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역대상

역대상 3:4 / 주의 기억 / 211105

정인순 2021. 11. 5.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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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한윤범

20211105a 울산강의-역대기상(5강) 3장 4절 : 주의 기억
(강의:이근호 목사)


역대상 3장 하겠습니다. 3장 1절에,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아들들이 이러하니 맏아들은 압논이라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의 소생이요 둘째는 다니엘이라 갈멜 여인 아비가일의 소생이요 셋째는 압살롬이라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의 아들이요 넷째는 아도니야라 학깃의 아들이요 다섯째는 스바댜라 아비달의 소생이요 여섯째는 이드르암이라 다윗의 아내 에글라의 소생이니 이 여섯은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자라 다윗이 거기서 칠년 육개월을 치리하였고 또 예루살렘에서 삼십 삼년을 치리하였으며 예루살렘에서 낳은 아들들은 이러하니“ 여기까지 보겠습니다.

성경을 보실 때에 성경 안에 인물이 나온다. 성경 안에 사람들 나오잖아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오늘날 우리가 성경 안에 있는 사람과 합류가 되지 아니하면 구원이 안 됩니다. 성경에 있는 인물들이 나 따로 있고 그 사람들 따로 아니에요. 이걸 공동체라고 이야기하고 이걸 히브리서에선 하늘에 있는 교회, 총회라 하죠.

하늘에 있는 총회는 엘리야도 있고 모세도 있고 아브라함 있고 다 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란 말이죠. 아브라함이 먼저 태어났고 그 다음에 이삭 태어났고 그 다음에 야곱 태어났잖아요. 태어났는데 모이기는 누구 앞에 모으느냐 하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앞에 집결하는 거예요.

옛날에 국민학교 때 월요일 조회시간에 전교생이 누구 앞에 모입니까? 강대상 교장 선생님 앞에 모이잖아요. 교장 선생님은 훈시를 너무 오래해서 지루하긴 하지만 어쨌든 교장 선생님 앞에 모이지요. 성경에 나와 있는 인물들이 다윗도 그렇고 인물들이 누구 앞에 다 모이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에 앞에 모여요. 약속이 하나님이거든요. 약속 앞에 모인다고요.

그러니까 이렇게 원칙을 세우면 됩니다. 다윗의 끝은 약속과 만난다. 다윗의 끝은 약속과 이어져있다. 그러면 다윗의 끝은 약속과 이어져 있음이 성경에 나오잖아요. 이 말을 이렇게 나의 끝은 약속과 통한다. 성경에 나오는 다윗 끝은 약속이고, 현재 저와 여러분 끝도 약속이어야 하는 거예요. 그래야 약속 안에서 다윗이나 우리나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모세나 엘리야고 전부 다 약속의 나라에 같이 모이는 겁니다.

초반부터 물어보겠어요. 여러분 사람이 그립습니까, 약속이 그립습니까? 하루하루 사는 것이 무엇을 그리워합니까? 사람 그리워하는 거예요, 약속이신 주님 만나고 싶어서 주님 그리워하면서 살아갑니까? 너무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서 죄송합니다만. 사람은 보게 되면 사람을 그리워해요. 시집 간 딸이나 아들이나 하여튼 내가 아는 사람, 나한테 잘해줬던 사람, 그 사람을 그렇게 그리워해요. 또 내 마음에 드는 사람. 문자 보내고, 전화하고 외국에 있더라도 화상통화해서 잘 있나, 하지요.

그런데 성경에 나와 있는 사람들은 사람이 그리운 것이 아니고 약속이 그리워요. 주님의 약속이 그립다고요. 그래서 먼저 강의 시작하기 전에 이렇게 하겠습니다. 다윗이 가졌던 약속과 똑같이 약속 안에서 다윗과 만나지 아니하면 우리는 구원되지 못한다. 그것이 바로 구약성경, 역대상 이야기입니다.

다윗의 끝이 약속과 연결돼있다면 오늘날 우리도 다윗처럼 끝이 다윗에게 준 약속과 연결돼야 돼요. 그 약속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다윗언약이라 한 겁니다. 벌써 어렵지요. 다윗에게 준 약속, 하나님께선 다윗에게 약속을 주면서 이 약속에 들어오지 아니하면 천국 없~다. 천국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강의는 이겁니다. 어떻게 하면 다윗이 들어갔던 약속에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느냐? 그게 오늘 강의의 모티브, 핵심입니다. 내가 보고 싶은 사람을 언제 만나느냐, 이게 핵심이 아니고 다윗과 연결돼있던 그 약속이 분명히 있다면 우리는 무슨 수로 그 약속에 안에 들어갈 수 있느냐 말이에요. 내가 죽어도 죽음은 약속과 연결돼있거든요. 우리가 꼬리가 길다고 보면 돼요. 원숭이처럼 꼬리가 있는데 꼬리는 주님의 약속이 손으로 쥐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면 약속의 내용이 약속이 하나에 상수도시설에서 식수를 보내주는 원천이라고 본다면 그 원천에서 온 약속이 흘러 흘러서 오늘날 울산에 사시는 여러분들에게 배수관을 통해서 여러분 속에 쏙쏙 들어오고 있다고 보시면 돼요. 그래서 성도는 뭐냐 하면 성도는 행동과 말, 태도를 통해서 다윗에게 준 약속,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 약속이 나오는 사람은 성도요, 약속이 안 나오고 지 잘났다고 나오면 성도가 아니고 그렇습니다.

우리가 다윗에게 준 약속에 못 들어가는 이유는 우리가 모든 것이 약속으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고 모든 가치가 나로 종결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다 나 잘되기 위해서 성경도 보고 하나님 믿어버리면 이거는 종착지점이 나에요, 나. 날 무시하지 마라. 그게 종착점이에요. 그러나 다윗 같은 경우는 약속에 의해서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잖아요. 약속에 의해서.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는 것을 놀라운 기적이라 하잖아요. 그것만 기적이 아니고 다윗이 활동하는 것, 살아가는 것 모든 것이 약속에 준해서 일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적이에요. 그러면 오늘날 성도가 되어서 약속과 관련돼있다면 우리가 아침에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이것도 전부 다 기적입니다. 약속이 하수관을 통해서 나로 하여금 잠자게 했고, 나로 하여금 밥 먹게 했고, 나로 하여금 활동하게 했고. 전부 다 약속의 튜브를 통해서 계속해서 우리로 흘러, 흘러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님의 약속이 마구마구 발산되고 분출되는 거예요. 우리의 삶 자체가. 지금 원리가 그래요. 그러면 그 다음에 여러분들이 궁금한 것은 다윗이 받았던 약속에 나도 끼어들고 싶어요, 나도 합류하고 싶어요. 다윗이 받은 약속, 다윗만 받나 나도 받자. 이런 생각 들지요.

그런 생각이 들려면 우리가 처음부터 창조부터 다시 생각해야 되는데 그게 뭐냐 하면 어려워서 적겠습니다. 우리 주변에 나를 만든 자는 없다. 이걸 분명히 해야 돼요. 우리 주변에서 주위에서 아버지, 어머니와 같이 살면서도 나를 만든 자는 거기에 없어요. 그래서 천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하늘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는 거예요.

아버지, 어머니 몸을 통해서 DNA를 통해서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참 이거 중요한데요. 마리아와 예수님 관계가,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든 게 아니에요. 마리아를 통해서 예수님이 쏙하고 등장한 겁니다. 마리아는 무대의 커튼, 예수님은 무대의 주인공. 커튼 젖히고 예수님이 태어난 거예요. 마리아는 거기에 설정돼있던 하나의 커튼, 가리개에 불과한 거예요.

마리아가 성령으로 임신했을 때에 남편 된 요셉도 우습게 봤잖아요. 네가 왜 임신했어? 마리아는 난처한 거예요. 왜 난처하냐 하면 내가 임신했다는 말을 못하고 성령께서 임신케 한 거예요. 자기는 그냥 통과하는 파이프 같은 역할 밖에 안 한 겁니다. 이게 오늘날 성도의 삶이에요. 내가 이렇게 잘나고 이렇게 열심히 살아간다. 난 이렇게 믿음이 좋다. 그것 나타내려고 우리가 있는 게 아닙니다.

이 세상 사람들 봅시다. 우리라 했으니까 이건 성도라 보고요. 불신자, 성도 아닌 사람, 이 사람들은 너는 어디서 생겼느냐, 하면 우리 부모 때문에 생겼다고 이야기해요. 이게 말이 안 되는 게 부모는 어디서 생기느냐? 부모는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 때문에 생겼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럼 할아버지, 할머니 때문에 생겼으면 부모는 사라져야 되지요.

“너, 누가 만들었어?” 할아버지, 할머니가 만들었어, 이렇게 돼야지 쓸데없이 부모까지 끼어들면 안 됩니다. 왜? 할아버지, 할머니 있어서 부모가 있고 부모가 있어서 내가 있다면 부모는 할아버지 앞에 지워져야지요. 그럼 그 할아버지는 누가 만들었나? 증조할아버지가 만들었겠지요. 그럼 할아버지, 할머니 또 지워지지요. 고조할아버지 등장하면 증조할아버지 또 지워지는 겁니다.

지우고, 지우고, 지우고, 지우면 결국 불신자는 뭐냐 하면 내가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돼요. 약속이 없기 때문에.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르고 그냥 살아가는 거예요. 이건 뭐냐 하면 누가 나를 죽이는 것도 모르고 그냥 늙어죽는 겁니다. 약속이 없으니까. 돈을 열심히 벌고 넓은 아파트 살지만 도대체 그게 자기 무덤이에요, 자기 죽는 자리에요. 아파트 살다가 나중에 늙어죽잖아요. 아파트가 약속입니까? 주 아파트를 믿으라, 구원받으리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너 갖고 있는 현찰을 믿으라, 이렇게 되는 겁니까?

구원이란 약속과 연결돼있어야 돼요. 그래서 죽으면 약속과 통하는 사람이 앞서서 성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다윗에 합류해야 되는데요. 합류하기 전에 이 말을 먼저 하겠어요. 이렇게 하면 됩니다. “아무도 나를 만들지 않았다.” 아무도 나를 만든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 생겨나고 살아간다. 아무도 나를 만든 사람이 없는데 나는 지금 생겨나서 살아가고 있다. 이 텀, 이 간격 뭐로 메울 거냐 말이죠.

사람들은 하나님이 만들었다고 하거든요. 그러나 이 하나님은 가짜에요. 왜 그러냐 하면 다윗을 통해서 보면 하나님이 만들 때는 반드시 약속으로 만들었거든요. 그런데 약속을 떼어내고 약속 없고 하나님이 만들었다, 이 말은 그럼 하나님이 내가 지어낸 하나님인지 어떻게 분간이 돼요? 하나님 이용해먹으려고 내가, “주여 기도하오니 응답하소서.” 내가 만든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 날 만든 게 아니고 내가 이 세상에서 좀 더 안정성 있게 살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게 되면 이거는 하나님은 내가 만든, 일본말 써서 죄송합니다. 오모쨔おもちゃ 뭔 뜻인지 알아요? 장난감. 하나님은 내가 만든 장난감, 내가 만든 인형 같은 존재. 교회 가서 하나님 하지만 인형이에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왜 그렇게 됐는가? 약속이 없는 거예요. 약속이 없이 그냥 나한테 복 달라고 비는 것은 약속에 그런 게 없어요. 아무도 나를 만들지 않았다, 에서 다윗에 합류하려면 아무도 나를 만들지 않았다를 전제로 하고 내 주변에 그 어떤 인사, 사람이죠. 어떤 사람, 인물도 나를 만들지 않았다 이 말이거든요.

그러면 나는 누구 말 들어야 돼요? 나를 만들지 않은 그 사람 말을 들을 필요가 없지요. 그 사람 비위 맞춘다든지 그 사람의 협박에 넘어갈 이유가 아무것도 없어요. 당신이 나를 안 만들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하나님이 나를 만들었다. 하나님이 보입니까? 하나님이 안 보이는데요? 나는 보이고 나는 거울 보면 보이고 하나님은 안 보이고. 그럼 도대체 지금 내가 이렇게 존재하는 건 누가 만든 거예요, 하면 여기서 하나님의 약속이 나를 만든 거예요.

‘아무도’란 자리에 뭘 집어넣는가? 약속이 나를 만들었다, 이렇게 돼요. 약속이 나를 만든 거예요. 그래서 나는 약속결정체, 약속덩어리가 되는 겁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약속을 방출하기 위해서 약속을 그걸 어려운 말로 재현 또는 표현, 약속을 표하기 위해서 드러내기 위해서 나를 만든 거예요.

노아가 방주 안에 갇혀있습니다. 홍수가 그치고 비가 오지 않습니다. 그때 노아가 방주에서 뭘 보내느냐 하면 방주 안에 비둘기도 까마귀도 있었는데 비둘기를 보낸다고요. 자,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방주에 있던 노아가 왜 비둘기를 어디에 보냈을까요?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에요. 노아가 비둘기를 도대체 어디에 뭐가 있는 줄 알고 보낸 겁니까? 이거는 답변을 원하는 게 아니고 답변 주기 위해서 내가 그냥 나 보고 하는 이야기니까 부담 갖지 마세요.

노아가 비둘기를 어디로 보냈느냐 하면 약속에다 보낸 거예요. 언제 홍수 끝나면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 주실 거죠. 하나님의 약속에다 보낸 겁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쉬워요. 이걸 알았으니까 이건 묻는 것에 답변해보세요. 요단 강 세례 받을 때 하늘에서 예수님에게 뭐가 왔지요? 비둘기 같은 게 왔지요. 뭡니까? 지금 비둘기 같은 성령이 오셨거든요.

이게 뭐냐 하면 노아 방주가 이 세상에 전부입니다. 다른 세계는 없어요. 노아 방주 안이 전부인 세계에요. 그런데 약속은 뭐냐 하면 노아 방주 바깥에 약속이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내가 있는 이 세상과 그리고 나로 하여금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그것은 나 바깥에 있는 약속이 나를 울산바닥에서 태어나서 살게 했다. 이게 바로 약속이에요. 여기서 노아는 비둘기를 보낸 겁니다. 거기 계신 줄 내 압니다. 이 말이에요. 약속이 노아 방주 바깥에 주께서 약속된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다는 걸압니다, 라고 보낸 거예요.

<러브레터>라는 일본영화에 나오잖아요. 오겡끼 데스까, 라고 하잖아요. 거기 잘 계시지요. 자기가 사랑했던 남자가 죽었어요. 고등학교 때. 죽었는데 어디 묻혔느냐? 저기 산 속 어디에 묻혀있는 거예요. 이미 죽었는지 알지만 홋카이도의 삼십 센티 눈 덮인 그 날의 주인공, 오겡끼 데스까, 하는 거예요. 거기 잘 계시지요. 오겡끼 데스까까까까……, 산에 메아리가.

왜 우리는 이 울산바닥에서 그렇게 못 삽니까? 주님 거기 잘 계시지요요요요……. 나는 약속과 연결돼 있습니다다다다……. 예수님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약속된 것을 다 이루기 위해서 오신 분이란 것을 비둘기 같이, 비둘기란 것은 내가 있는 세계 말고 다른 세계와 연락책이에요. 비둘기를 보냄으로써, 그런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이 오거든요.

성령을 보냄으로써 예수님 빼놓고 다른 인간은 누가 나를 만들었지? 부모를 통해서 만들었지만 정작 누가 무엇 때문에 왜 나를 만들었지 전혀 모르고 있는 그 세상에서 성령을 통해서 만드신 분이 이 땅에 합류한 겁니다.

이게 성경에서 우리가 역대상 3장 하지만 다윗 인물 나오게 되면, 다시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다윗에 합류하지 않으면 우리는 영생이고 구원이고 없습니다. 아브라함 나올 때 아브라함 세계에 합류하지 않으면 영생이고 구원이고 없어요. 그러면 그 합류를 어떻게 하느냐? 그 아이디어를 말씀드립니다. 합류를 어떤 식으로 하느냐? 어떤 식으로 하면 합류가 되느냐? 어떻게 하면 거기에 계시지요요요가 되느냐 이 말이지요.

자, 거미 있지요. 왕거미, 큰 거미. 거미가 밤에 어디에 주무십니까? 밤부터 새벽까지 어디 주무십니까? 자기 집에 자지요. 그런데 거미집이 이래요. 공중에 대롱대롱 매여 있습니다. 두 나뭇가지에서 거미가 한복판에 대롱대롱 매여 있는 이게 거미집이에요. 공중입니다. 공중에 매달려있는 거예요.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약속된 사람은 이 지상에 토대가 없어요. 그냥 멍하니 공중에 하늘과 땅 사이, 공중에 매달려 있는 식으로 사람이 달라집니다. 매달려 있음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어떤 부모든 어떤 할아버지든 당신은 나를 만들지 않았다가 뚜렷하게 드러나요. 왜? 공중에 매달려 있으니까. 거미집 이야기하는 이유가 이거에요. 어떤 땅의 기초도 성도에게는 없다가 됩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추방했을 때 어디로 추방됐느냐 하면 근본 된 토지로 추방됐거든요. 땅이 기초가 되었어요. 토대가 되었어요. 모든 인간은 땅에 삽니다. 그런데 이미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노아 경우에 그 땅이 노아의 영원한 토대가 될 수 없고 기초도 될 수 없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물로써 그 완전히 물로 심판해버렸어요. 네가 의지할 토대는 하나님에게 비하면 이거는 멸망의 대상이 되는 거예요. 땅에 사는 사람은.

노아로 하여금 땅으로부터 붕 뜨게 만들었어요. 방주 안에 있는 노아 신세가 어떤 신세냐 하면 갈 데도 없고 떠난 곳도 되돌아갈 수 없고 붕 떠버렸어요. 완전히 여덟 식구가. 붕 떴을 때 노아가 할 수 있는 것은 약속이 있잖아요. 비둘기 보내고 까마귀 보내는 겁니다. 우리를 붕 뜨게 만든 분이 언젠가는 안착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약속대로 주셨다, 이걸 믿었던 겁니다.

그러면 방주는 뭐가 되냐 하면 기존의 인간들이 이 세상이 전부라고 알던 이 세계에서 우주선처럼 떠나서 아무도 몰라요. 노아가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몰라요. 노아 본인도 몰라요. 비둘기가 앞서서 가이드가 됩니다. 성령이 앞서서 가이드가 될 거예요. 기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 받아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나올 때 갈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이삭 데리고 모리아 산에서 잡아 죽이려 할 때 이삭이 뼈아픈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합니다. “아버지여, 불쏘시개는 있는데 제물이 안 보이는 네요. 제물 없이 무슨 제사를 드립니까?” 그때 아브라함 한 유명한 말, 그래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에요. 뭐냐 하면, “주께서 친히 준비해두실 것이다.” 그게 아브라함의 약속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과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이고 구원이고 없어요. 붕 뜬 체험, 이 땅에 디딜 땅 자체를 주께서 이제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공중부양은 허경영이만 하는 게 아니에요. 두 다리가 떠야지. 주님이 구름 타고 갈 줄은 열두 제자 가운데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니고데모도 몰랐어요.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한테 이야기해요.

나는 들릴 것이다. 이 땅에 어떤 기초도 두지 않고 떠날 것이다. 마치 모세가 놋뱀을 든 것 같이 나는 이 땅과 빠이빠이 할 것이다. 그게 약속이에요. 중량 너무 나가면 안 되지요. 살 좀 빼야 되겠지요. 아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그 짐은 땅에다 놔두고 그냥 빈껍데기만 올라오라 이 말이죠.

그래서 출애굽기 19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육십만 이스라엘 백성을 어디서 수송하느냐 하면 독수리 날개에 얹어서 애굽에서 나오게 한 거예요. 그 독수리 날개 평수가 몇 평 쯤 됩니까? 독수리 날개가 도대체 폭과 길이와 높이가 얼마나 되기에 남자만 육십만을 다 실어 올라가는 거예요? 놀랍지 않습니까?

취지가 뭐냐 하면 이스라엘아, 너의 기초는 하늘에 있지 땅에 있지 않은 유일한 나라가 너다. 너의 공동체에요. 그래서 교인끼리 싸우지 마세요. 둘 다 땅에 기초도 없으면서. 둘 다 기초도 없으면서 나는 이만큼 잘 나간다, 나는 이만큼 돈 잘 번다. 그런 자존심 싸움 왜 합니까? 그건 다 세상에서 온 건데요. 우리는 붕 떠야 돼요. 너무 떠서 얼굴이 노랗게 뜨면 곤란하지만.

우리는 이 지상에서 아예 도끼 같은 게 있거든 자기 발모가지를 잘라버리세요. 하여튼 이 땅에서 붕 떠야 돼요. 땅의 기초가 없다는 점에서 성도와 성도끼리는 통하는 이야기가 있어야 됩니다. 둘 다 땅? 나 잊었어. 땅에서 뭘 해야 되는지 잊어버렸어. 나는 거미 같아. 공중에 붕 떴어. 나는 주님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붕 떠있는 상태야.

천국에 도달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땅을 떠나지 않지만 어쨌든 하늘과 땅 사이 경계선에 거미집처럼 붕 떠있는 거예요. 물론 거미집은, 거미를 성도라 한다면, 촘촘한 거미줄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의 망이죠. 약속의 그물망. 뭐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전부 다 약속이 되어서 주신 거예요.

세상 종교와 복음과의 차이, 기독교도 포함해서 세상 종교로 보는데, 세상 종교와 복음의 차이가 뭐냐? 세상 종교는 구원받기 위해서 자기를 비우라고 해요. 불교도 그렇고 천주교도 그렇고 기독교도 그래요. 자기를 비워라. 비우면 채워줄게. 이거거든요. 이게 세상 종교에요. 이걸 어려운 말로 빈 형식이라 하는데 빈 형식을 만들면 내가 채워줄게.

그런데 복음은 뭐냐 하면 빈 형식을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만들어주셔요. 빈 형식을. 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붕 뜨는 것도 내 힘으로 붕 뜨는 게 아닙니다. 내 것이라고 여겼던 것을 주님께서는 파내는 겁니다. 내 것이라고 여기면 이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돼버려요.

모든 인간이 불안하고 공포에 떠는 이유는 소유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뭔가 갖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자존심을 갖고 있든지 특히 뭘 갖고 있는가? 자기의 과거역사를 갖고 있어요. 내가 왕년에 이렇게 잘 나갔다. 그걸 갖고 있으면 그것이 무너질까봐 그것이 파괴될까봐 노심초사 매일같이 우리는 벌벌 떱니다.

임대아파트 분양받아야 되는데 돈도 없고. 임대아파트 누구 겁니까? 내 것이잖아요. 그럼 그건 기초가 있네요. 붕 뜬 게 아니잖아요. 나는 아파트 안에서 아파트를 내 기초로 해서 살았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 아파트를 주님의 것이라고 좀 주님이 주신 빈 형식이라고 그렇게 한 번 생각해보세요.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다윗에게 합류하지 않으면 우리는 구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끝에 약속과 연결돼있거든요. 우리의 원숭이 꼬리도 끝에는 결국 무엇과 관련돼있어요? 약속과 연결돼야 돼요. 우리는 꼬리가 길어야 되고 그 긴 꼬리가 약속과 접촉돼야 돼요. 약속에서 뿜어진 연결된 쏟아져 나왔던 빠져나왔던 그 약속이 우리의 몸체를 휘감고 있어야 돼요. 그래야 우리는 이 땅에서 약속에 의해서 말씀에 의해서 포위된 채 거미줄처럼 붕 떠있는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에요. 이런 이야기하면 여러분 쯤 되면 이해가 돼요. 자, 말씀이 있다. 지키자. 이거 바리새인입니다. 말씀은 못 지킨다. 이게 바로 구원받은 세리입니다. 누가복음 18장. 말씀을 지키게 되면 우린 여기서 뭘 요구하느냐 하면 나의 소유성을 요구하게 돼있어요. 지키면 복 준다면서요? 그 복 주는 것 나를 창고로 삼아서 주님 복으로 가득가득 채워주시옵소서, 라고 평소에 소유성을 통해서 나를 정립하던 그 사고방식이 그게 안 없어져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어떤 사람이 직업이 있고 이 사람도 직업이 있을 때 둘 다 직업이 있을 때 사람들이 만났을 때 자기보다 더 월등하게 소득이 많고 하면 사람이 기가 죽어요. 애들도 마찬가지에요. 자기 아버지가 잘 나가는 사람, 못 나가는 사람 있으면 선생님이, “너거 아버지 뭐하시노?” 나오지요. 우리 아버지 조폭인데요, 하면 맞는 거예요.

사람 대 사람이 만나면서 우리 주변에 사람들이 있잖아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아무리 기대를 걸고 혜택을 줘도 그 사람들을 믿을 수 없는 이유가 그 사람들 토대를 보잔 말이죠. 자기 소유된 것을 바탕으로 나한테 무슨 잔소리를 한다는 것은 이것은 약속이 아니고 비약속, 약속된 게 아니에요. 다윗의 세계에 갈 수가 없습니다.

역대상 17장 13절에서 14절 봅시다. 제가 읽습니다.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니 나의 자비를 그에게서 빼앗지 아니하기를 내가 네 전에 있던 자에게서 빼앗음과 같이 하지 않을 것이며 내가 영영히 그를 내 집과 내 나라에 세우리니 그 위(위치)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이렇게 돼있거든요.

지금 다윗이 훌륭하다고 하면 안 되고 다윗을 하나의 구심점으로 해서 하나님의 약속은 영원히 견고하다 이 말입니다. 다윗이 안 죽는다는 말이 아니고 다윗을 구심점으로 해서 하나의 왕거미로 해서 그 주변에 무슨 약속을 다윗에게 갖다 붙였느냐 하면 영원히 망하지 않는 나라를 다윗 중심을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께서 알려줬다는 게 중요한 사실이에요. 영원한 나라.

그래서 이 영원한 나라를 다윗 말고 다윗만 천국 가는 게 아니잖아요. 다른 사람도 가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러면 다윗에게 둘러싸였던 그 약속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다윗의 나라에 우리가 합류할 수 있는 거예요. 그 방식 외에는 천국 가는 방식이 없어요. 오직 약속이 약속되게 우리를 사용해야 돼요. 우리가 약속을 지키는 게 아니고요.

약속을 지키는 게 아니고 약속이 우리를 소요하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나 되기 위해서 그동안 많이 소유했잖아요. 주택이든 택지든 땅이든 돈이든 소유했잖아요. 애들까지 자식도 갖고 있잖아요. 아내, 남편도 있고 집도 있고 명예도 있고 자존심도 있고 뭔가 자꾸 모든 게 소유잖아요.

소유가 있으니까 약속이 들어올 때는 이미 기초가 자기 소유에 기초를 두고 있으니까 약속이 그냥 오지 않고 이 소유성을 무산시키는 겁니다. 네가 이것 믿고 살았냐? 그럼 너 끝났어. 이건 아니야. 소유를 버리란 말이 아니고 여기에 의미와 가치를 약속 되신 분이 일체 인정 안 해준다 이 말입니다.

“네가 집 살면서 몇 억 받았어?” “한 15억 모았습니다.” “15억 그것으로 구원받겠나?” “못 받지요.” “그러면 너는 구원받는 토대가 있어야지 15억은 토대가 아니야.” 너의 너 됨의 토대가 아니고 네 잘남의 토대가 아니다 이 말이죠. 다른 게 있어야 돼요, 다른 게. “그러면 약속을 믿지요.” 약속은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 이야기가 제일 말이 안 통해요. 하나님의 약속은요 하나님 말씀도 못 지키는데 무슨 약속을 믿어요. 예수 믿는다고요? 인간에게 예수 믿는 사람 한 명도 없어요. 지 능력으로. 예수를 믿을 것 같으면 예수님 십자가 사건이 생겼겠습니까? 안 생겼지요.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은 아무도 없음을 드러내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십자가 앞에 세워졌다는 말은 무슨 뜻이에요? 나는 주님을 사랑한 적 없고 주님을 소망한 적도 없고 주님을 그리워한 적도 없고 주님을 믿은 적이 없습니다. 바로 그게 뭐도 없고 뭐도 없고 뭐도 없고 이게 뭐냐 하면 나로 출발한 어떤 토대나 기초가 없나이다하는 거예요.

이게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세리가 이야기한 거예요. 바리새인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하고 했지요. 바리새인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옆에 있는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했다고요. 지금 바리새인은 누구와 비교하느냐? 사람 대 사람과 비교하고 있어요. 비교대상이 안 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 그렇게 하고 세리는 뭐냐? 사람과 비교 안 합니다. 나는 저 바리새인과 같지 아니하고, 그렇게 말 안 해요. 그냥 누구 앞에 서 있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 앞에 서 있어요. 예수님 앞에 설 때는 나의 어떤 토대나 기초가 돈이 있어도 그게 나의 기초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나의 영생에 토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대로 그냥 받아들이는 거예요. 주 예수 외에는 더 귀한 것이 없다는 것을.

세리를 누가 놀린다 했습니까? 세리를 바리새인이 놀리죠. 그러면 바리새인 붙들고 한바탕 싸웁니까? “니가 날 알아? 뭔데 까불어.” 싸웠습니까? 세리는 고개를 못 들어요. 감히 고개를 못 들고 주님 앞에서, “주여, 나 같은 것은 지옥 보내야 마땅합니다.” 왜? 주님 앞에서 죄인이기 때문에. 바로 그게 약속이에요. 그게 토대가 돼요. 나의 토대.

내가 갖고 있던 소유를 버리란 말이 아니고, 그러면 무소유가 구원의 근거가 되니까 그건 큰일 나는 이야기입니다. 무소유해서 법정 스님을 거론하게 되면 안 돼요. 무소유가 아니고 수십억을 갖고 있더라도 나의 기초는 수십억의 소유성에 있는 게 아니고 나를 죄인으로 간주하시는 바로 주님이 나의 기초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주님을 믿지 못하는 자기 때문에 나는 주님 앞에 죄인 되고 그게 주님의 주 되심의 유일한 기초가 뭐냐? “난 주님 앞에 죄인입니다.” 그거에요. 주님의 주 되심에 활용된 겁니다, 우리가.

자, 그 다음에 제가 진짜 이야기하려는 것은 지금부터에요. 제가 질문을 하게 되면 제 뜻을 확하고 느낄 겁니다. 다윗이 자기 자신을 알게 된 것이 권력을 다 만들었을 때입니까, 밧세바와 간음하고 나단 선지자 등장했을 때입니까? 어느 때 자기 자신을 알았어요? 어느 때 자기가 이스라엘 왕이 된 걸 알았습니까? 권력이 있을 때가 아니에요.

여기 본문 4절에 보게 되면, “이 여섯은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자라 다윗이 거기서 칠년 육 개월을 치리하였고” 이렇게 돼있지요. 칠년 육 개월 치리하고 그 다음에 삼십삼 년 치리했다고 돼있거든요. 예루살렘에서. 헤브론에서는 열두지파를 다스릴 때가 아니고 베냐민지파와 유다지파를 다스릴 때 칠년 육 개월이에요. 예루살렘에서 다스린 것은 삼십삼 년이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 남편을 죽여 버린 그 때가 헤브론이 아니고 예루살렘이었어요. 예루살렘은 누구의 성이냐 하면 하나님의 성이에요. 다윗이 하나님의 성에 포함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다윗에게 약속의 기초를 깔아두는 절차가 필요했던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내가 사람에게 죄 지은 게 아니고 하나님 앞에 죄 지었다는 것을 아는 그 순간이 와야 돼요.

여러분 누가 앞에 죄 지었습니까? 사람한테 죄 지은 적 없어요. 둘 다 기초가 없기 때문에 사람한테 죄 지은 게 아니에요. 그럼 누구한테 죄 지은 거예요? 십자가 사건이 뭡니까? 모든 인간은 예수님을 몰라서 죽였다 이거잖아요. 십자가 앞에 내가 세워진다는 것,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가 나한테 쳐들어왔다는 말은, 내 구원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음을 감사하고 기뻐하는 거예요. 이게 약속된 사람입니다.

방금 한 것 이렇습니다. 다윗이 있는데 두 종류의 다윗이 있어요. 한 다윗은 권력이 있어요. 권력으로 칭칭 감은 다윗, 한 다윗은 부모로부터 받은 죄로 칭칭 감은 다윗이 있어요. 처음에 다윗은 권력을 쥐었잖아요. 권력의 다윗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 죄인의 다윗으로 바뀐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약속이 주어지게 되면 권력의 다윗이 개인의 다윗이 되는 겁니다.

이것도 동일하게 합류되지 아니하면 똑같은 경우가 우리에게 발생되지 아니하면 우리는 약속의 나라, 천국에 들어가질 못해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저한테는 권력이 없는데요,” 이렇게 하지요. 세상에 권력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소박하게나마 가만 들어보면 나름 권력들을 소유하고 있어요.

이번에 사법고시 수석합격한 사람 누구요? 내 아들이요. 이게 권력이에요. 이번에 땅 던져놨는데 열 배 오른 사람 누구지요? 내 땅이에요, 내 땅. 권력이라니까 권력. 권력은 무슨 뜻이냐 하면 얼추 내 힘이라도 나를 지킬 수 있는 것은 다 권력이 돼요. 나를 나답게 지킬 수 있게 하는 힘 있잖아요. 그게 권세고 권력입니다.

그래서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은 사람의 만남이 아니고 네가 갖고 있는 권력과 내가 갖고 있는 권력의 만남이에요. 무시하지 마라. 이게 뭡니까? 니 권력이 세냐? 내 권력이 더 센 것 같은데?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권력을 그냥 유지하게 되면 이것은 약속의 다윗이 아닙니다. 역대상 17장에 나단 선지자가 나오지요. 그 뒤에 기도한 대목이 길게 나옵니다. 이제부터 어려우니까 여러분 정신 차리셔야 돼요. 진짜 좀 어려운데요. 여러분 감당할 수 있으니까 밀어붙입니다.

인간의 권력은 나의 기억에서 옵니다. 인간이 기억하는 것은 자기가 나를 지킬 수 있는 그런 영토, 영역 그 안에 대해서 권력에 대해서 기억을 해요. 무슨 말이냐 하면, “기억이란 나의 나다움을 형성하는 경계선까지만 저장하는 것” 기억이라 하는 것은 나의 나다움 경계선 안의 내용을 아는 그게 기억이에요.

예를 들면 엄마가 일곱 살 먹은 애가 있는데 듣는 줄도 모르고 부부끼리 이야기하면서, “여보, 오늘 당신 저녁하기도 귀찮은데 오면서 피자 사올게.” 그런데 아버지가 바쁘다보니까 잊어버렸어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애가, “아빠, 피자 사왔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애가 아빠한테, “아빠, 우리 남북통일 언제 되는데?” 이렇게 물었습니까. 애가 본인이 갖고 있는 기억이란 나를 나답게 행복하게 만드는 영토 안에 지식이에요.

이게 뭐냐 하면 이걸 크게 쓰면 이렇습니다. 이게 삶의 안정성이에요. 나의 삶의 안정성이 되게 되면 인간은 자기의 모든 노력을 거기서 스톱이 돼요. 삶의 이유고 목적이 되니까. 나의 나다움이 얼추 됐다 싶으면 인간은 만족한다 이 말입니다. 나의 나다움을.

아가씨가 팔년 동안 연애했다 칩시다. 팔년 동안 연애하며 돈 모았단 말이죠. 같이 돈 모아서 결혼하고 아파트 마련하게 되었을 때에 그 아가씨가 아프리카 난민문제 해결하려고 신경 쓰겠어요, 안 그러면 무엇 때문에 좋습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이제는 부부가 된 것이 기쁘겠지요. 기껏 인간의 나다움의 영토가 그것까지예요. 그 사람에게는 그것까지라고.

모든 인간은 나름대로의 자기 영토가 있고 그 영토 안에는 자기가 왕이에요. 주권자라고. 자기가 먼저 다윗처럼 왕처럼 구는 거예요. 나의 나다움이라 하는 것은 나의 절대적인 영토 안에 있으면 그게 안정성만 보장된다면 그걸로 만족하고 힘들지만 그걸로 견디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 영토에서 벗어나질 못해요. 자기 영토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약속의 세계에 못 들어가는 겁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 붙들고 뭘 했느냐 하면 예수님 붙들고 우리끼리 우리의 영토를 하늘나라를 만들어봅시다. 이게 열두제자의 한계에요. 그들은 예수님과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사전에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고난 받는다고 하니까 베드로가 얼마나 놀랬는지요. 주여, 그럴 일 없습니다.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하니까 주님 뭐라 했습니까? 이 사탄아, 물러가라 했지요.

교회 온 교인들이 늘 생각하는 기도 내용도 그렇고요 기도 내용이 나의 나다움을 보장할 수 있도록 하나님 도와달라는 거예요. 나의 나다움, 그게 소유성이고 그게 자기에게 전부라고 여기는 겁니다. 이거는 약속의 나라가 아니에요. 그거는 깨져야 돼요. 우리의 인생의 끝은 약속과 관련돼야 되는데 내가 구상한 내가 생각한 이만하면 뭐 연금 타고 이만하면 사람 사는 것 괜찮다. 사람 사는 것 욕심 안 낸다. 이게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거기서 벗어나야 돼요. 어떻게 벗어나는가? 10분 후에.


20211105b 울산강의-역대기상(5강) 3장 4절 : 주의 기억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첫째 시간 끝에 나의 기억은 내가 갖고 있는 그 영토, 그 범위 내에서만 기억하잖아요. 그런데 지금 인간 기억이 중요한 게 아니고, 오늘 제목을 이걸로 하겠습니다. 주의 기억. 우리가 미처 모르는 주의 기억, 내가 기억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내 거라면 기억하잖아요. 주님의 기억 속에는 약속이 들어있어요.

그래서 내 기억이 우세하냐 아니면 주님의 기억이 우세하냐? 주님의 기억이 와서 내 기억을 덮쳐버릴 때 성도가 되는 겁니다. 주님의 기억은 약속이란 형식으로 오거든요. 그러니까 다윗의 입장에서 다윗은 아무것도 한 것도 없어요. 하나님께서 약속을 다윗에게 퍼붓는 거예요. 다윗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약속과 관련돼있습니다. 오늘날 성도도 마찬가지에요.

성도는 주변의 그 어떤 인물에게도 사과하지 마세요. 너무 과격한가? 주변의 어떤 인물에게도 사과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내 기억에 준해서 사과하면 안 돼요. 일어난 모든 일은 어디서 나오는가? 주님의 약속, 주님의 기억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은 뭘 기억하느냐? 창세전부터 기억 다해요. 창세 끝날 때 종말 그 이후까지 주님의 기억입니다.

그 주님의 기억 속에서 너는 성도 돼야 하기에 주께서 일방적으로 자기 사람이 갖고 있는 나의 기억을 파괴합니다. 부셔버려요. “주님, 이건 제 것이고, 여기까지는 제 것입니다.”라는 것을 파괴시켜버립니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헌금을 하다가 죽었잖아요. 부부가 다정하게 한 날 다 죽었지요. 뭐 다정한지 모르겠지만 죽었잖아요. 그 사람이 헌금을 아예 안 했으면 몰라도 왜 해놓고 죽습니까? 그 헌금에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기 기억을 계속 집어넣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여기 피아노 누가 기증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피아노 기증한 사람 있다면 피아노 볼 때마다 자기 기억이 여기에 담겨있어요.

인간은 자기가 행한 것에 대해서 너무나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복음을 방해해요. 하나님 약속을 방해합니다. 왜? 자기가 기억한 것은 자기가 잘났다는 것을 증명할 증빙할 그 기억만 자기가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애가 부모를 기억하는 것과 부모가 애를 기억하는 것이 폭이 차이가 납니다. 애가 기억하지 못한 것까지 부모는 다 기억하거든요.

그래서 부모는 애를 둘 이상 낳았다, 형제가 있다면 첫째에 대해서 굉장히 집요하게 애정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그 기억을 행복했던 기억을 부모가 놓치지 않고 싶어서 그래요. 애 처음 낳을 때 얼마나 예뻤는지. 지금 애가 사십이 넘어도 예뻤데. 둘째 애는 시시하고 첫째 애만 오면 맨 발로 와서 아이고 먼데서 뭐하려고 바리바리 싸들고 여기까지 오느냐고 반기지요. 둘째, 셋째는 없고 첫째는 그렇게 특수하게 보고.

그래서 그렇게 해주니까 첫째도 둘째, 셋째와 달리 부모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관심을 갖고 있어요. 다 그렇다는 건 아니고요 대체로. 큰 딸, 큰 아들은 다른 형제와 달라요. 이상하게 책임감 같은 걸 갖고 있어요. 왜냐하면 연로하신 아버지, 어머니가 나의 나다움, 내가 얼마나 효자인 것을 보여줄 수 있는 나의 나다움의 영토 안에 놓여있다고 내가 기억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이게 약속이 적이 될 줄이야, 하나님의 약속의 적이 될 줄이야 상상도 못했지요. 로마서 1장 보겠습니다.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 나올 때 1장 2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절에,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그 뒤에 나오는 게,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라고 돼있지요.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 이게 얼마나 놀라운 말인지 하나님이 인간 혈통을 통해서 나타나는 게 그냥 하나님이 하늘에서 뛰어내려오는 것보다 더 놀라운 기적이에요.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들 생각을 다했지요? 그냥 하나님은 하나님 되면 되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재벌이 자기 회사 회장이면 그냥 회장차림으로 자기 회사 본사에 오면 되는데 왜 의도적으로 거짓꼴로 쫓겨나가는 식으로 회장님이 온다면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느냐 말이죠.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하나님대로 하게 되면 벌벌 떨면서 잘못했습니다, 이러면 게임 끝나는 데 왜 사람이 되셨고, 왜 그냥 사람이 아니고 다윗의 혈통으로 오셨느냐 말이죠. 누구든지 다윗처럼 되지 아니하면 구원은 없는 거예요.

여기서 죽음에 두 종류가 있어요. 하나는 고전적인 죽음, 하나는 약속에 의한 죽음. 고전적인 죽음, 인간들이 다 아는 죽음은 그냥 숨 끊어지는 거예요. 숨 끊어지는 옛날 방식, 인간들이 알고 있는 건 이 죽음이에요. “너, 까불면 죽인다.” 또는 히브리서 2장에서 마귀가 인간을 협박할 때 이 고전적인 죽음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내린 결론이 뭐냐? 예수님을 어떻게 한다? 고전적인 죽음으로 아예 없애버린다는 거예요. 무덤에 가둬두는 거예요. 죽여서 무덤에 집어넣어서 살아 있는 우리와 같이 못 살게 만든 이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기껏 협박, 겁박한다는 것이 고전적인 죽음이에요.

그럼 약속의 죽음은 뭐냐? 숨 끊어지는 게 아니고 약속된 죽음은 살아 있으면서 죽는 거예요. 몸은 살아 있는데 죽은 거예요. 이건 뭐냐 하면 나의 것, 나의 고유의 것이 끊어지는 걸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컴퓨터에 프로그램 있잖아요. 한글이라든지 그 프로그램 죽이는 방법은 뭡니까? 간단한데. 전기 플러그 뽑으면 되지요.

주님께서 내 인생, 아까 내 영토라 합시다. 내 영토, 또는 나의 나다움 여기에 개입해서 나와 내 고유한 것, 본연의 것에 뛰어들어서 플러그를 뽑아버려요. 나는 장차 이렇게 돼야지, 하는 거기다가 가위로 끊어버린다고. 그럼 나의 육체는 아직 숨 쉬고 있어요, 안 쉬고 있어요? 숨 쉬고 있는데 나는 나로부터 죽은 자가 되는 거예요.

왜? 내 것이 없으니까, 나만이 갖고 있는 그 고유성, 아까 이걸 뭐라 했습니까? 나의 기억. 주님은 나의 기억을 개 무시해버리는 거예요. 플러그 뺏다. 전기 끊었다. 네 기억은 하등에 네 구원에 도움 되지 않는다. 네가 어디서 헌금 얼마 했으며 예배당 나온 역사가 오십 년이며 그런 건 일체 나의 기억이에요. 그런 식으로 구원 안 해줍니다.

구원의 원형이 되신 것이 예수님이거든요. 예수님이 오셔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 유명한 겟세마네 기도인데요, 겟세마네 동산이라 하지만 별로 높지도 않아요. 야산보다 더 낮아요. 자, 기도내용을 여러분 다 아십니다. 내 뜻의 플러그를 뽑는 거예요. 내 뜻의 기억을 나에게서 끊어버리는 겁니다. 이게 주의 뜻이에요.

주님이 죽은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니고 아버지 뜻 받들어 죽은 거예요. 그래서 성도가 고전적인 죽음, 자연적은 죽음 되면 지옥 가고요 성도가 살아 있으면서 약속이 들어오기 위해서 기존의 나와 다른 나를 바꿔치기 일어나야 그 사람은 약속과 통하는 구원받은 사람이 되는 겁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여 또는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내가 누구한테 버림받았다고? 나다움은 하나님께 버림받는 나, 이것이 한 조가 되어서 뭘 이루느냐 하면 약속을 이루고 성취해버린 약속을 다 이룬 거예요. 그러니까 구원받는다는 것이, “목사님, 뭘 해야 합니까? 어느 말씀 지켜야 됩니까?” 이렇게 복잡하지 않고 간단하지요.

주님이 오셔서 나와 연결된 나를 플러그를 뽑아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나의 과거지사, 나의 모든 과거가 나의 일이 될까요, 아니면 주님의 일이 될까요? 소급해서 주님의 일이 되지요. 그게 로마서 8장에 나옵니다.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미리 정하시고 아시고 부르시고 불러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의 어릴 때, 나의 지난 과거,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의 모든 기억이 지금 내 기억을 잘라버리고 거기에다 뭐가 온다? 주님이 하신 기억이 이 안에 들어와 버려야 이미 우리는 영생을 얻은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럼 다윗에게도 그런 일이 생겼습니까? 생겼습니다. 어디에 그런 게 나옵니까?

다윗이 아들이 오늘 본문에 연결돼있지요. 그 뒤에 10절에 보면, “솔로몬의 아들은 르호보암이요 그 아들은 아비야요 그 아들은 아사요” 그렇게 돼있지요. 역대상 3장 10절. 이스라엘 역사에 역대 왕들이 나오지요. 거기에 누구 아들로 돼있습니까? 여기 3장 10절에. 솔로몬이죠. 이쯤하면 여러분 성경 아시면 눈치 채실 거예요.

아아, 인간의 육적 족보가 끊어져야 이게 구원된 사람의 족보라는 것을 여러분 눈치 채셔야 됩니다. 세상 족보는 위로부터 내려와요. 우리 윗대 할아버지, 윗대 할아버지부터 내려옵니다. 그런데 하늘나라 족보는 어디서부터 하느냐 하면 오히려 반대로 저 뒤에서부터 거꾸로 우리에게 와요. 위에서 내려오는 것은 뒤에서 오는 것이 다 삼켜버려요.

위에서 지난 과거로부터 올라와버리면 이게 나의 기억이 되고 나의 역사가 돼요. 역사가 맨 기억이니까 나의 기억과 나의 역사를 하늘나라에게 그때그때 삼켜버립니다. 확 빨아들여 없애버린다 이 말입니다. 교회 한 오십년 다녔다. 이거는 누구의 기억이죠? 자신이 기억이죠. 카운트 했으니까요.

그런데 주님께서 찾아오게 되면, “너 오늘 구원받았어.” 내일 되면 내일이 오늘 아닙니까. “오늘도 구원되었어.” ‘구원됐다’는 구원을 소유한다는 말이 아니고 구원이라는 주님의 기억게 네가 포함된 사람이다, 라고 우리에게 확인해주는 겁니다. 성도의 구원은 소유가 아니고 확인하는 거예요. 매일같이 확인하는 거예요. 오늘 일어난 일은 내 일이 아니고 주님의 기억에서 주어진 현실이라는 것을 기억케 하는 겁니다.

자, 다시 한 번 해보겠습니다. 사람이 있는데 오늘날 우리라고 봅시다. 우리가 있는데 주님의 성령이 오게 되면 복음이 오게 되면 뭐가 오느냐? 다윗의 혈통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 아닙니까. 따라서 다윗의 혈통에 우리가 가담되지 않으면 구원이 없어요. 왜냐하면 다윗의 혈통에서 약속이 주어졌으니까요. 그 약속에 포함되지 않으면 구원이 안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경주 이 씨니, 전주 이 씨니, 안동 권 씨니 성이 있을 것 아닙니까. 성은 뭐냐 하면 혈육적인 족보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육적인 족보. 그러면 그 족보에 의해서 나는 이 땅에 나타났다는 겁니다. 그러면 계속 과거 조상들의 이름이 거론되겠지요. 여기에 성령이 복음이 와버립니다. 복음이 와버리면 족보의 나열 속에 이게 끊어져버려요.

이게 들어와서 기존에 육적인 족보에 있던 사람을 약속 속에 집어넣어버려요. 그러니까 기존 족보에서 나는 뭐가 돼요? 나는 죽은 자가 돼버려요. 나는 육에서는 죽고 생명 안에서는 산 자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바로 멜기세덱에 따라 온 족보에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아까 거미가 어느 집에 산다 했습니까? 거미는 잠을 자는데 거미집에 자지요. 거미집의 특징이 뭐예요?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리는 게 특징이죠.

우리는 분명히 이 땅에서 이 땅의 육신을 갖고 있지만 우리 안의 내면성은 주님의 기억에 강탈당했어요. 다 빼앗겨버렸어요. 네가 세 살 때, 네 살 때 한 일은 주께서 뜻이 있어서 꼭 그 일이 일어나야 한 거예요. 따라서 우리가 하루하루 성도가 사는 것은 뭐냐 하면 확인 차, 내가 인생을 꾸려나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이 약속답게 되기 위해서 지금도 이런 상황에 집어넣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겁니다.

뭘 확인한단 말이냐? 뭘 확인하는 거예요? 뭘 확인하느냐 하면 구원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주님이 다 이루었다, 에서 나와서 구원이 되는 걸 확인하는 거예요. 내 행함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찾아온 주님의 능력으로 우리가 구원된다는 것을 매일의 삶 속에서 확인하는 겁니다. 그렇게 약속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다 그렇거든요. 그 중에 예가 뭐냐 하면 다윗입니다.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다윗이 권력을 쥘 때 자기는 이스라엘 왕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나 이스라엘 왕은 권력을 쥔 자가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돼야 돼요. 그래서 다윗이 말하기를 나는 사람에게 죄 지은 게 아니고 오직 주께만 죄 지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 말, 보신 적 있지요. 시편 51편에 나오니까. 그 말할 때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내가 아는 나를 상대하지 말라는 거예요. 죽음이라는 것은 책장을 넘기는 것 같은 거거든요. 세상은 죽음이 지평선 전부라고 보는데 성도한테는 책장 넘기는 게 그렇게 무섭습니까? 책장 넘기면 그 다음에 다른 세계 있는데요. 죽음이란 책장을 넘기는 거예요. 바람은 약간 일어나겠지만.

내가 비로소 죽게 될 때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뭐로 보이느냐 하면 안 죽으려고 약속 바깥에서 애를 쓰는 지옥 가는 자들의 눈에 다 드러나는 겁니다.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뭐냐? 한 번 적어볼게요.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은 한 때의 나였다.” 내가 저렇게 살았어, 내가. 따신 밥 먹고, 하면 “하나님 이걸로 됐습니다. 이걸로 충분히 행복합니다. 나 이 소유 붙들고 살아야지.”

그게 옛날에 내가 성령을 받지 않을 때 모습을 보면서 우린 확인하는 거예요. 아아, 주께서 찾아왔기 때문에 나는 자기 기억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이게 내 기억이 주님의 기억에 의해서 다시 자기를 기억하는 거예요. 너는 죄인이고 죽어 마땅한데 나는 너를 내 기억 속에 집어넣어서, 그걸 다윗의 약속 속에 집어넣어서 너는 영원한 세상에 있게 되었다. 그런 관점에서 지금의 나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보게 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이야기하는 것은 솔로몬이거든요. 아까 10절에, “솔로몬의 아들은 르호보암이요 그 아들은 아비야요 그 아들은 아사요”라고 돼있지요. 그 열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왜 열 명의 아들 가운데서 솔로몬이 굳이 왕이 돼야 되느냐? 솔로몬은 다윗이 살아 있을 때 생긴 자식이 아닙니다. 솔로몬은 다윗이 약속으로 죽고 난 뒤에 태어난 자식이어야 솔로몬이 약속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솔로몬이 그냥 밧세바 만나기 전까지는 권력 사람이에요. 그래서 암몬, 그 다음에 압살롬 같은 셋째 아들 이때는 다윗을 보면서 다윗에게 뭘 부러웠느냐 하면 아버지가 갖고 있던 권력이 부러워서 그 권력을 자기가 차지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압살롬 같은 사람들은 다윗을 제대로 못 보고 있는 거예요.

다윗은 권력자가 아니고 죄인의 괴수에요. 하나님 앞에서 진정 내가 죄인인 것을 알게 된 사람입니다. 그 계통을 밟아야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어요. 그런데 압살롬이나 이런 사람은 뭡니까? 권력이 무서워서 나도 힘 가지면 되겠지, 하는 거예요. 제가 방금 ‘권력’이란 말했지요.

우연히 길에서 어떤 사람을 아무나 만날 수 있다고 봅시다. 또는 명절에 일가친척 만났다고 봅시다. 자, 육촌 형님이 왔다. 우리가 볼 때 육촌 형님이 혼자 온 게 아니고 그중에 뭐가 있지요? 권력으로 휘감고 오겠지요. 이리 오너라, 이렇게 되잖아요. 요새 그런 말은 안 하지만. 요새는 이리 오너라하지 않고 벤츠 타고 오면, “형님, 차 언제 샀습니까?” “신상이다, 요새. 새로 샀어.”

이게 뭐냐 하면 본인의 소유성이 휘감고 있는 거예요. 이게 압살롬이에요. 암논이고. 배다른 다말이라는 자기 여동생을 겁탈한 사람 있지요. 첫째 아들. 다윗 주변은 전부 다 권력자에요, 권력자. 권력을 추구하는 겁니다. 딱 한 사람 권력을 추구하지 않은 사람 누굽니까? 아들 가운데서. 솔로몬이죠.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과 어머니 밧세바의 죄에서 태어나요. 그 죄의 열매가 솔로몬이에요. 우리의 공식에 의하면 죄인은 죽어야 돼요, 안 죽어야 돼요? 죄 지었으니까 죽었지요. 밧세바와 다윗 사이에 애 태어났는데 일주일 만에 죽었잖아요. 그 죽음의 취지를 고스란히 갖고서 이 땅에 태어난 자가 솔로몬입니다.

내 아버지의 죄 때문에 누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 죄 있는 아버지를 약속대로 살리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취지 때문에 아버지 대신 죽었던 어떤 아이의 취지가 솔로몬 안에 그대로 담겨서 십자가까지 계속 전달, 전달되는 기관차에 태워서 전달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길에나 회사나 직장에서 사람 만날 때 저 사람이 솔로몬인지 생각해보세요. 생각할 것도 없어. 딱 보면 알지요. 저 사람이 솔로몬일까? 선생님도 솔로몬 같아요, 하면 칭찬인 줄 알고, “그만큼 내가 지혜로워요? 내가 재판을 잘합니까?” 이상한 이야기할 거예요. 나나 너나 약속의 공동체에 들어간다면 나나 너나 누가 대신 죽었다는 그 취지를 살려내기 위해서 지금도 주님은 우리를 살려주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복음을 왜 안 받아들이고 성경도 안 보고 교회도 안 다니고 왜 인간 그렇게 사느냐? 사람들은 왜 복음도 거부하고 말씀도 안 듣고 왜 그렇게 삽니까? 자기 게 있잖아. 나를 지켜주는 자기 게 있잖아요. 아쉬운 것도 답답한 것도 없어요. 애 공부 잘하지 7억 살만한 여분의 돈 있지, 남편 직장 잘 다니지. 이만하면 자족하고 만족하는 데 뭐 거기다가 또 말씀을 들어야 돼. 난 내 소유로 살 거야.

그게 권력이거든요. 내가 원하는 권력에 둘둘 감겨서 살 거야. 이게 뭐냐 하면 다윗의 자손과 무관한 거예요. 하나님이 날 찾아오겠지. 아니에요. 하나님을 다윗을 통해서 찾아온 거예요. 그래서 다윗의 하나님이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이고, 이삭의 하나님이고, 강의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약속의 하나님이라고요.

사람들은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저도 예수 믿습니다.” 이러거든요. 예수 믿는 게 아니고 소유했겠지요. 예수를 소요한 것 아무 소용없어요. 바리새인이 하나님 믿는 건 하나님 소유한 거예요. 하나님을 소유하게 되면 나의 나다움이 여전해요. 내가 버림받는 게 아니고 나의 기억 속에 예수도 하나님도 포함이 돼있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의 기억은 나의 기억에서 잘라서 투입해서 나의 기억을 파탄을 내버려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돼요. 다시 말해서 내 기억은 전부 다 죄가 된다는 것을 까발리면서 주의 기억이 우리 안에 삽입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억의 운반체가 되고요. 그 운반체가 솔로몬이고 그 다음에 나오는 계속 나오고 끝까지 나오죠. 이게 뭐냐? 이스라엘 자체가 다윗언약의 운반체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역대상 17장 했는데 14절 다시 읽어볼게요. “내가 영영히 그를 내 집과 내 나라에 세우리니 그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영원하리라. 그걸 누구한테 약속? 다윗한테 약속한 거예요. 그 다윗이 어떤 다윗이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죄인인 걸 알았어요. 내가 하는 모든 기억은 주님의 기억 앞에서 죄가 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나라는 영원합니다.

시편 89편을 보겠습니다. 말은 어렵지 않은데 깊은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내가 말하기를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 하였나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나의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이게 주님의 기억이에요. 주님의 약속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주께서 주는 그런 것 없어요. 내가 원하는 걸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파괴당해야 될 대상이지 뭔가 주님으로부터 얻어 챙길 대상이 아니에요. 주님은 우릴 바꿉니다. 내 기억으로 구성된 나, 그걸 주님의 기억 안에 있는 나로 바꿔버려요. 그래서 주님은 열한 제자에게 찾아오신 거예요.

인간들이 아무리 기억하려야 기억 속에 들어있지 않은 기억은 주님한테 있습니다. 인간의 자기 기억은 자기 영토 관리에요. 그냥. “여기서 여기까진 내 거지. 손대지 마.” 이거였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베드로가 말하기를, “주님은 우리의 주님이기 때문에 누구한테 빼앗기기 싫어. 내가 죽기까지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기껏 베드로가 하는 게 고거였어요.

주님께선 베드로와 어떤 약속도 안 합니다. 베드로가 약속해봐야 소용없어요. 왜냐하면 자기 것 더 챙기기 위해서 주의 약속을 자기 속에 집어넣는 그 수작을 하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와 결별합니다. 열두 제자와 결별해요. 그러면 베드로와 열두 제자 속에 감히 상상도 못한, 인간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상상의 한계가 있어요.

인간이 여기 있다면 인간의 상상은 한계거든요. 주께서 이 한계를 너무 잘 알아요. 왜냐하면 이거는 그 인간의 기억이거든요. 인간의 기억이란 말은 뭐냐? 나름대로 나름 목표와 계획이 있다는 뜻이에요. 소망이 있다는 겁니다. 송강호가 자기 아들한테 이야기해요. “니는 계획이 다 있구나.”

계획과 목적은 누구 좋으라고? 나의 기억을 빛내기 위해서 내가 기대하는 것을 이걸 현실화시키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여기다 투입되는 거예요. 이게 인간의 기억입니다. 주께서 그 인간의 기억을 알까요, 모를까요? 아시지요. 아시기 때문에 인간의 기억에 도저히 들어있지 않는 발견되지 않는 한계 때문에 그래요. 인간의 기억의 테두리 속에 들어있지 않는 다른 것을 우리에게 줘버립니다. 그럴 때 우리는 뭐냐? 나는 주님 앞에 죄인입니다.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 만날 때 이런 현상을 보였습니다. 베드로의 목적은 고기 잡는 거예요. 밤새도록 고기 잡았습니다. 고기가 잡혔습니까, 안 잡혔습니까? 이상하게 그날따라 고기가 한 마리도 안 잡혔어요. 베드로의 기억 속에는 자기가 숙달된 어부기 때문에 얼추 어느 정도 고기 잡힌다고 생각했거든요. 주님은 베드로의 기억을 한계를 알아요.

그리고 난 뒤에 주님께서, “베드로야,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라.” 했지요. 베드로가 왼편에서만 잡았을까요, 왼편오른편 샅샅이 다 뒤집었습니까? 다했지요. 베드로가, 네 오른편에 하라, 해서 하니까 세상에 배가 뒤집힐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어요. 그때 베드로가, ①고맙다고 이야기했다. ②나는 죄인이니까 주여 떠나소서, 했다. 몇 번입니까? ②번이죠.

네가 앞으로 사람 낚은 어부가 될 것이다. 난데없이 내 계획에 없는 낯설기 짝이 없는, 나 이런 식으로 구원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나는 내 구원에 노력을 해야 되는 줄 알았습니다. 성경공부도 하고 예배도 드리고 헌금도 하고 전도도 하고 바르게 착실하게 살고 남한테 해코지 안 하고 난 그런 식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그래야 구원되는 줄 알았습니다. 자기를 비우라 하면 자기를 비우고, 겸손하라 하면 겸손하고 이래야 구원이 조금씩, 조금씩 앞당겨지는 줄 알았습니다.

주께선 그걸 다 피해갔습니다. 그게 우리가 구상하는 모든 것을 세세하게 다 피해갔어요. 생각하지도 못한 것 일한 것도 없이 의롭게 되는 그 방식. 이걸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면, “너는 미쳤어.”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구원받는다는 것. 그러니까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 구원을 내가 소지할까요, 아니면 아무것도 나한테 없었던 주님에 내가 소유가 될까요, 어느 쪽일까요?

이제부터는 주께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는 주님의 소유가 되는 겁니다. 이젠 내 구원을 내가 챙길 하등에 근거도 없고 이유도 없어요. 우리는 거미줄에 갇혀 거미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거예요. 기초도 없고 토대도 없어요. 주께서 아예 잘라버렸습니다. 너는 너로 인하여 네 인생사는 게 아니고 나의 기억을 빛내기 위해서 주님의 기억을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걸 증명하는 용도에서 너는 내 기억 속에 합류된 겁니다.

그 기억에 합류된 걸 다윗의 약속이라 합니다. 그 다윗의 약속이 시편 89편에서는 주님의 맹세가 거기 있어요. 내가 끝까지 다윗에게 준 맹세를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한 것을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라고 이렇게 맹세를 했습니다. 이게 주님의 기억입니다.

여러분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그래놓고 세상에 나가보세요. 한 때 나였던 사람들이 전부 다 보이지요. 한 때 나였던. 내가 저런 식으로 저런 사고방식으로 살아왔다는 걸 다 알 수 있습니다. 길거리 안 나가봐도 여러분 가족을 만나 봐도 그래요. 그들은 입만 떼면 자기 기억이에요. “내가 엄마한테 뭐가 잘못했는데?” 이게 뭔 뜻이에요? 자기 기억에 꽁꽁 묶여있는 겁니다.

자기 기억 바깥으로 벗어난 적이 없어요. 왜? 주님의 기억이 안 찾아오니까. 모든 매사 나 잘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내가 성공하기 위해서,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그런 식으로 살아온 거예요. 자기 행복한데 말씀 뭐 하려고 보는데? “지금도 행복한테 내가 굳이 성경 더 알 필요 없지. 나 예수 믿잖아.” 이런 식이에요. 믿는 건지 소유인지 분간도 못하면서. 예수 믿는다는 말은 나를 안 믿는다는 뜻이에요.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철저하게 우리 토대를 없애버리니까.

그래서 이런 공식이 나오지요. “죽었기 때문에 죽지 않는 자가 보인다.” 주님에 의해서 죽었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주님의 기억이 나의 과거, 현재, 미래까지 완전히 덮었기 때문에 나의 기억은 죽음 기억으로 간주되어서 이걸 죽었다 하는 거예요. 고전적인 죽음 말고 자연적인 죽음 말고 약속에 의한 죽음은 나는 아버지 하나님 앞에 나는 주 앞에 죄 지었습니다, 라고 하는 게 죽음이란 말이죠.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죽지 않으려고 하는 살려고 하는 사람들의 그 집착 그게 눈에 다 들어오는 겁니다. 사람을 대할 때 이래 봐야지요. “야, 살려고. 무섭다, 무서워. 저 봐.” 세상 사람이 산다는 의미는 내 것 지킨다는 의미다. 내 남편, 내 아내, 내 자식, 내 재산, 내 가오, 내 자존감, 명예, 내 족보 이게 세상 사람들이 내 것 지키는 거예요.

이 사람들 어디 오느냐? 교회 왔지요. 뭐 하겠어요? 기도하겠지요. 기도내용 들어보세요. 무슨 내용입니까? 내 것 지켜달라고 기도하는 거예요. 내 건강, 내 목숨 연장시켜주시고. 내 것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다윗의 약속이 안 나옵니다. 다윗은 내가 주님 앞에 죄인인 것을 안 거예요.

좀 더 설명한다면 사과해야 할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고 밧세바한테 사과해야 되고 이미 죽은 우리아한테 가서 꽃다발 조화라도 바쳐야 돼요.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합니까, 안 합니까? 안 하지요. 왜냐? 그렇게 해버리면 내가 죄인 되었다는 것이 내 기억의 일부가 되기 때문에 그러면 안 돼요. 여전히 나는 반성할 정도로 괜찮은 내가 된다고요. “세상에 내가 반성을 다하다니. 나 참 훌륭해. 이 훌륭한 나를 내 것으로 만들어야 되겠어.” 이거는 자기 기억이에요. 주님의 기억이 아니라고요.

누구 앞에도 사과할 필요 없어요. 정 사고하고 싶으면 이렇게 사과하세요. “내가 지난번에 너한테 사과했잖아. 그게 죄였어. 미안해.” 이렇게. “내가 지난번에 용서해달라고 했지. 복음 알고부터는 용서해달라는 그것이 나의 자존심을 더 키우기 위한 얄팍한 수작이었어. 결국 용서해놓고는 나는 누구한테 용서했다. 이 정도로 나는 훌륭해. 지 자랑하기 위해서 남을 용서한 거예요. 사과한 거예요. 끝까지 자기를 못 버린 겁니다. 이건 자기를 휘감는 권력이에요.

설교시간에 잠깐 언급했는데요. <주 예수 나의 산 소망>이란 노래 있지요. 그 가사에 보면, 어둠을 뚫고 오신 주 사랑, 이렇게 돼있거든요. 어둠을 뚫고, 갇혀있는 것을 뚫는 거예요. 어둠을 뚫고 오신 뭡니까? 주 사랑이거든요. 사랑은 내가 사랑해서 보답으로 받아내는 게 아니고 내 열성에 대해서 응답해주는 게 아니라 그냥 뚫고 일방적으로 가만있는데 뚫고 들어오는 거예요.

왜냐하면 나는 나를 사랑해요. 나는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나만 사랑해요. 심지어 하나님 믿는 나를 사랑해요. 예수 믿는 나를 사랑한다고요. 그러니 이거는 자기 부인이 아니에요. 어기는 종교로 장난치는 거예요. 성경 가지고 장난치는 겁니다. 이 잘난 나를 지켜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 믿는 잘난 나를 지켜달라고 기도하고 있어요. 그런 기도는 엉터리 기도에요. 진짜 나에게 중요한 것은 내 기억이 아니고 나와 관련된 기억이 아니라 주님의 기억입니다. 내 안에 낯선 분이 들어온 거예요. 그 낯선 분이 우리한 중요한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약속이고요.

그러면 주께서 이렇게 찾아올 때 그냥 곱게 오셨느냐? 곱게 온 게 아니고 전쟁을 벌였던 겁니다. 하나님의 적이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다윗에서 솔로몬까지 연결되려면 뭐냐 하면 다윗은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너 아니고, 너 아니고, 너 아니야. 아도니아 너 아니야. 누구냐? 솔로몬이야. 다윗언약에 의하면 약속에 의하면 이 땅에 잘났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나오는 자손은 하나님의 약속의 자손이 될 수 없습니다. 나의 못남과 나의 죄를 그대로 품고 나타나는 자가 약속의 자녀입니다. 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역대상 3장 10절에, “솔로몬의 아들은 르호보암이요 그 아들은 아비야요 그 아들은 아사요 그 아들은 여호사밧이요” 쭉 나오지요. 자, 복음은 다윗의 자손입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면 다윗 계통에서 계속해서 점점 더 다윗 혈통이 유지되겠지요. 저 끝에 다윗 혈통 끝에 누가 나오느냐? 바로 마태복음 1장의 족보에 의하면 예수님이 태어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스스로 나심이라. 마리아를 통해서 알아서 본인이 난 거예요. 마리아가 태어나게 한 게 아니라.

예수님이에요. 그러면 자식이 이런 마지막 나타난 이것이 소급해서 다윗을 용서하고 다윗을 예수님이 자기 계열로 합류시킨 거예요. 이쪽은 전달체고. 그러면 다윗은 죄인이죠. 줄줄이 죄인이죠. 죄인이죠, 죄인이죠. 그러면 하나님의 메시아는 어디서 나옵니까? 죄인에게서 나온 거예요.

그런데 본디오 빌라도가 어떤 행동을 했는가? 마태복음 27장 24절, 이거는 누가 읽어보세요.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본디오 빌라도가 약속이 없는 모든 일반적인 사람들의 본심과 심리를 대변해주고 있어요.

예수님이 죽으니까 세숫대야를 가져오라 해서 물로 자기의 손을 씻으면서 이 피에 대해서 이 사람의 사형에 대해서 피 흘림에 대해서 뭐라고 하느냐? 나는 죄가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 빌라도의 모습과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 닮지 않았습니까? 나는 나와만 연결되기를 원해요. 나는 나의 자존심과 나의 잘남과 연결되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예수란 분이 등장해서 빌라도에게 자기 자존심에 흠집을 남긴 듯한 인상을 주거든요. 그러니까 저 사람의 죄가 나한테 오염되지 않기 위해서 자기는 세숫대야 물로 씻으면서 나는 저 사람의 죄에 가담 안 했어. 나는 그 사람에 대해서 내가 책임 없어, 하고 손을 씻는 거예요. 이건 빌라도는 주님을 지키기 위함입니까, 아니면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예요? 자기를 지키는 거죠.

그러니까 예수님의 원수란 공식이, 자기 것을 지키는 사람, 하나님의 원수는 뭐냐? 나의 것을 지키는 사람이에요. 내 가정, 내 재산, 내 교회, 내 명예 지키는 사람, 이 사람이 예수님의 원수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교회 안 나오는 이유를 이제 아시겠지요. 왜? 나 혼자도 내 것 잘 지키는데 뭐가 아쉬워서 더 복을 달라고 비는 것도 귀찮다. 내 인생 보기에 얼추 만족스럽거든요. 대단히 만족스럽진 않지만 견딜 만한 거예요.

빌라도가 예수 믿었습니까, 안 믿었습니까? 안 믿었지요. 그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예수 믿었습니까, 안 믿었습니까? 안 믿었지요. 그러면 열두 제자가 십자가 지기 전에 예수 믿었어요, 안 믿었어요? 안 믿었지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백조는 희다. 맞아요, 틀려요? 백조 두 마리인데 두 마리 다 희다. 백조 백 마리, 백 마리 다 희다. 백조 천 마리, 귀찮게 더 이상 하지 않겠습니다. 다 희지요.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예수 믿는 것이 불가능한 거예요. 예수를 알고 지식은 가능한데 예수를 내 것 만드는 건 가능한데 예수님 때문에 내 것 사라지는 것은 인간으로선 불가능해요. 사라지는 방법은 뭐냐? 내가 태어난 것 자체가 죄로부터 태어났다는 걸 복음을 위해서 주님의 기억을 위해서 내가 이 땅에 죄인으로 태어나서 모친의 어미의 죄에서 태어나서 내 일이 아니고 주님의 작업으로써 내 인생이 하루하루 굴러가는 것

그래서 내 죄로 말미암아 주님의 은혜와 주의 사랑이 뚫고 들어왔음을 그 현장이 바로 현장되기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거예요. 하나님의 약속을 준 겁니다. 약속 안에서 우리는 죄인으로 구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 거라는 것은 이미 죽음을 당했어요. 이제는 내 기억, 내 추억은 기억하고 추억하더라도 그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루하루 사는 것은 주님의 기억의 능력 때문에 창세전에 기억한 주님의 능력이 오늘날 지금의 이 상황을 이 상황대로 고대로 밀어붙였어요. 그러니까 되어진 모든 일은 합력하여 오류가 하나도 없고 사단 난 것도 없고 딱딱 맞추어서 지금 오늘날 하루하루의 오늘 일과를 우리가 보내고 있습니다. 딱 맞춘 거예요.

욕심내지 마세요.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우리 보기에는 불만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주 딱 됐어요.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주님의 약속에 딱 맞춰도 우에 그렇게 맞췄는지. 주의 약속만 감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실 바랍니다.


기도하겠어요.
하나님 아버지, 나만 생각하고 내 위신만 계산에 넣으면서 살아왔습니다. 우리의 살 생각만 했지 일찍 죽을 생각을 하질 못했습니다. 이제는 주님의 약속이 들어오면서 나의 계획과 나의 목적과 나의 기억이 이미 끊어졌다는 것 깨달아서 오직 주님의 기억만 나타내고 높을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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