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9:6-10 / 둘째 장막법
둘째 장막법
이근호
2024년 12월 15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9:6-10
(9:6)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를 행하고
(9:7)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 일 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9:8)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9:9)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9:10)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인간들은 첫 번째 장막법, 즉 옛언약 법에 갇혀 있습니다. 인간들은 자율권을 외치지만 실은 법 아래에 놓여 삽니다. 인간들은 악마와 한 패 먹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실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라는 법을 철폐하고 그런 법 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는 곧 자신의 운명은 스스로 개발하겠다는 겁니다.
자신의 죽음 이후의 사정을 책임질 신조차도 자기 마음에 드는 신을 원합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행한 것에 대해서 선과 악에 의해 판정내리는 신을 말합니다. 인간들은 선과 악으로 나중에 심판받기 전부터 자신에 대해서 신으로부터 보호받기를 원합니다. “신이시여 나를 보호하소서”
이런 정신말고 달리 무슨 마음이 있어 종교기관을 찾겠습니까? 그러나 자세조차 모조리 옛언약 안에 다 가두어진 상태의 인간 모습입니다. 창세기 4:14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가인은 동생을 죽여놓고서 법을 무서워하는데 하나님께서 그런 가인을 당장 죽이시는 처벌을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체가 ‘법 아래에 놓인 존재’임을 알리는 용도로 사용하십니다. 즉 이 세상 전부는 다 법 아래에 놓인 세상이요 그 세상은 그보다 더 높은 언약에 의해서 물로서 몰살당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보호달라고 호소하면서 누락한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에게 주었던 성소에 관한 법, 곧 율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독 이스라엘에게만 자신의 진심을 드러내셨습니다. 불신자는 이것조차 거부합니다. 문제는 불신자뿐만 아니라 소위 신자라는 자들도 하나님의 상소 취지를 안믿습니다.
성소의 취지는 첫 단계와 두 번째 단계를 나누어 내부적으로 공간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첫 번 단계, 즉 첫 번 장막법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활성화하는 공간입니다. 오늘날에도 세상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내가 하지 않는 한 아무 것도 없다”즉 내가 뭔가를 남겨야 뭔가가 일어난다는 겁니다.
반면에 성경은 말합니다. “내가 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언약 안에 가두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언약이 일어난 일이지 내가 일으킨 일이 아닙니다. ‘내가 한 일’이 아니라 ‘나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일을 하십니다. 결코 나의 일이 나타나게 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일은 옛언약과 새언약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이는 옛 언약 안에서 일어나는 것은 인간의 육신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5:50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전 15:50)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은 말씀과 같은 내용입니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마 17:5) 이 말씀은 단순한 부탁이 아니라 계속 이런 식으로 일들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그 예가 바로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현장입니다. 사람들은 스데반 집사님에게 돌을 던지게 되는데 그런 와중에 스데반 집사님은 다음의 말을 끝으로 죽습니다. 그런데 스데반 집사의 끝말을 듣는 태도가 특이합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귀를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스데반 집사님은 무슨 말을 한 것일까요?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행 7:53-55) 스데반을 죽이는 사람들은 옛언약 안으로 잡혀 있습니다.
그들은 둘째 장막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단순히 못듣는 것이 아니라 저항합니다. 마치 다락방에 설치된 아동용의 인디언 텐트는 다른 어른 가족들에 대한 아동의 대항적, 혹은 대칭적 공간인 것처럼 말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바로 이 낯선 공간이 있었고 그것을 그대로 그들에게 전달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귀를 막고 안 들을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만이 통하는 소위 ‘산 사람 끼리’의 언어의 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데반 집사님은 이미 죽었다고 여겨지는 분과 언어 소통이 됩니다. 마치 일본 영화 [러브 레터]에서 죽은 약혼자와 눈 넢인 산 속에서 소통을 시도하는 여주인공과 같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공간은 둘째 장막으로 성사됩니다. 그곳이 바로 ‘하나님 우편’입니다. ‘하나님의 우편이란 성령을 보내실 수 있는 공간’입니다. 이미 하늘에 계신 주님과 언어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은 이미 옛언약을 거쳐 유일하게 둘째 장막에 들어가신 분에 의해서 가능합니다.
그분이 현재 가 계신 곳이 ‘하나님 우편’입니다. 그곳에서 우리 주님이 그냥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리에 올가셔야만 비로소 가능해지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곳이 ‘하나님 우편’입니다. 그곳만이 실재로 계십니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모든 공간은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유란 실체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붙어있고 연락되는 사이를 말합니다. 에베소서 2:5-6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즉 성도는 이미 하나님 우편에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다. 이는 성도의 육신 자체가 이 땅에서 비유로 작동하기 위해서입니다. 비유한 그 안에 숨은 실체의 증상과 징후가 드러나는 대상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신이 자신을 평하든지 타인의 평이라는 양심에 호소한다든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로지 함께 계신 주님의 증상과 비유로 살아갈 뿐입니다. 그리고 성도 안에는 이미 성경이 통째로 들어와서 각가지 증상으로 남기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도착점이 이미 확정된 사실과 거기서 주님을 모시게 되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생각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