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설교, 강의(이근호)/마태복음

89강 / 마태복음 23:34 ( 선지자 체험) / 170627

정인순 2017. 6. 27. 22:57

 

 

음성2

 

녹취:이미아

대전-89강 마태복음 23장 33절(선지자 체험)

20170627-이 근호 목사

 

33절,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34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마태복음 23장 이 자체를 목사들이 설교를 하는데 굉장히 버거워 해요. 왜냐하면 여기 33절에 독사의 새끼들아! 뱀들아! 할 때, 여기 바리새인, 사두개인들보고 이야기를 했잖아요. 독사의 새끼들아! 지옥의 판결을 피하지 못한다, 라는 그러한 감정을 그대로 실어서 설교를 해야 된다면, 독사의 새끼들이 뭘 주장했기에 주께서 이러한 과격한 표현들을 했는지를, 동일한 예수의 마음으로 설교를 해야 돼요.

 

근데 그 독사의 새끼들이 한 게 뭐냐 하면 율법 지키자고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럼 주님께서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 오버를 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 이 말이죠. 따라서 목사가 진실로 이렇게 한다면, 그야말로 이것은 율법 지키겠다는 그 행함에 대해서는 예수님과 동일하게 율법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고, 과감하게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이게 나와 줘야 해요.

 

그래서 마태복음 23장 34절을 설교하지 않고 딱 지나가고 싶을 거예요. 왜냐하면 사람은 욕 얻어먹으려고 교회 온 게 아니잖아요. 위로받으려고 오는데, 성경에서는 이게 욕하고 있다 이 말이죠. 그냥 눈 감고 안 본 척 슬쩍 넘어가버리면, 넘어가게 되면 교회는 그대로 유지되고 부흥될지 모르지만, 다 같이 지옥 가는 방향으로 방향이 바뀌어져요. 뱃머리 전체가 지옥 가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요.

 

그래서 처음에 개척교회 하면서 한국교회 썩었다고 설교할 때, 이럴 때는 교회에 사람들이 모이게 돼요. 근데 교인들이 한 50명모이고 100쯤 모였다 싶으면 방향이 이상한 방향으로 가버려요. 조류가 바뀌었나? 그러면 오늘 우리가 하고자 하는 본문은 이 34절부터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라고 이렇게 하셨는데. 지금 예수님께서 선지자를 말씀하실 때, 문제가 뭐냐 하면 우리가 그 선지자를 체험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체험이 안 된다는 것.

 

사람이 어떤 행동이나 말을 할 때는 자기가 체험한 것을 말하게 되어 있어요. 만약에 암웨이, 물건을 파는 사람들한테 이야기를 해보라고 했어요. 이거는 뭐 장소, 시간가리지 않고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떠든다고요. “암웨이 물건 좋습니다.”하고 줄줄 막 나오죠. 다단계 암웨이. 줄줄 막 나오는 거예요. 또 신비의 돌 있잖아요. 목욕탕에서 효험이 좋다고 하는 그 돌을 선전하는 사람들. 게르마늄, 이거 팔고 다니는 사람들 보세요. 이거는 뭐 기차 표 시간에 관계없이, 남이 보든 말든 상관없이 계속 선전해대요. 게르마늄 하나라도 팔아먹으려고.

 

 

이게 왜 그러냐 하면 이걸 지금 체험하고 있거든요. 근데 게르마늄 팔고 있는 사람한테 선지자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라고 하면 이야기 못해요. 아니, 선지자들 치고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라고 하면 이야기 못합니다. 교회이야기해보라고 하면 막 해대요. 열 시간도 모자랍니다.

 

복음의 체험을 하려면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복음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는 그러한 마음가짐이 될 경우에만 복음이 줄줄 나와요. 천하를 잃어도 복음만 있으면 생명을 얻는다는 이 마음가짐으로 평소에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복움이 줄줄 나오게 되어 있다고요.

 

그런데 욥 같은 경우에는, 욥이 그렇게 말이 많은 이유가, 욥이 평소에 누구를 위해서 살았느냐 하면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았어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기 자신의 의로움을 유지하기 위해서 살았단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마귀를 통해서 고난을 주니까 그렇게 할 말이 많은 거예요.

 

욥기 제일 마지막 장에 보면 결국은 내가 너무 말이 많았다는 걸로 끝나요. “내가 너무 말이 많았습니다.” 욥이 체험한 것은 자기가 만든 현실에 갇혀 있기 때문에, 그 안에 딱 가두어져있기 때문에 그저 자기 이야기만 하는 겁니다. 그럼 여기서는 울림이 있죠. 자기이야기 했다가 자기이야기로 바꾸고, 그걸 또 이야기하고, 또 바꾸고, 혼자 중얼중얼, 기도를 하나 철야를 하나 맨 자기체험, 자기이야기, 자기 한 맺힌 이야기.

 

나중에 껍질이 깨지고 보니까 자기가 이런 현상이 있는 이 자체가, 이게 바로 복음을 위해서 일어나야 될 일이라는 것을 그때는 다 알죠. 그러면 입이 완전히 닫히죠. 로마서 3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율법을 준 것은 우리로 입을 닫아 잠그고 저주 아래 있게 하심이라. 율법을 준 것은.

 

근데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줬는데 그 율법을 가지고 입을 닫는 것이 아니고, 세칙과 규칙들을 계속 양산해냈습니다. 율법을 인간의 행함으로 보다 완벽하게 지키기. 이런 분위기로 전부다 몰아간 거예요. 나라 전체를, 요새 말로 하면 예배당 전체 분위기를 그런 분위기로 몰아세운 거예요. 주일 잘 지키려면 이렇게 하면 잘 지키는 겁니다. 드라만 본방은 보지 말고 녹화해놨다가 재방송 월요일에 보시고. 뭐 이런 식으로. 주일에는 경건한 책을 보고. 뭐 이런 것. 주일날에는 딴 것 하면 안 되고 심방을 해야 되고.

 

유대인들이 발달시킨 그것을 요즘도 천주교나 개신교에서 다른 버전으로 그렇게 한 겁니다. 그럼 교인들이 물으니까, 성도라는 공식이 있어요. 성도라는 것은 거룩한 자. 그럼 성도가 거룩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성도라는 행위를 보일 때에, 행위를 통해서 믿음을 증명한다.

 

따라서 성도가 거룩하다는 말은 어떤 행동을 해야 되느냐, 거룩에 합당한 행동을 해야 된다. 그럼 거룩에 합당한 행동을 하려면 여기까지는 거룩이고, 여기서부터는 거룩이 아니라는 어떤 기준점을, 담장에 대나무 박아놓아서 표시해놓듯이 이걸 박아놔야 돼요.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는 거룩이고 이 바깥에 나가면 거룩이 아니다. 그 지침서가 계속해서 주어지는 거예요.

 

 

그 지침서가 처음에 교회 나올 때는 엉성하게 한 서너가지가 되다가, 그 다음에 신앙생활 오래해서 장로쯤 되면 촘촘히 박히죠. 촘촘히 박히니까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거예요. 어떤 꾀에 넘어가느냐 하면, 이 범위를 넘어가게 되면 벌벌 떠는 겁니다. 죄 지은 게 무서운 것이 아니고, 내가 한 죄에 벌이 주어질까봐 무서운 거예요. 죄는 하나도 안 무서워요. 신났어. 사람이 죄 지을때 제일 신나죠.

 

그런데 문제는 벌이 없다면 좋겠는데, 죄지었기 때문에 반드시 벌을 요청하게 되어 있어요. 자, 이게 이번 강의에 상당히 어려운 대목인데요. 한 번 물어봅시다. 우주는 누가 만들었습니까? 우주는 하나님이 만들었죠. 그렇죠. 그럼 그 다음에 우주는 누가 운영하십니까? 하나님이 운영하죠. 근데 인간은 왜 지가 책임집니까? 자기 인생에 대해서. 왜 자기가 책임지려고 나서냐 이 말입니다. 인간이라는 게 괴물이에요. 이상해요.

 

지금 하나님이 우주를 만드시고 운영하는 것하고 안 맞아요. 이게 맞는 것이 뭐냐 하면 코끼리나 코스모스는 맞아요. 민들레나 참새는 맞아요. 키우는 대로, 살려주는 대로 살면 그만이에요. 근데 인간에게 와서는 이게 안 맞아요. 인간에게 와서는. 만약에 저 코끼리보고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하면 따먹었겠어요? 안 따먹었겠어요? 안 따먹었어요. 저 늑대나 이리보고 따먹으라고 해도 안 따먹습니다. 사자보고 해도 안 따먹어요.

 

그런데 인간은 따먹었어요. 뱀 지가 따먹지, 왜 인간보고 따먹으라고 해놓고.. 인간이 따먹은 거예요. 인간보고 따먹으라고 한 거예요. 뱀은 알아요. 나중에 하나님이 인간으로 온다는 것을 알아요. 그래서 뱀 지가 따먹어도 소용없어요. 하나님은 뱀하고 상대 안 하거든요. 인간하고 이야기하기 위해서 선악과를 배치를 해놓은 거예요.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는, 그 다음에 나타난 현상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숨은 겁니다. 두려워서 숨은 거예요.

 

하나님께서 선악과 따먹었다고 닦달 내셨습니까? “이놈들 봐라! 내가 심어놓은 선악과를 누가 따먹었지?”라고 닦달 냈습니까? 선악을 따먹은 것 가지고 주께서 책임추궁을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창세기 3장에서. 안 했죠. 니가 어디에 있느냐고 찾으러 오셨지. 창세기 3장 한 번 봅시다. 11절,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이게 뭐냐 하면 지금 하나님께서 아담의 수준까지 내려오신 거예요. 아담이 벌벌 떨고 있는 그 이유에 대해서 아담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찾아오신 거예요. 이 말은 “선악과를 따먹다니? 이놈!”하고 찾아오신 것이 아니고, 너희들이 벌벌 떨고 있는 원인을, 너희들이 알고 있는 그 레벨에 주께서는 그대로 찾아오신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찾아온 것은, 이건 부름이에요. 아까 첫 번째 시간에 이야기한 부름.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그 다음 작업에 나서기 위해서 찾아오신 거예요. 그 다음 작업이 뭐냐 하면 뱀과 인간에게 저주를 내리시는 겁니다. 저주를 내리심으로써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상대할 의사는 없었고, 장차 오실 하나님의 아들과 아버지로서의 관계를 맺어서 창조를 완전하게 성취할 목적을 갖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뱀과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주님께서는 그 둘의 투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겁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그러니까 개도 그렇고, 자식들도 그렇고, 지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지레 겁먹고 벌벌 떨고 있잖아요. 왜냐하면 인간이 생각하는 그 생각의 폭, 개가 생각하는 생각의 폭, 자식들이 생각하는 그 생각의 폭이 어디까지나 자기 일방적이에요.

 

주님께서는 딴 것을 생각하는데, 주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법 없이 용서하시고 거기서 천국을 만드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의로써 천국을 만들 그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인간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 하면 자기 일에 자기가 책임질 때, 이게 진짜 인간 되는 줄 알고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엉뚱한 생각을. 남들이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래서 제가 지난 낮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죠. 나의 기억보다 타인의 기억이 더 우선된다고요. 살아보세요. 자기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남들이 기억하는 나에 과연 내가 합치됐는가에 우선이 되는 거예요. 남들이. 모든 행동에 남들을 생각한다고요.

 

인간들이 있잖아요. 인간들이 있다면, 인간들이 여기서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 인간들의 공통점을 끄집어내요. 그걸 가지고 인간성이라고 합니다. 이걸 좀 어려운 말로 인간의 보편성을 만들어내요. 이러한 보편성, 인간성이 뭘 하느냐 하면 그중에서 하나를 지도자로 추대하게 됩니다. 이 지도자 속에는 다수의 사람들이 이 지도자다움에 대해서 납득을 하고 동의를 하게 되어 있어요.

 

이게 투표가 아닙니까? 다수의 투표를 민주주의라고 해요. 이 지도자가 납득이 된다니까요. 예수님께서 병고치고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고 먹을 것을 주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따라 간 이유가 뭡니까? 자기가 원했던 메시아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가 원했던 메시아. 공통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 대 인간 속에서 인간성을 뽑아내는 것이 아니고, 자아를 뽑아내요.

 

그런데 인간에게 자아라는 것은 없다고 했죠. 자아는 실체가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신체는 유일한 자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필요해서 만들어진 인간들의 신체입니다. 이게 골로새서 1장 16절에 나온 말씀이에요. 세상의 모든 만물은 누굴 위해서? 예수님을 위해서 만들어진 거예요. 예수님을 위해서.

 

그런데 인간들은 마귀가 있어가지고, 마귀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니도 신처럼 된다고 해서, 주님을 위한 신체를 가지고 마귀가 들어와 버리니까, 신체의 주인공을 따로 설정했는데, 그게 뭐냐 자아, 또는 나라고 따로 설정한 겁니다. 그럼 나는 뭐와 연관되어 있느냐 하면 악마와 연관되어서 악마의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는 거예요. 악마의 하수인.

 

여러분, 악마라고 해서 머리에 뿔나고 눈 찢어지고 하는 게 악마가 아니고, 내가 다룰 수 있는 예수가 아니면 예수가 아니라는 생각. 그러니까 십자가 없던지, 십자가를 훌쩍 지나가버린다든지, 십자가를 그냥 거쳐서 다른 것을 찾는다든지, 하여튼 십자가를 앞장세우지 않는 그런 메시아를 원할 때, 우리에게 악마가 작용한 거예요. 왜냐하면 십자가가 들어서버리면 나는 걸레가 되고 나는 쓰레기가 되거든요. 십자가가 뭡니까? 너와 나 사이에는, 이거는 공통점이 없다는 거예요. 공통점 정도가 아니고 적대적 관계에요. 하나는 죽이는 자고 하나는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 십자가거든요.

 

그게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내용 한 번 볼까요? 35절입니다.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너희라고 하니까 인간들의 모임이죠. 거기서 인간들의 공통점을 끄집어내면, 예수님 오시기 전이나 오신 후에나 그들에게 있는 공통점을 끄집어내보니까 뭐냐 하면, 율법을 지키면 구원받는다. 이게 보편적으로 한 거예요.

 

그러면 그들의 지도자는, 자기들이 생각하기에 누구보다도 율법에 충실한 사람, 율법을 잘 지켰다고 인정해준 사람이 그들의 영적지도자고 되는 겁니다. 뭐 어렵지 않죠? 이게 당연한 거죠. 그래서 예수님도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 못 간다고 했죠. 문제는 그들이 최고지도자라는 랍비, 그래서 예수님도 랍비라고 불렀어요. 누가, 누가 랍비답냐고 그들에게 시합을 붙인 거예요.

 

인간들의 공통성, 지도자, 랍비, 율법 지켜서 구원받겠다는데 앞장서서 모델케이스로 움직이는 사람을, 그들은 그리워한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나타나기를 원해요. 세상은 썩어도 우리 목사만큼은 예수님 모습처럼 살기를 원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바리새인을 모시는 사고방식이라니까요. 사두개인을 모신 사고방식이에요.

 

이 지도자를 숭상함으로 말미암아, 지도자의 성과에 같이 묻혀 가면, 앞장선 지도자 덕분에 그들은 수월하게 천국 갈 수 있는 여력이 된다고 본 겁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똑같은 사고방식은 열 두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죠.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르죠. 선생님이여! 이 말은 뭐냐 하면 이들과 차이가 난다는 겁니다.

 

우리는 진짜 지도자를 모셨는데, 그 지도자는 천국의 주인이고, 나중에는 우리도 예수님 밑에서 한 자리씩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겁니다. 같이 고난 받았으니까. 같이 이들로부터 핍박받았으니까. 그래서 사람들의 의식이 얼마나 수준이 낮은가 하면 뭔가 고난 받고 핍박받으면 자기가 진리 쪽에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돼요.

 

제가 지난 오후설교 전에 교인들끼리 잡담을 하는 것을 들었는데, 성락교회 김기동 목사가 돈을 몇 백억 해먹었다는 것이 방송에 나와 가지고, 성락교회에서 돈 먹은 거, 그거 다시 게워내고 성락교회 돈으로 다시 전환하는 대책모임이 있었던 모양이죠. 근데 성락교회 김기동 목사가 주장하는 것은 뭐냐 하면, 그 돈은 나보고 준 돈이니까 내가 꿀꺽해도 괜찮다는 거고, 대책회의에서는 그거는 교회 때문에 준 돈이니까 내놓으라고 한 거예요. 순복음 조용기 목사 이야기를 그대로 하는 거예요. 앞으로 신천지도 마찬가지고. 전부다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럴 때 그들을 보고 참 기가 찼다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그걸 보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죠. 그런 거 보고 기가차지 마시고, 불쌍한 애들을 자기 자식으로 입양하고, 자기의 모든 월급을 어려운 아프리카 사람들을 도와주는 그런 악마를 주의해야 해요. 그런 악마를. 그러니까 인간들이 얼마나 복음이 없었으면, 우리교회 집사님들보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얼마나 복음이 없었으면 납득이 되는, 예수님 본받는 목사상像을 아직도 고대하고 있느냐 이 말이죠. 다 쓰레기인데.

 

십자가는 예수님 혼자서 지셨어야 돼요. 십자가 진 사람이 둘, 셋 되면 안 됩니다. 지도자가 헷갈려요. 다른 이름을 준 적이 없어요. 예수 이름 말고는 없어요. 말은 그렇게 하고 왜 예수 이름 말고 다른 이름을 찾습니까? 예수만큼 괜찮다는 그것이 가장 위험한 존재에요. 그게. 때리는 시어머니보다도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노골적으로 돈 밝히는 목사보다 예수님께 한 발짝 더 가까이 간, 그런 거룩하고 자기 것을 몽땅 다 내어준 그 목사가 가장 악마적인 목사에요. 가장 악마적인 목사. 그런 짓 하면서 나는 죄인이라고 하겠어요? 그런 소리 안 나오죠. 죄가 안 나오면 그거는 마귀자식이에요. 자기 죄가 안 나오면.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냐, 그것은 예수님 노선을 뒷조사를 해보면 돼요. 그러면 역대하 24장 22절의 그 말씀을 35절에 인용해놨는데, 그게 뭐냐 하면 요아스 왕 때 바가랴, 라는 대제사장이 있어요. 한 번 찾아볼까요? “요아스 왕이 이와 같이 스가랴의 아비 여호야다의 베푼 은혜를 생각지 아니하고 그 아들을 죽이니 저가 죽을 때에 이르되 여호와는 감찰사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 하니라” 여호야다가 바가랴입니다. 20절에 보면, “이에 하나님의 신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

 

여호야다가 아주 나라가 엉망이 되었을 때에, 못된 아달랴가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어놨잖아요. 쫓아내고, 어린 요아스가 8살 때 왕이 되었는데 아무것도 모릅니다. 위험해요. 권력이 인수가 안 되었을 때니까. 그럴 때 여호야다가 이노베이션,innovation혁명을, 혁신을 일으켜가지고, 권력을 줘가지고 잘했는데, 잘하다보니까 나라가 잘되었을 거잖아요. 그러다 여호야다가 늙으니까, 옛날 생각은 못하고, 하나님이 신이 임한 생각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생각 못하고, 이제는 뭐 내가 주도권을 쥐어야 하겠다. 이래가지고 우상을 섬겨버렸어요.

 

우상을 섬길 때, 아마 우상 섬기는 여자를 자기 부인으로 데려왔던 모양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여성. 이스라엘 왕에 대해서 이번 수련회 때 할 건데, 이스라엘 왕들이 이방나라 공주나 여인들을 데려오는 이유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래요. 첫 번째는 뭐냐 하면 나라 자체를,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자체로 유지를 해야 될 때는 정치적인 수완을 발휘해가지고 서로 인질로 삼는 거예요. 딸을 인질로 삼고, 저쪽은 이쪽 딸 인질로 삼아가지고, 여차해서 자기 딸이 죽으면 안 되니까. 강제평화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중요한 문제는 이쁘다는 거예요. 이뻤다는 것. 이게 에스겔에 나옵니다. 천하의 왕도 남자거든요. 남자는 근본적인 생물학의 욕구를 이겨낼 수가 없어요. 모든 인간은 벗어날 수가 없어요. 자기 DNA를 퍼트리기 위해서는 보다 더 예쁜 사람에게 자기 DNA를 퍼트리고 싶은 거예요. 이것은 자아 이전에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은 자아가 우선이 아니고 인간의 신체가 우선이죠. 인간의 신체를 자연스럽게 유지하는 그 욕구와 욕망이 예쁜 것을 찾게 되어 있다니까요. 예쁜 것을.

 

40, 50이 가까운 연예인들이 몇 살하고 결혼합니까? 20대를 넘본다니까요. 20대를. 40대 된 여자연예인은 뭘 넘봐요? 20대를 넘본다니까요. 젊고 예쁜 것을 누가 마다합니까? 이래서는 안 된다고요? 그거는 자아이야기고. 자아는 묻지 마세요. 신체발동이 그렇게 걸린다니까요. 남의 이야기할 것 없어요. 우리가 그만큼 재산이 있고, 인물이 되고, 연예인하게 되면 다 그렇게 하게 되어 있어요. 그럴 형편이 지금 못돼서 그렇지. 형편을 원망합시다. 지도 밥 먹고 살기 힘든데 남까지 밥 먹여 줄 여력이, 돈이 없잖아요.

 

여기 역대하 24장 18절에 보면,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긴고로 이 죄로 인하여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니라”라고 했죠. 아까 우상을 뭐라고 했습니까? 납득이 되고 신이 우상이죠. 내가 다룰 수 있는, 내가 조종할 수 있는 것, 기도할 때마다 쪼르르 올라오는 것. 예. 뭘 도와줄까요? 하고, 헌금할 때마다 잘했다고 칭찬해주는 그런 신. 그런 예수. 여전히 주도권은 내 인생 내가 만들겠다고 할 때 저쪽 신이 허가를 해주는. 그런 점잖은 분. 아주 인자하시고. 어르신다운 분. 우리 동네 어르신 특징이 뭡니까? 아주 점잖죠. 그런 점잖은 분. KFC할아버지처럼. 점잖으신 인상의 할아버지. 그런 게 우상이에요.

 

특히 여기 아세라 목상 같은 여신은요, 빌면 소원 들어주는, 자식을 낳게 하는 우상이에요. 자식을 낳게 하는. 자식을 낳게 하기 때문에, 자식을 낳을 수 있도록, 그냥 “자식을 놓습니다.”라고 하면 효과가 없잖아요. 그래서 자식을 놓을 수 있도록, 아세라 신의 계시가 효험이 있도록, 거기에 자식을 잘 놓을 수 있는 여자사제들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여자 쪽에서는 남자사제들이 있어가지고, 그냥 집에 가지 마시고, 말로만 자식을 놓으면 안 되잖아요.

 

그게 여호와의 말씀이 권태로울 때, 인간은 자극을 원하잖아요. 근데 이 자극은 어디서 오느냐 하면 자신의 욕망에서 나오는 겁니다. 십자가 다 좋고 진리인 줄 아는데, 재미가 없다는 거예요. 그 재미가 없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사람은 무슨 재미로 삽니까? 자기의 미지의 X를 그때그때마다 충족시키는 그 재미인 거예요. 소원 빌면 재깍 이루어지고, 기도하면 다 이루어지고, 그게 실적 있는 신앙생활 아니에요? 뭔가 손에 잡히는, 실적 있는.

 

그게 아까 이야기한 다단계 암웨이, 체험이 성사될 때 할 말이 있단 말이죠. 근데 십자가라는 것은 뭐냐 하면 주도권이 주님한테 있기 때문에, 내가 십자가를 믿는다고 해도 주도권을 가질 수가 없어요. 십자가를 믿는다는 말은, 주도권을 내가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부터 “주도권을 갖기만 해봐라! 내가 가만 안 둔다! 이런 관계라니까요. 십자가가. 이제부터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하기만 해봐! 내가 다 부숴버릴 테니까. 그 가짜 현실을.” 이게 십자가와의 관계거든요.

 

처음에 자기가 잘못 한 것 있을 때는 내가 죄인이라고 합니다. 근데, 그게 몇 번 안 가서는 ‘나도 인간인데 언제까지 이렇게 질질 끌려가기만 할까?’ 자아는 모르지만 이 신체가 그걸 싫어해요. 내 신체가 그걸 싫어한다고요. 찬송가만 냅다 불러보세요. 처음에 1,2절에는 은혜가 되다가 3,4절에는 은혜가 확 떨어져요. ‘길기는 왜 그렇게 긴지. 목사님은 왜 긴 걸 해가지고. 벌써 3절 할 쯤엔 잠 오고 설교는 다 들었다.’ 이런 생각이 든다니까요. 그래서 인터넷으로 설교 듣는 사람은 좋아요. 쫙 땡겨 가지고 찬송, 기도 건너뛰고 설교만 들으면 되니까. 얼마나 좋아요. 축도 듣지도 않아요. 설교만 듣고 끄면 그만이에요.

 

자, 여기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우상을 섬기도록 허락했습니다. 그리고 요아스가 까불죠. 아주 지가 최고니까. 왜 최고냐 하면 백성들이 자기를 따라오니까. 왕이 우상을 섬겼다는 것도 있지만, 백성들이 그걸 섬기는 것을 윤허, 인정한 거예요. 백성이 뒤집어버리면 왕이 왕 노릇을 못합니다. 언제 칼 맞고 죽을지 몰라요.

 

쉽게 말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하나도 안 무서워요. 타인의 시선이 무섭다니까요.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타인의 기억 속에 있는 내 모습이 무섭지, 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예수는 하나도 안 무서워요. 언제 내 소원 예수님이 들어줬습니까? 일가친척들이 다 도와줬지. 이거 종교생활 취미라니까요. 해도 되고 안 해도 그만이고. 미지를 잘 모르니까 보험하나 들어놓는다 치고 하나 떡 걸쳐놓게 되면, 물론 죽을 때는 보람상조가 오겠지만. 보람상조 그 다음에는 예수 아닙니까?

 

그런데 이게 사건이 터져버렸네요. 하나님의 신이 임했다는 거예요. 개입했다는 거예요. 스가랴, 여호야다의 아들이 스가랴인데요. 스가랴에게 임했어요. 하나님의 신이 스가랴에게 임하니까, 스가랴를 어디로 인도하느냐 하면 억지로라도 맞아 죽도록 했습니다. 돌로 쳐 죽였습니다. 역대하 24장 21절에, “무리가 함께 꾀하고 왕의 명을 좇아 여호와의 전 뜰 안에서 돌로 쳐 죽였더라”

 

자,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의 신이 임했잖아요. 신이 임했다는 것은 우선 은혜를 받았다는 거잖아요. 근데 우리가 생각하는 은혜는 앞으로 창창하게 잘 되는 것, 보다 건강하고, 보다 돈 많이 벌고, 보다 인기 얻고, 세상에 있는 모든 것에 자기의 파워가 확장되고 유명해지는 것, 이게 은혜의 효과라고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아느냐 하면 사전에 우리 인간들이 기도하고 빌 때, 뭐 예수한테, 삼위일체한테 빌었지만, 사실은 산당에서 아세라한테 빌고 바알한테 비는 그 모습이에요. 자아는 신체가 시키는 대로 해요. 이 자아는 내 맘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이게 늘 흔들리게 되어 있어요. 자아는 내 신체의 욕망이 요구하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어요. 내 욕구가 시키는 대로 해요.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분명히 내 신체가 시키는 대로 했는데, 돌아와서는 책임을 진다는 게 수상하다 이 말입니다. 제가 처음에 이야기한 거예요. 시키는 대로 했으면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데, 왜 거기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느냐 이 말이죠. 이게 비밀 아닙니까? 비밀.

 

하나님이 없잖아요. 하나님이 없으면 내 마음대로 살면 되는데, 나는 교회 안 가고 절에 간다고 해요. 절에는 신이 없어요. 절에는 부처처럼 되는 것이지 신이 없잖아요. 신이 없는데 왜 그들은 양심이 있고 죄책감을 왜 느낍니까? 신이 없는데? 얼음판에 넘어지면 “아이고, 하나님!”이라고 이렇게 합니까? 교인들이 훈련되어서 “아이고, 주여!”라고 하죠. 차타고 갈 때 울렁거리면 “아이고, 주여!”라고 해요. 그것도 훈련이 안 된 사람은 “엄마야!” 이렇게 하지만. “주여!” 얼마나 훈련됐으면 제 2의 천성이 됐을까요? “주여!” 한단 말이죠.

 

현실을 이렇게 모아야 되는데, 현실을 알 때 우리가 진리를 알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내 위주로 살 수 있는데, 왜 내가 만든 현실에서 빠져나오는 그 구석이 또 있느냐 이 말이죠. 내가 모르는 게 왜 자꾸 나를 힘들게 만드느냐 말이죠. 내가 모르는 구석이. 뭐 기분이다, 하고 객기 부리면서,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술을 쳐 먹고 집에 와서는 왜 자꾸 미안하다는 소리를 왜 하느냐는 말이죠. 지가 선택해서 술 먹었으면, 내가 술 먹었다고 이렇게 당당해야 하는데, “미안해 여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이 말이죠.

 

그건 뭐냐 뭔가 켕기는 것이 있잖아요. 근데 그 켕기는 미지의 X는 뭔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켕기는 미지의 X, 그게 뭔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당당하고 내가 신이라고 외치면서 평생 그렇게 살았으면 끝까지 그렇게 살아야 되지, 자기밖에 몰랐으면 그렇게 살아야지, 어려운 사람 도와준다고 나대고 왜 그러냐는 말이죠. 평소에 잘 도와주지, 꼭 돈 없으면서도 도와준다고 해요. 돈 있을 때는 지가 쓰다가.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이기주의가 기본입니다.

 

그런데 이기주의라는 말로 다 포괄되지 않는 다른 요소가 있어요. 인간에게는 악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선이 있어야 인간이 제도와 질서를 만들 수가 있습니다. 질서를 만들 때는 인간은 기본적으로 선하다는 그 원칙이 있을 때만 질서제도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법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지키고자 할 거야, 라는 것을 기본으로 그냥 간주를 해줘야 법을 만들어요. 법 만들어놓고 안 지키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거든요.

 

 

인간은 일단 선하기 때문에 나라가 제대로 돌아간다, 라는 것으로 하고. 악은, 악이라고 하는 것은 근원적인 것이 아니고, 인간이 선한데 결심이 약해서 또는 너무 형편이 안 돼서 악을 저지른다, 라고 이렇게 사람들은 생각하고 싶어 해요. 이렇게. 이렇게 생각하고 싶다고요. 그러나 선이 백 개가 있더라도, 악이 한 개만 있다면 백 개가 다 헛수고입니다. 백 개 선한 것이 다 헛수고에요. 악한 이것이 백 개를 전부 다 못살게 굴어요. ‘니 착함이 무슨 소용이 있나?’라고. 이게 남이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내 안에 타자가 있어요. 그 타자가 나를 자꾸 쑤신다니까요.

 

다시 이야기를 정리해봅시다. 나는 내 맘대로 살아요. 분명히 내 맘대로 살게 되면 책임을 지지 말아야 돼요. 어떤 것이든지. 내 맘대로 살아놓고 책임감은 왜 느끼느냐 이 말이죠. ‘내가 제대로 했어? 이거 너무 심한 것 아니야?’ 누가 나에게 그런 책임감을 안겨줍니까? 누가? 이 세상은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어요.

 

스가랴가 딱 죽습니다. 죽기 전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역대하 24장 20절에 보면, “이에 하나님의 신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 저가 백성 앞에 높이 서서 저희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치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린고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라고 이렇게 말씀을 했죠.

 

근데 이 말씀을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했죠. 한 번 정리해봅시다. 인간이 있기 전에, 인간의 자아가 있기 전에, 신체가 있고, 신체 있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 그래서 요아스가 스가랴를 죽이는 것도, 이것은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이렇게 죽여야 하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의 신이 임했다고, 은혜 받았다고 해서 잘 되고, “아, 당신은 신이 임했으니까 대박이다!” 이게 아니고, 신을 받았다는 그 이유 때문에, 성령이 충만한 그 이유 때문에 스데반 집사가 죽는 것처럼, 신을 받았기 때문에 죽을 때 죽어줘야 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내 신체를 주께서 거두어간다고 해서 자아가 뒤따라가면서 찔찔거리면 울지 말라 이 말입니다. 나 이전에 말씀이 먼저 있어요. 그 관계가 이어질 때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부름이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신이라고 하는 겁니다. 신약에 의하면 성령이에요. 성령은 나 이전에 이미 주도권을 장악하신 분이 계시고, 그 분의 영이 나한테 꽂힌 거예요. 뛰어든 겁니다. 나한테 뛰어드니까, 나에게 일어난 일은 분명히 나의 선택이고, 나의 자유고, 나의 의지입니다. 나에게 일어난 일은 나의 의지, 결심, 그리고 나의 선택에 의해서 행한 거예요. 이거는 부인할 수가 없어요. 분명합니다.

 

근데 이 선택, 결심, 의지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이게 선행적 선택이 따로 있었어요. 선행적 선택을 다양하게 배정시키고, 뿌리고, 할당을 시키게 되면 각자 인간은 자기 결심과 자기 의지와 자기 선택에 의해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이라는 것이 있잖아요. 예정은 나의 선택이 만드는 겁니다. 예정은 자아가 만들어요. 내가 예정됐다는 것을 내가 만든다는 말이죠.

 

그래서 내가 만든 이 예정은 결국은 선행적 선택 밑에서 만들어진 예정이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 착각과 자기 최면에 계속 몰두하겠죠. 내가 이런 일을 하기 위해서 이런 짓을 했다고 계속 이야기하겠죠. 그러면 뭐가 계속 굳어지게 됩니까? 자아가 점점 더 굳어지게 되겠죠. 언제까지? 내가 죽을 때까지. 만약에 내가 죽으면 이런 소리를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안 하겠죠.

 

자, 욥의 이야기를 다시 합시다. 욥을 통해서 인간의 죽음이 뭐냐 하는 거예요. 욥은 죽여 달라고 했어요. 근데 욥이 생각한 죽음은 지 목숨이 끊어지고, 다시 흙으로 돌아가고, 태어나기 전으로 환원되는 것을 죽음으로 봤는데, 하나님의 죽음은 뭐냐 하면 창조자가 욥 앞에 나타나는 것을 죽음으로 본 겁니다. 창조자가. 미리 땡겨서 죽음으로 본 거예요. 심판주가 나타났을 때, 우리는 죽고 싶어도 도저히 죽을 수 없는 존재로 창조됐다는 것을 알게 돼요.

 

내가 괴로우면 죽으면 그만이잖아요. 자살 왜 합니까? 좋아서 자살합니까? 괴로워서 자살하는 거예요. 주일에 그런 이야기를 했죠. 괴로울 때, 내가 괴로운 거예요? 안 그러면 괴로움을 위해서 내가 있는 겁니까? 어느 쪽입니까? 괴로움이라는 것이 이미 상주해있었는데, 우리는 남의 이야기로 여겼죠. 남이 울고 있으면 그까짓 가지고 운다고 하는데, 막상 그 상황이 나에게 해당되는 상황으로 오게 되면 우리는 울게 되어 있습니다.

 

왜 우느냐 하면 울고 싶어서 우는 거예요. 아주 오랜만에 바른 소리하고 있죠. 그러면서 우리는 이러죠. ‘아, 내가 울면 안 되는데...눈물이 왜 자꾸 나지?’ 눈물은 본인이 조작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미친 오토바이를 탔다니까요. 우리 신체를 관리하시는 분이 따로 있어요. 그분이 울게 하면 우리는 울어야 돼요. 그분이 웃게 하면 우리는 웃어야 돼요.

 

선지자가 지금 그 관계 속에 주님하고 밀당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성신에 의해서. 선지자는 자기 선택에 의해서 죽었어요. 살려달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요아스는 자기 선택에 의해서 선지자를 죽이게 되는 겁니다. 그 둘이 한 짝, 한 세트가 되어서 장차 하나님이 이 땅에 어떤 식으로 오시는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감추어진 기원, 그라운드가, 감추어진 토대가 이 땅에 등장할 때에 어떻게 등장하는지를.

 

우리는 있지도 않은 자아를 만들어서 망상과 환상으로 평생을 보내고 있었던 겁니다. 내 신체를 내가 다룬다고요? 내 인생은 내가 살아서 꾸려나간다고요? 그 자아라는 게 어디에 있어요? 자기는 울고 싶을 때 울 건데, 자기가 울고 싶었는데, 자아가 울어놓고 나중에는 내가 울었다고 하는 거예요. 그럼 내가 울고 싶을 때 막 울 수 있어요? 지가 연기자에요? 지가 탤런트에요? 주어진 대로 인간은 울 때는 울 수밖에 없어요. 미워하는 것 할 수 없어요. 미워하세요.

 

전도서에 나오잖아요. 전도서 3장에 내가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고, 이 모든 때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지 못해요. 또 알라고도 하지 마세요. 타이밍을 맞출 생각하지 마세요. 그냥 막사세요. 울고 싶을 때 선택해서 우시고, 웃고 싶을 때 선택해서 웃으세요. 그 선택보다 선행적 선택에 의해서 나는 그 선택과 자유의지를 할당받고 배정받은 거예요. 개인적으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우리가 하는 말은 다 헛말이에요. 해도 소용없어요. 우리가 이런저런 말 한다고 주께서 그 말 안 듣습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자기가 체험된 것만 이야기하고 체험된 것만 바라게 되어 있어요. 체험된 것. 근데 선지자는 뭘 체험했습니까? 내가 죽는 것이 마땅하다고하는 것을 체험한 반면에, 요아스 왕은 “나는 왕이다.” 지금 이 안에 갇혀있는 겁니다.

 

이 안에 갇혀있기 때문에, 그것만 체험해서, 거기에서 자기에게 유리한 것은 받아들이고 불리한 것은 배척하니까, 오늘 마태복음 23장 35절에서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를 죽인 거예요. 죽였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는 무엇의 유발자다? 하나님의 내용을 아는 자를, 하나님도 모르는, 영도 모르는 우리가 죽이는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우리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들이 다 그래요. 인간의 모든 보편성은 나도 신이다, 나는 나밖에 모른다는 것을 이미 배후의 악마로부터 세뇌를 받았기 때문에 오직 자기밖에 모르는 식의 보편성이에요. 이게 보편성이라고요. 이런 인간의 보편성에게 예수님이 죽임을 당했다면, 이것은 그 당시 유대인으로부터만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고, 누구한테 죽임을 당했습니까? 오고 오는 모든 이들에게 예수님은 죽임을 당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는 되풀이해서, 반복해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자, 끝으로 하나만 더해봅시다. 그러면 선지자라는 것은 배후에 누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을 받은, 성령 받은 사람이죠. 그러면 이 선지자가 마지막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아까 새 언약이라고 했고, 그건 하나님이 죽은 거예요. 하나님 죽음. 아까 한 것을 다시 할게요. 인간이 목숨 끊어진 것을 죽음이라고 하지 않고, 죽어도 무덤에서 다시 끄집어내요. 수목장 할까요? 화장할까요? 하는데, 어떤 사람은 화장하면 안 되고 매장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진지하게 질문한 사람이 있어요. 매장을 해야 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무덤을 열 때 열릴 게 있어야 되지 않느냐 하는 겁니다. 열릴 게. 상어한테 먹혀가지고 온 태평양 바다를 돌아다니면 천사가 그거 다 수집한다고 얼마나 바쁘겠어요. 부속품 다 챙긴다고. 그래서 아예 천사를 도와주는 입장에서 매장해놓으면 무덤이 열리니까, 열릴 때 도와준다는 거예요. 그래서 화장하지 말고 매장해야 된다는 거예요.

 

마리아, 마르다 오빠는 죽어도, 살아도, 이미 산 사람이에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살았잖아요. 죽음이라는 것은 주님의 심판이 먼저 오는 거예요. 그래서 누가복음 18장에서 세리가 나는 죄인이라고 할 때, 니가 의인이라고 한 말이 뭐냐 하면 바로 심판주 앞에서 자기 자신을 보는 거예요. 그럼 평소에 우리는 누구 앞에서 삽니까? 나를 생각하는 남들의 기억을 의식하면서 살아가잖아요.

 

그런데 성령을 받게 되면 주님의 영이기 때문에, 주님의 기억 속에서 나는 어떻게 보이느냐가 중요합니다. 주님보시기에. 주님 보시기에 우리는 죄인이죠. 그럼 그걸 세상에 나가서 그대로 보여주고 사세요. 그럼 주님 앞에서 죄인이 되게 되면, 죄인이라는 말은 자기 이익을 고려하는 것이죠. 이런 것은 바로 죄가 되죠. 우리는 어쩔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신체가 남아있기 때문에.

 

다만 이익을 고려하되, 이걸 죄라고 알면 돼요. 자기이익, 자기 몸 편한 것, 이익은 어디서 생산되느냐 하면 남들이 기대하는 내 모습에서 생산돼요. 남들이 기대하는. “적어도 너는 이 정도는 되어야지.” “오랜만에 만났는데 니 얼굴이 엉망이더라.” “니 완전히 폭삭 삭았더라.”라는 말을 들었다면 밤에 잠을 못자요. 가서 거울 보면서 내가 이렇게 빠졌나?

 

주님이 뭐라고 하면 귓등으로 듣지도 않아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그런 말씀 들으면 잠이 와서 덮어버리는데, 남들이 얼굴 좀 빠졌다고 하면 사흘, 나흘 동안 온 정신을 거기에 신경 쓰고. 왜 그리 쪘냐고 하면 다이어트 한다고 레깅스 입고 온 폼은 다 재고, 요가하고. 이런 체험만 있는 거예요. 이런 체험만.

 

그래서 두 번째 강의 제목은 “선지자 체험”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가 목숨 끊어진 것이 죽음이 아니고, 주님 앞에서, 주님의 기억 앞에서 어떤 모습인가를 날마다 되새길 때에, 주여! 주님의 용서 때문에 살았다는 고백을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