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 1:17 / 큰 죽음
큰 죽음
이근호
2021년 8월 4일
본문 말씀: 요나 1:17
(1:17)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삼 일 삼 야를 물고기 배에 있으니라
요나는 자신의 생의 끝을 자신이 결정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격렬하게 요동치는 검푸른 바다에 빠지면 그것으로 자신은 죽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죽음’에 대해서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죽기 전에 숨쉬고 있는 것을 인간들은 ‘살아 있는 것’이라고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이미 죽어 있는 존재’인 인간에게서나 나올 개념입니다. 창세기 3:24에서,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는 말씀과 같이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로 통하는 길을 천사들로 파수하게 했습니다.
그것은 이미 죽어 있는 존재인 인간들이 악마의 사주를 받고 끊임없이 생명나무의 세계를 침범을 시도하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이 자신이 이 땅에서 ‘살아 있다’고 여기고 단지 이 세상의 여건상 ‘힘들고 고통 가운데’ 살아 있기에 이제 죽어서도 고통도 없고 눈물도 없는 그곳을 욕구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들은 본인이 어떤 입장인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벌써 죽어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숨이 끊어져야 비로소 죽은 줄로 알고 있습니다. 요나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자기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사명이 얼마나 철저하게 요나 자신의 생애를 활용하는지 미처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죽음까지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버리지 않고 활용하십니다. 특히 요나는 선지자이며 구별되게 하나님의 뜻을 세상을 펼치게 되는 사명을 지닌 자입니다. 따라서 요나에게 일어나고 벌어지고 있는 그 일은, 세상이 아무리 해도 알지 못하는 하늘의 뜻을 전달하는 전달체가 됩니다.
요나의 죽음을 하나님께서 큰 물고기를 준비해서 받아내므로서 요나의 전 생애가 실은 ‘죽음의 연장’이었음을 말씀하십니다. 즉 요나는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도망친 자신의 과오에 대해서 스스로 속죄의 의미로 책임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속죄마저 허락하지 않고 받아내십니다.
그 이유는 인간 속죄는 죄지은 인간 당사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스스로 무너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 자체가 이미 죽어있기에 새삼 ‘무너짐’이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생명나무에서 격리되어 있으면 그 자체가 ‘죽음’입니다.
따라서 요나에게 주어진 그 사명은 요나가 자진한 투신으로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난 주님만이 해내시게 됩니다. 큰 물고기를 준비해서 요나를 그 물고기 안에 가두어두심은, 곧 요나의 죽음이 요나보다 더 큰 ‘큰 죽음’에 의해서 그 사명이 완수가 되게 하십니다. 인간 세계에서는 죽음이 추상적이지만 요나에게는 죽음이 실질적이고 구체적입니다.
‘요나가 살았다’가 아니라 요나는 큰 물고기 안에서 ‘제대로 죽었다’가 됩니다. 그동안 요나는 ‘삶’과 ‘죽음’을 일방적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러든 요나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큰 물고기 안에 갇히게 되자, 비로소 진정한 죽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진정한 죽음이란 그 어떤 목적도 삭제된 상태가 되는 겁니다.
실은 이런 인간이 최고의 ‘사명자’입니다. 이미 죽은 자신을 위한 그 어떤 일이 없음을 압니다. 달리 말씀드려서, 흔히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란 우리 인간의 생사화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생사화복을 관장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일생이 곧 유일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요나의 주님과의 만남은 요나의 죽음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2:40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즉 요나에게 일어난 일은 곧 예수님께서 요나와 함께 하셨기에 일어나야 될 일이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마태복음 12:39의 사실을 나타내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즉 이 세상의 성격을 최종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요나를 통해 ‘죽음 개념’의 전환입니다. 인간 세계는 자신들이 엄연히 살아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생각하기를 “내가 죽기 전까지는 살아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생명나무의 존재를 도외시한 생각입니다. 생명나무는 인간들이 그 어떤 노력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막혀 있는 곳에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생명이 주어지려면 생명나무가 직접 인간 세계 속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그럴 때, 생명나무는 요나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큰 죽음 안에 응축된 죽음’으로 말입니다. 요나는 ‘흙으로 돌아가기’라는 일반적인 죽음말고 먼저 하나님의 죽음과 만나게 됩니다. 그것이 3일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서 그가 진정한 죽음 속에 갇혀 있는 상황입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들의 모든 일생도 실은 ‘죽음의 연장’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정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 세계에서 통용되는 모든 행위와 말과 개념들은, 이런 죽음을 전제로 하지 않기에 모두 다 ‘악하고 음란한’ 것이 됩니다. 사람들의 일상은 누가복음 17:27-30에 잘 나와 있습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즉 인간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에 관한 이야기를 너무나도 수월하게 잘 알아듣습니다. 그러나 이들 인간들은 다음과 같은 말씀은 못 알아 듣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
이 세상이 얼마나 악하고 음란한지, 신앙생활도 결국 취미와 오락과 농담과 장난과 취향 문제로 마감됩니다. 진정 온통 저주받은 생명나무 밖의 세상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그 진지함과 심각함으로 우리 생각을 끌어올려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이하림
6강-요나 1장 17절(큰 죽음)21080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나 1장 17절입니다.
요나 1:17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삼 일 삼 야를 물고기 배에 있으니라”
요나가 죽기 전에, 자기가 뭐 바닷물에 뛰어내려봤자 물고기 준비되어 있을 건데 뭐, 뛰어내려봤자 잠시 비린내 상당히 좀 나겠지만 물고기 뱃속에 한 삼 일간 들어가 있지, 이렇게 예상을 했겠습니까? 전혀 예상 못 했죠.
요나는 선지자로서 ‘하나님 뜻과 자기 뜻이 일치되는 점이 있을 수 있다’ 그렇게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지. 하나님이 이렇게 나를 다룰 것이라고 요나 쪽에서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이 요나를 사명자로 다루는 방식에 전혀 공통점이 없습니다.
내가 알고 내가 예상하고 예측하는 것을 왜 하나님께서는 들어주지 않는가? 요나는 사명자이면서도 하나님의 낯을 피할 때마다 그 낯을 피하고 도망칠 때 그 때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하나님도 충분히 이해하리라고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그 점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만약에 내가 하나님의 낯을 피해서 도망하다가 하나님이 따라와서 걸리면 내 잘못을 내가 아니까 그 잘못에 대한 속죄를 내가 해주면 되지 뭐, 그런 태도로 같이 배를 탔던 선원들에게 거침없이 자기 입장을 표했습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해서 도망치는 것은 내 잘못이니까 나를 던져 넣으면 여러분들은 잠잠해질 것입니다. 편안히 고향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스스로 자기 죄에 대해 속죄하는 것을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 무너지는 것을 하나님께서 놔두지 않아요. 속죄라는 것, 내 죄를 알고 그 죄에 대해서 내가 알아서 책임지면 되지 않습니까, 하는 속죄조차도 내가 내 죄에 대해 책임지겠다는 그 생각조차도 그게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죄가 된다는 생각을 요나는 하지를 못했던 겁니다.
쉽게 말해서 요나는 자기 자신도 예상 못할 정도로 철저하게 하나님의 사명이 자기한테 우세하기 때문에 사명이 자기보다 더 세기 때문에 자기가 죽는 일조차도 나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감히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요나가 물에 뛰어들면 하나님이 물고기를 준비할 거야, 이런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한 거죠.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스스로 ‘내가 잘못되었습니다. 내가 죽겠습니다.’ 그것까지, 그것은 자기 담당이다,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극한이라 여겼던 그것조차도 극한이 아니고 인간이 죽음이라 여긴 것도 죽음이 아니었어요. 인간이 죽음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평소에 ‘나는 살아있다’고 여긴 그 잘못된 개념의 반대 개념이 ‘죽음’ 개념이거든요. ‘내가 살고 있다’는 개념조차도 잘못되어있기 때문에 그것과 반대되는 ‘죽었다’는 개념도 잘못된 거예요. 뭐 잘된 것은 하나도 없어요, 전부다. 사는 것도 사는 게 뭔지도 모르고 그냥 살고. 아이고, 살다 죽으면 죽겠지, 하는데 죽은 그것도 죽은 게 아니에요. 내가 살았다는 의식의 연장일 뿐인 겁니다.
진짜 죽는 것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했거든요. 삼킨다는 말은 인간에 대한 축소 프로젝트를 하나님께서 실시하신 거예요. 압축한 거예요. 요나를 압축해서 큰 물고기 속에 딱 가두어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축소된 요나의 생각 속에 ‘아마 내가 죽는 건 죽음이고 내가 안 죽는 건 사는 거야.’ 라는 생각도 그게 압축 되서 축소 되서 그 안에 뭉쳐져 있는 거예요.
그걸 하나님께서는 준비된 죽음을 가지고 요나를 둘러쳐버린 겁니다. 하나님이 생각하는 죽음의 개념으로 요나를 그 안에 가두어 둔 거예요. “네가 죽음을 알아?” 이런 거예요. 너는 죽음도 모르면서 지금 물에 빠지는 게 죽는 거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거예요. 요나가 죽음이라는 것을 자기 딴에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요나는 죽는 게 뭔지를 몰라요. 하나님의 죽음이 나를 둘러치고 감싼다는 것을 감히 생각도 못한 겁니다.
죽음이란 추상적이라고 생각하죠. 그러나 추상적인 그 죽음을 하나님께서는 요나한테 특별히, 요나는 선지자니까 인간의 대표니까 하나님의 언약과 관련된 사람이니까 특별히 요나로 하여금 이게 죽음이라고 추상적인 죽음을 구체적 죽음으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형태를 만드신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큰 고기 안에 요나가 담기게 하는 겁니다. 큰 죽음 안에 인간이 갖고 있던 곡해한 잘못된 죽음을 그 안에 담아 두는 거예요.
그 동안 너는 죽음도 모르고 네가 죽음에 시달려왔다. 그겁니다. 인간은 내가 죽으면 그만이지, 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죽음마저, 요나이기 때문에 사명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과 관계있는 자이기 때문에, 그 죽음마저 하나님께서는 주의 일로 전환시킵니다. 죽음 그 자체를 살려내는 거예요, 죽음 그 자체를.
그렇게 되면 인간이 하루 이틀 사흘, 돌 지나면 일 년, 육십 되면 환갑, 그 조차도 살아있는 것의 연장이 아니고 이미 죽었던 죽음의 연장이 이 세상에서는 내가 몇 년 살았다, 내가 백신 맞고 살았다, 지금 그렇게 오해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사는 게 아니고 괄호 안에 들어 있거든요, 괄호. 괄호 쳐버린 거예요. 이건 삭제입니다. 제거된 거예요. 나의 모든 생각을 제거하는 거예요.
잘못된 죽음이 큰, 진짜 죽음, 하나님이 생각하는 그 죽음 안에 잠기게 되면 내가 아는 죽음이라는 것도 실은 내가 살고 싶어서 환장해서 생긴 그러한 그림자 같은 제대로가 아닌 엉터리 개념의 죽음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요나가 사명자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선지자이기 때문에 요나의 그 잘못된 죽음, 내 죽으면 그만이지, 하는 그 죽음이 진정한 죽음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진정한 죽음은 뭐냐? 진정한 죽음은 창세기 3장 24절에 나오는 생명나무와 관련지어서 진정한 죽음이 밝혀져야 됩니다. 생명나무 가는 길을 에덴동산 쫓아내고 난 뒤에 천사들이 두루 도는 불타는 검으로 지켰거든요. 지켰다는 말은 그 불타는 검 즉 화염검 저 바깥쪽, 인간이 사는 쪽입니다, 인간이 사는 쪽에서는 생명나무가 없기 때문에 생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목숨이 유지된다는 이유 때문에 그것을 그들은 약간은 살아있다, 약간은 생명이다, 약간은 목숨 붙어있다고 여겨가지고 자꾸 그들의 붙은 목숨을 가지고 생명나무쪽으로 계속 침범을 시도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천사가, 파수꾼이 필요한 거예요.
마귀는, ‘네가 지금 살아있으니까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잖아. 죽어서도 좋은 데, 천국 가야지.’ 계속해서 마귀가 인간을 사주해가지고 생명나무 가는 길이 막혀 있는데, 그게 막혀 있거든요, 처음 들었어요, 막혀 있는 거? 막혀 있는데 뚫으려고 시도하는 거예요, 교회에서. 성경은 막아놨다는데 교회에서는 뚫자, 뚫어보자, 이런 식이에요. 그걸 왜 뚫어야 되는가? ‘나 지금 살아 있거든.’ 이렇다 이 말이죠.
‘나 지금 살아있다’는 자체가 요나에게 주어진 새로운 죽음 개념에 의하면 그것은 산 게 아니고 그것은 죽음의 다른 극단의 모습이에요. 살아있다는 자체가 죽었기 때문에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인간이 뚫어낼 수 있는 생명은 없어요. 생명은 이 땅에 와서 죽음을 삼킬 때나 나타나는 겁니다. 지난 주일 낮 고린도후서 5장 말씀 드렸죠. 사망은 생명에 삼킨 바 되어야 된다고요. 고린도후서 5장 4절에서는 사망이 생명에 삼킨 바 되었다고 되어 있지만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요나의 죽음은 하나님의 죽음에 삼킨 바 되었어요.
요나는 자기가 죄라고 여긴 것, 죄가 뭔지도 모르면서 하여튼 자기가 보기에는 하나님의 낯을 피했으니까 책임 추궁한다고 생각해서 ‘그래, 그럼 나 하나 장렬하게 죽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식으로요. 죄책감에 못 이겨서 자살하는 식으로. ‘됐습니까, 이 정도? 이제 목숨 바쳤으니까 이 정도했으니까 더 이상 닦달 내지 마세요.’ 이런 식으로.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적인 방식으로 속죄한 그 속죄는 하나님의 생각에 없는 속죄에요. 하나님은 그런 속죄를 허락하신 적이 없습니다. 뭐 새벽제단에서 가슴을 치면서, 부족합니다 부족합니다 부족합니다. 다 내 탓이요 내 탓이요. 그럼 주님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경상도 말로. 니 뭐 하노? 니 지금 뭐 알아? 니가 생명에 대해서 알고 속죄에 대해서 알아?
그러면 이제 ‘주님, 저도 알지요. 생사화복, 사는 것과 죽는 것과 복과 저주,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주님인 줄 믿습니다.’ 라고 이야기하는데 성경에서 하나님은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을 향하여. 생사화복은 주님이 주님 자신을 위해서 생사화복을 실시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생사화복을 따질 입장도 못 됩니다. 생명나무 있는 데서 쫓겨나서 죽은 인간이 거기에다가 뭘 기대를 해요? 좀 살 수 있는 가능성 있다 싶으면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주님이라고 하지만 인간은 이미 내놓은 자식이에요. 너는 생사화복이란 말을 거론할 자격조차 안 돼요. 생사화복은 이 땅에 오신 아들에게 주신 것이 생사화복이에요. 죽음은 삶이 되고 저주는 축복이 되는 그것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거예요.
인간이 인간 자신의 죄를 지가 속죄한다고요? 그건 마귀가 그렇게 가르친 거예요, 마귀가. 네 죄를 알렸다. 여기 사약을 받아라! 장희빈 드라마 보면 장희빈한테 네가 감히 왕가를 그렇게 폄하하다니 네가 이 사약을 받아라! 그러면 그 드라마에서 사약은 사실 콜라거든요. 여러분 모를까싶어서 알려줍니다만 콜라 혹은 보리음료, 이런 거. 그럼 안 먹으려고 한다고요. 입을 벌려라, 어명이다! 그럼 입을 벌려가지고 콜라를 막 붓고. 장희빈은 그걸 안 먹으려고 그렇게 하는데 그래봤자 나중에 죽잖아요.
인간이 하루하루 사는 것은 주님 주신 사약을 맛있게 먹는 순간 순간입니다. 죽음을 먹는 게 아니고 가짜 죽음인 것을 우리가 받아 들여야 돼요. 왜냐하면 성도한테는 성령을 통해서 제대로 된 진짜 죽음이 큰 고래가 되어서 우리를 둘러싸거든요. 우리가 포위되는 거예요, 큰 죽음 안에. 성도한테는 큰 죽음 안에. 그 죽음이 무슨 죽음이냐 하면 ‘속죄해주시는 죽음’입니다. 주님의 죽음 안에서 우리는 속죄되는 거예요.
주님의 죽음 안에서 속죄되기 때문에 나의 죽음은 시시한 아무 의미도 없는 시시한 일이 되는 겁니다.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사하게 하라. 인간들의 죽음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희 아버지는 죽은 자로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우리는 생명나무로 가겠다고, 생명나무는 막혔는데 악마는 자꾸 뒤에서 역정을 내고 사주를 해가지고 네가 기도를 하면 구원 받는다, 믿으면 된다, 뭘 어떻게 봉사하면 된다, 자꾸 우리로 하여금 생명나무 기능을 독촉하고 그걸 뚫어내라고 하는 거예요. 이때 적당한 표현이 뭐냐 하면, 속았어요 속았어요 속았어요~ 우리가 속았어요. 악마한테 속았어요.
주님의 죽음에 삼킴을 받는 자 외에는 생명나무를 따먹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을 신약 성경에서는 ‘포도주’라고 합니다, 포도주. 이 포도주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피니라. 이 찢겨진 떡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찢겨진 내 살이다. 요한복음 6장에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생명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6장 5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우리가 성도가 이 땅에 사는 것은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큰 죽음, 주님의 속죄의 큰 죽음 안에 내가 죽어 있다는 사실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가 하루하루 숨 쉬고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에 가장 대단한 사명자는 뭐냐. 인생의 사는 목적이 삭제된 사람이 가장 큰 사명자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목적이. 나름대로의 자기 사는 목적이 없어진 사람. 휘파람 불어도 괜찮아요. 휘파람 불어도 괜찮아요.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담이 죽어서 흙이 되잖아요. 그런데 지금 요나의 죽음은 흙이 되기 전에 일찍 죽음을 맞이해요. 흙이 되지 않는 죽음을, 주님이 준비한 고래 안에서 요나는 구체적인 죽음을 맞이해서 인간들의 죽음을 하나님의 큰 죽음 안에 포대기 싸이게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외관상으로 그냥 장례 치뤄서 화장하고 가루가 되는 그 죽음, 실제로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 죽음은 죽음이 아니에요. 진짜 죽음은 바로 성령을 통해서 주님의 십자가 죽음이 내가 흙이 되기 전에 일찍 먼저 주님의 죽음이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 영을 통해서 우리에게 합치한 거예요. 찾아온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갖고 있던 그 가짜 죽음은 예수님의 진짜 죽음과 합치되어서 아, 이 가짜 죽음도 주님의 진짜 죽음에 다 쓸모가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흔히 말하죠, 한의학에서 돼지고기는 버릴 게 없다고. 성도는 죽는 것까지도 하나님께서 버리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 속죄를 증거 하기 위해서 다 사용하십니다.
그러니까 요나는 나 죽으면 끝이라 하는데 요나는 지금 끝을 오해하고 있어요. 자기 죽으면 끝이 아니에요. 딱 죽고 보니까 준비된 고래 안에서 딱 보니까 나의 끝 자체가 애초부터 나에게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이제 쓸모 없다. 전에 살아있을 때는 쓸모 있다. ‘쓸모 있다, 쓸모 없다’의 결정권이 요나 본인한테는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없었어요. 내 의미, 내 가치, 나의 평가 자체를 할 그러한 권한이 애초부터 우리한테는 주어지지 않았던 겁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잖아요, 사나 죽으나. 그것을 회고적으로 돌이켜보니까 아,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거예요. 사람은 뭐 자기가 잘못 되었다 싶으면 ‘잘못 되었으니까 이제 바르게 살아야지.’ 하는데 그 잘못된 것이 나오게 된 그 뿌리, 자기 안의 뿌리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어요. 잘못 되었으면 뭐 나중에 더 회개하고 바르게 살고 보충하면 되지, 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왜 그런 잘못된 씨앗이 내 부분에서 나왔느냐 하는 것, 그게 중요해요.
그래서 에스더에 이런 말씀 있죠. “죽으면 죽으리라.” “죽으면 살리라”가 아닙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이것을 로마서 1장 17절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그러니까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것과 ‘믿음에서 믿음으로’라 하는 것은 모든 시작은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으로 마감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죽이신다면 그것이 주의 일이기 때문에 내가 죽는 것이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기 때문에 주의 일이 죽이시는 거라면, 죽으라면 죽겠어요~ 그럼 죽으면 되죠.
그 사실을 요나 자신이 물 속에 들어가기 전에는 몰랐습니다. 자기 죽음은 자기 죽음으로 인해 끝나는 줄 알았어요. 나라는 것이 사나 죽으나 더 큰 죽음 안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고래 뱃속에 들어가서 보니까, ‘아, 내가 내 죽음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었구나. 죽음에 대해서만 오해한 것이 아니고 내가 살아있다는 그 자체도 실은 죽은 건데 이걸 자꾸 살았다고 호흡이 붙어있으니까 살아있다고 착각했구나. 잘못 생각했구나.’ 하는 것을 제대로 된 죽음 앞에서 요나가 발견한 겁니다. 죽음이 이중이었어요. 큰 죽음 안에 우리 성도 하나 들어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요나는 사명자이기 때문에 이런 특별한 하나님의 죽음을 주지요. 그런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요나에 대해서 이렇게 평합니다. ‘요나는 자살했다. 아주 장렬하게 거룩한 의미를 담고 자살했다.’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하나님 앞에 자살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냥 있어도 죽은 건데 뭐 새삼스럽게 지가 알아서 죽는다 해서 자살하는 게 아니에요. 가룟 유다는 처음부터 죽은 것이기 때문에 자살이 성립 안 되고, 우리 수련회 때 배웠죠? 압살롬에 붙어서 다윗을 죽이라고 했던 그 아히도벨이 자기 의견이 잘 관철되지 않으니까 자기 집에 돌아가 자살해서 죽고 말았어요. 자기의 계획이 틀어지니까.
그러니까 이것도 마찬가지에요. 아히도벨이나 가룟 유다가 자살한다는 것은 인간이라고 태어난 것은 언제든지 지 성깔대로 안 되면 자살할 가능성이 많은 존재에요. 그만큼 인간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모든 의와 책임과 의미를 본인 자기 홀로 지면 그만이잖아. 내가 책임질게. 이런 식이에요. 누가 그렇게 배후에 있습니까?
진짜 하늘에서 오신 그 분이 이 땅에 와서 하신 것이 죽음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생명나무가 친히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자기의 택한 백성에게 생명을 주는 자기의 계획, 프로젝트를 완수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뭐, 내 인생 내가 책임지면 되지,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대대로 모태신앙이고 어릴 때부터 본의 아니게 부모로부터 유아세례 다 받게 하시고 이런 식으로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교회를 오래오래 다녔던 사람, 교회 많이 다니고 교회에서 일어난 일도 많이 본 사람, 그 사람의 마음 속에 늘 이런 게 있어요. 하나님 믿고 교회 생활하고 교회 봉사하고 하나님 섬기고 기도하는 이 모든 것은 하나의 오락이라는 느낌을 지울 길이 없습니다. 갈수록 이게 더 진해져요. 오락이고 나의 성격이고 취향이고 그냥 농담 같은 것. 그냥 장난 같은 것. 그런 느낌이 강렬하게 옵니다.
왜냐하면 성령이라는 것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주의 이름으로 단 한번이라도 기도하게 되면 주의 이름으로 기도했기 때문에 자기가 죽은 것을 아는데 교회 50년, 60년 다녀도 단 한 번도 기도가 된 적이 없는 사람들이 있어요. 성령이 안 왔으니까. 성령이 안 와서 기도가 안 되니까. 성령이 와서 기도하면 나는 이미 죽었다는 것을 아는데 그렇지 않고 성령이 안 온 상태에서 자꾸 남들을 흉내 내고 모방하는 거예요.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모방하게 되어 있어요, 타인의 욕망을. 그 타인의 욕망을 모방해서 자기 욕망으로 전환시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기도를 유창하게 잘 해보세요. 그게 타인의 욕망인 동시에 그 다음에 기도할 때 나도 그래야지, 그게 자기 욕망이 돼요. 그러니까 결국 이것은 내가 해낼 수 있는 거예요. 내 행함에서 행함으로 나아가는 이것은 결국 농담입니다. 장난이에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세요. 50년, 60년, 70년 교회 다닌 사람한테 묻고 싶은 것이 “요나는 이렇게 죽어도 고래한테 갇혀 있었잖아요.” 라고 제가 제시하면서 “그러면 오랫동안 교회 다니신 분도 고래한테 잡혀본 적 있어요?” 라고 묻고 싶어요. 그러면 그 쪽에서 “아이고, 요나나 그런 일을 당하지. 우리한테는 큰 고래 같은 그런 건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꿈에 큰 크루즈 여행하는 것은 생각했지만 큰 고래 속에 들어가서 여행하는 것은 생각 못했습니다.” 이렇게 하거든요. 그러니까 그 사람은 주님이 일하시는 그 진지함과 심각함의 수준까지 본인의 일상을 끌어올리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그걸.
하나님은 큰 물고기 입으로 요나를 받아줌으로 말미암아 본격적으로 요나로 하여금 요나가 지니고 있는 사명을 주지시키고 시작하게 하시죠. 그 말은 하나님의 생명의 일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죽음이라는 요소가 없어지지 않고 그것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그 진지함, 그 심각함 그것을 전제로 해서 모든 것이 주의 일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50년, 60년 교회 다니면서 교회에서 여러 가지 많이 본 사람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교회에서 무슨 일 있어도 ‘어차피 나는 살았는데. 항상 나는 살아있고 그까짓 거 뭐 신경 안 써도 내 배부르면 되지.’ 하고 내가 살아있다는 그것을 항상 빼돌려요.
교회에서 헌금하라 봉사하라 하면, 해주자 해주자, 하고 쓸데없는 짜투리 돈 같은 거 해주지만 뭔가 말씀으로 복음이 압박 들어오게 되면 사람들은 페이퍼 컴퍼니 있잖아요, 서류상 회사, 가짜 회사 만들어 놓고 거기다가 지 중요한 건 다 옮겨놔요. 다 옮겨놓고 예, 드리겠습니다. 받으소서. 이러고 있다고요. 진짜 자기한테 소중한 것은 다 따돌렸어요. 다 따돌려놓고 이거라도 드립니다. 성의라도 표하겠습니다.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어차피 교회 장난이고 하나님 믿는 이거 취미고 농담인데 뭐. 진짜 심각하고 중요한 내 것 있으면 됐지, 뭐 할라고 그런 거.
날이 갈수록 세대가 점점 어린아이부터 개나 고양이를 키우거든요. 어른들이 개 키우는 사람들이 많아서 내가 말을 함부로 못하겠다만 어린아이들이 개나 고양이를 자꾸 키우자 하는 것은 이 집구석이 지 마음에 안 든다는 뜻이에요. 내가 내 인생을 즐길만한 거리를 따로 내 옆에다가 두겠다는 겁니다. 그 말은 지금 내 가족 사는 게 영 성에 안 찬다는 뜻이에요. 내 진정한 속마음, 이 뽀삐 네가 알아다오, 이런 식이에요. 개 키워서 개하고 대화하겠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하고 대화할 맛이 안 나서.
특히 20대 아가씨들 개 키우고 하는 것은 자기가 죽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게 아니고 개나 고양이라도 키워서 나는 당당하게 지금 숨 쉬고 살아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강변하고 있고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나 살아있으면 됐지 뭐, 교회는 어디까지나 오락이고 취미이고. 하나님이 중요한 게 아니고 내가 더 중요하다는 거죠.
제가 오늘 아침에 운동을 하는데 운동 하다보면 모이는 멤버들, 늘 오는 사람들이 있어요. 한 80넘은 점잖게 생긴 할아버지가 있어요. 그리고 한 78 먹은 까불락거리는 할머니가 있어요. 그 까불락거리는 할머니가 할아버지가 점잖게 생겼으니까 대화를 서슴없이 하는데 그 이야기를 큰소리로 하니까 제가 안 들을래야 안 들을 수가 없는 거예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2015년부터 계속해서 공원묘지 관리 쪽에서 돈 내라고 독촉장을 보낸다는 거예요.
보내는데 그 자식들이 공원묘지에서 벌초하는 것이 귀찮다고 공원묘지에 있는 시신을 다 화장해서 지금 치워버렸어요. 그 안에 화장한 것도 없고 그냥 흙이 되어버린 거예요. 안에 조상하고 아무 상관도 없는 그냥 흙만 있는 공원묘지다 이 말이죠. 그런데 공원묘지 그 토지가 공원묘지에 속했기 때문에 계속해서 관리비 내라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공원묘지 포기하고 땅 넘겨주자고 하고 싶어도 장남 명의가 되어가지고 이걸 못 넘겨준다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내가 운동하는 내내 거기서 5분 이상 계속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나열된 단어를 한번 보세요. 독촉장, 돈 내라, 큰 아들 소유.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세상 사람들은 돈과 소유에 대한 이야기는 어찌 그리 잘 알아듣는지. 배우고 못 배우고 점잖고 안 점잖고 상관없어요. 너무너무 잘 알아들어요.
이게 바로 누가복음 17장 26절-29절에 나와 있습니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이 때까지는 먹고 마시고 시집 가고 장가 간 것까지 포함되거든요. 그 다음 28절,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그 다음에 “사고 팔고” 그 다음에 텃밭 가꾸는, “심고 집을 짓더니” 부동산, 집값 오르기 전에 빨리 마련해야 돼요. 전세 빼냐, 안 빼냐.
그런 단어, 자기 소유와 관련된 그런 단어 개념들이 인간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던 거예요. 왜 그것들이 지배하는 겁니까? 자기가 안 죽었다는 거예요. 악마가 뒤에서 사주해서 너희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 가고 장가 가고 주택 짓고 집 짓고 텃밭 가꾸고 뭘 하는 거 보니까 너는 안 죽었어. 살았어. 살았다는 그 개념만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납득이 되고 대화가 원활하게 잘 소통이 되는 겁니다. 모르는 영감 앞에서 그 이야기 하면 고개 끄덕거리고. 사람들에게 어려운 말이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당신은 이미 죽었으며 주님의 속죄가 생명입니다.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생명이 없느니라. 이것은 무슨 말인지 그들이 왜 못 알아듣습니까? 그들은 무엇이 심각하고 무엇이 진지한지 악마에 속아가지고 전혀 감을 못 잡고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의 진지하고 심각한 것과 자기가 진지하고 심각한 것이 전혀 엉뚱하게 만나지 않았어요. 이게 세상 어디 놀이터 운동장에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만의 이야기입니까? 그게 교회 내에요. 그게 교회 내에서 요새 그렇게 해요. 요새가 아니라 옛날부터 그랬죠. 성경을 알아듣지를 못해요, 알아듣지를.
못 알아듣는 이야기, 계속해 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16장 4절,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요나의 표적, 다시 말해서 인간이 사는 것 자체가 요나가 생각하기에는 ‘살았는데 내가 내 죄 지은 것 때문에 이제는 내가 사는 것 그만하고 물에 풍덩 빠져 죽을게요.’ 라는 그 생각이 큰 물고기 안에 갇히니까 내가 살았다는 것조차도 죽음 안에 있다는 이미 죽었다는 사실,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모든 사회생활에서나 사람하고 대화하게 되면 그 자체가 악하고 음란한 짓이 된다는 거예요.
나의 죽음을 전제로 하지 않고 내뱉는 모든 것들이 악하고 음란한 죄에요. 악하고 음란한 거예요. 전부다 악한 거예요. 김연경 선수가 이끄는 한국 여자배구가 터키를 이겨서 5세트 풀세트 끝나고 준결승 올라갔습니다. 이게 악하고 음란한 거예요, 이게. 이게 악하고 음란한 거예요.
왜냐하면, ‘그래서?’ ‘아, 이겨가지고 너무 기뻤습니다.’ ‘네가 지금 뭐가 진지한 줄 아느냐? 네가 살아있는 것만이 진지하고 중요하고 나머지는 이 살아있는 것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쾌락을 더하기 위해서 네가 응원하는 팀이 반드시 준결승 올라가야 되고 이겨야 되고 승리해야 되고 그래야 하루하루 사는 게 짜릿하고 재밌다는 이 생각 자체가 예수님의 속죄함에 대한 생각을 차단시키는 일인 것을 네가 모르느냐?’ 이 말입니다.
이렇게 살다가 예수 믿었으니까 천당 가겠지. 아닙니다. 천국 가려면 변화가 일어나야 돼요. 어떤 변화? 요나에게 일어났던 이런 변화. 주님이 찾아오니까 십자가가 찾아오니까 내가 숨 쉬고 살아있는 것, 맛있는 거 먹는 것, 스테이크 써는 자체가 죽은 시체가 스테이크 먹으면서 ‘아이고, 맛있다.’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시체인 줄 아시고 맛있게 드시기 바랍니다. 그거 먹었다고 안 죽는 게 아니거든요.
한 번 생각해보세요. 이거 먹고 그 다음날 죽었다. 이상하게 스테이크 먹었는데 왜 죽었지? 그러니까 이러한 논리적 연결이 안 된다는 말은 바로 내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것이 주님의 속죄의 연장, 주의 일의 연장인 것을 우리가 몰라서 그래요.
요나의 모습은 이겁니다. 핵심은 이거예요. ‘예수님이 이 땅에 사는 법’ 그거에요. 이것을 요나로 보지 말고 그 안에 예수님이 있다고 봐요, 선지자니까. 요나가 사는 법. 아니,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사는 법.
예수님은 죽기 위해서 사셨고 그 죽음은 흙이 되는 인간들이 아는 그 죽음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죽는 죽음, 생명을 주기 위한 죽음, 사망을 생명으로 삼키는 그 죽음, 그것이 필요한 속죄의 죽음, 그 죽음을 죽으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보고 이야기합니다. 네가 네 인생에 시건방지게 책임질 생각 마라. 왜냐? 너는 시시하니까. 네가 하는 모든 것은 시시하니까. 심각하지 않으니까. 진지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죽어있는 것만이 진지하지, 죽어있는 게 산 체하면서 꺼떡꺼떡대는 것, 그것은 진짜 꼴 사나운 거예요.
백신 맞았는데 안 아파. 안 아픈데 자꾸 쉬라고 해요. 그러면 쉬라고 하니까 아픈 척 해야 돼요? 분명히 우리는 죽었다 했는데 자꾸 남들이 너 뭐 할 줄 알아? 하니까 우리는 죽었는데 자꾸 사는 척 해야 돼요, 이 땅에서. 이게 얼마나 괴로운 일입니까?
이미 가장 심각한 것, 속죄, 주님의 진지함, 대속의 다 이루었다, 죄 사함, 이것보다 더 진지한 게 없거든요. 그 앞에서 내가 집 사고 전세 옮기고 몸이 아프고 그것은 시시하고 시시한 겁니다.
나의 죽음을 전제로 하지 않을 때는 모든 것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속한 하나의 경향들이죠. 우리가 무엇이 이 세상이며 무엇이 주님의 세계인지를 이제는 분별할 수 있는 영, 성령을 여러분들이 받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죽는 것이 새삼 죽은 것이 아니고 이미 죽었다는 십자가 죽음의 연장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혼자 살지 말고 주와 더불어 주의 죽음 안에서, 주와 더불어 살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