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구원론, 양자 본문
05 서울 경기(의존교회) 구원론, 양자 1-1
05. 12. 12 강의 이근호목사
오늘 이시간은 양자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교재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273페이지 양자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양자란 아들은 아들인데 정식 아들은 아닌 것입니다. 원래 출생은 아들이 아닌데 나중에 어떻게 하여서 아들의 신분이 된 자를 양자라고 합니다.
그러니 양자란 말에는 무엇이 포함되어 있는가 하면, 첫 번째는 아들?결단코 아니다. 절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며 될 수가 없다는 것이 명확하게 들어있습니다. 두 번째 들어있는 것은, 아들 아닌데 아들이라고 하였기에 이제는 이 아들의 신분, 아들 됨은 결단코 변할 수 없다. 이 두 가지가 양자됨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아들이 절대로 될 수 없는 자가 아들이 된 것은, 본인이 원한 것도 아니고 아들이 되고 싶은 마음도 없었는데 나중에 아들이 되었기에 이 아들의 신분 된 것에 대하여서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그 아들 됨의 신분은 확고하며 변하지 않는 것이 다 담겨있는 것이 양자라는 것입니다.
양자라는 말에 대하여 이렇게 말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자를 하나님의 아들이 될 때는 외부의 능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깥에 있는 어떤 분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 아들 됨에는 결단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양자됨이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다를 공부해보아야겠지요! 로마서 8:15절에 보면,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른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양자의 영을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왜 우리가 아들이 아닌가? 아들이 될 수 없는가 하는 그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 이유가 로마서 8장에 의하면, 옛날에 사람들은 집안에 아버지만 사는 것이 아들도 살고 딸도 삽니다. 집안에 아들딸만 사는 것이 아니라 그기에 종이나 노예들이 함께 살고 다른 식구도 함께 삽니다.
어린이 여러분들은 잘 모르겠지만 옛날의 한 집안에는 여러 식구가 살았어요! 목사님이 어릴 때에 집안의 식구가 13명이었습니다. 굉장히 많았지요! 왜 이렇게 많았는가 하면 자식을 많이 낳기도 하였지만 저희 할아버지가 좀 살았습니다. 촌에 있다가 도시에 와서 좀 잘 살게 되면, 촌에 있는 일가친척들이 가난한 자기 집의 식구들을 그 집에 자꾸 맡깁니다.
아이고, 아제요! 우리 아이 좀 맡아 주소! 형님요! 우리아이 식모살이해도 좋으니 밥이나 좀 먹여주소! 옛날에는 형제들이 많았어요. 여러분들은 형제들이 한두 명이지요! 그런데 옛날에는 낳았다 하면 서너 명이고 많은 집은 7명도 9명도 되었어요! 가난한데 아이들은 많으니 먹여 살릴 수가 없어서 좀 산다하는 집안에 맡겨서 허드레 일을 시키면서도 밥이나 먹고 잠이나 재워주면 된다고 맡긴 것입니다. 그래서 딸이면 나중에 커서 시집이나 가고 아들이면 공장에나 보내면 된다는 식으로 도시에 있는 친척들에게 그냥 맡긴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집에는 아버지와 아들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종은 아니지만 종 같은 분들이 많이 살고 있었어요! 그런데 아들이나 딸 같으면 나쁜 짓을 하게 될 때에 나무라면 아들딸이 그러면 나 아들딸 안할 거야! 그렇게 하여도 아니지 그래도 너는 내 아들이고 내 딸이야! 이미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태어났기에 어떤 잘못한 일이 있더라도 용서 해주고 계속 아들 되게 해 주는 것입니다.
만약에 종이나 노예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그때 어떻게 합니까? 네가 내 자식도 아닌데 이렇게 도와주고 있는데 네가 그럴 수가 있느냐? 법을 한번 따져보아라. 너는 법에 어긋났기에 너는 나가! 나는 너를 내 보내겠다. 법에 어긋났다고 내어 좇기는 것입니다. 이것을 종이라고 합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낳은 자식이고 그 속은 사랑이기에 아들과 딸이 잘못해도 용서 해주지만 노예들이나 일꾼들은 법에 어긋나면 그 법에 의하여 가차 없이 벌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종입니다.
지금까지 한 것이 너무 어려웠지요! 그래서 새로 하겠습니다. 양자라 하는 것은 어떤 요소 어떤 요소가 있다고 하였습니까? 양자라는 것에는 첫째로 절대로 아들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이 있었습니다. 야자는 누가 뭐래도 아들이 될 수가 없었다는 것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또 있지요! 뭐냐 하면, 일단 양자가 되고 나면 그 아들 됨의 신분은 어떤 경우에도 변한다? 변하지 아니한다? 어떤 경우에도 변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들 아닌 자를 아들 되게 한 그 외부 자가 아들 되게 하였기에, 그 분이 원해서 아들 만들었기에 이 양자 된 사람이 아들 되고 싶다고 되고 아들 되기 싫다고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무조건 하나님의 아들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첫 번째 두 번째 순서를 다 알아야 됩니다. 첫 번째 아들이 결단코 아들이 아닌 이유가 무언가 하면, 식구들 가운데 부모와 자식이 있지만 부모 자식 외에도 종과 노예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부모 자식 간에는 법이 없지만 종과 노예에게는 법이 있습니다. 이 법대로 안 지키면 모든 법을 지키지 아니하면 그 집에서 쫓겨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 때에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하면, 법대로 살면 아들이고 법대로 살지 아니하면 아들이 아니라고 하시기 위하여 법을 주신 것입니다. 법을 주니까 이 법을 지켜야 하는데 로마서 8장에 보니 육신에 속한 사람은 법을 지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법을 지킬 수가 없기에 저주 받는 종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 저희가 무서운 종, 무섭다는 말은 법대로 살지 아니하면 항상 벌이 떨어지는 그런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누가? 종들은 법대로 안하면 항상 매 맞을 준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린이 들 중에 여러분의 아버지가 학교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러분의 아버지가 여러분의 학교 선생님이라고 하면, 선생님이 숙제를 안 해 오면 벌 받는다고 매를 맞는다고 하면 다른 애들을 무서워요 그러는데 그 아들은 발 냄새나는 아버지, 술 먹고 늦게 오는 아버지, 아버지 다 알지 집에서도 안 때리는데 때릴 리가 있겠어! 하면서 웃을 거예요! 다른 아이들이 무섭지 그러면 하나도 무섭지 않다고 할 거예요!
이게 무어냐 하면 종은 무서운 영이고 아들은 사랑의 영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인간도 구약성경대로 아들이 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다 하면, 지금까지는 어린이 여러분들도 이해하기가 쉬웠을 텐데 지금부터는 어른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그런 이야기를 하겠어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사람들은 어떻게 들었는가 하면 아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주시고 그 아들을 인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구나! 하나님의 나라도 가족이 있구나! 이렇게들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라는 이 말씀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아버지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사람은 나 예수뿐이라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이 세상의 어느 인간도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성경 출애굽기 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 아들 삼기 위하여 출애굽 시켰다고 되어 있으니 자기들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은 자기들의 아버지인 줄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 오실 때 까지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구약성경만 가지고 있으면 언제든지 하나님 아버지를 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알기 때문에 당연히 자기들이 아버지의 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아버지를 아는 사람이란 아들밖에 없다고 여겼기에 그들은 안심 푹 놓고 그들은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향하여 너희의 아버지는 마귀라고 하였습니다. 악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만 해당됩니까? 모든 사람들에게 다 해당되는 말씀입니까? 모든 사람들에게 다 해당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악마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뭐든지 신성함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온 뒤로 무언가 신성한 것, 무언가 거룩하고 신성한 것을 이 자연세계에서 계속하여 찾아왔습니다. 어떤 계시, 꿈, 위대한 조상, 위대한 기적, 장소, 위대한 산, 효과 있는 산, 어떤 성막기구, 모세의 지팡이, 그리고 언약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서 신성한 것에 대하여 접촉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신성시 하고 그런 것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아브라함 이전에 셈과 함과 야벳이 이 땅을 통제할 때에 사람들은 바벨탑을 만들었습니다. 그 바벨탑은 그 당시에 최고의 신성한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인간들은 계속하여 신에 가까운 것을 만들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던 산 그 산이 무슨 산이죠? 시내 산이죠! 그 시내 산이 신성합니까? 거룩한 곳입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시내산 꼭대기까지 관광버스가 갑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시내산에 하나님께서 한번 오셨다고 해서 함부로 가면 안 되고, 자꾸만 무언가 특이하다 싶으면 신성시 하는 것입니다.
한국에 옛날 기독교가 오기 전에 1884년 아펜셀러와 언더우더가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들어오기 이전에 옛날 할머니들은 꼬부라진 그냥 밋밋한 나무가 아니라 꼬부라진 느티나무라든지, 아주 괴괴하게 생긴 바위덩어리라든지, 서쪽 하늘에 떠오르는 샛별, 그리고 자다가 꾼 희귀한 꿈, 그런 것들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였습니다.
만약에 비가 오지 않으면 그런 나무에 새끼줄을 쳐서 모든 사람들이 사물놀이도 하고 무당 불러서 굿도 하고 그렇게 신을 달래서 비가 오게 하려고 요청을 하고, 그리고 팥죽을 만드는데도 귀신이 끼이면 안 되고, 이사를 하는데도 귀신이 끼이면 안 되고, 결혼을 하는데도 날 받아야 되고, 전부다 사람들은 신성함에서 벗어날 생각을 안했습니다. 신성함이 없으면 허전해요!
축구시합을 하는 선수들도 안정환 같으면 무엇을 달고, 이천수 같으면 손을 안 씻는다든지, 박지성은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어떤 사람은 손톱을 깍지 않는다든지 하면서 그런 것을 부적처럼 무언가 옆에 두어야 비로소 자기가 안심을 하는 것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들의 버릇이었습니다.
신성한 것을 찾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슨 신성한 것들을 찾는가 하면, 요단강을 건너온 것, 홍해를 건너 온 것,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 언약궤, 이런 모든 것들을 신성하게 본 것입니다. 거룩하게 본 것입니다. 그런 것을 소지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그 자체가 누가 뭐래도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외치며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한 예가 있는데 날이 따듯하고 하니 잠이 오지요! 성경 한번 찾아봅시다. 사사기 8:22-27절까지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22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23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24 기드온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청구하노니 너희는 각기 탈취한 귀고리를 내게 줄찌니라 하니 그 대적은 이스마엘 사람이므로 금 귀고리가 있었음이라 25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가 즐거이 드리리이다 하고 겉옷을 펴고 각기 탈취한 귀고리를 그 가운데 던지니 26 기드온의 청한바 금 귀고리 중수가 금 일천 칠백 세겔이요 그 외에 또 새 달 형상의 장식과 패물과 미디안 왕들의 입었던 자색 의복과 그 약대 목에 둘렀던 사슬이 있었더라 27 기드온이 그 금으로 에봇 하나를 만들어서 자기의 성읍 오브라에 두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 집에 올무가 되니라”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승리하게 되니 사람들은 기드온을 신성시 하고 그 가문을 신성시 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기 기드온 가정에만 임하는 줄 착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에봇을 만들고 그 거룩한 옷을 만들기 위하여 금귀고리 패물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에서 하나님의 어떤 힘이 솟아나는 것처럼, 신기한 능력이 나오는 것처럼 그것을 음란하게 섬겼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아들답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이것은 인간들이 전혀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고, 그것은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한 악마적인 본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본다고 해서 여러분 속에 있는 악마적인 본성이 사거라 들 거라고 생각하신다면 엄청난 오산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경책이 아니라 꿈에 예수님이 나타나신다고 하여도 사람들은 그 예수를 보고서 사람들은 자기 속에 있는 악마적인 속성을 유감없이 멋들어지게 발휘하는 것입니다. 신성한 것은 없습니다. 없는데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아십니까? 십자가는 모든 신성한 것들을 자근자근 아예 박살을 내는 사건이 십자가 사건인 것입니다. 주님은 말도 다 할 수 없이 초라하셨습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십자가 믿고 천당 갈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믿고 천당 간다면 마치 십자가가 신성시 되고 십자가가 기드온의 에봇과 같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가수들이 십자가 목걸이 하고 있고 차안에 십자가 달랑달랑 걸어놓는다고 해서 효과 보는 것 아닙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십자가조차 신성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사람들은 신성한 것들을 찾으려고 하지 말고 아예 내 쪽에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마음을 다잡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을 알다니! 그 자체가 사기이며 나답지 않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모릅니다.
그때그때 마다 하나님께서 알게 해주셔야지! 어떤 지식 하나 확보하였다고 그것 가지고 계속 세 차례 네 차례 우려먹고, 작년에 은혜 받은 것 올해까지 써먹고, 1월 달에 은혜 받은 것 12월 크리스마스 까지 써먹고, 그 사람이 하나님을 압니까? 이미 내부에서 신성시 된,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가짜배기 하나님 상이 굳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런 쓰레기는 아침마다 오는 쓰레기 치우는 차에 버리시기 바랍니다. 한달에 3천원주면 시에서 와서 쓰레기 비웁니다.
생각한번 해 보세요! 주님을 우리로 하여금 매일같이 죽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는 그것 가지고 살려고 버티고 있으니 어떻게 그것이 주님의 뜻과 같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야! 이근호, 너 뭐 아냐? 압니다. 너 죽어야겠구나! 너 뭐 좀 아니까 내 더 이상 필요 없네! 예 이 정도 알았으니 이제 주님이 필요 없습니다. 알아서 그러면 너 혼자 천당가봐! 그러면 지옥 갈 거야!
어이 이근호 너 뭐 좀 아냐? 제가 무엇을 알겠습니까? 주님께서 알려 주어야 알지요! 그러면 아직도 날 필요하나? 아직도 주님 없이는 안 되지요! 아직도 만이 아니라 지금도 주님이시고, 내일도 주님이어야 합니다. 그러고 싶습니다.
사람이 무언가 신성한 것을 잡겠다는 것은 그것이 신성한 것이 아닙니다. 이 자연세계는 신성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왜? 변명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 비타 500이 있습니다. 신성하지 않습니다. 이것 마셔버릴까? 신성하지 않습니다. 어떤 것도 신성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신성하게 본다는 것은 내 속에 진짜 예수님을 거역하는 진짜 예수님을 대적하는 어떤 요소가 들어있기에 우리는 자꾸만 자연 세계 속에서 신성한 것을 하나 붙잡고 고정시키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너희 아비는 악마이며 너희는 악마의 자식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서기 200-300년 사이에 그 당시 교회는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 모으기 위하여 교회에 여러 가지 신성한 용품들을 끌어 모으면서 그 항목이 늘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촛불을 켜면 그 촛불이 신성한 것, 강대상도 신성한 것, 심지어 그런 물품만이 아니라 스케줄도 신성하게 만들었습니다. 11시 예배의 신성함, 그 다음 기도순서도 신성함, 예배순서도 신성하고 계속하여 신성한 것을 끄집어내는데 심지어 병자에게 뿌려준다는 물까지 신성하게 여겼습니다. 그것 조사해보세요! H2O 물밖에 없습니다.
거기다가 서기 500년이 되면 어떤 떡을 가지고 그 떡이 신성하다는 것입니다. 그 떡을 뭐라고 하는가 하면 자발적으로 활동한다고 한 것입니다. 성례식에 사용한 떡과 잔은 마치 귀신처럼 저 혼자서 돌아다니면서 활동한 다는 것입니다. 그 떡과 포도주가 돌아다니면서 다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사사시대에 언약궤가 블레셋에서 적을 물리치고 돌아오는 것처럼, 그 뒤에 보면 성례식 하는 그 물도 신성한 물이라는 것입니다. 보통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냥 물로 있을 때는 물이지만 신부가 뿌리면 신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자꾸만 신성한 것들을 만들어 내는가 하면, 사람들이 교회에 올 때에 자기가 지옥 안가고 천당 가고 싶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싶어서, 신성한 것에 접촉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신부도 신성하고 목사도 신성하고, 나중에는 예배당 자체도 신성하고, 그 예배당의 벽돌 하나하나가 다 신성하고, 예배당의 샹데리아가 가게에 있으면 안 신성하지만 예배당이 들어오면 신성하고, 여기도 신성한 것이 세 개 있네요! 형광등도 신성하고 선풍기도 신성하고 에어컨도 신성하고, 저것은 무엇입니까? 온풍기도 신성하고, 심지어 쓰는 목사님이 쓰는 안경도 신성하고 여러분이 쓰면 안 신성하고 목사가 쓰면 신성하고,,,,
진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성령이 왔다면, 십자가 사건을 아신다면, 이 자연세계에 신성한 것은 이미 박살났다는 그런 인식을 평생 여러분들이 간직해야 합니다.
다시 이야기 합니다. 사람들이 신성한 것을 만들고자 하고 찾고자 하는 이유는 자신이 자기 힘으로 자기 인식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미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뒤에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해당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은밀하게 곱게 자기 아들만을 감추어놓고서는, 앞서서 율법을 던져놓고서 하나님의 아들도 아닌 자들이 내가 던져준 율법을 가지고 얼마나 하나님의 아들 되고 싶어서 환장하고 있는지를 똑똑하게 보게 하시고서는 마지막 때에 숨겨놓은 진짜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한 것입니다.
여호와 섬기고 십일조 하고 구제하고 종교적인 행사를 다 하는 너희들의 그 짓들이 너희 아비 마귀에게 배운 짓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자연물을 가지고 신성한 것으로 변모시키고자 하는 그들의 악마적인 품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증거물로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회개하세요! 여러분 속에 신성한 것을 따로 숨겨 놓았다면 회개하세요! 회개하라는 말을 몇 십 년 만에 처음 씁니다. 부흥사도 아니고, 안 쓰려고 하는데, 너나 잘하세요! 할까봐서, 진짜 회개하세요! 여러분의 기도 시간이 신성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이 성경 읽은 것을 신성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여튼 이 자연물 속에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신성하다고 따로 분류한 것이 있다면 회개하세요! 그것이 다 여러분 속에 마귀가 만든 장난들 이었습니다.
몇 년 전에 은혜 받은 것을 신성시 여기고 있다면 그것 회개하여야 합니다. 지금도 날마다 햇빛과 공기를 주시고 지금도 별을 아름답게 빛나게 하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신성한 것이 아니고, 몇 년 전에 은혜 받은 것 그것을 신성하게 여긴다면 여러분들은 그것 회개하여야 합니다.
서기 400년이 지나면 일년 카렌다 자체가 신성합니다. 동그라미 친 날이 왜 그렇게 많은지! 성 베드로 돌아가신 날, 그냥 바울이 아니라 성 바울 죽었던 무덤을 신성시 하지 않나! 그 무덤에서 샘이 나왔는데 그 물을 찍어 바르면 병자가 낫는다는 그런 기적을 만들지 않나, 성 바돌로메 축제, 마리아 생신날, 부활절 무슨 날, 맥추 감사 주일날, 추수 감사주일날, 일년 스케줄에 얼마나 동그라미 쳐진 날이 많은지,,,,
교회가 그럴 때에 민중들은 교회가 시키는 대로 하면 자기도 신부님처럼 하나님의 아들 되는 줄 알고 지켰습니다. 그런데 그 달력에 동그라미 쳐진 그 수많은 날들이 오딘, 게르만 민족의 자기 토속신들 영토의 신들의 탄생일들 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게르만 족의 신들은 어디서 나왔는가하면 별의 이동을 따라서 별이 뜨고 지는 것에 따라 태어나고 지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도 마찬가지 12월 25일 태양신을 섬기던 날입니다.
그런 것들이 교회에 수입된 것입니다. 왜 수입이 되었습니까? 교회의 목적은 사람 끌어 모으는데 있습니다. 넓은 지역에서 무언가 신적인 요소가 있다면 그것도 신적인 것이 잠재되어 있는 것이기에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명칭만 바꾸라는 것입니다. 명칭만 바꾸고 세례만 받으면 다 기독교식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해서 로마 제국은 전 국토의 신자화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주일 낮 11시에는 주님이 오시고, 수요일 저녁은 천사가 대리로 옵니까? 목사님은 안 그렇겠지만 일반 교인들은 수요일을 약간은 시시하게 보지요! 그리고 주일날은 사람들이 꼭 지키려고 그것도 양복입고 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그것은 간단한 심리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고스톱을 쳐도 판이 크면 구경꾼이 많습니다. 그런데 세 명이 치다가 한 사람이 빠져 버리면 재미가 없어 치우라고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몰라요! 얼마나 신성한 것을 찾고자 하는지 그 종교성을 본인은 몰라요! 다만 자기 속에 신성한 것이 있다면 대견스럽게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내가 신을 아는 구나!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마귀가 만들어 낸 것인 줄을 모르고 20세기에 들어가면 유명한 신학자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 두 사람은 신 정통주의에 속한 한 사람인 부루너가 있고, 또 한 사람은 보수주의 곱하기 근본주의 할 만큼 보주적인 코넬리우스 벤틸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이 무언가 하면 접촉점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런데 칼 바르트는 신자와 비신자 간에 접촉점이 전혀 없다고 하는 반면에 부루너와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아브라함 카이퍼라는 사람 19말과-20세기 초의 네덜란드의 개혁주의자입니다. 이 아브라함 카이퍼의 이론은 고신측의 정통 이론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아브라함 카이퍼의 제자가 누구인가 하면, 헤르만 바빙크입니다. 벤틸의 스승은 메이첸, 메이첸의 스승은 워필드, 워필드의 스승은 하지, 하지의 스승은 조나단 에드워드, 조나단 에드워드의 스승은 툴레티, 툴레티의 스승은 칼빈 이렇게 족보가 나옵니다.
그런데 칼 바르트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간에는 어떤 접촉점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왜 전도하는가? 전도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 하는 그것이지 그 증거를 접촉점으로 보면 안 된다. 십자가가 그것을 보여 주었다고 하는 반면에 이 부르너라는 사람과 아브라함 카이퍼라는 사람은 일반 은총을 이야기 합니다.
일반은총이 무엇이냐 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기 전부터 인간은 그 전에 다른 것을 받았는데 그것이 일반은총이라는 것입니다. 아담이 비록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도 가정을 만들고 사회를 만들고 열심히 일해서 빵이 생기니 이렇게 빵이 생기는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본 것입니다.
이렇게 일반은총을 이야기함으로 접촉점을 이야기 하는 코넬리우스 벤틸 같은 사람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면, 모든 인간이 신을 알고 있다는 것을 접촉점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시고 그 하나님 아래서 벗어날 수 없기에 인간이 어떤 신적인 존재를 안다는 접촉점을 말한 것입니다. 그런 접촉점이라는 종교성에 복음을 입혀버리면 그들이 예수를 믿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이런 접촉점을 주장하고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벌을 내리는 것은, 적극적으로 벌을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하다 하다가 안 되니 진짜 못된 놈만 골라서 벌을 내린다는, 하나님께서는 벌주는 것을 굉장히 소극적으로 하신다고 보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자비로운 분이기 때문에 지옥을 만들어 놓았지만 될 수 있는 대로 지옥에 오지 마라는 쪽으로 사람들에게 사랑과 은총과 자비를 베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옥을 만들어 놓고도 여기에는 오지 말라고 당부를 하는데 그 당부마저 거절하는 그런 못된 놈은 집어넣어도 자기 책임으로 물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처음에 만든 그 인간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인간이라는 쓰레기 더미로 보면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하나님이 요구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 자체가 쓰레기 더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면 대충 의인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진짜입니다. 의인은 없습니다.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욕 얻어먹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자기 빼 놓고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넣기 때문에 예수님이 욕 얻어먹은 것입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바나바를 원할 정도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나쁜 인식을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좋아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신성시 되었다면 누가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은 절대로 신성한 것을 용납하지 아니하고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같이 죽자, 자기 목숨을 얻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고자 하면 얻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얻고자 예수님을 따른다면 잃어버린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죽자. 예수님을 위하여 죽는 자 만이 산다고 했을 때에 그 말이 십자가 앞에서 어느 누구도 지킨 자가 없고 심지어 수제자 베드로조차 도망을 다 간 것입니다.
모든 것이 헛방입니다. 예수님을 믿었던 3년 세월이 허구로 헛방으로 빈털터리로 다 날아간 것입니다. 그것이 후회스럽습니까? 그것이 무엇이냐? 예수님을 믿으면서 무언가 기대한 것이 있었다면 그 기대한 것이 나빴습니다. 내가 예수님 앞에 의롭기를 바랐다면 그것이 나빴습니다. 그것이 또 하나의 신성시였습니다.
분명히 구원이라는 것은 죄인을 예수님 쪽에서 나오는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구원하여 주면되는데 그것이 아니라 무언가 내 쪽에서 기대한 것이 있으면 기대한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다고 여기는 이러한 계산, 통박, 그것마저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마저 욕 얻어먹을 신성한 것입니다.
지난주에 한 것인데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정답인지 여러분이 한번 답변해보세요! 어떤 사람은 칭의, 의로움에 대하여 예수님의 의가 우리 속에 주입되어서 그 주입된 의로서 우리가 의로운 행동을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칭의로 본 것입니다. 다시 말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의가 전적인 죄인 인 우리에게 주입이 되어서, 주입이란 주사기로 몸 안에 밀어 넣듯이 주입이 되어서 그 의가 우리 안에 있어서 그 의로 말미암아 의로운 행동이 나온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는 계속 죄인 인데, 의가 우리에게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주지 않고 의인으로 간주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둘 중에 어느 것이 맞습니까? 1번 2번 어느 것이 맞습니까? 3번 둘 다 틀렸다. 몇 번입니까? 3번이 수상하지요!
1번이 성화론입니다. 칭의 다음에 성화라는 것입니다. 칭의 된 사람은 그 다음부터 율대로 살수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대로 산다는 것은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사랑을 요구하기에 사랑을 보여 줄 수 있다는 것이 성화의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2번은 어떤 죄인이라도 의인이라고 간주하여 준다는 이 사고방식은 성경적 사고방식이 아니고 구원에 관심을 깊이 가지기 때문에, 마치 칭의가 구원에 관계되는 것처럼 생각하기에 이런 생각이 나오는 것입니다. 나 어떻게 구원받지? 의롭다고 간주하여 주면 구원 얻는구나! 야 신난다. 이런 식입니다. 둘 다 틀렸습니다.
세 번째가 무어냐 하면 주입도 아니고 간주도 아니고 주님께서 우리를 삼켜 버리지요! 주님의 의가 우리를 삼켜 버리는 것입니다. 그 순간부터 우리는 뭐가 되는가 하면 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 의는 우리가 착하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와 은혜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한달 전에 이야기 하지 않았던가요? 이것은 세 번째 이야기 하였습니다. 이것은 통치 개념입니다. 지배하는 것입니다. 통치하고 지배하는 것입니다. 야! 구원 받았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제는 주님에게서 못 벗어나게 되었구나! 그런 뜻입니다.
칭의 라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삼켜 버려서 심지어 우리 목숨까지 삼켜버린 것입니다. 너는 이미 죽었고 너 안에 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산다. 삼키는 것입니다. 왜 3번에 대한 이야기를 저번에 하고서도 이번에 빼놓고 이야기 하였는가 하면, 칭의 라는 이 이야기 자체를 자기 구원론에 집어넣어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잘 들어보세요! 이번시간 제일 중요한 대목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의롭게 하시는 이 칭의가 자기 자신을 신성화 하는 그 버릇을 또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칭의가 왔기에 나는 너와 달라. 나는 하나님의 아들로 신성해 하면서 자신을 신성화 하는데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양자일 뿐입니다.
양자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었다는 내말을 알고 있는 사람이 진짜 양자입니다. 우리의 아비가 마귀였는데 지금은 아버지가 바뀌어서 하나님이 아버지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나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절대로 나는 아버지를 알 수가 없었는데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예수님 안에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알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양자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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