예요. DNA부터, DNA가 퍼질 때는 환경 따라서 맞춰서 적응해서 하는 거예요.
그래서 주일 날 아침에 설교했어요. 있음이란 몸이 환경에 부응한 것이다. 그래서 환경에 부응하는 것은 전부 다 뭐가 됩니까? 위선이 되는 거예요. 위선! 어제 나는 어제까지 만들어 낸 나기 때문에 그건 오늘 되면 취소해야 됩니다. 오늘은 오늘까지 만든 나기 때문에 어제 만든 나는 그건 사실은 나가 아니죠. 그렇게 만들어 놓기 위해서는 계속 주께서 말씀 가지고 더러운 것들을 삽질해서 퍼내기 바쁘죠. 계속 퍼냅니다.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것은 지금도 에덴동산은 끝나지 않았다. 그 사건은 본격적으로 예수님 이후에 본격적으로 시작이 된 겁니다. 거기서 뭐가 있었느냐, 전쟁이 있었다 하죠. 그러면 이 전쟁은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전쟁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창세기 3장 15절 유명한 말씀이죠.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전쟁을 벌이고 싸웁니다. 그 운명에서 벗어날 인간은 없습니다.
이 전쟁이라 하는 것은 십자가 아는 사람만 눈에 들어오는 전쟁이지, 육에 있는 사람은 무슨, 희한한 소리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의 여파로 모든 것이 전쟁터로 변했다는 것은 십자가로 해석을 할 때만 밝혀지지, 그냥 평소대로 몸의 습관대로 살면 우리 몸은 그렇게 전쟁 안하죠. 지금 우리 군대가 있기 때문에 북한이 안 쳐들어오잖아요. 그냥 매일매일 조용하잖아요. 우리 대한민국이 사업하기가 괜찮은 이유가 치안이 어느 정도 유지되기 때문에 그렇죠. 만약에 치안이 유지 안 되면 도둑놈이 와서 창고에 있는 물건 다 가져가 버려요. 그러면 외국에서 투자를 안 한다 말이죠. 할 수가 없죠. 그리고 치안도 치안이지만 세금 행정 이런 것들이 안정이 돼서 나라가 보장을 해줘야 돼요.
이건 성경하고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오늘 이태리 채권이 6.99%인데 6.99% 준다는 말은 얼마나 나라 사정이 어려웠으면 나라가 책임지고 7%나 나라에서 이자 쳐줄 테니까 우리 채권 좀 사서 우리 이태리에 외화 좀 들어오게 해 달라. 그런 뜻 이예요. 이게 3%이가 되면 국가 부도예요. 얼마나 답답했으면 국가 채권을 높은 이자 쳐줄 테니까 제발 채권 좀 사서 그 채권 서서 돈 좀 불릴 생각을 하라는 거죠. 그래서 전쟁이라 하는 것은 이태리가 그렇게 할 때 이태리 싫어하고 미워하는 국민들은 ‘아유, 신난다.’ 하겠죠. 그런데 이태리 국민들은 뭡니까? 이건 이제는 완전히 IMF 터지는 것처럼 불안하다 말이죠.
그래서 사람이 몸을 갖고 있는 전쟁은 누구 중심의 몸 전쟁입니까? 내 몸 중심의 전쟁이지 예수님 십자가 죽었던 그 몸 중심의 전쟁은 아니다 말이죠. 그럼 교회는 어때요? 교회도 마찬가지죠. 교회 십일조 바치고 땅 바치고 교회에서 집사에서 장로로 승진할 때 목돈 갖다 바친 사람들이 그들은 우리 교회 목사고 설교 진행 그런 건 따지지 않아요. ‘누구야, 내가 땅 바친 교회 욕하는 사람이 누구야.’ 그걸 목사들이 노린다니까요. 목사가 노리고 일부러 승진할 때 목돈을 바치게 해서 교회 기둥같이 쓴다니까요. 기둥같이, 사실 기둥이 아니고 물주죠.ㅎ 아, 개척교회 성도가 어디 있습니까? 물주 하나 잡아서 그 사람에게 교회 운영을 맡김으로써 그런 사람 서너 명 있으면 교회 된다 이 말 아닙니까? 예배당 지면 올 것이고 사람은 교회 와서 구원받으려고 올 거고, 왜, 지상에 있는 시체들 있는 자연세계에 있는 이미지가 교회를 통해서 구원받으려는 그 외에는 다른 계시가 필요 없잖아요. 얼마나 쉬워요? 교회가 전도해서 구원받고 세례 받고 구원받고, 나는 그처럼 쉬운 게 없다고 봐요.
‘예수를 믿으세요.’ 이건 어려워요. 내가 날 사랑하고 나는 믿는 게 나밖에 없는 상태에서 죽어서 지옥에는 가기 싫고 무서우니까 내 몸을 사랑하면서도 주님을 사랑하는 티를 낼 수 있는 방법은 교회에서 마련해 주는 이벤트에 참여하면 된다 이 말입니다. 이벤트가 뭡니까? 머리에 물 뿌려주는 것하고 빵 떼서 먹는 것 아닙니까?ㅎ 속았어요. 거짓 영들에게 속은 겁니다. 교회라는 곳에 그동안 속은 거예요. 아니 내가 말 잘못했어요. 교회에 속은 것이 아니고 지가 날마다 자기를 속인 거예요. 예수를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남한테 안 들키려고 하나님께 안 들키려고 몸은 환경에 부응되니까 위선밖에 없는 그런 식으로 살아온 거죠.
그게 요한계시록에서는 뭐냐, ‘빨리 욕해, 나보고 욕하란 말이야.’ 그런 사태를 자꾸 우리 주변에 우리 가정에 일으킵니다. ‘이래도 욕 안 할 거야? 이래도 니가 마귀 속에 안 속했어? 욕해, 욕하란 말이야.’ 전쟁 이예요. 전쟁!! 그리스도 몸이냐, 우리 몸이냐, 어느 게 소중 하느냐, 어느 게 사랑스러우냐, 그 전쟁이 시작된 거예요. 그 전쟁은 바로 우리 몸, 우리가 환경의 일부니까 우리 몸에서부터 이미 벌써 벌어졌던 거예요. 그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뱀의 후손이죠. 심지어 마리아도 뱀의 후손이죠. 그런데 성령이 임하니까 예수님의 영이 침투를 하니까 예수님의 자리가 있으니까 그때부터 마리아는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을 임신하게 되죠. 그러니까 우리 말고 우리 자리에 예수님의 자리가 있어야 된다니까요. 사도바울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예수님이 살려주는 그 힘으로 사는 거예요. 그것을 그 관계를 믿음이라 합니다.
믿음이라 하는 것은 두 번 다시 누굴 안 믿는다? 진짜 나 믿으면 진짜 개다.ㅎ 내가 나를 믿다니, 말도 안 돼, 내 헌금을 믿고 내 기도를 믿고, 말도 안 돼, 나는 뭘 해도 안 되는 인간이야, 처음부터 안 됐고 지금도 안 되고, 왜, 주님한테는 시간이 흐르지 않으니까 정지된 상태니까, 처음에 믿음 줄 때 그 상태로 굳어졌으니까 계속해서 그 상태로 계속 가는 거예요. 처음도 주님의 몫이고 마지막도 몫이고 끝까지, 처음 예수 믿을 때는 우리 힘으로 믿는 게 아니고 처음부터 끝까지 어느 날짜 11월 15일 16, 17일, 어느 날에도 주님께서 안 살려낸 날이 없었습니다. 참새를 기르듯이 들풀을 키우듯이 늘 키워왔었어요. 우리는 만날 내 몸만 생각하죠. 그러다가 가끔 ‘주께서 지금 살려 낸 것 같아.’ 그것도 ‘습니다‘가 아니라 ’같아’ㅎ
우리가 왜 그러느냐 하면 이 세상을 지옥으로 보지 않고, 성경적 관점으로 보지 않고 지옥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지옥에서 기대할 게 너무나 많아요. 애들 시집도 보내야 되고 집도 넓은 쪽으로 옮겨야 되고 전세도 구하고 해야 장가갈 수 있고 남들은 다 잘 사는데 바보 등신도 아니고 나는 왜 그러느냐, ^_^ 아직도 부러운 게 남아 있어요. 못 다 이룬 한이 있어요.
그래서 한국교회는 한의 교회라 합니다. 한 맺혀서 만들어 낸 교회가 한국교회라 하는데 한국뿐만 아니라 세상 다 그래요. 그 한이 무슨 영이다? 거짓 된 영이다. 예수님을 죽였던 그 뱀의 후손들이 조합해서 만들어 낸 한 맺힘, 그 한 맺힘을 육적인 방법으로 달래줄 때는 그것은 교회 안 가도 교인이고 교회 크지 말라고 해도 전 국민이 전 인류의 교회 화! 전 인류가 교회예요. 구태여 교회 안 가도 이미 교인 이예요. 마치 불교에서 절에 안 가도 불자라 하죠. 기독교도 마찬가지예요. 천주교는 이미 넘어졌고 교회 밖에도 그리스도인이라 해서 모든 인간이 양심껏 살면 이순신 장군이든 누구든 양심껏 살면 천당 간다 했으니까 소크라테스고 아리스토텔레스고 구원받는다 했으니까 앞으로 그렇게 해야 장사되니까 까짓 거 기독교도 장사 못 할 게 뭐가 있어요? 장사만 되면 되니까, 모든 인류가 신의 형상을 입어서 다 천국 간다는 이런 논조가 나온다 이 말이죠.
그럼 십자가는?? 예수 죽은 것은 무슨 의미냐, 그런 것이 사람의 귀에는 듣기 좋은데 그럼 예수님이 십자가 피 흘려 죽은 것은 무슨 의미냐 말이죠. 내가 만약에 내 몸에 대해서 사랑을 하고 신경을 써 버리면 결국 예수님의 죽으심은 저 한데(바깥) 뚝 떨어져 나가 버려요. 우리 집에서 우리 가정에서 우리 사업체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뚝 떨어져 나가서 흔적도 없어요. 그냥 십자가만 걸려있지 없어요.
얼마나 예수님의 죽으심을 우리 몸이 얼마나 싫어하고 가까이하기 거북스러워하는지 부담스러워하는지 우리가 너무나 잘 압니다. 뭐 남들이 십자가마을 사람들 부정적으로 본다 하지만 우리가 왜 부정적으로 보기를 원하겠어요? 주께서 그렇게 하니까 하는 것이지, 만날 십자가, 십자가, 생각하는 그렇게 살 수가 없는 거거든요. 그런데 성령께서 십자가 복음 아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주는데 주께서 찾아오는 걸 오지 말라 할 수도 없고, 어떻게 하겠어요?ㅎ
그래서 제가 말했잖아요. 가끔 자기가 믿는 자 아니라고 장담해 보라고요. 그거 아니야,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나라고 나를 꾀일 수 없다, 나라고 나를 넘어뜨릴 수 없지 않는가. 내 몸이 아닌데, 내 몸이면 내가 간수해서 내가 관여할 수 있는데 내 몸이 아닌 이상 주께서 십자가 증거 하라고 사용하는 이상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대응하는 힘이 없습니다.
15절 봅시다.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여기, 자기 옷이라 하는 것에 뭐가 묻은 옷입니까? 어린양의 피 묻은 옷이죠. 그것이 요한계시록 7장 14절에 나오죠. 어린양의 피로 씻어서 하얗게 되었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입은 옷은 예수님의 피 묻은 옷이란 말이죠. 옷이라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위치와 위상과 신분과 그 사람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오죠. 우리가 예수님의 뜻으로 옷을 입어서 같은 옷을 입었다. 이것은 마치 제사장들이 제사장직을 인수인계 할 때 아버지 제사장 옷을 아들이 입음으로써 제사장 직위 인수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뭔가 우리가 덮어씌웠어요. 예수님 피 묻은 옷이 덮어씌웠어요. 우리는 피 묻은 옷 밑에서 세상을 좋아하고 세상을 기대하고 남한테 안 지려고 또 내 뜻대로 안 되면 화내고 악에 받쳐서 달려들고 합니다. 하지만 피 묻은 옷이 옷 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가만두지 않아요. ‘니 옷 값 좀 해라. 피 묻은 옷 값 좀 해라. 니 신분이 다른 사람과 다르잖아. 다른 사람은 세상 좋아하면 이해한다. 지옥에서 지옥가지 뭐.’ 지옥에서 지옥가지 어디 가겠습니까? 하지만 빠져나왔다면 다시 한 번 그것을 이 세상이 지옥인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그러한 안목을 유지해야 되겠죠. 그게 바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세상 것이 없다고 해서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다 이 말 이예요. 세상의 것, 멸망당할 것, 지옥의 것이 없다고 해서 천국 사람들이 아쉬워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죠. 천국 것이 없어서 아쉬워한다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지옥의 것이 없어서 아쉬워한다면 말이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지상에서 만큼은 좀 당당하게 수치를 생각하지 말고 당당해야 돼요. 어떤 사람은 죄 짓는다 하는데 우리가 처음부터 언제 죄 안 진적 있는가요? 뭐 새삼스럽게 죄 짓는다 그래요? 죄 졌다 하는 것은 평소에 지는 죄 안 졌다고 우기는 시간을 보냈다고 스스로 자백하는 거밖에 안 돼요. ‘나 오늘까지 너무 잘 살았어. 아! 이건 실수네.’ 뭐가 실수인데? 처음부터 다 그랬는데.
그 다음에 봅시다. “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자, 왜 전쟁하는 그 전쟁터가 아마겟돈이냐 하는 거죠. 므깃도, 므깃도라 하는 곳이 어느 곳이냐 하면 여러분 아시죠? 사사기 5장에 보면 여자 선지자 나오죠? 여자 선지자가 이름이 누구죠? 드보라가 전쟁했던 장소가 므깃도예요. 5장 19절에 “ 열왕이 와서 싸울 때에 가나안 열왕이 므깃도 물 가 다아낙에서 싸웠으나 돈을 탈취하지 못하였도다” 므깃도 자리에서 전쟁한 이유는 ‘전쟁의 취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면서 전쟁을 일으킬 때 어떤 성경의 여러 지명 가운데서 어떤 특정 지명에다가 갖다 붙임으로 말미암아 현재 일어나고 있는 세상의 모든 전쟁의 의미가 옛날 그 지명에서 일어났던 전쟁의 의미의 확대입니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죠. 그렇죠?
‘아이쿠, 이 집안 개판이다.’하는 것은 이 집안에 돌아가는 것이 개들이 살았던 것을 빗대어서 그 정황을 그 개판이란 용어를 동원해서 이 집안에 사용하면 그 개집에 싸움이나 이 개판이나 똑같은 개판이라 말이죠. 그래서 성경에서 므깃도, 아마겟돈, 므깃도 산에서 싸운다는 것은 이전쟁의 성격을 성경은 제대로 파악하라 이 말이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될 것은 아마겟돈 성격이 뭐냐, 뭐의 명분을 위한 전쟁입니까? 집결한다는 것, 집결은 모든 다양성이 소멸되고 이것이 뭐를 이룬다? 하나의 다양성의 반대말 통일성이죠. 하나의 통일성으로 굳어지는 거예요.
자, 예수님 죽을 때 두 파가 있었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죠. 평소에 그들은 의사가 달랐죠. 달랐는데 어디서 통일됐습니까? 예수님 십자가 죽으실 때 통일됐죠. 민중들하고 지도자하고는 성격이 같지 않아요. 그런데 바나바란 강도를 풀어줄까, 예수님을 풀어줄까, 했을 때 민중들은 어느 것을 선택했습니까? 바나바를 선택했잖아요. 성격이 통일됐다 말이죠. 앞으로 안철수 나오고 하면 한국의 국민들이 어떻게 통일되는지, 한번 봅시다. 국회의원 뽑아줄 것이냐, 국회의원이 아닌 자를 뽑아줄 것이냐, 교수를 뽑아줄 것이냐, 모르겠어요.
그래서 성경이 통일 되는 것은 내부에서 그들은 다 같이 같은 류로 조정 받아 왔다는 거예요. 모든 세상의 신학들이 많아도 한결같이 공격하는 게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은 결코 죄인이 아니라는 거예요. 세상의 모든 신학들, 꼭 한 가지, 인간은 결코 구원받지 못할 정도의 죄인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게 제가 개혁주의가 이단인 이유 10가지 나오는데서 끝부분에 보면 그게 나와 있어요. 그래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성에 그래도 그 접촉점, 하나님과 인간이 맞닿을 수 있는 그 유일한 뭔가 자리가 있을 것이다. 그걸 어떤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 하고, 대부분 그렇게 이야기해요. 형상이 완전히 죽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개신교고 다 죽지 않고 흔적이 남아 있어서 착한 일로 북돋아주면 온기가 피어난다고 보는 게 천주교고, 우리가 신학교 때 조직신학 배울 때 그렇게 배웠어요. 개신교와 천주교의 차이점. 그러나 뭐는 없어지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는 고 마지막 점 하나는 없어지지 않았다. 그것을 가지고 그들은 뭐라 하느냐 하면 인간의 종교성만 남아있다고 이렇게 본 겁니다. 그런데 제가 이걸 굉장히 공격했잖아요. 고린도전서 2장에 의해서, 십자가는 사람의 마음으로도 깨닫지 못한다.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면 뭐로 깨달아요? 그럼 마음은 끝난 거죠? 마음으로 깨닫는다는 소리하면 안 됩니다. 마음은 물 건너간 거예요.
그럼 마음이 인간의 마지막 제일 깊은 것인데 마음마저 십자가 구원의 능력을 접촉하는 데 실패했다면, 그래도 구원됐다면 뭐냐 말이죠. 그러면 어디에 근거에서 구원된 거예요? 외부에서 와요. 계룡산! 외부에서 성령이 오게 되면 이 성령은 우리 마음에 포함된 거예요? 포함 안 된 거예요? 포함이 안 될뿐더러 성령께서는 예수님 십자가 죽음을 근거로 하기 때문에 우리 마음은 외부의 성령의 것을 공격하는 성향을 띠고 있어요. 그래서 성령이 오게 되면 그때부터 뭐를 압니까? ‘아! 우리는 내 마음은 주님의 십자가를 반대하는 성향을 갖고 있구나.’하는 걸 평생토록 그걸 노출시키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바로 주님을 싫어하는 당사자, 죄인입니다.’ 이런 자가 성령 받은 사람 이예요.
‘성경대로 바르게 산다.’ 이런 사람이 성령 받은 사람이 아니고 ‘난 뭘 해도 내 공로로 내 성과로 삼을 정도로 나는 나밖에 모릅니다.’를 이제 제대로 고백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나 죄인이라는 것. 나는 십자가 앞에 죄인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아요. 그런데 이게 뭐가 어려워요.
다시 한 번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아마겟돈에서는 하나님의 전쟁의 성격을 이야기해준다. 이 성격에서는 뭐라 했습니까? 모든 악들은 집결돼 있다. 집결됐다는 말은 다양성들이 어떻게 되느냐, 하나의 통일성인데 통일성이 지향하는 방향은 뭡니까? 바로 이스라엘에 누가 계시다? 하나님의 이름이 있죠. 이스라엘도 몰랐어요. 하나님의 이름을 향하여 집결돼 있어요. 저쪽에서. 노리는 것은 오직 진짜 숨어있는 하나님, 여호와 이름, 그것을 공격하기 위해서.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말씀하신 그 언약을 가져갈까 싶어서 하나님을 공격하기 위해서 모든 반 언약들을 집결하는 그 것, 그래서 그 전쟁은 이미 벌써 여기서부터 시작이 된 거죠. 왜, 묵시 안에서는 시간이 정지 상태니까. 화면 자체가 정지 상태니까. 한꺼번에 하나의 거대한 화면이 그림처럼 우리에게 다 다가오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우리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는데 판이 달랐습니다. 사람들은 이해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가져온 천국 판을 사람들은 천국으로 되돌려 보냈습니다. 그 속에 우리가 있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기존의 판이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는 나밖에 모르는 나만 사랑하는 그런 판인 것을 발각당하고 노출시키는 그 십자가의 능력을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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