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 1:8-10 / 심판 근거의 확대
심판 근거의 확대
이근호
2021년 7월 21일
본문 말씀: 요나 1:8-10
(1:8)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컨대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고국이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1:9)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1:10)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요나는 도망치지지만 하나님께서는 끈질기게 추적해 내십니다. 폭풍이 이는 바다 한 가운데서 요동치는 배에서 요나는 하나님을 접하게 됩니다. 그 방식은 바로 ‘타인에 의해 재판’받는 식입니다. 같이 배에 올라탄 이방인들은 요나를 심문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 각자의 삶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배가 뒤집어지면 모든 것을 잃습니다. 그리고 자기네들 목숨도 잃습니다. 여기서 이방인들의 의식이 노골화됩니다. 즉 “각자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각자의 신에게 빌자”입니다. 그들의 신은 자신들의 목숨을 지켜주는 신이었던 겁니다. 신에게 모든 것을 다 바칠 수 있지만 조건은 자기네들의 목숨을 유지한다는 범위 안에서 섬김입니다.
바로 이런 이방인들의 신들 속에 낯설고 전혀 다른 신으로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작동하고 계십니다. 우선 여호와 하나님께서 요나로 하여금 다른 이들이 믿는 신과는 다른 이질적인 신과 관계 맺고 있음을 들통나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 활동의 ‘구체성’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방인과의 차이나는 구체성을 하나님께서는 보여주십니다. 이곳은 곧 ‘이스라엘의 특수성’을 나타내는 경우도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더불어 일하시면서 뭘 만들어내십니다. 그것이 바로 ‘심판의 근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에서 악독이 올라온다고 해서 금방 심판하지 않습니다.
심판하실 만한 확실한 근거를 특별히 지상에 영글어내십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게 어떤 행악짓을 했느냐를 문제삼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보내신 자’에 대해서 어떤 행악짓을 했느냐를 문제삼으십니다. ‘보이는 자’에 대해서 인간들의 태도를 가지고 심판이 실행됩니다.
요나가 같은 배를 탄 그 환경에 들어왔을 때, 배가 무사히 순항했다고 하면 아무런 일없이 각자 집으로 돌아갔을 겁니다. 서로가 요나에 대해서 그들은 할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통해서 분란을 일으키고 싶었던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타민족과는 달리 특수한 사명을 지니고 있는 민족입니다. 그 사명은 바로 최후의 전지구적 심판이 무슨 근거에 의해서 당연하고 마땅히 주어져야 하는가 라는 사실과 관련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심판 소식’ 자체를 증거하는 자를 세상을 몹시 싫어하고 기피하고 밀어내게 된다는 겁니다.
즉 인간들의 자기만의 삶의 영역을 확보하려고 합니다. 그게 자연스럽고 옳은 일로 여깁니다. 그래서 이들이 우상을 섬기는 이방민족이라고 할만합니다. 요나는 니느웨 성에 대한 심판은 자기하고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기에 자기가 빠져도 하나님의 일에 성사되리라고 여겼습니다. 즉 왜 자신이 니느웨 심판에 끼어들어야 하는지를 몰랐던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같이 배를 탄 사람들은 ‘여호와의 낯을 피해도’ 아무 일도 일어날 것도 없는 그런 자인가를 우리가 고려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들에게는 특수한 사명이 없고 요나에게는 있기 때문입니다. 요나가 아무리 하나님의 사명을 버리고 도망쳐도 하나님께서 기어이 요나의 어깨 위에 사명의 가방을 짊어주어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에게 거부당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 근거는 육지와 바다를 관장하는 하늘의 하나님의 선지자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것이 무탈하게 건사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관심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들이 잘 있는지 관심두며 삽니다.
그러나 사명받은 요나의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무엇이 이익이냐 손해냐를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찾아냄을 당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반면에 이방인들은 제수없는 요나는 어떻게든 그들의 영토에서 배척하기에 급급합니다. 바로 이점이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심판을 내릴 근거로 작용합니다.
“내 것 다치지 않게 하는 신”들은 이방인들은 믿고 있기에 요나를 통해서 밀어들어온 여호와 하나님은 요나와 더불어 싫어 버린 바 된 겁니다. 이 ‘배제당함’이 곧 요나가 담당해야 될 연속적인 하나님의 사명의 일부였던 겁니다. 그러나 요나가 고국에 있을 때, 자신에게 이런 배척받음이 곧 사명의 일부라는 사실은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요나가 당한 처지에 하나님께서 합류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요나는 더불어 ‘더욱 심화된 심판의 근거와 재질’을 생산해내신 겁니다. 요나가 진정 가야할 곳은 다시스도 아니요 니느웨가 아니라 ‘죽음의 곳’입니다. 죽음으로 완성되는 것이 선지자의 사명입니다. 이 죽음은 자살이 아니라 타인에 영역에서 배척받아 생긴 죽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를 유도해내신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요나는 합세해서 일하신 겁니다. 이것이 언약적 사명의 구체성입니다. 오늘날 성도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성도로 하여금 자신의 구원의 근원 늘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된 거예요?”라고 묻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근거가 인간에게 있지 않음을 통해 제가 구원되었지요?”라고 고백케 하는 겁니다.
즉 “난 괜찮아!”가 아니라 “왜 나만 괜찮은 겁니까?”라고 반문하게 합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배척당하게 하시는 겁니다. 심판을 먼저 타인들이 하게 하시는 겁니다. 이럴 때 성도는 세상에 대한 그 어떤 미련이나 아쉬움마저 잊게 하십니다. 즉 성도는 이 세상에서 이익이나 손실을 생각하지 않는 자입니다.
그것은 살아야 될 근거를 자신이 추슬러서 소지할 권한이 없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신약시대에서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온다’는 점이 이를 반영해줍니다. 즉 평소에 이 세상이 당연히 심판받아야 하는 그 이유를 키우면서 살아가는 자들이 깨어있는 성도이기에, 심판이 도적같이 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필연적 일로 여겨집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살전 5:4-5)
주님이 찾아와서 함께 일하게 된 자들만이 이 세상이 자신을 밀어내고 있음을 압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함이 심판이 된다는 사실을 아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4강-요나 1장 8-10절(심판근거의 확대)21072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나 1장 8-10절입니다.
요나 1:8-10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컨대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고국이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이스라엘의 그 특수성을 오늘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이방 민족과 달리 다루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방 민족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다루는 식으로 다룸을 당하지 않습니다. 천지가 개벽하듯이 큰 파도가 일어서 배가 뒤집힐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러한 대자연의 변동 갑작스러운 활동이 구심점, 중심점이 특별한 특수한 이유에서 나왔다고 이방인들은, 같이 가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방 민족한테는 하나님의 그 특수성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라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요나는 하나님의 낮을 피하면 안 되지만 이방민족은 하나님의 낯을 피해도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대상이 된다는 거지요. 여기에 대해서 이방 민족이 그렇게 아쉬워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위기라고 느끼지도 않습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모르고 산다고 해도 자기 생애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그들은 여기고 있습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그들이 버림받은 거예요. 그런데 그들이 사는 방식이 나름대로 살아온 관습이기 때문에 정상이라고 여겼는데 여기 누구 하나 뭔가 자기가 알지 못하는 다른 요소가 끼어들었습니다.
요나가 끼어든 겁니다. 요나가 끼어들면서 어떤 일이 벌어졌느냐 하면, 갑자기 예상 밖으로 큰 대풍이 불지요. 4절에 “폭풍이 대작하여”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갑작스럽게 무슨 시그널처럼 뭘 알리려는 것처럼 바다 자체가 발작을 일으킨 거예요. 무질서지요. 혼돈스러워진 겁니다.
그래서 이방인들, 같이 배를 탄 그들에게는 굉장히 이게 낯설게 느껴지는 거예요. 비현실적인 경험을 그들은 하게 된 겁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겁니다. 하나님이 함께 있을 때 그것을 구체적 상황까지 하나님이 개입하게 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느냐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냥 성경에서 말씀하고 끝이 아니라 실제로 이 세상 전부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작용을 하게 된다면, 작동을 하게 된다면 그 때 이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되며 그들은 어떻게 자기 자신을 새롭게 이해를 해야 되는지 그것을 보여주게 되지요.
구체적 상황이라 하는 것은 지금 하나님께서 요나를 따라잡았다는 겁니다. 요나는 내뺐고 하나님은 따라잡고, 그렇다면 지금 이 배 위에서 하나님이 지금 자기가 있는 곳까지 따라잡아서, 자기를 찾아내서 기어이 함께 있다는 것을 요나는 직감하고 있습니다.
자기 주변에 온통 하나님이 일으킨 대풍이 대작하고 있으니까요. ‘여기까지 따라왔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나는 내뺐는데 여기까지 따라오셨습니까?’ 요나가 도망을 친 이유가요, 나의 어떤 생각 때문이냐? 니느웨 성에 악독이 있다, 하는 이 일 그것은 니느웨성과 하나님과의 관계이기 때문에 자기가 굳이 거기에 관람자로 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나는 빠져도 된다고 생각하고 빠진 거예요.
니느웨성에 악독이 있다. 이방 민족에 악독이 있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요. 악독이 임하니까 반드시 거기에 심판이 있을 것이고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그 소식을 내가 알려주나 알려주지 않으나 하나님께서 심판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발을 빼도 하나님의 일에는 하등 지장이 없다, 라고 요나는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요나가 참으로 제대로 하나님에 대해서 빠트린 것이 있어요. 모르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나님께서 이방 민족을 악독이 있다고 해서 심판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은 어떻게 심판하느냐 하면, 악독에 대해서 그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줄 때 그때 그 심판받을 자들이 요나에 대해서 피해를 입히고, 요나를 배척하고 배제할 때 그때 그것을 근거로 심판을 증거 하는 그 선지자, 이스라엘의 기능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이 배척했다는 그걸 근거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거예요.
악독이 하늘에 올라온다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악독이 올라오고 그다음에 그 악독이 올라온다고, 너희 죄가 올라왔으니까 하나님께서 분노하신다는 사실, 이걸 누가 전달했을 때 그 전달자 자체를 세상이 배척하고 거부한다면 그 배척과 거부가 바로 이 세상이 심판받는 근거가 되고 이유가 되는 겁니다.
아담의 자손이 범죄 했다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그 범죄 했다는 사실을 통보해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노아라든지 여러 선지자를 보냈잖아요.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을 때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심판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구체적인 이 심판의 내용을 가져가기 위해서 주님이 심판주지만 심판주 본인이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배척당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지요.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불심판을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받게 되어 있는데 이 불심판이 지연이 돼요.
왜 지연이 되느냐 하면, 심판받는 근거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받는다, 에 대해서 조금 더 그 내용을 확산시킵니다. 쉽게 말해서 롯이지요, 소돔과 고모라에 있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그 주변 사람들로부터 당하는 수모와 거부와 배척과 상처와 아픔과 그 이질성에서 오는 소외감 이런 것들을 하나님께서 롯에게 발생시키기 위해서 롯의 가정이 소돔과 고모라를 떠날 때까지 심판이 지연이 돼요. 심판이 행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천사가 롯의 가정에 가서 성을 빠져나가라, 했을 때 거기에 불량배들이 와서 롯에게 행패를 부리잖아요. 바로 그런 사실, 창세기에서 롯에게 일어난 그 수모당함과 비난받음을 요나의 시대에서는 누가 해야 되는가? 이스라엘이 마땅히 해야되는 거예요.
요나가 자기 사명을 버리고 도망쳐도 이 끈질기신 하나님께서 요나가 있는 그곳까지 와서 요나가 미처 본인이 해야 될 일을 모르고 있는 것까지 통보해주면서 요나가 있는 그 현장에, 도망치는 그 현장이 주님께서 하시는 그 심판작업의 영역으로 삼으시는 거예요.
자, 이야기를 다시 해봅시다. 여러분이 놓치지 말아야 될 핵심을 콕콕 집어내겠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낯을 피해서 도망가면 안 되고요. 이방 민족은 여호와의 낯을 피해도 아무 문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천지를 만드신 것은 하나님인데 요나가 자기 사명 버리고 다시스로 도망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대작을 일으키고 폭풍을 일으켜서 요나로 하여금 그 자리에 스톱, 완전히 묶어 놨잖아요. 오도 가도 못하게 그 자리에 딱 묶여 놨다고요.
그 정도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도망치는 요나는 옳은 행동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잘못된 행동이다, 그렇게 지적을 하시면서 왜 같은 인간인데 이방 민족은 여호와의 낯을 피해서, 여호와의 낯을 피하는 정도가 아니고 여호와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지요, 여호와의 존재 자체도 인정하지 않는 그 사람들에게는 왜 그동안 그 배가 왕래하는 중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자, 뱃놀이나 하세, 노래 불러가면서 아무 일도 없이 세상살이 여유롭게 할 수 있도록 놔두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같은 하나님인데요. 심판하시는 것은 여호와인데 요나는 닦달 내면서 왜 다른 사람은, 여호와를 모르는 그들에게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겁니까? 이방 민족은 아직 심판이 지연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고요. 그 지연되었다는 이유가 있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요나는 이스라엘 선지자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에 소속되어있기 때문에 심판의 지연이유를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요나는 꼭 알아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께 악을 저질렀다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이 지상에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그 소식을 전하는 사람에 대한 무시와 배척과 오해와 거부 현상이 일어나야 비로소 심판이 본격적으로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요나는 자기 생각에 하나님의 사명을 버렸다, 했는데 버린 사명을 하나님이 건지고 다시 요나에게 짊어지워 버리는 거예요. 어릴 때 엄마 말 안 듣는 농땡이 국민학교 애들이 있었어요. 제가 어릴 때는 초등학교라 하지 않고 국민학교라 했으니까 국민학교라고 표현하겠습니다.
제가 대성초등학교 바로 앞에 살았기 때문에 애들이 학교 등교할 때 다 보여요. 어떤 애는 삐져서 엄마가 도시락하고 가방하고 챙겨주니까 그 애가 도시락이고 가방이고 집어 던져버리고 엄마 얼굴도 안 보고 학교로 가버리는 거예요.
그걸 보고 엄마가 양보 없이 포기하지 않고 그 애가 던진 가방과 도시락을 챙겨서 애한테 다가가서 억지로 가방을 그 어깨에 짊어지워 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낯을 피해서 도망치는 말썽꾸러기 요나에게 그 벗어놓은 사명을 요나에게 그 현장에 짊어지우는 겁니다.
짊어지우면서 요나가 짧게 생각한 것, 요나가 빠트린 부분, 심판이란 어떻게 시행된다는 심판의 그 절차까지 요나에게 다 짊어지우는 거예요. 요나야, 네가 이 배에서 이방 민족, 같이 배를 탄 사람들에게 네가 배척을 꼭 받아야 되는 거예요.
“이 풍랑의 책임자는 너야. 너만 빠지면 우리는 옛날처럼 아주 조용하게 평온하게 우리 삶을 살 수 있어. 재수 없는 너 때문에 풍랑이 일어났으니까 그 풍랑의 원인 제공자인 너만 없어지면 우리는 예전처럼 평안한 행복한 우리 각자 인생 살 수 있어.”라는 그 이유 때문에 요나가 배척받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명 중에 핵심으로 포함되어있는 겁니다.
요나는 사명을 버렸지만 하나님은 요나를 버린 적이 없어요. 마치 풍랑이 이는 배가 일종의 하나님하고 요나하고 만나서 회담하는 장소라 보시면 돼요. “우리가 이로써 심판을 야기하는, 심판을 불러오는 그 죄의 깊이와 재질에 대해서 우리가 새롭게 생각하고 의논하고 너에게 알려줄 게.”
주님께서 요나에게 다른 사람들은 요나 배척하기 바쁜데 주님은 요나에게 찾아와서 합세해서 마치 요나와 함께 “야, 여기 카페에 왔으니까 다시 사명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다시 의논해 보자. 너 뭐 먹을래? 아메리카노 먹을래? 안 그러면 아보카토 먹을래?” 주님께서 “시켜, 시켜. 이것 먹고 죽자.” 이러는 거예요.
지금 이방 민족이 모르는 것은 이방 민족은 죽는 것이 낭패라고 여기고 하나님은 이방 민족에게 배척받아서 죽는 그것이 유일하게 하나님의 심판작업에 합세하는 생명의 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겁니다. 이게 이스라엘의 사명이에요. 역할이에요.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과는 차별화되는, 다른 민족이 아무리 공들여 공부해도 알지 못하는 것 그것은 뭐냐 하면, 사람에게 버림받아서 죽는 그 길만이, 오직 그 길만이 바로 사는 길, 하늘나라 가는 생명의 길, 구원의 길입니다.
요나에 대한 심판은 누가 하느냐? 요나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이 하는 것이 아니고 타인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가르쳐 줍니다. 별로 친절하지는 않아요. 요나에게 “당신 하나 없어지면 우리 살겠다.” 이런 식으로 기어이 그 배에 같이 탄 사람들이, 분명히 자신이 히브리인이라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믿는 하나님은 히브리인의 하나님, 진짜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나님, 하늘과 바다를 만드신 하나님이라고 분명히 언급을 했건만 그들은 요나를 자기의 영토에서 자기의 삶에서 내쫓기에 급급하고 바쁜 거예요. 나가라 그 말이지요.
그런 경우가 마태복음에도 나오지요. 8장이지요. 무덤에 귀신들린 청년이 있을 때 사람들은 그 청년이 귀신들려서 무덤가에서 이상한 짓, 정말 해괴한 짓, 괴물 같은 짓을 했을 때 사람들의 머리에는 뭐가 없었느냐 하면요, 단지 그 청년 생각만 하는 거예요. 저 청년 안됐다, 저 청년 귀신들렸다, 어떻게 누가 좀 해결해 줘야 할 텐데, 라고만 걱정을 했지요.
그런데 아무도 그 마을 사람 가운데서 그 청년 때문에 자기들 돼지가 다 죽는다는 사실은 상상을 하지를 못했습니다. 그 청년은 구원받고 자기들은 지옥 간다는 사실을 상상도 못한 거예요. 내 나와바리, 내 영역 내 삶의 영역이에요. 내 삶의 영역은 안정적이어야 되고 세상적인 평균값을 유지해야 돼요. 사람 사는 것처럼 살아야 돼요.
사람들은 그렇게 주장합니다. 내 인생은 그걸 꿈꾸었으니까요. 사람들은 죄를 지을 때만 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과 요나 또는 세상 사람들과 예수님을 비교해 보세요. 얼마나 이 세상을 보는 견해차가 큰가를 알 수 있지요.
만일 어느 교회에 요나 같은 사람, 사도바울 같은 사람 보내버리면 그 교회는 목사부터 온 교인들이 사도바울에게 싹싹 빕니다. “제발, please, 제발 좀 나가주세요, 제발 나가주세요. 왜 가만히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뒤엎어버리고 왜 흔드십니까? 보세요 당신 때문에 예배 전에 정전되었잖아.”
정전되어서 예배를 못 드리고 있어요. 에어컨도 못 돌리고 아예 예배를 못 드리게 되었을 때 그때 그 교회에 왔던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당신은 도대체 어디서 왔고 어느 교단이고 어느 교파고 종교는 어떻게 됩니까, 할 때 “나는 전기를 다스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나는 천지와 전기 에너지를 다스리는 하나님을 믿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들어왔기 때문에 정전된 거예요. 하늘과 바다를 다스리는 여호와를 믿는다 하거든요. 본문에서. 무신론자들이 당신 누구요, 하니까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바다와 육지를 관장하시는.
주님이 오셔서 귀신을 쫓아냈거든요. 그러니까 그 귀신들이 주님께 부탁을 했습니다. 마태복음 8장 31, 32절에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가로되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실찐대 돼지떼에 들여 보내소서 한 대 저희더러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그래서 돼지 속에 귀신들이 들어갔어요. 사람을 미치게 만든 그 귀신이 이번에는 돼지에 들어가니까 이번에는 돼지가 미쳤어요. 32절에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돼지 지가 물고기도 아닌 게 바닷속으로, 갈릴리 호수 속으로 마구 내달려서 한꺼번에 몰살해버렸습니다.
가다라 주민들은 간곡히 예수님한테 부탁했어요. “제발 저 청년 데리고 나가주세요.” 제발 나가달라.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증인 되는 구체적 상황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이것 때문에 배척당하는 구체적 상황을 요나는 빼먹고 하나님의 사명을 버리고 다시스로 도망가려고 했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니까, 지금 요나에게 벌을 주시는 게 아니에요, 자기가 던져버린 책가방, 네가 던진 가방 다시 주워서 요나에게 뒤집어씌우는 겁니다. 뒤집어씌우면서 너는 다시스로 갈 것이 아니고 죽음의 길로 가야 돼요. 이게 장차 오실 예수님이 하신 일이거든요. 다시스로 피신 하면 안 돼요. 그러면 다시스 사람들이 또 곤란해요. 다시스로 피신해 버리면 다시스 사람들 그 육지가 이제는 지진이 일어날 거예요. 왜? 바다와 육지를 다스리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지금 다시스까지 가지도 못하고 배 위에 있는 상태에서 주님께서 요나에게 찾아오니까 바다가 일렁이면서 육지와 바다를 다스리는 하나님으로 티를 확 내버린 겁니다. 그럴 때 그 순간 요나는 자신의 사명은 다시스로 도망치는 것도 아니고, 니느웨 가는 것도 아니고,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안 믿는 그 이유의 근원, 뿌리를 찾아서 나아가야 될 업무와 사명을 이스라엘 선지자 내가 감당을 해야된다는 사실을 알아요.
그게 뭐냐? 모든 사람이 기피하고 싫어하는 것, 모든 사람이 요나를 기피 한다, 맞는 말이지요. 모든 사람이 요나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을 싫어한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삶의 정황에서 인간들이 그렇게 기피하는 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죄의 재질, 죄의 그 깊은 내용을 요나가 도망을 쳤기 때문에 그 뱃사람들은 비로소 그들은 죄가 뭔지 수용하든 안 하든 관계없이 그들의 가장 근원적이고 원천적인 죄는 바로 죽음에 대해서 도망치고 있는 그들이라는 사실, 자신들이 죽음이 무서워서 어디까지나 내빼고 있는 이것이 인간이 근원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기피하는 이유가 된다. 이게 이방 민족의 한계에요. 문제점입니다.
요나는 죽어야 이스라엘……, 요나가 이스라엘 선지자니까요, 요나는 또는 이스라엘은 죽어야, 죽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민족이어야 되고 선지자이어야 해요. 오늘날 성도도 마찬가지고. 당장 아양교 다리 위에서 뛰어내려라, 그런 소리 아닙니다.
그 다리에서 뛰어내려도 안 죽어요. 혹뿔만 나겠지. 이스라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구원한다는 것은 세상 모든 사람들과 다른 특수한 사명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 사명을 이스라엘이 감당하고 담당하겠다는 그것이 또 죄가 돼요. 이스라엘은 담당하고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총괄적으로 그 사명을 성취하도록 하셨습니다.
그게 바로 이스라엘의 망함이에요. 인간은 망해야 바로 나의 일이 주의 일을 방해했다는 사실을 그제야 압니다. 물론 택한 백성에게만 해당 됩니다. 자기가 망해봐야 주의 일이 비로소 멈춘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어떤 식으로 망해야 되는지를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나는 이제 암에 걸릴 거야. 날도 더운데 8월까지 더 살기도 싫고 7월 말까지만 살고 인생 그만 살 거야. 갑자기 밥맛도 떨어지고 힘도 없고 올 장마도 끝났으니 난 이제 죽을 거야.’라는 계획은 필히 망해야 됩니다. 필히 망해야 돼요. 머리 나쁜 사람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지요.
내가 예수 믿어도 구원됩니까, 라는 질문을 성도라면 하면 안 돼요. 이렇게 해야 돼요. 내가 예수 믿으면 구원됩니까, 라고 질문하지 말고 구원 근거가 인간에 있지 않음을 통해서 제가 구원받은 겁니까, 이렇게 해야 돼요. 구원의 근거가 나에게 없다는 사실을 통해서 제가 구원받는 겁니까, 이렇게 나와야 돼요.
왜냐하면 이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주님이 친히 나서야 될 일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받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요나는 뭐냐? 자기 일의 계획이 있었어요. 자기 뜻이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낯을 피하면 된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요나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 택한 성도는 어떤 경우라도 여호와의 낯을 피할 재주가 없다는 거예요. 이 말은 더 나아가서 주님께서 주신 사명은 주님이 친히 찾아오셔서 이루시는 것이지 내가 그 사명을 이루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요나를 통해서 알려주는 겁니다.
그 끈질기신 하나님, 자기 일에 대해서 양보 없이 끈질기신 하나님, 그렇게 해서 구원받은 사람은 이런 고백을 하게 되지요. 난 이제 괜찮아, 이렇게 고백하면 안 되고요, 이렇게 해야 돼요. “왜 나만 괜찮은 겁니까? 왜 나만 괜찮은 겁니까? 저 이방 민족 살아가는 모습이나 내 모습이나 똑같은데, 지도 더 살고 싶고 번창하고 싶고 부자 되고 싶고 나도 마찬가지인데 왜 저만 괜찮은 겁니까?”라고 되묻는 물음이 나와야 돼요.
나 이제 성령 받아서 괜찮아, 가 아니라 난 괜찮아~, 이게 아니고 “왜 저만 성령 받아야 됩니까? 왜 저에게 사명을 주시는 겁니까, 주여? 소돔과 고모라에 있어서 왜 소돔과 고모라의 그 많은 백성들 가운데서 왜 하필 천사가 우리에게만 찾아오시는 겁니까, 주여.”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언약이에요. 언약은 이미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사람을 정해놨다는 사실을 그 언약을 통해서 우리에게 함께 하는 겁니다. 자, 여기서 함께 한다는 이야기를 더 많이 하겠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도망치는 요나에게 기어이 찾아와서 폭풍으로서 자기 소재를, 자기 현존을 알렸어요.
그러면 지금 요나는 하나님과 함께 있습니다. 요나 입장에서는 ‘잡혔구나. 걸렸구나. 아, 끈질기시다. 내가 숨어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과 요나를 찾아오는 이유가 새로운 죄의 사슬, 연쇄 고리, 사슬을 만들어내기 위함입니다.
그걸 제가 아까 미리 말씀드렸어요. 죄지었다 벌 내린다, 가 아니라 진짜 심판이 행사되는 죄는 우리가, 인간들이 아는 죄가 아니라 네가 심판받는다고 알려주는 그 당사자에 대해서 받아들이지 못할 경우에만, 그 경우에만 구체적 심판이 행사되는 거예요.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할 때 요나가 놀랐던 이유는요, 그들이 40일 지나면 심판받는다고 이야기할 때 그들이 뭘 받아들였느냐 하면, 요나의 그 말을 받아들였잖아요. 그런데 심판받는다던 그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심판을 안 받았어요. 안 받았습니다.
그러면 요나가 뭔가 놓치고 있는 게 있어요. 하나님의 언약적 심판에 대해서. ‘아, 죄지으면 하나님이 심판 때리는구나.’ 그게 아니라니까요. 그게 아니에요. ‘이미 선악과 따먹었을 때부터 아담은 심판받아야 됩니다.’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심판받아야 될 그 세상 속에다 자기 아들을 보내서 심판의 최종적인 것 최종적인 심판근거를 하나님께서 인간과 더불어서 그걸 형성, 만들어내고자 구성하시는 거예요. 그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심판하기 전에 “인간들아, 예수님에 대해서 너희가 심판해버려.”
그래서 심판받는 아들이 될 경우에만, 내 아들이 심판받는 경우에만 하나님께서 총괄적으로 심판을 때려버리는 거예요. 그 작업을 위해서 세상 사람들 앞에 하나님의 택한 성도나 하나님의 사도나 그리고 주님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밉상 거리가 되고 배척거리가 되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우리가 세상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세상 사람 입장에서 어떤 사람들이 요나에 대해서 그렇게 했을 때에 즉 “요나, 너 때문에 재수 옴 붙어서 이렇게 되었잖아.” 그런 이야기거든요. 우리가 세상 사람 입장에 한번 서 봅시다.
제가 이런 이야기 하면 또 ‘우리가 성도인데 어떻게 세상 사람처럼 그렇게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이 될 수 있습니까?’ 하는데 참 하여튼 그런 사람들 보면요, 죽는 척, 하고 있어요. 죽었는데 죽는 척, 하고 있다고요. 본인은 살아가는 그것이 전부 다 세상 사람들 살아가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아까 했잖아요. 왜 저만 괜찮은 겁니까, 하고 반문을 해야 된다니까요.
아, 나는 괜찮아, 하는 것은 이유를 알았다는 것인데 그 이유를 알았다는 게 수상합니다. 그것은 뭔가 잘못된 거예요. 왜냐하면 아, 정말 어렵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더불어 우리 성도를 살려주시는 이유는, 내가 너와 함께 해서 세상을 일괄적으로 몽땅 불심판 받아야 될 이유를 우리가 만들어내 보자 그 말입니다.
네가 살아줘야 만들어지는 거예요. 아직까지 죽으면 안 돼요. 7월 말까지 8월까지 계속 살아줘야 죄가 더 만들어져요. 죄가! 성도가 살아있는 이유는 죄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이 정도 나빠도 죄 받겠지.’ 아니에요. 멀었어요. 멀었어요. 더욱 멀었어요.
우리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우리가 얼마나 싫어하는지 우리가 더 살아봐야 아는 거예요. 참, 더 살아봐야 알아요. 주님이여, 눈물 줄줄 흘리면서 “주여, 죄인입니다” 주님께서 “꼴랑? 아이고, 지금 그 까짓걸 가지고 네가 죄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야. 멀었어. 더 살아봐. 더 살아봐. 아직 멀었어.” 네가 얼마나 예수님을 배척하고 미워하는지를 더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예수님을 요나로 보고 우리를 뭐로 보느냐 하면, 배를 요나와 같이 탔던 다른 승객들로 봅시다. 여러분, 요나가 얼마나 밉겠습니까? 얼마나 미워지겠어요? 왜 내 인생 꼬이게 만들었느냐, 그 말이거든요. 네가 지금 뱃전 끝에 가서 나가 죽어라, 그 말입니다. 타이타닉처럼 손 벌리고 바다나 구경하다가 빠져 죽어라, 그 말이지요. “내 인생 꼬이게 하지 말고 나가 나가버려. 나는 내 인생 건사하기 위해서 얼마나 고생했는데 네가 한꺼번에 다 조져놓나.”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그럴 때 성도라면요, 그런 고백을 하고 난 뒤에 그다음 조를 맞춰서 이 고백이 나와야 돼요. “그런데 왜 저만 괜찮은 겁니까? 이토록 주님을 미워하고 싫어하고 배척하는데 왜 저만 이렇게 구원받는 겁니까?”라는 고백을 내놔야 돼요. 오늘 여기 뱃사람들은 그렇게 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아이고, 속이 다 시원하다. 아이고, 괜히 재수 옴 붙어가지고.”
그러니까 오늘 본문 내용에 이방 사람이 동의를 안 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다 동의를 해야 돼요. 왜냐하면 내가 괜찮게 꾸며놓은 이 정원에 멧돼지 한 마리 들어와서 완전히 망쳐놔 보세요. 멧돼지 잡으려고 하지 멧돼지 모시고 하나님이여, 이럴 수는 없다 그 말이지요.
“제발 나가 주세요. 예수님이여, 부탁하니 귀신들린 그 청년하고 나가주세요. 데가볼리 이 지역에서 농사짓는다고 농협에서 대출받은 것 값을 길이 없게 다 망했습니다. 제발 부탁하니 내 인생에서 예수여 좀 꺼져줄래? 좀 나가줄래? 아예 내가 교회에서 나갈 게. 내가 교회 안 나올게.”
이게 여러분이 이해하기 힘듭니까? 정말 이 이야기가 이해하기 힘들어요? 여기 이방 민족, 배 타는 사람들이 요나에게 이런 요구를 할 때 누구나 납득을 해요. 나라도 그러겠다. 바로 예수님이 오셔서 벌인 사건이 무슨 사건이냐? 바로 십자가의 현장인 거예요. 이게 십자가의 현장입니다.
돈 들여서 편의점 차려놨는데 손님들 오는데 위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거예요. 이건 뭐 대번에 안 되지요. 주일 날 그런 부탁을 해서 집사님이 고생을 하셨는데요. 이게 인간의 타고난 본성입니다. 동그란 내 인생, 여기까지만 내 것으로 지키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지막 심판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2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주님께서 오실 때 도적같이 이른다. 도적같이 이른다는 것은 평소에 인간들이 본인 생각만 하면서 본인의 것들만 자기 주변에 눈에 띄는 곳에 모아놓고 살아왔다는 거예요. 낯설다는 겁니다. 주님이 낯설게 오는 거예요.
그러나 누가 구원받느냐 하면, 주님과 함께 있고 싶고, 주님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을 감사하고, 의외의 축복으로 여기는 사람한테는 그날에 너희가 어두움에 속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4절에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베드로후서 3장 10절에 봐도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이렇게 우리가 생활이 되려면 주님의 심판의 정당성에 대해서 적극 공감하는 식으로 하루하루 일상을 보내셔야 되는 겁니다. “오늘 주께서 불심판 내려도 정당한 조치입니다”라고 할 정도로 말입니다.
그래서 요나와 하나님과의 공통점은 뭐냐 하면, 이 세상에 대해서 어떤 미련이나 어떤 기대 같은 것은 아예 없다는 것이 요나와 그리고 하나님의 공통점입니다. 그리고 이 폭풍 속에서 요나는 무엇을 알게 되느냐 하면, 인생에 있어서의 하나님이 함께 있는 성도는 이 땅에서 이익이다 손해다, 가 아예 성립이 안 되는 인생이라는 사실, 나에게 무슨 이익을 줄 겁니까, 나에게 손실을 입혔습니다, 라는 게 아예 성립이 안 되는 인생.
왜냐하면 나는 주님의 사명이 나로 나 되게 했기 때문에 주님의 사명이 없는, 주님이 주신 가방이 없는 나는 아예 존재할 의미가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이 땅에 살면서 구애받지 아니하고, 이익이나 손실을 계산하지 아니하고 주께서 어디로 가게 하든지 이게 다시스가 되든 배 위가 되든 크루즈 여행을 하고 있든 내가 살 것은 바로 자기 십자가 지고 주와 함께 죽는 그 날이 바로 내가 사는 길인 것을 여러분들은 요나를 통해서, 왜 성도가 특수적인 존재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요나는 평범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다른 사람과 같이 섞여도 구분되지 않는 인생이고 싶어 했습니다. 요나는 그냥 평균적인 존재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요나가 벗어놓은 사명의 그 가방, 짐, 짐보따리를 주께서 요나에게 짊어지우신 하나님, 죽는 것만이 그것이 생명의 길인 것을 알려주신 그 일한 내용이 오늘날 우리 이야기인 것을 알려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