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미가

미가 6:1-5 / 논쟁의 끝

정인순 2022. 5. 25.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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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의 끝 

 

이근호
2022년 5월 25일                 

 

본문 말씀: 미가 6:1-5

(6:1)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일어나서 산 앞에서 쟁변하여 작은 산으로 네 목소리를 듣게 하라 하셨나니

(6:2) 너희 산들과 땅의 견고한 지대들아 너희는 여호와의 쟁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쟁변하시며 이스라엘과 변론하실 것이라

(6:3) 이르시기를 내 백성아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엇에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너는 내게 증거하라

(6:4)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어 종노릇 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보내어 네 앞에 행하게 하였었느니라

(6:5) 내 백성아 너는 모압 왕 발락의 꾀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추억하며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추억하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의 의롭게 행한 것을 알리라 하실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피조 세계의 역할을 심도 있게 밝혀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전부 다 정당하고 합당한 조치라는 사실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이 증언을 위하여 그동안 하나님께서 벌리신 일에 관여된 피조물들을 소환합니다. 산이 그러하고 작은 산이 그러하고 대지(땅)이 그러합니다.

여기에 이스라엘 백성들도 소환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다같이 과연 하나님의 조치가 얼마나 옳았는지를 고백들을 해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큰 붓이라면 그 큰 붓에 이스라엘이라는 먹물을 젖셔서 대지 위에 큰 획을 그어봅니다. 그렇게 되면 거기에서 죄가 나옵니다. 즉 이스라엘은 이미 죄를 품고 있었던 겁니다.

이 죄가 하나님의 동행하에 역사를 진행하지 아니하면 노출되지 않습니다. 즉 애초부터 인간은 자신도 모르고 있는 죄가 작렬하고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불러내어 속량을 해주신 것은 그들이 죄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 죄가 무엇일까요?

그 죄라는 것은 인간들이 하나님이 벌리신 논쟁을 조기에 마감시키려고 시도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마감도 자신들의 판단으로 귀결됩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들은 항상 옳은 선택을 한 것으로 남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논쟁을 이어하십니다. 논쟁의 끝은 ‘십자가 사건’입니다.

즉 인간들의 자기들이 일치된 판단으로 하나님을 살해한 사건입니다. 죄있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데리고 다니시면서 논쟁을 벌리신 것은 하나님 자신이 얼마나 억울하게 하나님의 정당성이 인간들로 인하여 훼손되고 있음을 그 극한까지 이끌기 위함입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근원적으로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마땅히 자신들을 구원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즉 인간들은 ‘심판을 위하여 인간을 심판한다’는 사실을 못받아들이고 ‘구원을 위한 중간 절차로서 심판이 있다’고 판단하고 싶어합니다. 문제는 이렇게 되면 세상 중심성이 ‘구원받고자 하는 인간 열망’에 있게 됩니다.

이는 곧 ‘인간의 가치와 인간의 의로움’이 중심처가 되고 이는 곧 궁극적으로 인간들은 자신을 위한 논쟁의 장을 고집하게 됩니다. 이러한 인간들의 경향은 이스라엘이 율법 해석에 대해서 그대로 반영됩니다. 예를 들면, 민수기 35:30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사람을 죽인 모든 자 곧 살인한 자는 증인들의 말을 따라서 죽일 것이나 한 증인의 증거만 따라서 죽이지 말 것이요”

이스라엘은 살인자에 대해서 2명 이상의 증인을 따로 형을 정하는 정도는 충분히 해내어서 자신들이 율법을 잘 지키는 의인이 되는데 별 지장이 없다고 자부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살인자의 자리에 율법의 만들시고 주신 하나님 자신이 들어선는 것으로 완성된다는 점을 상상도 못했습니다.

요한복음 8:16-19에 보면,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 기록되었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을 시키십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살인당할 처지에 있다면, 이 사형실시에 있어 과연 인간들이 하나님의 증언까지 고려할 수 있는지를 보시는 겁니다. 이것은 곧 의도적으로 논쟁을 일으키시겠다는 겁니다. 인간들 뿐만 아니라 온 자연세계 전부도 이 논쟁에 있어 주님의 의로움의 증언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하지만 인간들만 자신들의 판단으로 살인자에 대한 율법 적용을 정당하다고 자부하면서 마감시켜버리고 맙니다. 즉 인간들은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여기면서 결국 하나님께서 조성한 논쟁에서 자기 의로움으로 결론내립니다. 이것이 바로 우주의 중심성에 인간들이 벗어나 있음을 증명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 5절에서 ‘싯딤에서 길갈’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싯딤이란 축복을 받았다고 자부한 이스라엘이 바알이라는 우상을 섬기는 종교 축제에 빠진 장소였습니다.(민 25:1) 거기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어 24,000명이 죽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구원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심판을 위한 하나님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길갈은, 이런 이스라엘 전체에 할례를 행했던 장소입니다.(수 5:4) 그들의 더러운 것을 할례언약으로 씻어주시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뜻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이란 기본적으로 ‘심판을 위한 심판’이 없으면 무의미해지는 겁니다. 하나님의 정당함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자기의 중심적 판단의 정당성이 죄로 드러나야 하는 겁니다.

신약에 들어와서, 십자가 사건이 있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또 논쟁의 장을 마련하십니다. 그것은 바리새인의 의견을 유도해 내는 일이었습니다. 어떤 소문이 좋지 않는 여인이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향수를 부어며 발을 씻는 일을 허락하십니다. 여기에 대해서 바리새인은 이렇게 평합니다.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눅 7:39)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면서 바리새인의 판단을 반박하십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7)

즉 사랑이란, 인간의 자기 중심성을 심판으로 파기시키시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해서 새롭게 등장한 이스라엘(=성도)는 더는 자신에 대해서 그 어떤 책임을 지지 않는 존재가 됩니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정당함을 버리고 오직 예수님의 사랑만 증언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1:8에 보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성령이 이방인에게 거저 주어졌습니다.(행 11:17)  이로서 십자가 중심으로 새로운 논쟁이 발생하는 장이 열려 있습니다. 이 장이 곧 세상을 심판하는 기준입니다.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판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억울하게 죽었음을 늘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20강-미가 6장 1-5절(논쟁의 끝)22052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미가 6장 1-5절까지입니다.

미가 6:1-5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일어나서 산 앞에서 쟁변하여 작은 산으로 네 목소리를 듣게 하라 하셨나니 너희 산들과 땅의 견고한 지대들아 너희는 여호와의 쟁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쟁변하시며 이스라엘과 변론하실 것이라 이르시기를 내 백성아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엇에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너는 내게 증거하라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어 종노릇 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보내어 네 앞에 행하게 하였었느니라 내 백성아 너는 모압 왕 발락의 꾀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추억하며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추억하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의 의롭게 행한 것을 알리라 하실 것이니라.”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누구한테 이야기하느냐 하면, 산에게, 주변에 있는 높은 산과 그리고 작은 산에게 내 소리를, 하나님의 소리를 들으라, 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산뿐만 아니고 산을 지탱하는 그 견고한 땅, 지대, 지대도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뿐만 아니고 2절에 보면, 산과 땅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도 같이 들어야 된다는 겁니다. 들어야 되는 이유가, 여기 쟁변이라고 되어 있는데요, 쟁변은 토론, 논쟁하는 것, 과연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분별하기 위해서 대화하는 것, 또는 대화의 장을 마련하는 것, 하나님께서 땅들, 산들, 작은 산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끌어모으십니다.

끌어모으시고 뭐라고 일방적으로 이야기하시느냐 하면, 논쟁하자고, 하나님이 이야기하시면서 내가 너희를 애굽땅에서……, 4절입니다.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어 종노릇 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즉 “너희들을 건져내서 용서하고 내가 이끌어냈잖아.”

그리고 5절에, “모압왕 발락이 너희들이 저주받도록, 소멸되도록, 이 지구상에서, 이 지상에서 사라지도록 할 때에 발람이라는 선지자를 채용했는데 내가 그 발람이라는 선지자 입에다가 저주 대신 풍성하기를, 소멸 대신 오히려 반대로 풍성하기를 내가 만들었잖아. 그리고 그런 것을 네가 추억해야 되며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 하나님이 이끄신 것을 너희들이 알잖아. 그러니까 내가 너희들에게 행한 것이 의로운 일만 행했잖아.”라고 주님께서는 논쟁을 유발합니다.

5절, “내 백성아 너는 모압 왕 발락의 꾀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추억하며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추억하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의 의롭게 행한 것을 알리라 하실 것이니라.” 거기에 대해서 듣는 이스라엘은 생뚱맞은 이야기에요.

뭐냐 하면, 이런 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아, 왜 그랬어?” 이렇게 묻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뭐요? 뭐가요? 우리가 뭘 어쨌다고요?” 하나님의 일방적인 멘트가 이스라엘을 향하여 날아갑니다. “너희들 왜 그랬는데?” 이스라엘은 “뭐, 뭐, 뭐가요? 우리가 뭘 어쨌는데요?”

이스라엘이 먼저 하나님께 “하나님, 조치가 잘못됐습니다.” 하고 먼저 시비를 건 게 아니에요, 여기서. 하나님쪽에서 뭔가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을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논쟁하자, 라고 일방적으로 몰아붙이지요. 이스라엘은 하기 싫어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주부가 아침에 정성 들여 음식을 해서 아침상을 내놨다는 말이지요. 계란말이, 부추전도 지지고 된장찌개도 해서 내놨어요. 그런데 식구들이 아침 먹고 난 뒤에 애는 학교로 가고 직장인은 직장에 가는데 주부가 일방적으로 불러세워요. “그 자리에 다 스톱! 이리와. 왜 그랬어?” 하는 거예요.

애하고 남편은 “음? 뭐? 우리가 어쨌는데? 뭐?” “논쟁하자” “바쁘다, 지금! 무슨 논쟁을 해, 바쁜데.” “왜 계란말이 남겼어.” 주부가 이렇게 나온 거예요. 아들이 듣고서 “남길 수도 있지. 먹고 싶은 것 먹는데 왜 그래?” 남편보고는 “당신은 왜 된장찌개에서 두부만 골라서 건져 먹었어?” “그럴 수도 있지. 오늘 아침에 왜 그래? 지금 바빠! 출근해야 돼. 바쁘다고!” “논쟁하자.” “안 한다. 너나 해라, 논쟁. 나는 내 일이 바빠.”

바로, 이스라엘의 죄는 바로 자기 일에 몰두한다는 그게 죄가 되는 겁니다. 논쟁을 안 하려는 것이, 논쟁을 조기에 끊어버리고 논쟁 자리에 끼어들지 않는 것이 인간의 죄입니다. 그걸 언급하는 거예요. 인간들은 자기 일에 바빠요. 자기의 명예와 자기 처신을 건사하는데 정신이 없습니다. 거기에 모든 것을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이것은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닦달 내는 이유가, 네가 이 세상의 중심에서 멀어졌다는 겁니다. 신약에 오게 되면 그 중심을 주님께서, 하나님께서 이미 확정했어요. 십자가라는 그 중심을 마련했는데 인간들은 그 중심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떨어져서 어디로 가느냐?

중심에서 멀어지면 전부 다 건달들만 있어요. 그 건달들의 주특기는 뭐냐? 자기중심이라는 거예요. 주인님이 차려준 그 밥상, 아까 밥상 이야기했지요, 그 밥상을 실컷 먹고 난 뒤에는 전부 다 자기 영광에 도취 되어 가지고 자기밖에 못 생각하는 거예요.

나중에 집에 돌아와서는 “엄마, 오늘도 나 백 점 맞았어.” 그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나 백 점 맞아서 엄마 좋지? 엄마, 진짜 내가 사랑하는 자식이지?” 하는 거예요. “너 아침에 계란말이 왜 남겼어? 논쟁하자.” “엄마, 미쳤어? 왜 이래? 내 할 일은 내가 공부하는 거야. 공부 열심히 해서 엄마를 기쁘게 하는 것 그게 내 할 일이야.” 엄마가 하는 말이 “내 계란말이 남기지 않는 것이 나의 영광이야.”

그러니 도대체 주님의 뜻을 인간들이 알지를 못하고 있는 겁니다. 자기가 이 땅에서 착하고 훌륭하고 성공하게 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줄로 알고 있어요. 주님의 중심은 십자가에요. 십자가.

주께서 지금껏 이스라엘을 통해서 했던 그 논쟁의 귀결점, 논쟁의 결론 지점이 뭐냐?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살인사건, 죽지 말아야 될 죄 없는 분이 죽게 되는 살인사건. “과연 이 살인사건에 대해서 인간들은 정당하냐? 논쟁하자.” 그렇게 되는 겁니다.

여기에 주께서 누굴 동원 시키는가? 산들과 작은 산들과 그리고 땅, 땅들까지 다 동원 시킵니다. 그리고 거기다가 “이스라엘 너 나와! 너도 이 논쟁에 끼어들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동안 논쟁에 끼어들지 않았습니다. 자기 영광에 도취 되어서 거기에 몰두한다고 자기만 편하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하나님이 벌이는 그 논쟁에 대해서 들어서야 된다는 그런 인식이 전무했습니다. 전혀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민수기 35장 29-31절 제가 읽을 테니 들어보세요 “이는 너희 대대로 거하는 곳에서 판단하는 율례라 무릇 사람을 죽인 자 곧 고살자(고의로 살인한 자)를 증인들의 말을 따라서 죽일 것이나 한 증인의 증거만 따라서 죽이지 말 것이요 살인죄를 범한 고살자의 생명의 속전을 받지 말고 반드시 죽일 것이며” 그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 살인자에 대해서는 한 사람의 증인만 따라가지 말고 두세 증인이 있어야 그 사람의 살인판정을 할 수 있다는 민수기 35장 30절에 나오는 이 율법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율법을 줄 때 율법의 끝을 그들은 몰랐어요. 하나님이 주신 이 율법 하나하나가 논쟁거리라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치채지를 못했어요.

‘우리 그냥 지키겠습니다, 그러면 되지.’ 이렇게만 생각한 거예요. ‘우리가 알아서 지키겠습니다. 살인했을 때는 두 명 이상의 증인이 필요하니 우리가 제대로 율법대로 지켜서 살인을 판정하겠습니다.’ 이렇게 안일하게 생각한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여기서 뭐냐? 그 살인 당한 자, 그 살인 당하는 자 안에, 우리 하나님이 그 살인 당하는 자에 끼어드는 그러한 것을 내다보면서 미리 율법을 줬다는 생각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감히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게 이스라엘 사람뿐이겠어요? 어느 인간이 이걸 생각하겠습니까?

요한복음 8장 16-18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하였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

그러니까 이 두 사람 이상, 여기서 예수님이 하늘에서 온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이지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증거 한다는 이 율법이 나에 대해서, 나를 위해서 미리 주어졌다는 이 사실에 대해서 주님은 의도적으로 논쟁을 유발시키고 그 논쟁에 그 당시 유대인들, 유대인을 대표하는 유대 지도자들을 거기다 끌어 넣으려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겁니다. 중심에 서 있을 때 비로소 그 당시 유대인, 요새로 하면 인간의 대표지요, 모든 인간의 대표는 조기에 논쟁에 끼어들지 않으려고 하고 논쟁을 자기가 일방적으로 끝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과연 우리가 사형시켜도 될만한 분이냐, 라는 그 논쟁에 그들은 자신의 판단만 집어넣었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예수님의 증인으로 세우지를 않았다는 말이지요.

그게 뭐냐? 그게 바로 죄요 그게 인간의 악이라는 겁니다. 인간이 자기 고유함, 고유함으로, 그냥 끝까지 고유함으로, 마지막도 자기 고유함에 대한 판단으로 모든 일을 종결시키려고 하는 것, 그게 죄고 그게 악이 되는 겁니다.

율법에 나오는 그 살인자, “살인자를 그냥 경솔하게 다루지 말고 두세 증인으로 해라. 너희들 알아서 잘 하지?” 그렇게 던져준 정도가 아니고 살인자를 다룰 때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는 그 살인자 자리에 율법을 만드시고 주신 그분이 설마 살인자 자리에 나중에 거기에 위치해 있을지 이스라엘은 감히 상상도 못 했습니다.

인간은 서둘러서 자기 판단의 정당성으로 모든 것을 마감 지으려고 해요. 그래서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논쟁을 유발시키는 이유는, 너는 너 자신을 결정지을 위치에 있지 않다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뭐냐?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면서 “예, 죄 안 지을게요. 죄 안 짓고 바르게 살게요.”

죄 안 짓겠다는 그게 죄가 되는 거예요. 죄 안 짓겠다는 그게 죄가 되어버려요. 지금 주님은 논쟁을 하자고 하는데 그 자식은 백 점 맞았다고 하는 거예요. “엄마, 나 시험 쳐서 백 점 맞았어.” “아침에 계란말이 왜 안 먹었어?” “나 엄마하고 논쟁하기 싫어.” “그 논쟁하기 싫다는 그것, 네가 시험 백 점 맞은 그것으로 논쟁하기 싫다고 해서 논쟁을 대체하지 마라.”

그런다고 해서 논쟁을 싫어하는 네 고유함으로, 모든 정당성으로 판단을 마감하려는 그것은 인간이 이 땅에 만들어진 이유가 아니라는 겁니다. “산을 봐라. 왜 만들었는가?” 산을 만든 이유는, 예수님 증인 하라고 산을 만들어 놨다는 거예요. 작은 산은 왜 만들어 놨는가? 작은 산도 예수님이 진짜 메시아인 것을 증언하라고 만들어 놨습니다. 그러면 이 땅은, 이 대지는 왜 만들어 놨는데? 예수님의 논쟁에 예수님이 정당하다는 것을 증명해주기 위해서 증언자로 나선 거예요. “인간 너는 뭐해? 너는 뭐하냐?” 그 말이지요.

창세기 4장 10절에,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 자체가 전체가 CCTV 같아요. 땅이 주님 하신 일 하나하나 증언할 그런 자세가 되어 있는 것이 땅이고, 그리고 하늘이고, 산이고, 나무들이고 그런 겁니다. 일체 주님 증거에 그들은 발을 뺄 수가 없는 그런 입장에 있어요.

에스겔 1장에 보면, 올여름 수련회 에스겔 합니다, 거기 하늘의 보좌가 1장에 나와요. 그 보좌에 천사가 나오는데 천사의 날개가 있어요. 날개가 있고 다리도 나오는데 관절 없는 죽 뻗은 다리가 나오지요.

그 천사의 날개와 몸통 전체에 수많은 눈이 있어요, 눈이. CCTV지요. CCTV인데 이게 한쪽으로만 있으면 다른 쪽에서 몰래 죄지을 수 있는데 이게 사방으로, 동서남북 사방으로 달렸어요. 천사의 날개가 네 개인데 두 개를 가지고 서로 맞잡고 사방에서 어떤 테두리를 만들어버려요.

안에는 빈 공간이고 세상 전체를 다 감시체제로 만들어놓은 거예요. 눈들이 빽빽하게 있어요. 왜 그런가? 인간 감시하려고? 인간 감시해서 뭐할건데요. 그게 아니고 주님이, 인간 세상을 다루는 그 방식 율법을 준 거에 대해서 주님이 얼마나 옳고 정당하고 합당하고 적법하게 이 세상을 운영하는 것을 언제든지 한시라도 증언할 자세가 되어 있는 자들이 바로 그 천사들이에요. 증언할 자세. 천사가 자기 일로 자기가 마감되는 게 아니에요. 자기 영광과 자기 자랑을 위해서 천사의 기능이 마감되지 않아요. 누구를 증언하는 일로 마감이 돼요.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사도행전 1장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증인, 그러니까 이 산과 작은 산과 땅, 그다음에 이스라엘, 너희 다 합치면 피조세계, 피조세계의 기능은, 고유 기능은, 해야될 일은, “예수님이 하신 일은 어떤 경우라도 항상 옳았습니다.” 하는 것을 증언하는 기능을 부여받은 채로 그들은 피조물이 된 겁니다.

그래서 주님의 그 하시는 일 중에서 오늘 본문을 다시 돌아보게 되면요, 5절에,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추억하며” 그다음에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추억하라.” 되어 있어요. 싯딤이라는 곳이 뭐했던 곳이냐 하면, 민수기 25장 1, 2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여자들이 그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이렇게 되어 있어요.

싯딤이라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발람의 유혹을 받아서, 하나님을 따라가야 될 그들이 마음을 어디에 빼앗겼느냐 하면, 바알신에게, 바알브올, 바알신에게 빼앗겨버린 그 장소가 싯딤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싯딤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 숭배한 그 범죄의 현장을 그 당시 산과 작은 산과 땅들과 그들이 다 보고 있었지요. 물론 하나님도 보고 계셨지요.

거기에서 그들은 다 망해야 마땅한데 그다음에 “싯딤에서 길갈” 길갈이 나와요, 길갈. 길갈은 여호수아 5장 9절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그러니까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주님의 이름, 함께 동행하시는 주님의 이름의 큰 붓, 글자 쓰고 동양화 그리는 붓에다 이스라엘이라는 먹물을 흠뻑 적셔서는 역사라는 바탕에 긴 획을 좍 그어보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서 뭐가 나오는가? 이스라엘과 역사의 만남 거기서 죄가 나오는 거예요.

주께서 일부러 싯딤에서 벗어나지 않고 싯딤에 머물게 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판받는 그것은 적격한 것이다, 딱 자기의 본질에 합당한 것이다, 민수기 25장에서 그때 염병으로 죽은 자가 2만 4천 명이거든요, 2만 4천 명을 죽일 때 ‘하나님이 죽였습니다. 하나님이 심판을 행사하시는 것은 너무나 적법한 조치였습니다.’ 하는 것을 그 당시의 산과 작은 산과 대지와 그리고 이스라엘 너희들도 거기에 동의를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조금 전에, 이 사건 이전에 발람으로부터 하나님의 복을 받았거든요. 복을 받으니까 자신들은 이제는 저주는 없고 복만 받는 줄로 알았던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주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논쟁에 가담되어야 된다는 그러한 입장, 처지에 있는 것이 이스라엘인데 이스라엘은 자기 챙기기 바쁜 거예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의 죄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어떻게 했든 간에 결국 내가 내 것, 최종 괜찮은 것 챙기면 그걸로 오케이 라는 겁니다. 내가 학교 가서 시험 쳐서 백 점 맞으면 그것은 나의 기쁨이 되고, 내가 기뻐하는 경우가 아마 엄마 아빠에게도 기쁨이 될 것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엄마는 뒤끝이 있어서 아침의 그 일을 잊지 않고 “계란말이 왜 안 먹었어?”

이거 뭐 계란말이 오늘 몇 번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네가 수학 백 점을 맞든 나는 그거 안중에도 없어. 너는 너의 관심으로, 너의 고유함으로 종결되게 되면 내가 보기에는 그것이 바로 심판받아야 될 네 존재인 것이 드디어 노출되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해서 네가 그 죄인인 것이 노출되었고 그 죄에 대해서 가차 없이 심판하는 내가 얼마나 적법한 조치였던가, 바로 그 적법한 조치에 대해서 네가 내 백성이니까 내 백성이 임금 되신 하나님을 증언해야 될 사명이 있잖아.” 그걸 지금 따지시는 거예요.

사람들이 뭘 모르냐 하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는 것은 심판을 위한 심판을 행하시는 하나님, 저주를 위해서 저주를 퍼부으시는 하나님이라는 생각을 인간들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율법을 줌으로써 ‘아, 하나님은 결국 우리 인간 중심의 하나님이 아니구나.’ 우리 인간 구원하려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은 감을 잡지 못했습니다.

‘나 구원해 주셔야 좋은 하나님’이라는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다른 이질적인 엉뚱한 인간, 사실은 인간이라고 말을 붙일 수도 없어요, 이때는 인간이라 하지 않고 “아이고 인간아~”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그것은 하나님이 만든 본래의 기능 주님의 정당함을 위한 인간이 아니고 자기 정당함을 최종적으로 챙기려는 쥐려는 가짜인간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의도적으로 율법을 통해서 인간이 죄에 빠질 수밖에 없는 본질을 가졌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몰아넣지요.

그런데 그 죄가 뭐냐? 하나님의 율법에 관해서 ‘하나님, 미안하지만 우리 일방적으로 해석하고 판단하겠습니다. 율법은 그저 내가 착하며 내가 성실하고 착하고 훌륭하고 의로우면 되잖아요. 그렇지요? 그게 주의 뜻 맞지요?’라고 자기 맘대로, 자기 맘대로 자기가 결정해 버리니까 그 논쟁의 끝까지 안 가고, 논쟁의 끝은 뭐라 했습니까, 논쟁의 끝은 십자가에요, 십자가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 성급하게 ‘역시 나는 훌륭해. 역시 나는 말씀대로 살았어. 나는 왜 이렇게 착한 거야?’ 그걸로 모든 일을 마감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서 뭐가 생기는가? 주님의 억울함이 생성되지요. 그 억울함이 생성되면서 모든 논쟁은 끝을 보게 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죽였다. 이게 논쟁의 끝이에요. 하나님과 인간이 논쟁했는데 그 논쟁의 끝은, 인간의 자기 고유함을 포기 못 해서, 고유함의 가치를 포기 못 해서 결국은 율법에 의하면 하나님마저 증인 세워야 된다고 분명히 언급했지만 그들은 하나님 빼놓고 저희들끼리 증인 세워서 예수님을, 하나님을 살해한 사건, 이게 이 역사의, 이 지구의 중심입니다.

왜 사람들은 중심에서 벗어나고 중심을 보지 못합니까? 자기 잘난 맛에 살았기 때문에. 자기가 흐뭇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그것 들고 오려고 하기때문에. 자기중심을 못 버렸어요. 자기중심이 따로 있으니까 십자가라는 중심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거예요. 십자가라는 중심에서!

아까 한 예를 들게 되면 그 아침의 계란말이 사건 이후에 그다음 날 되니까 또 계란말이를 해줬다는 말이지요. ‘계란말이 제대로 안 먹어서, 엄마의 정성을 몰라줘서 엄마가 상당히 기분이 나빴나보다. 오늘은 제대로 먹자.’ 맘먹은 거예요. 그래서 맛있게 계란말이 다 비웠어요. “엄마, 오늘 잘 갔다 올게요.”

그리고는 저녁때 돌아오니까 엄마가 화를 내면서 하는 말이 “너 어제 아침에 계란말이 왜 안 먹었어?” “???, 아니 오늘은 먹어 줬잖아요.” “엄마가 말하는 것은 오늘이 아니고 어제 왜 안 먹었어?” 남편한테도 “어제 왜 두부만 건져 먹었어?” 자식과 남편은 그 이야기 듣고 전부 다 각자 독립선언 해서 ‘나 엄마하고 안 살아.’ 해서 오피스텔 구해서 다 가버렸을 때 그게 바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독립선언입니다. 그게 바로 죄의 결정체에요. 나는 나의 의로움을 바라보는 재미로 살겠다.

그게 바로 십자가라는 중심이 싫어서 외면하고 각자 전부 다 자기 아지트, 토치카를 만들어서 거기에 다 숨어버리는 그게 오늘날 인간 세상입니다. 다 그래요. 그렇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말씀한 것을 결론 내리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인간에게 찾아와서 이렇게 하는 거예요. 이 말씀 성경 전체를 가지고 “왜 그랬어?” 하는 거예요. 듣는 인간 입장에서는 무슨 이야기인지 영문도 몰라요. “뭐요?” “너 나한테 왜 그랬어?” “우리가 어쨌는데요?” 대화가 될 리가 있습니까? 각자의 중심부가 차이 나니까 대화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서 순간순간 논쟁거리를 의도적으로 만들어버려요. 사사기 6장 25, 26절에 보면, 이건 기드온 이야기에요. “이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네 아비의 수소 곧 칠년된 둘째 수소를 취하고 네 아비에게 있는 바알의 단을 헐며 단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또 이 견고한 성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한 단을 쌓고 그 둘째 수소를 취하여 네가 찍은 아세라나무로 번제를 드릴찌니라.” 이렇게 했어요.

농협 대출받아서 포도농사 지으면서 그저 수확 날만 기다리면서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이 농부 기드온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생뚱맞게 요구하는 것은 논쟁거리에요. 지금 기드온이 바알을 섬기고 아세라를 섬기는 게 아닙니다. 여호와를 지금 버리겠다는 것이 아니에요.

기드온이 지금 사는 목적은 뭐냐? 포도 농사지어서 그것 수확해서 자기 가족 밥 먹고 사는 거예요. 뭐 우크라이나 침공하겠다, 이런 생각도 없어요. 남의 포도원 빼앗겠다는 그런 생각도 없고 그냥 소박하게 촌에서 자기 영토에서 포도 농사 지어서 밥 먹고 사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기드온에게 난데없이 찾아왔어요. 천사를 보내서 갑자기 종교적인 문제, ‘바알이냐, 여호와냐?’ 그 문제로 논쟁거리를 만들어버려요. 기드온의 자기 전공 분야도 아닌데요. 전공 분야는 포도 농사할 때 가지를 어떻게 치면 되는가, 이게 전공이에요.

전혀 신학 한 사람도 아닙니다. 원래 신학 한 사람은 신학이 전공이기 때문에 예수를 안 믿어요. 여러분, 그 점을 꼭 아셔야 돼요. 목사는 목회하는 것이 전공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안 믿습니다. 목회하는 본인이 중심이고 신학자는 자기 교수 자리가 중심이에요. 주님의 십자가가 중심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내가 바로 하나님을,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 중심에서 도망치기 바빠요. ‘내가 예수님을 죽였고 그걸 제가 증언하겠습니다.’ 이 중심자리, 어느 인간치고 선뜻 나설 인간은 아무도 없어요.

이 논쟁이 신약에 오게 되면 아주 드디어 십자가를 가까이하면서 논쟁이 아주 치열하고요, 그다음에 십자가 이후도 본격적으로 논쟁이 아주 날카롭게 벌어집니다. 십자가 이전에 있던 논쟁이 누가복음 7장에 나옵니다. 39절에, 어떤 여자, 그 동네에서 소문 안 좋은 어떤 여자분이 눈물로써 향수 담긴 옥합을 가져옵니다.

37, 38절에,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가지고 온 향수를 거기에 다 부어버렸어요.

다 부어버리니까 39절에 보면,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바리새인이 예수를 초청했어요.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예수님이 만약에 정말 영안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죄인인 것을 알았으리라. 저렇게 부정한 식으로 생활비를 버는 저 여자의 모든 것이 율법에 의해서 얼마나 추접고 더러운 걸레같은 여성인지를 모르니까 좋다고 예수님이 저 여자를 받는 모양인데 알면 저리 가, 하는 것이 당연한 조치가 아니냐, 이렇게 나온 거예요.

여기서 예수님은 논쟁거리를 끄집어냅니다. 41, 42절에 논쟁거리를 만들어내지요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이 말은, 모든 인간은 주님의 심판을 위한 심판의 대상자라는 사실을 너희들은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최종 율법의 정답은 십자가에요. 십자가는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 죽음에 연관되어 있다.’ 십자가와 관련된 자라는 이것이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일으킨 모든 논쟁의 끝입니다. 죄인 아닌 자가 없어요.

문제는 뭐냐 하면, 주께서는 문제를 이렇게 일으켜요. 여기서 “모든자들이 다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기 때문에 이제는 심판받아 마땅함을 그것을 토대로 하고, 만약에 여기서 그 심판에 이르지 않도록 그 사람을 사전에 사랑으로 빼돌렸다면 그 사람은 자기중심을 가차 없이 내치고 주님중심에 서서, 그 사랑의 중심에 서서 주님만 기쁨으로 증거 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 여인은 지금 울면서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다. 자, 바리새인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저 여인이, 죄 많은 여인이 더 사랑하느냐?”

논쟁거리를 일으키기 위해서 주님은 사랑을, 그냥 일방적인 용서를 해주신 거예요.지옥 가야 될 자기 백성에게 그냥 일방적으로 용서를 함으로써 십자가 중심의 새로운 논쟁의 마당을, 논쟁의 장을 형성해 버립니다. 그렇다면 이 이스라엘은 멸망해야 되고요, 심판받아야 되고 이스라엘 말고 후(後)이스라엘, 이스라엘이 지고 난 뒤에 나타난 이스라엘, 그 이스라엘의 특징은 뭐냐 하면, 자기중심적이 아니기 때문에 더는 자기 자신에게 아무것도 책임질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수학시험 백 점 맞을 필요가 없는 겁니다. 엄마는 어제 계란말이 안 먹은 것에 대해서 엄마쪽에서 이미 용서가 되었다는 사실이에요. 그렇다면 그 자식은 수학 시험 치고 난 뒤에 “엄마, 엄마! 나는 엄마가 내가 계란말이 남긴 것에 대해서 용서해준 게 너무나 기뻐서 오늘 수학시험 빵 점 맞았어.”

“빵점 맞았다, 하는 것은 아직도 너 자신의 죄인 됨을 증언하려고 하느냐? 그러지 말고 네가 어제 계란말이 남긴 것을……” 계란말이가 자꾸 먹고 싶은가 몰라, “……계란말이 남긴 것을 용서했다는 증인이 되어라.” 이것이 너뿐만이 아니고 이 산과 작은 산과 땅도 지금 그런 식으로 내가 유지하고 있다는 겁니다. 해와 달과 별들도.

사람이 여러분, 마음이 괴로운 것은 주님중심의, 십자가 중심의 논쟁을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중심의 논쟁을 해서 그래요. 자기가 맹렬하게 늘 매 순간 자기를 지독하게 고소하고요, 자기가 고소해놓고 거기에 대해서 지독하게 거기에 반론을 펴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마음이 괴롭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마음이 괴롭다.

1년 먼저 기숙사에 들어가 놓고 갑질하는, 내가 이런 짓도 해야 되느냐, 자기가 자기를 마음에 고소해놓고 자기가 반론의 논쟁을 하는 거예요. 선배들 다 그랬는데, 이런 식으로. 그래서 마음이 편하던가요? 주님께서는 그 자체가 중심에서 마음이 멀어졌다, 하는 겁니다. 십자가 중심에서는 늘 죄를 짓거나 죄를 안 짓거나 이미 죄인이에요. 논쟁의 끝은 일방적으로 결정했기 때문에.

그뿐만 아니고 십자가 이후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 이후에, 막 십자가 끝나고 난 뒤에 그때 요한복음 21장에서 베드로하고 예수님하고 이야기합니다. 21, 22절에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곧 “너는 왜 너의 가치와 너의 정당함, 왜 거기에 신경을 쓰느냐? 저 사도 요한, 자기는 이렇게 이런 식으로 죽고 저 사람은 어떻게 죽습니까, 그런데 신경 쓰지 말고, 관심 두지 말고, 상관하지 말고 너는 나만 따르면 돼! 나만 증거 하면 된다.” 그 말이에요. 남들이 어떻게 살든 간에.

끝으로 사도행전 11장 17절에 이런 말씀 나오지요.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이게 뭐냐 하면, 16절에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것이 생각났노라.” 그러니까 이방인들에게 그냥 성령이 오신 거예요. 왜? 논쟁거리를 일으키는 거예요, 논쟁거리를. 논쟁거리를 일으키게 되면 성령 받은 사람은 자기중심이 아니고 십자가 중심이 되는 거예요.

안 주셔도 되는데, 용서 안 해줘도 되는데 이렇게 십자가의 은혜를, 십자가 피의 공로로 몽땅 다 이렇게 용서해주시니 내게 남아 있는 책임은 일체 입에 올리면 안 되지요. 없어졌으니까. 내가 따로 꿍치는 내 잘남, 내가 믿어서 잘났다, 꿍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할 일은 주님이 나에게 없는 것을 주셨다는 것, 그냥 하늘에서 주셨다는 그것만 증거 하면 되니까요.

세례요한은 말하기를, 요한복음 3장 27절에서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곧, 내가 준 것 아니면 나는 너희들이 가져온 것 인정하지 않는다. 내가 준 것, 내가 준 것은 중심, 십자가 지신 주님이, 심판하신 주님이 중심이지 우리가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증인 되라고 하늘에서 주께서 성령으로 선물을 주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논쟁을 원하지만 우리는 나 잘난 채로 나의 은밀한 내 자리에 숨어 들어가기에 급급한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 어두운 곳에서 성령으로 끄집어내어,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놀라운 사랑인 것을 이제는 마음 놓고 외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