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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하나님의 선택(12) - 바울의 무소유 목회론 , 선지자 언약 3 본문

저서 & 기타(이근호)/하나님의 선택

하나님의 선택(12) - 바울의 무소유 목회론 , 선지자 언약 3

정인순 2011. 1. 4. 10:36

하나님의 선택(12) - 바울의 무소유 목회론 , 선지자 언약 3

                                                                      97,9,29  이근호 (구득영 정리)


* 성전은 하나의 구조물이니까, 그 자체에는 너무 신경을 쓸 필요가 없고, 다만 그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성전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가? 그 속에는 언약궤가 들어있다.

* 언약궤와 레위지파 - 이 언약궤가 고정되어 버리면, 그때부터 레위지파의 역할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이동할 때, 언약궤의 부속물들을 이동시키는 일을 하였다. 또한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그 공간을 성스러운 공간으로 유지하는 역할도 하였다. 이 레위지파의 한 사람, 한 사람은 나머지 열두 지파와 일대일 대응이 되는, 즉 다른 지파를 대신하는 것이다. 그래서 레위지파가 다른 지파를 대신하는 역할을 하고, 이 레위지파가 품고 있는 법궤가 다른 지파를 대신한다고 보아도 좋은 것이다.

◈ 그러면 다른 지파가 가지고 있는 것은? - ① 씨(자손), ② 땅

* 이 지파들은 약속에 의해서 씨(자손)와 땅을 공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반해 레위지파는 땅이 없는 반면에 언약궤가 있다. 이 언약궤가 씨와 땅을 약속의 땅에서 거룩하게 유지되도록 대신 속죄하는 원리가 유지되는 것이다.

* 인간은 죄인이다 ! - 구약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신약에서 말하는 것처럼, 기존 인간의 이론에 있어 대 파괴가 일어나는데, '인간은 인간(피조물)이다' 라는 이론이 깨어지는 것이다. 즉,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로마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죄인이라는 것이다. 이 죄인이라는 것도 윤리적 개념이 아닌 것이다.

* 그러면 구약적 의미에서 인간이란? - 언약궤 안에서 존재하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신약에서 적용시켜 보면, 신약에서 죄인이라는 것은 윤리적, 도덕적 개념이 아니라, 새 언약 아래에서 인간을 비추어볼 때, 비로소 죄인임을 등장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을 파악해야, 하나님의 은혜 아래의 의미와, 찬양, 영광, 거룩 등의 모든 개념이 파악이 되는 것이다.

* 그런데 이렇게 언약 안에서 인간을 파악하지 않고, 인간을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으로, 윤리적으로 미흡한 존재로서 죄인이라고 보게 되면, 로마서의 중요한 개념인 하나님과 인간은 원수라고 하는, 원수관계가 성립이 안 되는 것이다.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데, 무슨 원수냐는 것이다.

* 원수라고 하는 것은 전쟁하는 관계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전쟁을 하시는데, 우리는 멀뚱 멀뚱하게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잘한 것은 없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하고, 잘못한 것은 반성을 하고 있는데, 원수라고 하는 것은 너무 심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 그러나 이 원수관계가 성립이 되지를 아니하면, 어떤 개념이 나오느냐 하면, 주로 선교단체에서 말하는 것인데, 99%는 노력을 했는데, 나머지 1% 때문에 안 되었다는 것이다. 즉, 최선을 다했지만, 인간이라서, 부족해서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머지 1%를 예수 믿어서 보충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 이러한 잘못된 인간관계를 가지고 접근을 하니까, 심지어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화 하라고 하니까, 천주교에서 하는 것처럼, '이 집에 들어오는 자는 평화가 있을 지어다' 라고 하는 것이다. 원수 관계라는 것을 가지고 평화를 생각해야 하는데, 어떤 심리적인 평화로 이해를 하는 것이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실존적인 초조, 불안 관계로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극복하는 평화를 생각하는 것이다.

* 그러나 이렇게 되어버리면, 구약에서의 '여호와 전쟁' 개념이 다 무너져 버린다. 언약 안에서의 인간을 생각해야 하는데, 언약을 빼버리니까, 이렇게 되는 것이다. 구약에서 그렇게 언약을 강조하고 있는데, 의도적으로 언약을 빼려고 하는 이유는?

* 그것은 언약에 대해서 놀라우리만큼 무지하기 때문이다. 구약학자들이 논문 제대로 낸 것이 없다는 것이다. 침멀리가 언급을 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이방나라의 정치적 형태, 상거래에서 나오는 것으로 이야기를 하니까, 이 언약은 핵심이 아니고 곁다리로 생각하고 다른 핵심을 찾는 것이다.

* 언약과 하나님 나라 - 그러면 구약의 핵심은? '에덴동산을 하늘나라의 원형으로 보자' 라고 해서, 그만 구약의 핵심이 하나님 나라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 나라는 전쟁 개념이 없다. 하나님 나라는 위에서 누르는, 지배 개념이고, 통치 개념만 있는 것이다. 즉, 우리는 하늘 나라에서 쫓겨났으니, 이제는 예수 믿고 돌아가자는 것이다. 예수가 나와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하지를 못하는 것이다.

* 이렇게 언약을 빼고 하나님을 생각하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밖에 되지를 않는다. 천국에 가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어주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아야 한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싸우시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을 보면서, 그들이 잘못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잘만 하면 그렇게 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자기의 일임을 모르는 것이다.

* 구약의 사사기, 사무엘 상 등, 싸우는 개념을 무시하는 것이다. 사울이 말 안 듣는 것도 넘어간다. 깊이 있게 보는 사람 같으면, 다윗에 와서는 하나님께 항의를 한다.

* 사울이 제사를 드리는데, 사무엘이 일주일만에 온다 해놓고 왜 안 왔냐는 것이다. 그래서 약속을 사무엘이 안 지켜서 제사를 드렸는데 사울의 잘못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설사 사울이 잘못했다고 할지라도 사울은 그것 하나도 용서를 안 해주고, 다윗은 강간죄에 살인죄까지를 범했는데, 왜 용서를 해 주느냐는 것이다. 왜 그렇게 불공평한가 하는 것이다.

* 이것은 여호와 전쟁에 대해서 전혀 감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가다가 다원주의로 빠진다. 하나님은 원래 자비로운데, 예수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기존 목사들은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도,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지를 않는다. 비겁한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만을 주장하는 사람을, 너무 독단적이라고 하면서 공격을 한다. 사실 그것은 자기를 탄로시키는 것이다.  

* 어제 한일전에서, 차범근 감독이 2:1로 이기고 나서, '주께서 크신 은혜를 베푸셨다' 라고 하였다. 차 감독은 일본에게 이긴 것을 큰 은혜로 보았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 집에 불이 났는데, 성경책만 안 탔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학생에게 어느 집사님이 등록금을 주셨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십자가이다. 자, 그러면 과연 이 네 가지를 한 자리에 놓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 교인들은 이것들이 다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려고 하면, 앞의 세 가지와 십자가가 동일한 속성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십자가란 무엇인가? 이러한 것들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의 사건들이 일어나는 곳은 어디인가? 구약과 예수님의 공생애이다.

*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구약의 모든 말씀을 완성하신 것인데, 그러면, 홍해를 가른 사건을 두고 볼 때, 이것은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 것인데, 이러한 홍해 사건의 반복은, 바로 제사이다. 홍해 바다에서 바다가 다시 갈라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닌 것이다. 레위지파가 있는 이유도 바로 이 제사 때문인데, 이 제사는 바로 대속의, 대신 행위인 것이다.

* 다시 반복하지만, 이스라엘이 씨와 땅을 얻었는데, 이것은 주님의 크신 은혜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이 노예였음에도, 이러한 것을 얻었음은 레위지파에게서 찾자는 것이다. 이 레위지파가 한 것이 바로 제사이다.

* 그렇다면, 축구를 해서 이겼는데, 어떻게 이겼는가? 즉, 씨와 땅의 겁데기를 보지 말고, 어떻게 그것을 받았는지를, 레위지파의 존재이유를 안다면, 주께서 베푼 크신 은혜라고 하는 것은, 소유개념이 아니고, 증인된 입장에서, 왜 씨와 땅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레위지파가 왜 있게 되었는가를, 12지파가 증언을 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땅은 자기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소유와 증인 - 축구를 이기게 하신 것이 크신 은혜가 아니라, 축구를 이기든, 지든 상관없이 그렇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작품인 것을 알아야 한다. 축구를 하는 것?내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셨음을 증언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증언하고, 나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십자가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 에스더가 예뻐서 느브갓네살 왕의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다. 그녀의 삼촌 모르드게가 와서 하는 말이, '죽으면 죽으리이다' 라고 하는 것이다. 아름다운데 왜 죽는가? 주님의 은혜를 받았기에, 아름답던, 못생겼던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 지금 교인들이 무엇이든지,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를 받으면, 자기의 소유로 삼으려고 하는 것이다. 자기의 간증거리로 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주의 은혜가 아닌 것이다. 헛되고 헛되며 헛된 것이 이 세상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주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 이스라엘이 땅과 씨를 소유하면 망한다. 그들은 그러한 권리가 없다. 하나님의 이름만 증언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 에스겔서를 보자.

(겔 36:16)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겔 36:17)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그 고토에 거할 때에 그 행위로 그 땅을 더럽혔나니 나 보기에 그 소위가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의 부정함과 같았느니라
(겔 36:18) 그들이 땅 위에 피를 쏟았으며 그 우상들로 더럽혔으므로 내가 분노를 그들의 위에 쏟아
(겔 36:19) 그들을 그 행위대로 심판하여 각국에 흩으며 열방에 헤쳤더니
(겔 36:20) 그들의 이른바 그 열국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인하여 더러워졌나니 곧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이라도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자라 하였음이니라
(겔 36:21)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
(겔 36:22)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 모세 율법은 월경 중의 여인을 부정하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대충 감은 잡지만 왜 부정한지를 모르는 것이다. 지금 이렇게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고 보니까, 단순히 그 여인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오직 여호와의 이름을 증언하는 것이다.

* 그러면 어떻게 증언을 하는가?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 부정적으로 증언하는 것이다. 월경 중의 여인이 부정하다고 하니까, 끝나면 깨끗해지는 것으로 아는 것이다. 구원을 소유 개념으로 보는 것이다.

*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예수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니까, 예수 믿어 구원받는 것을 소유개념으로 본다는 것이다. 나는 구원받았다는 것이다. 구원이 무슨 생명보험인가? 아니라고 하면, 이 차이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 지금 민중들이 교회에 온 이유는? 예수를 믿어서가 아니라,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무엇이든지 좋은 것은 다 소유하고 싶어서 오는 것이다. 천국을 소유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복음도 아니고, 일종의 종교적 행위인 것이다.

(겔 36:23) 열국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은 이름 곧 너희가 그들 중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로 인하여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열국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겔 36:24)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겔 36: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겔 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겔 36: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 하나님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기는 너무나 더러운 놈이라는 것이 입에서 나와야 한다. 이렇게 될 때, 하나님의 이름이 증거되고,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이다.
우리에 새 영을, 새 마음을 주시는 것도,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증언하기 위해서이다.

▷ 책 소개 :  [ 바울의 성령 이해 ],  김정주,  기독교문서선교회  

* 윤리, 도덕이 아니라, 오직 예수라는 것이다. 샌더스를 비판한다. 성령은 우리를 잡아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언하면 끝이라는 것이다. 성령은 성도의 기도를 돕는다고 한다. 비록 구약의 언약에 대해서는 무지하지만, 이 정도라도 반가운 것이다.

* 권성수 [ 히브리서 강해 ]  - 히브리서의 주제는 오직 그리스도인데, 이것을 제법 강조한다. 예수를 믿어서, 이제부터는 열심히 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었다.

* 로마서에는 칼빈의 주장처럼 '이신칭의(以信稱義)' 라는 주장이 없다. 왜냐하면 로마??구원론이 중심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이다. 다른 모든 성경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는 그리스도(주)이시다' 라는 것이 성경 전체의 주제이고, 흐름인 것이다.

* 어떻게 구원을 받을 것인가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민중들이고, 성경의 관심은 오직 그리스도이고, 우리는 구원받을 자격도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 된 자들이다. 물론 최선을 다해서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은 화가 나겠지만 말이다.

◈ 다시 정리해 보면, ① 축구에서 이긴 것, ② 성경책만 안 탔다는 것, ③ 등록금 문제가 지향해야 할 점이 있는데, 그것은 주님이다. 즉, '주님께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라는 것을 증언해야 하는 것이다. 소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조그마한 차이 같지만, 천국과 지옥이다. 내가 아니고 하나님께 중심이 있어야 한다.

* 자기의 소유의 개념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마지못해 자기의 것을 조금 떼어주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 앞에 소유개념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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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회와 신학  97년, 9월호 "무소유 교회론" - 사도 바울의 무소유는 재산 무소유가 아니라, 교회 무소유였다는 것이다. 그 교회를 소유하면 증인이 못되는 것이다. 그러면 성령 받은 사람이 아니고,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되지를 못하고, 신자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소유는 비언약적이라는 것이다.

                      [ 바울의 무소유 교회론 ]

교회의 모델을 고민하면서 참으로 중요한 일은 그것을 성경에서 찾고 있는가 아니면 주위에 널려있는 인위적 교회들의 운영방식에서 출발하려 하는가 이다. 이미 시작한 교회이니 어떻게든 운영해야하고 확장시켜야 하겠다는 정신을 갖고 있다면 이는 참된 교회와는 거리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1. '그리스도 몸' 만이 교회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관은 이런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의 교회는 오직 하나, '그리스도 몸' 뿐이다. 성령 받은 자는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 몸' 에만 관심을 두게 된다. 주위에 산재해 있는 각종 교단들의 연줄에서 뻗어 나온 우후죽순 같은 교회들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마치 짜장면과 만나의  차이와 같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 양식을 원했을 때, 그들은 나름대로 즐겨 찾던 음식들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하나님이 주신 것은 그들이 애굽에서 맛보아왔던 음식물이 아니라, 생전 처음 만나 보던 양식 '만나' 였다. 만나의 뜻은 '이것이 무엇이냐' 이다. 만나는 인간의 모든 경험을 초월한 음식이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그리스도 몸도 마찬가지이다. 인간들의 평소 아이디어에서 나올 수 있는 교회들은, 그 운영이나 유지책이나 발전과 번영을 이룩하는데 있어 인간의 노력과 열심과 손길이 요구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은 만나와 같이 인간의 노고와 전혀 상관없이 나타나는 것이다. '어, 이게 뭐지?어떻게 해서 이런 자들이 생겨났지?' 라고 의아해할 수밖에 없는 현상을 보인다. 흔히 말하는 교회에서는, '자, 여러분, 이제부터 이러 이러한 목표 아래 이러이러한 프로젝트를 만들었습니다. 자, 이 계획안에 전적으로 따라주시면 참으로 이상적인 교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라는 성토와 독려가 필수적으로 요구되지 만, 그리스도 몸으로서의 교회는 '이상도 하다. 아무런 노림수나 대가나 자기 이익이나 자기 명분도 없이 자기 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만 사랑하다니 정말 이상하여라' 라는 식으로 세상에 비쳐 나오게 되어있다.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 몸으로서의 교회는 오직 하늘에 계신 주님의 작용으로만 생겨나기에 그 자체로서 완성이요 의의 대상이다(고후 5:21). 특별히 추가적으로 인간이 더 손댈 것이 없다. 미흡함이 나 미완성 부분이 전혀 남아있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부흥, 성장, 발전시킨다든지, 혹시 소멸되면 어떡하나 하면서 보조장치를 설치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손길로서 생성되었기에 만약 인간의 노력이 보완적으로 요구된다면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 인간의 몸으로 전환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즉 머리가 둘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주님은 그런 교회를 전혀 고려한 적이 없으시다. 그리스도의 몸에 대해서 인간들이 보여줄 태도는, 그리스도께서 홀로 하신 일을 보고 경탄하면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뿐이다. 그 동안 자신들이 주특기처럼 간직하고 있는 종교적 테크닉과 사람들 '자극주기 수법'을 일소에 파기할 마음의 태도만 갖추면 된다. 그리스도의 몸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인간들의 '교회 만들기 수법'을 완벽하게 부정한다. 우리들만의 참한 교회를 갖고 싶어하는 인간의 종교적 심성을 고발한다.
인간은 자기만의 영역과 세계를 따로 구축함으로서 자기 왕국을 원한다. 그 속에서 자기 영광을 계속유지 보존하는데서 존?의미를 캐내고자 한다. 내 교회(교단) 역사 자랑하기가 바로 이런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바로 이런 본실들을 구현해주는 장이 되고 말았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런 인간들의 종교성을 거부한 증거로서 터진 사건이다. 왜 자기 부인을 못하고 자기가 만들고 세운 것에만 치중하느냐에 대한 질타인 것이다.

2. 예수님의 주되심과 사도의 증언

예수님의 주되심과 사도의 증언사도는 재산의 무소유가 아니라, 교회의 무소유를 통해 십자가 정신의 영속성을 증언하는 자이다. 왜냐하면 교회에 관해 지신의 십자가 안에서 무능력자임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을 만드는 능력은 오직 하늘에 계신 예수님에게만 있다. 왜냐하면 그분의 십자가 사건이 모든 율법을 완성한 의였고, 그 의의 열매로서 교회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원의 능력은 어떤 기적이나 지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있다(고전 1:18∼22). 사도의 임무는 종말 때에 주님께서 실시하시는 이 십자가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단지 증언할 따름이다.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엡 1:19, 2:1)  사도는 그냥 증언자이다. 예를 들면, 사도행전 3장에서 성전 미문에 있던 앉은뱅이를 걷게 한 것은 결코 베드로나 요한의 능력이 아니었다. 이 점을 사도는 단호하게 언급한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여기느냐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행 3:12)  그리고 그 앉은뱅이의 믿음도 실은 주님이 주신 믿음이었다. 즉 '예수로 난 믿음'이었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행 3:16)  
이로써 예수님은 계속적으로 주의 자리에 계신 주님임이 증언되는 것이다. 이러한 주 사상은 바울서신에서도 한결 같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8)
'주' 란 구약에서의 '여호와 자리'이다. 구약에서의 여호와란 모든 것을 자신의 약속대로 차질 없이 꾸려나가시는 분이시다. 이러한 주의 기능을 수행하는데 있어 인간들의 숱한 불신앙이 늘 병행해서 들추어졌다. 대단히 종교적이라고 여겼지만 하나님은 전혀 그것을 신앙으로 간주하지 않으셨다. 따라서 '주의 일'은 주님 홀로 수행하신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죄인들 속에 동행하시면서 인간들의 불신앙으로 인해 상처받고 고통받은 분으로 선지자를 통해서 외부로 나타내셨다.  
결국에는 이것이 십자가 사건에서 절정에 이른다. 사도 바울이 십자가를 거론하고 또한 그리스도의 몸을 거론할 때에는 바로 이러한 인간들의 죄를 배경으로 해서 설명하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도에게 주어진 의는 오직 주되시는 예수님의 공로뿐임을 온 우주에 밝히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죄인'과 더불어 일하시면서 죄인을 통해서 드러나는 죄악 됨 속에서 의로움의 능력을 드러내신 것이다. 십자가의 위대한 능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죄 안에서도 죽지 않고 활동하시는 의로운 주님의 희생 능력이다. 그런데 이러한 증언자의 삶 속에서 십자가는 계속 살아 역사하시는 것이다.

3. 교회는 십자가의 정신으로 사는 곳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인간들의 거짓된 성경해석의 결과였다. 인간의 노력과 윤리와 힘을 실으면 하나님의 말씀도 성취될 수 있고 의를 이를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인간 긍정'에 기초한 종교 행위를 통해 하늘과 땅의 만남을 가능케 하려는 인간들의 부단한 집념에는 이미 선악과를 통해 얻어낸 지식을 죄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선을 유발할 수 있는 긍정적 계기로 삼는 왜곡되고 도치된 진리관이 들어있다.  
이러한 진리 관으로 인해 그들은 예수님과 계속적으로 마찰을 일으켰다. 결국 예수님은 그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들은 주님께 모든 것을 전적으로 맡기기보다는 차라리 가룟유다처럼 계속해서 자기 자신에게 반성하는 인간이 되어 끝까지 자기 의를 남기려는 심보를 드러낸다. 이와 같은 인간들의 시도는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뒤, 사도들에게 똑같이 적용되어 주를 증언하는 사도에게 십자가생애를 갈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사도를 공격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거짓 사도들이었다. 십자가정신 속에 들어있는 것은 참된 사도의 눈에만 드러나게 되어 있다. 이제부터 사도가 당하는 고난은 곧 전에 예수님이 지상에서 당한 고난과 같은 연장선 위에 있는데, 이는 같은 십자가의 도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사도가 전하는 복음을 헛된 것으로 돌리는 모든 자는 곧 십자가의 원수요(빌 3:18), 주님이 행하신 일을 무로 돌리는 적그리스도들이다(갈4:10∼11; 골 2:14∼17). 참된 사도와 거짓 사도와의 기준은 오직 십자가의 성격을 드러내는 것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 정신을 드러내지 아니하면 주님이 친히 세우신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기 때문이다.

4. 사도 바울의 교회 무소유 정신

사도바울에 있어 교회란, 오직 한 그리스도 몸에서 나온 성령의 자생력이 낳은 결과일 뿐이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고전 12:13) 정말 성령을 마신 자라면 오직 한 몸의 머리되시는 주만 생각하게 된다. 사도바울의 생각에 모든 성도는 누구의 소유가 될 수 없고, 오직 한 주님의 지체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도의 교회론은 거짓 사도들에 의해서 교인들로부터 도리어 오해와 비난을 받는 빌미로 작용하게 되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거짓 사도들이 교회를 사유화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의 비난도 맹렬하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 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 ‥‥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고후 11: 4, 7, 13-15)
왜 사단의 일군들이 광명의 천사로, 의의 일군으로 가장할까? 그 내막은 사도행전 20장 28-31절에 잘 나타나 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줄을 내가 아노니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이 본문을 보면, 첫째로 교회란 오직 히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것이며, 감독자란 그 '하나님 피'에 흠집이 나는 일이 발생되지 않도록 감시하고 감독하는 일을 하는 자를 말하고, 셋째로 흉악한 자란 다름 아닌 하나님의 피로 사신 자들을 마치 자기에 의해서 생겨난 사람들인 것처럼 여겨서 자기 사람으로 전환시키려 하는 자를 지칭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주' 되시고 이미 주의 자리에서 활동하시는 이 시점에, 인간들의 종교적 활동이 교회를 더럽힌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지상에 남긴 행위에 대해서 그 결실을 반드시 자기 것으로 삼아 버리는 데서 자기 존재를 인식한다. 즉 "내가 기도하고, 내가 전도하고, 내가 목돈 댔고, 내가 애써서 사방에서 모아 놓은 교인들이기에, 내가 이 교회에서 남릿?주도권을 쥐어야 된다." 라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의 여타조직체 내에서는 통할지 모르지만 '하니님의 피'로 말미암아 세워진 교회 안에서도 통하리라고 여기는가? 만약 이런 주장이 통한다면 그 조직체는 하나님의 피로 세운 교회가 명백히 아니다.
반대로 이런 주장을 배척한다면, 그 교회는 성령에 의해서 세워진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 내에서의 이러한 갈등은 오늘의 일만이 아니다. 이러한 흉악한 이리들의 행세는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늘 재현했었다. 그때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국가 존립 문제를 두고 어떻게 하면 이 국가를 유지시키고 번영 시키겠느냐에 대한 방법론 때문에 선지자들에게 많은 괴로움을 주었다.
"(아합왕이) 엘리야를 볼 때에 저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 저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좇았음이라" (왕상 18:17-18)  엘리야가 말한 그 말씀이 바로 신약에 와서는 십자가사건 안으로 완성이 된 것이다. 오늘날에는 교회라는 단체를 가운데 두고서 주님의 방식과 인간적인 방식이 서로 대결하는 것이다.
이른바 영적인 지도자라는 미명 아래 양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서 그들로부터 각종 이익과 권위를 배양하여 수확하려는 수법들이 사도바울의 참된 사도성 앞에서 그 죄악성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것이다. 이러한 흉악한 이리 앞에서 사도 바울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서는가?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할지니라" (행 20:33∼35)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사도 바울에게 있어 예수님은 엄연히 살아 계신 분이며, 쉴새 없이 아직도 주의 일을 하고 계신 분이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과거 행적에서 찾아보라는 취지의 말씀이 아니라, 바로 사도자신의 사도성과 삶 속에서 그 주되심이 십자가 생애를 반복시키고 있음을 주목하라는 말씀이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 1:24)
따라서 사도의 무소유성은, 단지 불교계의 법정 승려가 외치고 있는 '자기 비움' 을 통한 탐욕으로부터의 해방 철학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피'로 완전해진 교회(그리스도 몸)의 존재성을 통해 예수님의 주되심의 위대함을 확인하고 찬양하고 증언하는 데 관심 두라는 것이다. 이런 신앙으로 해서 사도 바울은 그 무엇을 희생해도 즐겁고 만족스러운 생애를 보낼 수 있었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에 사도 바울이 가장한 사단의 일꾼이라고 욕했던 그들은 도대체 어떤 자들인가? 그들이 소유하고자 했던 것이 단순히 돈인가? 아니다. 더 근원적으로 인간을 소유하고 교회를 자기 것으로 삼고 지배하려 했던 자들이다.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고후 11:20)  
사단은 얼마든지 무소유의 모습으로 등장해서 자기를 타인보다 월등하게 위대하고 신적인 존재로 간주하고 살아갈 수완과 재질과 머리를 지닌 자들이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자기 영광을 고이 간직하려는 자들이 예수님 당시에 공동체 활동을 하면서 존재했었다.
또 역사적으로 수많은 방랑 걸식 전도단들이 예수님의 제자를 표방하며 생겨나면서 무소유적인 자기 포기로 마치 구원이 되는 것처럼 진리를 왜곡되게 전했던 교만에 빠진 자들도 많이 있었다. 복음 전도자들이 아무 녹을 받지 말라는 것이 사도 바울의 뜻이 아니다. 일하는 소에게 망을 씌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고전 9:9) .  
그러나 음식물이 성도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주되심이 성도를 살린다는 사실이 복음전도자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복음 내용이어야 하는 것이다.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 저것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고전 6:13∼14)

5. 무소유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인간은 영웅을 찾는다. 그리고 그 영웅을 신비화해서 종교단체 안까지 끌어 당겨 놓는다 가짜 교회는 이래서 생겨나는 것이다. 주님이 안 계신다면 이러한 종교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에 대해, 그들의 종교적 열심과 능력에 박수를 보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주님은 지금도 살아 계신다. 그렇다면 이 땅에는 영웅이 있을 수 없다. 교회 공로자라는 말도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교회가 특정 개인의 이름을 거론하고 그 자의 교회로 사유화 할 하등의 명분이 없다.  예수님이 지금도 하늘에서 주로서 일하고 계시는 한, 십자가 안에서 이미 죽은 인간에게 어떤 가치나 의미를 줄 신학적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중들이 비록 위대한 스타를 원하겠지만 참된 성도가 증거할 것은, '오직 하나뿐인 그리스도 몸을 위하여!' 라는 고백뿐이다.  재산을 버리는 일보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더 어렵고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능력이 이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신다. 이것이 십자가 이후 성도의 모응甄? 진정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은 무소유자는 이런 그리스도 몸의 지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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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존의 성전에는 언약궤가 있었는데, 새 성전에는 언약궤가 없다. 이 말은 성전은 이제 깨어졌다는 것이다. 제사를 드리는 것은 성전 건물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니다. 언약궤를 보고 하는 것이다. 언약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신 27:11) 모세가 당일에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신 27:12)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산에 서고
(신 27:13)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산에 서고
(신 27:14) 레위 사람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신 27:15)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아멘 할지니라
(신 27:16)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 이 말씀은 언약궤에 있는 것인데, 이것을 그대로 성전에 박아놓는 것은 이스라엘이 살자가 아니라, 죽을 놈은 죽으라는 것이다. 즉, 교회에서 나갈 사람은 나가라는 것이다. 이것이 증언이다. 교회의 부흥, 성장이 아니다. 말씀이 이 완성되었는데, 무슨 부흥, 성장이 있느냐는 것이다. 부흥, 성장이라는 것은 미흡함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 예를 들어, 삼촌과 조카사이에 성장이 있는가? 관계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존재하지를 않는다. 날 때부터 그런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 신명기에 있는 이 말씀들은 십계명을 패러디한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모든 율법은 사랑을 보여준다.(패러디 - 옛날에 있었던 것을 재해석해서 다시 한번 써먹는 것)  

* 십일조를 강조해 버리면 어떠한 결과가 나오는고 하니, 자기는 십일조를 했기 때문에 교회의 헌금에 대해서는 자유해 지는 것이다. 교회에 어려움이 있어 헌금을 하자고 해도, 자기는 십일조를 했기 때문에 아무런 느낌이 없는 것이다. 십일조라는 법 뒤에 자기를 숨겨 버린다. 율법의 사랑의 정신이 없는 것이다. 사랑의 마음으로 십일조를 했다면, 교회의 형편이 어려우면 당연히 헌금을 하는 것이다.

*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율법 뒤에 자기를 숨기고 마음껏 살았던 것이다. 교만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천국은 사랑의 나라이지 법의 나라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서 법을 보여 주었는데, 인간들은 이것을 반대로 이용하고 말았다.  

* 추석 때 묵묵히 일하는 시골의 큰며느리와 뺀질 뺀질한 둘째 며느리가 있는데, 시어머니가 밥을 하라고 하자, 이 둘째는 밥만 하고 자기 일을 다 했다고 여긴다. 시키는 것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그러면 큰며느리는 무엇인가? 아마 이 둘째 며느리는 지금 막 도착한 셋째에게는 큰 소리를 칠지는 몰라도, 첫째 앞에서는 할말이 없을 것이다.

* 그러면 목사가 해야 할 일은?  율법인가, 사랑인가?  십자가를, 사랑을 전해야 하는 것이다. 율법을 전해서, 그것을 지킨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사랑인 痼甄?

* 그렇다면, 성전에 언약궤가 없어진, 즉 성전이 깨어진 상황에서 선지자가 해야 할 말은? '야, 이제는 자유다?' 가 아니라, '이제는 죽었구나!' 이다.

◈ 언약궤가, 성전이 사라졌다는 것은, 열두 지파에서 레위지파가 사라졌다는 것인데, 이것은 대속의 원리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에스겔의 말대로, 다윗언약이 깨어졌다는 것이다. 다윗 같은 왕이 없다는 것이다. 즉, 약속의 땅이 있어야 이스라엘인데, 이 땅이 없으니, 이스라엘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 깨어진 예루살렘에 온 것은 누구인가? 에스겔에서는 인자인데, 이는 에스겔, 한 사람밖에 없는 것이다. 성신이 충만해서 인자가 온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 인자에서 새로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이다.

◈ 옛 언약과 새 언약 - 기독교는 이 인자에서 새로 시작하는 것이다. 아무 것도 없으니 말이다. 그러면 새 언약은 무엇인가? 피와 찢어진 살이다. 이것은 언약이 깨어졌음을 보여준다. 옛 아담의 몸이 깨어졌다는 것은, 이제 그 몸이 없어 졌으니, 옛 언약은 사라진 것이다. 구약은 아담과 계약을 맺은 것이데, 이 아담이 없어졌으니, 이 언약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 교회의 사명 - 그래서 새 언약은 언약이 없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지키기 전에 지킬 자격조차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 언약은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다. 오직 인자의 공로에 의해서 전리품으로 우리에게 공짜로 제공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냥 얻었다' 라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 새로운 이스라엘이고, 오늘날 교회인 것이다.

* 그런데 이렇게 연결되는 것이 단순한 것이 아니고, 차범근을 시작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차근차근 하나씩 풀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에 박사가 되어야 한다. 정말로 열심히 말씀을 보아야 한다. 그것이 목사의 일이다.

* 현상과 십자가의 간격 메우기 -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과 십자가의 사랑을 메워야 하는데, 신학을 하지 아니하면 메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간증거리로 메우는데, 그것은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간증 같은 것은 아무리 말로는 하나님의 은혜, 은혜라고 하지만, 결국은 인간 찬양에 불과하다.

* 그래서 신학이 제대로 정립이 되지 아니하면, 현상에서 십자가로 가는 것이 아니고, 현상에서 현상으로 도로 돌아가는 것이고, 이는 말씀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지는 것이다.

* 지금 우리가 모여서 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신학 작업이다. 남들이 실패하는 것을 보면서, '저렇게 하면 안 되는구나' 라고 알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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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선택, 157 페이지

⊙ 성전은 주의 이름에 의해 전쟁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책)

* 주의 이름 - 주의 이름이 나오면 먼저 다윗을 생각하면 된다. 다윗은 골리앗과 전투에서,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나와도, 자기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간다' 라고 한 것이다. 그러면 칼과 창으로 나온 사람은 또 누구인가? 바로 사울왕이다. 즉, 다윗과 골리앗 싸움은, 칼과 창과 하나님의 이름 싸움으로 계속 되는 것이다. 그러니 창으로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사울왕과 그 나라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울과 하나님이 파송 한 다윗과는 끝까지, 투쟁하는 것이다.

◈ 주의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전쟁하는 이름인데, 한 쪽은 칼과 창이고, 다른 한 쪽은 여호와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출 15:3)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 여호와는 용사시니, 그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또한,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은 방패요, 상급인데, 이 방패라는 것은 전쟁에서 사용하는 것이다.  시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창 15:1)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 이스라엘이 처음 국가로 등장할 때부터 원래 성소를 구성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다. 이 용사로 인해 얻어진 자들이 이스라엘이다. (책)  

(출 15:17)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 주께서 라는 말이 나오면, 먼저 용사라는 개념을 떠 올려야 한다. 그래야 요단강이, 아이성이, 여호수아, 사사기가 이해가  되는 것이다.

* 그러면 구약에서 왜 이렇게 전쟁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가?  그것은 주(主)가 용사이기 때문이다. 이 구약【?전쟁 이야기를 안 하면 어떻게 되는가? 엘리야 불 병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갈 때, 뒤따라온 엘리사가 엘리야를 보고 하는 말이, '이스라엘의 병거여!' 라고 했는데, 병거라고 하는 것은 전쟁에 사용하는 도구이다. 즉, 엘리야를 보고 전쟁하는 자라는 것이다. 그러면 엘리야는 어떤 방식으로 전쟁을 했는가? 고아와 과부에게 참기름을 부어 주었다. 그것이 전쟁이라는 것이다.

* 이 전쟁의 방식이, 저 쪽은 자꾸만 인간의 힘으로 밀어 부치는 반면에, 이 쪽은 하나님의 약속에 모든 기대를 걸고 하는 것이다.

* 그러면 지금 우리가 전쟁하는 모습은?  '나는 망해도 주님은 오신다' 라는 방식이다. 그것이 약속이기 때문이다. 한 평생, 50년만 견디면 된다. 주님은 반드시 오시기 때문이다. 약속을 기다리는 것이다.

* 성전은 분명히 있어야 되는데, 그런데 그 새 성전에는 언약궤가 없다. 왜냐하면 주님이 성령으로 세우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솔로몬의 성전에는 언약궤가 있지만, 에스겔 성전에는 언약궤가 없는 것이다.

* 신학의 임무 -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왜 이러한 형상들이 발생하는 지를 차근차근 파고 들어가는 작업인 것이다. 왜 언약궤가 없는지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말씀이 풍성해 지는 것이다.

* 이제는 인간이 만드는 성전은 없는 것이다. 오직 주님이 죽어서 자기의 몸으로 성전을 만드시는 것이다. 그것만이 성전인 것이다. 그것을 '그리스도의 몸' 이라고 한다. 여기서 우리가 할 것은 없다. 오직 받아서 챙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워져 가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이 기록된 돌판이 담긴 언약궤가 없는 것이다.

◈ 구약의 제사, 안식일, 십일조 등은 분명히 모형이고, 그림자인 것이다. 알맹이는 따로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골로새서, 히브리서 등이 다가오는 것이다.

* 이제 눈에 보이는 성전은 없고, 우리가 성전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령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어떻게 아는가? 예수님을 자랑하면 확실하다.

* 성령을 마시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주' 라고 하지 않는 것이다.  오직 성령을 받은 자에게만 해당된다.  여기서 주는 용사임을 아는 것이다. 주께서 홀로 전쟁하셔서 우리는 전리품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고백하는 자가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몸이 성전인 것이다.

◈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왜 껍데기만 남는가?' 를 추적하는 것이다.

* 그림자로 남아 있는 것이 성전이었는데, 그런데 사실은 이 성전은 원래부터, 구약부터 이러한 모습이었다. 왜냐하면 이 성전에 주님이 안 계셨기 때문이다(누락사상?). 중요한 것은 성전이 아니라, 그 속에 들어있는 언약궤인데, 언약이 살아있으면 성전이 된다는 것이다.

* 그래서 요한 계시록을 보면, 하늘나라 성전의 언약궤에서 진노의 연기가 피어올라서,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의 과정에 불과한 것이고, 요한 계시록 22장을 보면, 아예 성전이 없는 것이다.  

(계 21:22)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 성전이 있기는 있는데, 하나님과 어린양이 성전인 것이다.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백성들과 함께 모여 사는 동네이다. 이것이 에스겔에 나오는 '여호와 삼마' 이다.

* 성전 없다! - 그래서 성전이 있으면서도, 마지막 요한 계시록에서는 성전이 없음으로 끝나는 것이다. 마지막의 그 성전 없음을 지금 교회에서 '성전이 없다' 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목사의 모습이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우리 몸이 성전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 망한 이스라엘과 한국교회 !!

* 이렇게 분명한데, 왜 성전, 성전 하는가? 그것은 인간의 종교성으로, 어떤 특별한 장소에 가면 은혜를 더 받을 수 있다는 것 때문이다. 어떤 특별한 장소, 자리에 가면, 종교적 감흥이 더 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한 속임수이다. 자기가 자기에게 속는 것이다. 이 속임수가 초신자에게는 강렬하고, 오래된 장로들에게는 별로 없는 것이다. 자기들이 이 속임수를 이용은 하지만 말이다. 자기들에게는 정작 농담이 되는 것이다. 초신자들은 발을 꼬고 듣지를 않지만, 장로들은 꼬는 정도가 아니다. 농담이라는 것이다.

* 신학도 없으면서 '교회는 성전이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은, 이는 너무 진력하고, 면려했기 때문에, 이제는 모든 것이 신선미가 없고, 농담이나, 오락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충격적인 것을 원한다. 자학까지도 해서 말이다. '병자가 나았다', '40일 금식기도를 했다' 등으로 말이다. 대리만족으로 그러한 목사를 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돕는 부흥회가 개최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오늘날 놀이마당인 교회의 모습이고, 이상의 이야기가 바로 구약에 나오는 망한 이스라엘의 특징인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 159 페이지

⊙ 주는 자신이 던진 약속을 스스로 성취하여 회수하는 분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약속에 대해 수행 능력이 없거나 아예 부담을 준 약속과 무관한 신은 참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취지로 지상에서는 찬 신의 명칭을 두고 전투가 시작된다. (책)

(롬 11: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롬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롬 11: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롬 11: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 여기서 모든 사람이란, 어떤 민족과 나라와 계층도 상관없다는 의미이지,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예정 가운데 이루어짐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지금 열 골 차이로 지고 있어도 약속에 이긴다고 하면 이기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은 어떤 위기 상황을 몰고 옴을 알아야 한다. '나는 끝났구나!' 라는 상황이 닥치는 것이다.

(신 7: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신 7: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신 7:8)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 하나님의 선택, 159, 160 페이지

⊙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보다 수적으로 월등하거나 재주가 많거나 힘이 강해서 구원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조상에게 맹세한 바가 있어 일방적인 사랑으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책)

* 왜 구태여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  그것은 인간은 날마다 자기가 행한 일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를 믿는 것이다. 조상에게 맹세한 대로 한다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는 창세 전에 예비한 대로 하신다는 의미이다. 알파요, 오메가 인 것이다.

* 사다리가 어디에서 내려왔는가? 야곱이 준비한 것이 아니다.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거기에 천사가 오르락, 내르락 하는 것이다. 야곱은 사다리와 관계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한 바를 다 이루시는 것이다. 야곱에게 허락된 것이 다 이루기까지 떠나지 않겠다는 것이다.

* 사울과 다윗의 관계에 있어서, 사울은 나쁜 몸이라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러나 다윗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만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셨다는 것이 그들을 그렇게 차이가 나도록 만든 것이다. 그들과 동행하는 분이 중요한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 160 페이지

⊙ 숫자가 다른 민족보다 제일 적다는 표현 자체가 선택에 어떤 조건이 가미되지 안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택이란 인간들의 모든 선입관을 철저히 부수어 버린다. (책)

* 하나님의 선택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생활을 하면서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 그러한 방법이 아니라, '내가 내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사 43:1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사 43:11)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사 43:12) 내가 고하였으며 구원하였으며 보였고 너희 중에 다른 신이 없었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 이렇게 증인되는 과정을 구원이라 하기에, 구원은 소유 개념이 아니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다. 전도하자는 것은 전도가 아니다. 하나님을, 예수님을 증거해야 전도가 되는 것이다. 교회에 나오라는 것은 전도가 아니다. 전도가 전도를 방해하는 것이다. 전도라는 것은 되고, 안되고 하는 것이다. 주님이 전도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자기 교회에 사람이 안 온다고 전도가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 결국 선택이란, 개인의 구원 문제에 관계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이름의 자기 계시와 연관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선택했다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이 핵심이 아니라, 이스라엘 안에 계시는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다. (책)

(옵 1:10)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을 인하여 수욕을 입고 영원히 멸절되리라
(옵 1:11) 네가 멀리 섰던 날 곧 이방인이 그의 재물을 늑탈하며 외국인이 그의 성문에 들어가서 예루살렘을 얻기 위하여 제비뽑던 날에 너도 그들 중 한 사람 같았었느니라
(옵 1:12) 네가 형제의 날 곧 그 재앙의 날에 방관할 것이 아니며 그 고난의 날에 네가 입을 크게 벌릴 것이 아니라
(옵 1:13) 내 백성이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성문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고난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재물에 손을 대지 않을 것이며
(옵 1:14) 사거리에 서서 그 도망하는 자를 막지 않을 것이며 고난의 날에 그 남은 자를 대적에게 붙이지 않을 것이니라
(옵 1:15) 여호와의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왔나니 너의 행한대로 너도 받을것인즉 너의 행한 것이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옵 1:16) 너희가 내 성산에서 마신 것 같이 만국인이 항상 마시리니 곧 마시고 삼켜서 본래 없던 것 같이 되리라

* 택한 자를 무시하면 언약대로 저주가 돌아간다는 것을 오바댜가 보여준다. 이스라엘 주변의 이방나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증언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구약 때부터, 이미 이방인들은 나름대로 존재의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 그것이 그대로 신약에 와서, 한 이방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의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하였다. 비록 개 같지만, 증언자라는 것이다.

(마 15: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마 15:26)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마 15:27)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마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 그러면 우리 대한민국 사람은?  언약 밖의 이방 민족, 즉 개 같은 것이다. 이스라엘이라는 남의 나라의 메시야가 우리의 메시야가 됨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증언하기를, "I am a dog" 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개 같은 내 인생"을 고백하는 것이 믿는 자의 모습이다.

* 자살이 왜 나쁜가? 자기가 개 인줄 모르고, 왕자 인줄 착각하는 것이다. 살인도 같은 것이다. 자살은 자기를 죽이는 것이고, 살인은 남을 죽임으로 자기를 파멸시키는 것이다.

* 욕심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고, 자기가 살아야 되겠다는, 신이라고 하는 데서 모든 범죄가 시작되는 것이다. 십계명의 제 1계명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다. 나머지는 계속 반복이다.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죽이고) 따르라고 하신다.  

(호 2:23) 내가 나를 위하여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긍휼을 베푼 것이다. 인간 구원의 차원이 아니다. 앞서 말한, 자기 약속을 회수하는 분이라는 것이다. 낚시처럼, 미끼를 끼워서 던지고 당기는 것이다.

(겔 11:16) 그런즉 너는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고 열방에 흩었으나 그들이 이른 열방에서 내가 잠간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

* 성소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느냐, 안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면 이유 없이 성소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이 계시는 성소인데, 무슨 걱정이 필요한가? 혼자가 아니기에 외롭지 않는 것이다. 같이 주님이 계심을 날마다 증거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 기도 - 나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알게 하시고, 날마다 주님을 증거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