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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사도행전 22:5-11 / 빛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사도행전

사도행전 22:5-11 / 빛

정인순 2010. 12. 29. 16:21

이근호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사도행전-2003/093강-행22장,5-11,(빛)-acts050629.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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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2005년 6월 29일                                

 

본문 말씀: 사도행전 22:5-11


 

22:4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22:5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저희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22:6 가는데 다메섹에 가까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
22:7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가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22:8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22:9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22:10 내가 가로되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바 너의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22:11 나는 그 빛의 광채를 인하여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예수님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는 자들은 교회 다니고 난 뒤에 좀 더 향상되었다고 여겨지는 자신의 마음의 변화에 대해서 남들에게 과시하기 마련입니다. 보다 더 훌륭해지고 보다 더 성숙해졌다고 스스로 대견해하는 것은 여전히 진리를 놓치고 있는 사람입니다. 진리는 인간의 내적 달라짐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문 하심'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은 자신이 만난 누군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이 외출했다가 특별난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것이 외출 중 가장 큰 일이 되는 법입니다. 산책 도중에 중요한 정치인을 만나게 되면, 그 산책길에 보았던 나무나 하늘이나 돌멩이 같은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그 특정인을 만난 기억이 오래갑니다.


 

이처럼 참된 기독교란, 인간으로서 갖게 되는 세상에 대한 나름대로의 의견을 종합한 것이 아닙니다. 혹은 세상 살이하면서 나름대로 겪은 시련같은 것을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자신이 만난 살아 계신 예수님에 관한 것이 기독교의 전부입니다.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지 마치 비행기 타고 가다가 비행기 바깥에 사람이 창문을 바깥에서 두드리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는 것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이 인간들이 사는 세상 위에는 그 어떤 분들이 살고 있으리라는 사람들이 감히 상상치도 못할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인간들이 사는 이 세상 위에는 빛의 세계가 있고 그 빛되신 분이 직접 사울의 존재를 익히 아시고 이름까지 부르시면서 친히 찾아오신 겁니다. 이 때부터 사도바울은 예수께 미쳐버린 자가 되었습니다.


 

그 정도가 어느 정도인가는 빌립보서 1:21에 잘 나와있습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세상에, 얼마나 예수님에게 미쳐 있기에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고백을 다 하겠습니까! 즉 좀 더 세상을 더 살면서 인격수양에 나서보겠다는 그런 생각마저 다 부질없는 겁니다. 그냥 빛되신 분을 빛 속에서 빛으로 만난 그것으로 곧장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인격적으로 완성단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빛 되신 분을 만난 것, 그것으로 완료돤 상태입니다. 서서히 새로운 피조물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쪽에서 가상스럽고 피나는 노고가 추가되어야 그제사 새로운 피조물 되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인간 쪽에서 신을 만나기 위해 부지런 떠는 것이 새로운 피조물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저 예수님이 와서 찾아준 그 사실로만 이미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제부터 사도 바울은 그 누구도 합리적으로 납득이나 설득이 될 수 없는 말을 해야 하는 사람으로 살게 됩니다. 아무도 인간적인 이성으로 깨닫지 못하는 말을 해야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렇다고해서 사도 바울이 이점을 안타깝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 때부터 구약의 모든 율법과 예수님의 생애를 이 '빛의 찾아오심' 사건으로 다시금 해석하게 됩니다.


 

이런 해석은 사도 바울 뿐만 아니라 사도 요한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복음 1:4-5에 보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아예 이 세상 자체를 '어두움'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왜 어두움인가 하는 것은 빛의 세계에서 빛 자체가 되신 분이 이 땅에 오기 전에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이 세상이 어두움이라는 사실을 궁극적으로 철저하게 규정짓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이 사실을 수용하는 사람입니다. 즉 자신은 이 어두운 세상의 한 일원으로서 철저하게 어두운 자라는 점을 자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무엇하며 살았든지 어떻게 살았든지 상관없이 말입니다.


 

빛되신 분은 이처럼 자신이 어두움임을 자인하게 되는 자들로 하여금 오직 예수님만이 빛되심을 인정케 하여 그들로 하나님의 백성 삼으려고 하시는 겁니다. 즉 예수님이 빛으로 오셨고, 빛이 예수님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이는 혈통으로나 육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난 자만이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흔히 어두움 속에 자들이 자신의 어두움을 깨닫지 못하고 대단한 권력이나 권세가 있는 것처럼 행세합니다. 그러나 빛의 자녀들이 보기에는 그저 짚으로 만든 인형에 불과합니다. r,들이 아무리 세도를 부려도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니 죽는 것도 내게 유익하다"는 이 자유함이 있는 이상은 그들의 존재나 활동은 전혀 위협이 되지 못하는 지푸라기 같은 존재에 해당됩니다.


 

사도 바울이나 사도 요한 뿐만아니라 스데반 집사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행전 7:55에 보면,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 스데반 집사님의 주변에서 집사님을 살해할 의지가 충만한 다급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살해 당사자인 스데반 집사님은 조금도 다급하지 않습니다.


 

그는 죽어가면서 다음과 같이 예수님께 부탁합니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즉 자신들이 어둠에 속한 것임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신세를 불쌍히 여긴 것입니다. 이처럼 빛의 자녀가 된 이상 더 이상 자신을 우수하게 만들기 위한 그 어떤 노력도 다 부질없는 짓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흔히 신앙도 없는 주제에 억지로 신앙이라는 것을 만들어보기 위해 자기 쪽에서 신에게 다가가기 위한 정결한 품성을 갖추려고 온갖 노력을 다 하는 것, 그것도 어두움일 뿐입니다. 짙은 어두움이나 옅은 어두움이나 하나님 보시기에 빛의 자녀가 아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란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러한 짓들이 예수님의 빛의 영광성을 모독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만들기는 결코 우리 인간이 할 일도 아니며 해야 할 일도 아닙니다. 하지 않으면 안될 일도 아닙니다. 순전히 빛 되시는 예수님의 할 일이십니다. 우리는 그저 어두움으로서 그 어두움의 생리가 빛 되시는 주님 앞에서 낱낱이 폭로 당할 뿐입니다. 즉 우리 자신들이 사울이 고백한 것처럼 예수님을 그동안 핍박해 왔음을 고백하는 겁니다. 이런 자가 바로 신앙인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실제로 살아 계신 주님을 가상의 인물로 여기기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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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행 22:5-11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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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22:5)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저희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행 22:6) 가는데 다메섹에 가까웠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

(행 22:7)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가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행 22:8)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행 22:9)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행 22:10) 내가 가로되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 바 너희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행 22:11) 나는 그 빛의 광채를 인하여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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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동호회가 아니기에 !!

제가 기독교를 접하고 교회에 다니면서, 지금까지 가장 크게 우려하는 바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제대로 복음을 알고 진리를 안다면, 그래서 믿음생활을 하게 된다면, 자기 향상이라든지, 착해짐, 하나님을 향한 성실함, 순수함 등등, 그런 것에 대해서 관심을 둔다고 하면, 그런 것은 기독교를 크게 오해했기에 나오는 현상이란 말이죠.

기독교라는 것은, 이 세상의 여러 종교 가운데서 하나를 골라잡아서, 그것으로 마음의 위로와 평안을 얻는 것을 두고, 그것을 기독교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동호회나 취미단체이지 전혀 기독교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태도라는 말이죠.

하나님에게 믿음을 선물로 받아서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자라고 하면, 자기의 향상, 착함, 성실함 등등, 그런 이야기가 나오면 안 되고, 예수님 이야기가 나와야 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런 예수님을 믿게 해주신 하나님 이야기가 나오고 말이죠.

 

여보, 내가 오늘 대통령을 만났어 !!

만약에 제가 아침에 등산을 하다가 노태우 전 대통령을 만났다고 하면, 정말로 만났는데 말이죠. 그러면 집에 와서 가족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오늘 등산을 하는데 몸의 컨디션이 참 좋았다” 라는, 그런 평소에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무슨 내용이 나와야 하겠습니까?

“여보, 놀라지마. 오늘 아침에 등산을 하다가 내가 노태우 전 대통령을 만났어. 그리고 악수도 했어. 진짜야” 라고, 그게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왜냐하면, 특이한 사건이기 때문에, 그것은 평소에 경험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그분도 이제는 평범한 같은 주민이지만, 아무튼 특이하다면 특이하다는 말이죠.

그러면 진짜 천국에 가는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교회에 왔다갔다하면서 다리가 많이 굵어졌다든지, 정신수양이 많이 되었다든지, 노래를 잘 부르게 되었다든지, 그런 것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뭔가 정말로 잘못 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 것은 전혀 특이한 것이 아닌데, 정말로 특이한 것은 오늘 본문 그대로라는 말이죠.

 

그리스도인 !!

과거에 하나님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오셨다가 다시 가셨다는 사실, 그러면 지금은 무엇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고 하니, 부활의 영으로서, 눈에 보이는 않는 형태로서 자기 백성과 함께 계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바로 거기에 대해서 관심사가 집중될 때, 비로소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 즉 그리스도의 사람, 예수 사람이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예수 사람만이 예수님의 나라에 간다는 말이죠.

예수 사람이 되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에 대해서 만난 적도 없고 아는 바가 없는 사람인데, 그러한 사람은 예수님의 나라에 결코 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기껏해야 자기 자신의 나라에 가는데, 그곳을 사람들은 극락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당연히 지옥이라는 말이죠.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그래서 우리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이 현장에 사도바울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도 같이 있다고 여기고 보자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아니 사울이 길을 가는데 다메섹에 가까웠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자기를 비추더라는 말이죠. 그것도 모자라서 소리가 들리는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라고 한다는 겁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그때 아마 사울이 자기 양심대로 이야기를 했다면, “내가 무슨 나쁜 일을 했습니까?” 라고 나왔지 싶은데, 그런데 사울은 그게 아니라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했다는 말이죠. 보이지 않는 분이 빛 속에서 음성을 날린다고 하는 것, 그것은 상상이 안 된다는 겁니다.

사울이 이렇게 하늘에서 음성을 듣는 것이 얼마나 황당한 경우인고 하니, 자기가 비행기를 타고 가는데, 유리창 밖으로 구름을 보고 있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갑자기 손가락이 나타나서 “그만 봐라” 라고 글자를 적더라는 겁니다. 그러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슈퍼맨이 나타난 것인가요? 얼마나 황당하겠느냐는 말이죠.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 하늘에는 사람이 없는데, 그런데 웬 음성이냐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가 보기에 없는 것이지 있다는 말이죠. 기독교는 여기에서 시작하는데, 하늘에 어르신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어르신은 등산을 하면서 만난 노태우 대통령 정도가 아니라, 우주를 만드시고 우리 인간을 만드신 그 당사자라는 말이죠. 그분이 지금 하늘에 살아계신다는 겁니다. 죽은 정조 할아버지를 만난 것이 아닌데, 그야말로 엄청난 사건이라는 말이죠.

바로 여기서부터 사울은 완전히 미친 사람이 되고 마는데, 그 똑똑하던 사람이 완전히 바보가 되고 마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이야기를 말이죠. 인간의 지혜로는 도저히 납득을 할 수 없고, 또한 도저히 설득이 되지 않는 길로 간다는 겁니다.

 

죽는 것도 좋아요 !!

이것이 사도바울에게는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지 모르는데, 그래서 빌립보서 1장 21절에 보면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죽는 것도 자기에게 유익한데, 그러니 “착하게 살아야지. 바르게 살아야지” 라는 것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다는 겁니다.

(빌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일단 사람이 살려고 할 때, “이왕 사는 것 착하게 살자” 라고 나오는 것이지, 지금 사도바울은 어떻게 자기가 살아야 한다는 것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겁니다. 자기에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그야말로 축복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 정도 같으면 이미 끝났다는 겁니다.

“살아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라는 것이 없는데, 그런 것은 선교사들이 하는 말이고, 사도바울은 지금 피를 흘리고 그대로 쓰러져도 그것조차도 자기에게 이익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세상에서 이익이 아닌 것이 무엇이 있느냐는 말이죠. 자기는 그 어떤 일을 당해도 모든 것이 다 유익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가 직접 만난 예수님에게 미쳐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것 말고 달리 설명할 길이 전혀 없는데, 즉 “너희들은 만나지 못했지? 듣지 못했지? 못 봤지? 그런데 나는 만나고 들었고 보았다. 부활하신 주님이 죄인 중의 괴수에게 나에게 찾아오셨다” 라는 겁니다.

성도는 바로 이러한 희열을 맛보아야 하는데, 그러니 이제는 사도바울을 도저히 갈지도 못하는 자로 만들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도바울을 이렇게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라고 하면서 대범하게 살 수 있는 자로 만들었는지, 어떤 요소로 인해서 그런 사람이 되었는지를 살펴보자는 겁니다.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 !!

그 해답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데, 6절에 보면, “가는데 다메섹에 가까웠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 라고 되어있고, 또한 9절에 보면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라고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사울이 빛을 받아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죠.

(행 22:6) 가는데 다메섹에 가까웠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 …

(행 22:9)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그런데 이 세상에서 흔히 새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그 사람의 성격이나 행실이 나아졌다는 것인데, 술주정뱅이가 술을 끊는다든지, 혹은 마누라만 보면 때리고 하던 놈이 얌전해진다든지 하는, 그런 것이란 말이죠.

 

빛의 사람이 곧 새로운 피조물 !!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새 사람은 그런 것이 아닌데, 윤리 도덕적인 의미의 새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는 새 사람은 “나는 빛을 받았다” 라는 겁니다. 즉 빛의 사람이라는 말이죠. 달리 말하면, “나는 예수님을 만났다. 나는 예수의 사람이다” 라는 것, 그게 바로 새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 이상의 것은 없는데, “예수님을 믿었던 강도는, 그렇게 죽기 15분전부터 인간성이 달라지고, 자기가 강도짓을 한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했구나” 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런 것을 기대하면 안 된다는 것이죠. 주님과 함께 낙원이 간 강도는, 그가 예수님을 믿고 개과천선한 것이 아닌데, 그것도 시간이 없으니까 급하게 말이죠.

그것이 아니라, 빛 되신 주님과 함께 빛의 사람이 되어서 손을 잡고 천국에 함께 가는 겁니다. 그것뿐이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빛이 자기를 통치하는, 그래서 빛 속에 놓인 사람이 되는 것, 그런 사람을 두고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제 내가 새로운 피조물이니, 내 성격이 어떻게 달라졌는가?” 라는 것에 관심을 두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 것을 끄집어내어서, 자기 자신을 윤리 도덕적으로 증명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죠. 그런 것이 큰 시험이 된다는 겁니다.

 

아이쿠, 예쁜 내 저금통 !!

그것은 마치 시골 할머니가 돼지 저금통에 천원 짜리도 넣고 백원 짜리도 넣고 해서, 그것을 흔들고 보고, 그리고는 억지로 꺼내서 얼마나 들었는지 확인하는데, “아하, 오만이천육백원이 들었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리고는 다시 넣어서 또 흔들고 하는, 그런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저금통을 흔들고 구멍을 내서 확인하듯이, 자기 자신의 내부를 열어서, “내가 지난주에 무슨 짓을 했지? 아이쿠 그것은 잘못했네. 다시는 그렇게는 하지 말아야지. 하지만 다른 것은 참 잘했어” 라고,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게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 모른다는 말이죠.

고린도전서에 보면 그 저금통이 다 불타고 마는데, 집에 누전이 되어서 불이 났다고 하면, 저금통도 함께 타고 만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불 가운데서의 구원인데, 물론 그렇게 해서라도 구원을 받으면 참 다행이지만 말이죠. 아무튼 남는 것은 주님의 공로밖에 없다는 것이죠.

(고전 3: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고전 3:15)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그러니까 자기 저금통에 착한 것을 얼마나 넣었고 나쁜 것을 얼마나 넣었는지, 그런 것을 매일같이 검토하다가는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불 가운데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런 것들은 모두 다 불에 타서 없어져야하는, 그야말로 쓸데없는 짓이라는 겁니다.

 

빛의 세계에서 빛이 !!

사도바울은 자기가 만난 그 빛을 증거하는 사람이지, 자기의 향상이나 훌륭함을 증거하는 사람이 아닌데, 빛은 자기 머리 위에 있었다는 것인데, 그렇게 빛의 세계가 엄연히 있다는 겁니다. 마치 먹구름이 있어서 비가 오듯이, 지금 사울에게 쏟아지는 빛은, 빛의 세계가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빛의 세계에서 쏟아지는 빛을 받았다는 말이죠. 이게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겁니다.

여기서부터 사울은 이 빛을 가지고 신구약 성경을 해석하기 시작하는데, 예수님의 공생애, 그 이전에 있었던 이스라엘 역사, 즉 창세기부터 마지막 세상 끝 날까지를, 그 모든 것을 이 빛을 가지고 새롭게 조명하기 시작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이것은 사도바울뿐만 아니라 사도요한에게도 마찬가지인데, 그도 빛을 가지고 해석을 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사도요한이 기록한 요한복음 1장을 보겠는데, 4절과 5절입니다.

(요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 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예수님이 빛으로 오신 이유는?

여기서 빛은 예수님을 의미하는데, 예수님이 빛으로 오신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세상이 어둠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하기 위해서 빛으로 오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만을 단독적으로 빛이라고 했는데, 그러니 우리는 그동안 어디에 놓여있었다는 겁니까?

우리는 모두가 어둠 속에 놓여있는, 그런 어둠의 자식들이었다는 말이죠. 같은 어둠의 자식들이면서, 아무리 “너는 더 짙은 어둠, 나는 조금 덜 짙은 어둠이다” 라고 해봐야, 그것은 역시 무엇은 아니라는 겁니까? 빛이 아니기는 마찬가지라는 말이죠.

 

어둠은 빛을 몰라 !!

그런데 이 요한복음 1장을 좀 더 자세하게 보면 다음과 같다는 겁니다. 사람들의 빛이 되시는 분이 나타나셨는데,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은 그 특징이 있는데, 예수님이 빛의 세계에서 온 빛이라는 것을, 그것을 어둠에 속한 사람은 그 어떤 경우라도 깨닫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바보인데, 그것을 요한복음 9장에서는 소경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장애자인데, 그런 영적인 장애자는 국가에서 주는 혜택도 없다는 겁니다. 자동차를 사도 세금을 깎아주지도 않는다는 말이죠. 그렇게 세상에서는 장애자가 아니지만,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취급도 해주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 중에는 전두환도 있고 노무현도 있고 강금실도 있는데, 제가 등산을 하면서, 아니 산책을 하면서 만났던 노태우도 있고 말이죠. 그 사람이 과학자이든 정치가이든 재벌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자기가 어둠이고 오직 예수님만이 빛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그것은 짚으로 만든 인형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것들에게 협박을 당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 짚으로 만든 인형들이 고함을 친다고 해서 겁을 낼 이유가 전혀 없다는 말이죠. 적어도 사도바울과 같이, “내 안에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라고 한다면, 무슨 어둠의 자식들이 죽인다고 까불고 협박공갈을 해도, 그게 무슨 겁이 나겠느냐는 겁니다.

 

인형이 또 까분다 !!

지난 주일오후에 우리 장로님께서 폭력에 시달리는 가정주부 이야기를 했는데, 자아 정체성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아서 그냥 당하기만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 아줌마가 빛의 사람이라고 하면, 즉 “내 안에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라고 한다면, 남편에 늦게 들어와서 때려도 빙긋이 웃지 싶은데, “인형이 또 까분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면 말로 조용하게 타이르는데, “요즘 또 기어오르네. 까불다가는 혼난다. 좋게 말할 때 그만해라” 라고 말이죠. 그러니 정서적으로 불안할 것도 없고 여유를 부리면서, 마치 하수와 바둑을 두는 것처럼 그렇게 살면 겁니다. 굳이 이혼할 이유도 없고, 그렇게 살살 다루어가면서 돈만 빼먹으면서 말이죠.

빛의 사람은 그 정도로 여유가 있는데, 그런 사람 앞에서 어둠의 자식들이 아무리 까불어도, 그것은 웃기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데, 그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경험한 새 사람이라는 말이죠. 어느 정도로 새 사람인고 하니,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무리 도를 닦아도 전혀 될 수 없는, 그런 새 사람이라는 겁니다.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인품을 쌓아도 전혀 도달할 수 없는 새 사람인데, 그것은 위에 있는 빛의 세계에서, 생명의 빛이 되신 주님께서 오심으로서, “나는 어둠이고 그분만이 빛이다” 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 그런 사람을 여기 요한복음 1장에서 뭐라고 합니까? 12절과 23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는 겁니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만이 그러하다는 것인데, 그러니 이게 무슨 윤리이고 도덕이고 철학이냐는 말이죠. 성화도 아닌데, 사람 자체가 완전히 달라졌는데 무슨 서서히 달라지고 말고 하느냐는 겁니다. 무슨 된장이나 고추장을 만드는 것도 아니고, 서서히 되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빛을 깨닫고, 그 순간에 죽어도 천국에 가는데, 그래서 한 번 새 사람은 영원한 새 사람이라는 겁니다.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 집사님이 나오는데, 방금 이야기한 사도요한, 그리고 사도바울,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빛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55절 이하를 보겠습니다.

(행 7: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행 7: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행 7:57)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행 7:58)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행 7: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빛의 세계로 끌려 올라가는 스데반 집사 !!

스데반 집사님이 무엇을 보았는고 하니, 55절에 보면,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라고 하는데, 즉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곧 빛인데, 그런 빛으로 계시는 예수님을 보았다는 말이죠. 그런 영광을 나라를 바라보면서, 예수님에게 뭐라고 합니까? “예수님, 저 사람들이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러니 용서해주세요” 라고 하는데, 그러면서 그 빛의 세계로 끌려 올라가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의 모습인데, 성령에 충만한 말이죠.

그러니 교회에서 제일 한심스러운 사람이 어떤 사람인고 하니, “예수님을 믿었으니 윤리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살아한다” 라고 하면서 분통을 터트리는 사람이 있는데, 참으로 보기에 안타깝다는 겁니다. 얼마나 믿음이 아닌 것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우겼으면 저런 불상사가 생기냐는 말이죠.

그러니 전혀 믿음이 아닌데, 그것을 믿음이라고 걸쳐놓고는, 남들에게 자기가 믿음이 없다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소위 예수쟁이에 걸 맞는, 그래서 손양원이 어떻고 주기철이 어떻고 하면서, 한경직 목사와 테레사 수녀까지 언급해가면서 말이죠.

 

영락교회와 태극기 !!

제가 서울영락교회에 가서 깜짝 놀랐는데, 예배당에 태극기가 걸려있다는 겁니다. 태극기가 동양철학인데, 그렇지요? 그런 태극기의 취지도 모르고 걸어놓았다는 말이죠. 그것은 바로 인간들이, 어둠인데 그 어둠에서 탈피해보고자 자기가 정성을 다해서 반성하면 하늘도 감동할 것이라고, 그렇게 자기단련과 인격수양을 해서, 남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은 인간이 되어서 천국에 가려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다 부질없는 짓인데, 이 세상이 어둠이란 것에 대해서 절감을 해야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요한복음 3장에서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실 때, 주님이 심판주로 오셔서 어떻게 합니까? 어둠은 더욱 어둡게 하고, 자기 백성은 어둠에서 빛의 자녀로 뽑아내신다는 겁니다.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우리들, 그러나 !!

(요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 3: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그러므로 그것을 자기 쪽에서 어떻게 수용하려고 하지 말고, “예수님은 처음부터 빛이었다. 예수님은 생명의 빛이다” 라는 것을 믿으면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날로부터 천국의 백성이고 빛의 자녀가 된다는 겁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너무나 믿음이 없기에 그것을 보충한다고 하면서 남들보다 더 착해지고 훌륭해지려고, 그렇게 자기 인격수양이 매달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주님이 보시기에 참으로 한심스러운 것인 줄 압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핍박한, 그래서 죄인 중의 괴수이고 어둠인 것을 깨닫고, 오직 우리의 구원은 빛 되신 주님밖에 없다는 것을, 그래서 그 빛 되신 주님만을 의지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6,03,02 정리함 - 녹취 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