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9:1-5 / 어린 양의 시공간
어린 양의 시공간
이근호
2024년 12월 8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9:1-5
(9:1)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9:2)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9:3)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9:4)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9:5)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인간들은 성막을 거부해도 친히 설계하신 하나님께서 이 성막의 원칙을 취소하시지 않습니다. 이로서 성소는 이 세상에 대한 고발용으로 제작된 겁니다. 그 성소와 지성소를 제작한 취지는 그대로 새언약 속의 내용으로 채워집니다. 새 언약으로 인해 인간들이 사는 시간과 공간은 멸망 대상으로 등록되게 됩니다.
따라서 이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잘 살 것인가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왜 망해야 마땅한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멸망과 더불어 우리 인간도 같이 망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시간성, 곧 역사성은 하나님의 비-역사성과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단절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오늘날 하루하루를 열심히 삽니다. 그런데 그 누구를 살리기 위해 열심히 살지요? 그것은 내가 알고 있는 나를 살리기 위해서 열심히 삽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내가 알고 있는 나’를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나를 구원하십니다. 따라서 ‘내가 아는 나’와 ‘내가 미처 모르는 나’ 사이에 단절지어져야 합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동안 기거하던 고래 뱃속과의 관계는 무엇일까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자가 안 죽고 살아있는 공간으로서 하늘과 땅의 경계선으로 작용합니다. 즉 죽지 않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낯선 땅입니다. 요나는 분명 같은 배 탑승원들로부터 버림받아 바닷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죽었기에 비로소 고래 뱃 속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산 채로 말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나’의 죽음 뒤에라야 비로소 ‘구원되는 나’가 되기에 나로서는 살아 있는 나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살아 있다는 것은 역사적 기억의 축적으로 서의 자아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5:55-56에서는 이점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즉 인간의 자아는 사망으로부터 공격받고 쏘임을 당하는 대상체가 된다는 말입니다. “네 죄 짓고 있으니 빨리 선을 행하는 자로 전환하라”는 식으로 공격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늘 죄의식으로 추궁하는 존재는 악마입니다. 악마는 인간 내부에 악마의 말을 무시 못하고 가스라이팅 당하게끔 칩이 심어놓고 계속해서 추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이런 선악체계의 권능을 능가하는 율법이 끼어드십니다. 그리고 제대로 본격적으로 율법으로 인간들의 죄를 지적합니다.
그리고 끝장 볼때까지 밀어붙입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에 의한 조기 사망’입니다. 인간의 자아는 살아도 율법으로 볼 때 이미 사망자가 될 뿐입니다. 쉽게 말해서 악마는 인간으로 하여금 나쁜 짓이라는 인식으로 몰아세우지만 율법은 이 원칙을 극단적으로 사용하여 아예 인간을 이미 죽은 자로 규정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17에 보면,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율법이 한 일과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둘 사이는 끊어져 있습니다. 성소는 바로 그 안에 있는 모든 기구들을 ‘비역사적 효과’을 보여주는 것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아무리 역사가 흘러가도 일관된 원칙은 그대로 유지된다는 말입니다. 역사적으로 이미 자신이 알고 있는 자아는 자꾸만 자신을 포기 못하고 현명하게 행동하고자 합니다. 이는 이미 알고 있는 자아를 죽어서 천국까지 밀어넣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18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이 시도를 차단시키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즉 기존 자아를 붙잡는 자는 미련하기 싫은 겁니다. 자신이 성경으로 끌어모은 그 지식으로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겁니다. 이것은 여전히 옛언약의 성소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바깥에 구경하는 식으로 버티는 겁니다.
성소 안에는 제사장이 이미 제단에서 죽어버린 그 어린양의 대행자가 되어 그 피를 자기 몸, 자기 옷에 바르고 성소와 지성소 안에서 활동하게 됩니다. 성소의 배치된 모든 기구들은 역사적 존재자가 접촉해서는 결코 그 효과가 열려서 작동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제사장은 요나와 같이 이미 죽은 자로서 활동해야 합니다.
자신에 대한 죽음은 곧 자신을 조기에 죽게 한 그 비역사적 조치 속에서 새로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 예로 물두멍이 있습니다. “너는 물두멍을 놋으로 만들어 씻게 하되 그것을 회막과 단 사이에 두고 그 속에 물을 담으라 아론과 그 아들들이 그 두멍에서 수족을 씻되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단에 가까이 가서 그 직분을 행하여 화제를 여호와 앞에 사를 때에도 그리 할지니라”(출 30:18-20)
즉 물두멍에 씻지 않고 성소 안으로 들어가면 필히 죽는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제사장이 해야 할 일이 ‘역사적으로 이미 죽은 어린양이 비역사 속에서 비로소 살아 있음’을 드러내는 조건으로 살아 있는 겁니다. 떡 12개를 놓은 북쪽 테이불 위의 떡이나, 그것은 마주 보며 비쳐주는 등대는 가운데 통로를 어린양이 지나가는 위치라는 사실을 말해주기 위해 배치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성도나 교회가 이런 입장에 있습니다.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계 1:12-13) 성도는 자기 구원을 증거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에게 구원을 제공한 분의 비역사적 존재 위치를 증거하는 일을 하는 자입니다.
성도는 역사를 통해서 고장난 기계에 불과합니다. 자체적으로 일어키는 그 어떤 작동도 하늘나라에서 받아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령님께서 역사 안에서 깔아놓은 바리게이트이 걸려서 그들은 그저 구원됩니다. 그것을 ‘낚였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마 4:19)
구원이 되는데 있어 그 조건도 철거하도록 오늘날 성령으로 날마다 고발하시고 책망해주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참된 하나님은 십자가에 피흘리시는 어린양의 모습 뿐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