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욥기

욥기 8:16-22 / 영원한 거처

정인순 2020. 4. 19.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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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거처 


이근호
2020년 4월 19일            


본문 말씀: 욥기 8:16-22

(8:16) 식물이 일광을 받고 푸르러서 그 가지가 동산에 뻗어가며

(8:17) 그 뿌리가 돌 무더기에 서리어서 돌 가운데로 들어갔을지라도

(8:18) 그곳에서 뽑히면 그 자리도 모르는 체하고 이르기를 내가 너를 보지 못하였다 하리니

(8:19) 그 길의 희락은 이와 같고 그 후에 다른 것이 흙에서 나리라

(8:20)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신즉

(8:21) 웃음으로 네 입에, 즐거운 소리로 네 입술에 채우시리니

(8:22) 너를 미워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입을 것이라 악인의 장막은 없어지리라

사람들은 선한 자와 악한 자를 따지는 것은 일단 본인을 무조건적으로 선하다는 점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즉 ‘선한 자만이 제대로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과연 ‘본인이 선한다’는 판정 기준은 어디에 있을까요? 옛날부터 사람들은 하늘에다 호소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조건으로 스스로 선하시고 악하시지 않기에 옳은 판단을 내리신다는 겁니다. 그 하나님의 판단은 지상에 흔적을 남기는데 그것이 바로 악한 자에게는 처벌을, 선한 자에게는 보상을 주신다는 겁니다. 만약에 신이 선하기만 하고, 이 땅에 선한 자들이 어떻게 되든, 악한 자들이 어떻게 되는 방치한다면 이는 신이 진정 선할 수 없다는 것이 인간들의 판단입니다.

그렇다면 처벌을 받은 것과 보상을 받은 것과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여기서 소위 ‘공리(公利)주의’가 작동하는 겁니다. ‘공리주의’란 선과 악의 기준이 인간에게 이익이 되느냐 아니면 손실이 되느냐를 판단내리는 주장을 말합니다. 이익이라는 것은 곧 인간의 생존하는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을 뜻하고, 손실이란 인간의 생존에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이라고 보는 겁니다.

이렇듯 선과 악을 자기네들의 생존에 있어 유리함와 불리함로 구분지어서 판단하는 것이 오늘날까지도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생존’을 가장 최우선적으로 생각하는 바는 요지부동입니다. 변함이 없습니다. 한결같습니다. 바로 인간들의 이런 보편성 한가운데 욥의 고난이 박혀있다고 봐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빌닷은 더 나아가서 말합니다. 만약에 사람이 악하게 살면, 하나님께서 기존 공동체에서 왕따 시켜버린다는 겁니다. 대다수가 생각하는 바로 따라가지 않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가 분명하다는 겁니다. 다수의 의견이 소수의 의견보다 진리다우며 우월한다는 겁니다.

고집 피우지 말고 우리 친구들의 의견을 받아들이라는 겁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오늘날 제대로 복음을 알고 사는 사람들이 주변으로 당하는 수모를 그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진리를 구성하는데 있어 보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을 최종 기준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인간들 마음 내부에 공통점을 품고 있는 심성이 과연 하나님에게 인정받을 것인지는 고려해보지 않고들 있습니다.

그 이유는 본인들이 옳다는 그 구역에서 인간을 못벗어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사사기 19장에서, 어느 레위인의 장인이 자기 딸을 만나려온 사위를 넉달하고도 5일동안 더 붙들고 싶어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물론 장인의 입장에서 자기 딸이 잘못한 바가 있어 사위의 마음을 전처럼 좋게 되돌려 놓으려고 애쓰는 겁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사위가 힘들어 한다는 사실은 생각 안하고 있는 겁니다. 5일째 붙드는 것을 뿌리치고 사위는 장인집을 나왔지만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그만 자기 아내가 부랑배에 처참한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냥 못 이긴척 5일째 있고 그 다음날 떠날걸”이라고 후회할 수도 있고, 혹은 “장인이 사위를 며칠 앞당겨 보내주었더라도 그런 사단은 나지 않았을 것이다”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가능성도 있을 수 있지만 어쨌거나 진리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다른 진리 규정이 요구되는 겁니다. 요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요나는 본인이 하나님의 사명을 받았기에 자신의 판단은 옳다고 자부했습니다. 하지만 요나가 ‘멸망한다’고 장담했던 니느웨성은 무너지지 않았고, 자신은 선지자로서 제대로 미래상을 예언하지 못했습니다.

좌절한 요나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박넝쿨을 만들어 그늘을 만들어주었습니다. 요나는, 당연히 그런 배려를 받을 만 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박넝쿨을 말라죽게 해서 요나로 하여금 그늘이 머리 위에서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이번에 요나는 더워서 죽겠다고 나옵니다.

이처럼 사소한 박넝쿨이지만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십니다. 과연 요나는 자신이 사소한 존재라고 여겼을까요 대단한 존재로 여겼을까요? 요나는 마땅히 자신은 죽지 말아야 될 자라고 여겼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진 교만의 상태입니다.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마땅히 살 권리 있는 자는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의 모든 판단력은, 본인만큼 결코 지금 죽지 않아야 될 존재라는 감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판단의 기준점이 늘 이동한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빌닷도 마찬가지요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껏 자신이 경험한 과거 기준에 준해서 현재를 판단하게 됩니다.

따라서 정답은 이스라엘 언약에서 찾아야 합니다. 시편 69:24-25에 보면, “주의 분노를 그들의 위에 부으시며 주의 맹렬하신 노가 그들에게 미치게 하소서 그들의 거처가 황폐하게 하시며 그들의 장막에 사는 자가 없게 하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도 마치 빌닷이 말하는 것처럼, 악인의 장막이 사라지는 징벌을 내리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스라엘에게 있어 ‘악’이란 언약을 위배한 것을 뜻합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뜻을 추상적으로 찾을 것이 아니라 노아 때는 노아의 움직임을 통해서, 아브라함 때는 아브라함의 움직임을 통해서, 모세 때는 모세의 움직임을 통해서, 다윗 때는 다윗의 움직임을 통해서 계시와 진리를 접해야 되는 겁니다. 이들 언약을 받은 사람의 그 가치를 부정하면 곧 저주가 주어지는 겁니다.

시편 90:1에 보면,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예언에 의하면 진정한 영원한 처소는 지상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에 있습니다. 이를 위해 지상에 예루살렘 성전은 여지없이 파괴되어야 합니다. 예레미야애가 2:20에 보면, “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주께서 누구에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 여인들이 어찌 자기 열매 곧 그들이 낳은 아이들을 먹으오며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어찌 주의 성소에서 죽임을 당하오리이까”로 되어 있습니다.

지상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 무너졌다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상에서 거처가 없다고 해서 저주받은 존재가 아닙니다. 마태복음 8:20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의 영원한 거처는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습니다.

이미 거처가 옮겨진 겁니다. 따라서 이 땅에서 주님에 낚여서 수치스러운 과거가 노출되더라도 주님 탓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영광스럽게 주님만 자랑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모자람과 부족이 그대로 드러나더라도 도리어 주님으로 인하여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녹취:송민선

27강-욥기 8장 16~22절(영원한 거처)

20200419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8장 16~22절입니다. 구약성경 768페이지입니다.

“식물이 일광을 받고 푸르러서 그 가지가 동산에 뻗어가며, 그 뿌리가 돌무더기에 서리어서 돌 가운데로 들어갔을지라도, 그곳에서 뽑히면 그 자리도 모르는 체하고 이르기를 내가 너를 보지 못하였다 하리니, 그 길의 희락은 이와 같고 그 후에 다른 것이 흙에서 나리라,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신즉, 웃음으로 네 입에, 즐거운 소리로 네 입술에 채우시리니, 너를 미워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입을 것이라 악인의 장막은 없어지리라”

또 ‘아멘’하기가 부담이 되는데요, 어떤 집단이 있는데 집단에서 하나님 안 믿으면 너 쫓겨난다는 그런 이야기거든요. 그걸 나무뿌리 속에 있는 줄기로 그럴싸하게 비유하고 있습니다. 빌닷의 문제는 선악과 적이죠. 악한 사람과 착한 사람을 구분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구약에는 악한 사람과 착한 사람이 구분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신약에 가면 악한 사람 착한 사람 다 불구덩이에 들어갑니다.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반발하겠지요. 아니라고. 착한 사람 있을 수 있다고 하죠. 그때 로마서 3장에서 사도바울이 한 이야기를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악한 사람을 더 악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거예요. 물론 율법이 착한데 죄를 더 짓게 한다는 것이 아니고 본래 잠복 되어 있던 악함의 경향성을 더 들추어낸다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무증상자가 확진자가 되는 거죠. 증상이 없다고 여겼는데 푹 치고 들어오니까, 선거에 지니까 뭔가 확 올라오죠. 분명히 내가 평소에 어떤 관심사가 있다는 것은 이미 자기도 모르게 자기 나름대로 영역을 따로 구축한 거예요. 동그라미를 쳤다고 보면 돼요. 바운더리(boundary)를 친 거죠. 여기는 내 영역인데 내 허락 없이는 아무도 들어오지 마.

자기 영역들을 구축하고 그 영역에서 빼꼼히 창문을 열고 바라보면서 ‘저 사람은 착한 사람, 저 사람은 악한 사람’이라고 이렇게 판정을 내립니다. 그 판정을 내리는 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본인이죠. 본인의 판정은 이유도 없이 무조건 옳으니까 그렇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구약성경에서의 인간이 보여주는 한계입니다.

그런데 그 한계는 구약성경 여러 군데에서 그 한계점이 문제가 있고 이게 이동하고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여러 군데에서 이야기하지만 제가 두 군데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것이 뭐냐 하면 인간이 생각하기를 ‘여기서 여기까지는 악한 거고 여기서 여기까지는 선한 것이다’라는 선악과의 기준에 의해서 경계선을 쳐놨는데 그 경계선이 자기 딴에 그대로 멈춰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오산이었습니다. 자기의 경계선이 있는데 경계선이 이동해 버리면 본인이 나는 옳다고 여겼는데 어느새 내가 악함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경계선 이동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밝혀지는 거예요. 사사기 19장에 보면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에브라임 산지에 레위 사람의 첩이 있는데 첩이 행음해서 자기 본가로 갔어요. 처가로 간 거죠. 처가는 베들레헴에 있고.

거기서 넉 달간 있는데 남편이 자기 아내 찾으러 왔죠. 그다음 이야기에서 성경은 왜 이것을 이렇게 길게 이야기했는지 의아해 대목이 나옵니다. 그것은 그 장인어른이 자기 딸 사위가 찾아와서 도로 기브아로 데려가겠다는 사위를 붙들고 3일만 있다가 가라고 하고 있으니까 또 하루만 더 있다가 가라고 하고 있으니까 또 하루만 더 있다가 가라고 그렇게 5일을 머무르게 했어요. 이미 딸이 넉 달이나 있었는데.

장인은 마음을 달랜다고 3일, 하루 더, 또 하루 더 계속하면서 5일째까지 붙들었어요. 붙드는데 이 붙드는 이야기가 왜 나오느냐 하면 그 장인어른의 입장에서는 이게 뭐냐 하면 본인 생각에 지금 떠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여기고 사위를 붙드는 겁니다. 그런데 사위는 너무 오래 있었다고 떠나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그 당시나 요즘도 그렇지만 사람이 자신의 행동이 옳았다는 것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자기 과거의 체험과 경험한 데서 누적된 전통적인 가치관과 인생관에 의해서 지금 행동은 자기는 그다지 하자가 없다고 여기는 겁니다. 반면에 저쪽 상대방도 본인이 평생 살아온 그 가치관에 의해서 자기는 하자 없다고 하면서 떠나겠다는 거예요.

결국은 이 사위가 떠나고 난 뒤에 하필 아다리가 맞기를 5일째 될 때 있었으면 될 걸 괜히 떠나서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왜 이런 이야기를 할까요? 안타깝다는 거예요. 5일째 붙들 때 그냥 있지 그때 타이밍에 갔기 때문에 나중에 가다가 불량배 만나서 딸이 아주 비참하게 죽죠. 지나고 보면 ‘그때 좀 하루 있을걸’하는 생각이 들죠.

이걸 가지고 제가 수요일에 언급했습니다. 인간의 하는 모든 목적은 상위 목적의 하위 구조라고요. 인간이 하는 것은 나름대로 목적이 있어요. 계획이 있는데 그 모든 계획과 목적은 상위에 높은 데 있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그런 작은 목적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것을 위에 있는 목적은 큰 이야기라고 했고 아래 있는 자기 나름의 목적을 작은 이야기라고 했죠.

우리는 어디에 꽂혀있느냐 하면 작은 이야기만 꽂혀있어요. 나의 이야기만. 그런데 작은 자기 이야기에 관심이 있으니까 큰 이야기는 관심이 없어요. 그러면 작은 이야기는 도대체 왜 그렇게 작은 이야기에 고집부리느냐 하면 그 안에 자기의 역사적인 가치관이 있단 말이죠. 그 가치관은 무엇을 낳느냐 하면 ‘나는 정당하다. 나는 옳게 행동하고 있다’라는 것을 우악스럽게 고집하고 있는 겁니다.

이 사사기에서 하루 지나고 보내면 아무 일 없었을 것 가지고 타이밍이 당하는 타이밍이 되었다고 한다면 이 비슷한 이야기가 요나 4장에 나옵니다. 요나 4장 6~8절에 보면 요나가 하나님 지시를 받아서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데 그 말씀이 딴 것이 아니고 40일 지나면 너희들 망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망한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자기는 팔짱 끼고 그들이 멸망하는 멋들어진 하이라이트를 보기 위해서 산에 올라갔는데 이상하게 그 멸망 날짜가 지났는데 멸망을 안 하는 거예요. 여기서 요나가 삐졌습니다. 요나가 삐졌다는 말은 요나 자신의 결정과 판단은 옳다고 여긴 거죠. 그 옳다는 것이 뭐냐 하면 자기 경계선이 따로 있고 그 경계선에서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있으니까 이것만큼은 누가 뭐래도 자기는 옳은 판정을 받고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지시대로 했기 때문에 나는 문제 없다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분명히 멸망한다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 멸망을 안 했어요. 그래서 삐져가지고 ‘이럴 것 같으면 내가 죽을랍니다’라고 자살하려고 요나가 소위 말하는 땡깡을 부리는 거죠. ‘나 이럴 것 같으면 하나님과 일 못 합니다’라고 나선 거예요.

그런데 그때 마침 햇볕은 쨍쨍한데 6절에 보면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게 하셨으니”라고 나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하나님이 옳은가 내가 옳은가를 따지며 하나님에게 문제가 있다는 그쪽으로 자기 딴에는 큰 그림이라고 큰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사소한 박넝쿨이 와서 자기의 따가운 햇빛을 가리고 그늘지게 해주었습니다.

그늘지니까 굉장히 시원하거든요. 시원하니까 이건 뭐 내가 하는 일이 너무 옳기 때문에 하나님이 당연히 보호조치를 해준 것이라고 좋아했는데 하나님이 박넝쿨 준비해서 그늘지게 하다가 그늘이 이동해버렸어요. 벌레를 준비해서 박넝쿨을 먹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요나가 다시 뜨거워졌어요. 이제는 뜨거워서 죽겠다고 자살하려고 8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아주 사소한 박넝쿨, 이 박넝쿨 이야기가 작은 이야기가 아니고 오히려 사소한 것이 큰 이야기라는 사실을 본인은 왜 몰랐을까요. 요나는 왜 몰랐을까요.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은 정당하다. 나는 하자 없기에 지금도 목숨 부지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잘못이 없기에 생명은 이어지는 것이다’라고 그렇게 본 거예요. 그러나 내가 갖고있는 어떤 재산이나 목숨은 결코 하나님의 열매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생각하는 하나님이 찾고자 하는 열매는 우리 자신이 산다는 것을 오히려 이상하게 여겨야 하는 그 마음가짐, 욕심 없는 마음이에요.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거든요. 뭔가 보호해 주니까 자기가 잘나서 보호해 주는 줄 알고 살려주니까 자기가 잘나서 살려주는 줄 알고 있습니다. 바로 이 사실은 오늘 본문에서 욥도 모르고 여기 빌닷은 물론 몰라요. 서로 지금 옳다고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중입니다. 욥기 오늘 본문 8장 22절을 한 번 봅시다. 보면 빌닷이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렇게 이야기해요.

“너를 미워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입을 것이라 악인의 장막은 없어지리라”라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은 악한 자는 하나님께서 결국 어떤 조치를 하느냐 하면 그의 처소 장막 줄을, 그의 처소를, 그의 거처를 없애버리는 것으로 하나님이 현재 살아있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신다는 겁니다. 살아있다는 것을 하나님이 스스로 증명한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뭔가 행동할 때는 악한 자에게는 벌을 제대로 내리고 선한 자에게는 제대로 복을 주시면서 하나님이 제대로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빌닷이 이야기합니다. 이게 빌닷 본인 이야기 아닐까요? 빌닷이 선악과를 따먹어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렇게 주장하는 본인은 하자 없다고 그렇게 우기고 싶어서 그런 이야기를 지금 고난 받고있는 욥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제가 보기엔 그렇게 보입니다.

빌닷은 자기는 거처가 있고 지금 욥은 형편없이 되었기 때문에 내가 너보다 낫다는 것을 우기는데 그냥 우기면 안 되니까 하나님의 선인과 악인에 대한 조치를 가지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해답이 제시되어야 하는데요. 그러면 해답은 어디서 나왔는가. 늘 욥 설교할 때 해답은 어디서 준비되었는가 하면 바로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준비되어 있습니다.

욥과 빌닷은 이방 민족이에요. 그 당시 이방 민족. 이방 민족에게는 문제점만 제시하고 해답은 없어요. 하나님의 언약이 없단 말이죠.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타고 하나님이 내려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언약만 주고 나 몰라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던져 놓고 던져진 언약의 성취 자가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 본인이 성취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언약을 내어 주신 거예요.

언약에 대해서 하나님이 지키려고 하면 손을 쳐버리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가 말씀 지키려고 하면 우리 손을 때리는 거예요. 여러분이 신앙생활 평생 했다면 이점을 잊지 말아야 해요. 하나님의 일은 반드시 어떻게 나타나느냐. ‘제가 하지 않았습니다’라는 식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제가 하지 않았다는 말은 제가 여기 있을 이유가 없는데 말씀은 하나님이 직접 이루었다는 것을 증거 하고 입증하기 위해서 제가 아직도 여기 살아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가 살아있는 거예요. 신종 코로나가 사람보고 덤비지 않거든요. 신종 코로나 주신 분이 하나님이라면 하나님께서 착한 사람 나쁜 사람 가려가면서 나쁜 사람은 걸리고 착한 사람은 안 걸리라는 식으로 신종 코로나 오지 않습니다. 신종 코로나는 껍데기예요. 안에 RNA만 들어있고 아무것도 없어요. 신종 코로나 보고 ‘이놈’이라고 한다고 놀라고 그런 거 없어요.

그냥 기계입니다. 기계. 단백질 덩어리이고 하나의 기계예요. 에너지장이 그냥 움직이는 거예요. 그것은 하나님이 기계를 다루신다는 거고 인간은 손 못 대고 하나님이 다루십니다. 그러면 바이러스가 기계라면 우리도 기계란 말이죠. 중요한 것은 어느 기계의 만남에서 주께서 친히 이런 일을 벌이고 신종 코로나 주셨다는 주님이 의도적으로 하셨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걸릴 수도 있고 안 걸릴 수도 있어요.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안 걸렸다고 해서 착하다고 여기시면 안 됩니다. 물론 그런 사람은 우리 중에 아무도 없겠지만. 속으로는 그렇게 여겨도.

해답은 이스라엘에 있습니다. 시편에 69편 24~26절에 보면 저주 시라고 해서 저주를 하는데 “주의 분노를 그들의 위에 부으시며 주의 맹렬하신 노가 그들에게 미치게 하소서 그들의 거처가 황폐하게 하시며 그들의 장막에 사는 자가 없게 하소서 대저 저희가 주의 치신 자를 핍박하며 주께서 상케 하신 자의 슬픔을 말하였사오니”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악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을 위배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영원히 함께하시지 않을 요량이라는 것을 시편에서 또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또는 언약 속에서 보여주시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하나님이 친히 하심에 대해서 아무 감각이 없는 사람과 하나님은 같이 할 의사가 없다는 말씀이십니다.

그러면 그것을 시편에서는 구체적으로 다윗에게 일어난 행위, 다윗이 보여주고 있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저거는 다윗이 문제 있어서 그렇다고 여기는 사울왕 쪽은 저주받는 거예요. 그에 반해서 “하나님의 계시는 지금 나타났다. 누구를 통해서? 다윗을 통해서”라는 이것이 바로 다윗 언약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지면 모세를 통해서 나타나면 모세 언약, 노아를 통해서 나타나면 노아 언약, 그러니까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지 자꾸 찾아보지 마세요. 노아를 보면 되고 모세 때는 모세를 보면 되고 아브라함 때는 아브라함 보면 되고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하나님께서 복이 있다 하고 아브라함을 무시하는 자는 저주를 내리겠다 하십니다.

그게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구체화 된 인물을 보내줘서 그 인물에 대해서 내가 어떤 관계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시편에 있어서 하나님의 처소, 거처는 뭐냐 하면 다윗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이스라엘 내에서 모르는 사람 같으면 비록 이스라엘이라도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어떻게 되는가. 다윗의 언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영원한 거처를 주시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어요. 다윗에게 시편을 통해서.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늘에 있는 시온 산이라고 해요.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 지상의 예루살렘 아닙니다.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 지상의 예루살렘은 모형입니다. 제가 가본 예루살렘은 모형이에요.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따로 있습니다. 지상에 있는 예루살렘이 붕 떴다고 보면 돼요. 떴을 때 세상으로부터 버림받는 예루살렘이 되면서 완성된 예루살렘으로 붕 뜨는 겁니다. 따라서 그 순서가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걸 모르고 지상에 있는 예루살렘이 영원한 하나님의 처소라고 아직도 공간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골로새서에서 보면 골로새서나 빌립보서에 보면 땅에 있는 것은 우리의 고향이 아니고 우리의 시민권은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고 우리의 생명도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다고 했습니다. 땅에서 신종 코로나에 의해서 죽는 자에 포함되더라도 그 사람의 생명은 요지부동 변함이 없어요. 왜? 우리의 생명은 신종 코로나가 침범하지 못하는 장소에 고이고이 이미 거기에 도달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의 뼈가루가 하늘나라 그 안에 안치되어 있어요. 물론 공동묘지는 아니지만. 그러니까 ‘안심하소서’라는 말이에요. 하늘나라에 이미 생명 있기 때문에 지상에서 어떤 수치나 수모를 당하더라도 거기에 그다지 신경 쓸 필요가 없단 말이죠.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걸 몰랐어요. 예레미야애가 2장 20절에 보면 “여호와여 감찰하소서 뉘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 여인들이 어찌 자기 열매 곧 손에 받든 아이를 먹으오며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어찌 주의 성소에서 살육을 당하오리이까”라고 되어 있어요.

예루살렘 성전이 유일한 성전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는데 어떻게 바벨론 집단이 와서 완전히 어린 방금 난 어린아이까지 다 죽여버리고 살육하니까 믿는 구석은 예루살렘에 성전 하나 붙들고 있었는데 이게 완전히 다 불바다 된 거예요. 그래서 예레미야가 슬퍼하면서 이거 작살나면 안 된다고 한 거예요.

아무리 다윗이 우리 시온 처소가 하늘에 있다고 해도 그 당시 사람들이 계속해서 믿는 구석은 역사적으로 어떤 특정 지역 공간에 있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마치 큰 교회 지으려고 거기에 돈을 많이 투자했는데 그 교회가 만약에 누전되어서 불이 났다면 “아이고, 우리교회 다 탔네”라고 하는데 그 우리 교회가 여기 대구 지묘동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저 위에 우리교회가 있어요. 지상의 교회는 불타도 괜찮아요. 물론 보험 들어놓으면 괜찮겠지만.

구원과 아무 상관 없습니다. 그런 느긋함이 있어야 해요. 이런 이야기 하면 돈 몇 푼 내지도 않은 사람은 신이 났어요. 그런데 3대 4대째 믿는 가정이 되어서 나에게 돌아올 유산을 아버지가 교회 부흥사에게 속아서 예배당에 다 받쳐놔 버리면 그 예배당 하나 뭐 어떻게 되면 난리도 아니에요. ‘우리 아버지 돈 바친 곳, 우리 아버지 돈 바친 곳...’

참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가 우리교회 소속 건물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경찰관이 감시도 안 해요. ‘보나 마나 한 세 명 띄엄띄엄 앉아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대구 시내 자기 건물 있는 예배당은 전부 다 경찰관 파견해서 감시하고 있고. 서울도 마찬가지고요. 어디에서는 대구에 20군 데가 예배당 문을 열었다는 거예요. 그 말이 뭔 뜻이냐 하면 자기 건물 없는 교회는 교회도 아니라는 거죠. 참, 주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진짜 이 사고방식이 그러니까 성전이 있어야 하나님이 있다는 그거, 성전은 눈에 보이니까 진짜 우리만큼은 택한 백성이라고 여겼던 그들에게 예수님이 딱 오셨는데 마태복음 8장 20절에 보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빌닷의 기준에 의하면 예수님은 뭐가 되겠습니까? 악한 사람 중에 악한 사람. 왜? 자기가 예언했잖아요. 악한 사람은 장막이 뽑힌다고. 이 세상에 거처가 없다고. 그 거처가 없다는 빌닷의 말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께서는 거처가 없이 와버렸어요.

그만큼 인간들은 자기의 거처가 있음 자체를 하나님이 아직도 나를 귀하게 본다는 증거로 자기에게 일방적으로 써먹는 거예요. 내가 거처가 있고 넓은 아파트가 있으니 하나님이 날 버리지 않았다고 여기는 겁니다. 내가 보기엔 미신이에요. 미신이 다른 게 아니고 이런 게 미신입니다.

빌닷이 이렇게 나오니까 욥 입장에서는 같잖지도 않거든요. 지가 좀 산다고 못사는 사람을 그런 식으로 정신적으로 압박을 가한단 말이죠. 그 뒤에 9장부터 나오는 욥의 태도는 뭐냐 하면 탁자에 500원을 미리 두는 거예요. 이게 뭔 뜻이냐 하면 빌닷이 “궁금해? 궁금하면 500!”이라고 하잖아요. 욥이 “그래” 하면서 500원을 미리 탁자에 놔버리는 겁니다.

이 말은 네가 궁금하다고 여기는 거 내가 정답으로 먼저 여기 있다. ‘나’라는 정답에 네가 합당한 질문들을 이 정답과 매치 되도록 할 수 있는지 그걸 보겠다는 겁니다. 여기서 빌닷이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은 빌닷의 이러한 주장은 오늘날 이 세상 인간들이 머릿속에서 끄집어내는 모든 주장들이 얼마나 엉터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는가. 결론은 예수님에게서 찾을 수 있어요.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시고 소경을 눈뜨게 하시고 창기를 구원하고 세리를 구원하고 그렇게 하셨지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이것이 그렇게 당한 본인들에게 이게 자랑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수치가 되겠습니까?

예수님이 유대 지방에 다니고 갈릴리 지방에 다니면서 하신 모든 일이 그렇게 티 내고 대중 앞에서 내가 이렇게 용서받고 구원받았다는 티를 내고 싶겠어요, 아니면 그냥 이 아픔 그대로 숨기고 평생을 그냥 소리 없이 사라지고 싶겠습니까? 인간은 숨는 게 주특기라 했죠?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주님 앞에 용서받기를 원했겠습니까? 아니면 간음하다가 조용하게 안 들키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인간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께서 너무 주제넘는 행동을 하신 거예요. 세리와 창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인간 본인이 원하지 않아요. 인간은 자기에게 수치스럽다 싶으면 그걸 감추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주님은 주의 일을 하면서 그걸 폭로시켜 버립니다. 귀신을 쫓아내면서 “봐라, 저 사람이 옛날에 귀신들린 자야”라는 말씀이 그렇게 당사자에게 기분 좋은 말일까요? “쉿!쉿! 주님, 이야기하지 말라니까요”

“봐라, 이 사람 옛날에 소경이었어” “쉿! 주님, 소경이었던 거 이야기하지 말라니까요” “옛날에 이 사람 부도난 사람이야” “아니, 그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설교시간에 왜 하십니까?” 주님 앞에 들켜서 주님 앞에 걸려들어서 주님으로부터 구원을 받고 용서받았다는 것은 인간은 더 이상 내 수치는 내가 가린다는 개인적인 의욕은 전부다 거덜 났다는 뜻이에요.

자기의 모든 계획은 다 작살났다는 뜻입니다. 이건 내가 구원받고 용서받았다가 아니라 ‘나’라는 영역 자체가 완전히 파괴된 거예요. 요나에게 박넝쿨 주고, 그게 얼마나 의도적입니까, 박넝쿨을 시들게 함으로써 요나의 입장은 하나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를 드러내면 그걸로 끝나는 문제예요. 그걸로 끝나는 문제예요.

이걸 어떤 인간이 자진해서 ‘주여, 저를 사용해 주세요’라고 할 수 있어요. 아무도 그럴 용기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은 숨어 들어가기를 원해요. 숨어 들어가서 안 들켰으면 좋겠어요. 나라는 존재가 있는지 없는지 안 나타나면 좋겠어요.

주님께서 과부를 찾아가고 문둥병자를 찾아가는 것은 문둥병자의 사적인 욕구를 달성함이 아니고 도리어 그 사람의 평소 행동 ‘조용하게 지내면 나는 착한 사람 된다. 그저 착한 사람일 거야. 아마 분명히 그럴 거야’라는 것을 오히려 드러내서 “이 사람은 문둥병 걸릴만한 그 정도로 악한 사람이야. 하지만 나는 저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었다”라는 예수님 본인의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기 위해서 자기 백성이 숨어있지 못하게 해버렸어요.

노출되게 만들었다고요. 그러니까 막상 당사자는 당황스럽지요. 주님의 일에 자신이 연결된다는 것이 굉장히 당황스럽지요. 인간은 당황스럽기 때문에 선뜻 나서서 주의 일을 안 하려고 하는데 안 하려고 하는 그 자체가 뭐냐 하면 바로 내가 선악 적인 판단으로 이 정도 하면 괜찮다 싶어서 ‘제발 주님 저를 가만히 놔두세요’라는 본인이 본인의 생각을 고수하려는 그런 의도가 강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노래 보면 이런 거 있죠. 모든 인간은 세월 따라 다 지나가지만 그래도 남는 게 있다면 정동길 언덕 밑에 조그만 예배당 하나. 정동길이라고 예전에 MBC 있던 장소예요. 이문세가 부른 ‘광화문 연가’에 나오는 노래예요. 세월 따라 다 지나가지만 나도 지나가는 거 좋은데 남는 거 하나 있으면 좋겠다. 눈 덮인 조그만 예배당. 나는 그거 하나 있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 왜? 세상은 원래 그렇게 허무하고 사라지니까. 작사한 사람이 이런 뜻으로 한 것이 아닐까 싶어요.

주님을 그대로 적용해 보면 우리는 그대로 사라져도 괜찮아요. 그러나 그냥 눈 덮인 예배당 남아 있으면 안 되고요, 예수그리스도가 나를 이렇게 사용했다는 흔적은 영원히 남아 있어야 합니다. 욥은 그걸 모르고 있어요. 아직도. ‘네가 잘났나 내가 잘났나’하는 아직 그 관계에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 모습을 구약 때부터 욥과 빌닷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그런 사실이라고 받아들이면 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숨어 기어들어 갈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정말 뽑혀 나왔을 때는 내 자존심 높이고 내 자랑하고 싶은 거 자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추고 싶은 것을 노출 시켜서 주의 살아계심을 증거 하라고 저희들 택하여 주신 줄 믿습니다. 욥처럼 어떤 고통이 있다 할지라도 주님만 생각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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