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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11강 / 종말과 종말론적과의 차이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계시록

11강 / 종말과 종말론적과의 차이

정인순 2011. 3. 18. 17:20

 

 

종말과 종말론적과의 차이

음성1  음성 2

 

녹취:이한례

 

가락교회110317

요한계시9장-(종말과 종말론적과의 차이)-11강a

(이 근호 목사)


제 11강a

오늘 요한계시록 9장을 할 차례지만, 요한계시록 성경 해석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를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김 집사님이 직접 들어가라 하니까 들어가겠습니다.ㅎ 세상의 현실은, 여기 불완전 한데서 완전으로 나갑니다. 점차 높은 곳으로 나가죠. 그런데 요한계시록 해석은 이렇게 여기에 위에서 완전한 것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리라. 땅에서도 완전히 되는 겁니다. 보세요. 여기 밑에 인간이 있잖아요. 밑의 인간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불안하다고 보는 겁니다. 이 세상에는 죄도 있고 악도 있고 다툼도 있고 평화도 없고, 서로 시기하고 싸우니까 이것이 불안전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요한계시록 관점은 획기적 이예요. 이 땅에 악마가 있고 다툼이 있고 시기하고 환란이 있고 일본에 지진이 일어나고 원전 터진 이것을 놀랍게도 이것을 완전하다고 봅니다. 이것은 인식의 발상의 전환 이예요. 이걸 완전하다고 보는 거예요. 완전!!! 이 세상에는 불안전하기 때문에 여기 살기 힘드니까 더 좋은 나라를 추구하는데 이렇게 추구하는 그것과는 상관없이 현재 네가 힘들게 살아가는 그것이 너에게 합당한 완전한 너에 대한 대가라는 거죠. 니가 하는 짓에 대해서 그것도 과분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찾아야 되겠죠.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요한계시록은 뭐냐 하면 종말의 이야기라는 거죠. 종말은 마지막 때라 하거든요. 종말을 사람들이 이해를 못하니까 여기다 글자 하나를 덧붙이죠. ‘종말론 적’ 그래서 신학 공부하면서 ‘종말‘과 ’종말론 적‘을 구분해야 신학에 눈을 뜨는데 이게 눈이 안 떠져요. 신학 학생들이 눈이 안 떠져요.

 

종말론 적과 종말이라는 것의 차이는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종말론 적이라는 것은 종말이 가깝다. 세례요한이 뭐라 했습니까?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그다음에 뭐라 돼있죠? ‘가까이 왔느니라.’하는 거예요. 이 ‘가까이 왔느니라.’를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면, 바로 지금은 불완전하지만, 하늘나라가 오게 되면 완전하다. 지금 접근해간다. approach. 그런데 세례요한이 하는 말은, 그런 뜻이 아니고 종말이 이쪽에서 가까이 가는 것이 아니고, 종말이 이쪽에 다가오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종말에 가까이 가는 것이 아니고, 종말이 여기서 우리에게 덮치는 거예요.

 

마치 지구상에서 거대한 혜성이 지구를 덮칠 때, 그때 천문을 공부한 사람은 뭐라 합니까? ‘어, 가까이 온다. 가까이 온다.’ 하잖아요. 그 가까이 온다 할 때는 지금 이쪽 형편, 이 지구상의 형편을 고려해서 가까이 오는 게 아니고, 지구는 가만히 있는데 저쪽이 접근해 온다는 거예요. 어느 것이 움직이느냐 하면, 이쪽은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저쪽이 움직이는 거예요. 세례요한이 생각했던 게 뭐냐, ‘하늘나라에 어떻게 가자’가 아니라 우리는 평상시처럼 먹고 마시고 밥 먹고 사업하고 이러고 있는데 저쪽에서 들이닥치고 있다는 겁니다.

 

그 들이닥치는 세계가 어떤 세계냐 하면, 이질적 세계, 성질이 다른 세계, 전혀 예상 못한 성질이 다른 세계라는 겁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이쪽 세계와 다가오는 하늘나라, 천국과 지구, 유성 사이에 성질이 같은 공통점이 없다는 거예요. 공통점이 없다고 해서 나중에 배척합니다. 강하게 반발하는 거예요. 만약에 저쪽에서 세례요한이 오지도 않았고 선지자도 오지 않았고 예수님도 나타나지 않았으면 우리는 완전하지는 않지만 부족한 건 있지만 건전하고 우리는 이 상태로서 하나님이 오시면 얼마든지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자부했던 그들에게 주님이 오시기 전에 먼저 누구를 보냈습니까? 세례요한을 보낸 거죠. 이 말도 보세요. 우리가 세례요한 다음에 예수님 온다고 하잖아요.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 하지 않고, ‘내가 오기 전에 세례요한을 보낸다.’ 하는 겁니다.

 

그러면 기준점이 뭐냐, 세례요한이 과거에서 현재에서 미래로 가는 것이 아니고, 방향이 반대가 되는 거예요. 미래가 본부(아지트)고 미래를 위해서 미리 땡겨 준 것이 세례요한이고 미리 땡겨 준 것이 모세고 엘리야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예수님 보기를 원했다가 봤다는 거죠. 쉽게 말해서 ‘누가 나를 보냈습니까?’ ‘아! 주님!! 주님 보고 싶어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종말에 사는 성도는, 세례요한처럼 내가 천국에 다가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 왜 나를 미리 던져 놓았습니까? 서울 땅에, 이 송파구에 왜 저를 미리 던져 놓았습니까? 왜 진즉 저를 태어나게 했습니까? 뭣 때문에, 뭣 땀시로, 무슨 임무가 있어서, 미리 툭 던지셨습니까?’

 

 한국 놀이에 ‘올케놀이’라는 게 있어요. 외국에도 있는 걸로 아는데, 아시죠? 1, 2, 3, 4, 5, 6, 7 이렇게 해서 애들이 미리 던져놓고 하는 놀이인데, 던져놓은 곳을 밟아가는 거예요. 이런 걸 경상도에서는 올케놀이라 하는데, 서울에서는 뭐라 하는지 모르겠어요. 표준말로는 사방치기라는 게 있거든요. 해 봤습니까? 주님께서 먼저 던져놓고 주님께서도, 사방치기 특징은 뭐냐 하면, 자기가 던진 돌을 되찾아오는 거예요. 예수님이 던져놓고 모세 던져놓고 되찾고, 아브라함 던져놓고 되찾고 이삭 던져놓고 되찾는 겁니다. 고 되찾는 고 관계, 찾으시는 분과 찾아진 관계를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도바울이 이걸 ‘의’라고 하는 거예요. 밧줄입니다. 소유라는 게 아니에요. 밧줄이고 파이프고 연결 이예요.

우주를 여행하는 우주선과 우주인 사이에 지금은 아니지만, 옛날에는 처음에 암스트롱들은 밧줄 가지고 그들이 우주선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우주에 미아가 되지 않도록 그렇게 했거든요. 이 밧줄을 가지고 ‘의’라고 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뭐라 했습니까? ‘의‘가 됐죠. 그 의의 밧줄에 낚이는 사람을 뭐라 하느냐 하면, 의인이라고 해요. 우리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갖고 있는 선과 악의 개념하고 완전히 다르죠? 밧줄 이예요. 그걸 고상하게 ’관계성‘이라 하는데 쉽게 하면 밧줄입니다.

 

환란과 핍박과 곤고나 어떤 어려움이 온다 할지라도 주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죠.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너희들이 뭐를 가질 생각하지 말고, 끊어지지 않는 밧줄에 주목하라는 거예요. 밧줄을 가질 필요가 없어요. 오히려 밧줄은 우리 것을, 우리 내장까지 다 끄집어내죠. 갖다 버리라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그동안 ‘이것은 내 자아야, 이건 내 주체성이야,’라고 한 것까지 갖다 버리게 만들지, 거기다가 또 밧줄까지 내 소유로 이렇게 붙이지 말란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자꾸 확장되니까, 우리 자아가 확장되면 반드시 그건 나만 생각하는.

 

 ‘낚였다’라는 말을 하는데 그래서 베드로보고 하는 말이 ‘네가 전에는 고기 잡는 어부였지만 이제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라.’하는데, 낚였다는 겁니다. 낚이는 방법이 이걸 ‘시간 론’으로 바꾸면 뭐냐 하면, 미래가 과거에 미리 던져놓고 미래에서 오신 분이 그걸 되찾는 방식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게 되면, 기존의 인간들이 단 한명도 자력으로 구원이 안 되게 하기 위해서 그런 겁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인간의 힘으로 구원이 안 되게 하시는 분이예요. 그런데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느냐 하면, 인간은 아무리 이야기해도 반드시 자기 힘으로 구원 될 때, 확인을 하는 버릇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익히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구원 받은 흔적을 본인이 챙기고 그걸 자꾸 확인해 보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것을 뭐라 하느냐 하면, 그걸 ‘역사’라고 합니다.

 

이제 요한계시록의 해석이 드디어 무엇이 잘못 됐는가에 들어갑니다. 요한계시록의 기존 해석을 뭐로 보느냐 하면, ‘역사적 해석법을 해요. 역사적 해석법에 종말을 집어넣으면, 종말이 들어가는 게 아니고 기껏 해야 ’종말론 적‘이 돼요. ’끝이 다 왔으니까 조심하자. 끝이 되었으니까 기름을 준비해야지. 기름은 뭐냐, 성령이다.‘ 이런 식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굉장히 초조하게 만들고 긴장되게 만들어요. 이것은 미완료를 뜻합니다. 뭔가 완료되지 않은 상태에 있을 때, 그 빈칸을 계속 뭔가 하나님께 맡겨서 빈칸을 더 채워 주게 되면 결국 미완료가 완료로 옮겨갈 수 있다고 생각하도록 사람들이 그렇게 해요.

 

말이 어렵습니다만 제가 기존의  신학을 지금 이야기 한 것 같지만, 신학이나 철학이나 마지막은 쭉 잘 나가다가 점선(....)이 있습니다. 미완료가 남았어요. 항상 ’이것까지는 우리가 하지만, 여기까지는 신의 몫이다.‘라고 남겨두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프러스(+) 하나님이 하신 것을 보태면 이게 완료가 되고 완전히 되어서 구원 받는다는 거예요. 이게 한국을 지배하는 ’개혁주의 신학‘이라는 겁니다. 개혁주의 신학!! 그래서 여기서 실선이 3이고 점선이 7되는 반면에 실선이 7이 되고 점선이 3이 되는 사람은 이 앞에 있는 사람보다 더 성화 되었다고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것을 산으로 그리면 진리는 최고에 있는데 항상 거기는 아무나 도달할 수 없다. 하지만 이만큼 도달한 사람, 내신 성적 2 등급, 한 70점 되는 사람, 60점 되는 사람, 이런 식으로 교인 관리에 나서죠.

 

그래서 제일 높은 산에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목사가 되겠고, 목사가 저 밑에 있는 40점 되는 사람을 자기가 인사 관리하는데, 일종의 기업 경영 마케팅과 똑같은 겁니다. 우리가 손봐주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누가 관리하게 돼 있습니까? 성령님이 관리하게 돼 있는데, 인간이 관리해 줄 때는 위로해주고 이런 게 있지만 성령이 관리할 때는 위로하는 게 없어요.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매일같이 십자가에 근거해서 뭐든지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영원히 죽을 때까지 없어지지 않는 이 육체적인 본성, 좋은 것만 무조건 바구니에 담아서‘ 요 좋은 것 들어가 있는 바구니는 곧 납니다.’라고 자기를 그런 식으로 구축하고자 하는 그 습성, 그 습성을 성령께서 매일같이 지적하면서 그 바구니 다시 쏟아내기를 원하죠.

 

따라서 우리는 결국 남는 것은 뭐냐 하면, 항상 우리는 껍데기로 남아야 돼요. 이걸 고상한 말로 하면 그릇이 되겠죠. 항상 빈잔, 쏟아버리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 껍데기 그릇이 될 경우에 껍데기와 알맹이를 같이 합치면 이걸 ‘언약‘이라 합니다. 언약이라 하는 것은 죄인과 만나서 죄인을 더욱 죄인 되게 함으로써 그 죄마저 용서하시는 주체에 빛이 나는 것을 언약이라 합니다. 죄인을 불러서 죄인을 더욱 더 날이 갈수록 죄인 되게 함으로써 그것마저 용서하시는 주님의 공로를 높이는 거죠. 그때 이 죄인과 용서하시는 분 사이에 끊어지지 않는 밧줄을 뭐라 했죠? 끊어지지 않는 끈을 아까 뭐라 했습니까? 벌써 시간 지났다고 다 잊어버렸죠?ㅎ 이걸 가지고 ’의‘ ’하나님의 의‘라고 하죠.

 

이게 근거가 어디 있느냐,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나옵니다. ‘죄 없는 신분을 너희를 위해서죄 있게 해서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것은 너희를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심이라‘ 우리는 그냥 ’하나님의 의‘를 만드는 작업에 들러리로 간택되었죠. 뽑혀 나온 것뿐이죠. 강도가 십자가에 달릴 때 얼마나 사람들이 놀렸겠습니까? ’저 인간은 죽어 마땅하다. 그런데 강도가 뭐라 합니까? ‘예수님 나라에 임하게 하소서. 다른 말로 하면, 지금까지 강도짓하며 살아온 것도 주님 만나기 위한 주님의 조치였습니다.’ 그 자체로 안전, 다른 말로 하면 낙원으로 가기 위한 완벽한 조치중 하나의 스케줄의 하나가 자기가 강도가 돼야 하는 역할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세상에 이것은 그야말로 자기는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걸 느끼지 않는 사람은 도저히 생각을 못하죠.

 

자기 나름대로 고집이 있고 자기 나름대로 주관이 있으면, 맨 날 그 주관에 근거해서 ‘남은 되는데 왜 나는 인생을 험하게 살았습니까? 남은 건강한데 나는 왜 아픕니까?’ 맨 날 거기에 대들고 시위하고 데모하고 그렇게 나왔을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강도가 ‘오늘 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한 ‘주여 생각해 달라’는 의미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멋진 장치를 했죠. 이게 뭐냐 하면, 예수님 중간에 달리시고 양쪽에다 전혀 상반되는, 반대가 되는 배치를 했습니다.

 

그렇게 배치를 해서 ‘당신 하나도 죽음에서 못 벗어나면서 오히려 남에게 영생을 주고 남을 살린다는 말인가?’ 말 되는 소리를 해야지, 본인도 잡혀서 아무 힘도 못쓰고 무너지면서 어떻게 우리를 건져내?‘라고 생각하는 강도가 있었죠? 바로 그 점이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40년, 50년 다니고 신앙생활 하면서도 이쪽 구원 받지 못한 강도의 생각이 오늘 시점에, 2014년도, 2015년도 앞으로 몇 년 후에 불쑥 내 속에서 이건 내 허락도 안 받고 불쑥 불쑥 튀어 나와요. ’쳇, 예수, 예수 믿어서 나에게 해 준 게 뭐가 있어? 내가 원하는 걸 왜 안 해주는데? 말은 번지르르하지, 날 믿으면 영생을 얻을 것이요. 날 믿으면 죽어도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나도 많이 들어서 나도 그런 소리 써먹을 수 있다. 하지만 실감이 되고 그게 현실화 돼야지‘라고 할 때 그 사람 속에는 다시 한 번 우리가 불완전한 세계 속에 살고 있다는 그런 불안감, 두려움이 있게 되죠. ’아니야, 이게 전부가 아니야, 딴 게 있을 것이야,‘ 라는 겁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2장에 보면 나오죠.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 너를 죽이는 세상 같으면 완전한 세상이니까 죽는 세상에서는 죽는 게 그것이 네가 가는 코스다 말이죠. 보통 대문에 보면 개하고 같이 살다 보면 단독 주택에 사람들 다니는 대문 따로 있고 개구멍 따로 있죠. 주님께서 개구멍으로 들어왔거든요. 주님이 개구멍으로 들어와서 부활했다 말이죠. 그럼 우리보고 뭐라고 하는 거예요? 그 개구멍 들어가라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부자는 왜 천국에 가기 힘드냐 하면, 부자는 그 구멍 들어가기에 덩치가 너무 큰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자가 천국가기가 뭐라고 합니까? 크기 가지고 이야기 하죠.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갈 수 있겠느냐?’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못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럴 때 그 소리를 들었던 제자들이, 제자들 부자 아니에요. 하지만 그 소리를 들었던 제자들이 모두 다 부자 보고 이야기한 게 아니고, 바로 자기 자신들보고 이야기한 것이라고 생각하죠. 왜냐, 어느 누구도 ‘부자= 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들이 절망해서 ‘그럼 누가 구원을 얻겠습니까? 그렇다면 아무도 구원 받을 사람이 없는 겁니다. 예수님,’ 하고 예수님한테 한 수 가르치죠. ‘예수님, 그런 이야기 하시면 아무도 구원 못 받습니다.’ 요새 말로 하면 ‘아무도 교회 안 나옵니다.’ 그런 뜻인 거예요. 그럴 때 뒤의 말씀, 유명한 말씀이죠.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할 수 있느니라.’ 사람으로 하는 방법으로 절대로 난 천국에 넣어주지 않겠다.‘

 

요한계시록을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해석하면 절대로 천국에 넣어주지 않겠다는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예요. 요한계시록뿐만 아니고 마태복음, 에스겔이든, 어떤 구절도 사람이 능히 해석할 수 있는, 일반인도 능히,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도 능히 해석할 수 있는 해석이라면 절대로 그 사람을 천국에 넣어주지 않겠다.

 

그렇다면 방금 이야기한 것을 이렇게 정리될 수 있겠죠. 성경 해석, 요한계시록 해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불신자가 해석하는 해석이 있다. 두 번째는 성령 받은 신자가 하는 해석이 있다. 이 두 개를 전부 다 알고 있어야 돼요. 우리는 신자기 때문에 불신자의 것을 나는 몰라도 된다 하시면 안 됩니다. 그러면 뭐가 없어지느냐 하면 ‘나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신다.’는 예수님 말씀 가운데 반 토막 내는 것밖에 안돼요. ‘사람은 할 수 없으되‘ 말 나오면, ’사람이 하는 게 뭡니까?’를 알고 있어야 돼요. 그걸 모르면 ‘역시 나는 신자이기 때문에, 그런 건 몰라도 돼,’ 이렇게 하면 그 자체가 자기가 자칭 신자라고 나오는 해석이 사실은 사람으로 할 수 있는 해석을 가지고 마치 자기가 신자만 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할 수가 있다 말이죠. 그래서는 안 된다 말이죠.

 

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렇다면 두 가지 다 알아야 돼요. 사람들이 의인이라고 할 때 그 의인이 무슨 의인이냐를 그걸 알고 있어야 돼요. 그래야 성경 해석이 된다고요. 또 있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지, 새 술을 옛 부대에 담을 수 없다’고 할 때 뭣까지 알아야 하느냐 하면, 새 술을 옛 부대에 담는다 할 때, 옛 부대는 뭐냐, 옛 부대는 어떤 것을 말하는지 알고 있어야 돼요. 그걸 알고 있어야 ‘아하,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예수님의 복음을 옛 부대에 담는 것과 마찬가지구나.’하는 겁니다. 여러분, 옛 부대는 바로 율법이죠.

 

 율법외의 복음을, 율법외의 의를 율법에다 담을 수 없는 거예요. 노선이 다르니까. 대전에서 부산 가려면 경부선을 타야 돼요. 그런데 부산 가면서 호남선을 타면 안 되는 겁니다. 예수님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눠져 버려요. 한쪽은 율법에서 율법으로 가는, 옛날에는 율법을 못 지켰는데, 예수 믿고 율법을 지키겠다는 이 노선, 미진한 율법 완성을 이제는 예수님 힘으로 성령의 힘으로 내 힘으로 율법을 완성하겠다는 율법을 계속 고수하겠다는 이 노선이 있는 반면에, 이쪽 구원 받은 노선은 ‘율법외의 한 의’ 그럼 율법은 무엇에 호소해야 됩니까? 우리의 행위와 행동에 호소해야 되겠죠. ‘ 예수 믿었으면 예수 믿는 값을 하란 말이야.‘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뭘 요구하는 거예요? 예수 믿었으면 거기에 걸 맞는 행동을 내 놔야 예수 믿는 것이지, 행동이 없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거잖아요. 이것은 율법노선으로 계속 가고 있는 거예요.

 

그럼 ‘율법외의 한 의’라 하는 것은, 여기 율법의 노선에서는 계속해서 성도의 행위를  요구한다면, ‘율법의 한 의’는 무엇을 증거 하는 겁니까? ‘예수님의 행위’죠.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하셨습니다.’

 

처녀들이 결혼하기 전에는 친구끼리 모이서 하는 대화는 주로 여러 가지 옷, 화장 이야기, 또는 남자 친구 이야기 이거예요. 그런데 그 중에 처녀 7명이 친하게 지내다가 그 중에 한 사람이 결혼을 했다고 칩시다. 애기를 낳았다 합시다. 그러면 한 사람이 모임에 와서 무슨 이야기 하겠어요? ‘ 애 키우느라 잠을 못 자겠어. 기저귀를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어. 시어머니가 어떻고,’ 이런 이야기 한다 말이죠. 그러면 나머지 6명이 ‘헐~~ 무슨 이야긴지’ 그러다가 그 중 5명이 결혼을 해서 애기 키우는 이야기를 하면, 2명이 팔짱끼고 무슨 이야기 하는지, 못 알아듣는 것은 결혼 안 한 두 사람, ‘ 언제 쟤들이 그렇게 세속적인 이야기만 하는지, 엊그제 민주화를 이야기 하고 남북통일 세계 평화를 걱정하던 쟤들이 유엔 봉사해서 아프리카 가서 돌보겠다고 그렇게 자신만만했던 저 친구가, 이제는 남편 아침 출근에 반찬을 생각하게 되고 무슨 반찬, 해장국을 끓일 수 있나 생각하니... 자기애하고 남편밖에 모르니 이거 기가 차고 코가 찰 일이 아닙니까?

 

그 말은 뭔 뜻 이예요? 지금 처녀는 아파트에 혼자 산다는 뜻이고, 그 결혼한 사람은 아파트에 누구하고 산다? 남편이 있고 애하고 같이 살죠. 같이 사는데 그냥 같이 사는 게 아니고, 신혼 초니까 사랑하면서 살겠죠. 그러면 성도가 혼자 삽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같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같이 있잖아요. 그러면 이야기가 나오면 무슨 이야기가 나와요? 사랑하는 남편 이야기죠. ‘우리 남편 총각 때는 몰랐는데, 이런 좋은 점이 있더라.’ 남편 자랑!! 신혼 초니까...ㅎㅎ 이야기 끝까지 들으세요. 신혼 초니까,ㅎ 이해해야 돼요. 3년 살면 그 이야기 쑥 들어가지만...신혼 초니까 남편 자랑하고 남편 보고 싶으면 직장에 열 통화하고 신혼 초니까 그럴 수 있다 말이죠.

 

주께서 에베소서에 뭐라 하십니까? ‘첫사랑을 잊지 마라.’ 뭐냐 하면 니 자리에 니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니 안에 니 혼자 있는 것이 아닌데, 왜, 니가 성령 오기 전의 버릇처럼, 내 쪽에서 주님을 점검하려 하고, 내 쪽에서 주님 보시기에 완벽하게 살려 하고, 마치 남편이 없는 양, 그 사람 원래 남편 없겠죠. 남편이 없이 혼자 용쓰고 혼자 광내고 혼자 정숙하고 혼자 위로한다고 들볶이고, 율법적으로 살려고 마치 처녀가 혼자 도 닦는 식으로 왜 그렇게 사냐 말이죠. 남편 앞에서 방귀도 뀌고,ㅎ 자식들, 남편 먹다 남은 거 다 먹다 보면 어느 날, 뱃살이 나오고 그거 빼느라고 애먹고, 처녀 때는 바깥에 조금만 나가도 화장하고 옷도 제대로 입고 나가더니, 이제는 결혼하고 나서는 남편이 고등학교 때 입던 추리닝 입고, 화장이 어디 있습니까? 맨 얼굴로 하고 슈퍼에 가고 특히 목욕탕에 갈 때는 가관이죠.ㅎ‘남편이 있는데 뭐, 나 남편 있는 몸이다. 나는 내 남자 있어. 나한테 그러지 마, 내 남자 괜찮아,’ 자기 남자만 괜찮으면, 자기는 망가져도 괜찮아요.

 

그게 뭐냐, ‘율법외의 한 의’인데 관계는 뭐냐, 지킴, 행함이 아니고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무엇을 보지 않는다? 사랑은 자기 행위를 보지 않는 게 사랑입니다. 사랑하는데 뭐 이빨에 고추 가루가 어째... 이런 것 필요 없어요. 사랑하는 사이이기 때문에, 저쪽에서 다 떼 줘요. 고추 기루 끼어도 다 빼준다고요.ㅎ 이 사랑을 요한복음에서는 마지막 계명이라 했어요. 종말에 나타나는 계명, 거기서도 한 계명, 여러 계명이 있더라도 한 계명 ‘사랑’이외는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사랑으로 구원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여인이 비록 남편 고등학교 때 입던 추리닝 입고 돌아다녀도 그게 남편 눈에는 완전한 거예요? 완전하지 않은 거예요? 완전한 거예요. 얼마나 남편을 남편으로 인정했으면, 자기가 망가져도 허허허 하고 좋다고 그렇게 자유만끽을 하며 사느냐 말이죠. 그 여자 하는 말이 ‘ 나 보지 말고 내 남편 봐라, 내 남편 얼마나 대단하고 자랑스러운지 훌륭한지, 나 욕하지 말고, 그래 나 처녀 때 위장했어, 그때는 깨끗한 척 했어, 이제는 망가져도 괜찮아, 내 남편 있는데, 내 남편만 알아주면 되지 뭐, 저 남편이 내 남편인가 뭐, 내 남편만 알아주면 돼.’ 그 사이, 그 관계, 그걸 뭐라 했어요? 그 가정에는 하나님의 의만, 남편이 주는 의만 가득한 거예요.

 

사랑이라 하는 것은, 사랑을 성경에서 설명할 때, 율법을 지킨 자에게 사랑을 하는 게 아니고 의도적으로 사랑 이전에 율법을 먼저 줘 버렸습니다. 그래서 율법대로 하나도 못 지키는 정말 철딱서니 없고, 정말 인간 말 종이고 율법 안에서 정말 저주 받아 마땅하고, 심지어 율법을 못 지킨 정도가 아니고 율법에 의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 된 자예요. 원수 된 자에게, 로마서 5장 이야기하는 겁니다. 경건치 못하고 죄인 되고 원수 된 자에게 남편이 오셔서 우리 형편을 다 아시고 우리에게 어떤 지시나 명령을 하셔서 날 따라 오라 하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뻔히 안 되는 걸 뻔히 아시기에 자신의 피를 제공해서 이 사랑하는 아내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게 어떤 책벌도 어떤 저주도 어떤 징벌도 도달되지 못하도록 전부 다 책임지고 아내에 대한 모든 어두운 면과 구석진 면과 허술한 면을 전부 다 본인이 대신 감당했다는 증거로서 ‘피’를 흘렸습니다. 이 피를 보고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님의 한 가족으로, 신부로 인정하는 겁니다.

 

이걸 미리 던지는 것이 ‘언약‘인데 이 언약 속에 바로 유월절 어린양이 있죠. 죽음과 집안에 있는 식구들 사이 경계선, 문지방과 문설주에 뭐를 발랐습니까? 예, 우리 같으면 피 바르지 않고 우리 아이디어대로 하라면 거기다가 하얀 페인트를 바르고 손님 대접한다 할 거예요. ’ 우리 깨끗합니다. 화이트 하우스 만들자,‘ 할 거예요. 하나님은 화이트 하우스 필요 없어요. 우리의 지저분한 거 천하가 다 아니까. 피는 우리 피도 아니에요. 누구 핍니까? 흠 없는, 흠 없는 피를 바르라는 말은, 우리 피에는 뭐가 있다? 아무리 용을 쓰고 애를 쓰고 예수를 잘 믿는다 해도 우리 피는 흠이 있다는 거예요. 흠이 있는 너희 피 말고, 너희 용 쓰는 것 말고, 기도 많이 하는 것 말고 헌금 말고 봉사 말고 희생 말고, 주님이 행하신 희생과 봉사와 주님의 모든 말씀 이룸이 피에 모아져서 피로 말미암아 주께서는 ’ 이 집안에서는 더 이상 내가 터치할 게 없네.‘ 하고 넘어가 버리죠.

 

‘시비 걸 게 없네. 이건 완전하네.’ 그게 ‘의’ 아닙니까? 그래서 로마서 1장에 보면, ‘하나님의 의가 마지막 때에 드디어 나타났으니,’ 마지막 , 종말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말은 이 세상에 의가 있다? 없다? 의가 전혀 없었다는 거예요. 없다는 보증으로 율법을 줬는데, 인간들은 그걸 가지고 마치 내 속에 있는 의로운 행동을 가지고 율법을 만나서 거기서 율법을 새롭게 준수하면, 글쎄 없는 의가 생산되는 줄 알았죠. 이걸 그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뿐 아니고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다고 구원 못 받아요. 피로 구원 못 받습니다. 오직 여러분들이 성도의 행세를 해야 구원 받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얼마나 했습니까? 사실 그 배후는 돈 내라는 소리와 똑같습니다. ‘돈 좀 줘.ㅎ 교회 좀 유지되게. 나도 좀 살자 이거죠.’

 

요한계시록의 해석에 있어서 역사라는 거예요. 왜 하나님의 계시를 역사로 바꾸느냐 하면, 역사는 실선(과거, 현재)과 미래는 점선으로 돼 있잖아요.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로 불신자들이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정통적인 방법입니다. 그래서 시중에 나와 있는 요한계시록 해석이 이 해석 이예요. 불신자들이 주석한 해석 이예요. 박O선, 박O용, 유명한 해석이 이겁니다. 성령을 안 받으니까 이 해석밖에 안 나오죠. 그래서 스케줄 대비해서 미래에 이렇게 하자 그러죠.

 

여기서 한번 어렵지만 잘 들어보세요. 실선은 어디까지라 했어요? 과거에서 현재는 실선이고 점선은 뭐라 했죠? 미래죠. 그러면 과거에서 현재로 옮겨가는 방법은 뭘까요? 과거에서 현재로 오는 방법을 뭐라 하느냐 하면, ‘전통’이라 하죠. 전통 이니까 과거의 것을 누적을 시켜서 거기서 괜찮은 것을 골라서 누적을 시키면 그것이 점점 진리에 접근 한다 보죠. 루터가 뭣에 반발한 거예요? 루터라는 신학자가 한마디로 무엇에 반발한 거예요? 전통에 반발했죠. 그럼 전통에 반발했다면, 루터가 이야기한 것이 뭐냐 하면, 과거에서 현재로 왔을 때 루터가 반발한 것은 이 역사를 끊어버립니다. 절단내버리는 겁니다. 잘라버리면 잘라버리는 칼이 있을 것이요. 생일 날 케이크에 제과점에서 칼과 함께 주죠. 그 칼 왜 줘요? 케이크 잘라서 먹으라고 주는 거죠.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언약을 줄 때는 역사와 역사를 인정하지만 역사를 뭐하라고, 역사라 하는 것은 너희들의 죄진 본성의 역사거든요. 사람은 항상 기껏 아는 것이 과거고, 기껏 아는 게 현재인데, 뭘 몰라요? 미래는 모르기 때문에 미진하게 점선으로 남겨 두잖아요. 그런 식이니까 앞으로 이런 식으로 기대와 소망을 가지면 나중에 구원 될 것이라고 여기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에요.

 

역사를 자르는 것을 ‘묵시’라 합니다. 루터는 묵시란 말은 모르고 뭔가 비슷한 말을 했어요. ‘십자가’라고 이야기 했어요. 전통을 십자가로 자르는 거예요. 이걸 그림으로 한번 그려보겠습니다. 과거가 이렇게 있고 사람이 누어있는데 팔이 있고 머리가 있죠. 과거에서 현재 우리가 아는 것이 우리는 안다 했죠. 이, 아는 것이 과거, 현재 아는 거예요. 여러분, 어릴 때 다는 알지 못하지만 7살 때, 40살 때, 다 알잖아요. 그런데 2015년은 모르죠? 2008년도는 당장은 모르지만 그때 누구 이야기하면 알잖아요. 아는 것이 어디로 들어갑니까? 아는 것이 요 머릿속으로 들어가잖아요. 지금은 머릿속에 옛날에는 마음속에 들어가잖아요. 마음속에 피어나는 게 과거잖아요. 역사를 자른다는 것은 이런 역사를 가지고 있는 누굴 자른다는 말입니까? 날 자르죠. 날 자를 때는 바꿔치기 해야 돼요. 나는 몸이죠. 나는 몸을 갖는 게 아니고 내가 몸 이예요. 나는 몸 이예요. 다만 이 몸을 나라고 차후로 인정할 뿐 이예요. 저 몸은 여자인데 ‘이 몸이 내 몸이지 저 몸은 내 몸이 아냐.’ 이래 되는 거예요.

 

‘나’라 하는 것은 나 있고 몸이 있는 것이 아니고, 몸이 있고, 이걸 뭐라 부르지? ‘나라고 부르자.’ 그래서 부른 거예요. 이런 이야기 하면 거짓말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거짓말이 아니에요. 애기가 16개월 동안은 ‘나’가 없어요. 엄마가 나를 대신한다니까요. 그래서 엄마가 시장가면 울어요. 왜, 내가 없어지니까, 그런데 그 이후에 무엇이 됩니까? 그 후에는 엄마 몸 따로 내 몸 따로 생겨요. 두뇌가 커지니까. 그걸 거울단계라 해요. 라캉에서는...

 

이 몸에서 역사가 나오잖아요. 이 역사를 자른다는 말은 결국 뭐냐, 이 몸을 어느 몸이 자른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의 몸이 자르는 거예요. 예수님의 몸이!! 다시 말해서 나를 위한 예수에서 예수님 때문에 내가 이 땅에 태어났다는 새로운 관계가 맺어지는 것이 바로 ‘십자가’라는 겁니다. 루터는 이것까지는 몰랐고 이 이야기 했어요. 십자가 믿으면 구원 받는데, 왜 자꾸 전통을 믿느냐, 이런 선에서만 이야기 했어요. 그런데 그 루터가 나중에 어떻게 됐어요? 그런데 그 루터가 나중에 또 다시 전통을 해서 천주교 못지않은 전통과 전통으로 되어, 사순절, 오순절, 부활절, 다 지키고 계절 바뀌면 커튼 색깔 바꾼다고 바빠요. 뒤의 커튼 바꾼다고.

 

그러나 루터가 이야기한 것은 다시 할게요. 우리의 몸은 십자가로 인하여 구원된다. 이전에 뭐를 버려야 된다? 전통은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했죠. 전통을 포기해야 한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우리 몸 자체가 우리 마음속에 머릿속에 전통을 버린다는 말은 우리 몸 자체가 문제 있다는 뜻 이예요. 왜냐 하면 우리의 몸은 은혜 받아놓고 내일되면 어제 은혜 받은 것이 하나의 전통이 되고 그게 역사가 되니까, 그래서 이 몸이 문제예요. 이 몸이!!!!

 

그래서 요한계시록 해석에 있어서 불신자의 해석과 신자의 해석에서 신자의 해석은 없어요. 다만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불신자의 해석밖에 있는데, 불신자의 해석을 이렇게 바꾸어 주는 것, 이게 불신자의 그 해석은‘아니야’라고 바꿔주는 그것이 바로 뭐가 되냐, 신자의 해석이 되는 겁니다. 아, 어렵다, 어렵다, 어렵다. 신자의 해석이란 게 없어요. 신자의 해석을 가져 버리면 신자의 해석이 또 뭐가 됩니까? 신자의 해석이 또 소유가 돼요. ‘난 신자의 해석 할 줄 안다.’ ‘누가? 누가 가졌는데?‘ ’내 몸이 가졌잖아‘ 이러면 또 무슨 몸입니까? 신자의 해석할 줄 아는 내 몸이 또 나의 신앙의 대상이 돼 버려요. 주만 믿는 게 아니고, 예수 믿는 나를 믿게 돼 버려요.

 

그렇다면 그 집안에 남편은 안 살고 누가 살아요? 아가씨 혼자 사는 거예요. 아가씨는 맨 날 있지도 않은 남편을 상상해서 그리워하면서 키는 185, 인물은 장 동건, 돈은 기부금 10억 원 낼 정도, 이번에 배 용준이 정도, 저택은 200평, 맨 날 상상하게 된다니까요.ㅎ 그 상상의 요소를 다 갖추면 그것이 우리 예수님이고, 우리 남편이고, 그 남편 누가 만들어 냈어요? 누구 인형 이예요? 자기 몸이 만들어 낸, 또 자기 몸이 문제라. 내 몸이 만들어 낸 상상의 예수님입니다. 아픈 사람이 상상한 예수님은 건강한 예수님 이예요. 아픈 사람에게 아픈 예수님이란 상상도 못했습니다. 여러분, 강도를 보세요. 강도에게 예수님은 누구였습니까? 같이 십자가에 달리는 메시야가 자기 메시야라는 것을 밑에 있는 사람은 상상도 못합니다. 어떻게 같이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 주는 사람이, 물에 안 빠진 사람이어야지, 물에 빠진 사람이 건져 주면서 헥, 헥 같이 헥, 헥 거리면서 어떻게 자기를 건져내요? 그러니 이게 '불가능성‘이죠.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항상 인간의 몸으로 할 수 있는 것, 이 나올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성령이 와서 칠 때, 그 치는 힘이 치는 순간 고 순간 그 사람은 신자의 해석을,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하는 증인이 되는 겁니다.

 

요새 유행하는 말로 주님이 찾아온 순간 제명이 됐어요.ㅎ 자기 자신이 사라져야 되죠. 그 순간 사라지죠. 그 순간을 노리고 그 순간을 기대해서 요한계시록에 나중에 나옵니다만, 11장에 두 증인을 보냅니다. 그 두 증인은 자기가 살아있으면 두 증인을 못해요. 두 증인이 복음을 전하고 어떻게 됩니까? 죽는데 그 죽는 자리를 가지고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소돔과 고모라, 애굽이라. 두 증인이 죽어요. 죽으니까 그 죽인 사람들이 좋다고 웃죠. 그리고 난 뒤에 다시 지진이 일어나고 재앙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그 두 증인이 하는 코스는 마치 무슨 코스를 재현하는 겁니까? 예수님 이 땅에 와서 예수님 죽여 놓고 좋다고 자축하고, 그 뒤에 예수님 부활 하시고 예수님 십자가 죽으실 때 지진이 일어나고 세상이 깜깜해지는 그 코스를 주님께서는 허접스러운 우리를 사용해서 그 일을 되풀이하시겠다는 거예요. 우리 보고 하라 하면, 우리 의사를 물어서 하라 하면, 우리는 ‘아주, 예, 주님 혼자 하셨는데 제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 좋은 스데반 집사보고 하라 하세요. 저는 믿었으니까..’ 하며 공손하게 사양할 거예요.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사양이고 뭐고 그렇게 하게 하심으로써 성도됨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게 주의 일을 기피할 때 그 순간 나의 몸 위주가 또 다시 발작을 일으키죠. 또 내 중심으로 돌아오죠. 어느새 다시 내 중심으로 돌아온 겁니다. 그래서 다시 이야기 할게요. 한 집에 혼자 살면 안돼요. 항상 남편이 있어서 남편은 이미 아내를 완전한 자로 간주 했어요. 아내 행동이 완전한 것이 아니고 아내를 완전한 자로 간주하는 남편 자체가 그러한 연결 밧줄이 완전해요. 그 완전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 밧줄이 완전하기 때문에 그 밧줄을 통해서 그 파이프를 통해서 완전한 남편의 완전함이 계속해서 아내에게 주입되죠. 그래서 아내의 뜻은 따로 있지만, 이 뜻이 항상 망가지고 주님의 하시고자 하는 그 역할과 사명만 본의 아니게 본인이 원치 않는 길을 가면서 그것이 바깥으로 발현돼요.

 

이게 표출이 되어 나오는 거, 그게 바로 성도의 삶이라는 겁니다. 간단하게 성령의 삶이라 해요. 주체를 죽이면서 나오는 삶이 성령의 삶이지, 주체가 있으면서 나오는 삶은 성령의 삶이 아니에요. 온유와 화평, 양선, 자비, 그런 것이 내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그 힘에 의해서만 결과적으로 나오는 겁니다.

 

한번 봅시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모든 재앙은 원인이 인간들에게 있는 게 아니에요. 이 말도 어려워요. 원인이 우리에게 있어서 재앙이 오는 게 아니고, 재앙 자체가 결과입니다. 우리가 재앙을 받는 것 자체가 이 세상이 완전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하나님의 결과물 이예요. 그런데 불신자들은 그걸 어떻게 합니까? 그 재앙이 한 순간에 끝나고 어서 떨어지기를 바라죠. 이번 일본에 지진이 나니까 사람들이 지금 애를 쓰면서 그 원자력 연료봉에다 물을 채우려고 애를 쓰잖아요. 뭣 때문에 애를 쓰는 겁니까?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가기를 원하잖아요. 그러면 원래 상태가 좋은 것이고 지진을 나쁜 거로 보잖아요. 그 사고방식으로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면 안 된다 이 말이죠. 요한계시록은 지진이 일어났으면 ‘지진 잘 일어났습니다.’ 예 일어나야만 한 겁니다. 왜? 그 원인은 하늘에 있기 때문에. 원인은 하늘에 있지 이 지상에 원인이 있는 게 아니에요.

 

하늘에 가 계신 보좌에 계신 분이 어떤 분이냐 하면,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저주 받고 죽음을 당한 분이죠. 예수님이 죽음을 당했으니까, 이 세상의 정체는 뭐냐 하면, ‘메시야는 죽여라’ 라는  프랭 카드 구호, 그래서 예수님이 죽었잖아요. 잘 들어보세요. 이 ‘메시야를 죽여라’를 칭칭 감는 거예요. 감으면 예수님의 색깔이 뭐로 변하겠습니까? 죽었으니까, 피를 흘렸으니까,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 되겠죠. 어린양은 뭐와 관련이 있다? ‘메시야는 죽여야 된다.’와 관련돼 있잖아요. 메시야는 죽여야 된다는 이것이 하늘나라에서 해소되는 것이 아니고 하늘나라 보좌에 앉으신 분이 누구라 했습니까?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으로 묘사돼 있죠?

 

하늘나라에서 어린양으로 묘사돼 있다는 말은, ‘메시야는 죽여라’를 칭칭 감고 안 풀린 채 하늘나라에 가 있다는 말이 아닙니까? 하늘나라에 갔다는 그 자리는 완전한 자리기 때문에 여기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안에 뭐가 담겨 있습니까? ‘메시야를 죽여라’ 한 자는 죽여라가 이래 되겠죠. 메시야를 죽이라 한 자는 메시야를 죽인 그 대가를 치러 봐라. 그런 점에서 재앙이나 모든 지진이나 화산이나 이런 재앙들은 완전하다 말이죠. 그것을 알아보는 안목, 그 시선, 그 시선이 성령과 함께 성도에게만 주어진다 이 말이죠.

 

그래서 요한계시록 해석이 굉장히 어려운 것 같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굉장히 간단해요. 예수님만 따라가면 돼요. ‘예수님, 저 멀리 계세요.‘ 하면 안 됩니다. 혼자 아파트에 혼자 살면 안 됩니다. 처녀처럼 살면 안 됩니다. 남편과 함께 살아야 돼요. 남편과 함께 안에 있으면 하여튼 어떤 여자도, 그렇게 자기 주관이 있고 자기 줏대가 있다가도, 남편이 사랑하고 좋아하게 되면, 고만 자기 줏대고 주관이고 다 버리고 남편이 하는 것은 무조건 옳다고 해, 남편이 중앙선 위반해도 무조건 지가 나서서 우리 남편이 뭘 잘못했느냐고 상대방보고 싸우고,ㅎ 이게 뭐예요? 남편이 무조건 최고라. 그러다 자식 낳으면 자식이 최고고, 내 자식 누가 건드리느냐고 싸우고, 그래서 여자는 마이너스 존재 아닙니까? 항상 자기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모자라는 부분을 채워주는 것을 가지고 남 앞에 자기를 대신하여 내세우는 존재, 결핍을 채우는 , 이래서 마이너스 남자라 하죠. 라캉이 그런 이야기 했죠.

 

 4월말에 라캉과 들뢰즈에 대한 강의가 있습니다. 단서는 어려우니까 ’목사님만 참석하세요.‘ 너무 어려워서. 이번에는 어렵게 할 거예요.

한번 정리해 봅시다. 요한계시록의 해석은 모든 완전한 ‘메시야는 죽었다’ ‘인간들에 의해서 세상에서 죽었다‘ 세상 속에 메시야를 죽이라 하는 그러한 압력과 권력이 상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들뿐 인줄 알고 자기 앞에 어두운 세력의 바탕위에 기초위에 사는 줄 몰랐는데 메시야가 등장하니까 갑자기 자신도 모르게 ’메시야는 죽어 마땅해, 맞아, 강도 바라바보다 우린 바라바를 원하지, 맞아 메시야 죽이기를 원해,‘ 그래서 빌라도가 강도 바라바와 예수 중에 누구를 원하는지 물었을 때, 바라바를 원하지, 강도 바라바는 자기에게 심적인 부담을 안 주잖아요. 왜? 자기보다 못한 존재이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은 살아 있으면 맨 날 잔소리만 해댈 거니까, 인간의 죄를 지적하는 인간은 어떻게 돼요? 제거해야 되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제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아는데 자기를 창조한 하나님을 제거한 게 되었어요. 하나님은 모든 문제를 뭐로 봅니까? 피조물이 누구를 죽였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죽였기 때문에 피조물이 지옥 가는 것도 그것은 너희들에 대한 당연한 조치다 이래 보는 거예요.

 

만약에 창조주를 죽인 자를 창조주가 벌하지 않는다면 그건 창조주가 아니죠. 쉽게 생각합시다. 우리가 교회 나와서 ‘ 왜 내 아이는 서울 대학교에 안 넣어 주냐?’ 이래 생각하지 말고 ‘ 왜 우리 사업은 이렇게 안 되게 하느냐, ’ 왜 우리 아내는 아프냐.‘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지금 하나님이 우리가 기도하는 대답, 하나님이 뭘 조질라 합니까? ’ 너 자신의 죄를 알라‘ 그거예요. ’춘향아, 고개를 들라, 네 죄를 알렸다.‘ 춘향이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맨 날 변 사또 하는 말이, ’네 죄를 알렸다.‘ 이거잖아요. 관아에서.

 

주님께서 하시는 것이 ‘네 죄를 알렸다.’ 예요. ‘뭐요? 우리 죄가 뭔데?‘ 하니까 사도바울이나 사도들이 뭐라 합니까? 특히 마태복음 같은데 보면, 포도원 비유에서 종을 보냈더니 종을 쳐 죽이고 마지막에 아들을 보냈더니 농부들이 ’이 아들마저 죽이면 이 포도원이 우리 것이 되겠다.’ 라고 해서 사탄이라 하는 것이 결국은 하나님은 모독하는 것이 아니고, 사탄이 노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필요 없음을 노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하나님 중심이지, 예수 중심이 아니죠. 예수 중심이 아니면 완전히 사탄의 전당입니다. ‘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돼 있잖아요. 이 집은 마귀한테 기도하는 집이예요. 사탄이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그게 어디 나와요? 야고보서 2장에 나오죠. ‘귀신도 하나님이 한분인줄 알고 두려워 떠느니라.’(약2:19)했죠. 마귀가 귀신들리는 것은 예수님에 관한 거예요. 예수가 같은 인간인데 같은 인간이 같은 인간을 섬긴다는 것은 말도 안 돼, 이것은 정말로 안 돼, 뭔가 잘못이야,‘ 거기에 대한 반발성, 그래서 이슬람교나 불교에 있는 사람들이 기독교하고 편하게 못 지내면서도 무슨 이야기는 하지 말자? 예수님만이 참된 인간이고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세주며, 예수님 십자가 이야기는 제발 우리 앞에서는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서 다른 종교와 어울리는 사람은 뭐를 뺍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죄는 빼버립니다. 쉽게 말해서 저주와 죄를 빼버리고 ‘하나님은 사랑이다.’ 이래야 전부 하나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세계 평화 이야기하고, 세계 평화 이야기 하고 있네, 전부 돈 챙기려고 하는 거예요.

 

끊임없이 세계적인 유명한 철학자나 문학자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글을 쓸 때 항상 빠지는 게 있어요. 그건 ‘예수님의 십자가’를 빼버립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몇 번씩 이야기 합니다만, 다시 하면 그들은 실선을 안다는 거예요. 과거 현재를 안다는 거예요. 하지만 종교란 의미는 미래에 소망을 두기 위해서 종교가 필요하다고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렇다면 과거와 현재를 안다는 것은 누가 안다는 겁니까? 바로 내가 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죄인일 수는 없다 말이죠. 내가 만일 죄인 같으면 과거 현재를 이렇게 수집하고 편집하고 정리하는 그게 뭐가 돼요? 그게 죄가 되잖아요. 이럴 수는 없잖아요. 내가 하는 모든 것이 물 마시는 것도 죄라면 물을 왜 마셔요. 죈데, 안 되잖아요. 내가 하는 일이 죄일 수는 없다는 거예요. 반성은 하지만, 반성하게 되면, 반성하는 죄가 뭐로 바뀝니까? 이게 반성했다는 나로 바뀌죠. 반성 잘하는 나, 반성 100점, 반성의 달인, 회개의 달인, 이러면 뭐가 됩니까? 의인이 되잖아요. 어쨌든 간에 인간은 자기의 죄인 됨을 절대로 포기를 못하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를 뭐로 봅니까? 네가 아담의 자식이고 아담의 자식이 하나로 뭉친 게 뭐냐 하면, ‘메시야를 죽여라’라가 프랑 카드 구호란 말이죠. 그 선에서 피조물들이 데모해서 마귀의 조정을 받아서 마귀도 그런 짓 했으니까 메시야를 죽여라는 그 정신이 살아있는 이 세상에 대해서 ‘내가 본때를 보여 주마,’라는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어떤 의로운 인간은 없었다. 의로운 인간이 없었는데 그 의로운 인간이 없음을 드러내는 작업을 받은 사람만이 예수님의 시선과 안목을 가진 사람이라서 성령 받은 사람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불신자가 된다는 그런 이야깁니다. 10분 쉽시다. 

 


 

요한계시9장-(종말과 종말론적과의 차이)-11강

(이 근호 목사)

 

제 11강b

자, 둘째 시간은 약간 어렵습니다. 언약은 ‘다 이루었다’ 했는데 어떻게 해서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지상에 역사가 아니면서 역사 속에서 ‘다 이루었다’ 고 들어오시느냐, 어렵죠? 역사가 아닌데 역사를 깨는 언어를(인간의 언어는 역사적 언어예요) 역사를 내포한 언어를 사용하면서 어떻게 역사를 아까 케이크를 자르듯이 자르느냐 할 때, 여기에 언약의 ‘다 이루었다’가 올 때는 ‘창조의 원리’를 가지고 오는데, 그게 ‘7’이라 했죠. 지난 시간에 했는데, 잊어버렸죠?ㅎ 7인, 7나팔, 7대접이란 앞에 7을 달고 옴으로써 인간의 미완성된 역사 자체가 진짜 다 이루어진 하나님의 일(묵시)에 대해서 너희는 대치되고 반발하는 그런 속성을 담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너희들 잘못 되었어’ 말만 합니까? 아니죠. ‘7’만 떨어지면 여기서 뭡니까? 이것이 깨지죠. 지난시간에 요한계시록 8장을 하면서 인간들은 뭐로 버틴다 했어요? 눈에 보이는 대자연 세계의 안정성‘이라 했죠. 이 안정성에서 거기서 그들은 역사를 정리시킵니다. 대자연의 안정성이라 하니까 너무 범위가 큽니까? 그러면 쉽게 하면, ’우리 가정의 화목함‘ ’우리 이웃과의 사이좋음‘ 이게 안정성이잖아요. 그래서 사람은 사랑으로 사는 것도 아니고 소망으로 사는 것도 아니고 안정성으로 살아갑니다. 이 이야기도 처음 듣죠? 저도 처음 이야기 했습니다.

 

사람은 사랑을 잃는 것의 모든 것이 무슨 바탕위에? 안정성 위에 나올 때 그걸 사랑으로 이해하고 그걸 정으로 이해하는 겁니다. 초코파이 같은 이거. 만약에 한쪽이 내가 정주고 내가 사랑주고 이런 사랑이 만약에 흔들리면, 그 다음부터는 초코파이는 없습니다. 다시 한 번 다시 보자는 겁니다. 남편이 바람을 안 피우고 안정적으로 나만을 사랑해주면 여자들은 남편을 위해서 맛있는 음식을 연구하고 건강을 위해서 다 해줍니다. 그런데 남편이 안정성을 찾지 못하고 자꾸 바깥을 돌아다니면 남편에게는 콩나물국도 없습니다. 정도 없고 사랑도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 안정성이 뭘 위한 안정성이냐 하면, 상대방을 위한 안정성이 아니고, 나의 몸을 위한 안정성 이예요. 그러니까 인간들의 모든 사고방식의 밑바닥은 뭐냐, 제발 날 불안하게 하지 말라‘ 이겁니다. 남편이 아내보고 ’여보, 나 직장 더러워서 사표 낸다.‘ 아내가 ’여보, 사표 내는 것은 당신 마음이지만, 제발 날 불안하게 하지 마라.‘ 그럼 불안하게 않으려면 사표 내면서 불안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말을 바꿔야죠. ’여보, 이거 사표내고 더 큰 직장 되었어.‘라고 할 때면 괜찮죠. 그러니까 남편이 직장 옮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아내 입장에서는 남편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나를 불안하게 하지 말라는 거예요.

 

더 나아가서 내 새끼, 내 자식을 남편이란 이름으로 내 배에서 낳은 내 새끼를 건드리면 남편이라도 난 꽉 물어버린다. 여자가 애기 낳으면 그 다음부터는 눈에 뵈는 게 없죠.ㅎ남편을 돈 벌어오는 기계로 바뀝니다. 오직 자기 자신도 자식을 위해서 헌신할 수 있는데 이건 모든 포유 물, 6일째 태어난 모든 짐승들의 특징 이예요. 돌고래도 마찬가지니까. 이건 자연의 본성이죠.

 

그럼 자연은 뭐라고요? 자연은 안정성, 그다음에 나온 게 뭐냐, 확장입니다. 이걸 과학에서는 진화라고 해요. 모든 자연세계는 안정성 가운데서 안정성을 더 확장시키는 것 뿐 이예요. 그렇다면 인간이 원래 이런 요소로 돼 있다는 것을 아는데 제가 묻고 싶은 건 이게 언약입니까? 이게 하나님의 영광 이예요? 이렇게 사시면 하나님께 영광 되는 겁니까? 아니죠.  사람은 자연세계를 안정적으로 봤지만, 하나님은 이 자연세계를 뭐로 보느냐, 하나님의 새 언약을 위해서 보조역할을 하는 걸로 본 겁니다. 어렵죠? 새 언약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살과 피로 세운 새 언약이죠. 새 언약은 인간은 빠집니다. 인간은 빠지고 누구하고 하느냐,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 성부와 성자 사이에 맺었습니다.

 

이것이 시편 110편에 보면, ‘주께서 내 주에게’라는 말이 나와요. 주가 두 번 나와요. ‘주께서 내 주에게’ 아~~ 참, 성경이 너무 어려워요. 왜 주님이 한 분 같으면 헷갈리지 않는데 ‘주께서 내 주에게’ 더 헷갈리는 말은 뒤에 나옵니다. ‘내 오른편에’ 왜 오른편이 등장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중심에 계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인간 중심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박살내기 위해서 그래요. 하나님은 중심에 계신 분이라는 생각 자체를 ‘이거는 니가 지어낸, 상상한 신’이라는 거죠. 하나님은 오른편에 계시고 그 오른편에 계시게 한 진짜 중심은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는 분이 오른편에 오른편이라는 모습으로 주가 등장할 때, 이 분이 바로 ‘주’죠. ‘주께서 내 주에게‘라는 구조가 없으면 가짜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철학자들이 지어낸 모든 신은 다 가짜예요. 진짜 성경에서는 ‘주께서 내 주에게’ 다시 말해서 전쟁하는 신, 다른 말로 하면 언약적인 신, 다른 말로 하면 언약에 의해서 이 땅에서 전쟁을 유발시키는 신, 그것도 모든 역사 가운데서 신이라는 이름으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신이라는 이름으로 다 집어넣어서 이 세상에서 전쟁을 유발시켜서 안정화를 도모하고 추구하는 인간세계에 이걸 완전히 비빔밥 만들어 오른손으로 비비고 왼손으로 비비고 완전히 뒤죽박죽을 만들어 버리는 안정적인 가정에 뒤죽박죽을 만들면 그 원망을 누구한테 쏟아내겠습니까? 누구한테 하겠습니까? 신에게 하겠죠.

 

‘신이시여 왜 이렇게 힘들게 합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뭐라 합니까? ‘ 창세기 3장을 봐라.’ 원래 이 세상은 인간을 그렇게 힘들게 해서 이마에 땀이 흐르고 해산하는 고통을 줘서 니가 이곳에 살만한 존재로서 나는 그런 인간을 만든 적이 없다는 것은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자연세계라는 그러한 시스템을 동원시키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연세계에 대해서 인간은 여기서 살겠다는 쪽으로 나오고, 하나님은 그 자연세계를 통해서 인간을 죽여 버리겠다는 쪽으로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 우리를 죽이고자 작심을 하신 하나님 이예요. 이 이야기를 기존교회에 못합니다. 헌신 예배에 가서 이런 소리 못합니다. 더 쉽게 말하면, 만약에 헌신 예배에 가면 교인들에게 ‘ 하나님은 여러분을 이 땅에 죽이려고 태어나게 했는데, 여러분은 교회 와서 왜 살려고 합니까?’ 아멘 소리 아무도 안 나올 거예요. 여기는 몇 명 나오지만, 거의 안 나올 겁니다. 아마 헌신 예배 마치고 차비도 없을 거예요.ㅎㅎ 목사가 ‘괜히 불렀어, 괜히 불렀어.’ 목사가 헌신 예배에 다른 목사를 왜 불러요. 뭡니까? 안정성!!! 안정화 다음에 뭐라고요? 확장, 교회 부흥하려고 부른 거예요.

 

성경은 이렇습니다. 간단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받아들임으로써 그 외에는 영광이 없어요. 예수님의 새 언약 앞에 자기가 서는 것 외에는 영광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 운운하면서 십자가를 기피한다는 것은, 결국은 자기의 조작된 신에 의한 조작된 우상 적인 신을 영광이라 하면서 사실 챙기는 것은 나의 안정성을 그 신에게 뇌물을 바쳐서 신에게 잘 구슬려서 신을 내 맘대로 조정해서 결국은 노리는 것은 나의 굳건한 안정성을 간직하기 위해 그렇습니다.

 

나의 안정성이라 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여성이나 남성이나 마찬가지지만, ‘가정의 화목’이죠. 가정의 화목과 번창이죠. 자식이 잘 되고 번창하는 것. 1월 1일 날 보면, 저 동해안에 있는 정동진에 가죠. 해 뜰 때 뭐를 빌어요? 주의 영광을 위해서 비나요? 뭡니까? 십자가를 위해서요? 그저 우리 남편, 우리 자식 건강하고 외국에 가 있는 우리 애 공부 잘하고 하나는 취직했는데 사업 잘 되고 취직 못한 애는 취직되고 시집 안 간 딸을 시집 잘 가고, 안정성, 안정화밖에 더 있습니까?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 7이라는 7나팔을 동원해서 하시는 일은 무슨 일일까요? 우리 인간이 안정화를 추구하니까 결국 7나팔을 동원하는 일은 뭡니까? 간단하게 나오잖아요. 뭡니까? 안정화를 깨는 거예요. 안정화를 깨기 위해서 첫째 나팔, 둘째 나팔, 셋째 나팔, 넷째 나팔, 다섯째 나팔,...전부 다 뭐예요? 안정화를 흔들어 버리는 거예요. 안정화를 흔들면 그들은 드디어 ‘신이시여’ 하다가 오늘 요한계시록 9장에 나오죠. 그들은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을 더욱 더 원망하게 되는 겁니다. 본색이 드러나죠.

 

여기에 9장 20절 봅시다. 누가 한번 읽어 보세요.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그 손으로 행하는 일을 회개치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이렇게 돼있죠? 이러한 재앙이 떨어져도 그들은 어떻게 합니까? 인간은 오기 빼면 시체 아닙니까? 신은 나를 힘들게 해도 나는 나를 버리지 않겠다. 하나님은 나를 지옥에 보내도 그 지옥에 갈 존재를 건사하고 그래도 이뻐해 줄 것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나밖에 없는 거죠. 보세요. 얼마나 우리 자신이 하나님과 원수 됐는지, 하나님이 우리를 지옥 보내면, 우리는 스스로 '지옥 갈만한데, 맞습니다. 나는 갭니다.‘ 이래 돼야 하는데 그게 아니고 ’하나님은 나를 버려도 나는 나를 버리지 않겠다.‘

 

전 세계 모든 인민들의 마음속에 있는 구호입니다. 모든 인간들의. 현재 일본에서 하는 모든 움직임, 한국 땅의 모든 움직임, 정치인들, 종교인들, 모든 움직임은 ‘세상은 나를 버려도 나는 나를 버리지 않으니까 너는 실망하지 마, 지옥에 가면 내가 너를 따라 가마.‘ 푸쉬킨의 유명한 시가 있잖아요. ’세상이 너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언젠가 때가 되면 니 꿈이 이룰 때가 오나니,‘ 그런 시가 있어요. 소녀시절에 앞에 붙여 있잖아요. 흔히 7번 넘어져도 8번 일어난다. 주님께서 8번 또 자빠뜨리죠.ㅎ

 

요한계시록 쉽죠? 인간은 뭘 추구한다? 안정성을 추구한다. 그것을 하나님이 ‘7’ 언약의 완성인 7을 통해서 ‘완전한데 뭘 완전을 추구해 인간들아. 이 세상에서 나는 죽었다가 살아 나왔어 너도 마찬가지다. 너도 이 땅에서 죽었다 살아나야 구원 받아. 그런 조치로서 그게 완전이야, 그게 하나님의 의라는 밧줄이야.’라는 식으로 조져버리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가 요한계시록 6장 16절에 보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그러니까 세상에서 인간들이 진노를 받게 되면, 이 땅의 구석에서 자기 몸 하나 간수하기 위해서 피할 곳을 찾는데, 어디로 피합니까? 화산도 아니고 방사능도 아니에요. 어디서 피한다는 말입니까? ‘어린양의 진노’에서 피할 자가 있다? 없다? 어린양의 진노에서 피할 자가 없죠. 이것은 어떻게 지하 벙커를 만들어도 소용없어요. 그만큼 하나님께서 ‘메시야는 죽어야 돼.’라는 그 악마적인 속성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거침없이 정면 공격을 해 버립니다. ‘니가 기껏 해봐야 결국은 하나님이 죽었다는 사실은 관심이 없고 그저 자기 하나 죽는 거, 가족 죽는 거, 이게 급선무야,’

 

그래서 하나님의 모든 언약은 하나밖에 없어요. ‘니 자식이 최고냐, 내 자식이 최고냐,’ 그 관계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이 있는지를 뭐로 했습니까? ‘아브라함아 , 돈 갖다 바쳐라.’ 이렇게 했습니까? 아브라함이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뭘 내놓으라 했습니까? 열 명의 자녀가 있으면 정박아 하나 주면 돼요. 정박아가 아니고 열 명의 아들이 아니고 하나밖에 없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그것도 아주 건강한 아들을, 그 애 자폐증 아니에요. 아주 귀염 받고 사랑받는 독자를 바침으로써 결국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어떤 식으로 언약을 완성하는지를 거기에 체험학습을 시키는 겁니다. 누구를? 아브라함을. 그 체험학습 된 사람을 가지고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겁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면 그 뒤에 나오는 사람은 누구를 따라야 되요? 결국 아브라함 같은 동일한 체험학습을 하게 된다 이 말이죠.

 

항상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은 우리의 몸을 직접 겨냥해요. 우리가 몸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진선미, 진선미가 뭐죠? 참하고 선하고 착하고 아름답고, 그것에 주님께서 휘둘리지 않습니다. ‘웃기네.’ 합니다. 그런데 주께서 그거 보고 향기 취해서 ‘아이고 니 영광이다,’ 이거 없습니다.ㅎ 더러운 데서는 더러운 것밖에 안 나온다. 니 속에 들어간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고 니 속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다.

 

새삼 의인 될 필요도 없고 더구나 여러분께 부탁합니다. 새삼 죄인 될 필요도 없어요. 죄인인지 의인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자기 아내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이제는 하나님하고 남편이 나서서 하나님하고 상대해야지, 진노를 막든, 분노를 잠재우든, 그것은 우리 남편이 할 일이지, 내가 나서서 어떻게 처리할 문제가 아니란 말이죠. 우리 남편을 내세우는 걸 가지고 뭐라 하느냐 하면, 크게 써야 돼요. 그걸 ‘믿음’이라 합니다. ‘예, 저는 안 믿습니다. 저와 함께 계신 분을 믿습니다.’ 이런 뜻 이예요. 그걸 믿음이라 하죠. 그걸 ‘예수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하는 거예요. 제발 너 믿지 마, 너의 행위를 믿지 말란 말이죠. 예수 믿고 착한 사람 그런 사람 그 믿지 말란 말이죠.

 

자, 그러면 7중에서 지난 시간에 독수리가 뭐라 했느냐 하면, 8장 13절에 봅시다.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뭐가 있다? 화가 어떻게 있다 했습니까? 화, 화, 화가 있다. 화1, 화2, 화3, 3개의 화가 남아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1장 14절에 보면, 뭐라 돼 있죠? 둘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셋째 화가 남아 있죠.

 

그러니 하나님께서 기어이 이 지상에 화를 한꺼번에 줄 수도 있는데, 몇 개로 나눕니까? 꼭 7(일곱)로 나눠요. 뭔 뜻입니까? 이 화 재앙이 그냥 심심풀이로 오는 게 아니고, 이 세상은 왜 예수님이 주가 될 수밖에 없는가를 완벽한 스케줄로 꽉 차 있는 세상으로 보는 거예요. 그 하나 모든 일어나는 섬세한 사건 하나, 하나가 전부 다 미완료가 아니고 전부 다 완전한 데서 온 그런 것들이 모여서 그들이 배치되어서 구조를 이루어서 완벽하게 이 세상은 자기 역할 다시 말해서 메시야를 죽이는 자기 역할, 자기 본색과 그 배후에 숨어있는 악을 드러내는데 전혀 차질과 오류와 실패가 없다는 것, 하자가 없다는 것을 완벽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일곱(7)을 맞추어서 하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교회가 몇 개입니까? 7개잖아요. 이 일곱도 뭐가 되느냐 하면, 반드시 7은(하나교회에서 했어요, 그런데 다 잊어버려서..) 뭐로 시작한다? 하나로 시작한다. 왜? 여기에 이걸 등대로 만들어서 가지가 일곱이지 가지가 흘러내리는 중앙에는 뭐가 있습니까? 결국 하나에서 나온 거예요. 일곱 교회를 쥐시고 계신 분은 그것도 오른 팔로 한 분이 일곱을 쥐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일곱을 가졌지만 그것은 하나에서 출발해서 일곱이 된 거죠. 그렇다면 일곱 교회는 특정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구성하고 있는 구원 받은 자의 교회의 모습은 이러한 책망 속에서 피어난다는 거죠. 책망 속에서 양산된다는 거예요. 만약에 라오디게아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까? 이렇게 물으면 안 돼요. 원래 라오디게아, 빌라델비아 교회는 없어요. 원래 교회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인 교회가 역사 속에서는 이렇게 각각의 일곱 교회, 일곱(7)이라는 완전한 교회로 있어 이 교회들이 어떻게 사라짐을 통해서 완전한 교회가 한 군데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전에 이야기 했죠? 고린도교회가 교회가 되려면, 고린도교회 교인이 교회를 어떻게 해야 되요? 부정해야 돼요. 그 부정하는 힘, 고린도교회라는 그 지역이라는 힘이 하나밖에 없는 교회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완전한 교회 됨입니다. 이 고린도교회라는 미완료 교회를 완전하게 해서 고린도전서를 준 게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여기 하나 속에 따로 있고 또 고린도교회라는 교회가 따로 있고 그러면 교회가 두 개가 돼 버려요.

 

교회 머리는 누굽니까? 예수님밖에 없잖아요. 예수님밖에 없는 교회가 ‘머리도 하나요. 몸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나요.’ 에베소서 4장에 나오잖아요. 그러면 고린도전서에 보면 ‘나는 아볼로 파다. 나는 게바 파다. 나는 바울 파다. 예수 파다.’ 할 때 사도바울이 책망하면서 뭐라 합니까? 그것이 그런 파가 소용없다는 근거가 뭐냐 하면, 나 사울도 십자가 안 졌다는 그것, ‘나 사도바울이 너 위해 십자가 졌느냐?’라고 해서 십자가 지신 분은 ‘파’를 만들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하지만 인간 세계에 ‘파’가 있기 때문에 ‘파’가 있는 그 속에 하나밖에 없는 주님의 그것이 파고 들어와 버리면, 각각 서로의 ‘파’가 있는 것처럼 돼 있는데, 어떤 원리에서 전부 다 경계선이 깨지고 해소가 되느냐에 따라서 역시 교회는 하나밖에 없음을 느끼는 체험을 기존 교회에 다니면서 지 교회에 다니면서 그걸 해야 한다는 거죠. 교회 안 나오면서 교회 없다 하지 말고 교회 다니면서 교회 없다고 이야기해야 되죠. 교회 나와서 전도 하면서‘ 이 교회 아닙니다.’ 해야 돼요. 그럴 때 교회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교회는 교회도 안 나오면서 교회라 해서 문제라.ㅎ 나오시라 해도 안 나와요. 그렇다고 다른 교회도 가지 않아요.

 

그러면 이유가 뭘까요? 뭣 때문에 그렇습니까? 지금 실컷 공부 했는데, 뭣 때문에 그렇습니까? 아, 다 잊어버렸네. 몸의 안정성을 포기하지 못해서 그래요. 아, 교회 오니까 자꾸 욕을 해서 못 가겠다는 거예요. 핍박이 없으면 성령을 안 받는 거잖아요. 성령을 받았으면 핍박을 되고 핍박 속에서 그동안 ‘주님의 이름으로’ 란 말은 핑계고 사람에게 욕을 얻어먹으면 뭐가 먼저 상해요? 내 자존심이 상하잖아요. 그래서 자존심 상하라고 주변에 그런 인간을 깔아준 거예요. ‘니는 왜 아직도 니 자존심을 믿느냐, 왜 처녀로 혼자 사느냐,’ 그런데 남편 있다 하면서 남편 자랑해야 하는데 남편 있다고 지 자랑 해 버리면 안 된다 말이죠. 그런 경험을 하라고 교회가 있는데, 자기 안정성, 자기 자존심 상한다고 교회에 안 나오는 거예요. 그렇다고 다른 교회 다니는 것도 아니고 다른 교회는 돈이 없다고 안 가고, 인터넷으로만...인터넷을 없애야 하는지...ㅎ

 

그러면 잘 가르치는 게 뭐죠? 저는 평생 잘못 가르치는 것밖에 없어요. 잘 가르치는 것은 성령이 직접 여러분을 가르치는 것이 요한일서 2장 27절. 성령이 너희 안에서 가르치는데 누가 너희한테 배우느냐, 제가 어떻게 이야기해도 그 말이 여러분 속의 성령이 점검해 보세요. 제 말이 성령인지 아닌지, 그것은 여러분 속의 성령께서 점검하는 겁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 하니까 ‘ 내 속에 성령이 없으면 어떻게 하느냐,’ 성령이 없는 사람은 이리 이야기 하나 저리 이야기 하나 오해만 할 뿐이죠. 성령이 없으니까 뭐만 있다? 자기 속에 몸이 있고 몸을 장악하는 마귀만 있을 뿐이죠. 마귀는 뭐라 합니까? 마귀는 너희가 어떤 죄 지었다는 것은 묻지도 않고 너는 무조건 니 몸 하나 간수해서 살아남는 게 땡이야, 남은 죽든 말든 니는 살아야 돼. 방사능을 오면 니는 피해서 살아야 돼. 그게 성공이야. 다들 다 죽어도 니는 살아나야 그게 성공이야.‘ 자꾸 자기한테 그런 식으로 격려를 하죠.

 

이건 불신자만 이런 것이 아니라 우리 몸이 있는 한 계속 갑니다. 한국의 식품 회사 다 망해도 이 세미원이 안 망하면 아주 기분이 좋아서 ’예수 믿는 사람을 감히 함부로 해.‘ 라고 이렇게 자랑하죠. 또 그러기를 얼마나 소원 합니까? 전부 다 무릎을 꿇고 와서’사장님 잘못했습니다. 봐주세요.‘ 이런 식으로 올 것이라고 얼마나 기대 합니까? 언제나 이 회사가 삼성그룹처럼 되나?ㅎㅎ그게 바로 우리 몸의 안정성이잖아요. 죽으라는 세상에서 우리는 주님 필요 없이 내 힘으로 살 수 있습니다. 라고 버티는 거, 그게 숨어 있는 마귀인데, 그것이  화, 화, 화, 바로 네 번째 다섯 번 째, 여섯 번 째 나팔인데,  지금까지는 주님이 자연세계에 대해 안정성을 깨는 것이 요한계시록 8장이라면 9장 이야기는 바로 나를 4,5,6, 나 자신을 공격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나팔의 속성을 가지고 치게 되는 겁니다. 그 이야깁니다.

 

여기에 누가 열심히 도와주어야 하느냐 하면, 놀랍게도 악마가, 그리고 악마의 졸개들, 누굽니까? 귀신들, 악마와 귀신들이 주의 일, 하나님의 일에 열심히 거기서 봉사를 해야 돼요. 왜 그들이 주의 일을 합니까? 그것은 이미 예수님이 무슨 자리 앉았다? ‘주’의 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주의 자리라 하는 것은 부릴 수 있는 원수를 이미 지배할 수 있는 자리에 있기 때문에, 오른편에 앉으신 분이 여호와의 자리거든요. 여호와 자리에 계신 분이 모든 피조물, 악마도 피조물 입니다. 우리 보기에는 영물이지만, 영들도 주님 보시기에는 피조물 이예요. 우리 보기에 개미가 하찮죠. 주님 보시기에 악마도 하찮아요.

 

그래서 욥기에 보면, 마귀를 시켜서 ‘욥을 적당히 때려라. 죽이지는 말고 위에서 때리고 아래에서 때리고 적당히 때려라. 재산하고 귀한 자식들 홀라당 없애버려라.’ 그렇게 시키는 겁니다. 그게 다 완벽한 하나님의 완전한 스케줄 안에 포함돼 있어요. 그게 하나님이 실패 한 게 아니에요. 그 자체가 완전함 이예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9장에 보면, 독수리가 화, 화, 화, 를  날아다니면서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다섯 째 천사가 (5,6, 7은 항상 남겨 놔요) 나팔을 불매,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땅에 떨어진 별 하나죠. 땅에 떨어졌으니까 원래 이 별은 어디에 있던 겁니까? 하늘에 있어야 될 것이 땅에 떨어졌어요. 그러면서도 이름은 별(star)이예요. 재밌잖아요. 에덴동산에 원래 사람이 살기로 돼 있는데 거기 뭐가 들어왔어요?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옛 뱀이 들어왔죠. 그런데 그것이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이 마귀가 그냥 온 게 아니고 한바탕 벌리고 왔죠. 땅이 아니고 어디서 벌렸습니까? 하늘에 전쟁이 일어나서 미가엘과 지고 난 뒤에 패배해서 쫓겨나서 땅으로 내려왔잖아요. 마치 청년에게 군대귀신이 들어왔을 때, 그 귀신이 어디로 이동합니까? 난데없이 돼지한테 들어간 거예요. 돼지 구제역입니까? 돼지는 가만히 있어도 귀신이 들어온 거예요. 귀신이 들어와서 돼지가 어디로 가요? 바다로 들어가 버리죠. 돼지가 물 좋아하는 짐승 아닙니다. 이 말은 귀신 들린 돼지는 본인이 원치 않는 길로 가듯이 귀신 들린 인간은 아무리 진선미를 원해도 그것은 니 마음이지, 지 마음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겁니다.

 

사람이 좋은 것을 좋은 줄 알죠. 뭔가 알고 있기 때문에. 하지만 행동은 아는 것하고 아무 상관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성이 원인으로 되서 행위가 나온다고 하지만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몸에 있는 그 무엇이 원인이 되는 겁니다. 지성은 붕 뜨죠. 그냥 변명에 지나지 않아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짓을 했습니다. 왜, 그런 나쁜 짓을 했습니까? 그러면 그 사람이 ‘나도 나쁜 짓인 것은 알지만, 사회가 날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사회가 만든 것이 아니고 지 안의 마귀가 만들었어요. 그런데 변명을 뭐라 합니까? 사회 구조적인 죄가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남 탓을 할 수가 없어요. 남 안의 귀신이 그렇게 만든 게 아니라 내 안의 귀신이 그렇게 만들었거든요.

 

한 예를 들어 봅시다. 일제시대 때 정신대로 끌려간 할머니, 아직도 일본하고 보상하라고 데모하죠? 그 분의 자식이 있었는데 위급할 때 만약에 일본 사람이 그 자식을 도와줬으면 그 할머니 입에서 더 이상 일본을 욕하는 게 쏙 들어가 버립니다. 결국은 그 사람은 앞날을 모르기 때문에, 왜 내가 정신대에 끌려가는 이것의 원인과 결과를 찾기 위해서 눈에 띄는 것은 다 쑤시고 다니는 거예요. 국가가 잘못이다. 일본이 잘못이다. 부모 탓이다. 다 쑤시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알지 못해요. 그것이 바로 내 속에 있는 마귀의 탓이라는 것을 모르게 돼 있어요. 마귀가 그걸 막으니까.

 

우리는 어떤 사업을 결정할 때 뭔가 판단을 잘못할 때 핑계를 누구에게 댑니까? ‘그때 IMF 터졌어.’ 이래 하죠. (집사님 가슴 아픈 이야기해서 미안합니다.) ‘IMF 터져서 홀딱 망해서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진짜 원인에 접근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십자가를 바라보면, 진작 망해야 했고 진작 죽어야 되고 내가 그동안 지금까지 망할 때까지 살아온 것도 은혜라는 것을 알죠. ’예 내가 바로 갭니다.‘라는 것을 알죠.

 

그러면 강도처럼 내가 지금까지 주님 만나려고 지금 강도짓을 하고 살아온 인생이죠. 세리와 창기가 하늘나라에 먼저 가는 거예요. 내가 창녀 짓 한 것도 천국 가기 위해서 주께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이것을 십자가 앞에서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지, 그걸 어떻게 원인 규명을 십자가 앞에서 눈 돌려 버리면, ‘나란 인간이 왜 이렇게 생겨 먹었느냐,’란 말이 나오지, ‘나는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 라는 사명감이 주어지질 않아요. 왜 내가 원하는 내가 될 수 없는가, 자꾸 주변에 있는 사람을 붙들면 원망해요.

 

‘아, 이건 나를 안 알아주나?‘ 이러면 특히 개척교회 목사들한테 얼마나 많습니까?’ 여기는 안 계시지만,ㅎ ‘나같이 설교 잘하는데 왜 안 알아줘, 저 큰 교회 목사들 설교도 아닌데, 내가 강단에 서면 수도 없이 모을 텐데 왜 나를 그 자리에 안 세워주는 거야.’ 자꾸 원망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건 목사도 그렇죠. 일반 기업하는 사람들은 ‘내가 그런 찬스 왔으면 나는 이 자리 떠나버렸다. 바보같이 그 찬스를 놓쳐? 그게 돈의 흐름인데,’ 사업하는 사람들 매일 그거만 보이잖아요. 아닌가요? 누가 그러는데 그거만 보인다고 합니다. 맨 날 찬스 놓쳤다고 그래요.ㅎ 찬스만 다 챙겼으면 벌써 수조 원 재벌 됐을 텐데, 맨 날 남한테 가고 자기한테는 찬스가 오지 않는다는 거예요. 아, 주식하는 사람들. ‘아, 바보같이 살걸, 아유, 바보같이’

 

이게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계속 자기의 십자가를 눈 감아 버리니까 자기가 진짜 자기를 조정하고 있는 진짜 원인을 모르는 거예요. 그 원인을 알려주기 위해서 화, 화, 화가 있는 겁니다. 이제 이해하기 쉽죠?

 

이제, 하나님께서 하늘나라 완성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너는 나(예수)를 미워할 수밖에 없는 원인을 이제 내가 알려주마.’ 그 원인을 추적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나님께서 지난 8장에서는 자연세계를 건드리지만, 9장부터는 직접 마귀(악마)를 통해서 화목한 가정, 평화로운 가정, 행복한 가정,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세상 욕심 없이 텃밭 가꾸며 살아가는 그 가정에 하나님께서 화를 보내죠. 세상에 어떤 지역이나 공간이 문제가 아니고 경제적 상황이 문제가 아니에요. ‘ 니 속에 마귀 있다’를 들춰내는 점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어떤 지역이나 공간에 있던지 간에 나이 불문에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마귀를 보내버립니다.

 

그것이 바로 9장에 나옵니다.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별이 하는 역할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무저갱의 열쇠를 여는 거예요. 열쇠라 하는 것은 뭔 뜻입니까? 열쇠 없이는 못 연다. 다시 말해서 그 공간은 갇혀 있다. 갇혀 있는데 나왔다. 무슨 뜻입니까? 그들은 갇혀 있는데도 임무가 있었고 그 갇혀 있는 것을 잠시 풀렸는데도 그냥 풀린 것이 아니고 ‘니 자유로워라’ 해서 풀린 것이 아니고 임무를 주고 풀린 거예요. 그 임무는 귀신이 귀신다움, 마귀가 마귀다운 임무를 하겠죠. 딴 임무는 못합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인간의 본색을 권세(힘)를 가지고 6절에 보면, 재앙으로써 땅을 칠 때에, 여기에 인간으로선 이길 수 없었다는 겁니다. 여기 정리해 봅시다. 무저갱이라는 것은 바닥이 없는 그러한 음부, 원래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하실 때 땅과 바다를 갈랐는데 이 땅 안에다가 물이 있던 그 장소를 무저갱이라 만들어서 빈 동굴을 만들어서 거기에다 가두어 놨어요. 가두어 놨다는 것은 여기에 필요하면 열고 가두려면 열쇠로 채웠다는 거예요. 열쇠를 열면 이것들이 자기 본성 마귀, 귀신의 본성을 마음껏 발휘하는 성질이 어디로 갑니까? 나오죠. 이 악마의 본성이 잠시 풀어 나오게 되면, 여기 주위에 있는 인간들이 안정화를 공격하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면 기존의 요한계시록 해석을 본 사람은 ‘목사님, 그게 언제쯤 일어납니까? 언제!!! 언제쯤 일어난다는 겁니까?

 

자 봅시다. 역사라 하는 것은, 과거, 현재로 나눈다고 했죠? 미래는 점선으로 돼 있습니다. 미래를 점선으로 하지 말고 아예 없는 걸로 하면 되는데 왜 또 점선으로 했느냐 하는 것은, 요 점선 하나, 하나는 그냥 없는 것이 아니고 과거, 현재가 누적된 현재에서 스스로 모자란 부분을 마저 채워지기를 기대하는 이미지가 있어요. 이 미래는 다리가 어딥니까? 현재 내가 좀 더 내가 ‘요것만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고걸로 채워지죠.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는 미래 소망이라 하는 것은 누가 조작한 거예요? 내가 만들어 낸 거잖아요. 그 조작하는 힘은 어디서 나옵니까? 힘은 과거에서 현재까지 쭉 끌어온 것이라 하겠죠. 그렇다면 공격할 때 이 안정화를 미래로 확장시키는 거니까 이것을 깨버리고 공격해버리면, 시간 속을 만약에 공격해버리면, 이것은 어느 시점이 잘못됐느냐가 아니라 전체 자체가 이건 처음부터 폐기처분 될 허망한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번에 일본에 지진이 일어나면서 두 개의 사진이 저한테 뇌리에 꽂혔어요. 하나는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 집안 청소를 할 때(손님이 온다든지 평상시 청소를 하거든요) 마음가짐이 뭡니까? 깨끗한 이집에 깨끗한 정신과 마음으로 있겠다 하잖아요. 그런데 그것은 과거 현재에서 온 버릇이고 미래에 지진이 일어나버리니까 깨끗한 3층집 전체가 날아가 버리죠. 그거하고 또 한 가지 사진은 저 포항에 해맞이 하는데 있죠? 동산이 하나 있는데 손이 하나 있죠.호미곶 해맞이 공원에 손이 하나 있어요.

 

일본의 지진이 난 잔해 더미에 손만 딱 나와 있는 사진이 있었어요. 시체 오른손인데 이걸 보고, 이 주변도 흙이고 결국 인간도 흙에 불과한데 인간이 생각할 때는 인간은 인간이고 주변은 문명이라 생각하죠.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는 그렇게 분간하는 것이 아니고 너도 흙 중에 하나고, 이 자연세계도 같이 구겨져 버리죠. 자연이 구겨질 때 같이 구겨지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7이라는 완전한 나팔 속에서 7의 일부로서 다섯 나팔을 분다는 것은 결국 그들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뭐로 봅니까? 흙 정도가 아니고 악마에 소속돼서 악마에 예속돼서 악마가 시키면 그냥 얻어맞을 수밖에 없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완전히 노출시킬 때 그것이 바로 완전하심, 하나님의 멋들어지심, 하나님 되심의 솔직하심입니다. 완전히 드러나는 거예요.

 

그래서 지진이나 태풍이나 오는 것은 이것이, ‘니 주제에 맞다’는 거예요. 마땅하다는 겁니다. 대자연을 사람 말 안 들어요. 안 듣는 것을 사람들은 억지를 부리는 겁니다. 물은 위에서 떨어지죠. 인간이 여기서 댐을 사용해서 전기를 뽑아냈습니다. 하지만 전기 뽑아낼 때 물한테 물어봤습니까? 연못에 튀기는 물방울한테 ‘빗방울아, 빗방울아, 너 아름답구나.’하면 빗방울이 웃습니다. ‘니하고 내하고 무슨 상관인데??’ 빗방울은 사람 말 안 듣고 누구 말 듣습니까? 하나님(예수님) 말 듣죠. 바람과 바다도 잔잔해지죠. 지난시간에 했잖아요.

 

모든 자연세계는 주님을 위하여 주님의 하시는 언약의 완전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쓰여 지는데, 인간만 주님이 안 보이니까 자꾸 옆에 빗방울하고 상대하고 물하고 상관해서 ‘어떻게 니가 나를 도울 수 있느냐,’ 하는 거예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자연세계를 통해서 ‘니 속에 마귀가 있으니까 하늘에서 쫓겨난 주제가 하늘의 존재를 없애버리기 위해서, 없애야 자기 존재가 천상천하유아독존이 되거든요.

 

불교, 부처, 사람 누구나 부처 아닙니까? 천상천하유아독존이니까. 누구에게 간섭받지 않고 내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권리가 나한테 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이게 불교 아닙니까? 불교의 특징은 뭐냐 하면 타인(他人)이 없어요. 모는 것은 나예요. 이 세상에 나만 있어요. 불교의 특징 이예요. 그런데 자기 말고 어른이 있었네요. 누굽니까? 마귀가 있었어요. 그래서 그들은 공격을 받게 됩니다. 오직 누구한테 공격을 받느냐 하면, 4절에 보면,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 맞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했습니다.

 

여기서 한번 봅시다. 하나님의 인이라 하는 것은 도장이죠. 도장을 어디 맞는다 했습니까? 이마에 맞죠. 도장(인)을 이마에 맞는다는 의미가 뭘까요? 자, 이거 어려운데요. 에스겔에 보면 1장부터 3장에 보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의 모습이 나와요. 하나님의 모습이 나올 때 하나님의 다리가 나오겠습니까? 허벅지가 나오겠습니까? 하나님의 얼굴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놀랍게도 존재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기능적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4가지 기능이 있어요. 사자, 송아지, 어떤 때는 곰, 어떤 때는 사람의 얼굴이 나오죠. 이것은 하나님의 모습이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보이더라고 그 기능은 수시로 변하는 기능, 그 기능은 사자 같은 기능, 소 같은 기능, 독수리 같은 기능, 인간으로서의 기능이 나와요.

 

이것이 요한계시록에도 나와요. 전에 우리가 하나교회에서 4장할 때 했는데, 또 할 수는 없죠. 4가지의 서로 다른 종류의  생물들이 나오고 천사들이 나오고 했어요. 천사들의 이러한 기능, 모습은 여러분, 수시로 변합니다. 사람 얼굴은 하나지만, 수시로 변해요. 그래서 소돔과 고모라 때 천사가 나타났을 때 천사가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남자도 아닌 것이 여자도 아닌 것인데 남자 같은데 왜 그렇게 이쁘지? 그래서 그 동네 노는 애들, 침 뱉고 다니는 깡패들 와 가지고 여자보다 더 여성 같은 남성, 그래서 색다른지.... 그래서 내 놓으라 할 때 롯이 결혼하지 않은 딸 둘을 상대하고 이 손님은 손대지마, 롯은 이 분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눈치 챘어요.

 

항상 천사가 사람모습으로 오더라도 그것은 사람적인 기능으로 오는 거예요. 이것이 영들의 특징 이예요. 예수님이 부활했잖아요. 부활하면 영적이 되잖아요. 그러면 영적인 육체가 되는데 어떤 때는 예수님 모습으로 어떤 때는 도무지 알지 못하는 모습으로, 엠마오로 내려갈 때 제자들이 같이 가면서도 못 알아봤는데 떡 뗄 때 알아 봤어요. 사도요한에게 밧모 섬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 너무 엄위한 모습, 그러니 이 모든 것은 주님의 기능으로 하기 때문에, 존재는 뭐로 바뀌어져야 하느냐 하면, 존재는 잘라져서 하나의 사건으로 잘라져서 ‘존재에서 사건화’ 될 때 하나님의 언약과 사건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건화 만드시는 방법은 뭐냐, 어제 일을 잊어버리게 하는 거예요. 내일 염려는 내일 하게 하는 겁니다. 오늘 나는 ‘오늘 나를 통해서 무슨 주님이 계시다는 사건을 니가 드러내느냐‘를 보시는 겁니다. 어제 잘난 것 말고, 내일 염려 미리 땡겨 하지 말고 ’오늘 너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어떤 식으로 그것이 너에게 방출되느냐, 방사능 나오듯이, 너라는 몸속에서 남편 되는 예수님 살아계실 때 예수님은 너에게 어떻게 어떤 기능으로 오늘 내(예수님)가 일하느냐를 느끼게 되느냐를 묻는 겁니다. 우리 몸 하나, 하나가 사건이 되고,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천사같이 되는 거죠.

 

그런데 불신자들은 뭐가 있느냐 하면, 계속 뭐로 버팁니까? ‘나’라는 존재로 버티니까 존재는 안정성을 원하거든요. 안전성을 더 키우기를 원한다 말이죠. 이것을 무저갱에서 나온 마귀는 이걸 사건으로 화살을 쏘아대는 거예요. 계속 추월을, 추월을 일으켜서 계속 쏘아대는 거예요. 그러니 인간은 어떻게 합니까? ‘왜 이렇게 판이 떨리는지 모르겠다. 오늘 따라 왜 떨리는지, 오늘 들어서 사건이 왜 이렇게 터지는지 몰라. 파이프가 얼어서 터지고 녹았다고 터지고 집안에 애가 아프다고 터지고 그러니까 교인들이 우루룩 나가서 골치 아파, 이러니까 생방송 인터넷도 안 돼. 어제도 안됐어요. 목소리는 되는데 동영상이 안 되고... 도대체 왜 자꾸 들끓는지,

 

우리가 역사, 과거, 현재, 또 예상한 미래를 매일 같이 그걸 뭉쳐서 매일같이 주체라는 존재 화 시키는 이 작업을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잘라버립니다. 만약에 존재가 되면, 그것은 통째로 귀신의 공격을 받아요. 하나 예를 들게요. 욥이 자식 열 명 날리고 재산 다 날릴 때 뭐라 했습니까?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거두시는 분도 하나님이라.’ 이것은 바로 주님께서 일으키는 것은 반드시 나에게 사건으로 다가오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예요.

 

어떤 사람은 말했죠? 예수님을 보여주면 믿겠다. 하나님을 딱 보여주면 믿겠다. 그것은 나는 존재기 때문에 내 존재와 저 존재가 서로 악수 할 수 있느냐를 내가 판단하겠다 이 말 아닙니까?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고, 뭐로 온다? 존재로 오시는 것이 아니고, 사건으로 와서 내 존재를 존재라고 그냥 유지될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리죠. 더 이상 나의 존재를 유지될 수 있는 힘을 다 소진 시키고 포기하게 만들어요. ‘ 그래요, 맞습니다. 하나님 뜻이 맞습니다. 나 안개 맞습니다. 나 오늘 있다가 내일 죽어도 그만인 안개 맞습니다.’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그렇게 말이 나오면, 주님께서는 천사로 오셔서 ‘드디어 야고보서 4장 말씀을 듣고 순응하는 자여.’ 라고 그 말씀에 순응하면 가버려요.

 

주님께서는 오직 자기 말씀을 해석하면 그게 임무라. 얼마나 야박한지 몰라요. 시편 90편에 보면, 우리의 한평생은 진노 중에 순식간에 지나간다 하죠. 고걸 딱 느낄 때, 주께서 오셔서‘ 또 사건 나서 내가 얻을 게 있네,’하고 건져가요. ‘난 잘났습니다.’하면 그거 뜯어 고쳐놔요. 사건 터져서 ‘주여,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하지 않고 은혜도 모르고 더 달라고 했군요.’ ‘오, 디모데후서 말씀만 건져가요. 하여튼 성경 말씀만 다 건져가요. 또는 ’주님, 내가 동창생한테 복음 이야기 했더니 원수지간 되어 날라 갔습니다.‘ 그러면 야고보서 2장에 ’니가 세상하고 원수가 되었다.‘ 가 나오죠. 하나님의 말씀만 건져가는 거예요.

 

말씀이 나오는 그 기능적인 요소로서 우리가 평생을 하나님 앞에 사용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마에다 인을 맞는다는 것은, 얼굴을 인간의 기능이 작용하는 대표로 봅니다. 인간의 기능이라 하는 것은 얼굴이 대표하고 그런데 그건 에스겔에 의해서 하나님의 천사의 모든 일은 그 천사가 얼굴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얼굴에 나타난 천사의 모습이 천사가 해야 될 기능을 대표하는 겁니다. 그 얼굴에다 인을 박는 것은 얼굴 전부를 뭐가 차지한다? 도장이 지배하겠다는 거예요. 얼굴은 도장 밑에서 나타날 얼굴이지, 얼굴이 알아서 도장을 지운다든지 벗긴다든지 할 그럴 수 있는 여력이 못되는 거예요.

 

그렇게 이마에 도장을 찍으므로 말미암아 주도권이 어디에 있느냐, 그 사람의 몸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찍은 도장에 있는 거예요. 이 도장이라 하는 것은 악마에 속했다는 걸 그들에게 악마로부터 짐승의 인을 받는 것이 아니고, 짐승이라 하는 것은 피조물이죠. 피조물은 누구에게 두려움을 받는다? 죽음으로 두려움을 받죠. 그렇다면 짐승의 인을 받은 자의 숫자가 얼마입니까? 666이죠. 이것은 요한계시록 13장에 나와요. 그런데 이것이 무엇이냐를 알기 위해서 짐승의 666이 나온 게 아니고, 주님의 인을 받은 사람이 있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피조물인 악마를 통해서 짐승의 인을 받게 하는 겁니다.

 

이마는 뭐냐 하면, 성도가 여기 보세요. 4절에 보세요. “하나님의 인” 그다음에 “맞지 아니한 사람”이라고 부정적인 표현을 했죠? 하나님의 인을 맞지 아니했다는 말은, 하나님의 인을 맞은 사람은 따로 있다는 말이고, 그 사람한테는 다섯 번째 나팔의 해는 입지 않는다는 말이죠. 이건 뭐냐, 구별됨, 그리고 차별적, 선별적으로 다루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선별적으로 다루겠다는 자체는 바로 7나팔 기능 속에 있기 때문에 그것조차도 완전함이죠.

 

완전하기 때문에 세상에서 마귀에 속한 사람에게 재앙이 오고, 그리고 성도도 나중에 재앙을 받습니다. 성도도 뒤에 7째 나팔 불 때 재앙을 받는데, 그 7째 나팔 속에 7대접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 맞은 사람도 큰 시련을 당하는데 하나님의 시련을 당하더라고 그건 하나님께서 차별시키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일의 완전함에 속한 거니까,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슬퍼하거나 노하거나 하면 안돼요.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예수 믿는 게 아니고, 주께서 예수 믿도록 도장을 팍 찍어버렸다 말이죠. 마치 도살장에 ‘합격‘이란 도장을 찍듯이. 벌건 도장 큰 도장 ’합격‘이라고 ’아, 삼겹살 잘 나왔다.‘ 라고 찍듯이 우리 이마에다 찍어버렸다 말이죠. 어, 시간이 왜 이리 빨리 갑니까?ㅎ 죄송합니다. 이야기 안 했으면...할 수 없네. 그 다음은 다음으로 기약합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아버지, 모든 것이 완전하게 잘 이루어지는데, 참새도 그걸 알고 잡초도 그걸 아는데, 소위 똑똑하다는 우리 인간은 소위 믿음 좋다는 우리는 참새만도 못하고 잡초만도 못해서 맨 날 원망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옛 사람이 남아 있어서 그런 줄 아오니, 날마다 사건이 찾아와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언약의 완성을 위해서 ‘다 이루었다’를 위해서 그 기능을 하기 위해서 아직도 살아있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