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예레미야

예레미야 10:17-22 / 상처

정인순 2023. 9. 12. 12:36

음성 동영상 Youtube

 

상처

 

이근호
2023년 8월 27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0:17-22

(10:17) 에워싸인 가운데 앉은 자여 네 꾸러미를 이 땅에서 수습하라

(10:18)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 땅에 거하는 자를 이번에는 내어던질 것이라 그들을 괴롭게 하여 깨닫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10:19) 슬프다 내 상처여 내가 중상을 당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라 이는 참으로 나의 고난이라 내가 참아야 하리로다

(10:20) 내 장막이 훼파되고 나의 모든 줄이 끊어졌으며 내 자녀가 나를 떠나가고 있지 아니하니 내 장막을 세울 자와 내 장을 칠 자가 다시 없도다

(10:21) 목자들은 우준하여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므로 형통치 못하며 그 모든 양떼는 흩어졌도다

(10:22) 들을지어다 북방에서부터 크게 떠드는 풍성이 오니 유다 성읍들로 황폐케 하여 시랑의 거처가 되게 하리로다

선지자 당시에 외세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유다나라를 넘보는 일이 노골화되었습니다. 따라서 나라는 결속에 나서고 힘을 합쳐 나라를 지켜보려고 애씁니다. 내 나라 내가 지키는 정신은 너무나도 합당하고 타당해 보입니다. 참으로 정의롭게 보이는 태도입니다. 하지만 선지자는 말합니다. ‘그게 우준하다’고 말입니다.

‘우준하다’는 말은 어리석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 당시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태도가 극히 정상적이며 어리석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예레미야의 주장은 이러합니다. “망해버려라. 망하게 하려고 오는 적들에게 곱게 항복해 버려라. 그게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것이다”입니다.

그러니 그 당시 지도층에서 예레미야를 가만 두지 않을 겁니다. 공격할 겁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선지자는 상처받았습니다. 선지자가 받은 상처는 장차 오실 메시야의 상처를 미리 받은 겁니다. 결국 상처라는 것은 사람 대 사람의 관계에서 발생되는 겁니다. 사람은 같은 사람 없이는 못삽니다.

사람이 밥만 먹는다고 사는 게 아닙니다. 사는 의미가 발생될려면 필히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타인이 있어야 합니다. 비록 사정없이 싸우는 관계라 할지라도 자신의 말과 행동을 받아주는 자가 있다면 인간은 살 보람을 갖게 됩니다. 이것은 곧 인간들은 같은 인간들과 힘을 모아 자꾸 뭔가 이루어보고자 합니다.

두 사람만 모여도 그럴사한 성과를 지상에 남기고자 합니다. 자신의 업적이요 자신의 존개감을 기념할만한 것을 성사시키려고 합니다. 즉 인간은 자신이 무의미해지는 것을 참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벨탑이 그런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선지자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삽니까?

그는 왜 그 시대 유다나라의 대부분의 의견과 다른 의견을 내어놓는 겁니까? 선지자는, 인간의 역사가 사람들과 힘을 모아서가 아니라 담합하고 단결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개입으로 진행된다고 보는 겁니다. 그 과정에서 선지자가 사람들로 인하여 상처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도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는 분이라는 점을 자신을 통해서 내비치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그것도 소극적으로 상처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비난받고 욕얻어먹을 수 있는 상황임을 알면서도 담대하게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그 어떤 주저함도 없습니다. 선지자가 상처를 받게 되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란 이처럼 상처 중심으로 진행됨을 나타내는 겁니다.

사람들은 될수 있는대로 상처 받지 않는 식으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자기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고 여기는 사람과 잘 사귀어놓으려고 하다면 좀 더 사귀어보면, 추잡고 더러운 속내가 드러나서 기겁을 하고 물러가게 됩니다. 이런 경우는 우리 자신들로 마찬가지입니다. 홀로 살게 되면 천하에 점잖은 사람인 것처럼 간주될 겁니다.

하지만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서 비로소 ‘나는 얼마든지 타인에게 상처를 안겨줄 수 있는 인물임’이 밝혀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사람들과 만나지 말아야 할까요? 아닙니다. 성도에게 있어 ‘나’는 먼저 예수님의 상처와의 만남에서 규정되어야 합니다. 타인과의 만남에서 자신의 하지없음과 우수함을 갖추려고 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상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가 규명되어야 합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7-28) 도마는 비로소 왜 예수님께서 죽으셔야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즉 도마는 자신이 믿음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도마가 믿게 된 겁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생각할 때에, 일반인들을 선택해서 사귀는 식으로 사귀려고 합니다. 자신의 단점이 발각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예수님을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예수 믿어주는 것’이 자기에게 의가 되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사람들이 이런 오류에 빠지는 것에서 빼내시려고 합니다. 그 방법은 예수님 주위에 달무리같은 것도 같이 등장시키는 겁니다. 예수님 주변에 지옥도 같이 보여주시는 겁니다. 이 방법이 바로 상처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자들로 인해 생겨난 상처, 그 상처가 예수님에게 남아 있는 한 성도는 예수님과 헤어질 관계가 아닌 것이 됩니다.

따라서 참된 성도라면 예수님의 몸에서 그 상처 난 곳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 상처를 통해서 자신이 저주받을 자임을 파악하게 됩니다. ‘나 때문에 난 상처가 계신’ 바로 그분만이 우리의 목자가 되는 겁니다. 나로 인해 상처가 없는 목자는 목자가 아닙니다. 나의 지도자도 아닙니다.

우준한 자들입니다. 상처를 집중하게 된 성도는 이제 세상에 생활하면서 그 상처를 본인들도 경험하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7:13-14에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복음을 모르고 믿지 않는 자로부터 상처받지 않게 위해 부부 사이에 갈라서는 것은 정당한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상처받지 않는 나’는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성도가 아닙니다. 성도는 뭡니까? 마태복음 7:12에 보면,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라는 심정으로 세상 속을 살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받은 상처가 그렇게 해서 얻어진 상처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렇게 받은 상처로 인하여 성도는 이 세상이 천국이 아니며 도리어 지옥으로서 항상 예수님에게 대드는 요소로 가득 차 있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중심으로 역사를 이끌어 나가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토지 위에 이스라엘은 그냥 덤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그 상처에서 나오는 혜택 덕분에 살아가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의 상처만 쳐다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댓글수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