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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6강 / 요한계시록 5장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계시록

6강 / 요한계시록 5장

정인순 2011. 1. 1. 12:10

101104 하나교회 요한계시록 6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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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101104a계시록6강a

2010-11-12 22:27:59 녹취 : 이한례


하나교회101104요한계시록-6강a-(이 근호 목사님)

제 6강a

1분전인데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5장부터 할 차례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둘로 나눠져 있어요. 이 지상의 사람들, 스스로 살아있다고 여기죠. 근데 위에서 볼 때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죽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꼼지락거리고 움직여도 이 세상 전체가 죽은 세상이기 때문에, 죽은 세상에서의 존재하는 그러한 사람들은 곧 죽을 거니까, 너는 살았다 이름 하나 결국은 죽을 거니까, 이 사람들은 다 죽은 자로 간주가 되는 겁니다. 여기서 잠간 정리하고 넘어가죠.

선악과 입장에서 삶과 죽음하고,(한 윤범 목사님이 조금 늦으신 관계로 앞부분 다시 설명하심) 위에서 이야기하는 삶과 죽음의 개념이 달라요. 위의 세상에서 사는 게 뭐냐 죽음이 뭐냐 하는 개념하고 밑에서 사는 게 뭐냐 죽음이 뭐냐 개념이 달라요. 밑에서 나온 개념은 선악과 개념에서 나온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 따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죠?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보고,  어! 우리 같으면 따먹는 그 순간 어! 숨이 막힌다거나 졸도하거나 쓰러져야 죽는 것인데, ‘거봐 안 죽었잖아,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죽는다고 한 건 공갈  치는 게 아닌가? 그냥 협박조로 하신 게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는데, 선악과 따먹은 자체가 이미 이것은 어떤 관점에서 보냐 하면, 생명나무 열매를 먹지 못하기 때문에 죽은 겁니다.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그담에 뭐를 차단시켰습니까? 생명나무 가는 길을 차단시켰죠?

그러면 쉽게 말해서 ‘니들이 생명을 알아?’ ‘몰라요.’ ‘그러면 좋은 거야.‘ 예, 그러면 좋은 거예요. ’전 아직 목숨이 붙어 있습니다. 이렇게 팔팔 합니다. 안 아픕니다.‘ 이러면 ’그거는 너 관점이고, 현재 이웃하는 다른 인간들 관점이고, 인간들 관점 아무리 공통점 끄집어내봐야 결국 추구하는 것은 뭐냐? 선악적으로 추구하기 때문에, 이런 관점에 갇혀 있는 이상은 이렇게 해봐야 죽은 거예요. 정말 내가 죽었느냐, 살았느냐, 살았느냐, 죽었느냐 하는 것은 위쪽에 계시는 분, 생명나무 쪽에서 오셔서 대조를 해봐야 됩니다.

쉬운 이야기 할게요. 보통 우리가 교회에서 착하다 하잖아요? ‘참 착해, 테레사 수녀는 착해, 뭐 어떻고, 어떻고 착해. 그러면 진짜 착하신 분, 예수님하고 대조를 해 봅시다. 착합니까? 안착하죠? 거룩이 아니죠? 그렇다면 그건 거룩이 아니에요. 하늘나라는 일말의 흠이라도 있으면, 못 갑니다. 하나의 흠이 있고 하나의 법을 평생 동안 하나의 법을 어겨버리면, 그것은 모든 걸 어긴 게 돼요. 그래서 위의 나라 천국에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근데 이 밑에 사람들이 뭐를 만들어 놨습니까? 교회를 만들어 놓았죠? 교회를 만들어 놨으니까 교회는 어디에 속합니까? 죽은 세상에 속한 교회죠. 그러면 교회 안에서 착하다 안착하다, 하는 것은 어느 관점에서? 선악적인 관점에서 착하다 안착하다 하니까, 여기서 착하나 안착하나 별 의미가 없는 겁니다. 더 알기 쉽게 말해서 지상에서 인간과 인간들끼리 대비하는, 테레사 수녀하고 저하고 대비하는 것, 고런 대비나 게임은 하나님께서 일체 인정을 안 해줘요.

보스턴이라는 시에서 정기적으로 보스턴 마라톤대회 하잖아요? 그러면 1등이 있을 거고 2등도 있죠? 고거 하늘나라에서 알아줍니까? ‘아이고, 훌륭하다, 니가 마라톤 1등 하다니...’ 또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하죠? 그거 하늘나라가 인정합니까? 인정 안하죠? 세상에서 잘 사는 사람 있고, 가난한 사람 있더라도, 그에 대한 차이, 우열, 이런 경쟁시합, 이것은 일체 하나님께서 허용한 적도 없고 그걸 인정한 적이 없어요. 인간들과 인간들이 겨루는 것, 그건 자기 취미에 해당되는데, 그 취미에 주님은 전혀 동조할 마음이 없습니다.

이렇게나 저렇게나 그건 죽은 자가 죽은 자와 시합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체 무가치해요. 도토리 키 재기라는 말이 있잖아요? 고슴도치가 서로 인물 자랑 해봐도 사람한테는 안 먹히잖아요? 똑같아요. 더러운 끼리 누가 덜 더럽고 누가 더 더럽다는 차이는 생명나무를 먹지 않은 이상은 똑같이 죽은 자와 죽은 자의 대비에 해당합니다. 시체도 때깔 좋은 시체가 있다는 말을 알지만....ㅎ 어차피 시체에 불과하죠.

제가 부산서 강의하면서 이런 이야기 했습니다. 사람을 천명을 모아놓고 냄새를 맡아봐도 개 한 마리 보다 못하다. 왜 그러냐 하면, 사람은 개가 아니니까, 냄새 맡는 것은 개가 사람보다 훨씬 낫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예배당에 교인이 천명, 만 명 웅성거리고 나와 봤자 생명나무 모르면, 그거는 똑같이 밑에서 노는 존재기 때문에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러 오셨지, 우리끼리 시합 붙여서 다른 사람 앞에 ‘내가 승리자야. 우리끼리 시합해서 우리끼리 게임해서, ’그래 너는 큰 교회 목회 했으니까 천당 가,‘ 이런 식으로 손 들어주려 한 건 아닙니다.

자 그렇다면 제가 지금까지 한 이야기가 성경적으로 맞으려면, 이 죽은 세상 위와 아래, 위의 세상이 따로 있을 경우에는 제 말이 맞습니다. 만약에 위의 세상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들끼리 경쟁해야 되고, 우리들끼리 누가 잘났냐 해야 됩니다. 그리고 설사 위의 것이 있다 하더라도 위의 기준과 아래 기준이 ‘연속성’을 가지고(벌써 어려운 것 나옵니다. 연속성) 이쪽에 통하는 원칙이 저쪽의 원칙과 통할 것 같으면, 제 말은 틀린 거죠.

근데 제가 이야기한 것은 위의 원칙과 아래의 원칙이 같다고 했습니까? 다르다고 했습니까? 다르다고 이야기 했죠. 다르니까 이 원칙 따라서 잘됐니, 성공 했니, 출세했니. 하는 것은 위의 나라에서는 통하지 않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이쯤 이야기 하면 궁금한 게 뭐냐면, 그러면 도대체 위의 법칙이 뭐란 말인가? ‘성질 돋우지 말고 딱 이야기 해봐? 위의 법칙이 뭐야?’ 하면,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요한계시록 5장이 짧은데 내용에 쭉 보면,  사람들이 되게 좋아하고 기뻐하고 찬양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 찬양하는 이유가 나와요.

이유가 뭐냐? “일찍 죽임을 당하사, 자기 피로(9절입니다)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하나님께 드리시고,” 돼 있죠? 그리고 12절에 보면,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이래 돼 있죠? 그럼 여기서 사람들이 위에 천국에 이미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좋다고, 좋다고 찬양하고 노래를 해대는 그 이유가 있더란 말이죠. 이유가 뭐였던가요? 5장에 보니까, “죽임을 당했다.” 죽임을 당하면 거기서 뭐가 나옵니까? 피가 나오죠? 그 피로 적신 사람은 어디 간다? 천국에 가야죠. 이것은 지상에서의 시합이나 게임하고는 일치가 됩니까? 안됩니까? 일치가 안 되죠.

여기에 죽임을 당했다는 겁니다. 아 대목부터 보겠습니다. 죽임을 당했다. 예수님을 죽인 자가 누구죠? 보통 사람들이죠? 우리 인간들이죠? 개가 물어 죽인 것은 아니잖아요? 사람이 죽였죠? 그러면 사람이 개라면, 주님은 사람이라는 개한테 물려 죽은 게 되죠? 그렇잖아요? 그래서 피를 흘렸잖아요? 그렇다면 우리도 사람한테 물려야 됩니다...ㅎ 사람이란 개, 또는 다른 말로 개 같은 인간한테. 고게 기준 이예요. 이 땅에서 통하는 천국의 기준입니다.

이 땅에서는  그걸 모르고 뭐냐 하면, 착하다 훌륭하다 고상하다 거룩하다 능력 있네. 부자 됐네. 똑똑하네, 그런 걸 기준으로 보는데, 그런 기준이 예수님이 없기 때문에 인간은 그 예수를 꽉 물어 버려요. ‘너는 그런 재주도 기준도 없으면서 너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어디서 이렇게 사기를 치고 있어? 이게? 우리가 말씀의 도사인데, 예수님 돌아가실 때 주동한 사람이 누굽니까? 말씀의 도사들이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이죠. 그 사람들이 주동이 되어서 민중들이 동조했잖아요?

우리가 기대하는 메시야도 아닌 주제에 기존에 안 맞는 메시야임에도 불구하고, 너는 자칭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란 그 말을 주장했다는 이유 때문에 개 같은 인간에게 물려죽은 거예요. 그런 겁니다. 더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교회에서 ‘예수님의 피로 구원 받습니다.’ 하면, 물려죽습니다. 물려 죽어요. 왜냐 하면, 교인들이 교회에서 문 열고 딱 나올 때,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자기한테 미흡하기 때문에 그걸 신의 이름으로 채우기 위해서 그걸 보완하기 위해서 왔는데, ‘여러분 그 기준은 소용없는 헛짓하는 기준입니다. 라고 말하고, 그 기준은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기준이 아닙니다, 했을 때 그 때는 개 같이 달려들어서 물어버립니다.

방금 제가 무슨 이야기 했던가요? 방금 뭐가 안 된다 했습니까? 이러이러한 것은 뭐가 안 된다? 하나님의 영광이 안 된다 했죠? 그런데 사람들은 교회 문 열고 들어올 때, 하나님의 영광 생각합니까? 아니면 누구영광을 생각하죠? 자기 영광 자기체면, 자기위신 생각하죠? 자기 영광을 생각하는 사람이 자기 영광을 더 얻기 위해서 더 더 얻어서 남한테 꿀리지 않기 위해서 온 사람에게, 제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 있습니까? 물으면 그 사람은 화내죠. 그 사람 뿔따구 냅니다. 성냅니다.

사람들의 생각은 이래요. 우선 내 몸부터 챙길 건 챙겨놓고, 이쯤 했으면 나도 꿀리지 않는다는 내 영광 챙겼다 생각할 때, 남아도는 그 여분의 짜투리 그거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에 매진하게 되죠. 예, 저는 점쟁입니다. 쪽 집겝니다.,,ㅎ 100%입니다. 하루 밥도 못 먹는데 무슨 교회를 나와? 저 많이 들었거든요. 때 끼도 없는데 무슨 힘으로 교회 나오나? 많이 들었어요. 앞으로 또 들을 거고.

하나님의 영광이냐 아니냐를, 사람들이 정말 잘못 된 게 뭐냐 하면, 영광이냐 아니냐의 기준을 자기 영광보다 더 우수한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그렇게 너무 성급하게 결정하고 말았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성경에 다윗이 성전을 짓게 된 동기가 뭐냐 하면, 자기가 너무 잘 살거든요. 자기는 백향목 집에 거하니까 미안하드란 말이죠. 나는 백향목 집에 거하시고 우리나라를 승리케 하신 하나님은 들판에 천막 밑에서, 야전 천막 밑에서 이슬을 맡고 있으니 미안해가지고, ‘하나님 제가 멋들어진 성전 지어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뭐라 했습니까? ‘나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곳에는 절대 거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성전 따로 있다.’ 그게 뭡니까? ‘나는 너같이 식언 없고, 너밖에 모르는 너 입장만 생각해서 거기다가 추구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되리라고 오해하는 너 같은 인간들 그 잘못 속에 내가 희생 제물로 들어가서 그 추잡한 더러운 죄인을 품고 그래서 그걸 나는 거룩한 성전이라 일컫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과정이 어떻게 돼요? 성전 만드는 순서가 필히 무슨 순서가 남아 있게 되느냐 하면, 인간이 손으로 지은 성전, 그걸 하나님의 성전이라 우겼던 그것, 그것이 처참하게 망가져서, ‘아! 우리가 뭔가 성전에 대해서 오해했구나. 하나님을 우습게 여겼구나. 사람의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흩트렸구나. 라는 것을 심도 있게 그걸 온 몸으로 절실하게 깨닫고 난 뒤에, 그럴 때 그런 사람 뽑아서 두 번 다시 손으로 지은 성전을 성전이라 우기지 않는 그런 죄인 속에 성령 오셔서 성전 되게 하시는 겁니다.

그 절차가 다윗 이후에 이스라엘 역사를 장식하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잘 모르면서 천국 가는 일은 일체 없게 만들어 버려요. ‘와 보니 천국인데, 천국에서 어떻게 살지 잘 모르겠다.’ 이런 사람은 절대로 천국에 못 갑니다. 천국에 가는 사람은 왜, 내가 태어나서 생각했던 모든 발상들이, 천국에 전혀 맞지 않는 발상이라는 것을 혹독하게 실제적으로 현실로 느끼게 하면서, 그 사람을 천국으로 데려갑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 몰라요. 잘 모르는 게 아니고 전혀 몰라요. 전혀 모르기 때문에, 내 행동 하나하나 말씨 하나하나가 이게 전부 다 ‘나의 의 라는 통장’, 그 통장에 저축된다는 사실을 본인도 무심코 모르는 가운데 눌리게 돼요. 그런데 이러한 ‘자기 의’가 바로 이게 뭐냐 하면, 우리가 자연스럽게 그렇게 모으고 누적되는 게 ‘죄’의 누적이라는 사실을 성령님이 오실 때 비로소 알게 됩니다. ‘아!! 내 기준이 옳다고 여겼는데, 내 기준이 옳다고 여기는 그것이 직접 주님을 안 만나고 임의대로 내가 성경 연구해서 정리하다 보니까, 아! 이쯤 하면 천국 갈 수 있지 않을까? 일방적으로 생각했구나. 하는 것을 그것을 주님을 맞닥뜨리면서 깨지게 하죠.

율법에 흠이 없는 사람이 누구였죠? 사울이었죠? 그 사람이 언제 깨졌습니까? 누가 충고해 줬어요? 아닙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나니까, 그동안 자기가 죄를 누적한 거예요. 그 죄의 누적은 자기 의로 인하여 누구 의를 배척하느냐 하면, 진짜로 천국갈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의’를 미워하는 동기로서 사람들은 계속해서 누적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의를. 이 의 가지고 성과가지고 다른 사람 성과와 비교해서, ‘하나님, 하나님 축복으로 저 사람보다 나아졌습니다. 이 정도하면 천국 가겠죠?’ 라고 우겼던 그 생각. 그것들이 몽땅 뭐냐 하면, 하나님이 영광이 아니고, 무슨 영광? 자기 영광을 수습하는 차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 물어볼게요. 하나님의 영광은 어떻게 되죠? 이런 것들이 인간의 영광으로 다시 귀환된다면,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은 뭐냐 말이죠. 하나님의 영광은 어떻게 얻어지고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나타나느냐 말이죠. 그게 요한계시록 5장 초반부의 주제인데,(제가 아까 이야기 했는데...ㅎ) 예수님의 돌아가신 것을 믿으면 영광 이예요. 예수님이 날 구원하시기 위해서 대신 돌아가신 것이 믿어지시면 영광이 되는 겁니다. 그것을 요한복음6장에서는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 했습니다. 너무 간단하죠? 너무 간단해요. 너무 간단해서 흘깃 쑥 지나가요. 너무 간단하기 때문에.

왜 우리가 방금 한 것에 대해 관심이 없냐 하면, 우리는 24시간 나의 영광으로 나의 수치를 가리려고만, 자기가 보기에 자기가 영광스럽지 않으니까, 대신 땜질하듯이 내가 상상한 영광을 가지고, 자기 수치를 가리는 식으로 24시간 거기에 전념을 하다 보니까 뭔가 흘깃 흘깃 지나가는데 보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지나가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스톱! 태워주세요. 손들지 않습니까? ’그냥 통과‘ ’저것은 내 영광에 전혀 보탬이 안돼. 그냥 가세요 그냥 가세요.’ 보내 버리죠..ㅎ

어린양이 하나님의 세상에 있는 모든 비밀을 책에 있는 비밀을 인봉을 일곱 개를 뜯는다는 대목이 5장 초반부에 나옵니다. 뜯을 때마다 그게 뭐가 되겠어요? ‘하나님의 영광’이 되겠죠? 이럴 때 우리가 궁금한 것이 예수라는 그분은 무슨 자격으로, 뭐 대단한 일을 했다고 그 하나님의 계시를 뜯을 수 있는 유일한 자격자냐? 라고 따지게 되면? 예수님은 말하기를 ‘나는 죽음의 세상에서 나는 말씀대로 율법대로 나는 죽임을 당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럼 당신이 죽었다는 게 영광이 되는지 안 되는지, 당신이 어떻게 장담할 수 있냐?’ ‘죽은 지 사흘 만에 아버지께서 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냈다.’ 그래서 복음은 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복음이라 합니다. 이것을 로마서 10장에서 이걸 믿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래요. 왜냐하면, 구원이라는 것은, 바로 이제는 관심사가 그것 따라 노선 따라 가기 때문에 그래요. 옛날 동화에 그런 것 있잖아요? 동화에서 하늘에서 두레박 내려올 때, 두레박 타야 선녀가  사시는 그 동네, 선녀 마당에 올라갈 수 있잖아요. 폭포가 내려온다면, 연어가 폭포 물을 타고 올라가듯이, 십자가와 부활은 바로 주님께서 영광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 덩어리입니다. 폭포 들어가려 하지 말고, 말씀이 성취된, 말씀이 성취되면 여기에 뭐가 생기냐 하면, 거룩과 의가 생겨요. 하나님의 거룩과 의가 폭포수처럼 쏟아지면 그 물줄기를 타고 올라가면 뭡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되고 영광이 되는 상태에서 우리는 천국에서 영원히 삽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영광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천국가면, 가도 못 살고, 넣어주지도 않고 그래요. 하늘나라는 하나님의 영광만 찬양하는 곳이지, 자신의 자존심을 세우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을 잊어버려야 되죠. 그럼 이걸 타고 올라가려면, 무엇과 무엇을 비교해야 되요?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모습과 누굴 비교해야 됩니까? 예수그리스도와 비교해 볼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이 되지만, 우리가 어떤 종교적인 시도나 열심도 하나님의 영광이 되었다 안 되었다? 안 되는 거죠? 왜 안 됩니까? 우리는 뭐가 아니기 때문에? 메시야가 아니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아주 가볍게 여기고 즐겁게 반겨야 됩니다. 메시야도 아닌 주제에 지가 착하다니...말이 안 되죠. 우리는 메시야 덕분에 구원받아야 될 텐데, 우리는 메시야를 모방해서 제2의 메시야로 탈바꿈해서 완벽한 사람 되어서 구원 받겠다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메시야를 시기하는 겁니다. 질투하는 겁니다. (니만 메시야냐? 시..)

베드로가 자살해서라도 따라가려 했습니다. 의도가 뭐였겠어요? 당신만 자살하는 게 아니고, 나도 죽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베드로 자살 했으면, 베드로 죽었으면 천국 갑니까? 안되죠? 너는 죽어도 천국 못 간다 했습니다. 또 자살 한 사람 가룟유다 했죠? 자살 해봐야 소용없습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간단해요. 여러분! 이거 하나 배우세요. 가룟유다는 왜 안 됩니까? 이유는 메시야가 아니기 때문에. 오늘 강의 끝났습니다.ㅎㅎ

메시야도 아닌 주제에 메시야인척 말아주세요. 제발 마음을 낮춰서, 주여, 저는 주님 덕분에 삽시다. 영광 돌립시다. 이 죽은 세상에서 더 이상 죽은 자 하기는 싫고, 주님 덕분에 삽시다. 그럴 때 우리의 관심사는 그담부터는 ‘나는 안 되는데, 우리 주님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이 되어서 메시야로서 우리에게 찾아올 수 있습니까?’ 관심사가 그쪽에 가 있게 되죠. 왜? 그게 하나님의 영광이니까. 달리 영광 되는 길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어요. 다른 이름으로 영광 돌릴 이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해도 예수이름으로 찬양해도 예수이름으로 뭘 살아도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이 예수님의 의로 말미암아 그 의를 인정해주고 의를 믿어준다는 그것 때문에,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큰 영광을 받습니다. 하나님 아들 참 잘하셨습니다. 라는 그러한 고백이 아버지께 연결되어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고 기쁘게 하는 겁니다. 모든 만물이 예수님 중심으로 통일되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알아야 되거든요.

자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들어가서 본문에 들어갑시다. 본문에 들어가면 이래 돼 있어요. 초반에는 뭐냐 하면, 세상의 비밀은 닫혀 있다. 가 증거 돼야 해요. 이게 우선 이예요. 세상 모든 비밀은 공개되었다? 아니죠? 닫혀있죠? 닫혀 있으면 인간이나 다른 피조물이 알까요? 모를까요? 다 닫아져 있으니까, 모르죠. 그래서 초반부터 하는 이야기가 닫혀 있다는 것, 뭐 비밀들은 가방이 닫혀있다는 말은, 사람이 하나님의 비밀을 알려고도 해서도 안 되고, 그렇게 해봤자 알아지지도 않는 문제라는 것을 분명히 해두는 겁니다.

참 이런 이야기하기가 어려운데요. 어떤 사람이 교회 나왔습니다. 목사님이 묻습니다. ‘교회 왜 나왔습니까?’ ‘하늘의 비밀을 알기 위해서 나왔습니다.’ ‘그거 알아서 뭐하는데요? 알아서 뭐할 건데요?’ 알고 싶어도 모르고 알고자 해도 모르게 돼 있고, 또 알고자 하는 그것도 별 의미 없고 헛짓이고 그런 겁니다.‘ 라는 말을 할 때 그 사람이 얼마나 실망하겠습니까? 그냥 하던 대로 그냥 사세요. 평범하게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그냥 사세요.

그게 요한계시록 5장 초반의 확답입니다. 닫혀 있는 것을 열어달라고 사정사정 빈다고 열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닫으면 열자가 없고 열면 닫을 자가 없다고 했죠. 우리 그걸 분명히 믿읍시다. 어떤 사람은 기도 많이 했다고 열렸다 하는데 그런 식으로 열어준 적이 없어요. 절대로 하나님께서는 고집이 센지 사람 말을 듣지 않습니다. 왜? 이유는 뭐예요? 이유는? 정답은 인간은 뭐가 아니기 때문에? 메시야가 아니기 때문에..ㅎ 오늘 이 이야기 수백 번 하지 싶네요...ㅎ 인간은 메시야가 아니가 때문에, 하나님 상대할 대상이 안 됩니다. 우리하고 상대해 봐야 영광도 되지를 않고, 뭘 알아야 영광이죠. 뭘 비밀을 알고 그대로 살면 모르지만 비밀도 모르고 뭘 알아서 뭘 영광을 돌린단 말입니까?

그러면 목사님, 물어봅시다. 묻든지 째비든지...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알아요? 예수님은 창세전에 계셨잖아요. 창세전에 이미 이야기가 끝난 이야기거든요. 창세전에 아버지하고 이야기가 끝났어요.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 계셨다고 하시잖아요. 창세전에 이미 끝난 이야기예요. 그 분만 알아요. 다른 사람은 몰라요. 지금 모르면 모른다고 하면 되는데, 지금 모르면서 아는 체하는 게 문제가 된다니까요.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알았어요? 꼭 이런 소리가 그담부터 묻고 싶어서 환장을 해요.ㅎ 요한계시록 5장에 보면, 반드시 주체가 나와요. 주님께서 비밀을 공개하셔서 가방을 열어젖혀서 또는 가방 일곱 개 뜯어서 전체 뜯어서 뜯게 돼도 그거 몰라요. 뜯고 난 뒤에, 6절에 보면,  ’하나님의 일곱 영‘을 보내서, 알게 해 주실 때 우리가 알게 돼 있어요. 이거 고함지를 문제도 아니고 성경 보면 다 나오는 이야긴데, 제가 이렇게 한번 강조를 해야 돼요.

주체를 예수님이 열어서 성령을 보내셔서 알려주는 사람에게만 아다리! 딱 고걸 알게 돼 있기 때문에, 알게 된 사람은 뭐라 하느냐하면, ‘이거는 제가 아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알려 주셔서 압니다.’ 라고. 문장이 꽤 길어요. ‘나는 기도해서 알았습니다.’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홀로 있지 않고 성령이 함께 있음에 성령의 몫으로 돌리고 주님 몫으로 돌리는 약간 꽤 긴 문장을 나열하게 됩니다. 성질 급한 사람은 중간에 듣다가 떠나버려요.

어떻게 알았느냐 말이야? 어떻게 알았느냐 하면, 나는 아니고,(그럼 모르네. 가자..ㅎ)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할 때, 제일 난처하고 어려운 점은, 성경 말씀이 현실화 돼야 되고, 실제화 돼야 되는데, 현실화 하고 실제화 되지 않은 사람에게 성경 이야기 해 버리니까, 이것이 앞에 이렇게 세워나요. ‘고 까지만! 예, 앞으로는 내가 노력해서 고점에 대해서 내가 확인해 볼게요.’ 라고 요 앞에 주차장 넣으면 앞에 성경 주차장이 있어요. 거기다가 ‘나는 성경 10장 봤다고 하는 차들이 대 있고, 옆선에까지 들어가지 않고, 딱 준비돼 있어요. 실제화 되지 않으니까.

그런데 주님의 말씀이라는 그 차는요. 항상 ’급발진‘  그냥 와가지고 쇼윈도나 식당 안이고 급발진 해서 다 깨져서 손해배상 물어야 돼요. 완전히 다 깨졌어요. 내 마음 갈 곳을 잃어...ㅎ 완전히 박살 내놔 버렸어요. 자, 이거다. 이래도 니가 깨져 보니까 주님께서 니 대신 깨져서 니가 구원받은 것 알겠어? 라고 와장창 깨는 겁니다. 그 깨는 목표가 뭐냐 하면, 나의 영광, 나의 자존심, 나의 체면에 무럭무럭 자라나던 고이고이 손질해서 아름답게 소복하게 탐스럽게 자란 나의 드림, 꿈, 비젼, 그것이 난폭한 급발진 하는 차로 인하여 다 깨졌습니다. 그 꽃들은, 내가 어릴 때 꿈꾸던 꽃들은 급발진 하는 차바퀴에 다 짓밟히고..작품! .이젠 복음 찾아도 안돼...ㅎ 이런 마음 누가 위로합니까? ’주여 이 깨진 마음 누가 위로합니까? 주님 위로할 겁니까? 주님 뭐라 하시는지 아세요? ‘위로 받을 생각 마! 니 인생은 원래 죽었어야 돼.’ 니가 죽었는데 성경에 죽었다고 해도 니는 고개를 절래, 절래 그래도 아직은 살아있습니다. 하고 우기더니 거봐, 박치기 하니까 죽었잖아.‘

이거 급발진 때문에 장님 된 사람, 눈이 간사람 있어요. 누굽니까? 사울이잖아요. 사울은 아주 장님 됐어요. 아나니아 안 만났으면 계속 이렇게 지팡이로 더듬거리고 다녔어야 돼요. 아나니아 안 만났으면 계속 장님으로 살 수밖에 없어요. 복음이고 뭐고 끝났습니다. 그걸 가지고 사도바울은 종합적으로 말하기를, 성령께서 나로 하여금 사도되게 하셨다. 성령의 몫으로 돌렸어요. 성령께서 그렇게 하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령이 없으니까 안 보이니까 비실제로 간주하죠. 비실제로 간주하니까 그 사람들도 성령 받은 사람도 이 땅에서 예수님처럼 밉상 받고 설움 받고 돌은 사람 취급당하고 미쳤다고 욕 얻어먹고 그래요. 좀 현실적인 거 이야기 내놔봐라. 맨 날 이런 추궁 당하고요. 성경 말씀 대니까, 성경 말씀 말고, 너가 하나님 믿고 얻어 낸 거, 그거 효과 받은  그거 내놔라. 그 실적 내놔라. 환장하죠. 주님보고 실적 내라 하니 주님이 이 땅에서 무슨 실적 내놨습니까? 제자들 다 떠난 거, 그거 내놓을까요? 목회 실패한 거? 무슨 실적 있어요? ‘내 안에 아버지께서 일하신다.’ 그거밖에 더 있어요?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주님 일하신다. 그거밖에 뭐가 있어요?

로마서 8장에 보세요. 환난이나 핍박이나 곤고나 기근이나 적신이라. 이게 성도한테 들이닥치죠? 그럼 성도가 하나님 복 받은 건 뭡니까? 기근이 해소된 거예요? 핍박이 없어진 겁니까? 궁핍이 사라진 거예요? 아닙니다. 거기 뭐라고 딱 밝혀났어요? 그럴지라도 너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어떻게 한다? 끊어지지 않는다. 기껏 내놓은 게 그거잖아요? 기껏 내놓는 게. 환난이나 기근을 모면하고 면제해 주는 것이 아니고 기껏 내놓는 게 뭐냐? 그렇더라도 누가 널 정죄하리요. 그 이야기를 한다 말이죠. 그게 무엇과 연관돼 있냐 하면,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신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이것만이 영광이라고 진짜 모델케이스로 보낸 경우를 우리에게 확인시키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원치 않는 환난과 핍박과 어려움 속에 집어넣는 거예요.

내가 언제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이나 해 봤냐 말이죠. 맨 날 니 영광만 생각했지. 그래서 주님께서 계시를 뜯어내면 뜯은 그만큼 성령이 내려와서 그 뜯는 효과를 구원받는 효과로 전환시킵니다. 그걸 뜯으면 성령이 내려와서 성령 주게 되면, 그 밑의 성령 받은 사람은   ‘아, 뜯겠구나, 하고 아는 고만큼의 효과를 주는 거예요. 또 뜯어내면 또 성령 받아 또 생기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러한 절차가 예수님의 초반에 이미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에 들어가셔서 여기 비둘기같이 왔을 때, 예수님이 물에 계실 때 비둘기같이 성령이 내려오셨잖아요? 이걸 위로 쭉 땡겨 보세요. 쭉 땡겨보면 이렇게 되겠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위로 쭉 땡겨보면  이것이 예수님의 승천이 되는 거예요. 승천이 되면 성령께서 오셨던 성령이 어디까지 내려와요? 귀신 머리카락처럼 쭉 밑에 지상까지 내려오겠죠? 요것이 일곱 영이예요. 성령이라니까요. 주님께서 올라가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매, 이제는 자신도 성령 받을 뿐만 아니라 성령을 주시는 분으로서 주의 자리에서 행사를 하는 거예요. 성령이 이렇게 내려오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이 온 사람들은 뭐라고 이야기 하냐하면, ‘예수님은 주님으로서 지금 주의 자리에 앉아 계십니다. 라고 고백을 현실로 억지 부리는 게 아니고 실제로 성령께서 오셨기에 내가 주님이 존재한 것을 나의 관심사로 두게 되었습니다.’ 고백하죠.

그럴 때 다른 사람이 ‘당신은 어떻게 해서 예수 믿으세요? 라고 아무리 물고문하고 해봐야 ’나는 주님께서 믿게 해주셨다.‘ ’그거 말고 이실직고 하렸다? 하고 주리를 틀어 봐도, ‘나는 안 된다고 했잖아. ’기도 했잖아.‘ ’아니요.‘ ㅎ ’헌신 했잖아.‘ ’아닙니다.‘ ’엄마가 널 위해서  이아들을 뭐 바친다고 서약했잖아. ‘그거 아니에요.’ ‘왜 너희 엄마는 기도 안 하는데?’ ‘우리 엄마는 메시야가 아니거든요.’

메시야 되신 분이 주셔야 메시야의 공로라고 우리가 고백할 수 있습니다. 메시야가 아닌 사람이 옆에서 오게 되면, ‘우리 엄마 덕분에, 우리 아버지 덕분에, 이래 나와요. 그런 내용이 찬송가에 나와요. ’우리 어머니기도 못 잊어 어떻게 됐다.‘ ’그럼 니가 엄마를 알아?‘ 엄마 사생활 앎니까? 옛날 부모들 자식들이 모르는 사생활들이 많아요. 바람 피웠다는 말이 아닙니다. 뭐냐 하면, 옛날에는 낙태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 것은 동생들에게 안 알려줘요. 왜? 알려줄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럼 그거 낙태할 때는 자기 영광을 챙겼다 이 말이잖아요. 그럼 자기 영광을 챙긴 사람의 기도 때문에? 말이 안 되죠. 자기 영광을 챙긴 사람의 그 기도가 응답되어서? 우리가 예수 믿어? 말이 안 돼요.

우리의 사고방식에서 바로 주님께서 승천하셔서, ‘나 승천했다’는 기념물로 성경을 주게 돼 있습니다. 하나님 우편에 계시면서 아무것도 안 내놓은 주님은 없습니다. 반드시 뭔가 성공해가지고 주님 앞에 계시면, 반드시 성령이 오게 돼 있고, 나한테는 안 와도 누구한테는 가게 돼 있어요. 아! 이거 얼마나 약 오른 대목입니까? 나한테는 안 와도 누구한테는 가게 돼 있습니다. 이렇게 성령이 오므로 말미암아 계시를 열어젖히므로 어떤,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냐 하면, 이 땅에 있는(이거 크게 써야 돼요. 이거 너무, 너무 중요한데) 모든 차이를 전부 다 없애 버려요. 모든 차이를. 인간이 갖고 있는 모든 차이성을 다 무(無)로 돌려요.(없애버려요)

사람은 차이성을 통해서 자기의 정체성이 발견돼요. 난 저 사람과 이렇게 다르고, 저 사람과 다르기 때문에 이 자리가 내 자리다. 예를 들어서 학급에서 10등정도 한다면, ‘나는 1~2등을 못해도 20등은 아니잖아. 그래서 10등자리는 내 자리다.’고 항상 위, 아래 왼쪽, 오른쪽 항상 견주고 그 중간에 자기의 자리를 담게 돼 있어요. 그러면 그것이 바로 차이입니다. 그 차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다 죄인이고, 다 죽은 상태기 때문에. 다 죽었어요. 시체와 시체사이는 별 차이 없어요. 어차피 수천 년 지나가면, 한줌의 뭐로 갑니까? 재로 가죠.

지금도 화장터에 있는 그 항아리에 담겨있는 그 뼛가루 한번 쭉 내보죠. 색깔 한번 비교해 봐요.ㅎ 예수 믿는 사람 뼛가루하고 불교 보살 뼛가루하고 한번 성분 조사 해 보죠. 똑 같습니다. 그 똑같은 걸 위해서 그다음 무슨 짓 했습니까? 그걸 다르다고 우기면서 오해하면서 곡해하면서 평생을 버텼잖아요? 평생을... 미국 유학 간 사람이나 동네에서 공부한 사람이나 죽으면 책갈피 해놓은 건 똑같은데, 이걸 여러분 허무하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즐겁다고 여겨요.

하나님은 모든 차이를 없앤다. 근데 그걸 아는 사람은 오직 성령 받은 사람뿐이다. 이래 정리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5장에 그렇게 정리되는 겁니다.

다시 한 번 늦게 오신 분을 위해 다시 한 번 복습한다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만 전 우주에 담겨있는 비밀의 책을 열어젖힙니다. 왜? 다른 사람은 안 됩니까? 왜 다른 사람도 안 되고, 다른 천사도 안 되고 왜 예수님만 됩니까? 예수님만 메시야기 때문에. 그럼 왜? 예수님만 메시야냐? 창세전에 아버지와 이야기가 끝난 상태예요. 아들의 임무가 메시야 임무입니다. 구원자 임무이기 때문에 이야기가 끝난 거예요.

그러면 그 메시야가 이 땅에 와서 한 일은 무엇인가? 이 땅에서 아버지의 영광만을 위해서 일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와 보니까 사람들은 무슨 영광? 아버지의 영광은 전혀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않고 있어요. 왜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들이 뭐가 아니기 때문에? 메시야가 아니기 때문에. (오늘 참, 정답 내기 쉽다). 정답에 무조건 붙이세요. 메시야가 아니기 때문에 오직 자기 영광만 생각한 거예요.

메시야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 메시야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죽임을 당했는데 그 죽임을 당한 그 분을 사흘 만에 부활해서 주의 자리에 앉히므로 말미암아 세상은 이제 인간위주의 기준이 아니고, 예수님 위주의 기준으로 원래부터 그렇게 구조화 됐다는 사실을 드디어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거 누구의 영만 받아야 되겠습니까? 메시야 영을 받은 사람에게만 그런 혜택이 주어집니다. 만약에 그런 영을 안 받으면, 나한테 그런 성령이 안 왔으면, 우리 성격상, 내도 안 받으면 다 안 받아야 될 텐데...죄송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가게 돼 있어요. 아!! 그거 약 오릅니다. 그거 약 올라요.

거지 나사로는 그 집이 얼마나 좋았던지 자가기 인생이 거지가 되고 온몸이 아파도, 끄떡없이 즐거워했어요. ‘나 곧 간다.’ 왜? ‘웬 은혠지 성령 받았어. 아브라함 품에 안겼습니다. Vip 대우로 천사들이 와서 대동해가면서... 그것을 가지고 두 자로 이 세상에서 ’자유‘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죄로부터의 자유‘ 사단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규정해 주는 것이 율법이기 때문에, ’율법에서의 자유‘라고 합니다.

율법에서 자유 된 채로 율법을 보는 것과, 자유 되지 않은 상태에서 율법을 보면, 율법에서 자유 되지 않은 사람은 자기 체면을  챙기기 위한 용도로 쓰지만, 율법에서 이미 해방된 사람의 자유는 그 율법이 어디로 쏠려가는 그 방향성을 보게 되죠. 그 방향성이 어디로 쏠려 가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기 때문에 은혜 나왔거든요. 아! 내가 못 지킨 율법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구나. 방향성이 십자가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믿는 것이 율법을 전체를 다 이루는 것을 믿어주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자, 그러면 좀 더 진도 나가 봅시다. 그러면 책이 몇 가지로 봉인 돼 있는가? 일곱으로 봉인돼 있습니다. 이게 5장1절에 나와 있어요. 일곱 인으로 봉인 되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책이 있는데, 책이 닫힌 상태에서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이렇게 자물쇠로 채워져 있다 말이죠. 그렇다면 왜 이것이 일곱이냐 하면, 요 책 안의 그 내용이 바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있는 모든 세상의 변화무쌍한 변화가 다 요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일곱으로 봉인 됐다 말은 이 안의 세계가 무슨 세계다? 천지창조의 세계를 대변하고 있는 설계도가 되는 거예요.

지금, 제가 위의 있는 세계와 아래의 있는 세계를 이야기했는데, 아래 있는 세계에서 위에 있는 세계를 해석을 할 수 없는 이유는, 이 아래 있는 세계에서 우리가 해석할 때, 우리의 이성과 합리성만 동원되는 것이 아니고, 그동안 우리가 살아왔던 이 세계가 몽땅 동원되어서 그걸 바탕으로 해서 해석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이 세계의 원래 정답은 이 책안에 있는데, 우리는 책을 뗄 수가 없다 그랬죠? 왜 책을 뗄 수 없다 했습니까? 왜? 메시야가 아니기 때문에. 왜 우리는 메시야가 아니라 했습니까? 창세전에 우리는 거기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예? 간단하죠?

따라서 여기 우리가 기껏 아는 성경해석이라는 것은 지금 우리가 구축되어 있는 이 세계, 이걸 역사라 하죠. 역사에서 익히고 들은 것, 그것도 다 몰라요. 예, 우리가 어디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 제45번지에 있는 아줌마 얘기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모르잖아요? 그런데 뭐는 알고 있어요? 청함은 다 돼있죠. 다 몰라요. 그리고 우리는 어릴 때 일 모릅니다. 기억도 모르고 남의 세상도 모르고, 먼 나라 이야기도 모르고, 앞으로 될 일도 모르고 몰라요.

하지만 처음이요 나중이신 주님과 하나님은 다 아시기 때문에, 이 안에 다 원래 증거가 있다 말이죠. 그렇다면 문제가 되는 것은, 아! 우리는 모르고 주님은 아는구나. 이렇게 되면 문제가 큰 문제가 안 되는데, 문제가 뭐냐 하면,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는 체하면서 이 성경 말씀을 해석해 내고 있다는 이 사실, 이게 문제가 돼요. 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주님께서  해석만 하시겠습니다. 라는 사람 이 세상에 있을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습니다. 왜? 우리는 뭐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메시야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아담에 속했기 때문에 꼭 나름대로의 아는 척을 해요. 지가 경험한 것, 이런 것 가지고 성경에 다 나옵니다.

그러면 그 해석을 가지고 육적 해석이라 하고, 육적 해석의 근거는 뭐냐 하면, 바로 문자, 언어가 되는 겁니다. 언어세계는 언어 뒤에는 언어 구조가 있고, 이 언어구조는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우리가 잘 아는 생존과 존재 구조에서 나오거든요. 존재구조, 이 세상 삶에서 존재구조는 무엇을 매개로 하느냐 하면, 우리의 몸, 신체를 매개로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70이레 논문에 나왔지만, 다니엘이 몸을 갖고 있다 말이죠. 몸을 갖고 있는 이상은, 인간의 몸이라 하는 것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여기서 이 몸은, 이 유기체라 하는 것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살고 싶고 그리고 유기체적으로 확장하고 싶고, 또 공격해 오면, 사수하고 공격하고 자기 영역을 넓히고 그러면서도 자기 몸은 생존 지탱해야 되고, 여러 가지 활동을 한다 말이죠. 활동하면서 주변과 교류가 되는데, 누가 남하고 얘기할 때는 반드시 언어를 사용해야 되는데, 그들이 사용하는 개념과 사상에 동조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 사회에서 못 살아남잖아요. 인터넷 모르면 곤란하잖아요. 그것이 이런 해석이 나온 해석이 바로 성경해석이 육적 해석이 된다 말이죠. 이것은 어느 누구도 매일 있을 수 없어요. 역사적 해석법과 문법적 해석법이 모든 인간이 할 수 있는 한계고 그거 밖에 안돼요. 거기 갇혀 있어요. 그러면 역사적 해석을 하는데, 해석하는 주인공이 누구냐? 바로 나죠.

여기서 문법적 해석의 한계를 잠시 이야기 하면, 문법적 해석이라 하는 것은 다 끄집어내면, ‘주어+술어’인데, 나는 뭐다. 나는 한다. 주어+술어인데, 문제는 나라는 인간이 주어에도 속하고 술어에도 속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결국 뭐냐? 누가 누구한테 이야기 한다? 내가 나에게 알아듣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식밖에 안돼요. 내가 나에게 알아듣는 식으로 이야기 하니까, 결국은 뭐냐, 누구의 영광? 나의 영광, 나의 의가 되고, 그렇다면 핑계고 변명으로 일관을 하는 거예요. 모든 성경 해석은, 그래서 나는 정당하단 말이야. 라는 소리예요.

성경을 가지고 해석을 하면서도, ‘그래서 나는 정당한 거야.’ 후렴으로, 또 뭐라 합니까? ‘얼쑤~~’ 하고 추임새가 늘 들어가는 거예요. 한 마디 하고 추임새가 들어가는 거예요. 조 용기 목사 설교할 때, 그러므로, 하고 거기 추임새가 들어가듯이, 그러므로, 하면 다음 생각하듯이 같이 추임새가 들어가는 거예요. 나는 정당하다. 나는 정당하다. 나는 정당하다. 계속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면 뭘 못하느냐 하면, 나는 정당하지 않을 수 있다.라는 말을 나, 나의 입에서는 할 수 없죠. 왜? 정당하지 않으면 입을 다물고 있어야지, 할 필요 없겠죠.

그래서 욥기 마지막에 보면, 욥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합니까? 스스로 입을 막죠. 어디 손 냄새 맡으려하는 게 아니고...ㅎ 입을 막고, 그것도 모자라서 재(요새는 이불)를 뒤집어쓰면서, ‘회개하나이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는 척 했습니다.’ 그런데 욥이 아는 척 했다는 것은 욥이 건방져서 그런 것이 아니고, 욥의 뭐가 탈났어요? 욥의 신체(육)가 탈났잖아요? 신체가 우리의 자아를 만듭니다. 너무나 신체가 고단하고 힘들고 고통스럽고, 저주 속에서 싸여 밥 먹고 살다 보니까 힘들어요. 힘들면 신음소리를 내게 마련이고, 그 신음소리를 내면, 그것이 바로 그 중심이 결국은 Why Me? 왜 하필이면 나를???? 왜 하필이면 나에게?? 그렇게 외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너가 저 하마가 새끼 낳을 때 봤냐? 하나님께서 뭐냐 하면, 책 속의 내용을 얘기하죠. 욥은 모르죠? 바로 책속의 있는 내용을 알아야 예수님 중심으로 가야 할 건데, 욥은 메시야가 아니기 때문에, 메시야가 아니면 모른다하면 될 텐데, 욥은 누구 중심이었습니까? 자기 몸 위주, 몸이 아프니까 아프다고 한 거예요. 몸 위주로 하다 보니까, 결국은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왜? 고난이 왔는지, 이런 벌을 받을 쨉이 아닌데, 분명히 이런 상황이 아닌데, 나보다 죄진 친구는 다 멀쩡한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모든 것이 내 몸 중심이 되는 거예요.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자기 몸을 자살할 수도 없고, 몸을 버리고 도망칠 수도 없고...(시간이 벌써 됐네요. 조금밖에 없네요. 조금만 하고 쉽시다)

지금 제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인을 하나 떼면 뗄수록 어떤 변화가 주어지냐 하면, 떼면 성령이 흘러나오죠? 성령이 흘러나오면, 떼게 되면, 허락된 내용이 주어집니다. 주어지면 성령께서는 뭐냐 하면, 그동안 자기중심으로 살던 것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 예수님 중심으로 바뀌어요. 그럼 자기 중심은 그냥 바뀐다고 해서 내 중심은 날아가는 것이 아니고, 이것이 뭐가 되느냐 하면, 내 중심으로 산 것이 본의 아니게 이게 ‘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죄가 인봉을 떼는 상황과 연계가 돼 있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나는 사는 게 힘들었어.’ 외쳤는데, 그 외침이 인봉을 뜯는 사람을 뭐로 만들었다? 이 땅에서 죽게 만든 거예요.

그래서 죽음을 당한 어린양이 떼는 거예요. 우리는 본의 아니게 태어난 모습이 이런데 어떡합니까? 힘들게 사는 게. 본인이 어떤 변명과 구실을 하더라도 그게 정당하게 보여도 어쨌거나 저쨌거나 우리의 몸을 가져서 고통스럽다고 부르짖는 그걸로 인하여, 주님은 우리로부터 피해를 입은 피해자로서 이 땅에서 돌아가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고마우신 것은 돌아가신 분이 바로 ‘너 때문에 내가 죽었다.’ 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뜯는 과정에서 책이 나오고, 책에 있는 명단이 있는데, 리스트(LIST)에 해당하는 사람만 성령이 주어져서 주님의 피 흘린 그 값이 헛되이 돌아가지 않도록 그렇게 조치하신 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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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101104b계시록6강b

2010-11-16 18:20:02   녹취 : 이한례


하나교회101104요한계시록-6강b-(이 근호 목사)

제 6강b

자, 두 번째 시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4절에 보면 사도요한이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합당한 자가 보이지 없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라.” 사도요한이 울었어요. 책은 있는데 그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사람이 없어서 울었다는 겁니다. 안 펴면 되지...ㅎ 뭐 펴야 됩니까? 사도요한이 그 책은 반드시 펴져야 된다고 언급을 하게 된 것은, 그 뒤에 보면, “유다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라고 돼 있어요.

그러니까 책이 있다면, 책이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으로 인봉되어서 아무도 떼지 못한다 이 말이죠. 못 떼게 돼서 사도요한이 울었다 이 말이죠. 엉 엉 엉 엉 울은 거예요. 엉엉 울었다는 말은 자금 사도요한이 속해 있는 이 세상, 이 세상이 지금 하나님의 계시 내용과 반대하는 식으로 통치가 되는 식이라 말이죠. 그러니까 뭐라고 하느냐 하면, “걱정하지 마라 내가 이기었으니,” 이겼다는 말은 전쟁이 있었다 말이죠. 이쪽 세계와 이쪽 세계 사이에 전쟁이 있는데, 그 전까지는 누가 이겼냐 하면, 악한 세력이 이겨가지고, 아무도 인을 뗄 수가 없는 거예요. 어떤 인간도 마귀를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인봉을, 진리를 공개 될 수가 없던 겁니다. 그런데 사도요한이 고백하기를 다윗의 자손에서 나온 어떤 후손 한 분이 이기셔서 전쟁에서 승리하셔서, 그래서 탈탈 털면서 책을 하나, 둘 드디어 떼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냐 하면은, ‘진리는 감추어져 있다’는 말이죠. 그럼 진리는 감추어져 있다면, 그러면 우리는 어느 세계에 살았습니까? 진리 아닌  비 진리 속에서 그것이 진리처럼 여기면서 살아온 거예요. 비 진리 속에서 살았는데, 살면서도 우리는 비 진리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은 전혀 없고, 누가 오셔서 이겨서 우리로 하여금 건져내줘야 되는데, 이것을 다른 사람은 못하고 메시야 다윗의 뿌리에서 오신 분이 이걸 해줬다는 겁니다.

그럼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봐야 돼요. 그냥 넘어가면 안 됩니다. 그냥 넘어가 버리면 우리는 구원 받았다 하고 ‘헤이’ 하고 그걸로 끝나 버려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모른다 말이죠. 다윗의 뿌리라 돼 있잖아요. 그 다윗의 뿌리라면, 그림으로 그리면, 이래 있으면 뿌리가 있잖아요. 다윗의 뿌리. 그러면 열매는 무엇이 열렸다? 다윗이었고 그 뿌리가 자라서 다윗이라는 열매를 맺었다 말이죠. 그러면 다윗의 뿌리가 이겼다 했는데, 다윗이 뭐하는 사람이냐?

다윗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아는 것부터 할게요. 골리앗을 이겼죠? 골리앗을 이겼을 때 다윗이 무슨 힘으로 이겼습니까? ①번: 돌팔매 ②번: 하나님의 이름 성경에는 뭐로 돼 있어요? 내가 보기에는 돌팔매로 나오는 거로 보이지만 나는 너희들에게 이야기 한다. 나는 만군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간다. 했어요. 그런데 이름이 무기가 됩니까? 예? 이름이 무기가 됩니까? 총, 칼, 이런 게 무기가 되고, 사물 이런 차가운 북동쪽이 무기가 되지, 무기란 게 뭡니까? 상대방의 단백질을 압력을 넣어서 단백질을 붕괴시키는 것이 승리가 아닙니까?

그러면 그만큼 에너지가 이쪽 에너지 뭉치가 날아가야 되는데, 이렇게 하는 것이 무슨 일이 되느냐 말이죠.

다윗의 뿌리라 하는 것은 결국은 다윗이 승리의 열매가 됐다는 것은, 다윗의 고백대로 ‘하나님의 이름’이 하신 거예요. 근데 문제는 우리가 비 진리 속에 살다 보니까, 항상 우리는 힘과 에너지 중심으로 생활했지, 힘이 있어야 에너지가 많아야 그것이 우리의 생존에 유리하다고 생각했지, 하나님의 이름이 있어야 이것이 생존을 넘어서서 생명 얻는다는 생각은 꿈에도 생각 못하죠. 왜냐 하면, 우리의 한계는 항상 생존 이예요. 생존의 노선을 가다가 생명 노선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을 우리 육체가 그걸 허용을 안 합니다. ‘나 예수 믿으니까 굶겠어.‘ 이런 것을 우리 육체가 허용을 안 해요.

만약에 우리가 예수 믿는 순간부터 배도 안고프고 목도 안 마르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그런 경우는 특별한 경우에만 그런데 그런 걸 경험한 사람이 누구죠? 모세죠? 모세는 40일 동안에 전혀 목마르지도 않았고 배고픔도 몰랐어요. 침해입니까? 침해예요? ㅎ 그렇지 않죠? 그리고 내려올 때는 보너스까지 받고 내려왔습니다. 뭘 받았느냐 하면, 얼굴에 광채가 났어요. 무슨 화장품을 발랐습니까? 눈부신 화장품을 발랐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의 효과’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생명’이 나오고 우리 육체에서는 뭐냐 하면, ‘생존에 대한 몸부림’밖에 안 나오죠.

그래서 생존이 나오기 때문에 우리는 마귀에게 복종될 수밖에 없습니다. ‘죽인다.’하면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예. 잘못했습니다.’ 하고 나오죠. 죽기 무서워서 일평생동안 종노릇하는 것이 우리라고 아예 성경 히브리서 2장 16절에서 규정을 해놨습니다. 그 규정에서 혼자 빼지 마세요. 그것은 한꺼번에 규정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예외는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마찬가지예요.

생존에 속한 사람은 우리 육신의 욕구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오는데, 여기서부터 어려워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왔더라도 그 궤적(흔적)은 육이 있는 사람에게는 뭐로 보이겠습니까? 육적인 흔적으로 이해 해석이 되는 거예요. 돌팔매 잘 던져서 골리앗이 맞아 죽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볼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아까 얘기 했잖아요? 인간이 육체 중심이기 때문에 자기가 보고 경험한 것이 뭉쳐서 뭐가 됐다 했습니까? 그것은 역사죠. 나만의 역사 또 우리 역사. 역사에서 나오는 것은 역사의 한계성에서 나오는 그런 발취한 걸 근거로 해서 외부를 해석을 해요. 성경이든 어떤 사건이든 해석을 한다 말이죠. 근데 그 사건, 하나님이 주신 그 사건이 육적인 인간으로 봐서는 돌멩이가 날아가서 골리앗의 그 틈새(이마)를 쳐서 이마에 압력을 가해서 넘어진 걸로 보죠.

동방박사가 뭘 따라 왔습니까? 별 따라 왔죠. 별 따라 와서 예루살렘에서 또 별이 사라졌습니까? 동방박사는 별 따라 온 게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 따라 온 거예요. 근데 그 궤적은 뭐로 보입니까? 사람들이 보기에 육적인 흔적으로 보이는 거예요. 이 세상에 있는 이 모든 것들은, 이 세상에 하나님이든 뭐든 들어와 버리면, 이 세상 모습으로 변형돼 버립니다.

빌립보서 2장 6절에 보면, “그는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의 영광을 버리고 어떻게 돼야 ‘주’가 되는 겁니까? 십자가에 죽기까지, 고담에 십자가에 죽는다고 ‘주’가 되는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십자가에 죽은 사람은 예수님 말고도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십자가 달릴 때 강도도 십자가 달렸어요. 뭐를 했냐 하면, 죽기까지 ‘복종’을 한 거예요. 주님은 누구한테 복종을 했습니까? 아버지한테 복종했죠? 근데 아버지의 본체는 뭡니까? 없죠? 이게 없는 거예요. 아버지께 복종한 사람은 있는데, 정작 아버지는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럴 가지고 뭐냐? ‘하나님의 이름’이라 하는 겁니다.

‘이름’이라 하는 것은 이름이 서로 통하는 세계 속에 여기 들어와 있을 때, 그 분의 자리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이 땅에서 어떤 자리를 잡고 어떤 궤적을 남긴다면, 그럴 가지고 뭐라 하느냐 하면, 이걸 가지고 ‘사태’라 하고 앞에 뭐가 붙느냐 하면, ‘언약사태’라 해요. 하나님의 언약 사건은 언약 때문에 생긴 사건이기 때문에, 인간이 미리 예상할 수 있습니까? 예상 못합니까? 예상 못하죠. 근데 인간이 예상 못한 사건이 일어나버리면, 인간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아요? 고 사건을, 이미 일어난 사건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역사로 바꿔버려요.

‘옛날 금식해서 블레셋 이겼어, 우리 또 금식하면 이길 거야. 옛날에 언약궤 밀어붙이니까 저쪽이 물러갔어. 우리 언약궤 또 밀어 붙일 거야. 옛날에 언약궤 밀어붙이니 요단강 건너갔어. 언약궤만 있으면 우리는 저쪽 이길 거야.’라고 역사적으로 해석해 버리죠. 그래서 언약궤 들고 나와서 전쟁에서 완전히 개떡 된 사람 있잖아요? 죽은 사람 있죠? 홉니와 비느하스라고 엘리제사장의 두 아들입니다.

사람이라 하는 것은 자기 역사로 자기를 속이기 때문에, 과거에 기도원에서 은혜 받은 꼭 그 기도원 자리를 찾아가요. 돌멩이도 꼭 그 돌멩이에서 하는데. 만약에 신학도 날과 시와 절기를 지켜서, 은혜 받은 그 시점을 찾아 가는데, 문제는 그곳에 이미 그 장소를 누가 선점하고 있다는 겁니다. 어떤 아주머니가 벌써 그 자리에서 기도하고 있으니 화가 나죠. ‘내 자립니다.’ 그러면 따져봐야죠. ‘당신 언제 이 자리에서 은혜 받았어요? ’98년도에 은혜 받았어요.‘ 아주머니가 화가 나서 ’나 86년도에 은혜 받았어요.‘ ㅎ끝 발이 위에 있는 겁니다. 그 끝 발을 목사들은 뭐라 하느냐 하면, 영발이라고, 기 팍 죽여 버리죠. ’ 니 기도 얼마 했어? 니 금식 얼마 했어?‘

이것을 꼬챙이로 팍팍 쑤시는 분이 계시는 분이 누굽니까? 바로 주님이 이 꼬챙이로 그러한 역사를 구멍을 내버려요. 구멍을 낼 때 예상 못한 구멍이 나죠. 그것을 가지고 뭐라고요? 사건. 앞에 뭘 붙인다? ‘언약 사건. 언약 사건은 되풀이 됩니다. 되풀이 되는데, 되풀이 되는 그 궤적은 같은 게 하나도 없어요. 홍해 사건의 출애굽은 그 다음 출애굽에 한해서 홍해가 아닌 다른 걸로 사용해서 끄집어내는 겁니다.

구약의 홍해사건이 있다면, 신약에서는 뭐냐? 죄로부터의 탈출이죠. 처음에 출애굽 할 때, 어린양의 피를 문지방과 문설주에 발랐어요. 그러니까 안쪽에는 고기를 먹었고, 그리고 고기를 먹은 사람은 할례를 행했고, 그런 그 당시 사건에 필요한 요건들이 갖춰졌습니다. 근데 지금 유대인은 아직도 그 짓하고 있어요. 뭐 피까지는 안 바르지만, 냄새난다고..양고기는 먹는다 말이죠. 지금도 유대인은 지키니까.



그러면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유월절 지키고 하면 되는데, 왜 지금은 하나님께서 못하게 하십니까? 제가 오늘 정답을 분명히 이야기 했는데.....왜 그렇게 합니까? 우리가 메시야가 아니니까. 그쪽은 그림자에 합당한 실체가 우리가 아니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할 거 뭐가 있습니까? 우리가 할 게 있다는 그 사고방식을 없애야 돼요. 우리는 안 해도 돼요. 왜? 대신 하이카가 다 해주니까.ㅎ대신 다 해주신다니까, 우린 그걸 믿습니다. 근데 그걸 믿으려면, 자기가 안 해도 된다는 생각을 가져야 돼요. 사람이 안 해도 된다는 것이 얼마나 조바심을 내는지 몰라요. 안 해도 된다는 것처럼 힘든 게 없어요. 그러니 이것은 육신으로는 못하고, 성령이 임해야, ‘아! 안 해도 되는구나.’를 아는 겁니다. 고거 3초갑니다.ㅎ

안 해도 된다고 버티다가 환난과 핍박 오게 되면, ‘너무 안 했구나.~ 나도 너무 뻔뻔스러웠어, 너무 심했어.’ 라고 그 다음부터 설칩니다. 그게 로마서 8장 또 어긋나요. ‘환난이나 핍박이 오더라도 누가 너희 사랑에서 끊으리오.’ 또 주님의 사랑을 잊어버리고, 또 행함으로 설칩니다. ‘전에는 기도를 이렇게 했는데, 이제는 꿇어앉아서 기도 해야지.’ 제가 분명히 했죠? 이 세상이나 십자가 앞에서 모든 차이를 없앤다고. 꿇어앉아서 기도하나 그냥 기도하나 찬송하면서 손뼉을 위에서 치나 옆으로 치나 아무 의미가 없어요. 이 세상에서는 의미가 없다 말이죠.

중요한 것은 이것에 의미를 준다는 문제예요. 의미를 주면 그것이 내가 이렇게 풀릴 것이고, 이리 풀리면 누구 영광? 결국은 나에게 돌아오는 반대급부. 나의 영광. 결국은 인간은 자기 영광 챙기는 그 순간 주님의 영광은 눈앞에 보이질 않는 겁니다. 어떤 차이도, 교인 수가 3명이든, 1000명이든 하늘나라는 전혀 차이가 없어요. 다만 인간들의 게임이죠. ‘어이, 어, 동창생 몇 명이야? 570명. 난 590명.’ 이거는 자기들이 하는 월드컵이라니까요. 그들만의 메이저리그예요. 거기 주님이 왜 심판 봅니까? 왜 주님이 인정도 않는 게임에 왜 우리가 말려들어서 자존심을 걸고 거기다가 헛된 세월을 다 보내느냐 말이죠. 주님께서 그런 시합을 붙인 적이 없는데... 목회 크게 하는 시합을 붙인 적이 없어요.

이건 결국 뭐냐? 여기서 울었는데요. 왜? 우리는 나의 이름(하나님의 이름이 아니고)으로 살 수밖에 없는가? 우는 겁니다. ‘주여! 주의 이름으로 실체와 진실성을 드러내주시옵소서.’ 다윗보고 하나님 이름 맡긴 게 아닙니다. 다윗은 하나의 그림자였어요. 다윗의 뿌리입니다. 다윗의 뿌리라? 그러면 사울의 뿌리는 안 되는가? 다윗의 뿌리에서 다윗이란 열매가 맺었거든요.

성령이 오게 되면,(이런 말 어려운데) 어렵지만 들어봅시다. 세상 모든 것은 주님이 ‘주님 되게 하시는 공정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주님이 스스로 주님을 양산해 내요. 내가 주님이 스스로 주님 되고 싶어서 깔아놓은 배치물들이예요.

그런데 다윗이라는 열매는 뭐냐 하면, 다윗은 다윗 아닙니다. 다윗은 뿌리가 만든 성령의 열매예요. 다윗이. 다윗은 주님의 열매입니다. 다윗이 요구한 적 없어요. 주님이 스스로 알아서 자기 열매를 그렇게 맺고 싶은 걸 어떡합니까? 우리가 말립니까? ㅎ육의 열매하고 성령의 열매 차이가 주체가 달라서 그래요.

육의 열매는 우리가 주인이고, 성령의 열매는 어떻게 하냐 하면,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는 그 분이 맺은 열매가 성령의 열매예요. ‘니는 가만히 있어.’ 하고 우리는 가만히 있어 하고 정과 욕심을 못 박아서 나온 열매가 성령의 열매예요. 성령의 열매는 우리가 맺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맺은 그 순간 우리는 뭐로 변하느냐? 육의 열매로 바뀌어요. ‘아! 난 온유하네, 왜 닌 온유 안 해? 이게 뭐냐? 육정의 열매예요. 시기하고 질투하고. 성령의 열매라 하는 것은 ’나는 죄인입니다.‘ 하면 돼요.’나는 아무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그게 성령의 열매예요. 그거는 인력으로 안 되거든요. 인력으로 안 되는 걸 뭐라 했습니까?  ’사건‘ 사건이라 하는 것은 예상 밖의 일이 화산 터지듯이 내 안에 구멍이 뚫려 버려요. 이런 것은 예상도 못한 거예요. 우리 역사에 구멍을 뚫어 버려요. 과거에 이렇기 때문에 적어도 이렇게 될 것이라는 예상 자체를 전부 다 쑤셔놓는 거예요.

자, 여기서 좀 더 어렵습니다. 이왕 어려운 거 계속 어렵게 합시다. 이게 사건인지 아닌지 어떻게 판별합니까? 주님은 사건을 일으키는데 우리는 사건을 기다린다고, ‘맞아 사건으로 뭔가 획기적으로 깨져야 돼. 벌써 지나갔는데... 그걸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너무 어려워서 설명을 하기도 자신이 없는데, 그냥 해 보겠습니다. 사건이 우리 속에, 우리 역사 속에 사건이 주어지게 돼요. 역사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충실성‘, 다른 말로 하면, ’성실성‘인데, 사람은 자기 역사, 자기 내력, 자기 인생을 꾸미려면, 촘촘하게 자기한테 유리한 건 다 끄집어내야 돼요.

자기 잘난 것, 자기 피해 본 것, 자기 억울한 것, 자기 잘못한 건 다 감추고, 철저하게 충실하게 딱 다듬어야 됩니다. 그 다듬는데 등장한 게 뭐냐 하면, 놀랍게도 '자기는 ’이런 게 기억나? 라고 자기 기억나는 대로 그냥 무심코 해서 충실하게 역사를 다듬었는데, 거기서 나오는 등장하는 부산물이 뭐냐 하면, 바로 ‘주체’라는 겁니다. ‘나 이런 인간이야. 나 이렇게 잘났어, 나 이렇게 슬퍼, 나 이렇게 우울해.  위로 받아야 돼. 나 손해 봤어. 나 이런 인간이야. 동정 좀 해줘.’ 이런 것들이 모아져서 하나의 주체가 이뤄집니다. 근데 나만 그렇습니까? 타인도 마찬가지죠.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죠.

그래서 주체에 대해서 사건이 주어지게 되면, 주체에 뭘 낸다? 구멍을 내잖아요? 구멍을 내는데 이 주체가 충실하다 보니까, 자기 주체 형성에 유리한 것은 채택하고, 자기 주체와 맞지 않다고 여기는 것은 제껴 버리는 거예요. 마치 바리새인이 바라바를 채택하고 누굴 제껴 버립니까? 예수님을. 바라바는 다시 우리 형제로서 이 사회에 섞여 살아도 무방하지만, 예수란 저 작자는 두 번 다시 우리의 이웃으로서 우리와 함께 있으면 절대로 안 된다는 거예요. 그게 예수님을 진짜로 만난 사람의 고백입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어요.

우리가 예수님을 가짜로 생각하게 되면, 주님은 좋으신 분으로 늘 우리 곁에 있고 싶죠. 그러나 바라바 체포할 때 현장 사람들은, ‘니도 예수 한 번 당해봐라.’ 그런 말 안하는가. 절대로 예수그리스도를 두고 싶지 않은 거예요. 그 대신 그들은 뭐를 믿었습니까? 예수 안 믿고 그들은 뭘 믿었죠? 하나님 믿었죠. 하나님 믿으면 되는데, 왜 예수 추가로 믿어야 합니까? 예수님이 오신 것은 ‘느 아비는 하나님이 아니고 마귀다.’ 라고 했어요. 느가 믿고 있는 신은 악마인데, 너희들은 악마를 뭐로 보느냐 하면, 신으로 본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그 신과 자기하고 뭔가 통하는 게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은 사건으로 왔으나 채택을 안 해보는 겁니다. ‘에, 당신은 저리 가.’ 예수라는 이름이 듣기 더러워서 채택 한 것이 아니고, 예수라는 이름은, 앞에서 기능이 나와요. 야곱의 이름은 야곱 적 기능,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기능, 요셉은 요셉기능,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의 기능, 아브람은 틀리죠? 이삭은 웃었다는 기능, 예수라는 이름의 기능으로 나오니까 이 사람이 예수라는 이름 때문에, 채택된 건 아닙니다. 그 당시 예수라는 이름이 흔했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예수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그 기능은 아무나 납득을 하고 이해를 해줄라 해도 이해가 안 되기 때문에, 내 주체 형성에 보탬이 안 되는 거예요. 채택이 안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이런 말씀 있죠? 지옥 간 사람이 묻기를 ‘언제 주님이 헐벗을 때 입을 것을 안 주었고, 언제 목마를 때 제가 물 안 준적이 언제 있습니까? 이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다. 이 지옥 갈 놈아. 이렇게 했다 말이죠. 그러면 왜 그들이 왜 물을 안 주었을까요? 탐탁지 않기 때문에. 자기 주체 형성에 전혀 보탬이 안 되거든요.

거짓 나사로를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품에 안깁니까? 왜 부자가 거지 나사로를 왜 못 본받았을까요? 질문 자체가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왜 부자는 거지를 부러워하지 않았을까요? 질문 하는 내가 나쁜 놈이죠..ㅎ 부자의 주체가 뭡니까? 나는 항상 부자이어야 되는데, 왜 부자여야 할까요? 왜 사람들은 가난한 것보다 부자를 왜 좋아할까요? 그걸 제가 묻고 싶어요. 왜 좋아합니까? 학생 왜 좋아하죠? 문제가 너무 어려워요? 왜 사람은 가난을 싫어하고 왜 부자를 좋아할까요?

부자는 어렵게 말해서 ‘주체의 잉여’ 또는 초과분. 25억 갖고 있던 사람이 20억 돼 보세요. 기분 더럽습니다. 25억 갖고 있을 때 자기 주체는 뭐였습니까? 나는 적어도 25억은 유지돼 줘야 나다운 거예요. 근데 25억 되었다가 주식이 폭락되어 20억 되면, 뭡니까? 자살까지는 안 해도 술 퍼먹을 거예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5억 가졌다가 25억 됐을 때 좋아서 나자빠집니다. 드디어 나는 뭐가 됐다? 드디어 원했던 부자 되었다. 부자가 뭐냐? 초과분이라 하고 주체의 잉여분. 주체의 잉여분은 내 노동의 댓가 보다 더 예상외로 더 주었을 때, 이것을 그들은 뭐라? 축복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처럼. 이걸 축복으로 본 거예요. 그럼 한국교회 축복은 그 성질이 어느 성당과 연계돼 있습니까? 이 지상에 있는 세속적인 선과 같은 노선이죠. 선이 이탈되는 것이 아니고, 축복이란 그 속성을 탁 깨보면 뭐가 있습니까? 교회 안 다니는 사람도 복이라고 여기는 것들과 조금도 어색하지 않고 동일하게 돼 있죠.

이거 한 번 봅시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 행하셨죠? 오병이어. 어려운 말 했습니까?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 사람들은 축복했다 했죠? 그런데 그 현장에서 예수님이 잠시 화장실에 갔다 합시다. 자, 남자들 5천 명씩 앉아. 자 이제 빵 줄게. 아이고, 나 화장실 갔다 올게. 하고 빵 나두고 화장실 간 사이에 5천명에게 배불리 먹였습니다. 예수님 안 계십니다. 그렇다면 그 궤적은 뭘까요? 뭐가 중심이 될까요? 눈에 보이는 게 뭘까요? 예수님이 안 보이니까 뭐가 보인다는 겁니까? 어린아이의 그 도시락이 하나님 앞에 아주 가상한 진짜 값있는 헌물이 되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그렇게 됐다고 생각하겠죠? 뒤늦게 주님이 오셔가지고 뭐하고 있노? 먹고 있네. 아이고, 주님보다 애의 희생하는 저 마음이 월등합니다. 할거예요.

인간은 이처럼 모든 것을 자기가 이해되고 납득이 되는 잉여, 초과분, 나보다 더 초과분 그것을 찾는데, 그 찾는 방법이 뭐냐? 납득이 되는 식으로 궤적을 찾기를 원합니다. ‘역시 우리는 동전 하나라도 어린 주일학교 헌금 무시하면 안 돼, 왜? 그것이 큰 이적을 찾기를 원합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안하고 복 받는다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조차도 해낼 수 없다고 우리는 철석같이 믿습니다. 죄인입니다. 아! 정말 성질납니다.

여러분! 구원은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와요. 왜? 하면 할수록 그것이 내 주체가 개입하기 때문에. 주체라 하는 것은 첫 번째 사건의 개입이고, 두 번째는 충실성입니다. 개입만 하는 것이 아니고 그걸 다지고 다져요. 1998년도에 이 자리에서 내가 은혜 받았다고. 그건 잊어버리지도 안 해. 노상 방뇨한 것은 생각 안하고...ㅎ 그걸 잊어버리지 않아요.

사람이 살고자 하는 그 순간부터 사람은 남을 밀쳐야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밀치고 싶지 않더라도 저쪽에서 떠밀어요. 사기를 당해봐야 사기를 치는 거예요. 가만히 있는데 사기를 칠 리가 있습니까? 사기를 당했으니까 복수하느라 엉뚱한 사람에게 사기 치듯이. 밀어 줘야 밀리고 하는 이 시대에, 버스 타봤잖아요? ‘어이구, 미안합니다. 뒤에서 미니까, 차가 흔들리니까. 우리는 같이 흔들리는 거예요.

다 같이 이 세상은 노동하지 않더라도 초과 잉여분이 주어지는 것이 축복이라고 우리가 다 같이 그렇게 습득하고 납득하고 교육받고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이 언어개념, 이 의식개념에서 이탈되면 이단 돼요. 그런데 그 게임과 룰(rule)을 하나님이 인정했습니까? 안했습니까? 인정한 적이 없어요. 그걸 인정했는지 당신이 어떻게 알아? 주님께서 어떻게 왔습니까?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었습니까? 주님이 이 세상의 게임에 동의했습니까?  뭐 거룩한 헌물 요? 주님께서 뒤집어엎었어요. 이것도 헌금이냐? 다 찢어버렸어요. 거룩한 성전?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헐어라. 성전 헐어라. 헐면 내가 사흘 만에 지을게. 사람들 머리 계산하고 머리 굴립니다.’자, 헐면 지금 어디서 회비를 모아서, 혹은 어디서 일군을 모아서 46년간 지어도 못 지는 이것을 어디서 크레인 와서 어떻게 지을까? 또 인간의 육적으로 납득이 되는 식의 납득되는 식의 속도나 스피드가 나는 식으로 사흘 만에 짓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짓는 방법은 뭐냐? 바로 고따위 생각 때문에 죽는 그것이 주님 짓는 방법 이예요. 그러니까 주님이 하시는 방법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반드시 너희들이 납득이 되는 그것이 계속 그것이 예수님을 죽게 만들고 죽에 만들고 못 박고 못 박아서 그것을 주께서 살려내는 방식으로 주께서는 다시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임을 당한(한번 보세요. 어렵습니다) 어린양이 하나님의 계시를 연다는 말은, 결국 안에 있는 계시는 무슨 중심으로 해석해야 맞다? 주 예수님이 왜 죽었을까를 중심으로, 십자가 중심으로 해석을 해야 그게 그 해석이 진짜로 납득이 되는 사람은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열어야 성령 오니까. 성령 받은 사람은 그 안쪽에 있는, 모든 성경,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을 예수님 십자가 어린양이 왜 죽었는가. 중심으로 해석을 해야 그게 정답이라 말이죠. 그 정답은 정답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정답 때문에 사도요한부터 모든 사람들은 그 뒤에 보면 순교의 길을 가게 됩니다.

그런데 순교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고, 제가 첫 번째 강의 했잖아요? 연어가 폭포수를 올라가는 것처럼, 오르는 과정 이예요. 왜 죽는 사람,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주님께서는 복음을 바라본다고 정신없이 살다보니까 죽게 된 거예요. ‘하나님, 나 죽습니다. 나 고생하죠? 이래 죽어서 천당 간 사람 없어요. 나는 뭘 해도 순교해도 죄인이니까, 주님 십자가 보다 보니까 순교 자리에 올라간 거예요.

그게 오늘 본문에 보면, 24장로예요. 24장로의 자리 배치를 보세요. 이건 간단하지만, 속는 셈 치고 한번 믿어보세요. 24장로가 4줄, 4줄, 4줄,4줄,4줄,4줄, 이렇게 앞을 향하여(골든 벨 예능프로에서처럼) 24배치가 어떻게 됐어요? 어린양을 중심으로 전부 다 나란히 봤습니까? 어린양을 중심으로 빙 둘러 있죠? 뭐를 봅니까? ‘어린양’ 이 말은 예수님과 우리와 관계있다? 없다? 관계있다 말이죠. 예수님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기능적으로 표현하면 뭐가 돼요? ‘어린양’이죠? 앞에 뭐가 붙죠?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을 왜 쳐다봅니까? 왜 쳐다봐요? 죽으면 죽었지 왜 쳐다봐요? 납득이 된다 말이죠. 비로소 이게 이해가 된다 말 이예요. 왜 죽었는지. 죽음의 원인 제공자가 누굽니까? 바로 나 아닙니까? 저 때문에 돌아가셨잖아요? 이런 식이예요.

저는 분명하게 이것을 지금 이 지상에서부터 궤적을 남기자 이 말이죠. 그래서 교회에 어린양을 세우고 이런 것은 하지 말고, 십자가 복음을 전하자 말이죠. 복음을 전하면 거기에 나와 내 인생 전부와 관련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그게 이미 지상에서 또 이미 주님의 끊어지지 않는 관계 때문에 산 사람 됩니다. 죽어서 가는 세계가 아니고, 이미 이 땅에서 죽었다가 살아나서 산체로 주님께 가는데, 그걸 육의 사람들은 순교했다.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지껄이죠. 저 사람 죽었어. 예수 믿다가. 본인은 죽은 것이 아니고, 자죠. 주무십니다.

제가 주일날 설교 했잖아요? 자는 사람 깨우면 기분 나쁘다고. 이미 주 안에서 죽는 것은 죽는 것이 아니고, 잠자고 있습니다. 여기 남편 옆방에 자고 있으면, 남편 혹시 지금 어디 갔습니까? 죽었습니다.,ㅎ 뭐라고 합니까? 잔다고 하죠. 다른 말로 그 분 아직 살아있습니다. 이래 되죠. 인구조사 한다고 딩동 하고 어떻게 됐습니까? 아버지 어떻게 됐습니까? ‘아버지 죽었습니다.‘ 아니죠? 아버지 주무십니다. 아버지가 늘 주무시지 않지만...

이러한 사고인식의 변화, 그것은 뭔 뜻이냐 하면, 일종의 고집인데요. 나는 세상에서 조립된, 세상의 육이 그동안 나에게 알려준 그 기준을 따르지 않겠다. 나는 비로소 성령이 와서 예상 밖의 하나의 사건으로서 주어진 그것을 보겠다. 그럼 진짜 사건은 논리를 따져 보세요. 예수님은 죽었다가 사셨죠? 여러분 속이는 거 아닙니다. 잘 들어보세요. 예수님은 죽었다가 사셨죠? 죽은 척 한 것 아니죠? 그런데 우리 인간은 죽음한테 못 이기죠? 히브리서 2장에 보면, 죽음에게 못 이기죠. 어느 인간도 죽음한테 못 이기죠? 자기가 이기면 자기가 알아서 구원 받으면 되지만, 아무도 못 이기죠.

그렇다면 죽었다가 사신 분의 영이 우리에게 임해 버리면, 우리는 이 안에서 어떤 작용이 일어나느냐 하면, 죽음보다 더 센 힘이 뭐냐 하면, 죽었다가 사신 힘이, 현재 내가 꼼짝 못하고 있는 죽음보다 더 세게 작용함을 알겠죠? 이게 바로 십자가 사건이 우리에게 오는 하나의 궤적 이예요. 변화입니다. 이렇게 변하게 되면,  고린도후서 5장에 나오죠? 예수를 믿는 자는 죽었다가 사신 자를 믿기 때문에, 이제는 예수를 믿는 자는 자기를 믿지 않고, 죽었다가 사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함이라.

여기서 주의 할 것은 여기에 우리는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아니고 죽었다가 ‘예수님에 영’에 의해서 살아난 사람이죠? 그렇다면 우리의 행함은 계속 뭐가 됩니까?  계속 죽어있어야 주님의 영이 계속 살려줌이 바깥으로 증거 되겠죠? 그렇다면 죽은 우리가 행할 수 있는 선한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없어요. 근데 개혁주의 신학에 뭐라 하느냐 하면, 옛날에는 우리가 죄 때문에 율법을 못 지켰는데, 성령 받고 나면 율법이 요구를 이루자는 거예요. 율법의 요구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율법의 요구냐 아니냐 하는 그 기준은 우리한테 하라는 게 아니에요. 우리 양심과 선악과 따먹은 양심 전하는 게  아닙니다.

뭐가 나쁜 짓이냐 하면, 행함이냐 행하겠다는 것이 나쁜 짓인데, 우리는 그렇지가 않고, 행함으로 잘하면 될 거 아니냐는 거예요. 그게 선악 구조예요. 예수 믿고 착하면 되잖아. 술 끊으면 되잖아. 이래 나온다 말이죠. 그건 우리가 알고 있는 궤적입니다. 우리 육적 궤적. 죽은 자가 뭘 합니까? 자동차 사고에 대해서 뭣도 모르는 게 자동차 사고 처리한다고 더 사고내지 마시고, 하이카가 다 알아서 해 주잖아요? 우리는 거듭났다는 우리가 왜 행하면 안 됩니까? 우리는 뭐가 아니기 때문에? 메시야가 아니기 때문에. 또 벌써 여덟 번째..ㅎ

우리는 메시야가 아니에요. 처음부터 끝까지 메시야가 해줘야 은혜로부터 은혜로 마감되는 겁니다. 왜 은혜로 했다가 중간에 행함으로 빠집니까? 그런 것은 유대인이 그랬고 바리새인들도 구원 받는 것은 은혜로 구원받고, 홍해 갈라져서 구원받고, 그 담부터 구원받고 난 뒤에 영광 돌리는 것은우리가 알아서 행해서 구원받는다. 이렇게 가르친 거예요. 근데 그것이 설득력이 있다는 거예요. 왜? 그들은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맥락이 같은 예수 믿기 전의 그 맥락과 예수님 만으로의 그 맥락이 같이 연결 되리라고 그렇게 이해한 거예요. 그래 이해가 돼 버리면, 현재 있는 주체가 잠시 흔들렸다가 내 이 주체가 그대로 가요.

그런데 주님의 사건은 뭐냐 하면, 우리가 살아있다는 우리를 구멍을 내버리고 죽게 만들죠. 죽어버리면 여기서 구멍이 나서 찢어지죠. 그러면 우리 주체는 요 가장자기에 임시적으로 형성됩니다. 이게 24장로입니다. 거기에 우리가 어디를 들여다보느냐 하면, 요걸 들여다보죠. 옛날 이거 내가 있던 자린데, 어! 구멍이 났네.  쳐다보니까 거기에 누가 계십니까? 예수님의 주의 이름, 주의 이름은 반드시 모습이 아니고 눈에 띄는 게 아니고, 반드시 뭐로? 기능적으로. 그 기능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죽어도 내가 살아서 너와 함께 있는 거야. 더 이상 너는 이제는 죽은 사람이 아니고 내 안에서 산 사람이야. 독자적으로는 죽은 거지만 내 안에서는 산자야. 너가 죽는 것은 자는 거야.

이러한 성경에서는 보통 이런 뜻이죠. 그러면 우리는 쳐다보죠. 한시적으로. 여기서 쳐다보고, 오후 2시에 여기서 쳐다보고, 오후 4시에 쳐다보고, 한 자리에 머물지를 못하는 겁니다. 왜? 주위의 있는 다른 일들이 변화를 해서 우리는 자꾸 왔다 갔다 해요. 애 아프다 하니까 병원에 갔다가 다시 와서 보고, 상대방 보고 좋다고 까불다가 와 보고, 이래 봐요. 우리는 가장자리를 도는데, 한평생 걸립니다. 항상 사람이 예수 믿는다 할지라도 주님 생각 안 해요. 바빠요. 예배시간에 ‘예, 예, 그거 안 되고요. 3개 5천원(전화 받는 소리). 예 알겠습니다...ㅎ 바깥에 3개에 5천 원 할 때, 이 사람은 장사하잖아요? 그러면 이거 자기의 장사니까 그럼 자기의 주체가 무슨 꾼? 장사꾼. 장사하다 말아먹으면 백수가 되겠죠. 그런데 백수와 장사꾼이 이 사건에서는 차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그래서 이 세상은 어떤 차이도 없습니다. 차이 없게 구원 하시는 겁니다. 어떤 차이가 없이 구원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24장로가 직업이 같을까요? 다를까요? 같다 할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는데, 일체 직업을 묻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직 성령이 임할 때는 직업 보고 임하는 게 아니에요. 창녀다 깡패다 고려하지 않고 임해버립니다. 성령이 임해버리면, 그때부터는 뭐냐 하면, ‘나는 이래서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런 주체가 이런 가스(라캉이 이렇게 지었는데)가 구멍 난 주체가 되죠. 구멍 난 주체를 가지고 공백이라 하죠. 나중에 이걸 집합론하고 연계해서 수련회 때 설명을 할 것이고, 공백이 들어와 버리면, 이 공백 안에서는 뭐가 나오느냐 하면,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나옵니다.

그것이 다윗으로 하여금 골리앗을 칠 때 그 담부터 다윗 주변 사람들은 다윗을 뭐로 봅니까? 골리앗을 이긴 대단한 소년 되게 했잖아요. 그러면 다윗이 그 주체를 소용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수용을 안 했죠.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 할 때, 다윗은 그걸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런 사건을 인하여 점점 더 고난 받죠? 고난 받으니까 시편 22편에 뭐라 합니까? 놀라운 이야기 나오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왜 다윗이 하나님을 믿는 자가 버림을 받는 모습입니까? 그것은 주체에서 나오는 은혜가 뭐냐 하면, 장차 올 메시야가 우리 죄 때문에 담당해야 될 고난이 이 분화구를 통해서 터져 나오니까, 그 가라앉았던 것이 옴팡 다윗에게 씌워진 거예요.

성령이 십자가 영이 오게 되면 우리가 본의 아니게 십자가 길을 가도록 옴팡 뒤집어 씌워집니다. 그럴 때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여호와는 목자시니, 그 담에 뭐가 없죠?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다윗이 재산이 얼마쯤 됩니까? 얼마 있기에 부족함이 없어요? 예? 자기에게 딸린 군사가 몇 명인데 부족함이 없어요? 저쪽은 엄청난데, 수십만인데 이쪽은 오백 명 밖에 안돼요. 왜 부족함이 없어요? 어떤 선 위에 올라가야 부족함이 없어요? 그 선은 뭐가 있어야 결정한다? 아! 오늘 강의 잘 들은 사람은 아는데? 뭐가 있어야? 주체, 주체. 빵꾸  난 주체에서는 내가 이렇게 빵꾸 난 자체가 부족함이 없는 거예요. 왜? 고 다음 차례가 뭐냐? ”내 잔이 넘치나이다.“ 넘치지만 그 사이 가는 길은 ‘주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때리시는 거예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내 상을 차리시고,  내 잔이 넘치나이다.

아까 이야기 했죠? 축복이 뭡니까? 하늘나라의 잉여, 초과분. 아무것도 행함도 없는데, 세상에 생명나무 있는 낙원에서 천국에서 영원토록 지옥가지 않고 살다니...이거는 완전히 덤태미로 이거는 탱 잡은 겁니다.‘ 라는 고백.

그것이 바로 그 맥락이 성령을 받은 다윗의 뿌리나 다윗이나 우리나 공통점입니다. 다 같이 어린양을 중심으로 빙 둘러서 24장로 앉는 자리에 앉아 봅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저희들 남들보다 주체가 얼마나 높아졌는지, 적어도 저 정도라면 이 정도 돼야 된다는 아직도 강렬한 주체의식이 있습니다. 이 시간 십자가를 다시 바라보아서 저 피가 누구 땜에 흘린 핀지를, 저 죽음은 누구 땜에 죽은 죽음인지를, 그로 인하여 우리가 어떻게 해서 공짜로 구원 되었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