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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빌레몬서 강의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빌레몬서

빌레몬서 강의

정인순 2010. 9. 25. 10:31

080125 빌레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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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서경수

 

광주080125a빌레몬서1

광주 강의(2008. 1. 25) 33-1

빌레몬서(351페이지) 오늘 다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1-3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은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및 자매 압비아와 및 우리와 함께 군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이렇게 되어 있지요.

시작이 안부를 묻는 식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 보면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참 엄청나게 위대한 대상이 되잖아요. 태초부터 계셨고 천지를 다 만드신 분이 얼마나 세밀하고 구체적인지, 빌레몬과 압비아와 아킵보 그런, 우리 인간들이 생각해도 그냥 무시해도 될 만한 이웃집 아저씨 아주머니한테 누구를 동원시키는가 하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과 예수님을 다 연결시키기 위해서 매치를 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기어이 자기 백성을 드러내고 분명히 자기 백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편지를 보낸다는 겁니다. 보통 사도바울이 편지한다고 하면, ‘바울이 쓴 편지나 내가 쓴 편지나 뭐가 다른가?’ 생각하는데, 바울이 편지를 쓰지만 하나님과 그리스도까지 동원시키는 것으로 봐서, “당신이나 나나 우리가 보통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는 그런 것이 있어요.

이 본문을 보면서, 교회 오래 다닌 사람 같으면 그저 ‘안부 인사를 하는구나.’ 생각하지만, 만약 예수님을 처음 알았던 사람 같으면 이 구절만 봐도 눈물 날 일이지요. 마태복음에 나오는 것처럼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이것 설명하기 이전에 사도행전을 보겠습니다. 13장 47-48절에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가를 이제 아시겠지요? 하나님의 영생은 너무나 귀하기에 아무에게나 주는 것이 아니고,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한 자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뭐냐? 십자가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태초에 있었던 계획이 십자가 안에 삽입이 되어 있습니다. 태초의 계획이니까 태초에는 우리가 없었습니다. 태초에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밖에 없잖아요.

그 태초에 있던 계획이 십자가를 가지고 구체화되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 외에 다른 계시가 있을 수 없지요. 모든 태초의 계획이 십자가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십자가를 가지고 ‘십자가 피만 있으면 구원 받는다’ 이것만 생각하지 마시고, 그 십자가 안에 태초에 예정하신 계획이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 에게만 이 피가 믿어진다는 겁니다.

혹시 피가 믿어지시기든 ‘나는 피 믿었다.’고 하지 마시고, 태초에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에베소서 1장 4절에, 창세전부터 구원 받기로 작정한 그 계획의 일환으로 피가 우리에게 나타났고, 우리는 그 피를 받아드리게 되었고, 그 받아드린 것을 기점으로 그 안으로 파고들어가 보니까 ‘태초에 예정된 자이기 때문에 우리가 믿게 되었구나’ 하는 것을 압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몰랐던 하나님이 태초에 세운 계획이 21 세기에 우리와 만나는 거지요. 뭘 통해서? 십자가를 통해서 만나는 겁니다. 사도행전 13장 48절을 다시 보면,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가 나라는 것을 믿는다면 그 사람은 뭘 믿느냐 하면, ‘영생 받았다.’ 이렇게 나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작정이 들어오겠지요. 내가 훌륭해서, 자질이 뛰어나서 내가 예수 믿어 영생을 얻은 것이 아니라, 영생 주시기로 작정하신 계획이 내 안에 침투해서 믿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영생 주시기로 작정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잖아요. 그러니까 빌레몬서 1장 안부에 뭐가 나옵니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는데, 진짜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는 거예요. 이것은 상투적인 인사치레가 아니란 말이지요.

다시 해 봅시다.
빌레몬서 1장 1-3절에서 나오는 문안인사는 우리의 운명이 우리의 존재 기반에서 온 것이 아니란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므로 이 인사를 들을 때마다 감격케 하는 거죠. 그 감격의 근거가 뭐라고 했습니까? 사도행전 13장에 나오는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했는데, 누가 영생 주시기로 작정했습니까? 하나님이 작정한 그 계획이 계속 일관성 있게 밀어붙이다 보니까 나에게도 예수님의 피를 믿고 영생을 얻게 되는 그런 결과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일관성이 있는지 사도행전 18장 9-10절을 보겠습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그렇게 되어 있지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다’는 말은 누가 하셨습니까? 밤에 주께서 환상가운데 사도바울에게 그렇게 말씀하시지요. 그러니까 그 도시에 내 백성이 있고 없고를 누가 먼저 압니까? 주님이 알지요. 그리고 자기 백성이 있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고, 그 다음에 사도바울을 보내잖아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자기 목회 성공에 대해서 염려할 위치에 있지 않지요. 왜냐하면 이 성중에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 외에 더 모아서도 안 되지요. 원래 이 도성에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가 10명이라면 그 10명만 모아야지 12명 모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5명 되었다고 해서 철수하면 안 되겠지요. 10명이 되어야 하니까.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사람이 도중에 사도바울이 부실하다든지 본인이 끈기가 없어서 영생이 취소되는 법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런 법은 없는 거예요. 한번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기어이 영생이 오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오게 되어 있는 그 결과가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속에는 뭐가 있어야 됩니까? 영생 주시기로 작심한 하나님의 마음이 변하지 않아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죠. 이것을 빌레몬서에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다’(3절)는 것이지요.

영생 주시기로 작정한 그 능력이 너로 하여금 이렇게 하나님과 연결되도록 한 것입니다. 어느 골목 어떤 집에 있는 할머니. 이웃 사람도 이름도 모르고 존재도 모르는 그러한 미미한 존재인데 어느 날 빌레몬서 성경을 읽다 보니까, 그 할머니를 사람들은 안 알아줘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 할머니와 연결되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빌레몬서 1장 3절의 문안인사가 얼마나 심오합니까? 심오하고 초 시간적이고, 초 공간적이죠. 시간과 공간, 물질 이런 것을 초월해서 (이것을 영적이라고 하는데) 하기에 이 하나님의 일은 방해할 사람도 없고, 방해받을 일도 아니고, 그 놀라운 은혜의 가속도 앞에 누가 그것을 차단시키겠습니까? 아무도 그럴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보고 감격할 수밖에 없죠. 저 사람이 날 안 알아주고, 이 사람도 날 몰라주는데 하나님과 예수님은 날 알아주시는 구나. 언제부터? 태초부터. 그래서 아까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마태복음 16장 26절을 잠시 보겠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여기에서 서로 비교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온 천하’가 나오고, 또 다른 것은 ‘구원 받는 목숨’이 나오지요. 온 천하보다 뭐가 더 귀하다? 구원 받을 목숨이 더 귀하다는 말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 말씀이 실제로 우리에게 오려면 온 천하가 우리 주변에서 무너지는 경험을 해야 이 말씀이 경험 되겠지요.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이 마태복음 16장 26절 말씀이 나에게 체험이 되려면, 내가 온 천하의 일부를 가지고 있잖아요. 아이들도 온 천하 중 일부이고, 집도 그렇고, 직장, 교회, 내 건강도 천하의 일부인데, 이런 것이 없어지고 무너지고 깨질 때 ‘역시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돈과 명예와 권력과 이 세상. 까짓것 깨지려면 깨져라! 나는 구원 받은 목숨이 더 좋다.’ 라고 체험이 되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그 다음 무슨 말이 나올까 겁이 나서 대답을 못하시는 것 같은데 ---

하나님께서 이 말씀하나 우리한테 체험 시키려고 온 천하가 불바다 되는 일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예수님 재림하시면 두 사람이 맷돌을 갈다가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그냥 남지요.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하다가 결국은 인자가 도적같이 오면서 세상은 불바다가 되잖아요.

롯의 처가 뒤돌아 봤잖아요. 아쉬워서, 미련이 남아서 뒤돌아 봤는데 소금 기둥이 되었지요.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일을 험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 말씀이 그냥 농담이 아니고 진짜로 네가 얻을 영생은 네가 지금 그렇게 갖고 싶어 하는 온 천하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것이 뭉개지고 무너지는 일들을 당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방금 언급한 마태복음 16장 말씀을 제가 하나의 논리로서 한 번 정리해 봤어요. 뭐냐 하면, 인간의 존재의 밑바탕이 있지요. 바닥이 있는데, 이 ‘나’라는 인간은 이것저것 끌어 모아서 바구니 안에 담을 때 이것이 ‘나’가 됩니다. 나는 키가 얼마다. 몸무게가 얼마며, 나는 어떤 색깔을 좋아하고, 직장은 어디를 다니고, 학교는 어디까지 나왔으며, 내 아버지는 누구며, 친구들은 어떤 사람이며, 우리 집에는 뭐가 있고, 나는 모자를 좋아해서 늘 모자를 쓰고 --  이런 것들을 모을 때 ‘아하, 나는 이정도 인간이다.’ 이렇게 됩니다.

늘 모자를 쓰는데 누가 내 모자를 빼앗아간다면 모자 없는 나는 왠지 ‘나’ 답지 않게 되지요. 현대 철학자가 밝혀낸 것인데, ‘나’라는 것은 안을 들여다보면 조각조각 이질적인 것들(이것을 속성이라고 하는데)이 융합되어서 모인 것이 ‘나’라는 것입니다.

제과점의 빵 중에 멍게같이 생긴 빵이 있어요. 감자를 모아놓았는지 고구마를 모아놓았는지 밥알을 뭉쳐놓았는지 주먹밥 같이 생긴 그런 것이 있어요. 이것을 훅 불면 깨지겠지요. 예를 들어, ‘나는 어떤 기업체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 내 안의 속성은 기업체 사장이 속성이잖아요. 그런데 기업체를 누구한테 빼앗겼어요. 그러면 나머지 반 토막가지고 나를 또 세워야겠지요. 그리고 그 사람 속에 뭐가 있는가 하면 기억이 있는데, ‘나는 한 때 잘나갔던 기업체 사장이었다.’를 하나의 속성으로 해서 모읍니다.

이것이 존재의 바닥을 이룹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6장 24절에 의하면 이런 바닥을 성도에게는 균열이 일어나게 해요. 균열이 일어나면서 쪼개지면서 이 밑바닥에서 뭐가 올라오느냐 하면 ‘나 외에 다른 길이 없느니라.’ 이게 나와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이것이 나와요.

그러면 그동안은 무엇이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나’라고 하는 이 자아. ‘나는 이러이러한 것이 나다.’ 라는 것이 꽉 눌러 있었어요. 우리는 24시간 ‘나’를 생각해요. 그런데 예수님은 뭘 생각하는가 하면 길을 생각해요. 길은 쪼개서 통과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고, 나는 뭐든지 끌어 모아서 응집하는 기능이 있지요. 나쁜 것은 버리고 좋은 것은 더 모아서 더 좋은 나로 만들지요.

그런데 이런 나를 관통해서 해산시켜 버려요. 해산시키고 그 가운데 길을 내버려요. ‘까불지 말고 나 따라 와. 나는 길이야.’ 이것이 ‘과정적이다.’ 라는 말도 되고, ‘흐름이다.’ 라는 말도 되고, 우리는 응집되면 이것은 영원히 가지고 갈 고정된 것으로 안정감을 느끼려고 하는데, 주님께서는 흐름을 이야기해요. ‘나 따라 인도함을 받아. 어떤 몰골을 하든지 묻지 않을 게. 네가 살인강도가 되던 창기가 되던 깡패가 되던 묻지 않을 게. 그냥 나만 따라 와.’ 하는 것이 어디 나오는가 하면 마태복음 16장 24절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길과 인간 아닙니까.

길이냐 인간이냐? 멈춤이냐 떠나는 도정이냐? 멈추면 끌어 모아야 돼요. 더 실력을 쌓아야 되고, 유학도 갖다 와야 되고. 멈추면 자꾸 끌어 모아야 돼요. 떠나는 사람 같으면 나를 깨더라도 나를 천국 쪽으로 잡아당기는 길의 힘이 나에게 더 소중하다고 느낍니다. 이게 예수님 말씀입니다.

자, 그렇다면 ‘나’라는 존재 밑에 콘크리트가 있는데, 나를 굳히는, 나를 금신상으로 만들고 나를 존대하는 ---
민주주의와 느부갓네살의 공통점이 뭐냐? 다니엘에서는 느부갓네살 왕 자기만을 신으로 보잖아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인간이 다 신입니다.

우리 집근처 어떤 종교단체에서 온 것이 있어요. “인간이 곧 하나님이다.” 큰 글씨로 써서 자기 종교 전파한다고. 하나님이 따로 없고 인간이 곧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인간을 자극합니까. 높여줍니까.

느부갓네살은 누가 하나님이에요? 자기만 하나님이다. 라고 하다가 짐승처럼 7년 동안 소처럼 풀을 먹고 살았단 말이지요. 이것이 민주주의와 제국주의의 차이점인데 그쪽은 한 명이고 이쪽은 모든 만민이 다 절대자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서로 절대자 되려고 하니까 싸우잖아요.

“만인의 만인을 위한 투쟁” 누가 이야기했지요? 홉스가 이야기했지요. 존 로크도 비슷한 이야기했지만 홉스가 먼저 이야기했어요. ‘이 세상은 투쟁해서 승리하는 자는 살아남고, 눌리는 자는 도태된다.’ 이 이야기가 빌레몬서에도 나와요.

그래서 빌레몬서가 좀 어렵습니다. 미리 이야기한다면, 사람이 가난한 자 부자가 나눠진 것이 아니고 사실은 모든 사람이 다 가난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넉넉하면 안 초조합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다 초조하니까 자꾸 성급하게 되고, 더 끌어 모아야 되고, 더 벌어야 되고. 왜? 가난하니까. 항상 불안하니까. 보험 들었는데 또 다른 보험 들고.

부자란 이름의 가난뱅이들입니다. 아무도 넉넉한 사람이 없어요. 20대 아가씨. 장래가 불안해요. 가난해요. 항상 초조하고 불안해요. 내 미래가 어떻게 될지? 젊은이들이 다 그렇습니다. 여자고 남자고 관계없이 모든 인간은.

앞으로 3년 후의 내 모습이 어떨지? 항상 쫓겨요. 쫓기면 그만큼 여유가 없어. 여유가 없으니 가난한 사람 아닙니까. 부자들은 안 그런 줄 압니까? 부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은 많이 벌었는데 세무조사 나올까 불안하고 --

가난의 의미가 이것 말고 좀 더 나오는데, 가난의 의미가 상당히 어려워요. 출애굽기 노예와 연관시키고 무지하게 어려워요. 그 어려운 것도 조금 아는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나’라는 것은 없습니다. 임시방편적인 것입니다. 끌어 모아서 그것을 ‘나’라고 합니다. 모은 것이 없어지면 또 다른 나를 만듭니다. 기업체 사장하다가 망하면 처음에는 아쉬워하다가 새로운 것을 시작해서 또 다른 ‘나’를 만듭니다. 그러니까 ‘나’라는 것은 대충 주변에 있는 것을 적응하는데, 그 적응하는 매듭을 짓는 마지막 테두리에 있는 끈을 ‘나’라고 보면 됩니다. 쉽지요?

그냥 모이면, 무조건 끌어당기면 일단 오늘의 ‘나’에요. 그런데, 이것이 존재의 기반인데, 밑에서 뭐가 올라온다고 했습니까? ‘나’는 덩치가 있는데, 그 덩치를 길이 관통을 해서 나는 분해되고, 균열이 생기는데, 이 갈라지는 길을 예수님이 마태복음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그러면 십자가란 것이 뭐냐? 십자가에는 두 가지의 힘이 있어요. 하나는 저주의 힘이 있고, 저주의 힘이 우선이고, 그 다음에 사랑, 다른 말로하면 용서의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실 때 예쁜 선녀복 입고 사람을 유인하듯이 “나는 하늘나라에서 왔단다. 내가 입은 옷 예쁘지? 날 따라오면 천국에 간단다.” 이런 식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피 흘리며 망가지는 모습입니다. 예수님 스스로 자멸하는 모습으로 오십니다. 저주의 모습이란 말이지요.

그런데 왜 예수님이 이런 저주의 모습을 보여주는가 하면, 이 저주는 누구 때문에 받은 저주입니까?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의 우리 모습이란 말이지요. 우리 모습인데, 죄 없으신 예수님이 우리 역할을 하기 때문에 ‘죄 있는 인간은 이렇게 된통 당한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기 위해서 저주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번 가야산 수련회에서 한 내용 기억나십니까?
그렇다면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할 때의 그 십자가는 무슨 힘입니까? 저주의 힘이에요. 결국 인간은 무슨 힘으로 구원 받습니까? 저주의 힘으로 구원 받는 거예요.

사람들이 구원 받을 때 사랑의 힘을 붙잡지 말고, “맞습니다. 나는 저주 받아야 할 놈입니다.” 하고 저주의 힘을 받아야 돼요. 저주의 힘을 받아야 그 사람이 구원을 받습니다. 십자가는 저주의 힘이에요. 나는 이것을 이야기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사람들은 십자가를 이야기하면서도 ‘사랑의 하나님’만을 말해요. ‘위로의 하나님’을 말하고. 사람들은 사랑받고 위로받기 원하는데, 이들의 요구에서 기독교가 생기고, 개혁주의가 생겨요.

인간들은 지금 뭘 하고 있습니까? 끌어 모으고 있지요. 끌어 모으는데 뭣까지 끌어 모으려고 합니까? “하나님이 저를 사랑해 주세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 사랑 받기 위해 사랑까지 끌어 모아서, 이 땅에서는 지금까지 끌어 모은 것으로 살고, 죽어서는 주님 주신 사랑까지 덧붙여서 천국 가는 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봐야 이 안에는 누가 있습니까? 자아가 형성되는 겁니다. 길이 아니고.

‘나는 나보다 길이 더 좋아요.’ 이런 소리를 못해요. ‘나는 아직도 내가 좋고 이런 나를 더 잘되게 하기 위해서 길이 필요하다.’ 이렇게 되지 ‘나는 부서져도 길만 있으면 됩니다. 유일한 그 길만 있으면 나는 아무 탈 없습니다.’ 이런 소리를 할 수가 없어요.

저주의 힘이 밑에서 균열을 일으킵니다. 그럴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십자가가 무슨 힘이라고 했습니까? 저주의 힘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설 때 ‘아하, 저렇게 당하는 것이 내 모습이구나.’ 이 저주의 힘.

그러면 이 자아에 뭐가 임합니까? 저주가 임하죠. 저주가 임하면 그 첫 번째 현상이 뭐냐? 당황스러움입니다. 그래서 제대로 복음 전하는 교회 왔다가 사람들이 가버리는 이유가, 핑계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 고 하지만 속으로는 당황스러워 해요.

사랑받기 위해서 왔는데, 사랑이 아니고 십자가 이야기를 하니까 ‘나’의 가치를 못 찾잖아요. 나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그 모임에 왜 갑니까. 그래서 더 이상 안 가지요. 내가 얻는 것이 있어야 가지. 얻기는커녕  오히려 저주 받아야 할 인간이라고 하니까 당황스럽지요.

두 번째는 격분이 일어나지요. 분노가 일어납니다. 이게 바로 스데반 집사를 죽였던 사람들인데, 그들이 격분을 했지요. 그럴 때 우리는 스데반 집사를 이해할 생각하지 말고 누구를 이해해야 되는가? 스데반에게 돌을 던지는 그 바리새인의 마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우리도 돌을 던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제가 질문합니다. 왜 스데반 집사에게 돌을 던졌습니까? 그 사람들이 그렇게 성질 나쁜 사람들이 아닌데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은 사람들이 그렇게 악한 사람들이 아닌데 왜 예수님을 죽였습니까? 점잖은 사람들을 왜 격분하게 만들었어요. 그동안 굳혔던 자아가 쓸모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 시간에는 이 자아가 무엇을 추구하는가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자아는 자기 노동의 가치를 지양(추구)합니다. 자아가 되려면 남이 갖고 있는 것이 탐이 나야 되고, 탐나는 이웃만 골라서 타인으로 간주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가 장가를 가는데 선을 100번 봤습니다. 100번 선봤다는 것은 여자를 100명 세웠다는 말 아닙니까. 100명 세웠는데 이상하게 한 사람에게 필이 꽂히는 거예요. 그것은 누가 선별합니까? 자기가 선별하잖아요. 그것은 그 사람에게 자기가 원하는 바가 있다는 거예요. 나머지 99명은 그 사람의 이웃이 아니죠.

이웃을 누가 정합니까? 본인이 정하는 거예요. 어떤 식으로 정합니까? 내가 아쉽고, 내가 원하는 것이 들어 있는 속성, 내가 갖고 싶은 속성을 그 사람이 갖고 있는 것 같으면 그 사람을 내 남편감으로 혹은 아내감으로 삼는 거예요.

오 목사님은 구자근 사모님의 무슨 속성 때문에 뽑았는지 모르겠는데, 키 큰 것?
사르트르가 이런 이야기했어요. 사람이 누구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 사람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내가 내 마음을, 어떤 마음인지를 상대방이 알아주기를 원해서, 그림을 그립시다. 어려운데, 나는 여기 있고 상대방은 여기 있습니다. 나는 사랑한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거짓말입니다. 왜 거짓말인가 하면, 나는 어떤 상대를 볼 때 그 상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상대를 선별해서 뽑지요. 여러 사람이 있지만 너는 저리가, 너도 저리가. 이런 식으로 자기가 원하는 사람을 뽑는데, 이 사람이 마음에 든다는 것은 내가 갖고 싶은 속성을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상대방에게 당신은 나와 일치해야 돼. 일치하려면 내가 마음을 줬는데 상대방이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가 어떻게 압니까? 모르죠. 내 속 터지는 이 심정을, 부모가 자식에서 말하잖아요. ‘야, 나는 너 보면 속 터진다.’ 백날 부모가 속 터져도 자식들은 아무 일 없어요. 왜? 자식은 부모가 아니고 부모는 자식이 아니니까. 어떻게 상대방을 압니까? 모르잖아요. 일치가 안 되잖아요.

일치가 안 될 때 그 답답한 마음을 풀기 위해 언어가 동원됩니다. ‘나는 널 사랑한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너 내 마음 안 알아주면 죽어.’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상대방 입장에서는 ‘내가 왜 당신 마음 알아줘야 되나’ 이 말이죠. 그러면 이쪽에서 하는 말이 “내가 너를 골랐거든. 내가 골랐으니까 넌 나하고 일치해야 돼.”

사람이 누구를 사귈 때는 상대방의 기분을 사귀는 것이 아니고, 너는 내 마음에 무조건 들어야 되고 너는 무조건 내 기분 마쳐 줘야 된다는, 니체는 이것을 ‘권력 의지’라고 했는데, 강한 힘의 의지를 가지고 상대방을 내게 종속시키려는 목적으로 상대를 선별해서 그를 친구로, 애인으로 사귀지요. 이것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입니다. 일방적이죠.

이것을 어렵게 말하면, 나의 자유에 상대방이 무조건 무릎을 꿇을 때까지 나는 상대방에게 희생과 봉사를 다하는 겁니다. 말이 좀 이상하지요. 희생과 봉사를 한다는 것이 누구를 위해서? 자기를 포기하고 상대방 좋으라고 하는 것이 희생과 봉사인줄 알지만 결국은 희생한 나에게 종속시키기 위한 일종의 투자를 한 거예요.

정성도 투자고 희생도 투자고 전부 투자를 하는 거예요. 특히 부모들이 자식에게 투자를 해서 부모 알아주기를 원해도 결국 자기 사랑하는 사람 만나서 결혼하고 난 후에는 친정에 와서 심지어는 화장실에 있는 화장지까지 다 들고 가요.

이처럼 서로가 알력처럼 자아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중재를 해야 돼요. 이것을 제 3의 매개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일반 사회조직, 교회. “우리 적당하게 하자.” ‘내가 너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한 것처럼 너도 나한테 일방적으로 한 것이 있으니까 이제 서로 적당하게 하자.’ 하는 식의 가정이라는 조직이고, 사회라는 조직입니다.

그런데 가정도 없고, 교회도 안 다니고, 조직 사회에 속해 있지 않는 사람들은 제 마음대로 살지요. 성질나면 지하철에 휘발유 뿌리고 불 질러서 사람들 다 죽여도 자기는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을 쉽게 말해서 가정교육이 덜 됐다고 합니다. 제 3의 매개체가 없기 때문에 ‘왜 세상은 날 안 알아주는가?’ 그 사람(대구 지하철 방화사건 주인공)이 진짜 휘발유 뿌린 이유가 그런 거예요. ‘왜 세상은 나의 고달픈 인생에 무관심한가?’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네가 뭔데 우리가 알아줘야 되는데?’ 하고 나오지요. 그러면 그 사람은 ‘내 마음 나도 몰라.’

사르트르가 이것까지 파악했는데 그가 결국 뭘 몰랐어요? 왜 내 마음이 일방적으로 내 위주인지, 이런 마음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몰랐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사르트르는 뭘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성경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선악과 따먹고 난 후에 인간은 자신이 신이 된다는 사실이 성경에 나오는데.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2:2) 불순종의 아들이니까 이것은 자기밖에 모른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돛대고 자기가 최고입니다. 이런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들이 자기 욕망대로 가도록 만든 것이 누구인가? 세상 신, 악마입니다.

마귀가, 뱀이 그렇게 만든 거예요. 뭐라고? ‘네가 돛대다. 네가 하나님이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원인도 모르고 이유도 몰랐어요.

자기밖에 모르는 여기에 (저주가)왔으니까 당황스럽지요. 그리고 자기를 이루기 위해서 자기 노동의 가치를 계속 찾아 온 겁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부터 호주로 뉴질랜드로 자녀를 영어 연수 보내고 하는 이유가 뭡니까? 자기 노동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아이들도 부모의 지시에 따라 외국으로 연수를 가는 이유는 ‘언젠가는 날 알아주겠지.’

시장 난전에서 채소 파는 할머니도 이 말 알아듣습니다. 사르트르 이야기는 못 알아듣는데, 이 말은 다 알아듣습니다. ‘언젠가는 날 알아주겠지.’ 엄마가 이렇게 추운데 난전에서 고생하는데 이놈의 자식은 오늘도 술 처먹고 늦고 들어오네. 하지만 언젠가는 날 알아주겠지. 이것을 간단히 말하면 ‘자기 노동의 가치’죠.

그런데 이렇게 노력했는데 어느 날 십자가가 다가옵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어떤 모습인가를 보여줍니다. 저주받은 모습이지요. 그리고 지금까지 나는 ‘언젠가는 날 알아주겠지’ 하는 희망을 품고, 예쁜 나, 귀한 나, 남에게 뒤지지 않는 나, 이런 내가 언젠가는 이 꿈을 이룰 날이 있겠지 하고 손꼽아 기다리는데, 어느 날 갑자기 십자가가 저주의 힘으로 다가올 때 격분하게 되지요.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세상이 너를 미워하거든 너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네 입에서 예수님이 나왔다는 것 때문에 널 미워하는 것이다.’ 너희들의 모습은 십자가에 죽어야 할 이런 모습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그 예수가 미워서 예수를 전하는 너희도 미워할 것이다. 이로서 너희는 예수님과 한 식구인 것이 드러날 것이다.

저주의 힘, 그 저주의 힘이 올 때 우리는 격분하고 되고 분노하게 되고 우리는 돌아서게 됩니다. 교회고 복음이고 나발이고 기독교고 신이고 뭐고 나는 자연스러운 것을 원한다. 자연스러운 것이 뭘까요? 자기 가치를 알아주는 곳으로 이웃을 선별해 가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 어떤 이야기가 나옵니까?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가 나오죠. 여러분 이 이야기 다 아시지요? 어떤 사람이 길에서 강도를 만나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첫째는 제사장이 보고 그냥 지나가고 두 번째는 레위인도 그냥 지나가고 세 번째는 사마리아인이 와서 그 사람을 치료하고 했다는 이야기지요.

사람들이 어디에 초점을 맞추는가 하면 선한 사마리아인에게 초점을 맞추는데, 그렇게 해석하면 안 되고,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돼요? 첫째 둘째 사람들의 입장을 우리가 이해를 해야 됩니다. 왜? 사실은 그들이 오늘날 우리의 본 모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냥 지나갑니까? 자기 노동의 가치를 들어줄 만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순간적인 선별 작업에서 그 사람은 제외됩니다. 자기 가치를 높여주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떨어트리고 자기의 수고를 헛것으로 만들 수 있는 요인이 되기 때문에 외면해 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킬 때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는 애굽의 노예였다.’ 오늘 빌레몬서에 노예가 나오는데, 주인의 돈을 훔친 모양이에요. 그래서 바울이 ‘빌레몬아 돈 훔친 것은 내가 갚아줄 게.’ 이런 이야기가 나와요. 돈 훔치고 도망간 노예 수배를 했는데, ‘빌레몬아 잊어라. 그 돈 내가 계산할 게. 못 배운 노예((오네시모)가 그런 짓을 했는데 지금은 주의 종이 되어 날 도우는 동역자가 되었으니까 과거는 잊어버리고 오네시모 나에게 다오.’ 이것이 빌레몬서에 나오는 표면적 이야기입니다.

출애굽기에 노예가 나오잖아요. 옛날 시대 노예는 ‘유사 동물’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유사 인간’이 되는데,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노예는 사람이 아니고 동물인데, 인간과 비슷하게 생긴 동물로 봤어요. 그래서 소가 밭을 간다고 돈을 지불하지 않는 것처럼 노예는 부리면 그만입니다.

헤겔은 말하기를 노예의 특징이 뭔가? 노예의 이름으로 소유재산이 없다는 것입니다. 노예는 아무것도 자기 소유가 없어요.

자아는 모든 속성을 내 소유로 만들 때 자아가 생기지요. 그러나 노예는 자기 것이 없어요. 그래서 노예는 사람이 아닌 거예요. 노예에게는 자아란 것이 허용이 안 돼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노예들(구약 이스라엘 사람들)을 하나님 백성으로 만들었잖아요. 이것을 아브라함은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다.’

사람이 뭔가 있으면 사랑을 받으려 해요. ‘현재 하나님 이만큼 가졌습니다. 가진 것 사랑해 주세요.’ 이렇게 나온다고. 뭔가를 가지게 되면 그 가진 것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더 사랑해 달라고 요구하지만, 만약 가진 것에 공격하면 저주로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나는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들은 죽은 자요, 없는 자인데(다른 말로 하면 노예인데), 인간들이 악마의 영을 받아 ‘이미 나는 이만큼 가졌고, 그래서 나는 인간이며 하나님 보기에도 나는 당당하게 큰소리 칠 수 있는 그런 존재다.’ 이것을 좀 인정해 달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노예가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 자유 의지를 이야기할 수 있고, 하나님 앞에서 개혁주의 신학을 말할 수 있는 그런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뭐라고 합니까? “에라, 이 저주 받을 놈!”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10분간 쉽시다.

(2008. 2. 12. 13:27 녹취 마침) 이름 : 서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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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080125b빌레몬서2
광주 강의(08. 1. 25) 33-2

피곤하신데 강의 일찍 하고 마치겠습니다.
소유가 없다는 말은 자아가 형성이 안 되어 있는데, 노예가 전쟁 포로들이거든요. 그래서 이미 죽었던 자입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는 것처럼 이미 죽었던 자입니다.

고대국가에서는 노예들이 노동을 다 담당했어요. 심지어 로마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70%가 노예들이고, 노예들의 노동을 누가 즐기느냐? 30%의 로마 시민들이 즐겨요. 무상으로 그냥 즐기는 거예요. 그래서 로마 시민 된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지 지금 미국 시민권보다 더 대단한 것입니다.

양반은 돈을 주고 사서라도 양반 되고 싶어 하잖아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돈 주고 산 것이 아니고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이었습니다.

노예는 자아가 없기 때문에 법의 보호를 못 받아요. 그런데 시민은 법의 보호를 받아요. 결국 노예를 보호하는 법은 없고, 가진 자, 권력자를 위한 법이 오늘날의 법이에요. 강원도 산골의 무식할 할머니에게 법을 이야기하면 “나는 법 몰라. 나는 지금까지 법 없이 살았어.” 이러거든요.

그런데 만약 그 강원도 산골에, 노인 질환성 다단계 사기꾼들이 오면 졸지에 그들은 다 피해자가 되지요. ‘노인 건강식품’ 이런 것 있잖아요. 그리고 사기꾼들은 자기를 위한 법이기 때문에 다 빠져나와 버리고 손해는 무식할 할머니들이 감자 캐고 나물 캐서 모은 돈 다 날려버립니다. 법 없이 살았던 사람들이 다 손해를 보는 겁니다.

그래서 법이라는 것은 항상 더 가지고 싶을 때, 지금 내 노동의 가치를 더 크게 하고 싶을 때 뭘 항상 염두에 두는가 하면 법을 찾아요. 지금보다 더 강한 나, 더 강력한 나를 만들기 위해 법을 찾는다니까. 그냥 “이만하면 됐다.” 고 할 때는 법을 안 찾아요.

시장 난전에서 나물 팔고 채소 파는 아주머니, 할머니들이 시장이 조용할 때는 법을 모르고 그냥 지냅니다. 그런데 옆에 대형마트가 생겼다. 또는 어떤 사람이 시장을 인수해서 새로 개발한다. 그렇게 되면 이들은 머리에 띠 띠고 대모하고, 변호사 찾고 하지요. 자기 권리 찾겠다고.

법을 찾는다는 말은, 법을 찾을 때 비로소 자아 정체성을 찾습니다. 처음에 어린아이들은 무지한 상태에서 태어나요. 1~3세 정도. 그러다가 4세부터 해서 오줌 쌌다고 때릴 때, 그 때부터 그 아이는 법이 새겨지지요. 이것을 상징계라고 하지요. 법이 들어갑니다. 법이 들어가면, 그 법을 지키면 의인 되고 상을 받고, 못 지키면 악인이 되어 벌을 받지요.

여기서부터 자아가 생깁니다. 그 자아는 뭐냐? 법을 지키면 의인 될 수 있는 자아. 못 지키면 엄마한테 매 맞는 자아가 됩니다. 이것이 로마서 7장에 나오잖아요. 하나님께서 법을 주니까 인간들은, 바리새인들은 그 법을 지키려고 한 거예요. 이게 그 사람들의 치명적인 오류였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못 지킵니다. 하나님이 법을 준 것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입을 막고 “너는 이미 저주 아래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 법을 줬는데, 인간들은 자아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10계명을 주니까 그 법을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간음하지 말라.”고 하니까 간음 안 하려고 하고,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니까 부모를 공경하려고 하고,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니까 안식일을 지키려고 한 거예요.

그러면 그 계명을 지키는 주인공이 누굽니까? ‘나’잖아요. 그러면 그 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누가 더 곤고해 져요? 나의 응집력이 더 강해지지요. 그래서 예수쟁이들은 전부 자기밖에 몰라요. “나는 기도 몇 시간 한다. 헌금 했다. 봉사 했다. 전도 몇 명 했다.”

세상 사람들은 호프집에 가서 술 몇 잔 주고받고 하면 “우리 친구아이가” 하면서 친하게 되는데, 예수쟁이는 항상 이야기할 때 술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 말씀이 왔다 갔다 하기 때문에, 성경 말씀이 법으로 취급받기 때문에 지킨 자와 안 지킨 자가 나눠지지요. 그러면 안 지킨 자는 대들지요. “목사님, 그것 꼭 지켜야 됩니까?” 자기가 못 지켰기 때문에.

법을 못 지키면 그 집단에서는 악인이 되니까, 의인 되고 싶은데 교회만 가면 악인 되는 거예요. 그러니 다음부터는 교회 안 나오지요. 왜? 의인 되려고 하면 그 법을 안 지켜도 되는 곳에 가야지요. 그러면 주일날 교회 안 나오면 되잖아요.

내 노동의 가치를 하나님의 법이 훼손하면 이 성경을 덮어버리면 되지요. 그리고는 다시 안 보는 거지요. 차 뒤에 얹어놓고 주일날만 들어오고 안 보는 거예요. 안 보면 안 볼수록 성경 바깥에 있는 누가 의인 된다? “역시 나는 훌륭해.” 그런데 성경이 펼쳐지고 복음이 나오면 나는 저주받을 인간이라.

그런데 여기에서 오산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너희는 노예다.” 다시 말해서 “너희는 자아라는 것이 있을 필요도 없다.”는 이야기하기 위해서 성경 말씀을 준 것입니다. 자아가 필요 없다는 말은 뭡니까? 법이 온 것은, 지키면 복 받고, 안 지키면 저주 받는 것이 아니고, 결국 이 법을 준 것은 ‘지키려고 덤벼드나 안 덤벼드나?’ 

성경을 아나 모르나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 법을 준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먹을 자격 없다고 줬는데 막 먹는 거예요. 왜 먹습니까? 자아가 있으니까. 법을 던져준 것은 ‘너는 하나님 앞에 얻어맞아야 마땅한 죄인이다’라고 줬는데, 인간은 자아가 있으니까 법 지키면 의인 된다고 생각해서 자기에게 온 법을 지키려 하고, 그렇게 해서 ‘이제 나에게 복이 오겠구나.’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하나님, 잘 먹으니까 의인되게 해 주세요.” 이렇게 하는 거예요. “잘 먹고 있으니까 저 의인 맞지요?” 이런다고. 다른 사람은 못 지켜도 나는 지켰다고 하면서.

우리는 법을 지킬 자격이 없어요. 이 말은 우리가 뭘 지켜서 의인되고 혹은 못 지켜서 악이 되고 하는 그런 구분을 지을 자격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뭣 때문에 고민합니까? 내가 나쁜 짓 했을까봐 고민하잖아요. 이게 인간의 문제입니다. 전체가 나쁜 짓인데 그걸 인정 안 하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오늘도 또 나쁜 짓을 했습니다.”

천주교에서 참 악마의 말을 했어요. “다 내 탓이오.” 라고 했어요. 이거 악마의 음성입니다. 내 탓이 아니고 ‘내가 문제다.’ 이것이 옳은데, ‘내가 문제다.’ 하고 ‘내 탓이다.’는 달라요. ‘내 탓이다.’라는 것은 “조금만 잘 하면 개선의 여지가 있었을 텐데. 내가 부족해서 그렇다.” 이것은 아직도 희망을 품고 있지만, ‘내가 문제다.’는 것은 “하나님, 백날 말씀 줘 보세요. 나는 안 됩니다. 내 자체가 문제니까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변경 불가지요.

이렇게 되면 내가 선하지 않았다고 고민할 필요가 없지요. 이것을 로마서에서는 “예수 안에서는 정죄함이 없다.” 로마서 8장에 “누가 너를 송사하리요?” 마귀는 자꾸 우리에게 가능성이 있다고 이야기해요. “너는 선할 가능성이 있어. 너는 착해야 되는데 네가 게을렀잖아. 열심히 주를 섬기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신앙생활 잘 못하고 있는 거야.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잘할 수 있어” 라고 계속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뭘 빼앗아 가기 위함입니까?

우리에게 덮쳐진, 우리에게 찾아온 그 하나님의, 죄가 많은 곳에 뭐가 많다? 은혜가 많다. 주님의 거저주시는 용서를 마귀는 제일 싫어해요. 그래서 그것을 훼손하기 위해서 그따위 짓을 하는 거예요.

제가 크게 쓰겠습니다. 나는 이 말을 참 좋아해요. “나는 그분으로 산다.” 나는 예수님 그분 힘으로 사는 거예요. 그런데 자꾸 내속에 “나는 내 힘으로 산다.” 이게 나오지요. 내가 그분의 힘으로 살면 나는 노예가 되면 돼요. 노예가 자기 운명에 대해 고민한다는 것은 자아가 있다는 말입니다. 제가 아까 노예는 뭐가 없다고 했습니까? 자아가 있어도 쓸모 짝이 없는 자아지요.

자아가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어요. 죽을 때까지 자아가 생기는데 생기더라도 이거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아무 소용없는 자아로 생각하면 되는데 자꾸 “나는 나로 인해 산다.”고 하니까 이 자아를 쓸모 있는 자아로 자꾸 변경을 시키는 거예요. 누가? 내가 그렇게 해요. “조금만 신앙생활 열심히 했으면 이런 재앙은 안 받지.” 모든 사소한 일. 지갑을 잃어버렸다든지 이가 아프다든지 뭣하면 제일먼저 “주여, 제가 뭐가 잘못되어 이런 고통이 옵니까?”

사모님은 그런 생각이 안 들던가요? 많은 것이 아니고 아마 전부 그럴 거예요.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하나님께 잘못해서 벌 받아서 그렇다.’ 이것을 보고 마귀가 춤을 춥니다. ‘오늘 또 한 놈 걸려들었구나.’

우리가 열심히 안 해서가 원인이 아니라 “나는 그분으로 산다.”고 했는데, 그분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어요. 그분이 사라지게 하는 것이 마귀의 주특기, 전략입니다. 그분이 사라지니까 “할 수 있나? 나는 나로 살아야지.” 이렇게 되지요. “나는 그분으로 산다.”가 아니라 “나는 내 힘으로 살아야지 어쩔 수 없다.” 이 순간부터 마귀가 찾아와서 “열심히 살아. 열심히 못 사니까 이런 화를 당한 거야. 앞으로 열심히 하면 전화위복이 될 거야.”

하루 온 종일 생각하는 것은, 잘못은 줄이고 선한 일이 누적이 되면 그것이 복으로 온다는 거예요. 그 복이 어디에 저축됩니까? 자아라는 보따리에 저축이 되겠지요. 이제 노예입니까, 주인입니까? 이것은 노예가 아니고 주인 행세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빌레몬서 1장 3절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해도, 이게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이 멘트는 그냥 인사치레로 끝나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거예요. 내 힘으로 사는데 무슨 예수님의 은혜가 옵니까. 내 힘으로 내 평강으로 사는데.

우리는 예수님 덕분에 삽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를 노예로 봅니다. 기분 나쁘게 듣지 마세요.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탈출할 때 그들이 노예였기 때문에 탈출 된 것입니다. 왜? 새로운 주인으로 교체가 되었거든요. 전에는 누가 주인이었습니까? 세상 신이 그들의 주인이었는데 이제는 여호와 하나님이 주인이 된 거예요.

그러면 자신의 노예 신분은 바뀌었습니까, 안 바뀌었습니까? 절대로 안 바뀌었지요. 주인이 바뀌었을 뿐입니다. 주인이 세상 권력자에서 온 우주의 권력자로 바뀌었을 뿐이지 절대로 노예의 신분은 안 바뀌었지요. 그 정신이 살아 있을 때 이스라엘이고 그 정신 사라지면 그것은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예레미야 34장을 봅시다. 이 말씀 보기 전에 중요한 것이라서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고민이 될 때에 이런 마음을 먹으세요. “하나님, 나는 주님 덕분으로 살지 내가 지금 성질 고치고 뭘 바꾼다고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내가 뭘 잘못했기에 또 이런 벌을 받지?” 이렇게 생각하면, 잊어야 될 자아가 더욱 더 단단해 져요. 그러면 그 단단해진 자아의 명예와 자존심과 고집이 있어서 그것이 상처가 되고 나중에 그것이 자기 뜻대로 안 되면 하나님 앞에 분노를 터트리고 ‘나는 이제 교회 안 간다.’ 이렇게 돼요.  

‘내 탓이오.’ 하면 안 되고, ‘나는 문제아야.’ 제가 수련회 때 ‘합격증’을 붙이고 다니라고 했는데, 오늘은 합격증 위에다 ‘문제아’라고 같이 써 붙이세요. ‘문제아’라고 쓰고, 그 밑에 “이미 천국에 합격했음.” 이렇게 두 줄로 쓰세요.

문제아는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90세가 되어도 문제아에요. 고쳐지지도 않지만 고치려고 하면 다시 자아가(아무 소용없는 자아가) 올라오면서 나를 힘들게 해요. 나를 굉장히 초조하고 불안하게 만들고 내 자존심 유지를 위해 또 무슨 짓을 해야 되고, 위선과 거짓말을 만발하고. 이것은 지옥보다 더 힘든 거예요.

지옥에 간 부자가, 제가 이번에 장례식 치르면서 눈이 펑펑 쏟아지는데 진흙 길을 올라가면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부자의 문제점은 지옥 가도 그놈아 자아가 안 없어져서 나사로보고 뭐라고 한줄 압니까? “물 한 방울만 찍어주세요.” 죽을 놈의 자아라. 정말 못된 자아라. 우리 조상이 왜 선악과 따 먹어서 이 자아가 생겨났는지?

어쨌든 자아가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데, 항상 나는 문제아다. 단 그 밑에 뭐가 있어요? 합격증. 문제아인데 문제아로서 합격한 거예요. 십자가 강도처럼 “주여, 저를 생각해 주세요.”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예레미야 34장이 긴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8절부터 쭉 보면 “시드기야 왕이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백성과 언약하고 자유를 선언한 후에” 9절에 “그 언약은 곧 사람으로 각기 히브리 남자 노예를 놓아 자유케 하고” 자유케 하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11절에 보면 “후에 그들의 뜻이 변하여 자유케 하였던 노예를 끌어다가 다시 복종시켜 노예를 삼았더라.”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에 어긋난다 이 말입니다.

노비를 자유케 하라는 말은 이 이스라엘 나라의 임금이 누구란 말입니까? 하나님뿐이라는 거예요. 제가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의 주인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지요. 그런데 왜 자꾸 아침 눈만 뜨면 내가 주인이 됩니까.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서 눈을 뜨게 해서 눈을 떴는데, 자기 힘으로 눈을 뜬 게 아닌데, 그런데 아침에 눈을 뜨면 주인이 누구냐? 내가 주인이 되어서 “오늘 하루도 내 위신과 체면이 손상되지 않도록 잘 하자.” 이러고 있는 거예요. “오늘도 나의 노동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열심히 해보자. 이 가치를 언젠가는 알아줄 날이 오겠지. 열심히 공부하면 언젠가는 알아줄 날이 있겠지.”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요.

이것이 바로 자아가 주인 노릇 하는 것이지요. 헤겔이 근대사회를 말하면서 노예로부터 시작해서 근대사회의 성격을 규명해요. 뭐냐 하면, “노예가 있어야 주인이 있다.” 이 한마디가 끝이에요. 보통 사람이 생각하기를 주인이 있어서 노예를 돈 주고 사는 것으로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헤겔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자기가 주인이란 것을 언제 표출해 낼 수 있습니까? 자기 집에 노예가 있어야 자기가 주인 되는 겁니다.

‘나’라는 적자존재는 대자존재를 통해서 적자존재인 내가 나의 주체성, 나의 정체성이 발견된다고 했습니다. 적자존재, 대자존재, 대타존재 이 세 가지 밖에 없는데, 적자존재라는 것은 돌멩이, 있는 그대로 충만한 것. 이것이 적재존재입니다. 인간은 대자존재거든요. 내가 누구인지 모를 때는 ‘당신이 나를 뭐라고 불러주지’ 광장에서 어떤 사람이 나에게 “야, 이근호” 라고 부르면, 나는 이근호 인줄 알아요.

우리 이름을 본인이 지었습니까? 김 집사님은 본인이 이름 지었습니까? 아니지요? 누가 이름을 불러줄 때 나에게 의미가 있는 거예요.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가 있지요. 내가 이름이 이근호인데, 내가 혼자 이름을 배용준으로 바꿨어요. 아무도 안 불러 줘요. 아무도 나에게 ‘배용준 목사님’이라고 불러주는 사람이 없어요. 그러면 나는 이 사회에서 대자존재가 될 수 없지요.

“어, 이근호 목사님!” 이라고 아는 척을 하는데, “나는 배용준인데요.” 본인이 아무리 주장해도 사회에서 알아주지 않을 때 그 인간은 사회에서 없는 존재입니다. 인터넷에 접속하지 아니하면 인터넷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 세계는 메트릭스 세계죠. 메트릭스의 구조는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점과 점으로 연결되어 있지요. 온 라인상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어떤 논쟁을 벌이다가 “이제 자야겠다.”하고 인터넷에서 나가버리면 그 논쟁에서는 그 사람은 없는 존재지요.

노래 가수 생활하다가 2년 동안 어디에 갔는지 흔적도 없어. 야쿠자한테 고추가 잘렸다느니, 야쿠자 애인이 김혜수인데 김혜수에게 접근했다고 야쿠자에게 당했다느니 온갖 루머가 퍼졌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메트릭스 안에 등장해야지요. 이 구조 안에. 메트릭스는 관계망입니다.

관계가 없는 자는 죽은 자에요. 그래서 나훈아가 다시 관계망 속에 들어와서 기자회견하고 했지요. 1시간 동안 쇼를 했어요. 책상위에 올라가서 바지 지프를 내리고 쇼를 했어요. 이게 연예인들은 발 갈고 논 갈아서 돈을 버는 것이 아니고 관계망에서 돈을 보태줘서 배용준은 드라마 한 편에 1,000만원 받는 거예요. 그 1,000만원이란 돈이 시장에서 채소 팔아서 번 것이 아닙니다.

배용준을 보고 싶은 사람이 관계망 속에 들어와서 된 일입니다. 만약 배용준씨가 활동을 다 접고 사라졌다가, 몇 년 후 배용준이 나오면 1,000만원 못 받아요. 왜? 그 사람의 품위를 보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얼마나 관계망 속에 우리를 기쁘게 하느냐? 그것이 돈이 되는 거예요.

지금 김 집사님이 책상에 올라가서 바지 벗어봐야 돈 안 나옵니다. 돈은커녕 경찰서에 잡혀가서 문란 죄로 벌금을 내야 됩니다. 왜? 남에게 혐오감을 줬다는 이유 때문에.

분명히 제가 이야기합니다. 이 세상은 자아가 살아 있을 때 그 자아에게 돈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아가 있어야만 다른 자아가 돈을 주는데 만약에 노예 같으면 돈을 안 준다니까요. 노예는 돈이 안 들어와요. 그래서 이 세상은 노예에서 뭐로 변하기? 노예생활 청산하고 자아 되려고 자꾸 관계망 속에 얽혀야 돼요.

이것을 알튀세르의 중층 관계라고 아주 어려운 것이 나오는데,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옛날에는 한 사람이 있어서 한 사람의 코스가 있습니다. 한 사람의 사회가 부모님 사회, 이것이 농경시대니까 부모님과 살다가 시집가면 농사꾼이 되어서 그 가정에 며느리 노릇하고 이렇게 코스가 하나예요.

그런데 지금은 다양한 다원적 중층 사회라고 해서, 알튀세르가 말하기를 내가 있으면 하나인 내가 낚시 모임, 동창회 모임, 향우회 모임 등 여러 모임을 중첩해서 가입을 하게 되면 이 관계망이 한 코스 같으면, 한 코스는 베트남인데, 베트남은 무슨 사회입니까? 베트남은 도시에도 공장 없지요. 공장이 없으면 농경사회 아닙니까. 농경사회는 코스가 한 코스 밖에 없지요. 딸 낳았다. 그러면 학교도 안 보내요. 학교를 왜 보냅니까. 농경사회인데. 집에서 엄마, 아빠가 농사일을 가르쳐요. 그래서 농사 배워 농사꾼에게 시집가서 농사짓다가 자기도 며느리 맞이하고 늙어서 죽으면 그만이에요. 이게 베트남 여성이에요.

그래서 우리나라 농촌 총각이 베트남 여성을 좋아해요. 이들은 당장 시집오자마자 써먹을 수 있는 거예요. 그러나 한국 처녀는 농촌 여성이라고 해도 TV를 보면서 자라요. 그러면 ‘나’라는 인간은 뭘 끌어 모은다? 내가 갖고 싶은 것을 타인으로부터 끌어 오지요. 그러면 타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도시에 살잖아요. 농촌에 살면 노선이 단선이에요. 그러나 도시에 가면 관계망이 여러 개가 되잖아요. 관계망이 많으면 많을수록 내가 원하는 것을 여러군데서 받을 수 있지요.

그렇게 되면 농촌에 살지 않고 도시로 나갑니다. 시골에 있다가 서울로 갑니다. 점점 대도시로 몰리지요. 그런데 뉴질랜드 같은 나라에는 인구가 적어요. 뉴질랜드는 인구가 400만 밖에 안 돼요. 우리나라 토지의 3배입니다. 그런데 인구는 부산 인구밖에 안 되니까 관계망이 엉성해서 관계망이 형성이 안 돼요. 그러면 도움 받을 때가 적어요. 베트남 여성 이야기하다가 왜 이게 튀어나왔지?

다시 헤겔로 돌아갑시다. 헤겔은, 내가 주인노릇 하려면 나에게 무상으로 노동을, 내가 노동하는 것이 아니고 무상으로 노동을 제공하는, 제공하면서도 그 가치는 누가 챙기고? 주인인 내가 챙길 때 비로소 나는 주인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세상에서 노예 되고 싶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지요. 다 주인 되고 싶지요. 주인 되고 싶다는 그 경쟁이 바로 근대사회의 특징입니다. 

그러면 누가 노예가 됩니까? 그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도 노예지만, 그 사람은 자신을 노예로 생각하지 않지요. “언젠가는 알아 줄 거야.” 다시 주인의 반열에 들어서고, 또는 지금 노동자지만 언젠가는 내가 사장 된다고 기대하고 또 나가는 겁니다. 그리고 국가라는 것은 노예들에 대한 법이 아니고 주인들끼리 모여서 그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것이 바로 국가의 법입니다. 이게 근대사회의 특징입니다.

이제 빌레몬서를 봅시다. 4절에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여기에 보면 ‘사랑과 믿음’이 있지요. 아까 했던 예레미야 이야기 계속 해 봅시다. 노예를 풀었는데 이것들이 믿음과 사랑이 없기 때문에 다시 뭐로 만들었습니까? 노예를 해방해 주는 것은 이스라엘의 임금이 누구예요? 여호와 하나님이죠. 하나님이 애굽에서 포로 된 자를 구원했던 그 정신이 살아 있을 때만 그것이 이스라엘이고 그것이 교회고 그런데 이 인간들이, 아까 헤겔이 뭐라고 했습니까? 노예가 있어야 주인 노릇 하잖아요. 그러니까 남이야 죽든 말든 자기는 상대를 기어이 노예 삼아야 자기가 주인 되는 겁니다.

드라마 보면 그런 것이 많잖아요. 복수하는 방법 중 하나가 옛날에 자기를 미워하고 학대했던 그 사람이 패가망신하게 만들어서 자기가 그 위에 서서 옛날 자신이 당했던 몇 배로 갚아주는 것. 그럴 때 복수가 성공했다는 쾌감을 느끼지요. 아버지 무덤에 가서 소주 뿌리면서 눈물 흘리는 이유가 뭡니까? “아버지, 내가 어릴 때 공부 못한다고 무시했지요? 그때 내가 뭐라고 했습니까? 언젠가는 내가 성공할 때가 있을 것이라고 했잖아요. 이제 나도 자랑할 만큼 되었는데 왜 아버지는 내 성공도 못 보시고 세상을 떠나셨어요?” 하고 통곡을 하지요.

이것은 아버지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아버지는 무조건 내 기분 좋은 것과 일치를 해야 되는데 일치해야 될 그 상대자가 죽어버렸으니 그것이 속상한 거예요. 내 성공을 축해해 주어야 되는데 박수쳐 줄 사람이 없어요. 너무 늦게 성공했어요.

이걸 보면 인간은 전부 자기중심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누가 분열시킨다고 했습니까? 십자가 저주의 힘. 저주의 힘이 우리를 깰 때 그 때 우리는 자아가 없이 하나님의 노예가 될 때 그것을 용서,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저주케 하는 힘이 사랑입니다. 기존 교회에서 이런 소리 하면 기절할 것입니다. 무슨 그런 소리를 하냐고. 저주하는 것이 무슨 사랑이냐고.

자아 때문에 고민하거든요. 날마다 우리의 자아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우치는 그 저주의 힘이 곧 진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너는 더 이상 너 자신에게 기대 안 해도 괜찮은 신분이 되었잖아. 왜 자꾸 너의 선함과 우수함과 월등함과 위대함에 아직도 왜 미련을 못 버리느냐?”는 것이지요.

하나님 보시기에 ‘너는 더럽고 죄 많은 인간’이라고 하면 그런 줄 알고 살면 되지, 왜 자꾸 독자적으로 위대해야 되고 훌륭해야 되고 왜 그렇게 자아를 포기하지 못하느냔 말이지요. 이렇게 되면 결국 누가 힘듭니까? 본인이 힘들어요.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를 보세요. 처녀가 임신을 했잖아요. 이게 말이 됩니까? 이럴 경우 첫 번째 어떻다? 당황스럽다. 두 번째 분노한다. 그런데 두 번째 분노해야 되는데 마치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서 “마리아야, 두려워 말라. 하나님의 말씀이 응했다.”고 하니까, 세 번째 자아가 분열되면서 뭐라고 합니까? “말씀대로 하옵소서.”

순서가 1) 당황스럽고, 마리아의 남편이 누구지요? 요셉이 당황스럽고, 2) 격분했지요. “마리아씨 나는 당신 그렇게 안 봤는데, 당신이 어떻게 이렇게 나를 배반할 수 있어요? 당신은 나만 좋아한다고 해놓고 ---” “그게 아니고, 성령이 잉태케 했어요.” “당신 지금 농담해요?” “다른 남자랑 잤으면 솔직히 잤다고 하세요. 성령이 잉태케 했다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격분 하지요. 그럴 때 천사가 찾아가서 “요셉아, 아내 데려오기를 두려워 말라.” 할 때 3) 자아가 깨진다. 요셉도 자아가 깨지고, 마리아도 자아가 깨지고 이게 오늘날 우리 성도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자아가 깨지고 2, 3초 후에 다시 자기 노동의 가치를 찾는 것으로 되돌아가요. “언젠가는 날 알아 줄 거야.”

제가 강의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마태복음 16장 26절에, 온 천하보다 더 귀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온 천하에 불을 싸질러 버리지요. 그런데 우리는 온 천하의 것들을 가지고 자아를 만들어 놓으니까 이것은 내 몸이 불붙은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분노하지요. “왜 이렇게 내 인생을 망가지게 합니까? 왜 나를 이렇게 수치스럽게 만들어요? 날보고 어쩌라고?”

“날 왜 이렇게 망가지게 합니까?” 라고 이렇게 외친 사람이 성경에 있어요. 누굽니까? 욥 아닙니까. 욥기의 내용이 어떤 것입니까? “왜 하필이면 나에게--” 친구들은 조롱하고 있고, 자기는 된 통 당했지. “하나님, 왜 나를 자꾸 힘들게 합니까?” 그렇게 나오다가 끝부분에는 어떻게 됩니까? 자기 입을 막고, 입을 막으니까 로마서 3장하고 같지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는 것처럼, 입을 막고 재를 뒤집어쓰지요. 재는 쓰레기 아닙니까. 쓰레기를 뒤집어썼다는 것은 “나는 쓰레기입니다.” 나는 없는 자고, 나는 죽은 자입니다.

뒤집어쓸 때 하나님께서 뒤집어 쓴 욥을 친구들 앞에 높이 세워서 ‘너희들이 구원 받으려면 욥이 기도해야 된다.’ 그 욥이 바로 장차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래서 우리는 멀쩡한데 예수님 혼자 죄를 뒤집어쓰셨지요. 왜 그러냐 하면, 진솔한 우리 모습을 우리 자신은 밝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아가 강해서 못 밝히는 것을 주님께서 내 대신 내 모습을 대신 밝혀주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하나님 앞에 내 대신 서셨고,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내가 이 구절 때문에 손00 한테 많이 당했어요.

로마서 6장 11절 다 같이 읽어봅시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이미 우리는 죽은 자예요. 죽었는데 우리가 살았다는 말을 할 때는 우리가 누구 안에 있기 때문에 살았다고 말하지, 독자적으로 나를 떼버리면 나는 자아를 부르짖는 죽은 자입니다.

그러니까 노예에서 벗어나지 마세요. 하나님의 노예 된 것을 고맙게 여기면서 주님 은혜에 감사해야 됩니다. 내가 주인 되려고 하면 안 된단 말입니다.

다시 빌레몬서로 돌아가 봅시다. 빌레몬서에 보면 사도바울이 “‘노예 되었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주인 되셔서, 주인이 바뀐 채 그들은 해방되었다는 그 정신이 남아있을 때 그것이 하나님 백성이다.’ 라는 그런 믿음을 빌레몬 너도 알고 있지?” 라고 묻는 것과 똑같지요.

그렇다면 너 안에 누가 있다? 너 안에 노예가 있다 이 말입니다. 여기서 또 생각해 봅시다. 그렇다면 노예 해방을 왜 안 시켜주는가? 그 당시 사회 구조는 노예가 있어야 유지되는 사회이기 때문에 노예를 해방시키면 대안이 없어요. 노예를 해방할 때는 기독교 정신 때문에 노예가 해방된 것이 아닙니다. 근대 주체사상 때문에 노예가 해방된 거예요.

우리나라에서 ‘식모’가 ‘가정부’로 바뀐 것이 몇 년 됐습니까? 식모와 가정부의 차이점이 뭔지 알아요? 식모는 노예고 가정부는 용역회사 직원입니다. 노동의 가치를 식모는 인정하지 않아요. 그런데 가정부는 인정해 줍니다. 그러면 노동의 가치가 누구한테 갑니까? 노동을 한 그 사람에게 돌아가지요.

그림 하나 그릴게요. 옛날 식모 있지요. 못사는 시골의 친지 불러다가, 월급 없어요. 못 사는 친척이 딸 데리고 와서는 뭐라고 합니까? “아제요, 우리 아이 밥만 먹여주세요.” 하고 부탁을 하잖아요. 진짜 밥만 먹였어요. 학교 안 보냈어요. 자기 자식도 공부 제대로 안 시켰는데. 돈 있으면 서열이 자기자식 먼저이지 미쳤다고 시골에서 데려온 남의 자식 공부 시키겠습니까.

젊은 사람들은 ‘식모’라고 하니까, 돈 주고 채용한 사람이구나 생각하는데, 옛날에는 돈이 있어서 식모를 데리고 있는 것이 아니고 가난한 친척이 그냥 맡겨놓고 갔다니까요.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놓으면 안 됩니까.” 하고 떠안기고 갔어요. 우 집사님은 아시지요? 옛날에는 다 그랬지요?

그래서 기껏 해 준다는 것이 시집갈 때 약간의 살림살이(요강, 이불, 장롱, 옷가지 몇 개)를 마련해 주는 그것으로 20년 노동의 대가라고 해 주는 거예요. 그리고 시집가는 것도 그 식모되는 아가씨가 결정합니까? 식모가 무슨 자아가 있어요. 누가 결정합니까? 주인이 결정해서, 여자는 식모지만 남자는 머슴입니다. 그래서 머슴에게 시집보냅니다. 머슴과 식모의 만남은 본인이 만나는 것이 아니고 주인들끼리 이야기하면 끝입니다.

이런 이야기하면 젊은 사람들은 “그러면 20년 동안 고생한 식모가 아무리 못 배웠다고 하지만 가만히 있습니까?” 하는데, 옛날에는 다 그랬어요. 그렇게 시집, 장가 보내주는 것도 고맙게 생각했어요.

그러면 왜 그 사람은 그랬습니까? 기준이 보편적인 기준이 되면 다른 기준을 생각할 여력이 없지요. 학군 좋은데 왜 가려고 합니까? 좋은 학군에 가면 서울대, 연대, 고대 들어가야 공부 제대로 한 거예요. 그러나 학군 나쁜데 가면 조선대학교만 들어가도 공부 잘 한줄 안다니까. 더 이상 욕심을 안 내잖아요. 예가 좀 이상하다만 ---

옛날에는 그저 밥만 먹여주는 것도 은혜고 그랬던 시절입니다. 그런 시절에 21세기의 관점에서 빌레몬서를 보면 안 돼요. ‘하이고, 하나님이 계신데 노예 해방시켜야지.’ 그 당시는 노예가 해방되면 굶어 죽어요. 신분사회에서는 신분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보장해 주지 않았어요.

따라서 빌레몬서에서 노예 해방, 인권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은 자아에서 나온 그 모든 법의 관계망을 완벽하게 초월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 사랑이라는 것은.

14절을 봅시다. “다만 내 승낙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
여기 ‘선한 일’이 나오지요. 나 혼자 이야기하기 때문에 이해가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모르기 때문에 물어보겠습니다. 선한 일을 법적 체제, 법적 관계망에서는 선한 일이 뭡니까? 윤리가 되겠지요. 맞지요? 그런데 복음 체제에서 선한 일은 뭡니까? 복음 증거죠. 목사 되라는 말이 아니고 평신도도 다 마찬가지에요. 복음 증거하는 것.

선한 일은 법적, 윤리, 도덕적 선한 일이 아니에요. 지금 개혁주의에서는 법적 선한 일을 이야기해요. 착한 일을 선한 일로 보는 거예요. 선한 일, 착한 일이 복음 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우리는 노예다. 우리는 저주의 힘으로 구원 받았다.’ 이렇게 복음과 관련시킬 때 이것만이 선한 일이에요.

예수님께서 어떤 청년에게 그렇게 말했지요. “선한 분은 오직 한 분이시니라(마19:17).” 하나님이 선한 분이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선한 일이고, 예수님 본인도 선하신 하나님 일이 예속된 일을 하는 것이기에 “선한 분은 오직 아버지뿐이다. 나보고 선하다고 하지 마라.”

따라서 인간은 선하지 않는 거예요. 인간은 죄인이고 악할 뿐이지 선한 것은 없어요. 그러니까 선과 악을 우리가 기준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 없다? 없어요. 없는데 우리는 매일같이 ‘착한 일 하면 재수 좋고, 내가 나쁜 짓 했으니까 내일쯤 벌 받을 거야. 몸이 아프든지.’ 이러고 있어요. 이렇게 생각하면 정말 내일 몸이 아파요. 자기가 생각을 그렇게 아니까 진짜로 몸이 아파요.

지금까지 착한 일 해서 산 것이 아닙니다. 누구 때문에 살았습니까? 그분으로 인해 우리는 살았어요. 혹은 로마서 6장 11절에 의하면 ‘우리는 이미 죽은 자요, 예수 안에서 산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 행동과 상관없이 이미 하나님 안에서 산 자이고, 나 자신을 내세운다면 내가 무슨 착한 일을 해도, 테레사 수녀처럼 밥 퍼주고 착한 일을 해도 죽은 자고, 밥 안 퍼줘도 예수 안에서는 영원히 산자가 되는 겁니다. 이 말은 곧 자아가 나서서 판단하는 것은 아무 쓸데없는 짓이라는 겁니다.

많이 피곤해 하시니까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사람이 성질나면 과격한 말이 나옵니다. 나오는데, 과격한 말이 나온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 다음 반성 단계에서 문제가 심해요. ‘내가 또 과격한 말을 했구나. 말조심하라고 내가 내보고 주둥이 단속하라고 그렇게 했는데 또 과격한 말을 했구나. 내가 다시는 과격한 말을 안 해야지.’ 왜 그런 반성을 합니까? 과격한 말을 안 하면 나쁜 자아가 좋은 자아 되지요. 이게 더 큰 문제입니다.

좋은 자아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과격한 말을 했잖아요. 그러면 “또 나의 나쁜 속성이 드러났구나. 다음에는 어느 시점에 터질지 모르겠다. 아이고 하나님 마음대로 하시겠지.” 이렇게 나와야 됩니다.

반성을 하면 고치는 것이 아니고 위선자가 돼요. 마음은 점점 더 굳어지고. 사람이 위선자가 되면 뭔가 밑에서 두두두 뚫는 소리가 나와요. 십자가의 꼬챙이가 뚫어요. 그러면 우리는 당황스럽지요. “주여 5년 전에는 과격한 말을 했지만 이제는 안 합니다. 순한 말만 합니다. 순한 말을 하는데 왜 뚫습니까?” 당황스럽지요. 그런데 더 뚫으면, 순한 말을 하는 나를 치니까 “이제부터 모든 일은 하나님 책임이다.” 하고 하나님과 작별을 고하지요.

그러다가 나중에 깨닫게 되면 “주여, 내가 십자가로 몸을 돌리지 않고 세상으로 몸을 돌리니까 내 노동의 가치 --” 노동의 가치 속에는 뭐가 포함되어 있어요? 나의 종교생활. 종교생활에서 누적된 노동도 내 새로운 가치로서 등장된 그것을 가지고 내가 새로운 자아로 적립했다는 것. 이것이 나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14절에 보면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12절에 보면 “네게 저를 돌려보내노니 저는 내 심복이라”
그러니까 오네시모라는 사람은 하나의 노예로서 자아가 없는 상태기 때문에 누가 보호를 해줘야 되는데 현재 지금 사도바울이 로마의 옥에 갇혔을 때 오네시모가 돈 훔치다가 갇혔는지 그것인 모르겠는데 하여튼 옥에서 만났어요.

이것이 10절에 나오는데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라고 하지요. 오네시모가 전과자가 되어 바울과 같이 갇혔어요. 그래서 예수를 믿게 되었어요. 그리고 현재 누가 데리고 있는가 하면 사도바울이 데리고 있는데 “네 주인이 누구지?” 하고 물으니까 “빌레몬입니다.” 라고 했어요. “빌레몬 내가 잘 아는 사람인데” 하고는 다시 오네시모를 빌레몬에서 돌려보내서, 이젠 정식으로 주인 빌레몬이 “사도바울님, 내 노예 복음의 선한 일을 위해 잘 쓰세요.” 하고 다시 돌려보내 주기를 원해서 이 편지를 보냅니다. 

그냥 여기서는 이런 과정에서 세 명 다 뭐가 없어져야 돼요? 자아가 없어지고 세 명 다 누가 주인이 되어야 해요? 세 명 다 노예가 되어야 하고 그 주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은혜만 주인이 되어서 그 밑에서 선한 복음적인 일을 하기 위해서 세 명이 관계망으로 연결되는 이것이 바로 진정한 교회라고 보는 겁니다.

모두 다 노예입니다. 사람은 주인 되려고 하는 것은 이해하는데, 자기가 주인 되면 상대방을 본의 아니게 노예로 봐야 되는 거예요. “너는 나보다 못해. 나보다 실력도 없는 것이 왜 까불어” 이렇게 상대방을 노예로 보는 거예요. “성경도 모르는 게, 기도도 못하면서” 만날 자기는 주인 노릇하고. 상대방을 노예로 무시해야 내가 주인이 되니까.

그렇게 되면 우리는 저주 아래 있다는 하나님의 십자가 밑에 선 교회가 아니고 하나의 침목 단체나 아니면 세력단체, 정치단체가 되어버려요. 이것은 바른 교회라고 볼 수 없습니다.

끝으로 하나만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개인이 모여서 단체가 된다.’ 이 말이 맞습니까? 우리의 상식으로는 맞는 말이지요. 사르트르의 집합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했죠. 개인들이 버스 정류장에 모여서 215번 버스를 같이 탈 때 개개인은 서로 모르는 사이지만 공통점이 뭡니까? 215번 버스를 기다리며 모였으니까 이것은 ‘집합’이 되지요. 이들이 서로 약속하고 모여서 어떤 산을 등산을 간다면 이것은 ‘집단’이 됩니다. 그런데 만얀 이 집단에서 나를 무시해서 내가 그 집단에서 탈퇴해서 또 다른 집단에 가지요. 관계망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사회는 이런데, 개인은 자아가 있잖아요. 그런데 하늘의 백성, 교회는 뭐가 없다고 했습니까? 자아가 없지요. 자아가 없으면 단체가 먼저 있고 단체에 자아가 소속되어 있는 것이 추후에 밝혀지겠지요. 그 단체가 뭐냐? 그리스도 몸입니다. 그리스도 몸이 먼저 있고, “당신 그리스도의 몸 맞아?” 서로 만나서 복음적인 이야기하면 “아하, 당신도 주님의 노예구나. 나도 노옌데. 우리는 주인 아니다. 우리 서로 섬기자.” 할 때, 단체가 개인이 모여서 단체가 아니라 그리스도 몸이 몇 개입니까? 하나지요. 문어의 몸통은 하나인데 다리는 8개잖아요. 몸통이 하나인데 그 몸통에 붙어있는 다리인지는 이야기 해보면 알아요. 추후에 밝혀지는 거지요.

이야기를 나눠보면, 저 사람이나 나도 우리는 주님 은혜로 영생을 얻었구나. 십자가의 용서로 구원 얻었구나. 알면 그것이 비록 미국을 가든지 캐나다를 가든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전부,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엡4:4-5)” 입니다. 그래서 우리 화평교회 다니다가 울산 가든지 어디를 가더라도 헤어졌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몸은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다(고전5:3)”고 했습니다. 이 말은 비록 그 몸이 죽어도 우리는 한 영으로 영원히 살아있다는 것 아닙니까.

최후, 운명 직전에 유언을 하는 것 같은 분위기인데, 제가 한 말은 개인부터 출발해서 교회를 생각하지 말고, 이미 태초, 창세전부터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영생 주시기로 한 취지가 우리 속에 이미 있는 사람 같으면 “내가 잘해서 영생 얻었습니다.” 라고 하지 말고, 영생 주시기로 작정하신 그분이 당신에게도 있고 나에게도 있어서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만나서, 헤어지든 만나든 우리는 이미 구원 된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그런 평안의 교회, 화평한 교회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가 부담스럽게 스스로 주인 될 이유도 없고, 자아를 챙길 그런 부담을 안 가져도 된다는 이 기쁜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그동안 자아 챙기기 위해서, 내 노동의 가치를 뽐내기 위해서 얼마나 헛된 수고와 윤리, 도덕에 얽매였는지, 이제는 법정에서 벗어나서 마음껏 자유하면서, 이 자유를 주신 주님의 거저주신 용서를 감사하는 화평교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8. 2. 19. 09:22 녹취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