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마가복음 3장 1- 6절 제목 : 생 명 듣기 : 음성 , 보기 : 동영상
생명 이근호 2008년 5월 4일
본문 말씀: 마가복음 3:1-6
(막 3: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막 3:2)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
(막 3:3)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 일어서라 하시고』
(막 3:4)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
(막 3:5)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막 3: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이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습니다. ‘죽여버려도 상관없는 자’입니다.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의 심정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바보라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요모조모 따져봐도 죽어 마땅한 자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평가는 인간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무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행여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여 마땅한 자라는 그들의 평가를 이상스럽게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 당시 예수님의 행색이나 말씀하신 것을 들었다면 우리들도 분개해서 예수 죽는데 기꺼이 가담할 자들입니다. 교회에서 유행하고 있는 구절들을 건성으로 듣고 ‘예수님은 좋으신 분이다’라고 단정을 내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나와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눈여겨 보게 되면 예수님은 참으로 사람을 모독하고 사람의 품위에 위협을 가하는 존재見?죽어 마땅한 인물임이 실감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은 근원적으로 부정해 버립니다. 사람의 기본 가치를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오죽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실망했으면, 바라바라는 강도를 살려주고 예수님은 가차 없이 죽이는데 편승했겠습니까. 참으로 예수님을 진지하게 평가한다면 예수님을 좋아할 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밉상을 받고 결국 죽음으로 인생을 끝맺어야 하는 이유는, 사람의 생각을 근원적으로 집요하고 공격해대고 그것을 죄라고 모욕감을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이 질문은 어린애들도 아는 답변입니다. 선과 악 사이에서 악이 선보다 낫다고 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뻔한 답변이 나올 그런 질문을 소위 학식있는 사람들에게 했다는 말은 곧 “너희들이 하는 짓거리는 모두 사람을 죽이는 짓거리”라고 공개적으로 모독하는 발언입니다. 어느 인간이 안식일에 악한 일을 내놓고 하겠습니까. 안식일뿐만 아니라 평일에도 사람들은 악보다 선한 일을 통해서 자신의 가치를 드높이고 자신은 선한 사람중에 선한 사람임을 나타내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그런 질문을 하신 것은 “왜 너희들을 사람들을 죽이려 하느냐”라는 하면서 시비걸고 있는 것입니다. 한 예를 들면, 만약에 공무원 시험 준비로 하루 15시간씩이나 고시원에서 공부하고 있는 청년에게 예수님께서 다가서서 묻습니다.
“너는 생명을 원하느냐 죽기를 원하느냐?”라고 말입니다. 이 말의 취지는 곧 ‘공무원 시험 준비’가 결코 생명을 위한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말의 취지를 비록 그 청년을 알아듣었다고 치더라도 듣는 청년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와서 격려를 못할 만정 어디서 초를 치느냐로 기분 나빠할 것이 뻔합니다.
또한 예로서 지금 우리가 한참 예배 드리고 있는데 저 뒤에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저를 밀어내시고 이 강대상에서 말씀하시기를, ‘예배날에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과 어느 것이 옳으냐?’라고 물으신다면 우리가 정답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물으시는 취지에 분개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질문은 곧 “너희들 예배 드리는 것이 생명을 살리는 일이 아니야!”는 그런 뜻을 들리기 마련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오늘 설교의 결론부터 말씀 드려서, 생명이란 예수님만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뭔가 한다고 해서 생명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이는 아무도 생명을 줄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예수님만이 생명을 줄 수 있느냐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주보 뒷면에 보면 이런 글이 나와있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인간을 찾습니다. 전혀 다른 사람을 찾습니다. 기존의 인간들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생각에 준해서 만들어진 사람을 원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담겨 있는 그런 사람을 만들고 찾으십니다. 사람의 힘으로 못하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으로 사람을 데려가려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천국의 기준에 맞추어져야 합니다. 천국의 기준은 오직 예수님만이 아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인간들의 기준을 정죄하고 배척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기준에 맞추어서 살면 천국에 못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오직 예수님만이 줄 수 있는 그 무엇입니까? 그 무엇이 무엇입니까? 로마서 9:10-13에 보면,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창세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사랑할 자와 미워할 자를 구분지어 인간을 만들기로 했다는 겁니다. 창세 전부터입니다. 이 ‘창세 전’의 확정된 뜻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그 에서와 야곱이라는 두 사람이 이 땅에서 살면서 어디서 무얼하며 어떻게 살았는지를 전혀 상관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즉 에서와 야곱이 이 땅에서 무슨 선을 행하는지, 무슨 악을 행하는지 상관없이 창세 전에 확정된 그 조치대로 모든 것이 진척될 뿐이라는 겁니다. 그 사랑에 따라 예수님의 생명이 주어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손 마른 병에 걸린 자가 무상으로 예수님으로부터 고침받게 됩니다. 앞으로 그 사람의 손에는 예수님이 그저 주신 사랑이 그대로 배겨있는 채로 살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생명이란 사랑한다는 조치에 따라 일관되게 주어집니다. 오로지 사랑하게도 지음받은 사람에게만 말입니다. 그래서 생명이란 예수님만이 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조치에 반발할 것입니다. 왜 미워하는 자를 영원히 미워하느냐고 말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고 싶은 자를 만들 권한이 있고, 나는 내가 미워하고 싶은 자를 만들 권한이 내게 있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정답입니다. 따라서 진정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자는, 자신이 그 생명을 유도하거나 받도록 뭔가 행한 게 없음을 압니다. 이는 곧 이 세상에 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보다 더 생생하게 내용 있는 ‘있음’은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즉 예수님은 나보다 더 있습니다. 나만 계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도 계신데 예수님 계심으로 인해 나의 있음을 있음도 아니라는 점을 압니다. 왜냐하면 나는 늘 나를 죄로 죽게 하는 일밖에 못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못만드는 나의 있음은 있음 축에도 못듭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8:19에 보면 개척교회 목사의 낙담케 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즉 두 세 사람이라는 숫자를 헤아릴 필요도 없이 '예수님이 계시다“라는 것이 현실을 현실답게 합니다. 예수님의 계심 앞에서 우리의 있음은 의미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대속물이 되었습니다. 대속물이라는 것은 순전히 ‘너는 죄인이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제대로 생명을 얻은 자는 나의 모든 죄가 예수님께서 이미 다 처리했음을 아는 자입니다. 이런 자는 손마른 자처럼 예수님 생명만을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죄인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인간적으로 당연히 미워할 만한 예수님이신데 도리어 사랑의 증표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이미 정리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앞으로 예수님만 쳐다보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