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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한계시록 94강 / 계21장 22-27 (사라진 인간들의 성전)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 94강 / 계21장 22-27 (사라진 인간들의 성전)

정인순 2010. 12. 30.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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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사라진 인간들의 성전

 

2008년 1월 6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21:22-27

 

(계 21:22)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계 21: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계 21:24)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계 21:25) 『성문들을 낮에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는 밤이 없음이라』

(계 21:26)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

(계 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진리란 반드시 감사와 영광이 쏟아져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안다는 것은 더 이상 모자람이 없이 모든 것을 몽땅 알게 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진리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는 순간, 여기서 감사와 영광이 저절로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기도 싫고 봤어도 감사와 영광이 나오지 않는다는 말은 평소에 진리가 아닌 것에 주로 관심 두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그곳이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이 진리가 못되며 허약하며 한계가 있음을 뻔히 알면서도 자기 말고 달리 눈 돌리지 않으려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우리 인간이 에덴동산에 추방된 그 이유를 여전히 온 몸이 품고 휘두르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 서지 않고 자기 입장에 서서 살아가는 그 모습은 우리 조상이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될 수 밖에 없는 그 원인을 오늘날 우리들도 여전히 발휘하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성경을 보고 이해하려고 하니, 성경 해석에 오류가 생길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즉 내 중심의 세상을 보는 나의 현실을 무한대로 확대해서 그 끝자락을 천국에 닿고자 하니 아무리 그곳이 천국이라고 우겨도 그곳은 여전히 내가 생각은 ‘나의 현실’일 뿐입니다. 결코 하나님의 현실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성전은 천국에는 더 이상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현실을 확장시켜 하나님의 현실과 만남을 주선하려고 종교 생활을 못버립니다. 성전이란 원래 하나님께서 지어달라고 요구하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의 자신들의 본심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 성전입니다. 즉 성전 안에는 인간들이 평소에 발휘하고 모든 종교적 성질을 유감없이 쏟아내고 담아두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그 성전이 하나님의 현실에 의해서 거부된다는 것은 인간들의 평소의 생각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거부당할 생각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현실에서 그 안에서 행할 수 있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자기를 살려내기 위한 노력이라는 양상으로 투자하게 됩니다.

 

그것은 인간이 최종 사랑하는 자는 자기 자신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나를 더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고 아끼는 자는 없습니다. 지옥에 가도 이 습성을 변하지 않습니다. 지옥에 간 부자는 자기 자신에게 복무하고 봉사하기 위해서 천국에 있는 거지 나사로를 향하여 심부름 시킬 자체를 보입니다. 즉 ‘나에 대한 내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공간에서든지 멈추는 법이 없다는 말입니다.

 

바로 ‘내가 날 사랑하기’로 인하여 형성된 세계가 ‘나의 현실’입니다. 이 ‘나의 현실’과 ‘하나님의 현실’이 마주쳐서 충돌되어서 터져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인간들이 유일하게 거룩하고 신성하다고 여기는 성전을 공격했습니다. 거기서 난동을 부렸습니다.

 

이것은 곧 인간들의 모든 행위의 궁극적인 가치 자체를 뒤엎고 무가치하게 간주하겠다는 ‘하나님 쪽의 현실’이 보여주는 고정 관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로지 최종적으로 자기만을 사랑하는 인간들 입장에서는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장치인 그 성전을 무시하고 짓밟는 것에 대해서 전력을 다하여 대들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이 성전이 의미없다는 것은 곧 내 자신이 의미없는 인간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 있는 곳이 천국있다. 하지만 그 천국은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기를 지고서만 올 수 있다” 이같은 제안에 따랐던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12제자도 다 제 사랑하는 길로 갔습니다.

 

아무도 없다는 말은 그 누구에게도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불가능하다는 말은 곧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천국과 거기에 들어갈 자는 아예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없는 것, 곧 불가능한 것은 아예 무시해버립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신에게 저주받아도 영원히 받아야 될 자인 것으로 간주되어 ‘나무로 매달려’ 죽는 죽음을 당합니다. 곧 ‘너같은 인간은 신의 저주를 받은 맞다’라는 선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의 저주를 받아야 할 것을 우리는 오직 우리 자신만을 사랑하기에 우리의 본질을 진리 입장에서 말해주는 그 자를 저주해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죄입니다. 즉 그 누구도, 심지어 하나님마저도 나의 절대에 흠집을 내는 이는 그냥 두지 않겠다는 오기에 우리 속에서 여과없이 튀어나옵니다.

 

세상살이가 힘들어 견뎌가며 사는 이유는, 그만큼, 세상 역경을 장하게 이겨내는 나 자신이 너무 고맙고 사랑스럽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보다 세상 사람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세상이 있어야 자신이 자기에게 기대를 거는 바가 늘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약에 ‘나의 내 사랑하기’를 모독하는 자가 있다면 그 자가 비록 하나님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서슴없이 저주합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십자가 사건을 앞장 세워서 우리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어야 당연한 죄인인 것을 말하는 곳이 이 성경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시로 성경 말씀이 들리지 않는 곳으로 도피하면서 ‘나만 최종적으로 사랑하는 즐거움’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더나아가서 성경을 대하더라도 자기를 절대자라고 인정해주는 해석만을 취사선택해서 뽑아내려고 합니다.

 

히브리서 1:18절을 보게 되면, 하나님은 죄를 위해 필요한 제사는 더 이상 필요없다고 하십니다. 제사드리는 그 당사자의 제사 행위는 곧 그 당사자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어야 마땅함을 보여주는 증거로 작용할 뿐입니다. 구원이란 인간의 행위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거대로 천국을 구상해도 뒤돌아보면 그 길 여정 내내 자신이 신에게 드렸다는 종교 행위들이 줄지어져 있을 뿐입니다.

 

그것들은 다 가짜입니다. ‘하나님의 현실’이 아니라 ‘자기 현실’일 뿐입니다. 진짜 천국에는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명단이 있는 자들만 들어옵니다. 그 명단을 친히 작성하신 분이 이 세상에서 인간들에게 필요없다는 평을 받으며 저주의 죽음 속으로 사라진 바로 그 분입니다. 따라서 아무도 그 분을 사랑하지 못했지만 도리어 그 분의 일방적 능력에 의해서만 책임지고 천국에 들어오게 됩니다. 여기서 나올 수 있는 반응은 오직 하나입니다. “나는 죄인이고 주님은 그 죄를 위하여 피를 흘리고 죽었습니다. 저는 오직 감사할 뿐이며 모든 영광은 주님의 몫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사다리가 걷어차인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친히 우리는 자신이 계신 곳으로 이끌어내심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