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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종말 (마 23장 37- 39절) 대전-90강
이근호
2017년 7월 25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23:37- 39
(마 23: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마 23:38)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바 되리라
(마 23:39)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두 번째 시간은 마태복음 23장 37절부터 합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이렇게 되어 있지요. 그 뒤에는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이렇게 되어 있는데 그러면 선지자가 뭐냐 하는 거에요. 이번 수련회 때도 선지자에 대해 집중적으로 말 할 거에요.
선지자라는 것이 원래 인간 무리에선 없어요. 인간은 아까도 얘기 했지만 아담의 자손이기 때문에 거기서 거기입니다. 도토리 키 재기에요. 잘났다 못났다 하지 마세요. 똑같은 한 조상에게 그 품성을 물려받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나는 공부를 많이 해서 너희와는 다르다던지라는 소리를 하면 안 됩니다. 인간은 공부를 해도 육적인 요소는 그대로 있기 때문에 공부 많이 한 나름대로 거기서 시기 질투가 나오고 못 배우면 못 배운 데로 시기 질투가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인간에게는 개과천선 할 어떤 여지도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면 선지자 중에 예를 들면 사사기에 나오는 기드온 같은 사람은 본인이 성신 받으려고 애쓴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누가 애썼느냐하면 안 된다는 것을 자꾸 억지를 부리면서 하나님께서 하라~ 하라! 는 거에요. 그런데 기드온은 자꾸 빼는 겁니다. (삿 6:37-40) 그러면 양털 (한 뭉치)을 (타작 마당)에 둘테니 거기에만 이슬이 있게 하고 주변 땅은 마르게 되면 말씀 하신대로 될 줄 알겠다고 하고
그대로 되니 다시 반대로 양털만 마르고 주변 땅에는 이슬이 있게 해달라고 하니 그대로 되는 일이 있었는데 왜 그렇게 하냐 하면 그렇게 되어줘야 선지자가 하는 것에 대해 무슨 이야기가 나오게 되냐 하면“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가 나와야 되요. 이것이 왜 중요하냐 하면 인간은 인간만 바라보게 되어 있어요.
인간이 인간을 바라보면서 나온 것을‘사회’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질서’어려운 말로 하면‘문화 질서’라고 합니다. 문화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면 자연에서 나와요. 자연은 뭐냐 하면 무질서에요. 무질서에서 인간들이 지혜를 모아 버리면 질서가 생겨 버리고 질서가 하나의 보이지 않는 덩어리가 되어 버리면 이것이 사회가 되고 아까 이야기 한 것처럼 사회는 인간들이 요청하는 데로 신과 자신들 사이에 뭐를 만든다? 왕(王)이 되겠지요.
그렇게 되면 선지자가 필요가 없게 되요. 왜? 선지자는 필요 없고 왕이 제사장이 되면 됩니다. 제사장은 신에게 제사를 드림으로서 어디까지 내다 보냐 하면 미래의 궁금증까지 보장을 해주는 겁니다. 아까 했던 것을 한 번 더 반복해 볼께요.
1. 신체보호 : 어버이 같은 마음으로 (가족 친화적) 가족=육(남자+여자) 왕 2. 행복충족 (욕망의 충족)
왕은 신체를 보호해 줘야 되요. 어버이라는 말은 뭐냐하면 기족 친화적이다는 말이에요. 주일 낮 설교에서도 했는데 그럼 가족은 어디서 나오느냐 육에서 나왔어요. 육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있어요. 남자의 욕구는 자연을 개발하는 거에요. 개발해서 밥 먹고 살 수 있도록 개척하고 개발하는 역할을 하고 여자는 최고로 추구하는 것이‘짝’입니다. 남자는 생존을 추구하고 여자는 생존을 추구하는 남자를 자기와 세트로 여겨 집착하고.
왜냐하면 원래 남자가 먼저 만들어 졌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 교회에 장로님 손자가 있는데 (다른)교회에서 뭔가 예리한 질문을 해서 목사와 전도사 등을 곤욕스럽게 하는데 그 아이가 설교 시간에 질문하는 것이 뭐냐하면 남자와 여자를 왜 만들어 놓았습니까? 그게 질문이에요. 아무도 그 아이가 만족하는 답변을 못해주는 거에요. 답변을 못 들으면 울어 버려요. 그래서 우리 교회로 데려 오라고 했어요. 제가.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이유는 그 관계 때문이에요. 왜냐하면 두 사람인데 하나가 되는 이것을 가지고‘사랑’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실 때 사랑이라고 하실 때 그 사랑은 반드시 둘이 있을 때 성립이 되요. 둘이 먼저 선행되어 있고 둘 인데 하나가 되면서 거기에 개입된 것이 사랑입니다.
죄인이 있다면 주님은 홀로 의인이잖아요. 둘이잖아요. 그런데 죄인은 백날 가야 죄인이거든요. 인간은 어떤 인간을 만나도 서로 다른 몸이기 때문에 절대로 동질성이 안 됩니다. 부부는 한 몸이라고요? 30~40년 살아봐야 소용없습니다. 삐끗하면 30~40년 살았는데 갈라섰다. 이렇게 나오지요. 한 마음 된 적도 없고 하나인 적이 없어요. 남편이 아내에게 푹 빠지면 이쯤 되면 저 여자는 내가 뭘 해도 나를 신뢰할 거야!라고 생각하는 데 그건 착각이에요.
새로운 사태가 일어나면 예상 못했던 성깔 튀어 나오고 그건 수습하기 힘들어요. 수습이 안된다니까요. 영원히 하나가 아님을 증거 하기 위해 부부가 되게 한거에요. 믿을 걸 믿으라는 말이지요. 여자는 남자를 집착하기 때문에 달려들어요. 그런데 남자는 여자를 소유하기를 원하거든요. 그럴 때 여자는 조금 빼는 느낌이 있어요. 빼야 값이 오른다고 빼는데, 어느 날 여자가 남자에게 너무 빼서 다른 여자 쳐다보면 안 되는데,
그 때 여자가 두 번 뺀다고 그냥 넘어가면 안 되잖아요. 확 달려들어요. 달려들면 남자는 자기의 소원대로 여자를 차지했다고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겁나요. 뭐냐하면 거머리가 있지요. 거머리 내지는 새퍼트, 물면 안 놔요. 남자가 기겁을 하는 순간이 어떤 순간이냐하면 아내가 남편을 사랑할 때 모든 남편들은 공포심을 느낍니다. “뭐지 저거? 나를 잡아먹을 기세로 저거 뭐지?”갑자기 안 하던 화장을 하면 “큰일 났다! 도망가야 되나?”하지요.
남편들의 어떤 보람 같은 거가 뭐냐하면 아내의 입에서 나 친청 갔다가 일주일 있다가 올꺼다 그거에요. 그게 낙이에요.“대한 독립 만세”(자유~) 제발 푹 쉬다 온나~ 남녀가 이렇게 됨으로서 삐그덕 거리죠. 하나는 집착하고 다른 하나는 도망치고 여자들은 혹시 자기 남자가 다른 여가를 볼까봐 병적으로 집착하지요. 여자들에겐 기본적으로 다 있는데 아닌 것처럼 꾹꾹 누르고 들 있어요.
그러면 남자는 뭘 하냐하면 여자와 관계없이 명분인데 자기 절대성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신이다는 말이야! 알아줘!”이거거든요. 남자는 과시욕 빼면 남자가 아닙니다. 허풍과 허세, 잘난 척, 그러면 여자는 그 잘난 척 하는 너는 내꺼야! 이러고 여자는 남자만 바라보고 있고 남자는 여자는 안보고 세상 사람들아~날 알아줘! 그러니 부부가 하나가 될 수 있겠어요. 바라보는 방향이 다르니까 볼 수 있겠어요? 삐걱거림이지요.
그 삐걱거림이 하나의 질서와 문화를 유발합니다. 따라서 그러한 인간의 육적인 것에 대해서 이러한 성향이 결국 자기 자신의 육을 보전해야 돼요. 가족의 보전이고 이렇게 남녀가 문제인데 서로의 불화를 일시에 해결하는 결정적 사태가 바로 자식 생산이에요. 자식이 생기거든요. 자식이 둘이 결혼 전에는 있었어요? 없었어요? 없었지요. 없었으니까 자식은 없는 존재에요.
남녀가 결혼해서 있음인데 사이에 없는 존재가 끼어들어요. 애가 어느 정도 크면 아빠 엄마 침대에서 자면 자기 방에서 안 자고 어디에 끼어듭니까? 그 중간에 끼어들잖아요.“난 아빠, 엄마하고 자는 게 좋아!”하고 끼어들지요. 나이 많이 들어서도 끼어들어요. 끼어들면 남녀의 관계에서 어디를 경유하냐 하면 자식을 통해서 아내에게 가고 자식을 통해서 남편에게 가는 겁니다.
여자는 나에게 잘해라가 아니고 이제는 내가 넣은 자식에게 조금이라도 해가 되면 남편이라도 그냥 용서하지 않으리 이렇게 되요. 이혼도 자식이 상처 입을까봐 못하는 거에요. 참는 거에요. 자식이 자기를 대신해 버려요. 남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자식이 둘 사이를 이어버립니다. 그래서 자식을 통해서 부모는 존재를 재정립 하지요. 이것을 가지고 경상도 말로 하면 시근 났다, 철들었다.
부부가 자식을 낳아봐야 진짜 부모가 되지 대체로 자식을 통해서 남자는 “에잇! 때려치워!”를 안 하고 참아야 되느니라~ 자슥이 셋이나 되니! 예~ 과장님!하고 참는 거에요. 왜? 자씩을 위해서 여기서 희생적인 사랑이 되는 겁니다. 관계를 통해서 그러니까 육적인 생존 관계 속에서 어떤 암호 같은 것이 있어요. 하나님이 숨겨 놓은 암호가 있는 거에요.
제가 가족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만은 여러분 중에 우리 부부는 티격태격 합니다라고 제게 말을 하게 되면 티격태격 하도록 만드신 분이 누구 십니까? 묻지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위해서 부부 싸움 하도록 하게 하신 거에요. 그러면 성도가 되면 전에는 자식을 경유 했던 것들이 성령을 받으면 십자가 복음을 통해서 부부 관계를 다시 보게 되는 겁니다.
내가 욕심이 많았구나! 내가 이 가정을 소유화 시키려고 했구나! 이런 것들이 내 힘으로 안 깨어지는 것을 주께서 깨기 위해서“네가 달라져야 돼! 네가 정신 차려야 돼!”우리에게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긴다는 것은 고칠 게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겁니다. 고칠 게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힌트로 주는 거에요. 그리고 그런 것을 깨우치게 되고 뒤돌아보면 이렇게 티격태격 한 것 까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아하! 하나님이 스스로의 뜻과 말씀의 진리를 위해서 싸워야 하는 방식을 우리 가정에게 채택하셨구나!” 이렇게 되면 주도권이 누구에게 돌아가요? 주님에게 돌아가지요.
이제 종말론 이야기 해 봅시다. 종말론이란 것이 누구를 위한 종말론입니까? 지금 모든 종교는 자신이 불멸의 존재가 되기 위한 욕망 때문에 종교도 만들고 거기에 리스트엔 반드시 들어가는 것이 종말론이 들어가요. 어느 종교치고 종말론 없는 게 없어요. 끝까지“나는 좋은 데로 가겠습니까? 보살님~ 나중에 저는 우에 되겠습니까?”그러면 그 교주는 선지자가 되는 거지요. “예~ 비록 지금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다단계 회사에서 하는 이야기, 다단계 회사에 가면 붙어 있어요.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지금은 정수기 2개 파나 나중엔 10개 팔 것이다. 지금은 비트 코인 16게 파나 나중엔 100개 팔 것이다. (비트코인은 인터넷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가상 화폐로 지폐나 동전과 달리 물리적인 형태가 없는 온라인 디지털 통화다.)
종말론을 거론한다는 자체가 당신들의 종교적인 욕구를 우리가 채워 줄 테니 뭐를 내라? 돈만 내라! 이거에요. 결국 모든 종교도 마지막은 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라고 되어 있잖아요. 교회든 기업이든 간에 나를 유일하게 이끄는 것은 돈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4장에서 사단이 예수님을 유혹하는 것도 그거잖아요.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게 아니고 하나님 말씀으로 (신 8:3)
내가 주의 뜻으로 집도 잘 짓게 되었고 이렇게 잘 살게 되었습니다라고 할 때 말로는 주의 뜻으로라고 해놓고 실제로는 그 자체로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왜? 내가 갖고 싶은 소유를 다 집어넣었기 때문에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해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 자체를 목적으로 두기를 원하시는데 내가 갖고 싶은 소유에 하나님께 들이대고 연결시키는 거에요.
종말론의 주인공이 누구냐 하면 본인이에요. 난 이렇게 해서 살아남는데 성공했다. 결국 종말론을 언급하는 것은 여러분 중에 그런 야심을 갖고 있지요? 그것을 채워 드리겠습니다. 성경 구절, 요한계시록 다 가져와! 신천지처럼 다 가져와 가지고 요거대로 행하면 시키는 대로 요거 주의하고 바코드나 칩 받지 마시고 이런 거 주의하시면 여러분은 무사히 살아남는데 성공 할 것입니다. 그렇게 이야기해요.
그리고 여러분들은 마지막 3년 반, 3년 반 지날 때 3차 대전이 일어나는데 이란과 이스라엘에서, 그때는 핵전쟁으로 멸망하는데 그때는 아마겟돈 전쟁인데 중요한 것은 뭐냐하면 벙커를 만들어야 하기에“돈 내세요!”벙커는 혼자서는 안 되니까 우리 집단 전체 우리 교회의 교단 전체에서 돈 내서 벙커를 만들면 이것이 최후의 노아의 방주처럼 된다는 거에요. 생수 사놓고 라면 사재기하고 잘 봐야 되요.
이스라엘 수상이 무슨 발언을 하는지 중동 쪽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얼마 전에 예루살렘에서 팔레스타인에게 테러가 일어난 후 그랬잖아요. 못 들어가게 하니까 그 앞에서 두 명 죽고 하는 그런 걸 보면 그 쪽은 난리에요.“보아라! 드디어 요한 계시록 대로 움직이고 있다. 정신 차려라!”이렇게 나온 다구요. 지나 정신 차리지, 세상에 정신 차려서 구원 받는 건 없어요.
왜? 도적이라는 것은 정신 안 차릴 때 오거든요. 주님은 도적같이 온 다구요. 기름 준비하는 처녀들 이야기, 신랑이 다 잘 때 왔어요. 기다리다 졸려 눈에 성냥개비 끼고 (부릅뜰 때) 오는 것이 아니고 다 같이 졸 새 잠 푹 주무시기 바랍니다. 신랑이 오면 톡톡 깨워줘요. 얼마나 믿음이 없으면 어지로 믿음이 있는 척을 하고자 하겠어요. 그러니까 거기에 맞춰 가짜들이 서비스 해 줄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선지자는 필요 없습니다. 왕이 있으면 되는 겁니다. 왕은 1. 신체의 보호와 2. 욕망의 충족, 욕망의 충족이 뭐냐하면 개인들이 어떤 왕이든 개인은 스스로 자기를 포기 할 의사가 전혀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남이 천국 가는 것은 안 좋아요. 내가 가야 되요. 만약에 교단에서 144,000이라고 하면 남을 제치고 남보다 144,000 안에 좌석 하나 화보하려고 더 헌금하고 봉사 합니다. 신천지는 다 찼다는 거에요. 이젠 돈 많이 내는 사람하고 자리가 바뀌는 지! (웃음)
신천지만 그런 게 아니에요. 신천지도 어디서 배웠겠어요. 한국 교회에서 다 배운 거에요. 돈을 써보니 먹히더라~ 신천지가 거기서 나온 거에요. 이런 전체를 묶어 구원론이라 합니다. ‘나’가 구원론으로 하겠다는 거에요. 여기서 주체가 누구라고요? ‘나’그러나 종말론은 나에 대한 종말론은 없습니다.
왜냐 천지 창조 할 때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를 위해서 만들어 졌기 때문에 되어져 가는 모든 사태나 상황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의 모눈종이처럼 혹은 그물처럼 촘촘히 엮어진 모든 인간관계가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지게 되어 있어요. 모든 것이 예수님 복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나는 스스로 실수했다, 죄를 지었다. 하면 그것은 여러분들이 죄를 짓고 싶어서 지은 게 아니고 그런 현상이 나타나도록 예수님께서 작용케 하신 거에요. 제가 말하는 것이 어렵게 들리는 것이 기본입니다. 얼마나 기본인지 제가 예를 들어보겠어요.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참새를 키우시잖아요. 그러면 참새는 누구의 소유입니까? 주님 것이지요. 그 앞에 6장에 보면 들풀도 나오지요. 들풀도 친히 키우시잖아요. 이것도 주님 것이지요.
그러면 인간을 봅시다. 인간을 누가 기르십니까? 하물며 너희 일까 보냐 했잖아요. 그러면 나라는 인간은 누구의 겁니까? 주님의 것인데 왜 걱정합니까? 지금 논리가 이것이거든요. 마태복음 10장에서, 네 것도 아닌 남의 것 가지고 네가 걱정 한다는 자체가 그런 네가 수상하다는 거에요. 도둑놈이에요. 자기의 것도 아닌 것을 자기가 갖고 있는 거에요. 종말이 오든 불 심판이 오든 내 것도 아닌데.
지옥으로 보내든 주인이 보내겠다는데 내가 왜 걱정합니까? 이것은 수상한 개입이에요. 악마가 중간에 수상한 개입을 하는데 악마가 개입하면 주체 의식을 심어줘요. 왜냐하면 ‘주님은 선악과 따먹는 날엔 정녕 죽으리라’했고 악마는 (따 먹으면)신처럼 되리라고 했으니까 주체 의식을 집어넣으면 갑자기 이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인데 거기에 ‘나’를 집어넣습니다.
나를 집어넣고는 나는 ( )~해서는 안돼! , 나는 (불행)해서는 안돼! 라고 일방적인 의식이 확 감도는 거에요. 나는 불행해서는 안돼! 그러면 인터뷰를 해 봐야 되요. “왜 당신은 불행해서는 안 됩니까?”그 이유를 댄 인간이 없습니다. 아무도 납득이 되는 이유를 대는 사람이 없습니다. 저 쪽은 불행해도 관계없는데 남의 아이는 세월 호에 빠지든 괜찮은데 나의 아이는 안 된다는 거에요.
왜 안 됩니까? H2o가 사람 구분 합니까? 바닷물이“너는 올라 가야돼! 너는 삼켜야 돼고!”바닷물에게 그런 의식이 있습니까? 없지요. 모든 자연은 오직 예수 그리스에게 순종합니다. 심지어 풍랑이 이는 파도도 제자들이 기절할 뻔 했어요. 그들은 바닷물을 그냥 H2o로만 알고 있거든요. 그냥 중립적인 가치로 본거에요. 그냥 바람이 불어서 풍랑이 일어나는 거에요. 그리고 그건 오류가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바다야! 됐다 고만! 고만해라! 그 정도 했으면 잠잠해야지!”그러니까 바다가 “예~”H2o가 예~ 하고 있는 거에요. 제자들이 놀래서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저 분은 누구시기에 (바다도 순종하는가) 이런 질문을 우리가 한다는 자체도 건방진 거에요. 우리는 예수님을 보고 누구십니까라고 질문도 하지 말아야 되요. 모든 질문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시고 그대로 이런 사태가 우리에게 일어 날 거에요.
그래서 성도는 뭘 고쳐야 하냐하면 내가 질문하고 내가 이유를 얻겠다는 그 사고방식을 이건 질문하기 이전에 먼저 이러한 사태의 원인자는 따로 있음을 아는 교체가 되는 방식으로 인생을 살아야 되요. 그래서 결과적으로“나는 아무것도 행하지 않았습니다.”이 말을 두 자로 줄이면‘믿음’이라고 하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도 주체가 누굽니까? 내가 믿으면 이건 행함이지요. 이건 예수 믿어서 지옥 가는 거에요.
내가 예수 믿어서 지옥 가는 것이고 주님이 믿게 하셔서 천국 가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 안에 무슨 싸움이 일어나냐 하면“나는 예수 믿는다!”와 (주님이)믿게 했어!라는 싸움이 아침에 눈만 뜨면 시작되요. 이번에 얘가 100점을 맞아 전교 1등을 해왔습니다. 내가 과외 선생을 두 분을 붙여 줬습니다. 그런 생각이 막 들지요. 왜? 실제니까! 마치 풍랑이 일어서 배가 뒤집힐 뻔 했으니까!
그러면 주님이 그 과외 선생 누가 붙여 줬는데? “제가~ 아니! 아차! 아니구나!”주께서 하필 그 선생님을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주체가 바뀌어요. 이게 뭐냐하면 애가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와 관계없이 주와의 믿음의 관계입니다. 남편에게 복속된 여자 신부인 관계. 그래서 미리 당겨서 경험하는 천국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죽어서 가는 데가 아니라 미리 당겨서 경험 하도록 항상 우리 존재에 틈을 내어 버리지요.
틈이라고 하니까 생각나는데 인간 세상에는 선지자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주체이기 때문에 자기가 알아서 다른 사람과 협력해서 일을 처리해요. 협력의 최종점이 왕 입니다. 왕이라는 말이 어려우면 그냥 지도자라고 합시다. 지도자 없이는 못살아요. 군주라고도 하지요. 이번 수련회에서 하게 될 열왕기 상에도 나옵니다.
거기서 르호보암이 신하들에게 뭐라고 묻냐하면 내가 어떠한 왕이 되면 좋겠느냐고 할 때 (아버지)솔로몬 왕 때 모셨던 늙은 신하들이 뭐라고 하냐하면 백성들의 종이 되면 훌륭한 왕이 되십니다. 그럴 때 왕은 속으로 미쳤나? 하겠지요. 다시 젊은 신하들에게 물으니“이제는 나라가 왕의 소유이니까 옛날 노 신하들은 당신에게 충성 안 합니다. 자꾸 솔로몬을 추억 하면서 그때가 좋았는데 박정희가 좋았는데 하니 조져야 됩니다. 너희들이 추억하는 왕보다 내가 더 센 왕이다라고 해야 됩니다.”
이것이 자애로운 어버이를 원했건만 막상 그들이 지배하게 된 왕은 깡패 같은 왕이지요. 그 이유가 질서 때문에 나라 자체를 소유화시키려하기에 그렇습니다. 백성은 왕을 소유하려고 하고 왕은 백성을 소유하려고 하니 그 갈등이 계속 이어지는 겁니다. 심지어 이런 경우가 국가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부부가 이혼하면서 새로운 엄마나 아빠가 왔다, 그러면 처음엔 잘해줘요. 잘해 주지만 애들 자체가 과거를 잊을 수 없잖아요.
아직 어려서 애먹인다구요. 계부나 계모가 애먹지요. 참는데도 한계가 있잖아요. 한번 줘 팼다, 패다 애가 넘어졌다, 신고 들어 왔다, 감옥 가지요. 처음부터 조지는 게 아니에요. 처음엔 자기들이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요. 아빠가 새엄마를 좋아하고 아빠가 사랑하는 엄마이니까 엄마라고 불러! 이렇게 간병인이라고 부르지 말고 이젠 엄마라고 불러! 이렇게 한다고요. 드라마에서 보면.
결국 종말론도 뭐냐하면 나 구원이라고 하고 그 안에 권력이 있어요. 이 권력에 누구나 갑을의 관계가 형성 될 수밖에 없습니다. 소위 돈 가진 자로 살기 위해서 ~밖에 없어요. 이 권력을 영적으로 보면 악마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하는 마태복음은 구약에서 드러나지 않는 실체, 모든 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되어져 있다는 실체가 신약에 와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고난의 길을 가심으로서 그동안 인간들만의 세계라고 여겼던 세계에서 인간을 배후에서 조정하는 세력이 등장한 거에요.
그런데 그 모양세가 권력자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이것이 다니엘에 보면 느브갓네살 또는 금 신상으로 나타나는데 느브갓네살에게서 네 개의 새끼가 나와요. 짐승들이 나와요. 짐승은 국가를 올라 탄 왕, 어떤 짐승 위에 올라갔을 때가 국가를 하나의 인격체로 대변해 줄 때 그것이 인격화된 악마의 모습이 왕의 모습이에요. 왕은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하고 백성들은 지배를 받습니다.
히브리서 2장 15절에 보면 무조건 지배하고 지배받는 관계 속에서 뭐가 생기냐 하면 죽기를 무서워함이죠. 결정적인 것의 하나는 악마의 지배를 받는 방법은 하나 밖에 없어요. 죽기를 무서워하는 것. 예수님 주변에서 죽기를 무서워하던 사람이 누구냐 하면 12제자들이에요. 12제자의 핵심 인물은 가롯 유다입니다. 그 가롯 유다를 누가 제자로 삼았습니까? 예수님이지요. 이게 놀라운 사실이에요.
예수님은 자신이 잡혀 죽게 하기 위해서 이런 것을‘적폐’라는 용어로 쓰고 또는‘적대’라고도 하는 데 대적이 되는 요소를 의도적으로 그 일을 주도 하시는 분이 일부러 삽입시켜 놓은 거에요. 삽입시켜 놓게 되면 여기의 구성원들이 주인을 자기 소유화시키는데 실패하게 만드는 겁니다. 이런 적폐와 적대가 있게 되면 예수님을 내 구미에 맞는 예수라고 하다가 결국은 뒤로 돌아 갓! 하고 뒤돌아서게 만드시는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의 존재가 복음이 아니고 예수님의 부활이 복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복음이 아니고 창조도 복음이 아니에요. 복음이 아니고 뭐냐하면 사도의 복음은 십자가입니다. 건널래야 건널 수 없는 단절의 계곡을 주신 겁니다. 아무리 너희들이 나를 믿고자 하여도 내가 심어 놓은 악마에 의해서 너희가 죽기를 무서워하기 때문에 베드로는 세 번 씩이나 예수님을 부인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왜 베드로와 12제자들이냐? 우리가 그 베드로의 범주에서 베드로라는 테두리에서 탈출에 성공한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9:13) 제자들이 한 두 번 들은 소리가 아닐 거에요. 하지만 정말 예수님이 말씀하신 죄인이라는 것이 (우리와는 다른데 사람의)악마의 세계에선 죄인이냐 아니냐의 기준은 윤리, 도덕이에요.
제가 지난 낮 설교에서 지나가는 말로 했는데 윤리, 도덕에서 벗어난 사람을 정말 찾고 싶다고 그런데 있어요. 알지만 입을 다물었지요. 제발~윤리와 도덕에서 벗어나서 만약에 내가 이런 짓 하게 되면 이익일까? 손해일까? 생각하지 않는 다른 말로하면 이것이 나에게 행복을 갖다 줄까? 아니면 불행이 온다면 난 안돼! 불행이냐 행복이냐를 논하지 않고 자유의 범위로 사는 사람이 궁금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없는데 되게 하세요. 성령이 오게 되면, 그들이 누구냐 하면 12사도에요. 이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해요. 히브리서 11:38에 보면 협박, 공갈이 통해야 악마도 갖고 노는 재미가 있지요. 다시, 교회는 신과 인간의 대리자가 필요하다. 대리자란 요한 계시록 2장에 용어를 써서 목사들이 하나님의 사자라고 해서 맨 날 왕 짓 하고 있지요. “나한테 대드는 인간은 주님께 대드는 것과 같다”
이건 천주교에서도 교황이나 그런 그런데 그것을 대중들이 원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자신들의 여망이 하나의 정점으로 구현 될 때 심적인 안정감을 얻어요. 대장 하나면 돼요. 원래 1등은 하나이어야 되듯 둘이 되면 골치 아파요. 불안해서 안돼요. 아까 무슨 이야기 했습니까? 베드로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그렇게 자신만만했던 베르도가 내가 목숨까지 버리고 따르겠다고 한 것처럼
이런 교회에서 목사님이 뭐라고 하냐하면 우리가 여기서 만족하지 말고 사도행전에 있듯 하늘나라를 확장해야 된다는 거에요. 이게 지상 명령이라는 거에요. 성경 어디에 그런 게 나옵니까? 교회의 머리가 누구지요? 예수님이지요. 그럼 예수님은 노시는 분입니까? 실제로 활동하시는 분입니까? 주체이니까 활동하시지요. 그럼 주께서 하신 말씀은 누가 이룹니까? 주님이 이루시지요.
그럼 주님이 우리의 게으름이나 마귀의 설침 때문에 “아이고~ 이건 안 되겠네! 나도 안 되는 일이 있네!”이러십니까? 아니면 그래서 실패나 좌절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지요. 왜 처음부터 가롯 유다를 집어넣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이 세상과 천국은 단절되야 되거든요. 단절이 돼야 (성도의)면류관도 반납이 되요. 만약 반납이 안 되면 “이번에 내가 전도 하느냐고 얼마나 애썼는데 계속 쓰고 있다구요.
고구마 전도 해야되지~ 여리고 성 전도 해야되지~ 전도의 명장, 전도의 노하우를 갖고 있고 그렇게 되면 안되잖아요. 그런데 교회 학장 한다고 (방법)등을 동원 합니다. 이러한 것을 나무라지 마세요. 이게 바로 적폐입니다. 이 적폐를 누가 허용 하셨고 누가 시켰냐하면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에요. 2차 대전 때 영화에 보면 이런 대사가 나와요. 배가 하나 있는데 적군에게 포위 되어 있어요. 영국 군과 프랑스 군이 있습니다.
배가 하나 있는데 군사들 끼리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왜 같은 협력 군이라 프랑스 군인이 타려고 했어요. 그러니까 영국 병사들이 너희는 타지마라고 했어요. 자기네만 타고 프랑스 군은 못 탄다는 거에요. 그 기준을 누가 정하느냐 머리 되시는 주님이 정하겠지요. 그 기준에 의하면 아무도 천국 가는 배에 탈 사람이 없어요. 아무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까 같은 교인들이 있어야 되요.
이런 교회들의 특징이 뭐냐하면 하늘나라를 확장 하는데 선교 비를 낸 사람은 성도입니다라고 자기네 마음대로 기준을 정하는 거에요. 돈을 봉투에 넣어 내면 되잖아요. 그것은 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내가 할 수 있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 영광이 되고 보탬이 된다면 이미 교회가 정해준 기준이에요. 만약에 만 명 되던 교인이 12명으로 된다면 “우리 교회 망했다. 교인이 12명밖에 없다.”교회가 망한 것으로 알아요.
그런데 성경을 보면 교회가 망한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교회가 왜 안 망하냐 하면 머리 되시는 분이 어떤 인간도 이길 수 없는 모든 테스트를 통과해서 이미 승리 하셔서“다 이루었다!”이긴 분이기 때문에 어딜 가도 이김의 흔적만 나타납니다. 그래서 만 명 되는 교인이 12명만 남게 됐다면 이게 주님의 승리에요. 너무 섭섭하게 보지 마세요. 달랑 12명만 남았다고 “교회 꼬라지 봐라!”라고 그러지 마세요.
교회는 12명도 많다 이럴 정도로 이것도 왜 많다고 하느냐 하면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주님이 함께 하신다(마 18:20) 여기 12명이 남아 있는 것은 내가 이단인지 아닌지 주위의 작용으로 제가 주님 만 쳐다보게 되었습니다. 나라면 절대로 못 했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올 때 그런 큰 선물이 또 어디 있겠어요! 이것도 인간의 힘으로 나올 고백이 아닙니다.
예수님 옆에 달린 강도를 보세요. 최고의 챔피언 뻔뻔함의 극치 아닙니까? 사람을 죽여 놓은 강도인데 주여! (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저를 기억해 달라고, 뭐를 기억해요. 죄 지은 거를 기억해요 언제 봤다고?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강도가 십자가에 달릴 때 주님의 양 쪽에 있을 때 강도의 특징이 뭐냐하면 자기 구원에 있어 자기의 것이 하나도 섞이지 않았다는 것.
다만 강도 질 한 것도 주의 뜻이었잖아요. 뻔뻔함의 극치에요. 나쁜 짓은 다하고 사람은 다 죽여 놓고, 이것도 주의 뜻이잖아요. 밀양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원래 소설(원작: 벌레 이여기)에선 전도연(주인공)이 자살 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자기 아들을 유괴하여 죽인 범인이 잡혀 교도소 안에서 예수를 믿고 용서 받았다고 자매님~하고 이렇게 나오니까 (주인공 전도연) 자기가 선하게 용서 할 기회를 잃었을 때 그런 하나님,
내 아들을 죽인 혈육=내 소유를 죽인 자를 용서도 내가 해야 되는데 하나님이 뭔데? 내가 아직 용서를 안 했는데 당신이 용서해 버리면 나는 쪼다 되잖아. 그게 기분 나빠서 어쩔 줄을 모르지요. 원작엔 전도연이 하나님을 욕하고 자실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그래서 종말론을 자꾸 거론하는 것이 자기를 위한 종말론이에요. 주님의 종말론이 아니고 그러면 주님의 종말론을 믿으면 될 것이 아니냐?
아무도 몰라요. 제자들이 다 배신하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뒤에 인간은 구원 받을 자격이 애초부터 없었던 겁니다. 인간 자체가 문제가 있는 거에요. 인간 자체가 적대이고 적폐였어요. 악마와 한 통속이 되었는데 무슨 인간이 구원 되요? 그럼 악마까지 천국에 넣어야 되나? 천국에 가니까 악마가 거기 있어요. “내가 올 줄 몰랐지?”(웃음) 그런 천국이 어디 있어요?
그래서 악마를 예수님의 원수라고 한 이유가 요한계시록엔 원래 지옥은 악마가 가 있을 곳이에요. 따라서 원수란 말은 뭐냐하면 예수님의 원수는 지옥에 가는 거에요. 인간끼리는 사기치고 원수지간이어도 아무 소용없어요. 예수 그리스도 구원 받지 않은 사람은, 영국군이 아니면 그 배를 탈 수 없듯이 그 기준은 누가 정하느냐 예수님이 정하시는 겁니다. 그것을 소급해서 확인하는 것이에요. 성경 해석이.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네가 선지자들을 죽였다고 하는데 선지자를 죽인 적이 없어요. 오히려 선지자를 양성했어요. 예루살렘은 선지자를 계속 양성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자들을 키웠습니다. 그러나 다 한 통속이에요. 왜 여기서 선지자이다 아니다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 거에요? 구원 받고자하는 개인들의 집합체가 정하는 거에요. 한 통속이 돼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자고 외쳤던 그들이 자체적인 선지자를 양성해서 그 선지자의 말을 귀담아 들었던 겁니다.
교회를 누가 욕 합니까? 목사를 욕 하겠어요? 교인들을 욕 하겠어요? 다 한 통속인데, 그런 교회를 범람케 하신 분 또한 누굽니까? 허락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주님이시잖아요. 가롯 유다를 심어 놓듯이, 왜? 그래야 진짜 믿는 자인 선물로 믿음이 있는 자와 악발이 그런 악발이가 없어 믿쓉니다~ 기어이 이번에 방언 하고야 말리라! 두 시간 기도 채우고 말리라! 이번에 기어이 십일조 하고 말리라!
이렇게 악을 써서 내가 이 정도로 가치 있는 존재이고 나는 의미 있는 존재입니다를 자랑 질 못해서 환장한 사람, 그런 사람은 교회에서 임원이고 장로 직이잖아요. 투표로 되니까 남들 보기엔 열심히 (신앙생활)한다는 말이죠. 축구한다고 잔치 벌리고 장로 됐다고 전부 축하한다고 하고 장로 되려면 교회에 그 만큼 교회 교육관 지을 때 목돈내야 되고 그러니 목사 입장에서 보면 목돈을 냈잖아요.
거기서 어지간하면 못 빠집니다. 인간은 돈에 따라 살기 때문에 자기가 낸 목돈을 거부한다는 것은 정말 성령 받지 않으면 못해요, 그리고 장로 되기까지 그동안 결혼식 축의금 얼마나 냈겠어요? 곧 자기 딸이 결혼식 해야 하는데 축의금 도로 받아내야 됩니다. 문제는 이것 때문이에요. 축의금. 못 빠져 나옵니다. 어지간하면 그냥 다녀요. 다른 교회로 가면 축의금 안 나옵니다. (웃음)
이것을 조선 시대 때는 상부상조 한다고 하고 다른 말로 두레 마을이에요. 우리 한민족은 예전부터 상부상조하는 모임 중심으로 살았어요. 그게 그대로 교회가 된 거에요. 친목이라니까요. 시골에 가보세요. 장례식을 누가 치뤄 주는데요. 어~야! 어~야! 하던 것이 가다가 찬송 하나 부르다가 돈 내고 가다가 찬송 하나 부르고,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지금은 안 그러는지 모르지만 촌에 가면 그래요. 저도 많이 해봤습니다. 딸랑딸랑 안 흔들었습니다만은
모든 것이 사적인 종말론이에요. 사적인 종말론을 추구하는데 그게 적폐이고 적대에요. 아하! 이런 사적인 구원 때문에 주께서 죽으셨구나! 이것을 깨달을 때가 주께서 원하시는 대로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오신거가 되는 거에요. 본문에 선지자를 죽였다는 말은 이미 그들이 모르는 게 아니고 알아요. 알지만 그 선지자는 아부쟁이, “여러분이 뭘 원하시는지 내가 이렇게 이렇게 처방전 내려 준대로 하시면 됩니다.”선지자는 미래를 예측하니까 반드시 여러분들의 소원대로 될 것입니다.
(미 3: 11)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들의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미가서 한 번 볼게요. 요대로 예수님 당시에 그 세대가 투영됩니다. 12제자도 여기에 다 포함되어 있어요. 사적인 행복을 위해서 이건 분명히 신의 뜻이다. 만약에 나에게 분란케 하면 이건 악마의 저주이다. 악마가 벌인 저주의 일이다. 그런데 저주와 축복이 뒤 바뀌어 버렸어요. 십자가를 통해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 목사님! 그런 설교를 하면 누가 교회에 오겠습니까? 하는데 원래 교회는 머리 되시는 분이 계시면 교회는 머리가 알아서 만들어요.
우리가, 교인들이 걱정하지 마세요. 악마마저 주의 뜻대로 활동해야 되니까 그 정도로 권력을 쥐고 있으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도 그건 승리의 삶이 되는 겁니다. 어떻게 살아도 뒤돌아보면 예수님 보다 더 좋은 것에 손대다가 눈물 흘리는 거에요. 그게 내 자식이나 결혼 앞둔 딸일 수도 있어요. 입으로는 예수님을 말하지만 실은 내 행복만을 추구하는 여전히 죽을 때까지 육적인 본성을 그 때마다 들춰서 이런 죄를 집어넣어서 십자가 의가 튀어 나오는,
죄 집어넣으면 의 튀어 나오고~ 죄 집어넣으면 의 튀어 나오고 포장 작업처럼 십자가 피만 묻어 나오도록 주님께서 그런 인간을 인도 하시는 그 모슴을 고백하는 자가 이 시대의 선지자입니다. 이 땅은 이미 종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마지막 때에 주님 오시는 것을 분명히 규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린 우리 중심에 삶이 남아 있다고 여겼습니다. 날마다 우리를 죽이시고 예수님의 피로 새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니 주님 안에 있는 것이 늘 새로운 피조물이란 것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