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뒤에서 본 한국교회] 살전(추가), 히브리서 2 본문
05칠곡강의 [뒤에서 본 한국교회] 49 - 살전(추가), 히브리서2
05,12,24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니들이 '죽음'을 알어 ??
오늘은 히브리서를 하기 전에 먼저 지난번에 공부한 데살로니가전서를 다시 살펴보겠는데, 일단 4장 13절과 14절을 한번 보자.
(살전 4: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살전 4: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
여기 13절에서 사도바울은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라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뜻인가? 자는 자를, 즉 죽은 자가 어떻게 되는지, 거기에 대해서 알아야한다는 말인가? 아니면 몰라도 된다는 말인가? 알지 못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죽음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성경은 살아있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이미 죽은 자도 아울러서 동일하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우리가 평소에 상상치도 못한 것인데,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여기에 이렇게 사람이 놓여 있는데, 이렇게 태어나서 살다가 그만 죽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면 '좍' 하고 뻗어버려야 하는데, 이제는 그야말로 완전히 가버렸다는 말이다.
◈ 이 세상의 학문은 살아있음을 더욱더 !!
그런데 이 세상에서의 학문은 대부분이 어떠한고 하니, 사람이 살아있을 경우에만 해당되고, 죽음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요? 왜 죽음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는 것일까요? 몰라서 그런가요? 그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학문은 살아있음을 더욱더 살게 하기 위한, 즉 철저하게 살아있는 자를 위한 것이란 말이다.
◈ 죠지 캠벨 - 인간은 생의 체험 때문에 산다 !!
'죠지 캠벨' 이는 아주 유명한 신화학자가 이런 말을 했는데, "인간이 자기 인생의 의미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체험 때문에 살아간다" 라고 말이다. 즉 사람이 산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그렇게 살아있다고 하는 체험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지, 인생의 의미를 논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그에 의하면 인생의 의미를 논하고 이야기하는 것은,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들이 하는 짓이라는 것이다. 또한 개인적으로 실연을 당한다든지, 아니면 가정의 상처가 있을 때는 그렇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잠시 잠간의 문제이고, 한잔의 술과 더불어서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 혹은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 라는, 그런 씰잘데기(?) 없는 소리는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냥 살아있으니 사는 것이지 말이다.
이 '죠지 캠벨'은 미국사람으로 20세기 최고의 신화학자라고 할 수 있는데, 아무튼 "인간은 생의 체험 때문에 산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살아있다고 하는 체험 때문에 말이다. 즉 "바로 거기에 '내'가 살아있음에" 라는, 바로 그 이유 말고 다른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것 말고는 인간이 사는 목적도 이유도 없다는 말이다.
◈ 그런데 죽음을 이야기해버리면?
그렇게 인간은 살기 위해서 살아가는데, 그런데 막상 죽음을 이야기하면 어떻게 되는가? 즉 살아야 하는데 죽어버리니, 그렇게 되면 히바리가(?) 없어져 버리니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학문은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방향 자체가 그렇다는 말이다.
하지만 조금 전에 우리가 살펴본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그렇게 죽은 자에 대해서 모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아이 나는 몰라. 그런 것은 무서버. 알고 싶지를 않아" 라고 하면 된다는 말이다. 즉 죽은 자에 대해서도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기 장래에 곧 일어날 일이니 말이다.
◈ 살아있음과 죽어있음, 그 자체를 동일한 원칙으로 !!
그렇다면 이렇게 살아있는 문제와 죽은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살아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래도 좀 알았다고 한다면, 사실 그것도 잘 모르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안다고 치면, "그렇다면 이제 죽은 자에 대해서 좀 이야기해주소"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음과 죽어있음, 바로 그 자체의 차이를 없애버리라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양쪽이 다 동일한 원칙이 적용되는데, 즉 죽었다고 해서 어디로 도망갈 입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그 동일한 원칙에 의해서 마지막 심판 때 모두 불러 세우는 것인데, 그것을 15절에서는 '주 강림하실 때' 라고 한다는 것이다.
(살전 4: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이것이 참으로 어려운 말인데, 여기서 '주(主)' 라는 개념은 여호와를 의미하는데, 즉 여호와께서 강림하시는데, 그때는 그냥 강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먼저 던져놓고, 그 약속을 쫓아가면서 실현시키는 방향으로만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 하나님은 자기 약속을 성취하고 이루시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 하나님은 자기 약속을 성취하는데 전능하신 분 !!
따라서 여기서 예수님이 강림하신다는 것은,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던지신 그 약속을 쫓아서, 즉 그분의 모든 맹세와 약속을 성취하는 입장에서 실시하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실시하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죽어도 다시 영광된 몸으로 살아난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것은 죽은 자 본인이 요구해서 그런 것이 아닌데, 즉 "저는 부활되고 싶어요. 제발 천국에 보내주세요" 라고 말이다. 여기 '주' 라는 분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에게서 나온 맹세는 누가 뭐라고 해도 지켜내는 절차를 가지고 일을 하시는 분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죽은 자를 다시 일으키는 것은, 그 사람이 요구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이 주님이 하시는 일에 포함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아주머니가 여기에 청소를 하려고 왔는데, 그런데 그것을 두고서 제가 "아주머니, 여기도 해주시고, 저기도 좀 깨끗하게 해주세요" 라고 할 입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그 아주머니는 온 학원을 깨끗하게 청소하라고 하는 원장님의 명령을 받고 왔기 때문에, 즉 자기가 받은 임무대로 다 알아서 그대로 일을 처리해버린다는 것이다.
◈ 구원도, 주님이 일을 하시는 과정에서 !!
이와 같이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도, 주께서 자기 일을 묵묵히 하는 순종하면서 진행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즉 그렇게 주님이 일을 계속해서 진행해나가면, 그러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영광스럽게 부활되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자기가 구원을 원하고 부활을 소망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일을 하는 과정에서 말이다.
방금 제가 동일한 원칙이라고 했는데, 그러니 죽은 자에게도 그렇게 해야 하는데, 물론 "죽은 놈 불알 만지기" 라는 말도 있기는 한데, 아무튼 죽은 놈이 달려달라고 하면, 그건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주님이 거기에 자기의 할 일을 퍼부어 버리면, 죽은 자가 벌떡 일어나서 천국에 간다는 것이다.
◈ 오직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에 의해서 !!
바로 그러한 동일한 원칙이라고 한다면, 여기 이렇게 살아있는 인간에게 있어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무엇이고, 인간의 욕구가 무엇이며, 그러한 것을 제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어떻게 되는가? 그 사람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것은 주님인데, 주님은 동일한 원칙으로 자기 맹세를 여기에다 그만 실행시켜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사람은 물론 자기가 원하는 것은 많이 있겠지만, 그러나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잠언서에 보면 나오는데,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라고 말이다.
(잠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 물론 성도에게도 꿈이 있겠지만, 그러나 !!
성도에게도 자기가 생각하는 꿈도 많고 비전도 많이 있겠지만, 그러나 그런 것들은 전혀 하나님에게 통하지 않고, 오직 주께서 맹세하신 그 맹세만이 퍼부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징벌을 내리는 쪽으로 성취가 되는 사람은 지옥으로 갈 자들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모든 것이 동일한 원칙으로 진행이 되면, 자기가 죽어서 부활이 될 것만 너무 기대하고 좋아하지 말고, 이미 부활된 채로 살아가고 있음을 알아야 하는데, 이것을 지난 시간에 무엇이라고 했는고 하니, '첫째 부활' 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영원히 천국에서 사는 것이 '둘째 부활' 이고 말이다. 그것이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온다고 했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런데 목사님, '죽는다' 라는 개념이 어떤 것인가요?
이 세상에 살다가 죽는 죽음이 있고,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두고 죽음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두 가지 죽음의 의미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죽음은, 자기가 살아보려고 하는데 잘 되지 않을 때, 바로 그것을 죽음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잠자는 것 !!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것을 두고서 죽음이 아니라 무엇이라고 했는가? 그냥 '잔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요한복음 11장의 나사로 사건에 나오는데 말이다. 오늘 우리교회의 초등부 학생들이 연극도 할 것인데 말이다.
(요 11:13)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 질문 - 사실 지옥에 가도 살아있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마치 신문지에 불을 지르면 없어지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지옥에 가면 하나님의 축복된 관계가 끊어진 것이기에 성경에서는 그것을 죽음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땅에서도 그러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죽은 것과 같은데, 그래서 살아있어도 산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본인은 살았다고 우길지 몰라도, 그러나 사실은 죽은 자라는 것이다. 그것도 역시 성경에 나오고 말이다.
(계 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의 하나님의 축복된 혜택에서 끊어진 것을 의미하는데,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과 17절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는데, 그렇게 살아서 영원히 주와 함께 있다는 말이다.
(살전 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살전 4: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 질문 - 이 땅에 있는 인간들은 이미 죄를 지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그래서 모든 인간들은 다 죽은 것이 아닙니까?
물론 그렇게 죽었는데, 그런데 그 관계가 연결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사나 죽으니 살았다고 한다는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그 연결된 관계는 지속적인가요?
그 관계가 지속적인 정도가 아니라, 고래힘줄 보다 더 질기다는 것이다. 즉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영원토록 말이다.
* 질문 - 그렇다면 애초에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산 자와 죽은 자가 정해져있다는 말씀인가요?
그야말로 '아멘' 인데, 당연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여기에 이렇게 캡슐이 있는데, 이 캡슐이 내려오면서 이 캡슐 안에 포획이 되는 사람은 살았다는 것이다. 원래는 모두 죽은 자인데 말이다. 그것은 '예수 안' 이라고 하는데, 그 사람이 바록 늙어서 죽어가고 있더라도, 그렇게 죽어도 살아있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렇다면 이 땅에서는 산 자와 죽은 자가 분명하게 구별이 되어있다는 것인가요?
물론 구별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어떤 사람을 두고 '산 자' 라고 하는지, 즉 '산 자'의 특징이 무엇이고, 또한 '죽은 자'의 특징이 도대체 무엇인지, 그것을 구별하기가 싶지 않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이러한 특징에는 시간적인 요소들이 포함이 되어있어서 말이다. 시간적인 요소가 말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27살 때에 보면 분명히 거듭났는데, 그런데 32살에 엉뚱한 소리를 하다가, 또 42살에 복음적인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50살에 또 엉뚱한 소리를 하고, 그렇게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보기에는, "어, 거듭났네' 라는 것과, "어, 지옥으로 가겠네" 라는 것이 반복된다는 말이다.
* 질문 - 왜 그런 헷깔리는 현상들이 일어나지요?
그것이 바로 인간의 못된 행태 때문인데, 무슨 말인고 하니까, 그렇게 구분을 해서 어떤 모델이 그만 결정이 되면, 인간은 그런 모델을 가만히 두는 것이 아니라 그만 흉내를 낸다는 것이다. 마치 원숭이처럼 말이다. 그렇게 되면 가짜가 자꾸만 설치게 된다는 것이다.
* 질문 - 인터넷에 있는 이야기인데, 어느 유명한 한 모 목사님이 병원에서 임종을 했을 때, 치매증상인지 몰라도, 그동안 수발을 든 권사를 보고 십원짜리 욕을 하면서, "니 미쳤나? 예수를 믿게" 라고 했다는 말이 있는데, 그러면 그 목사님도 평소에 흉내를 낸 것이 아닌가요?
물론 그럴 수도 있는데, 그런데 만약에 그 양반이 정상이 아니라고 한다면, 보통 사람이 마지막에는 정신이 다들 혼미해지고 오락가락하니 말이다. 그러니 그런 것을 가지고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미 나이가 90세도 훨씬 더 넘은 양반인데 말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제 정신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하면, 그것은 당연히 그동안 쇼를 한 것이고 말이다. 아무튼 우리가 어떤 특정한 사람을 모델로 삼으면 안 되는데, 자칫 잘못하면 황우석 교수처럼 가짜 배아줄기세포를 만들 수가 있다는 것이다.
◈ 베르고송 - 결정하지 마, 그냥 그렇게 살아 ??
철학에서는 이것을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까, 이렇게 뭔가가 하나 확정이 되고 결정이 되면, 그렇게 결정된 것을 흉내를 내는데, 그래서 베르고송은 그렇게 결정을 지을 것이 아니라, 미결정으로 남겨놓아야 한다고 주장을 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철학을 공부하면 나오겠지만, 아무런 이렇게 결정이 되면 위험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부터 무엇을 하겠다" 라는 것이 위험한데, 왜냐하면 어떤 다른 환경이 되면 그것을 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에 말이다. 예를 들어서, "나는 이제부터 술을 끊겠다" 라는 것이 위험하다는 말인데, 그렇게 하면 할수록 더욱 술을 마시고 싶은 욕구를 스스로 불러일으키니 말이다.
◈ 인간은 자기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기에 !!
물론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런 결정을 하지 않을 수는 없는데, 그러나 하더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야 하는데, 그런데 인간은 자꾸만 의미를 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슨 의미를 두게 되면 반드시 거기에서 시험이 든다는 것이다. 그냥 "그런 것하고는 천당에 가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라고 해야 하는데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상당히 위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렇다면 이렇게 보면 되지 싶은데, 인간은 하나님과 단절의 상태로 가고, 하나님은 인간과 관계성의 상태로 간다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물론 그러한데, 그것이 바로 언약이라는 것이다.
* 질문 - 그렇게 인간은 언제나 신과의 교감을 추구하지만, 그러나 인간의 입장에서는 결코 신에게로 갈 수 없는데, 하지만 신은 언제나 인간을 포획한 상태로 유지하고 있다는 것입니까?
포획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멱살을 잡고 마구 뒤흔드는데, "왜 자꾸만 너의 행동에 의미를 두는가? 내가 주는 은혜로 구원을 받는데 말이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 질문 - 그러니 성령을 받은 자의 경우도, 남이 자기를 어떻게 여기는지가 문제가 아니라, 정말 자기 자신도 자기가 성령을 받았는지 혼란스러워하는, 그런 현상들이 나타난다는 말씀이지요?
우리가 만약에 데살로니가전서 4장을 보지 않고, 그것을 모른다고 한다면, 장례식에 가면 무슨 생각이 들겠는가? "아하,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죽으면 모두 다 저렇게 끝이구나" 라고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데살로니가전서 4장의 말씀이 깨달아지면, "아하, 저렇게 죽는 것으로 희망이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는 것이다.
◈ 다시 정리하면 !!
지금까지 한 것을 다시 정리하면, 산 자나 죽은 자나 동일한 원칙을 적용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동일한 원칙이 무엇인고 하니까, 예수님이 주님이기 때문에, 예수님 본인이 자기 맹세를 던져놓고는, 그 맹세의 본인의 숙제라고 여기고 본인이 그렇게 일을 하셔서 나온 결과이지, 결코 우리가 요구해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구원이 말이다.
◈ 구원은, 예수님의 자기 맹세의 실천 !!
그러니 만약에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그것은 여러분의 요구사항이 관철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믿도록 자기 임무를 다 완성했기 때문에, 즉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믿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셨기에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예수님을 믿으려고 해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상상외로 많은데, 하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냥 쉽게 믿어지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볼 때는 예수를 믿으려고 그렇게 몸부림을 치는 것이 얼마나 이상하게 보이겠는가? 그래서 "이런 바보들, 그냥 믿으면 되는데, 뭐가 어렵노?"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것이 정말이지 어렵다는 말이다. 사실은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한데,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서 구원받는다는 것이 말이다. 그것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데,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것만큼 쉬운 것이 없다는 것이다.
◈ 여호수아의 옷을 벗기고 새 옷으로 !!
지난 시간에 설교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스가랴 3장에 보면, 주께서 여호수아의 옷을 벗기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히는 내용인데, 그것이 전혀 어려운 게 아닌데, 그런데 사람들이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께서 자기가 다 알아서 갈아 입히면 자기는 무엇이냐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구원은 결코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슥 3:3)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슥 3:4)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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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히브리서를 !!
이제 히브리서를 시작하겠는데, 지난 시간에는 전체적으로 살펴보았고 말이다. 먼저 1장 1절과 2절을 살펴보자. 제가 읽겠습니다.
(히 1:1)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히 1: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 이름이 등장하면, 더 이상 가시적일 이유가 없어 !!
여기서 좀 어려운 이야기를 하나 해야 하겠는데,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하면 하나님이 가시적일 이유가 없다" 라는 것이다. 이것이 신학적으로 상당히 난해한 표현인데, 즉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스스로 가르쳐주었으면, 더 이상 하나님은 사람들의 눈에 드러나도록, 그런 눈에 보이는 타입으로 나타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되니 말이다.
◈ 하나님은 자기 이름 뒤로 모든 것을 던져버린다 !!
이것을 좀 더 어렵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은 자기 이름 뒤로 모든 것을 던져버린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왜 그렇게 던지는가? 더 이상 필요 없기에 던져버린다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다 쓴 물건을 휴지통으로 버리듯이 말이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신성시하려고 하는데, 그렇게 신성시한 것을 바탕으로 해서 천국에 가려고 하고 말이다. 인간은 이렇게 자연세계에 보이는 것을 추려서 신성한 것으로 여기는데, 그렇게 신성한 것을 가지고 천국에 도달하려고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드러내게 되면, 인간이 이렇게 신성하다고 여기는 것을 다 치워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 유대인들은 왜 안식일과 성전인가?
그러므로 인간은 그냥 주의 이름을 부르면 되는데, 그런데 인간은 자꾸만 자기 앞에다 신성한 것을 차려야만 한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제사를 지내든 무엇을 하든지 간에 말이다. 왜 이 세상에 인간들이 하는 그런 것들이 많지 않은가? 유대인들에게는 두 가지 신성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시간적 신성과 공간적 신성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시간적 신성은 안식일인데, 즉 특정한 날은 거룩하다는 것인데, 그렇게 거룩한 날을 지킴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간적으로 거룩한 것은 성전인데, 이 성전이라는 특정 장소는 너무나 거룩하기 때문에, 그래서 여자들이나 이방인들은 들어가지 못하는데, 오직 제사장만 들어가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 그러나 성전도 결국 주의 이름 뒤로 !!
그리고 성전이 거룩하면 그 안에 들어있는 여러 가지 기구들도 역시 거룩한데, 물론 그 성전을 운영하는 제사장들도 거룩해야 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런 모든 거룩이 주의 이름 앞에서는 뒤로 던져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이런 것들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여기 이렇게 신문이 있는데, 그래서 누군가가 "신문을 보세요. 그래야 이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알지요" 라고 하면, 그 신문을 하나님께서 집어서 던져버린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하나님의 이름으로 벌리는 새로운 공간에만 파격적으로 일이 벌어질 때, 그때만 천국의 맛을 보는 것이지, 인간들이 신성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가득히 채워서 들이밀면서 "하나님, 받으소서" 라는 것은, 그런 것은 하나님이 결코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런데 인간의 생활 속에는, 이러한 안식일과 성전 말고도 시간적으로 신성한 것과 공간적으로 신성한 것들이 무지무지하게 많이 있지 않나요?
물론 많이 있는데, 소위 '터부시' 하는 것들이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축구선수가 게임을 하기 전에 손톱과 발톱을 깍지 않는다든지,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은 첫 손님에겐 물건값을 깎아주지 않는다든지, 또 식당을 하는 사람이 오전에 비빔밥을 팔지 않는다든지 하는 것이 그렇다는 말이다.
◈ 이 자연세계 자체가 더럽기에 !!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받지 않는고 하니, 이 자연세계 자체가 더럽다는 것이다. 히브리서를 공부하려면 반드시 이 부분을 언급하고 넘어가야 하는데, 자연세계가 이렇게 더럽고 후패하기 때문에, 그런 더러운 것 가운데 아무리 깨끗한 것을 고르고 해서 하나님께 드려도, 하나님은 더러워서 드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도 인간은 자꾸만 거룩한 것을 만드는데,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둘 사이게 엄청 싸움이 벌어지는데, 구약 때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을 누가 공격했는가? 성전중심의 제사장들과 거기서 양성된 기존 선지자들이 참 선지자들의 귀때기를 때리고 난리를 피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왜 그렇게 했는가? 그것은 바로 "당신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만든 이 거룩한 성전을 왜 거룩하지 않다고 하는가? 그리고 이 제사장직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참된 선지자는 뭐라고 하는가? "그것은 이미 한물이 지나갔습니다. 그것은 이제 인간의 죄를 씻을 수가 없습니다. 이미 용도폐기가 되었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아하, 이것은 성립되지 않는구나 !!
그러므로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까, 인간이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겠다고 하는 것은, 항상 수시로 "아하, 이것은 성립되지 않는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구약이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안 된다는 식으로 말이다.
예를 들어서, 여기에 빨간 매직이 이렇게 있는데, 그런데 지난밤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근호야, 내일 빨간 매직이 나타날 것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나타났으니, 제가 그것을 가지고서 간증을 하면서 돌아다닌다고 한다면, 그리고 "그 빨간 매직을 가지고 강의하면 잘되고 성령이 역사할 것이다" 라고 해서, 그것만 가지고 열심히 강의를 했다는 말이다.
◈ 하나님은 '주고 나서, 던져버리고' !!
그런데 하나님께서 실제로 꿈에 나타나서 그렇게 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런 것을 집어 던져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보면 되는데, "주고 나서, 그리고 던져버린다" 라고 말이다. 성전의 경우가 그러한데, 분명히 하나님께서 먼저 지으라고 해놓고, 선지자들을 보내서 부정해버리고 말이다. 그리고 제사장도 역시 세우라고 해놓고 소용이 없다고 하고, 또한 선지자도 세우라고 해놓고 필요가 없다고 한다는 것이다.
* 질문 -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시는 것이죠?
자연세계 자체가 더럽다는 것인데, 거기에는 어떤 거룩이 없다는 것이다.
* 질문 - 그것은 인간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가요? 아니면 하나님 스스로에 대한 모습인가요?
물론 인간에게 보여주기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인간은 그것을 차츰 알아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자체가 자연세계이니 말이다. 그것을 모든 인간은 다 아는데, 그런데 위선적으로 스스로나 남들을 속인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므로 시간적 거룩이나 공간적 거룩이 시간이 가면 갈수록 차츰 더러워져 간다는 것을 인간이 깨닫는다는 말씀이지요?
물론 아는데, 그것이 전도서에 나오는데, 그 전도서의 특징이 바로 '허무하다' 라는 것이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자기가 과거의 초등학교 시절의 교정의 느티나무가 참으로 아름다웠다고 한다면, 하지만 지금 한번 가보라는 것이다. 과연 그렇게 아름다운지 말이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 그런 아름다움을 찾을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시간자체가 모든 것을 후패하게 만드는데, 즉 썩어지게 만들고 또 허무하게 만든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느티나무의 잘못이 아니라, 인간자체가 자연세계와 더불어서 후패해지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즉 자기가 늙어가기 때문에, 그래서 자연세계의 아름다움도 같이 늙어간다는 것이다.
* 질문 - 억수로 어렵지만 참 흥미로운 말인데 말입니다. 그러니 피조물이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과 맥을 같이 하는 말씀이 아닌가요?
예를 들어서, 2년 전에 "영덕대게가 참 맛있었다" 라고 했다면, 하지만 지금 먹어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런 맛이 나는지 말이다. 오양맛살이 더 맛있을지 누가 아느냐는 말이다.
* 질문 - 이 자연세계에서 인간이 그렇게 견줄 하나의 모델로서 제시가 되었다는 말씀이지요?
물론 그러한데, 인간은 이 자연세계 속에 있으면서 함께 망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보여주는데, 그래서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전도서에 나오듯이 허무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성령을 받지 않아도 다 아는 것인데, 하지만 그렇게 허무하다는 것을 알아도 해답이 없기에, 깊이 있게 생각하기를 싫어한다는 것이다. 분명히 허무하기는 허무한데, 그런데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 질문 - 그래서 그런 허무는 철학을 하는 사람들도 발견을 하지 않습니까?
철학은 그것이 목적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리고 이 철학이 발전하면 불교가 되는데, 그런 허무함이 불교에서 다 드러난다는 것이다. 철학은 주체이고, 불교는 그 주체마저도 없애버리고 말이다.
* 질문 - 너무 심한 비약인지도 모르겠는데, 성령께서 택한 자들뿐만 아니라, 로마서에서 '내버려두사' 라고 한 자들도 역시 인도해서, 그들을 지옥으로 보내는 것이 아닌가요?
◈ 이놈아, 니 손가락을 잘라라 ??
물론 그러한데, 예를 들어서, 불교의 중을 이야기하자면, 어느 고승이 한 사람 있는데, 그 사람은 누가 무엇을 물으면 항상 손가락을 하나 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제자 중에 하나가 스승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자기도 친구가 무엇을 물으면 손가락을 하나 들었다는 것이다. "니가 훌륭한 스승 밑에 있으니 잘 알지 싶은데, 진리가 뭐꼬?" 라고 하니, 손가락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러자 스승이 그것을 보고 제자의 그 손가락을 그만 잘라버렸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만 피가 철철 흐르는데, 그래서 제자가 "아니 선생님, 제 손가락을 왜 자릅니까?" 라고 하니, 그 스승이 역시 손가락을 하나 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진리도 모르면서 함부로 어디서 까불고 흉내를 내느냐는 말이다.
◈ 이미 주체가 성립이 되니 질문을 !!
이것이 선(禪)불교에 다 나오는 것인데,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스승이 손가락을 드는 것은 질문자와 답변자가 한 마음이 된다고 한다면, 질문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질문하는 주체가 성립이 되니 질문을 하는데, 그러니 백날 답변을 해주어도 그것은 그 질문의 주체자를 좋게 하는 것밖에 안 되는데, 왜냐하면 이미 주체가 성립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제자는 스승의 그런 모습이 너무나도 멋있고 좋아보니, "야, 나도 우리 스승님과 같은 훌륭한 도사가 되어야 하겠다" 라고 하는 마음이 드는데, 그래서 모방을 한 것이고 말이다. 그러니 그 스승이 자기 제자의 손가락을 자른 것은, 바로 그러한 '나' 라고 하는 것을 없애버리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것이 철학의 극단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선불교가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이 자연세계에 대해서, 그것이 신성하고 거룩하다고 여기면 도망을 가버리고, 또 여기면 도망을 가버리고 한다는 말이다.
◈ 라캉 - 기의(記意)가 기표(記表) 위를 미끄러진다 !!
프랑스의 정신 분석학자 '라캉'은 이것을 '미끄러진다' 라고 했는데, 즉 "기의(記意)가 기표(記表) 위를 미끄러진다" 라고, 참으로 어려운 말을 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기의, 즉 기호의 의미는 기표, 즉 기호의 표시 위를 미끄러진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여기에 지우개가 있다고 하면, 이것이 그냥 지우개가 아니라 빨간 지우개라는 것이다. 즉 파란 지우개는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미끄러지는데, 이렇게 ( )를 하고 넘어가고, 또 ( )를 하고 넘어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계속 기의가 발생하면서 기존의 것은 비워버린다는 말이다.
사람이 누구를 사랑해도, 춘자를 사랑하다가 정애를 사랑하다가 현숙이를 사랑하고, 그렇게 계속해서 미끄러진다는 것이다. 처음엔느 춘자에게 "너만을 사랑해" 라고 하다가, 6개월을 못 가서 미끄러지고, 거기서 또 미끄러지고 말이다.
* 질문 - 기표 때문에 미끄러지는가요? 아니면 처음에 기의를 잘못해서 그런가요?
처음에 춘자를 사랑할 때는 그것이 거짓말이 아니라, 그야말로 자기에게는 춘자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지만, 자연세계가 뭉개지면 본인도 같이 뭉개지듯이, 춘자를 사랑했던 그 마음을 빼내어서 다른 여자에게 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자기도 자기 자신을 종잡을 수 없어 !!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은 본인 자체가 절대자가 아니라 항상 미끄러지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여기서 '미끄러진다' 라는 것은, 왜 눈이 와서 미끄러지면 어떻게 되는가? 바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만 옆으로 가버린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있는 지점이 A에서 B로 바뀐다는 말이다. 그것이 미끄러진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나는 착하고 훌륭하다" 라는 자리에 있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무엇을 하나 잘못해서 미끄러지면, "나는 정말 나쁜 놈이야. 그것도 하나 제대로 못하고 말이야" 라고 하는데, 그렇게 하다가 자기가 또 연말에 이웃돕기도 하고 방송국에 성금을 내면, "역시 나는 그렇게 나쁜 놈이 아니로구나" 라고 하면서 또 미끄러진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연예인들이 참으로 불쌍한데, 우리가 보기에 결혼생활도 불행하고 함부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들의 인기라고 하는 것이 그야말로 종잡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인기가 있는 줄 알았는데, 자고 나니 전혀 다른 곳에 미끄러져서 있다는 말이다.
* 질문 - 미끄러진다고 하니, 마치 미끄럼틀을 타는 것처럼 추락하는 의미로 들리는데요?
그것은 후퇴나 추락하는 의미가 아니고, 자기가 누구인지, 즉 "나는 이런 모습이다" 라는 것이 없고, 도저히 자기 자신을 종잡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자꾸만 변한다는 말이다.
◈ 문제는 인간들의 선입관 때문에 !!
그래서 히브리서 1장 1절에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하나님에 대해서 옛날 적에 선지자들이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백성들이 일단 선지자의 말을 듣기는 듣는데, 그런데 문제는 각자가 자기들의 선입견을 가지고 듣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해를 하고 말이다.
* 질문 - 그것은 기존의 가지고 있는 자기의 과거경험 때문에 그런가요?
물론 그러한데, 예를 들어서, 하박국이 "이 나라가 3년 내에 부흥한다" 라고 하니, 백성들은 자기들의 나라가 3년 안에 잘 될 것이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들은 선지자들의 이야기를 자기들에게 좋게 왜곡해서 듣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선지자들이 여러 모양으로 그렇게 이야기를 했는데도, 하나도 아다리가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뜻이 맞아떨어지는 법이 없다는 말이다. 인간들의 선입관으로 인해서 말이다.
이렇게 인간들은 하나님의 뜻을 전혀 모르는데, 그러니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백날 보내도 모두가 자기 잘날 쪽으로 받아들이니, 그렇게 선지자를 핍박을 하고 학대를 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지자들이 가지고 있는 뜻을 잘 몰라서 말이다. (과연 몰라서 핍박을 했을까?)
◈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예를 들어서, 성탄절이 되면 자주 사용하는 설교본문이 있는데, 물론 그것이 마태복음 1장 23절에도 나오지만, 이것은 구약 이사야서 7장 14절의 말씀을 인용해서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사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임마누엘' 인가? '예수' 인가?
여기에 보면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고 하니, '임마누엘' 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분명히 글자가 넉자인데, 그런데 이것을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이사야서 7장 14절의 본문을 그대로 인용을 하면서, 천사가 장차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가르쳐주는데, 그만 그 이름이 바뀌어있다는 것이다. 22절에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라고 하면서 말이다.
(마 1: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 1:22)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그러니 예언에는 분명히 '임마누엘' 이라고 네 글자인데, 그런데 신약에서 '예수'는 그만 두 글자라는 것이다. 그러니 서로 맞지 않다는 말이다. 예언이 임마누엘이라고 했으면, 그 예언의 성취도 당연히 임마누엘이 되어야만 맞지 않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는가? 그러한 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선입관과 착각 때문에 그렇다고 하시는데, 사실 우리가 보면 그것이 제대로 보는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이 아니라고 한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렇다고 하면,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이 그런 선입관을 가지고 착각을 할 줄 뻔히 알면서, 왜 선지자들을 보내서 그런 일들을 하셨지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하게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의 모형을 제시하는 과정 속에서 다른 무엇이 있는지 말입니다.
◈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도록 !!
물론 인간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하는 의미가 있는데, 그것이 곧 인간들 속에 무슨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 속에 있는 어두운 죄의 문제인데, 바로 이 죄 때문에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임마누엘' 이라고 하면, 그냥 그 넉자만 기억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의 자손, 즉 메시야가 장차 어디에서 태어나느냐고 물으면, '베들레헴' 이라고 대답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구약에 그렇게 예언이 되어있기에 말이다. 하지만 베들레헴에 가면 과연 예수님이 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 베들레헴이 새로운 의미로 !!
왜냐하면, 이 베들레헴의 의미가 어떻게 되는고 하니, 약한 자, 소외된 자, 하나님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한 자의 의미로, 그런 새로운 의미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이런 것이 정말로 어려운데, 이 베들레헴은 분명히 장소의 의미인데, 실제로 예수님과 동방박사들이 베들레헴에서 만났고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베들레헴을 신성시하면 하나님은 또 자기의 이름 뒤로 집어 던져버리는데, 왜 그런고 하니, 하나님의 이름은 날마다 새로운 일을 하는데, 그런데 인간들은 날마다 과거의 구닥다리를 붙들고 있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어" 라고 말이다.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새로운 기적을 일으키는데, 그런데 인간들은 과거의 장소에 연연해하고, 또한 그것을 반드시 신성시한다는 것이다. 즉 "이 장소는 내가 기도해서 3대 외동아들을 낳은 곳이다" 라고 한다든지 말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 베들레헴의 의미는 무엇인가? 바로 그러한 자들의 오해와 곡해로 인해서 무시를 당하고 핍박을 받은 그리스도의 종들이 모인, 바로 그러한 집단이 베들레헴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베들레헴의 의미라는 것이다. 좀 어렵지요?
◈ 육적인 해석에서 영적인 해석으로 !!
여기에 대해서 이번 전남 함평 겨울수련회에서 집중적으로 할 것인데, 즉 "어떻게 육적인 해석에서 영적인 해석으로 이어지는가?" 라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베드로전후서를 강의하면서, 여기서 대해서 이야기를 할 것인데, 오늘은 기초 중에서 기초만 한 것이고 말이다.
이번 수련회 강의시간이 90분 강의가 총 12강인데, 아마 5번 정도는 이 육적인 해석과 영적인 해석에 관해서 이야기를 해야되지 싶은데, 그렇게 해야 좀 풀리지 싶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경전체를 다 살펴보아야 하는데, 어떻게 영적인 해석을 할 수 있는지 말이다.
◈ 다시 정리하면 !!
앞에 한 것이 중요한 내용이라서 다시 한번 더 강의를 하겠는데,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가 이야기를 하면 인간들은 반드시 곡해를 하도록 되어있는데, 그런데 정작 인간들은 자기가 그렇게 왜곡했다는 사실을 알겠는가? 물론 모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베들레헴의 경우에도, 선지자가 누군가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고 하면 인간들은 장소적으로는 베들레헴인 줄 안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성적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사렛 사람이다" 라고 하면,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한 줄 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자기들이 사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 영적인 해석이 되면, 핍박받고 무시를 당하는 집단을 두고서 '나사렛' 이라고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선지자가 핍박을 받으면, 그러한 선지자가 옳다고 동의하는 자들이 함께 핍박을 받는데, 그렇게 선지자와 함께 동거동락을 하는 자들이 나사렛의 의미가 된다는 것이다.
◈ 빛이 없는 곳에 빛이 비춰지면 !!
왜냐하면, 이사야 9장에 가면 이 나사렛의 특징이 어두운 흑암이고 빛이 없는 곳이란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빛이 없는 곳에 빛이 비춰지면 어떻게 되는가? 기존의 인간들이 이 빛을 공격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소경인 자가 소경이 아니고, 소경이 아닌 자가 소경이 되어버린다는 말이다.
(사 9:1)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사 9: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 하나님의 비밀전달방법은?
하나님은 이렇게 인간들을 공격하기 위해서, 그래서 기존의 인간들이 생각하고 있는 사고방식을 역전시켜서, 그와 반대로 자기의 뜻을 전달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자신의 감추어진 비밀을 전달하는 방법이라는 말이다.
◈ 소경이 '본다' 라는 의미는?
이왕 어려운 것이니 좀 더 어렵게 해보면, 예를 들어서, 소경이 된 자가 눈을 떴다고 할 때, 그것을 두고 사물을 본다고 하면 그것은 역시 오해이고, 그것의 영적인 의미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이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었다는 것을 알 때, 바로 그것을 두고서 소경이 본다고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소경이 눈을 뜬 것을 몰랐는가? 그들은 분명히 소경이 눈을 떤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그 소경에게 닥달을 내는데, 즉 "도대체 누가 너에게 눈을 뜨게 는가? 그 예수가 이단일 줄을 니가 정말 몰랐다는 말인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 누가 진짜 소경인가?
바로 이렇게 예수님에게서 나온 능력이 눈에는 보이지 않을 때, 즉 그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능력이 나와서 거기에 꽂혔다는 사실을 전혀 모를 때, 그런 사람은 아무리 자기 시력이 2.0을 넘는다고 해도, 성경에서는 바로 그러한 자를 두고서 소경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실로암의 연못가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제자들이 날 때부터 소경이 된 자를 보고 예수님에게 뭐라고 하는가? "저 소경이 누구의 죄 때문에 저러합니까?" 라고 하니,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저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날 때부터 소경이 되어야 한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능력이 밖으로 뽑혀 나와서 그 사람에서 도착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한다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소경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왜 인간들이 말씀을 왜곡하는가?
이런 영적인 입장의 기준에서 보면, 현재 인간들이 곡해하는 이유가 바로 철저히 자기 중심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영적인 해석은 누구 중심인고 하니, 예수님에게서 나간 보이지 않는 능력중심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능력 중심으로 해석을 하면 영적인 해석이 되고, '나' 중심으로 해석을 하면 육적인 해석이 된다는 말이다. 이것은 이해가 되지요?
그리고 "마리아가 동정녀인가? 아닌가?" 라는 문제에 있어서, 어떤 학자는 연구를 해보니 예수님에게 이복 형제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요셉이 바람을 피워서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상당히 곤혹스러웠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말이다. 아무튼 예수님이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것은, 즉 아버지가 없이 태어났다는 말인데, 그래서 이 마리아가 처녀인지를 가지고 따지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왜 이러한 현상들이 일어나는고 하니, 인간의 이성으로 뚫어나가면 뚫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들이 이렇게 이성으로 뚫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 더러운 것이고, 전혀 신성한 것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전혀 엉뚱하게, 역으로 해석을 하면서 계속해서 공격을 하신다는 것이다.
◈ 소녀야 일어나라, 달리다굼 !!
마가복음 5장에 보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의 딸이 죽었을 때 예수님은 뭐라고 했는가? 그냥 '잔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웃고 했지만, 그러나 그 아이는 예수님이 일어나라고 하니, 잠을 잔 아이처럼 잠에서 깨어나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달리다굼'이 나왔고 말이다.
(막 5: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훤화함과 사람들의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막 5:39) 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막 5:40) 저희가 비웃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 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막 5: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막 5: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 열 두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 예수님에게는 죽음도 잠자는 것과 같아 !!
그렇다면 분명히 죽었는데 왜 예수님은 잔다고 이야기하는가? 인간에게 죽음은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자기 영역 밖의 문제인데, 하지만 예수님에게는 죽음조차도 자기의 손이 닿을 수 있는, 그래서 죽은 사람도 마치 자는 사람을 깨우듯이 한다는 것이다. 즉 죽은 자도 얼마든지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예수님에게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누군가가 죽으면 어떻게 하는가? 병원에 가보면, 의사들이 환자가 살아있을 때는 그렇게 애를 쓰고 고생을 하는데, 그러나 죽어버리면 모든 손을 다 놓아버린다는 것이다. "우리 할 일은 다했다. 이제 끝났다" 라는 의미로서 말이다.
◈ 마지막 때는 오직 아들을 통해서 !!
하지만 예수님의 경우는 전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에게는 산 사람도 죽일 수 있고,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역으로 공격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히브리서 1장 2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마지막 때는 누구를 통해서 설명을 한다고 했는가?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인데, 그러니 마지막 때는 이해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히 이해가 막혔다는 것이다.
(히 1: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 질문 -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줄 알면서 선지자들을 보내지 않았나요?
그래서 선지자들이 고난을 받는데, 그것이 바로 그들의 역할이고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고난을 받는 선지자가 중심인가요? 아니면 고난을 받게 하는 인간인가요?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 내부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데, 바로 그 그리스도의 영이 핍박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베드로전서 1장 10절과 11절에 나온다는 말이다. 선지자 자신은 그렇게 하기 싫어도,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 때문에 어쩔 수가 없이(?), 선지자는 그렇게 장차 오실 메시야의 고난을 미리 보여주는 의미에서 고난을 미리 앞당겨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벧전 1: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벧전 1: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 선지자는 메시야의 고난을 미리 앞당겨 !!
그러니 선지자들은 팔자가 편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엄청 꼬인 사람들인데, 그런 선지자들 중에서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인데, 고생을 얼마나 많이 했느냐는 것이다. 요셉의 경우에도 그렇고 말이다. 다윗도 역시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노아, 에녹, 사무엘 등등, 모두가 다 그렇다는 말이다.
바로 이러한 선지자들 속에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고난과 핍박을 받게 되는데, 그것이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모세의 경우에도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는가? 그렇게 그리스도의 핍박을 미리 앞당겨서 다 받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제 우리 차례가 되었는데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예수님이 오시고 난 뒤에 죽은 스데반 집사의 경우는 어떠한가요?
역시 마찬가지인데, 이렇게 예수님을 중심으로 해서, 이쪽에는 구약의 선지자들이고, 저쪽에는 신약의 선지자들, 즉 성도들이라는 것이다. 시간이 앞서고 뒤서는 것에 너무 구애를 받지 말이다. 물론 선지자는 미리 앞당겨 보여주는 의미가 있지만 말이다. 그런 선지자들의 모습을 이제는 성도들이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저와 여러분의 차례가 되었다는 것이다.
◈ '물고기와 뼈' 비유 ??
이런 비유가 어떠할지 모르겠는데, 우리가 물고기를 한 마리 잡아서 먹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 뼈만 앙상하게 남는데, 그런데 그 뼈는 물고기를 먹기 전에는 알 수가 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살점을 다 먹어봐야만 뼈가 드러나서 비로소 알게 된다는 말이다.
이렇게 성도에게는 이미 예수님이란 뼈가 내장이 되어있는데, 물고기의 뼈와 가시처럼 촘촘히 박혀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눈에는 겉에 있는 살점만 눈에 보이니, 그래서 자기가 다 알아서 하는 줄 알지만, 사실은 뼈가 안에 들어있어서 그렇게 몸을 유지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므로 선지자를 보냄으로서, 인간의 곡해로 인해서 그 선지자가 퉁겨서 나가기 위해서, 그래서 일부러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말씀이지요? 말을 해도 듣지 않을 줄 뻔히 알면서 말입니다.
◈ 제사법을 누가 주었는가?
물론 그러한데, 예를 들어서, 제사법을 누가 주었는가? 분명히 하나님이 주셨는데, 그런데 사무엘이 사울의 제사를 보고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은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기존의 인간들이 완전히 돌아버리는데, 그렇다면 왜 제사법을 주었느냐는 말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제사법을 주었다는 것은 이성적으로 볼 때 그 제사법은 거룩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육적인 해석인데,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그 제사법이 거룩하고 또한 신성하게 여기게 되는데, 그러니 그것을 이용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라고 하나님이 주셨으니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떠한가? 인간들이 그것을 육적으로 해석해서 이용하려고 한다면, 아까 말한 것과 같이, 그것을 자기의 이름 뒤로, 즉 그냥 쓰레기통으로 집어던져 버린다는 것이다. 새로운 선지자가 나타나서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이름 뒤로 던지는 것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라는 것으로 표현이 되고 말이다.
* 질문 - 그런 일들이 다양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선지자들이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것인가요?
인간 속에 들어있는 새로운 죄악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선지자들은 계속해서 어떤 상황 속에서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그러게 반복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우리는 기껏해야 90세를 사는데, 그렇게 살면서 특정 지역에서 특정 교회를 서너 군데에 다니면 그것으로 그냥 끝이지, 이 세상 모든 교회를 다 관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 질문 - 구약시대의 선지자는 자기가 선지자인 줄 알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명령을 하달까지 받았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현대에는 그렇지는 않지 않나요?
물론 구약시대에는 성령을 통해서 알았고, 하지만 지금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본인은 아는데, 하지만 그 특징을 남에게 이야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 손가락을 들까 싶어서 말이다. (??)
* 질문 - 그런데 아모스는 자기가 선지자가 아니라고 했는데요?
아모스의 경우에, 자기는 뽕나무를 키우는 농부이지 선지자가 아니라고 했는데, 그러나 그것은 자기가 선지자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기존 선지자에 대한 고발이라는 것이다. 즉 "좋은 것은 니들이 모두 해먹어라.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도 안 되는 나를 선지자로 불러 세웠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기존 정통보수 신학교를 나온 선지자들이 얼마나 꼴통인지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숫자적으로, 구약의 거짓 선지자가 100명 정도라면 참 선지자는 몇 명이나 될까요?
성경은 참 선지자가 과연 몇 명이고 누구인지, 그런 것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엘리야의 경우에 그를 추종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더물게 7000명이라는 숫자는 나오기는 했지만, 그들의 명단은 성경에는 없다는 말이다.
◈ 나는, 엘리야에게 가서 배울 거야 !!
그러나 거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엘리야가 그냥 말한 한 것이 아니라, 엘리야가 한 말이 전파되는데, 그렇게 되면 이름도 없는 선지자가 하는 말이 "나는 이 신학교에서 배우지 않을 거야. 엘리야에게 가서 배울 거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기 동네에 가서 선지자 노릇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엘리야는 한 명이지만, 그러나 "엘리야의 말이 맞아, 그가 하나님이 보낸 참된 선지자야" 라고 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면, 이런 사람은 성경에 나올 정도의 유명인사는(?) 아니지만, 자기 동네에서는 선지자 노릇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질문 - 지금 이 땅에서는 엘리야와 그에게 배운 자들은 있나요?
엘리야와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은 없는데, 12사도로서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은 모두가 끝이 나고, 그리고 그에게 배운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모든 신자들이 모두 해당된다는 것이다.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다" 라고 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성도는 다 왕 같은 제사장이고, 또한 선지자라는 말이다.
◈ 주어진 자기 영역 안에서 !!
그런데 그런 선지자로서 활동범위를 온 세상을 다 돌아다닐 생각은 하지 말고, 우리가 기껏 살아봐야 90살이고, 또한 교회를 다녀봐야 겨우 서너 군데의 교회이고, 또 대부분은 자기가 태어난 그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냥 거기서 태어나서 거기서 죽는다는 말이다.
제가 그래도 책을 낸다고 이렇게 똥폼을 잡아도, 지금까지 그렇게 검은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생고생을 해서 낸 책이 겨우 십여 권에 불과한데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주님께서 사용하시니, 그것으로 황송하게 여기소 감사하면서 살아가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도 아무리 설치고 돌아다녀 봐야 자기 직장이고, 자기 학원이고, 또 가게라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은 우리에게 묻는 것은 얼마나 많이 설치고 돌아다니고 실적이 어떻게 되느냐가 아니고, 그것은 회사가 영업사원에게 요구하는 것이고 말이다.
* 질문 - 그러니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을 믿고 따르면, 그것이 오늘날 선지자의 모습이란 말씀이지요?
그것이 왜 선지자의 모습인고 하니, 육적인 해석은 누구든지 다 할 수가 있는데, 세대주의적인 해석과 같은 것은 말이다. 그러나 그런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육적인 해석이 아니라, 인간에게는 나올 수 없는 영적인 해석, 즉 예수님에게 능력이 나와서 자기를 구원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반해서 육적인 해석은 무엇인가? 자기가 알아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인데, 그런데 이런 육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으로 건너갈 인간적인 방법은 그야말로 전무하다는 것이다. 오로지 주님의 능력이 임하지 않으면 전혀 없다는 말이다.
◈ 육적에서 영적으로 건너갈 인간적인 방법은 없어 !!
인간에게는 기껏해야 자기가 주일성수를 했고, 교회에 피아노를 바쳤고, 꽃꽂이를 했고, 그리고 목사님에게 승용차를 한 대 사드렸고 등등, 그런 것밖에 다른 것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목사의 경우에는 자기가 개척교회를 몇 군데 했고, 또 사례를 받지 않고 자비량으로 목회를 했다는 등, 그런 것밖에 나오지 않고 말이다.
* 질문 - 그런데 육적인 것이 작용이 되기 때문에 영적인 것이 나타나지 않나요?
물론 그런 경향이 있는데, 영적인 것이 다가오게 되면 육적인 것이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즉 영적인 것에 자극을 받아서 그것을 공격한다는 것이다. 마치 개를 그냥 두면 가만히 있는데, 괜히 발로 건드리면 마구 달려들 듯이 말이다.
하나님께서 그냥 가만히 있으면 참으로 좋을 텐데(?), 그런데 영적인 사람을 보내서 자꾸만 건드린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런 영적인 사람이 직장에 다닌다고 하면, 그런 영적인 말을 하도록 함으로, 그만 그 직장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고, 다들 그 사람을 공격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 스데반 집사가 순교에 목숨 건 사람이 아니라 !!
제가 몇 번 말씀을 드리지만,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를 하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이 결코 아닌데, 자기는 자기가 알고 있는 대로 전했을 뿐인데, 그야말로 아는 대로만 했을 뿐인데, 그만 그것을 듣고 상대방이 열을 받아서 죽이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육적인 것에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영으로 난 것만이 오직 영적인 것을 알 수가 있지 말이다. 즉 영으로 난 것은 바람과 같아서 전혀 육적인 것이 알 길이 없다는 것이다.
◈ 내가 교회의 주인이다. 다 나가 !!
제가 알고 있는 어느 목사의 경우인데, 평소에 자기는 복음적이고 영적인 사람이라고 하다가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내가 교회의 주인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인 자기 주장에 대해서 반대하는 사람은 모두 다 나가라고 했다는 말이다.
그러한 경우에는 우리가 충분히 분석할 수가 있는데, 즉 평소에는 그냥 잘 있다가 누군가가 옆에서 찌르니까 자기의 목사직이 그만 신성시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주님의 이름에서 나오는 능력과 충돌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평소에는 그렇게 복음적이고 온화하고 부드럽고 좋다가, 그런데 누군가가 쑤시니 그만 "나에게 반대하는 인간은 다 나가"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갑자기 말이다. 왜 그렇게 갑자기 태도가 돌변하느냐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를 너무 신성시하니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 인간은 언제나 자기를 신성시하는데 !!
그러니 누군가가 우리를 공격해도, "왜 이래? 내가 뭘 잘못했는데?" 라고 하지 말고, "나는 원래 그런 놈이야. 그런데 내가 구원을 받는 것은 전적으로 예수님의 은혜이고 능력이다" 라고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씨, 누가 맞는지 한번 해보자" 라고 해버리면, 그것은 곧 자기 자신을 신성시하는 모습이라는 말이다.
특히 목사들에게 이런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는 것이다. 아무리 복음을 안다고 해도 이런 경우들이 비일비재한데, 물론 저도 예외일 수 없고 말이다. 이것이 참으로 안타까운데, 마음을 낮추어야 하는데, 그런데 자기 목사직이 신성하다고 여기니, 즉 "내가 아니면 누가 가르치겠는가?" 라고 나오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 질문 - 오늘 이 내용을 들으니, 그 전에 제가 질문했던 "성령이 임하면 성도는 그것을 눈치챌 수 있는가?" 라는 문제가 좀 풀리는 것 같은데, 성도는 알지 싶은데 말입니다. 표현하기는 곤란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렇지요?
물론 성도는 아는데, 같은 영으로 받았으니 말이다. 만약에 목사가 자기를 신성시해서 "어디 집사가 감히 목사에게 까부는가?" 라고 했다가, 그러나 그 다음날 자기 자신을 회개한다면 그 사람은 영적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를 신성시하는 것이 죄임을 깨닫게 되면, 다음날 그 집사에게 자기가 잘못했다고 한다는 것이다.
◈ 집사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장로나 집사, 혹은 아무라도 성령을 받은 사람을 보내서 목사의 신성시하는 것에 대해서 자극을 주게 되니, 평소에 그렇게 복음적인 목사가 비복음적이 되고, 또 그 집사는 욕을 얻어먹는데, 그러니 결국은 그 집사가 선지자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본인이 의사와 상관없이 말이다.
아무튼 그 집사님은 "우리교회 목사님은 아닌 줄 알았는데, 나에게 엄청 화를 내네.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지?"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런데 그 다음날에 목사가 찾아와서 "집사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하면, "아하, 주께서 우리 목사님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나를 사용하셨구나" 라고 하면서, 서로서로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영적인 사람의 사명이라는 말이다.
◈ 마지막 때 예수님을 이야기한다는 의미는?
그러니 지금 이 마지막 때에 예수님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다는 의미인데, 오직 영적인 사람만이 알아듣지 말이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우리가 공부하는 이 히브리서도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하는데, 우리 자신들도 말이다. 그런데 만약에 알아들을 수가 있다면, 그것은 영적인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명심하자는 것이다. 이 히브리서를 그렇게 해석을 해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한 예를 한가지 들어보면, 일단 2장 11절을 살펴보자.
(히 2:11)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 영적인 해석 - 항상, '예수님이 모두 하셨습니다' !!
여기서 이것을 육적으로 보면 얼마나 이해가 되지 않는지 알 수 있는데, 이 본문에서 예수님은 어떤 분인고 하니, 예수님을 거룩한 분이라는 데서 멈추면 안 되고, '거룩하게 하시는 분' 이라는 말이다. 즉 예수님의 주특기가 남을 거룩하게 만드는 분인데, 그런 예수님에게 "왜 나를 거룩하게 못합니까?" 라고 하면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분의 숙제이고 주특기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그렇게 하고자 마음을 먹은 상대방은 어떻게 되는가? 그 사람은 자기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거룩함을 입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어떻게 육적인 사람이 믿을 수가 있느냐는 말이다. 자기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런데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자기가 거룩하게 되어진다는 사실이 말이다.
그러니 자기가 무엇을 한 것이 아니라, "그렇지. 내가 아니지.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다 하셨지" 라는 사실이 믿어지는 사람이 바로 영적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영적인 사람인지 아닌지는 본인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에 가니 목사가 뭐라고 하는가? "여러분, 하나님이 이 목사를 보내서 여러분이 거룩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목사님, 잠시 저하고 이야기를 좀 합시다.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요즘 왜 그렇게 하십니까?" 라고 하면서, 선지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 그런 선지자 역할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즉 복음을 전하고 욕을 듣고 말이다.
◈ 히브리서는 영적인 사람만이 !!
사실 이 히브리서 전체의 내용이 다 그러한데, 영적인 사람이 아니라면 도저히 믿지 못할 내용으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이 히브리서의 내용을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가 받을 고난을 예수님께서 모두 받으셨다" 라는 것인데, 그것이 2장 18절에도 나오는데 말이다.
(히 2: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 이것을, 육적인 해석과 영적인 해석으로 해보면 !!
먼저 이것을 육적인 해석으로 해보면, 이렇게 육적인 해석을 먼저하고, 그 다음에 영적인 해석을 하면 좀 더 쉽게 이해가 되지 싶은데 말이다. 먼저 이 본문에 대한 육적인 해석은, 예수님이 그렇게 시험을 받고 고난을 당했기 때문에, 우리도 예수님처럼 고난을 받고 시험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을 일종의 모범으로 본다는 말이다.
하지만 영적인 해석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이 시험을 받고 고난을 받고 승리하셨기에, 그런데 그런 승리를 본인의 승리만으로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도 승리할 수 있도록 그런 능력을 베풀어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방은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데, 그런데 예수님에게서 나온 능력으로 넉넉히 이기도록 조치를 해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히브리서 뿐만이 아니라, 신구약 성경전체의 그 어느 부분을 설교하더라도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것은 예수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도 예수님처럼" 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에게서 나온 능력으로" 라고 말이다. 그렇게 오직 예수님의 능력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한결같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 목사님, 왜 목사들은 예수님 이야기를 싫어하지요?
* 질문 - 저도 신학교 교수님에게 그런 비슷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요. 저와 밥을 먹는데, 설교는 텍스트가 어떻게 컨텍스트가 어떻고 하면서 설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또 적용은 이렇게 하면 되는데, 요즘 신학생들이 설교를 제대로 못한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요즘 목사들도 공부를 하지 않아서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 질문 - 그래서 제가 그 소리를 다 듣고 나서, "아니 설교 마지막에 예수님이 나와야지, 왜 인간에게 듣기 좋은 소리가 나와야 합니까?" 라고 하니까, 지금까지 자기가 한 말이 수포로 돌아가니 저에게 짜증을 내더라구요. "그것은 기본이지" 라고 하면서 밥을 다시 먹던데 말입니다. 그런데 그 양반뿐만 아니라, 목사들은 다 그런 소리를 듣기 싫어하는 것 같더라구요.
그것은 바로 목사들이 자기가 이런 소리를 하면 얼마나 자기편이 생길지, 거기에 관심을 두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즉 자기 사람을 만들려고 말이다. 목사가 이렇게 얼마나 정치적인지, 물론 복음에 관심이 없어서 하는 짓들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쉬워 보이기도 하겠지만,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제 히브리서 3장 15절과 16절을 보자.
(히 3:15)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히 3:16)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여기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마음에 강퍅케 된 자가 있는가? 없는가? 물론 반드시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자기 숙제로 그대로 하시는데, 그래서 하나님은 이 말씀에 대해서 인간이 듣고 화를 내도록 유도를 하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한 육적인 해석이 무엇인고 하니,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 마음이 강퍅해지지 말고, 격노케 되지 말고, 오로지 그 말씀대로 순종하자" 라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육적인 해석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말씀에 대한 순종도 아니고 말이다.
◈ 말씀으로, 강퍅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구별 !!
그리고 여기에 대한 영적인 해석은,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는, 강퍅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구별해서 일하신다" 라고 하면, 그것은 곧 영적인 해석이 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자기 말씀을 던져서, 강퍅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구별하시는 쪽으로 일을 하신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강퍅치 않은 것을 두고서 '믿음'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 질문 - 아무튼 제가 그러한 이야기를 하면, "왜 너무 직설적으로 표현하는가? 은혜스럽지 못하다" 라고 하는데, 제가 가는 곳마다 그렇게 저를 잡아죽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라는 것과 같은 말인데 말입니다.
어디를 그렇게 돌아다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ㅋㅋ), 아무튼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그런 식으로 반응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상하다면 참으로 이상한 현상이고, 하지만 당연하다면 또 당연한 현상이라고 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제 히브리서 4장 3절을 보자.
(히 4:3)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 도다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
여기에 보면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라고 하는데, 즉 주께서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는 쪽으로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전에 맹세한 대로 말이다. 물론 믿음이 있는 사람은 들어오도록 일을 하시고 말이다. 이렇게 모든 것을 다 주님께서 하신다고 하는 것이 곧 영적인 해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육적인 해석은 무엇인고 하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지, 그렇지 않으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고 여기도록 하는 것이 곧 육적인 해석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 말씀에 있는 것처럼 그렇게 맹세한 대로, 즉 "너희들은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고 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러한 것을 보고서, 우리가 안식에 들어왔다고 하면 그것에 대해서 정말로 감사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이 안식에는 도저히 들어올 수 없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왔으니 말이다. 그러니 또 마지막에는 이렇게 모든 것이 다 예수님의 공로가 된다는 것이다.
◈ 아하, 역시 주님의 공로군요 !!
다시 말해서, "야, 믿음이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공로로 믿음이 생겼고, 그 믿음으로 안식에 들어가게 되었구나" 라고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또 감사하게 되는데, 그렇게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만 살펴보고 오늘은 마치겠는데, 히브리서 5장 1절과 2절을 보자.
(히 5:1)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히 5:2)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 대제사장도 무식하고 연약해 !!
이게 대제사장에 관한 이야기인데, 여기 2절에 보면, "저가 무식하고" 라고 하고, 또 "자기도 연약에 싸여"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대제사장들도 결코 하나님이 보시기에 거룩한 게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자기들은 거룩한 줄 알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육적인 생각이고 말이다. 그래서 연약에 싸여있다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대제사장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그것은 바로 '속죄제' 때문에 그러한데, 그것이 바로 뒤에 나오는데 말이다. 대제사장 본인은 이미 자기가 그래도 대제사장이기에 구원된 줄 착각을 했는데, 그런데 속죄제를 드리면서 "아하, 내가 이렇게 대제사장이라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구나" 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 속죄제로 인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히 5:3)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 바로 이 '속죄제' 때문에 !!
그러니 대제사장도 이렇게 구원을 받았다면, 나머지 백성들도 모두 다 이렇게 구원을 받을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속죄제가 누구인가?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속죄제를 드리는 행위자체로 인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즉 목사가 설교를 한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서 예수님을 믿어야지 말이다.
다시 말해서,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정말 구원을 받았는지 아닌지는 본인이 예수님의 공로가 믿어지는지 그렇지 않는지, 그것이 중요하지 말이다. 자기가 아무리 설교를 잘하고, 전도를 잘하고, 찬양을 잘해도, 그것으로 인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설교를 하면서 자기 무식함과 연약함이 !!
그렇다면 왜 설교를 하고, 전도를 하고, 또 찬양을 하는가? 그렇게 함으로서 자기가 얼마나 무식하고 연약한지, 바로 그것을 깨닫는다는 말이다. 즉 자기의 감추어진 죄성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구약의 대제사장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 히브리서 5장에서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렇게 하면서 또 누구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멜기세덱'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이 상당히 어려운데, 그래서 신앙의 초보들은(?) 잘 모른다고 한다는 말이다.
* 질문 - 멜기세덱이 바로 예수님이 아닌가요?
이 멜기세덱은 예수님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는 선지자라고 보면 되는데, 아무튼 이 히브리서 5장 10절 이하를 보면 이 멜기세덱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이다.
(히 5: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히 5:11)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히 5:12)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히 5:13)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저희는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히 5:14)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 멜기세덱 - 모든 육적인 족보로부터 해방된 자 !!
이 멜기세덱의 특징은 이 지상의 모든 육적인 족보로부터 해방된 자인데, 그래서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지상의 족보에서 벗어나야 하는가? 대제사장도 자기 엄마가 있고 아버지가 있는데, 그래서 대제사장도 연역할 수밖에는 없고 말이다. 왜냐하면, 자기 부모가 못났으니 자기도 당연히 못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멜기세덱은 어떠한가? 자기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는데, 그래서 그러한 연약함에서 초월할 수 있는 입장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초월해야 하는가? 그 문제는 너무나 어렵기 때문에 다음시간에 하도록 하고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육적인 저희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무엇이 영적인 것인지, 그래서 이런 모든 것이 다 예수님의 은혜이고, 그분의 능력으로 말미암아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니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러니 더 이상 우리의 자랑거리는 다 없어지게 하시고, 오직 주님의 공로만 드러내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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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목사님, 좀 엉뚱한 질문 같을지 몰라도, 목사직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성경에서 '목사' 라는 말은 없고, 그냥 '목자' 라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런데 지금 목사는 신학교를 나와야 되고, 그런 성경적인 지식과 라이센스를 취득해야만 한다고 하니 말입니다. 그러니 저 같이 목사가 아닌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그야말로 교회의 종교화를 부추기는 일로 여겨진다는 말입니다.
* 답변 - 옛날에 교회에 사제가 있었는데, 그 사제는 설교도 하지만, 사실 더 중요한 임무가 성례식을 행하는 것인데, 그것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기에 말이다. 그러니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구약의 제사장과 같은, 그런 사제가 있어서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또한 성도라고 하면 당연히 그 성례식에 참여해야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이 되고 말이다.
이러한 사제를 둔 것이 천주교인데, 그런데 여기에 반대해서 성례가 아닌 설교를 해야 한다고 나선 것이 개신교이고 말이다. 그래서 개신교는 성례식이 아닌 설교가 중심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설교가 강조되다보니, 이 설교는 반드시 목사가 해야 된다는 것이다.
즉 집사가 하면 설교가 아니고, 반드시 목사가 해야 설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또 천주교와 같은 전철을 밟게 되고 말이다.
하지만 이런 오류에 빠지더라도 왜 목사가 있어야 하는고 하니까, 교회라는 것도 기존의 행정체제를 갖추고 동일하게 움직여야하기 때문에, 즉 어른이 한 사람이 있으면 그 밑에 똘마니들이 여러 명이 있고 말이다. 그러한 그 당시 봉건주의 체제가 교회 안의 질서로 잡혀있었기 때문에, 물론 그런 것을 깡그리 무시하고 "모두가 목사이다" 라고 한 파도 있었는데, '재세례파' 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단으로 다 잡혀서 죽어버렸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 '사제' 라는 자리에 설교를 전문적으로 하는 목사를 집어넣었다고 보면 되는데, 그래야만 일반 대중들에게 납득이 된다는 것이다. 즉 "아하, 한 분밖에 없는 하나님께서 저 목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는구나" 라고 말이다. 그런데 아무나 다 설교를 해버리면, 교회가 혼란스러워서 전혀 질서유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런데 반드시 신학교를 졸업해야 목사가 되니, 그것을 두고서 어떻게 하나님이 주신 직분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것은 그렇게 여길 필요가 없고, 그냥 신학교라는 학원에서 양성을 했다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마치 구약시대에 선지자를 선지학교에서 양성한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아닌 사람들도 많이 있었고 말이다.
그리고 굳이 신학교를 나오지 않아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인 모임에서, 그렇게 해서 모인 여러 사람들 가운서 한 명을 뽑아서 설교를 듣고서는, "아하, 저 정도라면 우리에게 유익이 되겠다" 라고 하면, 그 사람을 목사로 세우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행정적으로 질서가 잡히면 또 신학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질문 - 하지만 그것이 인간적인 방법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 그것 말고는 딱히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런데 구약에서 보면 참으로 모자라고 부족한 사람들을 많이 들어섰는데, 그런데 지금은 보면 사업에 번창할 목적으로, 그런 똘똘한(?) 사람들만 골라서 목사로 만들지 않습니까?
물론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 중에는 어리석은 사람들도 있고, 또 엘리야나 이사야 같은 선지자들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목사들도 그렇게 똑똑하다고 볼 수는 없고 말이다(ㅋㅋ). 지금 집사님의 질문을 이렇게 하면 맞지 싶은데, "꼭 신학교를 나와야 주님이 인정하는 목사입니까?" 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저는 "아니요" 라고 대답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 것도 몰라도 목사가 될 수 있지 않습니까?" 라고 한다면, 그것은 또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 질문 - 제 말은 지금 기존의 목사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목사가 아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기존 신학교를 나와도 엉터리 목사가 있을 수가 있고, 또한 신학교를 나오지 않고 어느 특정한 공동체에서 목사로 세워도 역시 엉터리 목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기존 신학교 문제와는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말이다.
그런데 '하지'의 장로교 헌법에는 어떤 것이 있는고 하니까, 성도들이 목사를 세울 때 투표를 했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바로 성령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말이다. 즉 성령의 공동체가 다수로 목사로 인정할 때는 그 사람을 목사로 세워도 좋다고 정해놓았다는 것이다. 장로교 헌법에다 말이다. (로이즈 존스 목사가 그런 경우가 아닌가?)
그러면 여기서 문제점은 무엇인가? 그런 공동체에 문제가 있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다. 엉터리 목사에게 설교를 들을 수밖에 말이다. 그러니 현실적으로 "이렇게 해야 완벽한 주님의 종입니다" 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는데, 뭔가 신성한 것은 하나님에게 용납이 되지 않는데, 아까도 말했지만 하나님께서 다 자기 이름 뒤로 던져버린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런 것을 항상 흉내내기에 말이다.
그래서 주기철 목사를 흉내낸다고 하면 다 가짜이고, 또 손양원 목사를 흉내내어도 물론 다 가짜이고, 더욱이 이근호 목사를 흉내를 내어도 모두가 다 가짜이고 말이다. 인간은 이렇게 얼마든지 흉내는 낼 수가 있겠지만, 그러나 문제는 그런 것이 다 가짜라는 것이다.
* 질문 - 구약의 선지자는 다 그렇게 고난을 받았는데, 그런데 지금 목사는 왜 다들 그렇게 성공과 출세만 추구하는지 말입니다.
그것은 집사님이 그렇게 보아서 그러한데, 구약 때도 고생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러나 성공과 출세가도를 달린 선지자들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주님을 위해서 애매히 고난을 받는 주의 종들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목사가 아니라고 말이다. 물론 사기를 치는 놈들이 지금 집사님의 눈에 드러나게 보이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저는 '여자 목사'의 경우에도, 왜 그렇게 여자들이 목사가 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냥 주님의 종으로 복음을 전하면서 살면 되는데 말이다. 그런데 굳이 목사가 되겠다고 하는 것이 조금은 수상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 '목사' 라는 직분이 뭔가 좋아 보이기에 그런 주장을 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목사가 자기들 눈에 죽도록 고생하게 보였다고 하면, 그렇게 목사가 되려고 애를 쓰고 했겠느냐는 것이다.
* 질문 - 그런데 에베소서 4장 11절에 보면 '목사'가 나오지 않습니까?
그것은 '목자'의 의미인데, 뒤에 나오는 '교사'의 의미로 보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목자' 라고 하면 우리나라에서는 농부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아마 그대로 사용하기가 조금은 곤란하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아무튼 다 같은 의미라는 말이다.
(엡 4: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엡 4: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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