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100506a계시록1강a
서울강의-요한계시록001강-100506a(서울하나교회, 이 근호목사)
요한 계시록을 공부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이 성경 끝에 있습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에 요한계시록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그 다음에 있습니까? 없지요. 그러면 요한계시록으로 성경이 끝나는 겁니다. 그렇게 끝나는 이유가 요한계시록이 사도요한에게 주어졌는데 사도가 하는 일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담는 일이기에 마지막으로 사도인 요한이 죽어버리면 그것으로 계시는 더 이상 없습니다.
사도라야 계시를 받는데 사도가 없는 이상 더 이상 추가될 계시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잘난 체하면 곤란해요. 사도로서 모든 계시가 끝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모퉁이 돌이 되어서 그 위에 사도를 통해서 그 다음에 교회를 세우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께서 사도를 우회해서 보통사람을 통해서 교회를 세우는 법은 없습니다.
누군가가 기도원에서 계시 받아서 교회되는 법은 없습니다.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 터 위에 사도 터 위에 이렇게 올라가야 됩니다. 올라갈 때 여기서 성령이 개입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사도들이 아는 것도 성령을 통해서 알게 되고 사도가 예수님을 알게 할 때 성령을 통해서 알게 한 그 성령이 아니고서는 우리가 사도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육으로서는 사도가 아는 예수 그리스도 그 내용을 성령에 의해서 알기 때문에 그 동일한 성령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아니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도 이해 못하고 사도의 말도 이해 못하고 다시 말해서 우리는 교회가 될 수 없는 겁니다. 이렇게 다른 계통은 없다는 것을 제가 강조합니다. 혹 누가 계시 받았다는 그런 것을 부러워하지 마세요.
열두 사도에 의해서 생겨난 이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구약은 사도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 아닌데?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창세기를 비롯한 모든 구약을 사도들이 ‘이렇게 풀어야 옳습니다.’ 라고 해석을 했습니다. 물론 성령을 통해서 합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자기 실력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3년 동안 예수님 따라다니면서 공부했다고 해서 아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와야 바른 예수를 알게 됩니다. 동일한 성령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아니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도를 통해서 알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 한 그 내용에 대해서 사도들이 공부해서 아는 것이 아니고 ‘아하, 창세기는 이렇게 풀어야 아는구나.’ 누구처럼? ‘예수님처럼 창세기를 봐야 되고 예수님처럼 레위기를 봐야 되는구나.’라는 것을 사도들이 성령을 통해서 아는 거예요.
신학교를 가서 아는 것이 아니에요. ‘아, 유대인들이, 바리새인들이 성경을 푸는 식은 엉터리구나. 유대인들이 신명기를 해석하는 그것은 잘못이구나. 아, 그래서는 안 되는구나. 왜? 그들의 잘못된 해석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으니까 그 십자가에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부활이 왔다는 것은 너희들의 창세기 해석은 엉터리였다.’ 그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들의 특징이 뭐냐, ‘독점적’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밖에 몰라요. 어떻게? ‘해석을 하려면 사도처럼 해석을 해야 이것이 옳은 해석입니다.’ 라고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모든 해석을 일임했습니다. 그것도 성령을 통해서. 지금 여러 번 이야기합니다. 사도바울이 겸손했다, 이런 인간적인 요소를 자꾸 집어넣지 마세요.
사도바울이 기도를 많이 해서, 이런 것을 집어넣지 마세요. 사도 개인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이 아니고 부활하셔서 성령을 주시니까 사도가 그것을 알게 된 겁니다. 갈라디아서 1장에 보면 ‘이것은 내가 사람에게 배운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게 직접 받은 것이다.’ 라고 합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갈 1:1)
특징이 뭐냐, ‘내가 사람을 좋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합니다. ‘사람들이 육적으로 복음을 납득하는 식으로 내가 복음을 설명한 적이 없다.’ 사람을 기쁘게 한다는 말은 사람으로 하여금 납득이 되게 하는 식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사람을 기쁘게 하면 내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해서 ‘사람이 납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임해야 알 수 있는 것만 나는 이야기한다.’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그래서 사도바울의 로마서나 갈라디아서, 사도요한의 서신들에 보면 ‘구약성경 창세기는 이렇게 풀어야 옳습니다.’라는 내용이 사도들의 편지와 복음서에 쫙 나와 있어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 1:1) 이것이 창세기의 설명이에요. 창세기를 문자적으로 봐서는 안 되고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준해서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을 아는, 예수님이 하신 일을 통해서 창세기를 보게 되면 예수님은 창세전부터 계신 분이라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는 겁니다.
그냥 문자가지고 막 풀면 안 된다는 거지요. 이것을 다른 그림으로 설명하면 성경은 문자로 되어 있습니다. 이 두꺼운 박스처럼 생긴 것을 위에서 보면 문자(층)이 보이지요. 프리셉트나 여호와의 증인들 성경구절 외우는 것, 선교단체에서 제자 훈련할 때 성경을 문자로 외웁니다.
성경을 문자로 외우는 것은 누가 잘하느냐, 성령 받지 않은 유대인들 바리새인들이 성경을 문자로 어릴 때부터 달달 외웁니다. 시편 같은 경우에는 바리새인들이 이미 어릴 때 다 외웠어요. 어릴 때부터 교육받기를 이마와 손목에 하나님의 율법을 잡아매면서 ‘우리는 특별한 선택받은 민족이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씀공부에 매진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구약성경을 잘 아는 사람들이에요. 이들은 구약전체를 달달 외우다시피 하는데 그렇게 달달 외운 성경해석의 결과가 뭐였습니까? 그 결과는 메시아가 오니까 예수님을 영접할 수 없었잖아요. 그렇다면 그들이 달달 외운 문자적인 성경해석 안에서는 뭐가 발견되지 않느냐,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가 그 안에 담겨 있지를 못하는 겁니다.
아주 희한한 이야기지요? 구약성경대로 메시아가 온다고 자부하면서 기다렸는데 예수님은 자진해서 내가 메시아라고 하고 그들은 자기가 알고 있던 성경을 다 외워서 예수님과 견주어 보니까 그 안에 예수그리스도가 이야기하는 것이 전혀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하, 이거 이단하나 또 나왔구나. 이단 또 나왔어.’
예수님도 인정했거든요.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가 아니면 천국에 못 간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역사적 문법적 해석을 다 동원해서 이 표피층에 있는 문자들을 해석했는데 전혀 예수그리스도가 그 안에 들어오지를 않습니다. 문자 속으로 들어가야 돼요. 더 들어가 보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이 안에서 서로 통하게 되는 겁니다.
표피, 문자에 머물지 않고 그 속으로 깊숙하게 들어가서 일관되게 전체 해석을 하는 것, 이 해석을 다 하신 분이 있어요. 그 해석을 다 했기에 ‘다 이루었다.’는 발언을 누가 했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사건 때 이 이야기를 했지요? 십자가사건입니다. 이 논리를 여러분들이 놓치면 안돼요.
누구하고 이야기할 때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말고 십자가로 해석하라.’는 그것을 논리적으로 이야기하라고 하면 설명할 수 있어야 돼요. 아까 한 것 잊어버렸지요. 다시 할게요. 문자적 해석에는 뭐가 안계시다? 예수그리스도가 안계셨어요. 계셨더라면 그들이 알아챘습니다. 전혀 안계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아는 것은 어떤 누구도 아니고 반드시 여기에 뭐가 개입되어야 합니까?
성령이 와야 되고 성령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지시고 난 뒤에 우리에게 성령세례를 주시기 때문에 사도들이 성령세례 받지 아니하면 전혀 그들은 예수님을 증거 할 수 없는 거예요. 3년 동안 예수님 따라다니면서 배운 자기 실력가지고 하면 안 됩니다. 그 실력 가지고 해 봐야 베드로는 또 배반할 거예요. 가룟유다는 또 팔아먹을 것이고, 그것이 인간의 한계니까.
제가 지금 자꾸 강조하는 것이 인간은 안 된다, 인간은 안 된다, 이것을 여러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안 된다, 여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그 뒤에 뭘 붙이냐 하면 ‘성령이 오시면 하신다.’ 이것을 붙이는 거예요. ‘인간의 육으로는 안 되는데 성령이 오시면 된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까 영이 와야 된다.’
그런데 성령이 오신다는 것이 서랍장에서 물건 꺼내듯이 성부 끄집어내고 성령 끄집어내고 성령 끄집어내고 신발장에서 등산화 끄집어내듯이 우리가 끄집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성령은 주셔야 받는 겁니다. 안주면 어떻게 하는가? 만약에 안주면 우리는 성경해석 못하느냐? ‘안주면 어떻게 하는가?’라는 질문은 성령이 필요치 않은 사람 같으면 그런 질문 자체를 하지 않지요.
우리의 문법적 해석으로 충분하다, 이렇게 이야기하지 ‘안주면 어떻게 하는가?’라는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우리는 육으로 하면 안 됩니다.’라는 것을 전제로 하기에 성령 받은 사람일수가 있어요. 말이 참 어렵습니다. 뭔가 ‘내가 육으로 아는 이것이 미흡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 자체가 성령을 받았기에 나오는 고백일수가 있다는 말이지요.
성령이 필요치 않은 사람은 ‘성령이 뭐가 필요해. 우리 실력대로 문법적 해석 하면 예수 다 튀어나오지. 구약도 다 그렇게 되지.’ 라고 아주 으스대겠지요. 문자적 해석으로는 안 되고 그 밑바닥에 있는 ‘다 이루었다.’로 해석됩니다. 모든 성경말씀을 다 이룬 겁니다. 다 이루었으니까 방향을 거꾸로 돌리자 이 말이죠.
색깔을 바꾸어서 써보겠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여기에서 다 이루었으니까 우리는 거꾸로 소급해 가는 거예요. 어째서 다 이루었느냐를 십자가를 가져다가 창세기에 대보고 레위기에 대보고 민수기, 사사기, 예레미야, 에스겔, 말라기, 마태, 마가 전부 다 십자가를 가져다 대는 거예요. 그렇게 대고 다시 오는 겁니다.
두 번 타는 보일러가 따뜻하다고 하지요. 그것처럼 다시 십자가로 돌아오는 겁니다. 그래서 마지막 고백이 뭐냐, ‘역시 다 이루었다.’가 되는 거예요. 논리가 이렇습니다. 첫 번째 문자적해석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았다. 두 번째, 성령님으로 예수님과 사도의 관계가 맺어졌다. 성령세례 받지 않은 사도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 같은 경우에는 ‘부활하신 주께서 마지막으로 미천한 나에게도 보이셨다.’(고전 15:8)고 합니다. 세 번째, 사도가 예수님을 알게 했던 그 성령이 우리에게 동일하게 주어지지 아니하면 우리는 예수님을 알 수 없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모든 해석을 사도에게 일임했기에 그 사도의 해석을 영적으로 해석하는 데는 성령께서 개입하신 예수님과 사도들 사이의 그 관계를 가지고 우리와 사도사이를 연결시켜 줘야 된다.
이것이 논리적으로 합당합니다. 이것이 합당하게 되면 예수님께서는 ‘다 이루었다.’고 했고 그것을 사도가 기록을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 같은 경우는 ‘다 이루었다.’에서 펼쳐지는 그 내용을 우리에게 소개했습니다. 예수님과 사도사이에서 ‘다 이루었다.’가 이 사도에서 우리에게 ‘다 이루었다.’로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무엇이 다 이루어졌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어떤 것들이 다 이루어졌는가?’를 보는데 그것은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 나오거든요. ‘하나님의 의가 다 이루었다. 죄에서 용서가 다 이루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하자 없이 다 이루어졌다.’ 모든 것이 다 이루어 진거예요. ‘율법에 대해서 다 이루었다.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율법을 다 이루었다.’ 이렇게 ‘다 이루었다.’가 나오는 거예요.
특히 오늘 강의에서 어려운 대목이 뭐냐, ‘역사를 다 이루었다.’는 이 대목입니다. 이 대목 참 어렵습니다. ‘의를 다 이루었다. 용서를 다 이루었다.’ 이것은 익히 다 들은 거예요. 복음을 아는 사람은 다 압니다. 그런데 제가 ‘역사를 다 이루었다.’ 할 때 이것은 동의하기가 힘들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내일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리고 내년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일이 있고 내년이 있다는 것을 다 알기 때문에 ‘역사를 다 이루었다.’ 하는 것을 선뜻 받아들이기가 굉장히 난처합니다. 오늘 이것까지 진도 나갑니다. 늦게 오신 분들을 위해서 강의를 다시 하겠습니다. 이것은 자꾸 반복해도 좋습니다. 창세기의 구약을 먼저 해석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유대인들이고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양심, 신앙심에 입각해서 구약을 달달 외우다시피 해석을 했는데 그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바울되기 전의 사울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인’이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사람’입니다. 성경 지키기 대회하면 맨 날 일 등하는 사람입니다. 그 정도로 율법의 흠이 없는 그 정도로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소식을 듣고 자기들이 알고 있는 성경과 대조를 해보았지요. 자기들의 성경해석에 예수그리스도가 나타나느냐, 보니까 안타나는 거예요.
안 나타나니까 당신은 사기꾼이라고 몰아세워서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 죽였던 예수를 하나님께서 되살림으로 말미암아 누가 틀리고 누가 맞았느냐, 예수 그리스도가 맞고 바리새인들이 틀린 거예요. 바리새인이 틀렸고 사울이 틀렸다는 말은 인간적인 문법적 역사적 해석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는 그 자체가 틀렸다는 이야기예요.
성경을 그리 해석해서는 안 되고 인간들이 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해석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이게 말이 됩니까? 인간들이 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해석을 해야 된다고 한다면 인간들 쪽에서 해석을 아예 안하고 말지 왜 합니까? 못한다면서요? 못하면 안하면 그만이죠.
예수님께서 성경을 해석했던 성경전문가들로부터 배척을 받아서, 예수님에 대한 이해는 인간의 문법적이고 역사적인 해석을 해서 될 문제가 아니고 다른 방식이어야 된다. 다른 방식이어야 되는데 그 방식에 대해서는 예수님과 우리가 직접 상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게 오늘 강의의 포인트에요.
예수님과 우리가 바로 상대하면 안 되고 예수님께서 사도에게 맡겼고 사도들의 신약성경이 뭐냐, 구약성경의 해석서입니다. 구약성경은 이렇게 해석해야 되고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렇게 해석해야 된다, 라는 해석서가 마태복음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 나옵니다. 우리가 하려는 요한계시록도 예수님에 대해서는 이렇게 해석해야 옳습니다, 라는 해석서가 요한계시록이에요.
그런데 예수님과 사도 사이의 해석은 사도가 또다시 인간인기에 바리새인처럼 문법적으로 육적으로 해석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해석해서는 안 되고 성령님을 통해서 오는데 그 성령님이라 하는 것은 십자가 지시고 오신 영이기 때문에 십자가 지신 그 ‘다 이루었다.’를 근거해서 예수님을 해석했고 그 해석과 같은 해석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님을 모르게 되어 있다는 것이 신약성경의 사도들의 일관된 해석입니다.
교회라는 것은 실제 나타나는 현상적인 것이지요. 교회라는 것이 올라올 때 다른 인간들을 통해서 올라오면 안 되고 반드시 사도를 통해서만 접근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12사도를 통해서만 접근해야 되는데 이 12사도의 이것이 바로 신약성경입니다. 왜냐하면 12사도가 죽어버리면 요한계시록도 끝나고 ‘더 이상 보태거나 빼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았던 사도의 그 방식대로 예수님을 알아야 그것이 성경에서 인정하는 유일한 교회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가 예수님을 알았던 방식 말고 우회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예를 들어 기도원에서 계시를 받았다든지 이런 식으로 교회를 생각하는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교회냐, 아니냐 하는 것은 사도들이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를 해석할 때 그 해석방법으로 사도의 서신서와 복음서를 해석하는 교회만이 교회가 되는 겁니다. 논리가 점점 더 중첩되면서 자꾸 포개지지요? ‘하나교회가 교회입니다.’ 간판 달렸다고 교회입니까? 간판은 2만원만 주면 달거든요. 예를 들어서 예를 들어서 ‘여자는 교회에서 기도할 때 머리에 수건을 쓰라.’고 했는데 ‘하나교회여자교인들도 교회에서 기도할 때 머리에 수건 쓰니까 교회 맞다.’고 나서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수건 이야기 하려고 신약성경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다 이루심을 위하여 신약성경이 있기 때문에 어떤 권면이나 명령이든 간에 반드시 그 내부에 파고 들어가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를 해명해 낼 수 있어야 돼요. 그래서 두 번 타는 보일러가 따뜻하다고, 문자에서 내려와서 십자가로 가시는 방식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어요.
‘바리새인들이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그 해석은 잘못되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라고 해석하는 그것이 한 번 타는 것, 이것이 ①번이고 그 다음에 ②번은 바로 여기, 예수님의 십자가에서부터 보고 다시 신약성경을 해석하는 것, 이것이 ②번, 이 ②번의 해석된 것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해석하기 위해서 다시 한 번 보일러 때는 이것이 ③번, 그래서 결론은 뭡니까? ‘십자가에서 다 이룬 것이 맞구나.’라고 되는 겁니다.
그러면 교회라는 것은 뭐냐, ‘다 이루었다.’ 할 때에 그 이루심의 주체가 누굽니까? 우리가 다 이룬 것이 아니고 누가 다 이루었습니까? 예수님이 다 이루었기 때문에 교회가 전도하거나 전파할 때 교회가 주체가 아니고 ‘예수님이 다 이루었습니다.’라고 나오는 그것을 가지고 ‘예수님의 증인’이라고 합니다.
내가 다 이루었다, 가 아니고 누가 다 이루었다? 주체가 누구다?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 하는 겁니다. 이러면 요한계시록 해석의 토대가 잡혔지요? 아하, 요한계시록의 어떤 대목을 푹 찔러도 거기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를 드러내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문법적 역사적 해석의 숲을 파고 들어가야 됩니다.
그런데 제가 남겨놓은 것이 있어요. ‘구원 다 이루었다, 천국 다 이루었다, 죄용서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 이렇게 하는데 여기 뒤에 하나 무엇을 남겨놓았습니까? ‘역사도 다 이루었다.’ 하는 말을 이제부터 설명하고자 합니다. 저도 기대가 됩니다. 여러분도 기대가 되지요?
‘역사를 다 이루었다.’ 할 때에 이것이 무슨 이야기냐? 예수님의 십자가를 분석해 봅시다. 예수님의 십자가, 여기에 오리가 달렸습니까, 개가 달렸습니까? 십자가에 어떤 사람이 달렸지요. 사람이 달렸으니까 여기에 피가 흘려지고 살점이 찢겨지지요. 둘 다 죽음이니까 하나로 ‘피’라고 합시다. ‘주님의 피로 구원받는다.’ 해서 ‘피 언약’이라고 성경에 되어 있으니 ‘피’ 하나로 통일해 봅시다.
‘예수님이 피를 흘렸다.’고 할 때에 이것은 사람의 피도 아니고 오리의 피도 아니고 그냥 사람의 피거든요. 그러면 십자가사건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하나님과 인간을 다룰 때 십자가를 통해서 다루어지겠지요. 십자가 말고 다른 식으로 다루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구름 속에서 하나님이 ‘십계명을 지켜라.’ 이렇게 나온다면 이것은 십자가 말고 다른 계통이잖아요. 그 소리에 대해서 ‘아멘, 지키겠습니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이 관계 사이에 뭐가 없어졌지요? 십자가가 필요치 않지요. 산상설교에 ‘형제를 라가라고 욕하는 사람은 살인죄를 저지르는 것이다.’라고 외치면 ‘예, 알아서 주의하겠습니다.’라고 되어버리면 뭐가 필요 없어요? 십자가 필요 없지요.
‘물위를 걸었다.’ ‘우리도 물위를 걷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십자가는 필요 없다는 말이지요. 십자가에 달린 사람이 없이 그냥 십자가 같으면 이것은 남묘호렌게쿄처럼 나무가 무슨 효과가 있는 것처럼 되고 십자가는 신기 있는 나무가 있어서 여기서 희한한 에너지가 나온다는 식이 되어버리죠. 그게 아니고 이 십자가에 사람이 있어요.
이 십자가는 사람이 죽은 거죠. 사람이 죽었다는 말은 사람을 죽이고부터 시작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사건이라는 것은 그 사람을 산 사람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고 죽여 놓고 시작하는 겁니다. 죽은 사람 째봐야 소용없지 않습니까? 사람을 죽여 놓고 시작하는 거예요.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이 다 죽었다.’(고후 5:14)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기로는 여기 십자가에 죽으신 분이 둘도 아니고 한 사람이지요. 그런데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했거든요. 이 십자가에 들어갈 데가 어디 있다고 기어들어갑니까? 희한하지 않습니까? 저 혼자 희한한가요?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 혼자 다 이루셨는데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뭐라고 합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잖아요.
그러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뒷부분을 들춰보자고요. 들춰보니까 여기 누가 나와 있어요. 밖에서 보면 예수님이 혼자 달렸는데 그걸 들춰보니까 예수님이 구원해야 될 사람하고 같이 죽은 것이 이 뒤에 들어 있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고 그 뒤에 같이 달려 있는 사람을 역시 사람이니까 man1, man2, man3, man4 이렇게 죽 나온다면 이 예수님 죽은 이 뒤편에 가담되지 않으면 구원을 못 받습니다.
그래야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 내 안에 사는 것이 내가 아니고 그리스도가 산다.’고 되는 겁니다. 이 뒤에서는 뭐만 제공하느냐, 껍데기만 제공하고 실제로 사는 것은 누가 살고?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셔서 우리 껍데기를 사용해서 예수님이 사시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할 때 그 십자가를 분해하고 분석해보니까 그 십자가 안에서 어느 누구도 산 사람은 전혀 없어요. 다 죽었어요. 예수님도 죽고 다 죽었어요. 다 죽었는데 그 중에서 단 한분만 살아났지요.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그 십자가 뒤편에 죽은 사람들은 껍데기밖에 없는데 그 껍데기 속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들어가니까 부활의 요소가 이 껍데기 안에 들어가 있으니까 이 껍데기가 다시 산 것이 돼요.
풍선은 스스로 뜨지를 못합니다. 풍선에 헬륨가스를 푸욱, 하고 집어넣으니까 그 헬륨가스 때문에 풍선이 뜨잖아요. 풍선이 자기가 무슨 재주로 뜹니까? 자기가 무슨 재주로 자기 힘으로 천국을 갑니까? 이미 천국에 가셨던 분의 능력이 오니까, 이것을 로마서 8장에서는 ‘이미 죽었다가 다시 사신분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죽을 너희 몸(풍선)도 마지막 때는 살리라.’고 합니다. ‘너희 안에 있는 헬륨가스 때문에 너희 몸(풍선)이 산다.’고 합니다.
참 쉽지요. 무지무지 쉽지요. 껍데기만 제공하면 돼요. 주님 앞에서 우리는 비우면 돼요. 껍데기 제공할 때 그냥 제공하지 말고 ‘저 죽은 놈입니다.’ 하고 제공하면 돼요. 누가 광고했던 그 홈쇼핑에서 판 음식이 있습니다. 게장인데 그 게가 껍데기가 있잖아요. 우리가 그 게장 껍데기고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담긴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껍데기인 우리 자신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임하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랬던 사람이 누구냐? 이걸 직접 우리에게 끌어와서 그게 나다, 나다, 하지 말고 이러한 이야기를 우리보다 먼저 이해했던 사람이 누구라고 했습니까? 열두 사도, 그 열두 사도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교회라고 합니다. 예수님과 열두 사도 사이에 알았던 그 비밀스러운 관계를 열두 사도만 아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임하니까 열두 사도가 이야기하는 내용을 영적으로 알아듣는 사람들 그 무리, 그것을 교회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라 하는 것은 반드시 사도가 이해했던, 사도가 전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같이 증거 할 때 사도처럼 그들은 교회를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에 하나 남아 있는 것이 역사인데 그것이 어떻게 되는가? 십자가를 더 크게 분해하겠습니다. 십자가를 크게 확대시켜 보겠습니다. 이 십자가에 분명히 예수님 혼자 달렸습니다. 좌우에 강도가 함께 달렸지만 예수님이 달린 십자가는 분명히 예수님 홀로 달린 십자가에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 십자가 안을 분석을 했어요.
‘성령을 통해서’입니다. 문자가 아닙니다.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 안을 보니까 누가 있었다? 같이 구원받아야 될 무수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뒤에 같이 포개져 있었던 거예요. 이것을 설명합니다. 이 포개져 있는 사람들 중에 M1을 끄집어 내 봅시다. 그럼 이렇게 되겠지요. 이 사람을 사도바울이 되기 전, 사울이죠, 사울로 쳐 봅시다.
사울이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고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지요. 이 말은 사도바울이 구약성경의 하나님의 계시를 나름대로 문자적으로 해석했다는 말이잖아요. 이것이 고린도후서 5장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나는 옛날에 예수님을 육으로만 알았다.(고후 5:16)
예수님을 몰랐던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더라도 그 안 것이 육으로만 알았다는 거예요. 예수님을 육으로 알았다는 말은 이미 성령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성령을 받지 않고서는 자기가 안 그것이 전부예요. 육이고 영이고 구분이 안 됩니다. 그런데 육과 영을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성령 받아야 나올 고백이에요.
성령을 받지 않으면 뭐가 육인지 뭐가 영인지가 구분이 되지 않아요. ‘나는 전에 예수님을 육으로 알았다.’ 요새 예수님에 대한 소설을 비롯해서 책들이 많이 나와 있잖아요. 신학 책들도 많이 있잖아요. 대부분이 육으로 아는 겁니다. ‘예수님은 겸손했다, 예수님은 인류를 위해서 희생했다, 우리도 본받아서 무소유로 가자.’ 이런 이야기거든요.
그것은 ‘예수님만 육이냐, 우리도 육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할 수 있는 것은 우리도 본받아서 할 수 있다.’ 라고 인간의 가능성을 자꾸 개입시키고자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육으로가 아니고 영으로 알았다는 말은 도저히 우리가 흉내 낼 수 없다는 겁니다. 흉내 낼 수 없는 정도가 아니고 우리는 죽은 자가 되지요.
그런데 여기서 사도가 예수님을 육으로 알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할 때 동원된 것이 뭐냐, 역사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역사예요. 역사를 우리가 판정하고 역사를 우리가 분해, 분석할 수 있고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따로 뽑아낼 수 있다고 장담한 겁니다. 이것을 제가 그림으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사도 주변에 빙 돌아가면서 역사가 돌고 있습니다. 사도가 여기 있으면 그 주위를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자기중심으로 한 바퀴 빙 도는 거예요. ‘나를 위한 창세기, 나를 위한 레위기, 나를 위한 출애굽기, 나를 위한 민수기, 나를 위한……, 나를 위한……, 나를 위한 말라기.’ 또는 ‘우리 민족을 위한, 우리 이스라엘을 위한 …….’ 이렇게 빙 도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역사관입니다. 우리식으로 설명해 봅시다. 여기에 어떤 여자 분이 있다면 한 바퀴 빙 도는 거지요, ‘세살 때 말하다, 일곱 살 때 초등학교 가다, 열다섯 살 때 처음으로 선생님을 사랑하다, 23살 때 결혼, 35살 때 남편 사업, 50살 때 갱년기에 들어가다.’ 이 역사가 없는 자아는 아무도 없어요. 전부 다 나름대로 자기일기장이 있고 자기 역사가 있어요.
이 역사를 가지고 뭘 보느냐, 성경책과 맞추는 겁니다. ‘하나님, 우리 애가 내년에 고3인데 주께서 도와주시면 무엇이든 다 하겠습니다.’ 성경말씀을 똑 떼어서 어디에 집어넣었습니까? 돌고 있는 자기 역사에다 집어넣는 거예요. 사울 같은 사람은 개인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민족을 사랑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역사가 되겠지요.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역사가 누구를 핍박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했습니다. 이 말이 좀 어렵지요. 더 쉽게 하겠습니다. 여러분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쉽게 해야 여러분이 남에게 이야기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의 현재라 하는 것은 나름대로의 과거가 누적이 되어서 현재를 이루어요. 그리고 미래는 아직 미완료로 남아 있습니다. 이 테이프를 돌돌 감아버리면 이렇게 돼요.
만약 어제 두 시간을 기도했다, 그러면 뭘 기대합니까? ‘두 시간 기도했으니까 오늘은 응답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고 자기 주변을 돌아버리지요. ‘내가 기도를 두 시간 하면 응답받는다.’는 것이 성경에 어디에 나옵니까? 안 나와요. 여기에 이근호가 있다면 이 근호라는 인물이 예레미야에 안 나오거든요. 성경에 내 이름이 없어요.
내 이름이 없다는 말은 성경이 내 중심으로 안 움직이는 거예요. 안 움직이지만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나의 긴 꼬리처럼 관심 있는 것은 옆집 아저씨의 역사가 아니라 나의 역사에요. ‘이 흉터가 뭔지 알아? 아홉 살 그 때에 장독에서 장난을 치다가 다쳤는데 흉터가 나서 지금도 그게 남아 있는 거야.’
이런 식으로 항상 자기몸 전체에 남아 있는 것은 자기 과거의 기억들인데 그 기억들이 온 몸을 적시고 있습니다. ‘똥배가 많이 들어갔지? 운동을 좀 했더니 팍팍 들어가는구먼.’ 이렇게 모든 것이, 심지어 자기 똥배 들어가는 것조차 다 과거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이렇게 ‘나’라는 것은 과거 없는 ‘나’가 없어요. 그래서 내가 말하는 미래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그 근거가 과거에서 누적된 현재를 근거해서 미래를 생각합니다.
제가 지금 사기 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봅시다. 누가복음 12장 20절입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라고 하지 마세요. 부자치고 어리석은 부자는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어리석습니다. 똑똑하기에 부자가 된 것이지 바보 같은 인간은 부자 못됩니다. 일단 어리석다는 판정을 우리가 내리지 마세요. 우리는 부자 보면 부러워서 죽습니다. 어리석어도 좋으니까 한 번 부자 되고 싶은 것이 우리 소원입니다.
‘(어리석은 것이 아니고) 그냥 부자가 농사가 잘 되어서 복 받아서 창고를 크게 짓고 곡식을 채웠습니다.’ 어리석다는 것은 누구의 판정도 아니고 하나님의 판정입니다. 우리 같으면 어리석다는 소리 들어도 좋으니까 부자 좀 되어 봤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그런 마음밖에 없지요. 어쨌든 부자가 하는 말이 ‘걱정할 것 없다. 창고에 평생 먹고 살 것이 그득하게 있다.’ 할 그 때에 ‘이 어리석은 부자야, 오늘밤에 네 영혼을 데려가면 누구 것이 되겠느냐.’ 하는 거지요.
이 부자의 역사관은 뭐냐, 일단 현재 곡식이 잘 되었잖아요. 그 현재를 미래까지 확장시킵니다. 내년에도 풍족하게 후년에도 풍족하게 평생토록 편히 먹을 수 있다, 라고 할 때에 이 역사에 누가 침범합니까? 하나님께 그 영혼 데려가지요. 그럴 때 그냥 데려가는 것이 아니고 뭐라고 하면서 데려갑니까? 여기에 뭐가 붙어요. ‘어리석음’이 붙어요.
어리석음이라 하는 것은 ‘어떻게 네 역사만 고집하느냐.’ 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평생 교육받고 늘 느껴지는 것은 ‘내 역사로 인하여 지금의 나가 된다.’라는 것뿐이지요. 과거가 누적되어서 지금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미래를 위하여 현재가 있다.’고 보는 겁니다. ‘네가 만든 미래 말고 주님이 만든 미래 때문에 내가 일찍 와서 어리석음이라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 미리 배치되어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미래를 미리 보다니 미쳤어요? 인간에게서 나오는 그 미래라는 것도 전부 다 과거를 근거로 해서 나온 미래밖에 없는데 터무니없이 알지도 못하는 미래가 나를 덮쳐서 그 미래에 봉사하라고 현재의 존재가 있다는 것, 그것을 모르게 되고 그 모르는 자를 향해서 어리석은 놈이라고 하고 안 어리석자고 하니까 알아챌 방도는 없고 미치겠지요.
이러나저러나 어리석기는 마찬가지에요. 똑똑한 자가 없어요. 개나 소나 전부다 갖고 있는데 보니까 너는 너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나는 나의 역사를 가지고 있어요. ‘어디 출신인데?’ ‘나는 경상도.’ ‘아아, 나는 전라도.’ 전부 다 자기 역사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사도바울보고 ‘당신 역사는 어디 입니까?’ ‘나는 십자가다.’ 하니까 완전히 미친 사람이에요.
어떻게 십자가를 자기역사로 갖고 다닙니까? 전라도냐 충청도냐, 그런 것이 나와야지. 그래야 소통이 되잖아요. 서로 간에 알아먹는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갑자기 ‘전라도’라고 나오니까 ‘옛날에 육으로 알았을 때는 전라도였는데 영으로 알게 되니 나는 십자가다.’라고 해요. 그러면 쥐어박지요. ‘너도 죽어라.’ 그래서 사도바울은 죽었잖아요.
예수님을 몰랐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듯이 예수님의 성령 받은 사도들도 성령 받지 않은 육의 사람들이 죽이고 그 다음에 그 성령을 받은 교회도 성령 받지 않은 교회가 또 죽이고, 무슨 팔자가 이런 팔자가 다 있어요.
문제가 뭐냐, 현재 우리가 역사가 없는 것이 아니고 꽉 차 있어요. 빈틈없이 걸쭉한 역사입니다. 한 번도 과거를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항상 우리는 기도를 해도 온통 과거를 다 끄집어내서 기도제목을 삼는 겁니다. ‘주여, 제가 이렇게 착한 일을 했는데 내일은 어떤 보상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김 중배의 다이아몬드가 문제입니까? 그것보다 더 생각해 주셔야지요.’ 이런 식으로 하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가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는구나. 내 쓴잔을 마실 수 있느냐. 너는 기도 내용에 주여, 주의 쓴잔을 마시게 하옵소서, 왜 그런 내용이 나오지 않느냐.’ 하는 거예요. 미쳤습니까? 남의 쓴잔을 왜 마십니까? 소주잔이나 맥주잔은 들이킬 수 있어도 예수님의 쓴잔을 왜 마셔야 됩니까?
그게 노선이 달라서 그래요. 우리는 우리 역사만 고집하다 보니까 기존의 역사에서 미흡한 것을 미래에서 채우겠다는 식으로 하는 거예요. 지금 자기애가 반에서 15등인데 공부도 많이 하고 기도도 많이 해서 이 애가 5등까지 치고 올라오는 것, 5등이 목표인데 지금 15등이니까 그 비어진 10등만큼 채워달라고 기도하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응답하기를 ‘너는 주님의 쓴잔을 마셔라.’ 그러면 사람들이 타협에 나가요. ‘주여, 쓴잔 마시면 5등 되게 해 주십니까?’라고 합니다. ‘쓴잔을 마시라.’가 목표인데 그것을 수단으로 바꿔요. 그리고 ‘쓴잔을 마실 테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겠습니까?’ 하는데 이것은 흥정에 나서는 거지요.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읍시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결국 인간이 살았다고 할 때는 그냥 산 것이 아니고 자아가 산 것이고 자아가 살았다는 말은 자기역사가 살아 있는 거예요. 어리석은 부자가 미래를 위해서 그런 기도를 했다는 것은 본인의 영혼을 지금도 가져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 영혼은 내 소관이고 내가 버티면 버틸 수 있다는 자기 과거인 역사와 경험을 토대로 한 자아가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야구공을 깨보면 실타래가 잔뜩 엉켜있습니다. 이 비유가 좀 어려우면 양파를 예를 들겠습니다. 양파 안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양파가 들어있지요. 또 깨보면 뭐가 있습니까? 또 양파가 들어 있지요. ‘나’라는 것은 깨보면 하나의 끈이 줄줄 나오는데 그 끈이 뭐냐, 과거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의 역사가 있고 그것을 한 타래로 뭉쳐보면 지금의 나가 되어 있어요.
단 조건이 있어요. 세 살 때부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두 살 때 여러분 뭐 했습니까? 기억이 안 나지요. 그러니까 세 살 때부터의 역사인데 그 이전의 세 살 때까지의 기억은 누구에게 참고인진술을 받느냐, 엄마나 아빠의 진술을 받아서 그 때의 과거기억이 나오는데 그 때의 진술을 받아봐야 그 상황을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자기가 재구성하는 거예요. 재구성을 하는데 네 살 때부터 다섯 살의 기억을 재구성할 때도 그것도 현재에서 임의로 뽑아서 재구성합니다. 일곱 살 때 개구쟁이 짓 한 것들은 다 빼버립니다. 자기가 보기에 괜찮은 것만 다 골라서 지금의 내가 이만큼 되었다는 거예요.
그러니 얼마나 일방적입니까? ‘나’라는 것은 역사의 테이프로 되어 있다. 그 역사의 테이프도 역사전체가 아니고 현재 나의 존재의 정당화, ‘나는 죽으면 안 돼. 남 다 죽어도 나 혼자 살아 있어야 돼.’라는 것을 증명하는데 필요한 자료들만 뽑아서 그것을 나의 역사로 꽁꽁 꼬아서 그것을 지금의 나의 껍데기에 ‘나! 나는 이렇다.’라고 주장하는 거예요.
그런데 예상 밖에 자기가 기대하지 않던 사태가 그 테이프에 적혀 버리면 자살합니다. ‘이럴 것 같으면 내가 왜 살지? 죽는 게 낫지.’ ‘나’라는 것이 없고 그냥 ‘나’라는 것을 분해해 보면 과거에 누적된 기억들만 가득 차 있어요. 인생이란 기억입니다. 기억이고 또 예상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에요.
그러면 그 인간은 과거만 있는데 그렇게 과거만 기억하는 인간을,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을 하나님께서 무엇과 대비하느냐, 십자가의 예수를 보내서 이 몸과 이 뒤에 있는 몸과의 차이성을 보여줍니다. 이 몸은 모든 언약과 말씀은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는 거예요. 예수님 몸에 역사가 휘감겨 있는데 이 역사는 예수님 중심의 역사고 그 뒤의 죄인 된 우리는 내 중심의 역사에요.
내 중심의 역사는 창세기가 기억되지 않고 미가가 기억되지 않습니다. 다만 세 살 때부터 내가 기억나는 것, 그것도 좋은 것만 골라서 기억하지요. 그래놓고는 ‘이런 나를 무조건 구원해 내라.’는 거예요. 복 달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주장하는 복이라는 것, 구원이라는 개념은 누가 맘대로 정한 거예요? 남들 보니까 잘 살고 있으니까 그것이 복인 줄 알고 자기의 과거의 자료 중에서 뽑아내서 남들이 나보고 인생 성공했다고 이야기할만한 것, 자존심 높여줄 만한 것만 뽑아내서 ‘이것이 축복이니까 축복 내놓으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의 축복은 뭐냐, 바로 이 테이프가 죽어버리고 주님의 주로부터 주로 말미암고 주로 돌아가는 이 역사가 휘감기는 것, 이것이 축복입니다. 그리 될 때 나의 자아 속에는 누구의 자아만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남아 있는 주님의 역사가 내 안에 이루어지지요.
죽었던 우리가 부활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나의 소원이 아니고 주님이 내 안에 있으니까 주님이 나머지 일을 하시는 거예요. 누구를 껍데기로 사용해서? 우리를 껍데기로 사용해서. 주님의 남은 언약, 주님의 남은 약속을 실현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내 몸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내 몸이 아니고 ‘너는 값으로 산 것이니 너는 내 것이라.’(6:20 ; 롬 14:8))고 합니다. 그 때 그 말씀이 실감나는 거죠.
다시 천천히 정리해봅시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연구했지만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것이 육으로 봤기 때문에 그렇다고 했어요. 그러면 성령이 와야 예수님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성령께서 오신다는 말은 바리새인들이 육으로 알 때의 예수님을 죽였다는 그 현장성, 그 실제성을 성령께서 이야기함으로 말미암아 육과 영의 차이성을 분명하게 드러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오신 사람은 뭘 아느냐, ‘나 성령 받았다.’ 이게 아니라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축복, 구원, 예수님은 내 역사 잘되라고 벌렸던 잘못된 해석이었구나.’라는 것을 회개하는 것, 그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주여, 나 중심으로 살았군요. 남의 교회 다 망하고 우리 교회 부흥되게 하옵소서.’ 이게 바로 육적인 해석이에요.
‘복음을 아는 교회 부흥되게 하시고 복음을 모르는 교회 망하게 하옵소서.’ 이게 육적인 해석이에요. 왜냐하면 복음을 하나의 수단으로 삼아서 결국 노리는 것이 뭐냐, ‘내가 담임하는 교회’가 된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그 다음날 ‘당신 나가고 내가 여기서 담임목사 할게.’ 하면 그 다음부터 삐져서 ‘이근호가 있는 교회 망하게 하옵고 내가 온 여기 잘되게 하옵소서.’
어떤 사람은 이것을 고칠 생각을 하는데 고칠 생각을 하지 마세요. 고쳐지지 않습니다. 왜 고쳐지지 않느냐, 이 받은 우리 몸인 껍데기가 아까 무슨 껍데기라 했습니까, 게장껍데기, 이게 게장 껍데기이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게장에서 나온 속성이 발휘되게 되어 있어요. 내 힘으로 껍데기를 고치겠다고 하지 말고 그냥 가세요.
가시면 한 번 우리를 고쳤던 성령께서 끝까지 따라와서, 빚쟁이보다 더 심합니다, 사채업자하고 똑같아요, 50되면 50, 60되면 60, 90되면 90까지 기어이 따라붙어서 ‘이게 바로 육으로 알던 예수님이고 이것이 성령주심으로 성령으로 아는 예수님이다.’라고 그 차이를 계속 드러내어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는 것이 내 공로로 이룬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이루었다.’고 그리스도만 증거 하게 하는 겁니다.
죽어가는 현장에서 자식들 보면서 ‘얘들아, 십자가 붙들어야 된다.’ 60되어서 붙들 때하고 다릅니다. 70되어서 붙들 때하고 다릅니다. 90되면 또 달라요. 제가 어제 수요설교 중에 이렇게 했지요. ‘여러분의 친구는 죽음밖에 없습니다. 죽음이 여러분의 친구가 되어야 됩니다. 같은 인간을 친구하면 여러분은 실망합니다. 그런데 죽음은 여러분을 실망시키지 않고 반드시 죽이니까 얼마나 듬직한 친구입니까? 죽음이 친구가 되기에 현재 살아 있는 것이 죽어도 살게 되었다는 것을 증거 할 수 있고 그렇게 증거 할 수 있도록 아주 근사한 친구를 옆에 붙인 겁니다.’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몰라요. 천안 함 침몰할 때 그 죽은 이들이 나이 적어서 죽었습니까? 열아홉 살 먹은 애도 죽었어요. 지난 주일설교에는 이 휘소 박사 이야기를 했지요. 그 분 이야기가 KBS에서 다큐멘터리로 나왔지요. 그 사람이 최첨단물리학을 하는 노벨상 후보감이라도, 아무리 전자입자를 연구했어도 평소에 죽음을 연구한 적이 없어요. 자기는 살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5톤 트럭에 받혀서 죽을 줄이야!
내 이 몸이 죽어야 죽음이 오는 것이 아니고 살아 있어도 항상 죽음이 지배하고 있었던 겁니다. 살았다 해도 실상 죽음이 더 세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친구가 가자, 하면 그냥 따라가 주면 돼요. 아주 팔자 편합니다. 죽음이 가자, 하면 가면 돼요. 사도바울의 소원이 뭐냐, ‘내가 빨리 죽어서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다.’(고후 5:8)라고 했습니다.
목사의 소원도 그것이 되어야 돼요. 목회 빨리 때려치우고 죽어버리면 제일 좋아요. 그게 편해요. 하지만 사도바울이 살아 있는 것은 목사나 목회 때문에 아니라 복음 들어야 될 사람들 때문에 주께서 안 죽이시는 거예요. 안 죽이시는 것과 살아있다는 말은 완전히 반대말입니다. 안 죽이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이지 살고자 애쓰다 보니까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안목, 영으로 사도가 알았던 예수님을 우리가 동일하게 알 경우에만 아멘, 하고 사도의 편지에 동의합니다.
조금만 하고 10분 쉽시다. 예수님의 역사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 휘감겨 있어요. ‘모든 것이 주로 말미암고 주를 통해서 주께 돌아간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구약에서는 ‘언약’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언약대로 내가 죽고 언약대로 부활하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줬는데 우리는 우리가 좋은 것만 기억하는 역사만 칭칭 감고 이것을 주체, 또는 자아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는 다 이루었으니까 의가 되고, 너희 역사만 칭칭 감고 있는 너희는 그 의 앞에서 그 의와 대비해 볼 때 죄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죽을 때까지 인간은 죄에서 못 벗어납니다. ‘예수를 믿었다.’ 그 다음날 되면 그 예수를 믿었다는 것이 ‘예수를 믿은 나, 예수 잘 믿는 나’가 되니까 주님의 역사라고 한 그것이 몇 초도 안가서 주님의 역사라고 말하는 나의 역사가 되었어요.
‘너는 어제 은혜 안 받았지? 나는 받았거든.’ 이러면 또 자기역사가 된다니까요. 주께서 그렇게 자꾸 해줘요. 고마운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의 것을 내 것으로 잡아오는 순간 우리는 시커멓게 더러워지는 겁니다. 주님 것으로 남기면 되는데 ‘주님이 그렇게 했기에 이것은 내 것’이라고 넘기는 순간 이것은 나의 역사로 편입되기 때문에 또 죄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를 죄라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이미 성령 받았기 때문에 죄라고 하는 겁니다.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이게 어때서?’라고 하는 거예요. ‘개척교회 두 군데 하고 기도도 잘하는데 이게 어때서?’ 이것만 고집하게 될 거예요. 성령이 오게 되면 주님의 다 이루심과 나의 다 이루어가려는 것에서 주님의 다 이루심은 의가 되고 나의 다 이루어가려는 것은 죄가 된다.
따라서 성령이 오게 되면 이 재료에다 뭘 붙이느냐, 여기에 예수님의 역사로서 언약을 붙여서 ‘나는 죄인인데 주님은 의인입니다. 주님의 의 때문에 구원받았습니다.’라는 고백을 성령을 통해서 하게 되어서 우리는 예수님의 증거자 되게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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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100506b계시록1강b
서울강의-요한계시록002강-100506b
2010-06-03 20:12:50 녹취 : 오용익
서울강의-요한계시록002강-100506b(서울하나교회, 이 근호목사)
둘째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첫째시간 한 원리를 여기에 그대로 적용시켜 봅시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 하는 것은 여기에 예수님의 역사가 감겨 있다 했지요. 창세기부터 마지막 요한계시록까지 전부 다 감겨있지요. 모든 것이 감겨 있는 그것이 중앙의 십자가를 통해서 ‘다 이루었다.’가 되는 겁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우리가 해석하면 이것은 육적인 해석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 한 이것이 안 나와요. 바리새인들이 그런 해석은 잘 했어요. 인간들이 하는 문법을 따지고 역사를 따지는 소위 문법적 역사적 해석에서는 창세기에서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는 것이 안 나옵니다.
사도처럼 해석을 해줘야 ‘다 이루었다.’가 되는 겁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역사가 그 모든 것이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기 때문에 다 이룬 거예요. 이것을 요한계시록 1장에서는 알파요 오메가, 처음이요 나중이다, 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똑똑함으로 해석을 제대로 했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인간들의 실력으로 성경에서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는 것을 끄집어 내지 못해요. 제가 칠판에 그려놓은 것 같이 여기 교회가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교회가 있습니다. 일곱 교회를 (교회자체만 액면대로 있는 모양새로) 이렇게 그리면 잘못이에요. 일곱 교회는 일곱 교회 나름대로 (토성 주위를 감고 있는 띠 모양으로) 역사가 이렇게 감고 있습니다. 누구의 역사? 자기 좋은 대로의 역사, 그 역사가 감겨있어요.
이렇게 감겨 있으니까 ‘다 이루었다.’고 하는 주님의 새로운 역사의 테이프가 이것을 뭐라고 하겠습니까? 지적을 하겠지요.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야.’라고 지적하겠지요. 이것이 요한계시록 2장에서 3장 내용입니다. 참 쉽죠? ‘네가 알고 있는 인간들이 만든 역사, 교회는 이렇다는 그것들, 아니거든!’
아까 이야기했지만 게장은 절대로 껍데기가 바뀌지 않습니다. 자기역사를 바꾸는 법은 없어요. 교회를 우리 자신으로 봐도 괜찮아요. 우리는 절대로 자기 역사를 포기 안합니다. 교회 나와도 우리는 자존심을 챙기고 나오고 자존심으로부터 시작해서 자존심으로 말미암아 자존심으로 끝나는 것이 우리입니다. 교회 10년 다녀도 마찬가지고 100년을 다녀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는 이것을 절대로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몸 자체가 이미 썩어야 될 몸이고 썩으면서 그냥 썩는 것이 아니고 썩는 티를 내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자기 몸이 늙고 썩어가면서 육적인 집착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결혼을 안 해본 사람은 자식이 얼마나 귀한 줄 몰라요. 마음껏 예수 섬기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처녀로 있던 여자가 결혼을 해서 애기를 낳아보면 달라집니다.
처녀 때는 동기들이 결혼해서 애와 함께 교회 오면 설교에는 집중 안하고 유아실에서 애보기 바쁜 그 철딱서니 없이 보이는 행동들을 보면서 ‘시집가더니 믿음이고 뭐고 다 팔아먹었구먼.’ 라고 그렇게 비난했던 본인이 나이 50넘어서 남편 만나서 결혼해보니까 (50에도 애를 낳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 애가 얼마나 좋은지 목사님 설교가 안 들어오는 거예요. 말은 주님, 하지만 말보다 몸이 더 당기네요. 이론과 몸의 현실이 이렇게 달라요. 운동회 때 달리기 하면 남의 새끼 넘어지며 고소하다, 하지만 내 새끼 엎어지면 자기가 막 운동장에 뛰어 들어가지요. 이것은 말릴 수가 없습니다.
육이라는 내 몸이 철학적인 그리고 신학적인 이론보다 앞장서서 먼저 이야기하고 반응을 나타냅니다. ㅅ(시옷), ㅐ(애), ㄲ(쌍기역), ㅣ(이), 이것은 아무 의미 없어요. 그냥 기호의 나열인데 이것을 합쳐놓으면 화가 나는 거예요. 화가 나는데 한국인에게만 화가 나거든요. 한국말을 모르는 외국인에게 이렇게 하면 ‘음? 뭐?’ 그렇게 하고 맙니다.
이것은 우리 몸에 욕이라는 것이 내장되어 있고 적응이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욕과 일치가 되면 이것은 하나의 기호가 아니고 나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이 되어서 반발을 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의 몸이라는 것은 주변의 모든 상황이 지금의 몸을 만들었기 때문에, 과거가 지금의 몸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 몸을 우리가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가져가면서 ‘나한테 욕하기만 해봐라.’ 하면서 성질부리게 되어 있어요.
그것을 일곱 교회가 보여주는 겁니다. 일곱 교회가 보여주는 것은 ‘다 이룬 것이 아니다. 단, 교회 나름대로의 역사는 교회를 교회답게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못하지만 이런 교회답지 못한 교회가 있음이, 그 자체가 다 이루어진 거예요. 참 어렵지요. 교회가 주님을 닮아야 다 이룬 교회가 아니고 어설픈 교회가 있음 그 자체가 ‘다 이루었다.’의 증거가 된다는 말이죠.
어설퍼야 주님이 다 이루었지요. 어설퍼야 교회를 믿지 않고 예수를 믿고 구원받지요. 교회 믿으면 구원 못 받아요. 왜? 교회는 항상 미완성이니까. 제가 가슴 아파서 하는 이야기에요. 제발 교회에서 교인들 싸운다고 교회 나가지 마세요. 교회라 하는 것은 원래 싸우게 되어 있고 원래 미완성이에요. 교회 믿으려고 교회 온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못났지만 다 이루었다는 것을 공통적으로 바라보기 위해서 교회 온 거예요. 어떻게? 못난 채로. 죽을 때도 어떻게? 못난 채로 죽는 거예요. 못난 채로 와서 못난 채로 죽으면서,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믿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교회 다니면서 예수 믿자, 그 말입니다. 교회 다니면서 교회 믿지 말고.
여기 하나교회, 우리교회, 화평교회 죽 있습니다. 믿지 마세요. 믿을게 못됩니다. 믿을게 못되는데 교회를 때려치우지요. 아니요. 이렇게 미완성임을 드러낼 때, 이렇게 미완성임을 드러내게 하시는 분이 교회를 오른손으로 쥐고 있는 주님의 소관이라는 것을, 이 못난 것을 통해서 잘난 주님을 믿을 때 비로소 이 못남의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지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교회 오실 때는 ‘이 하나교회는 뭐가 못났느냐.’ 그것만 찾아서 오시기 바랍니다. ‘우리 목사님은 어떤 점에서 부족하지? 우리 집사님은 뭐가 못났지? 저 못난 인간을 주께서 구원하셨구나. 나도 못났는데 구원하셨구나.’ 다 같이 대화할 때 그리스도의 다 이루심을 통해서 서로가 대화가 돼야 됩니다.
‘집사님, 머리 어디서 하신 겁니까? 그것도 머리라고 하신 겁니까? 역시 싼값에 했구먼.’이렇게 하지 말고 ‘집사님은 주께서 어느 미장원에 가게 하셨습니까?’ 하는 식으로, 또 ‘그 머리, 다 이루었네요. 완벽한 머리입니다. 이상하지만 완벽한 머리입니다.’ 해서 못난 것 자체를 완벽하게 바라볼 수 있는 그것이 영적인 안목입니다.
내 육적인 안목으로 볼 때는 분명히 미흡한 것이 많은데 그 사람이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는 완벽한 겁니다. 주님께서 쥐고 있기에. 그래서 일곱 교회라는 것은 앞으로 두고두고 모든 역사적 교회가 여기에 다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일곱 교회 뒤에 보면 여기에 우리교회도 있어요. 이 뒤에는 하나교회도 있어요.
이렇게 있는데 이 일곱 교회만이 구원받습니다. 이 일곱 교회의 특징이 뭐냐, 책망을 받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다 이루심을 증거 하는 교회지요. 그렇다면 일곱 교회에 있는 사람들은 뭐냐 하면, ‘우리교회가 뭐가 모자라서, 우리교회가 얼마나 건전하고 복음적인데!’라고 따지겠지요. 따질 때는 요한계시록 2장 3장을 갖다가 들이대 버립니다.
“네가 이것대로 해?” “엄마야~!” 인간의 힘으로 못하지요. 들이대는 거예요. 그러면 그것을 통해서 왜 이 교회들이 그리스도가 원하는 교회가 못되는가 하면, 교회를 세울 때는 반드시 자기만의 역사를 고수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곱 교회 문제점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일곱 교회가 잘하는 것도 있고 못난 것도 있는데 그 못난 것의 공통점은 뭐냐, 그것은 자기만의 교회를 인간적인 교회로 자기식대로 해보려고 하다 보니까 타협도 있고 아부도 있고 허용도 있고 자기들끼리의 부정도 있게 되는 겁니다. 그것을 지적해주시는 분이 있다는 것이 고맙지요.
지적할 때 무엇으로 지적하는가? 고맙게도 성령으로 지적합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는 말을 너희가 들어라.’(계 2:11 ; 2:17 ; 2:29 ; 3:6 ; 3:13 ; 3:22) 그렇게 되지요. 성령이 교회들을 지적하게 되면 교회는 성령을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당겨오거든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곱 교회를 전부 다 오른손에 쥐고 있다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이 교회들의 특징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만들었구나.’ 처음부터 교회를 위하여 시작했다가 교회를 위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 뭐가 감기느냐 하면,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로 간다.’(롬 11:36)는 그것이 여기에 휘감기게 되지요. 그러면 이 감긴 것이 몇 개입니까? 안에는 ‘교회로 시작해서 교회로 말미암아 교회로 돌아간다.’는 이것이 휘감겨 있고 그 다음에 뭐가 감깁니까?
바로 이것이 책망 받을 짓인데 이것을 뭐가 휘감습니까?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로 돌아간다.’는 이것이 감기게 되겠지요. 그렇다면 이 감기는 것을 다시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이야기가 갑자기 복잡해져버렸는데 그러면 일곱 교회 중에서 하나만 생각해보겠습니다. 진도 2장 3장 나갔다고 좋아하지 마세요. 아직 시작도 안했습니다.
교회가 이렇게 있는데 교회를 둘러싸고 뭐가 하나 감겨 있습니까? 교회 역사가 이렇게 감기지요. ‘이것은 내 교회다.’ 교회라는 것이 인간인데 인간은 자기역사를 못 버리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것을 뭐로 감는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그 외부를 감아 버리지요. 이것 두 개를 테이프처럼 좍 펴봅시다. 펴보면 밑에는 땅의 역사가 있겠지요. 위에는 그 땅의 역사를 그냥 버리거나 방치하지 않고 당겨주는 우리 주님의 역사가 있지요.
이것이 요한계시록 4장에서 22장까지예요. 2, 3장까지는 교회를 세워두고 빙 둘렀지만 이것을 좍 펴버리면 요한계시록 4장부터 22장까지는 땅의 역사와 대비되는 하늘의 역사가 나란히 가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을 개인으로 봅시다. 개인으로 보면 여기에 나의 역사가 돌지요, 그 다음에 거기서 또 뭐가 돈다? 주님의 역사가 또 돌지요.
이것 둘을 좌 펴봅시다. 펴보면 나의 역사가 있고 또 그 다음에 뭐가 있습니까? 주님의 역사가 있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을 교회에 적용해도 되고 이것을 나에게 적용해도 되겠지요. 그러면 이 땅의 역사, 이것이 죄의 역사인데 그것을 주님께서 어린양의 피로써 용서하시는 역사가 따로 있다면 이 사람은 세상에 대해서 미련을 두지 않고 주께서 구원하시는 이 노선에 해당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둘 사이에 뭐가 생기느냐, 고민과 갈등이 계속 이어지는 겁니다. 고민과 갈등이 있다는 것은 이미 그 사람은 구원받았다는 뜻이에요. 나는 항상 나 중심입니다. 남한테 지기 싫어하는 것이 우리의 공통점이잖아요. 개척교회를 시작해서 한 10년이 되었는데 옆에 교회가 하나 들어와서 1년밖에 안되었는데 교인수가 더 많아버리면 목사 때려 치고 싶습니다.
‘내가 이런 수모를 당해야 되겠나. 하필 저에게 왜 이런 수모를 주십니까?’ 치킨 집을 차려 놓았는데 한참 잘 된다고 생각했더니만 옆집에 치킨집이 들어와서 손님 다 데려가면 주님한테 항의하고 싶어요. “왜 이런 우세를 당하게 하십니까?” 주님께서 “뭐가 어째서? 그게 뭐가 어쨌는데?” “기분 나쁘잖아요.”
주님의 역사를 보다가 자꾸 어디로 떨어집니까? 자꾸 나의 역사로 떨어지는 거예요. 떨어지니까 주님께서 그것을 다시 뭐로 옮깁니까? 하나님의 역사로 다시 올리지요. “다 이루었다.” “예, 다 이루었습니다.” 돌아서면 또 “다 이루었다면서 왜 나에게 이런 수모를?” 또 떨어져요. “다 이루었거든!” “알겠습니다.” 이것이 평생 계속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알고 난 뒤에 요한계시록 덮지 마세요. 왜? 평생 봐야 될 책이기 때문에. 성경을 지키겠다는 사람들의 논리의 문제점이 뭐냐, 성경을 하나 지키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성경을 찢어도 괜찮아요. 왜? 자기가 지켰기 때문에. 그런 성경은 없습니다. 성경은 지켰다는 것이 없어요. 성경은 날마다 우리에게 평생 가도록 같이 가야 되지 ‘이것은 지켰으니 내가 두 번 다시 안 볼 거야. 다 지켰는데 뭐.’
고등학교 3학년이 초등학교 3학년 수학책 봅니까? 안보잖아요. 그것이 볼 것 뭐 있습니까? 다 뗐는데. 성경도 그런 겁니까? 성경 다 뗐다고 두 번 다시 안보는 겁니까? 성화론 하는 사람들의 약점이 그 점이에요. ‘이것은 내가 기본으로 다 지키고, 그러니 이것은 찢어버리자.’ 성경은 그런 것이 없어요.
성경은 항상 우리가 어느 정도 은혜를 받아놓고 몇 초 안가서 그 은혜에서 도로 떨어집니다. “집사님, 은혜 받았어요?” “은혜 받았어요.” “몇 킬로 받았어요?” “3킬로 받았어요.” “난 5킬로 받았어요.” 이런 말 하면서 서로 좋아하다가 툭 떨어져요. 이처럼 자기역사가 죽을 때까지 계속 가기 때문에 성경은 계속해서 ‘다 이루었다.’로 주는 겁니다.
이러한 못난 게장껍데기를 계속 끌고 가는 것은 주님께서 은혜로 구원했다는 것을 이 못난 자를 통해서 계속 은혜를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뭐든지 하셔서 게장껍데기로 드러나시기 바랍니다. 뭐든지 하셔서 ‘아 이게 바로 게장껍데기구나.’ 하고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이게 바로 자유 아닙니까?
만약에 이것을 해도 되고 안 해도 되고, 이렇게 내가 결정해버리면 이것은 자기 역사를 자기가 손대는 결과가 되어버려요. 이것은 역사가, 교회가 스스로 자기 힘으로 교회 되려고 하는 파란역사(그림에서 파란 선으로 표시된 나만의 역사)만 고집하는 것이 돼요. 빨간 역사를 불필요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냥 나는 나대로 돌고 바깥에서 빨간색으로 표시된 것처럼 이렇게 도는 주님의 역사를 같이 보면서 살아가 주시기 바랍니다.
양쪽 다를 봐야지 ‘나는 잘났으니 주님 필요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곤란해요. 또 어떤 사람은 ‘나는 못났으니까 이제 교회 안다닌다.’ 이것도 문제가 됩니다. 못났으니까 주님께서 용서를 했지요. ‘다 이루었다.’ 했지요. 주께서는 탕자만 원해요. 탕자만 원하고 죄인만 원하지 잘난 의인은 필요치 않아요. 병든 자라야 병원이 필요하지 건강한 자가 병원에 왜 옵니까?
놀러옵니까? 의사친구 있어요? 건강검진이라는 것이 있는데 저는 그게 말이 안 된다고 봐요. 안 아프면 건강한 것이고 아프면 건강하지 않은 거예요. 아플 때 오면 돼요. 미리 당겨서 건강검진 한다는 것은 지금 그 자체가 안 아프다고 여긴다는 것인데 저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다만 여기에 의사가 없다고 여기고 그 경우에 한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항상 나의 역사와 주님의 역사가 나란히 가서 ‘그리스도의 은혜가 이 못난 나를 이렇게 용서한다.’고 이렇게 해야 되는 겁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요한계시록에 들어가 봅시다. 요한계시록 1장 1절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간단하지요. 다 배웠잖아요. 예수님에게 뭐가 둘려져 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예수님의 역사가 있지요. 이게 바로 계시잖아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간단하지요. 방금 배웠잖아요. 예수님에게 뭐가 감겼다? 알파와 오메가, 처음부터 나중이라, 이것이 휘감긴 것이 예수님의 계시에요. 이걸 누가 보고 있습니까? 세례요한이 보고 있지요. 세례요한은 뭐가 감겨 있습니까? 자기의 역사가 감겨 있습니다. 사도요한의 역사를 따라서 온 것이 아까 이야기한 일곱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사도요한에게 주어짐으로 말미암아 ‘내 말, 곧 내가 전하는 그리스도의 계시를 듣는 너희들은 하나님의 교회다.’ 그러면 예수님의 계시가 사도요한에게 찾아오면 이게 한 바퀴 돌게 되어 있지요. 그러면 이 도는 것이 일곱 교회에 전부 다 있으면 일곱 교회에 전 부 이렇게 다 돌겠지요.
그럼 여기에 우리도 있으면 우리도 뭡니까? “이 계시를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계 1:3)죠. 우리도 복이 있지요. ‘다 이루었다.’는 것, 이것이 빨간색 원(주님의 역사, 완성)과 파란색 원(나의 역사, 미완성), 이렇게 두 개가 되어야지 만약에 이 선이 하나가 되어버리면 ‘주님, 저 작년에 요한계시록 다 지켰는데요.’ 이렇게 된다니까요.
선이 하나가 되어버리면 계속해서 그 선은 누구를 위한 선이냐 하면 나를 위한 단독역사가 돼요. 옆 사람도 아니고 누구도 아니고 나만의 역사가 되어버려요. 나만을 위한 역사가 되어버리면 어떻게 나오느냐 하면, ‘너희는 예수를 보지 말고 예수를 믿지 말고 예수 잘 믿는 나를 믿으라.’가 되어버려요. 이게 교주입니다.
‘나의 역사는 건전한 역사이기에 다른 것을 찾으려고 하지 말고 이 목사를 본받으면 돼.’ 이것은 교주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교인들은 좋다고 하지요. 왜? 예수님은 눈에 안보이고 목사는 눈에 보이니까 목사한테 엎어지면 구원받을 줄 알고 있어요. 그러면 목사가 어떻게 설명해야 됩니까? ‘여러분, 나를 본받는 사람 되세요.’ 이것은 맞아요.
‘내가 얼마나 엉터리고 잘못인가를 여러분은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왜? 저나 여러분이나 똑같은 인간이니까요. 나 같은 죄인도 주님을 믿습니다.’ 그러면 교인들도 ‘목사님만 믿습니까? 저희들도 믿습니다.’ 이렇게 되지요. 그러면 요한일서 2장 27절,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이렇게 되지요.
‘목사가 가르치는 은사가 있다.’(딤전 4:14 ; 5:17)는 것과 요한일서 2장 27절이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것과 어떻게 일치됩니까?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이 말은 목사라는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고 무엇이 신앙이냐, 고백하는 사람이에요. ‘저는 이렇게 고백합니다.’라고 성경 가르치는 거예요.
‘나도 동의합니다.’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목사가 가르쳐서 된 사람이 아니고 성령께서 양쪽 다 친히 가르친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 교회는 그리스도에게만 영광 돌리는 교회가 되지요. 보세요. 벌써 신약성경 뽑아냈잖아요. 항상 중심을 그냥 인간 대 인간으로 하지 말고 뭘 경유하라고 했습니까?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를 경유해야 됩니다.
예수님의 계시에 뭐가 있느냐, 요한계시록 1장 7절을 봅시다.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여기에 1장 7절을 집어넣어 버리면 예수님의 계시, 예수님의 역사테이프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구름타고 다시 오시리라.’고 되어 있지요.
여기에 사도요한이 있습니다. 사도요한이 예를 들어 한 80되어서 죽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사도요한의 테이프는 출생부터 죽음까지 몇 년 동안 산다? 80년 밖에 안 되지요. 그것이 자기역사잖아요. 이 역사에 ‘주께서 오시리라.’가 이것을 둘러 쳐버리면 사도요한은 80이 되어 죽어도 주께서 다시 오시는 것에 포함되어서 죽게 되지요.
그러면 세례요한이 구원받는 것은 자기역사가 똑똑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그를 둘러싼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에 의해서 구원 받는 겁니다. 이것은 사도요한 뿐만이 아니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변화 산에 예수님께서 계실 때 누가 있었습니까? 엘리야 있고 모세 있지요. 엘리야와 모세가 구원받을 때 엘리야와 모세하고 예수님이 대화를 했습니다.
대화 내용이 ‘주님께서 언제 별세하시는데요?’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엘리야가 죽었으니까 구원받은 겁니까, 구원받지 않은 겁니까? 파란 것은 이미 끝났어요. 자기 인생은 끝났는데 끝나고 난 뒤에 남아 있는 것이 뭐냐,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가 남아 있으니까 그것가지고 서로 하늘나라에서 뒷담화하는 거예요.
“주님, 언제 죽으십니까?” “좀 있어봐라. 내가 제자들하고 가야 돼.” “빨리 좀 십자가에서 다 이뤄주세요.” “성질하고는, 좀 참아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의 인생은 자기만 보면 의미 없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를 둘러싼 그리스도의 약속, 이것 때문에 엘리야와 모세 그들은 구원받는 겁니다. 정말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죠.
세상이 모든 역사라 하는 것은 남의 역사가 자기를 둘러치지 않습니다. 남의 역사는 그쪽에서 쳐요. 그런데 타인의 역사가 없어지지 않고 그것을 둘러친다는 것은 성령께서 예수님의 역사를 우리에게 가져와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테두리가 두 개의 테두리가 돼요. 내 역사 똑똑하게 보이고, 이것은 짧은 역사지요.
우리는 이것을 길게 보잖아요. 이것이 초 끈인데 그런데 성경 야고보서에 보면 이것을 ‘안개’라고 합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제법 긴데 ‘인생이란 무엇이냐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다.’(약 4:14) 누굴 약 올리는 겁니까?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랍니다. 그러면 90이 된 분을 두고 “할아버지, 연세 어떻게 되십니까?” “90이다.” “잠간이군요.”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어느 테두리, 이 빨간색의 주님의 테두리에서나 봤을 때 자기는 아무리 90이라고 우겨도 주님의 계시 입장에서는 뭡니까? 말씀대로니까 뭡니까? “할아버지, 잠간입니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인생이 풀의 꽃같이 없어져도 주의 말씀은 영원히 감기는 겁니다.
이거, 2초갑니다. 2초 가는데, 교회에서 다 같이 은혜 받다가 누군가 교회 왔다 하면 “아저씨 몇 살인데? 민 증 까 봅시다.” “이거 동생이었구먼. 나이가 왜 이리 많아 보여? 머리는 훌렁 벗어져가지고.” 목사님 보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은혜 받은 그것이 몇 초가 안가요. 다시 내 쪽으로 와요. 견적내서 수술하고 물방울수술도 하고, 왜 그걸 하는지 몰라요, 잠간인데. 그렇게 하는 것은 기죽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나도 한 인물 한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하는데 아무리 뜯어도 DNA까지 뜯지는 못하기 때문에 결혼 잘못하면 엉뚱한 애가 나오는 수가 있어요. 분명히 그 엄마와 그 아비의 애인데 나중에 이게 누구 애인지 친자확인에 들어가는 수가 있습니다. 성경대로 산다는 것은, 우리의 본색을 충분히 인정하세요. 우리는 뭘 해도 괜찮습니다. 뭘 해도 우리는 죄인이기에 뭘 해도 하세요.
바나나를 먹든지 뭘 하든지 되는데, 문제는 그것으로 구원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성령이 와서 당겨주니까, 주님의 역사가 당겨주니까 아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특징이 뭐냐, ‘맘 놓고 핍박 받고 고난 받아도 당신들 괜찮습니다.’ 하는 것이 요한계시록이에요. 그것을 ‘환란가운데서 참아라.’라고 간단하게 나오는 겁니다.
‘여러분은 이미 테두리(주님께서 이미 이루신 주의 역사)가 쳐 있기 때문에 원 없이 한번 환란 받아보세요.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문제입니다. 다 주께서 의도해서 주신, 빨간 것(주님의 다 이루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신, 주님의 계시를 드러내기 위해서 주님이 의도해서 주님이 가신 경로를 밟게 했습니다.’라는 것이 요한계시록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이미 우리는 이미 따고 들어가요. 우리는 이미 성공한 거예요. 내가 이룬다고 하면 못합니다. 그런데 주께서 다 이룬 것대로 들어오는 겁니다. 제가 성격이 아주 섬세한 면이 있어요. 어릴 때 방에 누우면 천장의 장판 무늬가 보입니다. 어릴 때니까 아주 멀게 보입니다. 그런데 그 장판무늬가 언제 가까이 보이느냐하면 천장이 무너질 때입니다.
그러면 천장이 코앞에 있겠지요. 주님께서는 ‘이미 다 이루었음’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멀찍이 느껴지니까 나를 자꾸 미완성으로 규정하는 거예요. ‘나는 저 사람 따라가려면 멀었어.’ 자꾸 멀었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무대장치 내려오듯이 가까이 내려오게 되면 ‘아하, 안개구나. 나나 저나 다 같이 안개구나.’ 그것이 다시 올라가서 멀어지면 ‘나는 멀었어. 나는 죽어야 돼.’라고 합니다.
목사님에게서 복음 설교 들으면 가까이 왔다가 문 열고 나가면 다시 올라가 버립니다. 하여튼 희귀해요. 교회 와서 은혜 받을 때는 가까이 왔다가 차 몰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누가 끼어들기 한다고 싸우다 보면 천장이 위로 올라가버리고 그래요. 멱살 쥐고 싸우다가 ‘어느 교회 다니십니까?’ 하면 다시 ‘주께서 하셨구나.’ 하고 내려옵니다.
말씀이 가까이 오면 우리는 죄인 되고 말씀이 멀어지면 우리는 잘난 사람이 되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께서 오시는데 계시록 1장 7절에 보면 “그를 찌른 자도 볼 것이요.”라고 되어 있어요. ‘찌른 자’가 나옵니다. 여기서 ‘주님의 다 이루심은 어떤 양식으로 오느냐’하면, 어린양의 모습으로, 죽임당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 이루었다.’를 주는 겁니다. 예수님의 어린양의 효과가 ‘다 이루었다.’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린양이 다 이루었다 하는 증거를 대세요.’ 한다면 어린양은 부활의 세계에서도 어린양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전제가 뭐지요? ‘죽었었잖아.’입니다. 죽었었는데 부활했잖아요. 부활하신 분으로서의 어린양이니까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이것은 이미 죽음을 초월한 생명의 힘으로 우리의 인생을 둘러치고 있습니다.
이게 가까이 오면 생명인데 멀어지면 또 우리의 생존의 본능이 작용합니다. 가까이 오면, ‘참, 이미 살았잖아. 잊고 있었네.’ 다시 올라가 버리면 ‘살아야지’ 하게 됩니다. 부활하신 어린양이 다 이루었다, 그러면 어린양은 요한복음에 보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죠. 이거 하늘나라 수능에 나옵니다.
어린양 앞에 괄호를 칩니다. 다음 중 어린양 앞에 들어갈 항목은? 1) 착하게 살라고 한 어린양 2) 열심히 하면 구원된다고 한 어린양 3) 어느 교회 가면 구원받는다는 어린양 4)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어린양. 몇 번 입니까? 4번입니다. 책을 하나 내고 싶어요. 천국수능이라고 해서 모든 성경을 1번, 2번, 3번, 4번으로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다음중 어느 것이 정답입니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그냥 어린양만 잡아당기지 말고 이미 세상 죄, 우리의 죄를 지고 가신 어린양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해당되려면 우리는 뭐만 제공하면 됩니까? 우리는 여기에 죄만 집어넣으면 되지요. 그냥 오지 말고 죄인의 모습으로 오면 아귀가 딱 맞잖아요. 우리는 죄인이고 주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고, 짝이 잘 맞잖아요. 완전히 한 셑 아닙니까? 나의 죄 때문에 죽으신 어린양.
그런데 죄가 뭐냐 하면 바로 내 위주의 짧은 역사, 안개 같은 역사를 휘감고 있는 이 죄, 그리고 이 죄는 죽을 때까지 없어지지 않는 죄. 아침에 눈만 뜨면 나를 위해서, 마누라도 아니에요, 나만을 위해서, 그리고 아내는 나만을 위하여 존재하는 아내, 자식도 낳고 나면 귀찮아요. 나를 위한 자식이죠. 자식에게 사랑받으려면 절대 죽을 때까지 땅 빼앗기면 안돼요. 빼앗기면 그 때부터 천덕꾸러기가 돼요. 자식도 자기밖에 모르니까.
희한하지요? 분명히 내가 예뻐해 주면 인간이 되어야 할 텐데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자기밖에 모르니까 그것은 누구를 닮았습니까? 부모를 닮았지 누구 닮았겠습니까? 자식을 보면 부모를 안다고, 다 같은 입장입니다. 다 같이 자기 역사만 휘감고 다니는데 이것을 다행스럽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자기 죄를 알 때 이미 우리는 뭐와 만난다? 이 세상 죄를 딱 당겨서 어린양과 같이 결부하게 되어 있어요. 이것을 사도바울은 복음이라고 했지요.
여러분들이 다 아는 이야기를 이렇게 해서 죄송합니다. 이제부터 약간 난해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이것을 해 줘야 요한계시록의 시발점이 됩니다. 신명기 31장을 봅시다. 약간은 충격적인 이야기가 될 거예요. 하지만 ‘다 이루었다.’를 여러분들이 휘감고 있기 때문에 어지간한 충격도 충격이 안 될 겁니다.
신명기 31장 16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열조와 함께 자려니와 이 백성은 들어가 거할 그 땅에서 일어나서 이방신들을 음란히 좆아 나를 버리며 내가 그들과 세운 언약을 어길 것이라.” ‘어길 것이라.’ ‘어기면 안 된다.’ 그것이 아니고 ‘어길 것이라.’ 그 다음에 20절에 보면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한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그 다음에가 뭡니까? “내 언약을 어기리니” ‘어기면 안 돼.’ 이게 아니고 ‘어기리니’
이미 예수님의 역사가운데서는 어떤 인간도 의인은 없다는 것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역사, 주님이 휘감고 있는 이 역사 속에는 성경말씀대로 되어야 돼요. 지금부터 내가 이야기하는 것을 틀렸으면 틀렸다고 이야기하세요. 예수님의 모든 행동은 성경말씀대로 되지요? 오케이. 그렇다면 신명기 31장 20절에 ‘반드시 어기리라.’ 되어 있지요?
그러면 그 말씀이 지켜져야 예수님이 지킨 것이 되겠지요? 그래서 우리가 성경말씀을 못 지키도록 주께서 해주셔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살아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충격이라는 말을 썼어요. 보통 교회에서 이 이야기 못합니다. ‘목사님, 말씀 지키겠습니다.’ 보통은 ‘와, 대견스럽습니다.’ 이렇게 나오잖아요. 웃기고 있네. 예수님의 계시에 의하면 못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목사님, 저를 무시합니까?’ 이것은 제가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어디에 나옵니까? 신명기 31장에 나옵니다. ‘에이, 이것은 유대인, 바리새인들 보고 하는 소리잖아요.’ 여러분, 이스라엘이 모든 인간의 대표자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언약의 백성이라고 했어요. 여러분은 이것만 알면 모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다 날아갑니다.
우리는 말씀을 못 지키는 정도가 아니고 어깁니다. 할렐루야! 제가 할렐루야를 20년 만에 처음 합니다. 우리가 지키려고 하는데 힘이 빠져서 못 지키는 것이 아니고 아예 못 지키도록 되어 있으니까 못 지킬 때 할렐루야, 해야 돼요. 지금 아멘, 하고 말일이 아니고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 나온 목적, 하나님께 불려나온 목적이 뭐냐, ‘우리는 성경을 어기는 존재였습니다.’라는 것을 교회 나온 사람은 알고 교회 안 나온 사람은 몰라요.
그냥 농사나 짓고 하던 사업이 하는 것이지 ‘내가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는 존재’임을 몰라요. 모르는 채 살다가 언제 아느냐, 지옥 가서 알아요. ‘아, 어겼구나.’ 우리는 그것을 당겨서 아는 겁니다. 참 고맙게도. ‘지키려고 해 보니까 안 되더라.’ 그게 아니라니까요. 그게 아니고 ‘처음부터 어기고 끝까지 어기는구나.’ 어깁니다. 또 어겨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집에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그런 것을 붙이지 말고, ‘여호와는 목자시니 내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런 것 붙이지 말고 ‘나는 어길 수 있다.’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제가 말을 오버해서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반드시 말씀 어길 수 있다.’ 그게 아멘, 되어야 됩니다.
‘당신 뭐 믿고 그렇게 하느냐?’ 어린양이 그렇게 우리에게 말씀하는 거예요. 어린양은 성경 신명기의 말씀을 그대로 이루어서 ‘이루었다.’는 그 증거물로 우리를 태어나게 하신 겁니다. ‘봐, 어겼잖아.’ 괜찮은 어긴 놈 나와 보라고 해요. 괜찮은 어긴 놈. 이것을 유대인들은 도저히 납득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쉐마’밖에 몰라요. 하나님 여기 계시고 인간은 여기 있는데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흔적이고 우리와 다른 이방민족과의 차이점은 뭘까? 우리에게 언약을 주셨다. 언약을 보니까 ‘무엇 무엇을 하라.’고 되어 있고 ‘하지 말라.’고 되어 있다. 명령과 권면으로 되어 있으니 ‘주여,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이것이 전부에요.
이 모습이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어쩌면 이 모습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하고 똑같아요. 그들이 누굴 죽였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우리 능력을 무시하지 말라고. 거기에다 바리새인들은 무엇을 추가했는지 아십니까?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은혜로 구원받는다.’ 이것은 홍해에서 받은 은혜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은 것은 말씀대로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함이다.’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 아닙니까? 오늘날 한국교회 이야기하고 똑같지요.
여기에 ‘어기고’가 어디에 들어갑니까? 신명기 31장을 슬쩍 넘어가버려요. 신명기 31장 방금 봤던 그 대목 말고 뒤의 대목에 보면 ‘반드시 여호와를 저주한다.’는 대목이 나와요. 그런 대목들이 많이 나와요. 그래서 이랬어요. ‘너희들이 너희들의 종말을 알았으면 얼마나 좋겠는가.’(신 32:28,29) ‘너희의 끝을 알았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것을 누가 알아챘느냐, 육으로 말고 사울이 영으로 알아챈 뒤에 ‘신명기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더 죄인 되게 하려 함이라.’(롬 5:20) 다른 말로 하면 비로소 우리의 실상, 우리의 자리에 눈떠서 자기가 소경인 것을 알게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눈에 티끌이 들어 있는 것을 어떻게 알겠느냐.’ 하지요.
눈이라는 것은 원래 안쪽을 바라보게 되어 있습니까, 바깥쪽을 바라보게 되어 있습니까? 바깥쪽을 바라보지요. 그런데 주님 쪽에서 바라보니까 ‘네 안에 티끌 있다.’ 하거든요. 이 말은 눈이라는 것을 우리는 바깥을 보기 위한 용도로만 생각하는데 이 눈이 내 안의 나를 바라보기 위한 눈이 있다고 본 거예요.
그것도 우리는 모르고 주님이 우리를 보니까 그렇다는 거예요. 눈이라는 것은 날 위한 것이 아니고 눈이라는 것은 하나의 매개체로서 주님이 우리를 바라볼 때 통과하는 거예요. 통과하는데 여기에 뭐가 걸렸습니까? 티끌이 걸려 있는 거예요. 우리는 눈을 소유했다고 하잖아요. 눈은 우리가 소유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우리 눈을 소유한 거예요.
우리 눈이 잘못 되었기 때문에 잘못된 눈으로 보니까 예수님이 메시아로 안 보이는 겁니다. 안보이고 ‘나는 건전한데 이 건전한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주께서 오셨구나. 듣겠습니다.’ 이렇게 나온 거예요. 그런데 그 자체가 바리새인들의 눈에 뭐가 씌운 거예요. 자기가 소경 아니라고 하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소경인 겁니다.
우리의 눈동자는 남을 보기 위한 눈동자라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알기 위한 돋보기입니다. ‘완전히 봉사구먼, 봉사.’ 이런 돋보기예요. 그런 것 하나 아는 것도 성령이 임해야 그것을 알 수 있는 겁니다. 항상 성령이 임하면 내 쪽이 아니고 주님 쪽에서 보는 겁니다.
제가 십자가 마을에 ‘헬레니즘’이란 글을 썼습니다. ‘성경에도 나오지 않는 헬레니즘철학을 왜 이야기했습니까?’라고 묻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에요. 성경도 공부하기 바쁜데 그 철학을 공부해서 자랑하려고 하는가, 왜 그것을 해야 되느냐? 헬레니즘철학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 안에 나오는 철학, 스토아철학 같은 것이 오늘날 성경의 하나님을 빙자해서 육적인 해석을 하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사건 이전에 이미 그리스로마 시대에 유행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십자가가 왔으면 뭔가 달라져야 되는데 십자가 오기전의 해석을 기독교 받아들이기 전의 똑같은 해석을 내놓는 거예요. 어떻게? ‘드럼통이 있는데 그 드럼통이 굴러가는 것은 외부에서 드럼통을 굴려야 되고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고 그 드럼통이 네모지게 각지면 굴러가지 않으니까 알아서 둥글게 되어야 잘 굴러간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이란 것은 하나님의 일과 나와 둘이 짝이 잘 맞아야 돌아간다.’
여러분, 많이 듣던 이야기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한다고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거기에 대해서 반응을 보여줘야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 그 이야기잖아요. 그게 이미 기독교 이전에 스토아철학에 있었던 이야기예요.
그걸 영적이라고 왜곡시키는 겁니다. 그것이 육인데. 영은 뭐냐 하면, 주님께서 다 이루었고 우리는 당당하게 언약을 이미 어긴 입장에서 ‘우리는 언약을 어겼습니다.’ 하고 나서면 그게 영인데 그게 아니고 ‘주님 일부하고 우리 일부하고 잘 만나면 주의 일을 할 수 있다.’고 나와 버리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고 영적인 해석도 아니고 육적인 해석인 겁니다.
그런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제가 ‘헬레니즘철학’을 쓴 거예요. 빌립보서에 나오지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앞에서 배설물로 여겨라.’(빌 3:8) 고린도후서에 나오지요. ‘모든 철학과 이론을 그리스도 앞에 굴복케 한다.’고 할 때 우리는 그냥 그리스도만 세우면 되는지 알지만 뭘 굴복시키는지 그 굴복의 내용을 알아야 될 것이 아닙니까?
배설물이라고 하는데 배설물 아닌 줄 알고 그냥 쥐고 있다 그 말이지요. 배설물이라면 버려야 할 텐데 자기가 버린 것이 배설물인줄 알지만 자기가 아직도 갖고 있는 것이 배설물인데. ‘당신 갖고 있는 것이 배설물이다.’ 하면 ‘이것은 영적이다.’라고 하는데 아니에요. 그것도 배설물이에요.
문제 나갑니다. 우리가 예수 믿음으로 구원받습니까?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습니까?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주체가 예수님이고 내가 믿으려고 하면 그 주체가 내가 되는 거예요. 내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내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되면 믿는 나를 믿는 것이 돼요. 그래서 ‘아, 이런 것들이 바로 인간의 종교성이구나.’를 아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믿음으로 구원받는데 그렇게 받은 내 믿음이라는 것도 쥐고 있으면 내일 되면 이것이 쉬어버리고 썩어버려요. 내일은 내일치의 믿음을 또 주십니다. 안주면 어떻게 하는가? 성경에 보면 주게 되어 있어요. 왜? 성경은 주님이 다 이루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다 이룬 계시를 우리에게 되면 우리가 안 지켜도 우리 속에서 지키도록 하는 겁니다.
범사에 감사케 하시고 항상 기뻐하게 하실 때 제발 그것을 내 믿음 좋다고 하지 마시고 주께서 じ?이렇게 휘감아서 나를 만들었다고 고백하세요. 그게 주의 이루심의 작품입니다. 주님의 작품이에요.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문제가 깔끔하게 해결 된 것은 아닙니다. 가다가 툭 쳐놓고 “집사님, 이유도 없이 나를 왜 칩니까?” “주께서 하게 하셔서 치게 했습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가 있잖아요. 도둑질을 했는데 “왜 했습니까?” “주께서 도둑질을 하라고 해서 했습니다.”
이걸 알아야 돼요. 죄란 어겨야 한다. 어겨야 죄가 되니까. 그런데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었으니까 선과 악을 알잖아요. 자기가 어긴 것이 주님이 어겼다고 한 것을 어긴 것이 되어야 하는데 자기가 선과 악을 구분해서 이것이 악이라고 결정해놓고 그것을 어겨버리면 이것은 죄가 아니에요. 실컷 죄 지어놓고 죄가 아니에요.
죄가 뭐냐 하면, 몰라야 하는 것을 안 것이 죄입니다. 선악과를 알아야 됩니까, 몰라야 됩니까? 몰라야 되는데 그것을 따먹었지요. 이미 죄가 되었어요. 몰라야 되는데 알아버렸다 이 말이죠. 이게 안경입니다. 아버지가 “얘, 이것이 뭐냐?” “아빠, 그거 안경.” “내가 그것을 죄라고 했지!” 그렇게 해놓고 “야, 이게 뭐야?” “몰라요.”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이미 안 이상은 모른다고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인간은 항상 죄인데 이 사람은 그렇게 보지 않고 자기가 나쁘다고 여긴 것을 죄라고 또 잘못을 저지르는 거예요. 이렇게 툭 친다든지 해서 시비 거는 것이 죄가 아니고 ‘이미 나는 몰라야 될 것을 알았구나. 조상을 잘못 만나서 그랬구나.’ 그것이 죄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죄 아닌 경우는 없어요. 내가 선과 악을 안 것 자체가 이미 죄가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당당하게 우리가 죄인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왜? 몰라야 되는데 알아버렸으니까. 이걸 모른다고 거짓말 하면 거짓말하는 그것이 죄로 더 추가됩니다. 빼도 박도 못해요. 하나님의 특징은 묶는 것, 매듭을 짓는 거예요. 모든 인간들이 있는데 하나님은 인간들을 이렇게 보지 않습니다. 여기 집사님 계시고 장로님 계시고 목사님이 계시는데 이것을 한꺼번에 묶어버려요.
어떻게 묶는가? 아담으로 묶어버려요. 묶는 것이 주님의 주특기예요. 묶어놓고 죽여 버립니다. 못나서 죽는 것이 아니고 너 나 할 것 없이 다 죽어요. 이것을 우리 앞에 계시로서 알려주는 겁니다. 이것을 모르게 되면 ‘왜 하필이면 다른 애들은 군에서 빠졌는데 왜 내 애는 해군에 입대해서 바다에 빠져죽게 하십니까? 왜 하필이면!’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럴 때 주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망대가 무너져서 18명 죽는 것을 보고 너는 잘했다고 생각하지 말라. 회개치 아니하면, 네 실상을 모르면 너도 그와 같이 죽으리라.’(눅 13:4-5) 주님께서는 항상 묶어서 다루기에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은 그 말씀대로 움직인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그냥 햇빛 받듯이 그냥 받으시면 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햇빛 죽 나오잖아요. 계시도 그냥 죽 받으세요. ‘주여, 오늘도 어떤 것을 어기겠습니까? 아, 이것이군요.’ 내가 잘했다 한 그것도 어긴 것이고 못했다 한 그것도 어긴 것이고 잘하나 못하나 그것 자체를 신경 쓰지 마세요. 여러분, 스트레스 받습니다. ‘나는 잘했어. 나는 못했어.’ 그것 신경 쓰면 안돼요.
신경 쓰지 마시고 그냥 사세요. 그게 하나의 사건이고 흐름입니다. 이것을 예를 들어야 합니다. 여기 물이 있잖아요. 물의 오야붕이 누굽니까? 없지요. 물은 이쪽 물 저쪽 물 다 똑같잖아요. 그런데 이 쟁반에서(수평으로 있는 쟁반) 튀는 것이 누구입니까? 바나나지요. 이렇게 살면 안 된다 그 말이지요. 이렇게 살지 말고 물처럼 살아야 돼요. 이렇게 하니까 노자철학 비슷하게 되는데.
이렇게 돼버리면 ‘나는 잘했어. 나는 착한 바나나야.’ 아예 우리는 자체가 죄니까 ‘내가 잘했다 못 했다.’를 신경 쓰지 말고 뭘 하면 됩니까? 그냥 시키는 대로 주어지는 대로 사시면 여러분들이 어차피 죄인이니까 의인 되라고 요구하지를 않아요. 죄인보고 의인되라고 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 아닙니까? 되지도 않는 것을 왜 시키겠어요.
다만 우리는 ‘선악과를 따먹었기에 자꾸 우리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식으로, 이런 현상으로 살아가는구나. 자기가 자기 스스로의 힘대로 살려고 하는구나.’를 아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지 말고(수평으로 있는 쟁반의 물) 이렇게 하시면(기운 쟁반에서 흘러가는 물) 이 물이 하나의 사건, 사건의 흐름, 다른 말로 하면 말씀의 흐름이 되는 겁니다.
아침에 일어났다. 딱 떠오르는 것이 마태복음 6장, ‘그날 하루는 그날에 족하니라, 참새도 기르시고 들풀도 기르시나니, 주여 길러주소서.’ 벌써 말씀대로 되었지요. 그런데 우산도 안가지고 왔는데 비가 온다. 마태복음 6장, ‘선인과 악인에게’ 뭘 주신다? ‘비를 주신다.’ ‘아, 이거구나.’ 모든 것이 말씀의 흐름이에요. 모든 것이!
자칫하면 또 여호와의 증인처럼 되는 수가 있어요. 나는 못 지키는데 주께서 알아서 지켜주시는 것, 어떤 것 하나도 못 지키는데. 그래서 누구와 어떻게 하다 보니 싸웠다. 싸웠는데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 ‘범사에 감사하라.’ ‘아, 역시 난 안 돼. 그렇지 안 되는 것이 정당해. 왜? 언약을 어겼으니까.’ 그런데 그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은 그 순간 이런 말씀이 있다는 것을 기억나게 하시는 그 자체가 말씀의 포대기에 싸여서, 말씀이 사건화 되어서 나를 하나의 사건 속에 집어넣은 거예요.
내가 고체가 아니고 하나의 액체로서 흘러가는 겁니다. 움직였다 하면 말씀이 움직이는 거예요. 팔 부러져 보세요. 없잖아요. 있으니까 팔이 있다는 것을 감사하지요. 모든 것이 감사할 뿐이지요. 머리카락 빠져서 머리가 훤해도 감사해요. 나머지 머리 없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완전히 대머리가 되잖아요.
그래서 모든 것이 말씀이 휘감아서 말씀대로 되게 되어 있어요. 말씀대로 되는데 그 말씀 중에 뭐가 들어있다? ‘너는 절대로 언약을 못 지킨다.’는 이것이 포함되어 있으니까 이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만약에 지켜야 된다고 나왔으면 우리는 이것을 못 지키면 지옥 가는 거예요. 아예 못 지키기로 작정을 했어요. “못 지켜.” “내가 지켜줄게. 다 이루었다.”가 바로 못 지키는 우리의 역사와 다 이루는 그 주님의 우리 외곽의 역사가 휘돌아서 결국 주께서 오신다는 것도 남들은 기다려보자, 하는데 우리는 지금의 문제죠.
왜냐하면 우리 역사는 아직 안 죽었기 때문에 뚝뚝 끊어진 점선이 되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점선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처음 시작하신 것이 마지막까지 이루기에 십자가지신 분이 재림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죽어도 주님의 재림의 효과가 그대로 우리에게 들어와서 무덤 속에 있는 우리가 이 재림 때문에 나팔소리 날 때 살아나는 겁니다.
이것을 주께서 지키지 아니하면 만약 우리 역사에서 나이 70이 되었는데 치매가 걸렸다. “저, 할아버지. 이제 예수님 믿어야죠.” “예수님이 누구시지?” “아이고, 이목사가 드디어 미쳤구나. 그동안 복음 전한다고 돌아다니면서 외쳤잖아요.” “예수님이라고? 사도신경? 그런 다 뭐지?” 아무것도 모르는데 이 사람이 구원받았겠습니까, 안 받았겠습니까? 이거 수능에 내야 됩니다.
역사가 하나로 되어버리면 아무리 과거에 개척교회를 많이 했어도 치매 걸려서 ‘나는 마귀다.’ 하면 지옥 갑니다. 역사가 하나가 되어 버리면 아무리 성령 받고 회개해도 회개안한 것이 되어버려요. 아무리 지금 믿음 좋아도 다 소용없습니다.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거든요. 항상 불안, 초조, 안달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나머지 역사는 어떻게 하느냐? 지금부터 자기엔진에 기름 붓듯이 해서 ‘내일 정신 차려라.’ 이게 말이 됩니까? 내일은 내일 가봐야 알지요. 정신 차려서 내일까지 이어가야 됩니까? 자기가 격려해봐야 내일되면 한방에 훅 갑니다. 새벽기도 하다가 은혜 받았는데 돌아오는 길에 차 박아서 욕설 퍼붓고, 새벽 여섯시 반에 천당 갔다고 오전 9시에 지옥가고, 다시 은혜 받았다가 오후에 다시 지옥가고, 내일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어요.
이게 무슨 믿음의 확신입니까? 말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휘감은 선이 하나가 되면 안돼요. 두 개가 되어야 돼요. 예수님 십자가 끄트머리에 재림이 오는 거예요. 재림 믿고 십자가 믿고 두 개를 믿지 마시고 십자가 믿어주시면 나중에 다 세트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홈쇼핑 보세요. 하나 사면 다 따라오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의 역사 이 끝에 있습니다. 내가 믿어서 가져오는 것이 아니에요. 나는 그냥 가는 거예요. 언제 죽을지 몰라요. 이 점선이 언제 끝날지 모르니까 그냥 가더라도 없는 나를 주께서 만들어서 에베소서 1장 4절에 있는 대로 창세전에 택한 백성을 주의 약속대로, 어차피 언약 못 지킨 것 주님께서 미리 십자가 믿게 하는 성령 주셨으면 그 성령으로 인하여, 성령이 보증금이거든요,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오는 대로 그 보증금을 주면, 성령으로 우리에게 먼저 선불금을 주면 성령께서 알아서 다 무덤에 있는 것 다 끌어내서 알아서 다 해줍니다.
하이카, 차 보험 같아요. 알아서 다 해줘요. 이미 오신 주님께서 십자가 믿게 했으면 그 십자가 안에 이미 세트로 다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못 지키는 것을 명심하셔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그것만 하면 안 되고 그 뒤에 뭐? ‘어린양’까지 증거 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요한계시록 서론 들어갔습니다. 다음에 집회가 있을지 없을지 그것은 허락하시면 1장부터 속도내서 나가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킨다는 것이 어느 기준에서 지킨다는 것인지 참 어처구니없습니다. 주께서 다 이루었다는데 새삼스럽게 우리가 지키겠다고 나서서 남과 비교해서 이기고 승리하려고 하는 우리의 자존심이 아닌지 다시 한 번 십자가에 우리를 못 박게 하셔서 껍데기 같은 우리 안에 풍성의 헬륨가스처럼 주의 말씀, 주의 가스가 우리를 살게 한다는 것을 날마다 고백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