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역대상

역대상 2:3 / 죄의 송유관 / 211001

정인순 2021. 10. 1.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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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01a 울산강의-역대기상(4강) 2장 3절 : 죄의 송유관
(강의:이근호 목사)


역대상 2장 3절부터, “유다의 아들은 에르와 오난과 셀라니 이 세 사람은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이 유다로 말미암아 낳은 자요 유다의 맏아들 에르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죽이셨고 유다의 며느리 다말이 유다로 말미암아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으니 유다의 아들이 모두 다섯이더라”

여기에 가나안 사람이 돼있어요. 약속의 땅이 되기 전에 땅, 약속의 땅의 되기 이전에 살던 원주민들이 누구와 혼인했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유다와 혼인을 했는데 그 중에 맏아들 에르가 여호와 보시기에 죽었다고 돼있어요. 에르만 죽은 게 아니고 여기에 오난도 죽었습니다.

방금 역대상 2장 3절 한 절만 봐도 이렇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된 사람이 비 약속, 약속되지 않은 여자와 혼인을 했는데 거기서 나오는 현상이 무슨 현상이냐 하면 죽었더라. 누가? 자식들이 죽었더라. 이렇게 돼있습니다. 이걸 보게 되면 하나님의 약속이 있게 되면 거기서 반드시 무슨 사건이 난다? 죽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걸 말을 달리 바꿔보면 사람이 죽는 것은 그게 하나님의 약속을 약속대로 드러내기 위해서 사람은 태어나서 얼마 정도 살다가 죽었더라, 죽었더라가 연속돼야 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얼마나 잘 살았느냐가 아니라 살아가면서 해야 될 일이 뭐냐 하면 죽는 이유를 알아야 그게 제대로 된 삶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살아 있는 게 기적이 아니고 살아 있는 것이 진실이 아니라 죽는다는 것이 살아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다. 살아봤자 죽잖아요. 살았다 하는 것은 중간과정이고 죽었다 하는 것은 결국 최종적으로 드러날 것 다 드러난 거예요.

제가 어릴 때 어머니께서 바느질할 때 이불호청 할 때 굵은 바늘을 집어넣는다 말이죠. 바늘을 집어넣을 때 깊은 솜 속에 들어가서 바늘이 없어요. 그런데 바늘을 저 뒤쪽에서 잡아당기니까 바늘이 있었는데 없어졌네. 어, 바늘이 나왔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들어가는 바늘과 나오는 바늘과 무엇이 연결돼있겠습니까? 실이 연결돼있겠지요. 그 실을 약속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탄생이라고 들어갔는데 보니까 죽음으로 기어 나올 때 처음에 있는 탄생된 것이 결국은 죽음화, 사망화 되어야 될 그 목숨이 이 세상에 진입한 거예요. 솜 속에 바늘에 쑥 들어갔다가 바늘이 툭 튀어나오는 것처럼 처음에 들어간 것도 바늘이었고 나중에 나온 것도 바늘이었고. 애초부터 우리는 죽음덩어리로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얻고자 하는 건 뭐냐?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은 지금도 생생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모든 인간에게 삶과 죽음으로 이어지는 삶을 그렇게 허용하신 거예요. 방금 한 것을 이렇게 적어보겠습니다. 서로 연결된 일련의 내용들, 이걸 비유로 이야기하면 이 전체를 한 자로 이야기하면 이건 바로 ‘실’이 돼요. 실을 풀이하면 서로 연결된 일련의 내용들이에요.

지금 역대상 2장하고 있는데 그 내용들이 한 내용을 두고 이야기하는 거죠. 연결, 연결, 연결, 연결, 계속 연결돼있는 거예요. 뭐로? 하나님의 실로 연결돼있어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걸 정리하게 되면 하나님의 약속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역사 내부에 잠복돼있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바닷물 속이 고요해서 물속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잠망경 낀 해녀가 불쑥 튀어나오는 그런 경우 있잖아요. 해녀라든지 스쿠버다이버라든지. “어, 당신 그 안에 들어있었어?” 이러고 놀래잖아요. 해삼, 멍게 잡아 수면 위로 올라오지요. 약속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예상한 현실 거기에 있는 게 아니라 역사라는 현실 안에 잠복돼있어요.

잠복돼있을 것을 우리가 왜 못 알아보느냐? 우리는 실과 연결돼있는 게 아니고 살아 있으니까 계속 살겠다고 이어졌거든요. 그러면 여러분들 머리 있는 사람은 생각할 거예요. 아, 실이 두 종류구나. 하나는 살아 있으니까 계속 살자는 그런 조류로 가는 사람, 시작이 내가 살아 있으니까 오늘도 살아 있으니까 내일 살고, 모레 살고, 팔십, 구십 살자. 그것만 아는. 그러면 뭡니까? 그것은 서로 연결된 일련의 내용들이 어느 쪽으로 간다? 사는 쪽으로 간다. 이래 살면 잘 사는 거지.

그래서 불신자들이 궁극적으로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고백은 뭐냐 하면 이거에요. “참 멋진 인생이었어!” 참 멋진 죽음이었다고 안 하지요. 멋진 삶이었어. 나는 사는 것은 나한테 너무 당연한 거야. 암 나는 살아야지. 나는 길게, 길게 살아야지. 그게 인간이 자기가 태어난 걸 시작점으로 하는 실이에요, 실. 참 멋진 인생이었어.

그에 비해서 신자는 뭐가 되느냐 하면 주님의 죽음에 참여되었음, 이게 신자에요. 실이 다르지요. 이쪽에 참 멋진 인생이었다 할 때 주인공이 누굽니까? 나지요. 이 나는 죽은 나를 염두에 두는 겁니까, 멀쩡히 살아 있는 나를 염두에 두는 거예요? 멀쩡히 살아 있지요. 멀쩡히 살아 있으니까 일련의 연결된 내용들을 계속 만들어가는 거예요. 살아 있는 나가 계속 또 살면서 목적은 뭐냐 하면 참 멋진 인생이었어를 증명하듯이 살아가는 거예요. 나는 참 멋진 인생이었어.

내가 참 멋진 인생이었다. 이걸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건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지요. 믿고 자시고 할 것도 없지요. 자기 자신을 믿는데. 입만 떼면, 눈만 뜨면, 행동을 하면 막 쏟아지는 모든 것들이 뭐냐 하면 나는 참 멋진 인생인 것을 나는 내 앞에서 증명하고 싶다. 그러니까 네가 나한테 호응 좀 해줘. 잘한다, 잘한다고 호응 좀 해줘.

높이뛰기 선수, 우리나라 이번에 올림픽 나간 높이뛰기 선수가 자기 딴에 자기 기록을 경신하기 위해서 높이뛰기 준비하거든요. 그냥 하면 힘이 안 나니까 일본관중들 보고 호응을 원하는 거예요. 박수 막 치고, 그러니까 박수 쳐주는 거예요. 힘내서 자기가 목표한 2미터 35센티를 넘었어요. 타인의 호응은 방향이 누구한테 쏟아지는 거죠? 나한테 쏟아지는 거예요.

나한테 죽으라고 박수 치는 거예요, 안 그러면 당신이 이제까지 높이뛰기 선수로 왔기 때문에 높이뛰기 선수로 온 그 청춘을 보상받기 위해서 빛내기 위해서 서로 연결된 일련의 내용들로 연결시켜 보겠다는 거예요. 목걸이를 같이 종류로 연결시키듯이. 그래서 목걸이로 보면 거기에 어느 하나를 건드리면 건드릴 수 없어요. 왜? 서로 연결돼있기 때문에. 나의 과거를 건드리면 오늘날 나를 건드린 게 돼요. 서로 연결돼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설명한 참 난 멋진 인생이었어, 이게 약속이 없는 거예요. 이걸 아까 역대상 2장 3절에서 가나안 여인 또는 가나안 사람들 또는 하나님의 언약, 약속이 없는 이방민족이에요. 약속의 땅이 아니에요. 약속의 땅 되기 전에 살던 사람들의 풍속 또는 문화, 문명, 좀 고상하게 말해서 그들의 이념이 이거거든요. 자기 잘 되기 위해서.

이걸 요즘으로 바꾸면 네 자가 돼요. 이걸 ‘민주주의’라 하는 거예요. 민주주의란 이념의 특징은 자기 부정이 없습니다. 자기 부인이 없어요. 그냥 서로가 서로에게 박수를 유도하는 거예요. 호응을 유도하는 거예요. 힘을 합쳐서 잘 되자는 겁니다. 이번 추석날 여러분들이 친정이나 또는 시가집이나 처갓집이나 가봤지요. 오랜만에 가까운 일가친척 모여서 얼굴 봤습니다.

자, 가서 하는 일들의 방향성은 뭐였든가요? “우리 다 같이 손잡고 죽자.” 이랬습니까? 아니지요. 뭐였어요? 호응해주는 거죠. “수고했다, 잘했다, 잘 될 수 있다. 지금은 마음에 안 차지만 걔 성공할 거야. 내 장담할게.” 서로가 서로에게 용기를 북돋아주지요. 그게 뭐냐 하면 약속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에 그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2장 3절에서 유다가 누구와 결혼했습니까? 유다라는 하나님의 언약의 사람이, 아브라함의 손자요, 야곱의 아들이죠. 야곱의 아들이 누구와 결혼했어요? 가나안 여인과 결혼했지요. 여기서 뭐가 나왔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에서 뭐가 나왔어요? 애 둘이 첫째 아들, 둘째 아들 죽었지요. 죽음이 나왔지요. 죽음이 나왔다고. 자식이 죽어버린 거예요.

그렇다면 유다가 이 가나안 여자와 결혼할 때 자기 딴에 하나님 믿지요. 유다의 심정을 이해한다면 이렇게 됩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또는 인정한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를 하나님은 뭐로 바꾸느냐 하면 나는 나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라는 식으로 유다에게 작용한 겁니다. 가나안 여인과 혼인함으로써 유다가 얼마나 구원받느냐, 안 받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약속과 비 약속이 만나면 거기서 필히 뭐가 발생된다? 죽음의 발생되는 거예요.

죽음이 발생됨으로 말미암아 서로 살았다고 여겨서 혼인했을 것 아닙니까. 어디 죽은 시체 붙들고 결혼 한 게 아니잖아요. 둘 다 살아 있으면 그 자식을 낳겠어요, 안 낳겠어요? 자식을 낳겠지요. 그때까지 아무 문제없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둘 다 살아 있다고 여겼는데 자식을 낳았는데 자식 둘 다 죽었어요. 셋째도 위기가 왔어요. 죽을 뻔했어요. 다 죽었어요.

자, 이 대목을 설명하기 위해서 한 가지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사람마다 원수가 있습니다. 사람마다 적이 있다 이 말이죠. 저 사람이 나의 원수라 하는 건 다른 사람은 못 알아봐도 나는 알아봐요. 사람마다 원수를 규정하는 그런 본능들이 있습니다. 저 사람은 나의 원수라 하면 그 다음에 저 사람은 나의 원수가 아니라고 되겠지요.

그러면 원수와 결혼하는 사람 없잖아요. 그럼 누구와 합니까? 일부러 원수와 결혼한 사람 없지요. 원수가 아니라는 조건 하에 그 사람과 결혼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둘 다 결혼할 때 둘 다 살아 있는 거예요. 살아 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자식이 나온 겁니다. 우리 자식 낳고 자식 죽이자. 이런 게 결혼 아니잖아요. 그런데 막상 하나님의 약속이 개입되니까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 자체가 뭐가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거예요.

쉽게 해도 못 알아보니까 그냥 어렵게 하겠습니다. 제가 문제 내겠어요. 인절미가 하나 있습니다. 한 개는 너무 커서 못 먹어요. 젓가락으로 두 조각냈어요. 각 조각을 A와 B라 한다면 끊어진 상태니까 A는 B가 아니고 B는 A가 아니고. 그러면 저 사람이 적이다, 아니다, 라는 것을 누가 판정하느냐? 내가 A가 B를 그렇게 결정하잖아요. 그런데 여기서 인간들은 이렇게 살아가요.

그런데 이게 갈라졌을 때 여기서 미지의 것이 올라오면서 A도 가짜고 B도 가짜고 진짜는 갈라진 틈 안에서 올라오게 돼있어요. 하나님 믿는 나도 가짜고, 전에 하나님 안 믿는다고 너는 우리 집안을 박살내었어. 이 나쁜 가나안 여자야, 하는 저쪽도 가짜고. 내가 저 여자와 결혼하는 게 아니었는데. 내가 진짜 신앙인과 결혼했으면 우리 애들 안 죽었는데, 라는 나도 가짜고.

가짜냐, 진짜냐의 결정은 내가 했는데 저 사람은 진짜다, 가짜다 결정하는 내가 갈라져서 비로소 등장하는 하나님에 의해서 내가 가짜가 되고 원수가 되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언약의 원리입니다.

1953년도 왓슨과 크릭이라는 두 화학자가 뭘 규명했느냐 하면 왜 인간은 닮았느냐? 그걸 규정하는 데 성공했어요. 저희들끼리 성공했어요. 그러니까 인간이 그냥 철학적으로 심리적으로 닮았다 하는 것을 닮았다 하는 게 너무 모호하고 너무 희미하고 심리적 개념이고 구체적이 아니잖아요. 왜 닮았는지 닮게 하는 요소가 뭔지를 1953년도에 그걸 발견했다니까요.

그게 디옥시리보핵산, DNA를 발견한 거예요. DNA, 이 유전물질을 발견하고 난 뒤에 그 다음부터는 성격이니 인격이니 감정이니 이것은 전부 다 DNA의 원자구조의 서열, 순서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이미 확정이 된 거예요. 쉽게 말해서 자기 아버지 성질 더럽고, 엄마 성질 더럽다. 그러면 분명히 이건 백 프로 DNA 얻기 전까지는 그래도 뭔가 좋은 환경이 좋다면 성격 좋지 않겠나, 생각했는데

DNA가 등장하고 난 뒤에는 애가 태어나기 전에 미리 엄마 배를 갈라서 아빠, 엄마의 못된 DNA 부분을 싹둑 잘라서 끄집어내고 거기에 좋은 DNA, 착하고 점잖고 훌륭하고 인격적인 DNA를 배양해서 그걸 부속품 교체해버리면 아버지, 엄마가 성질이 더럽든지 간에 그 애는 성질 착하게 나오는 거예요. 왜냐하면 착하다 하는 것은 교육을 잘 시키고 사랑을 받아서가 아니라 뭐로 규정된다? DNA 디옥시리보핵산이 결정하는 거예요.

DNA가 구조를 살펴보니까 꽈배기처럼 이중나선구조로 돼있어요. 그러니까 유다가 구원받았느냐, 뭐 자식은 어떻게 가나안 여자는 유다 때문에 구원받았느냐? 어떤 특정인을 겨냥해서 당신은 구원받았느냐, 라고 이젠 더 이상 물으면 안 돼요. 당신은 누구와 이중나선구조로 얽혔습니까, 이렇게 물어야 되는 거예요.

당신과 당신의 원수로 여겼던 그 자를, 하나님께서 어떤 자를 당신과 같이 이중나선구조로 만들어서 저쪽도 가짜고 너도 가짜라는 언약적 혜택을 언제, 어떻게 이뤘습니까? 그게 질문이 되는 거예요. 뭐, 나 예수 믿습니다, 해도 기분 좋을 때 술 한 잔 들어갔을 때 할 수 있거든요. 감정이니 나는 기분 업 됐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그것도 감정이에요. 감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구조가 중요해요. 언약과 비 언약이, 말조심해야 된다.

언약과 비 언약이 결합되는 게 아니고 언약이라고 규정된 형식과 비 언약이라고 규정된 형식이 두 마리가 똬리를 트는 거예요. 이건 뭐냐 하면 형식이에요, 형식. 폼 내는 거예요, 폼. 그럴 듯 하는 거예요. 교회 다니는 폼 내는 사람과 교회 안 다니는 폼 내는 사람 둘이 결혼해서 있는데 하나님께서 어느 날 성령이 와버리니까 교회 다니는 것도 가짜고 안 다니는 것도 물론 가짜고 둘 다 싸울 필요도 없다. 둘 다 가짠 데 뭘 싸워.

그 가짜가 가짜로 드러나는 것은 뭐냐 하면 나의 삶도 주께서 인정하지 않고 당신의 삶도 인정하지 않고 둘 다 죽을 대상인 것을 확정짓는 제삼의 갈라짐의 새로운 원리가 여기서 분출돼야 돼요. 그 분출되는 사건이 무슨 사건이냐? 죽음 사건이에요. 분출된다는 것은 젓가락으로 하나라고 여겼던 우리 식구라는 걸 떼어놓는 거예요.

성경에서는 가나안 여인과 유다가 결혼한 것으로 돼있지만 신약에 오게 되면 이게 더 복잡해요. 뭐냐 하면 남과 나와 결합한 게 아니고 신약은 나하고, 나하고 이중나선구조가 돼있어요. 진짜라고 여기는 쉽게 말해서, “나는 이렇게 잘난 나야, 나는 훌륭해.”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언약이 없을 때 인간은 뭐가 목표로 하느냐? 나는 참 멋진 인생이었어, 라는 그것과 그런데 왜 현실적으로 나는 이렇게 내 마음에 들지 않은 그러한 고된 인생을 망가져버린 인생을 나 왜 이렇게 사는 거야, 라고 이게 이중나선구조로 돼있는 거예요.

어느 게 진짜로 생각합니까? 사람들은 지가 잘 되는 걸 진짜라고 생각해요. 못 되는 것은 재수 없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후딱 빨리 재수 없는 나의 약점을 뭐로 바꾼다? 지금 내가 괜찮게 여기는 나로 빨리 모양새를 바꾸는 그렇게 되는 하나 되려고 인간은 아등바등 애를 씁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 실제 내 모습과 이게 너무 괴리되지 않도록 합치되도록 내가 봐도 내가 참 멋진 인생이다. 참 멋지기까진 너무하지만 뭐 A학점은 아니지만 B학점 정도는 줄 수 있다. 내가 원하는 인생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딱 맞춤은 아니지만 견딜 만하기는 하다, 라는 쪽으로 이해하잖아요.

그러니까 이런 자기에 대해서 얼추 자기 자신을 용납하는 모든 근거에는 뭐냐 하면 계속해서 실이 어떤 실이라 합니까? 계속해서 “나는 살아 있다, 살아 있다.” “어, 실수했네.” “실수했지만 다시 만회했다.” 그러니까 일련의 사태들이 연결해서 하나의 이야기, 내가 주인공이 되는 소설을 만들어나가는 겁니다. 거기에 죽음도 없고 이중나선구조도 없고 그렇지요. 그래놓고 인간들은 그게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 번도 못해요. 내가 살아 있기 때문 산다는 게 뭐가 이상하냐.

셜록 홈즈 탐정에 보면 조수와 이런 대화가 있어요. 탐정이 조수에게, “그 집을 어제 지켜보라 했지?” “예. 지켜봤습니다.” “지켜보니까 무슨 일이 있었어?” “탐정님, 아무 일 없었어요. 개도 짖지 않고 아무 일 없었습니다.” 그때 탐정이, “개가 짖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거야.” 이 말은 뭐냐? 범인은 평소에 개와 잘 아는 사이라. 사건은 터졌는데 아무 일 없었다, 단서가 없다? 이건 뭐냐“ 내부 인물이란 뜻이에요.

지금 우리 인생, 십자가 모르고 교회 별로 좀 빠져도 아무 문제없지요. 그 범인은 누굽니까? “이만하면 선방한 인생인데 이만하면 평온한 만족스럽진 않지만 견딜 만한 인생이잖아. 그냥 이대로 살지, 뭐.” 그냥 넘어가려 할 때 그 범인이 누구에요?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있지 않은 것이 얼마나 무서운 줄 모르고 그냥 설렁설렁 넘어가려는 범인이 누구에요? 내부 인생이 누굽니까? 본인이에요. 본인이 문제에요.

자기 사는데 만족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요. 누가 예수님에 대해서 험담하면 뭐 쉽게 참습니다. 하지만 나에 대해서 험담하면 못 참아요. 자기가 예수님보디 더 소중해졌어요. 우리의 일상생활이. 처음엔 예수님 생각하다가 이제는 그것도 예수님 생각하나 안 하나 태평인데 뭐. 아무 일 없는 데 뭐. 아무 일 없으니까 용기가 나는 거예요. 누가 주님을 욕하든 말든 내 일 아니지만 나에 대해서 조금만 하게 되면, “너, 오늘 죽었어.” 자기한테 굉장히 예민하고 민감하고 그렇습니다.

집에서 개를 오랫동안 키워본 사람은 개라도 의리가 있거든요. 자기 주인이 약간 안 좋은 눈치를 하면 짖는 거예요. 그런데 다른 사람이 와서 집안에 함부로 해도 개가 짖지 않는다는 그것은 개가 사료만 지 배만 채운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이사야 1장에 뭐라고 돼있습니까?

이사야 1장에 보면 소도 주인을 알고 짐승도 알거만은 너희들은 너희가 주인이 되었으니까, 내가 주인인데 나한테 문제 삼지 않으면 세상 아무 문제없어요. 세상이 예수님을 욕하든 그것 나하고 무슨 상관있습니까? 아무 상관없어요. 나만 멀쩡히 살아 있으면 되잖아요. 그리고 내 자식이나 내 가정만 잘 건사하면 더는 소원 없어, 참 멋진 인생이었어, 이러고 있단 말이죠.

그런데 유다 가정에서는 하나님께서 너무 사랑하셔서 유다 가정의 자식 둘이나 죽여 버렸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처음에 선악과 따먹을 때 분명히 하나님께서 무슨 원리를 집어넣었습니까? “네가 인간이냐?” “예.” “그러면 너는 필히 죽는다.” 이게 원리입니다. 이거는 인간의 운명이에요.

저는 이걸 인간이 독약 마셨다 하는데 독약 마시자마자 죽는 사람도 있겠지만 독약 마시고 그 약이 잠복기 지나서 온 몸에 퍼져버리면 결국은 죽잖아요. 사람들은 그걸 늙어죽었다고 이야기하는데 늙어죽은 게 아니고 그게 독약 마셔 죽은 거예요. 먹지 않을 약을 먹은 거예요. 자기가 잘못된 약을 먹었다는 걸 알아야 뭐 해독제를 구하든지 말든지 하지 자기는 정상인데 해독제 필요합니까? 필요 없지요. 해독제가 중요한 게 아니지요. 그저 가을에 놀러가는 게 중요하지 해독제가 뭐 중요하겠어요.

아까 무슨 떡이라 했습니까? 인절미. 쭉쭉 늘어나는 인절미. 인절미 떡이 하나에서 두 개 되었을 때에 둘로 떨어졌을 때 A란 사람과 B라는 사람은 뭘 모르느냐 하면 하나님의 실체가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거예요. 왜냐하면 떡만 보이는 거예요. 나라는 것은 A떡, 너는 B떡, 다른 사람은 C떡, 또 다른 사람은 D떡, 눈에 보이는 인간들만 보이지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 되는 거예요. 왜? 보이는 것에 가려져 있으니까.

인간세계에 하나님은 안 보입니다. 보이지 않는 분에 의해서 그분의 약속에 의해서 유다 가정에 어떤 사건이 터지지요. 그게 아들 에르과 두 번째 오난이 둘 다 죽었다는 사건.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세요. 인간은 늙어 죽든 젊어 죽든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 있다는 뜻이에요. 그냥 살아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다루고 있는 것으로 내 인생에 내 허락도 없이 일방적으로 침입해서 내 몸과 내 모든 인생에 하나님 자기의 원리를 적용시키고 있는 것으로 받아주시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요. 보이지 않으니까 인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빼고 보이는 것들만 이렇게 ABCD 보이는 인간들만 웃고 희희덕거리며 살아요. 어서 오이소, 손님 청하고 어서 가이소, 하고 싸우고 이러지요. 이 보이는 것들의 집합이 될 때 보이지 않는 분이 이 안에 섞이기 때문에 인간들의 영역에는 탈출구가 없다. 탈출구가 없어요. 탈출구가 없다? 이게 인간들의 눈에 보이는 살아 있는 것들이 백날 뭉쳐봐야 꽃다발처럼 뭉쳐봐야 그들은 탈출구가 없어요.

그러면 죽음이란 우리는 재수 없다고 여기잖아요. 아이고, 안 됐다고 이러잖아요. 죽음이 무슨 역할을 하느냐 하면 아까 처음에 강의할 때 누비이불에 두꺼운 이불에 바늘이 들어왔다가 없는데 뽑혀 나오잖아요. 그 죽음의 바로 뭐냐 하면 탈출구 없는 곳에 탈출 구멍 작용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바로 유다 가정에 일어났던 며느리 다말의 행위입니다. 다말의 행위는 며느리가 창녀기 때문에 유다 말 그대로 그 며느리는 가정의 가문을 생각해서 죽어야 돼요.

여기 창세기 38장에 보게 되면 24절에, “석달쯤 후에 혹이 유다에게 고하여 가로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을 인하여 잉태하였느니라 유다가 가로되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자, 불살라 죽이라고 명령을 누가 합니까? 시아버지가 하고 명령은 누가 받아요? 며느리가 죽임을 당해야 되지요. 일종의 명예살인이에요.

명예살인이란 뭐냐 하면 이슬람 나라에서 여자가 나대면 그 집안의 명예를 위해서 자기 일가친척이나 집안 가운데 설쳐댄 여자를 죽여도 그거는 살인죄로 처벌하지 않는 법, 이게 명예로운 살인이라는 겁니다.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에 방송국 여자 앵커가 있었는데 그 여자가 명예살인을 당했어요. 누가 죽였느냐? 친오빠가 죽였어요. 왜 죽였는지 물어보니까 그 여자가 영어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고 똑똑해서 카불 방송국의 앵커가 됐다 이 말이죠. 앵커가 돼서 남자 진행자와 같이 나오는 걸 보고 카불에 있는 시민들이 그 집안의 부모와 오빠한테 압력을 가한 거예요.

우리나라의 전통을 네 동생이 그렇게 하는 데도 가만히 보고 있느냐? 정말 진짜 당신의 가문을 중시한다면 우리가 하기 전에 너희 집안 손으로 죽여 버리면 당신을 다시 옛날처럼 위대한 가문으로 존중해줄게. 그래서 죽였어요. 그래서 당국에서 살인한 오빠와 공모한 아버지를 한 달간 구금했는데, 구금도 아니고 자유롭게 왔다 갔다 하다가 풀어줬어요. 그리고 그 가문은 역시 대단한 가문이에요, 대단해요. 이렇게 된 거예요.

유다의 가정이 그와 비슷한 거예요. 유다가 자기 며느리가 임신했다 하니까 뭘 생각합니까?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보통 뼈대 있는 집안이 아니잖아요.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집안이잖아요. 우리 집안에 이런 여자 들어오면 누구의 명예를 먹칠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먹칠하는 거예요. 자, 묻습니까? 유다가 가짜에요, 가짜 아니에요? 가짜지요. 하나님 믿는 유다가 가짜인 거예요. 하나님 믿는 자가 가짜란 말이죠. 그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언약의 작업이에요. 네가 가짜야, 네가.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서 너 하나님 믿는 이유가 뭐냐? 뭘 노리고 믿어? 그 질문에 답해야 돼요. 우리가. 하나님 믿으면 죽어서 천당 가고요. 하나님 믿으면 나쁜 짓 안 해서 칭찬받고요. 죽 들어보면 하나님을 결국은 뭐냐 하면 내가 살되 내가 원하는 값어치 있는 훌륭한 나를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 이용한 것밖에 더 됩니까?

지옥 있다하니까 살살 비는 겁니다. 어린애가 학생이 선생이 때리니까 안 맞으려고 잘못했습니다. 잘못한 게 잘못한 게 아니에요. 안 맞기 위해서 잘못한 거예요. 지옥 있다니까 지옥 안 가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왜 가짜냐 하면 지옥에 안 가겠다는 가짜이기 때문에 나오는 본심이에요.

“지옥에 나는 안 갈래.” 그러면 이것은 무슨 원리를 어기느냐 하면 창세기 2장의 원리,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3장에 보면 진짜 따먹었잖아요. 그러면 따먹기는 해놓고 지옥에는 안 간다? 배후에 누가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부업에 대항하게 만듭니까? 보나마나 악마가 그 짓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 빼놓고요 지옥에 안 갈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음부에 내려갔잖아요. 초대교회 사도신경에 보면 예수님이 지옥에 갔다는 문구가 있어요. 지금은 음부라고 그냥 넘어갔지만. 아버지로부터 저주를 받았으니까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낸 것은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어느 누구도 구원될 희망이나 자격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담의 자손 치고는 단 한 명도 없다는 것. 의인이 어디 있어요.

의인이 없는데 천당 갈 사람은 왜 그리 많은지 모르겠어요. 본인이 의가 있는지 없는지 그건 돌아봐야 돼요. 의도 없으면서 천당 가려하고. 무슨 그런 횡포입니까? 교회는 좋다고 또 한 건수 걸려들었어, 하고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사기 쳐서 그렇게 끌어당기고.

인간은 할 수 있는 게 구원도 그렇고 천국도 그렇지만 자기 세계 만드는 것 외에는 일련에 연결된 자기 세계 있잖아요. 자기 내용, 할 줄 아는 게 그것밖에 없어요. 스스로 탈출구를 못 만들어요. 나로부터의 탈출이 점점 더 안 돼요. 뭐 그전부터도 안 됐지만. 그냥 자기 안으로 응축되는 겁니다. “건드리기만 해봐라.” 맨날 외부에 대해선 그런 소리나 하고.

유다의 가정에 애 둘이 죽었다는 말은 이거는 죽음의 이유들의 아빠, 엄마한테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그 자식들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그 부모한테 나왔잖아요. 만약에 손등에 점이 있다면 점을 보면, “이 나쁜 점아.” 이러면 안 돼요. 왜냐하면 이 점은 어느 영역에 있어요? 손이라는 영역에 점이 찍힌 거예요.

자식이 점이라면 그 손등은 뭡니까? 부모에요. 그 부모는 더 넓은 의미에서 그 부모의 부모, 부모의, 부모의 부모. 어떤 점이라는 안 좋은 일이 발생되게 되면 그건 걔만 닦달내지 마시고요 이미 그걸 잉태한 모든 환경과 모든 육적인 조건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탈출구로 보여준 거예요.

뭐 매 맞는다, 장사 안 된다. 이런 게 아니에요. 장사 안 되면 열심히 겸손하게 살면 되고 매 안 맞으려면 나쁜 짓 안 하면 되지만 이게 아니고 죽었다는 말은, 애초부터 너한테 아무것도 기대를 안 하는데 너는 왜 자꾸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 저 기대해주세요. 제가 하나님 말씀대로 잘할 수 있습니다.” 왜 네 주제파악도 안 되고 네 자신을 몰라도 그렇게 모르는 그런 소리만 해대느냐 이 말이죠.

서당집 개가 한 삼 면 배웠다 칩시다. 누가 속담을 듣고 서당집 개는 풍월을 읊는 다해서 도그, 도그, 도그 녹음기 들고 가서, “풍월 시작, 풍월 읊어 봐. 시조 한 번 읊어 봐.” 하면 개가 뭐라 합니까? 웡~ 이것 개소리 아닙니까. 인간이 찬양을 하고 무슨 설교를 하고 강의를 해도 주님 보시기에 웡~ 개소리에요. 강의해서 구원받아요, 설교해서 구원받습니까? 기도한다고 그것으로 구원됩니까?

하나님께서 자식을 죽일 때 그 삶의 영역에 탈출구가 생겼다 했잖아요. 구멍이 생긴 거예요. 그 구멍 속으로 뭐가 들어왔느냐 하면 하나님의 바늘이 들어온 거예요. 그 바늘 뒤에 실이 있고. 언약이 유다 가정에 꽂이고 드디어 잠복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거예요. 그 들어올 때에 유다는 처음에 아들 죽고 난 뒤에 겁났어요. 우리 집안 거덜 난다고 죽었다고 대가 끊어진다고 벌벌 떨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유다가 다말이 변장해서 창녀가 됐다는 그 내력을 듣고 난 뒤에 창세기 38장 26절에 보면,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가로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다시 말해서 내 며느리가 나보다 옳다. 그런데 그 전에 유다는 며느리는 자기 집안의 원수로 생각했잖아요. 너는 나의 원수라고 판정내린 그 판정이 틀려먹었다 이 말입니다.

내 쪽에서 나를 본 거에요. 이중나선구조에서 기어이 나는 내 것을 지키려고 한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죽음으로 돌출된 주님의 언약의 입장에서 그게 뭐냐? 하나님의 적이 되고 하나님의 원수가 된 겁니다.

지금 몇 분 됐습니까? 그만해야 되겠지요. 그만합시다.


20211001b 울산강의-역대기상(4강) 2장 3절 : 죄의 송유관
(강의:이근호 목사)


서로 연결된 일련의 언약 내용이 있다는 말은, 우리가 역대상하고 있잖아요. 역대상에 보면 족보가 쭉 나오거든요. 족보가 겉에 역사적으로 드러난 영웅들의 이야기가 아니고 망했던 주님이 직접 개입했을 때 어떤 현상들이 나타나는데 그 현상들이 살고자하는 인간들에게는 너무나 난처하기 짝이 없는 일들이 일어난 일들을 이렇게 연결시켜놓은 거예요.

지금 역대상 2장 이야기가 오늘 본문 유다의 아들이죠. 그런데 3장에 보면 다윗 나온다고요. 유다에서 다윗이 나올 때 족보를 이야기했다고요. 그 가운데서 일련의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는 일이 어떻게 엮여져서 다윗 같은 인물, 다윗 같은 인물하면 위대한 영웅이라 하잖아요. 그게 아니고 하나님 앞에 상한 심령이 되고 죄인이 되는 그런 자가 등장했느냐? 다윗이 죄를 지었다는 말이 아니고 어떻게 모든 인간이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 사람의 죄만 부각이 되는 인물이 어떻게 생겨났는가? 그게 역대상이에요.

송유관이 있는데 땅 밑에 송유관이 있다는 사실을 여기 A, B, C, D, E 여러 가지 지점이 있지만 하필이면 B지점 말고 A지점에 꽂혔고 D지점에 꽂혔는데 A지점은 유다고 D지점은 다윗이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B, C가 죄 없다는 게 아니고 다윗 오기 전에 일련의 사태들이 일련의 모든 행동들이 그 다음에 D, E, F지점 뚫어보면 동일한 죄가 나오는 거예요. 인간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원했던 인간이 아니고 가짜 인생이 티가 나는, 나는 가짜요, 라는 고백이 튀어나오는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이런 일련의 사태가 결국 신약에 오면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거든요. 보내면 이 죄와 예수님이 만남에서 터진 사건이 무슨 사건이냐 하면 바로 십자가 사건이고,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예수님이 피, 예수님의 찢겨진 살, 이게 뭘 의미하느냐? 이게 바로 언약이라는 거예요. 너희들이 죽어 마땅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 믿고 자시고 하나님 믿고 교회 다니고 아무짝에 소용없어요. 무조건 너는 저주받아 마땅하고 지옥 가도 마땅한 죽어 마땅한 자라는 것을 그런 내용을 들추어 그런 내용을 품고 있는 자를 드러나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저는 트랜스포터, 택배기사. 여러분들이 택배 물건 받을 때 택배기사 키가 크다, 얼굴이 작고 잘 생겼다 이게 큰 문제 됩니까? 관심사가 뭐냐 하면 그쪽에서 보낸 물건이 온전하게 왔느냐가 중요하지 택배기사 애가 몇인지 그거 중요합니까? 중요하지 않지요. 우리가 이 땅에 성도가 이 땅에 살면서 직업이 무엇이며 월수입이 얼마며 애는 몇 명이며 아버지 뭐하시노? 그게 중요한 문제에요?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어요. 우리가 택배기사, 1톤 화물이라면 하나님 보시기에는 뒤에 화물이 뭐가 실렸는가가 중요하다 이 말이죠. 뭘 운반해야 되거든요. 운반한다는 것은 여러분들 북한이 심심하면 운동장에 모여서 하는 것 있지요. 평양광장에서 하는 것. 미사일할 때 미사일운반용 차량, 그 차량이 중요합니까, 미사일이 중요해요? 미사일이 중요하지요.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인생을 제대로 살았다는 말은 이 세상에 어떤 일을 당해도 그 모든 일을 묵살할 만큼 귀한 것을 운반할 때 그게 바로 인생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에요. 내 인생이 어떻게 꼬이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내가 지금 뭐를 포터, 운반하는 택배하고 있느냐, 그게 중요한 거예요. 천하보다 귀한 보물을 운반하는 거예요.

그동안 우리는 나를 운반한다고 나의 중량, 나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어요. 물론 살 좀 빼고 하겠지만 빼나 안 빼나 소용없어요. 죽음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어요. 주님께서 뭐라 하나? 내게 배워라. 내게 배우면 너의 짐도 가벼울 것이다. 주님 자신이 가벼운 이유가, 주님이 우리를 아이스크림 취급하고 아이스크림 담고 있는 과자 있잖아요. 바삭바삭 부셔지는 그 과자 무게 얼마 나가요? 주님께서 아이스크림 담아줄 때 노란색 과자가 중요합니까, 아이스크림이 중요해요? 아이스크림이 중요하잖아요. 그런데 과자를 금으로 만들고 그러면 아이스크림 가치가 죽어버린단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언약을 우리한테 양보하질 않습니다. 계속 우리 자신을 무겁게 가지고 가는 게 아니고 가볍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 미미한 존재로 계속 가져가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다시 쓰겠습니다. 이게 굉장히 어려운 말인데요. “인간은 내용은 없고 형식만 있다.”

너거 아버지 뭐 하시노? 당신 집은 몇 평? 전부 다 형식이에요. 당신, 나이 몇 살 먹었어? 당신 건강해? 전부 다 형식이에요. 우린 형식이니까 내용은 우리 이야기는 여기서 빠져야 돼요. 어떻게? 가볍게. 가볍게 빠져야 돼요. 네 아이스크림 바닐라 맛이야, 크림 맛이야, 무슨 맛이야, 바나나 맛이야? 그걸 묻는데 나 어때? 아이스크림 담는 콘 과자, 그것만 쥐고 안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는데요.

안에 빈껍데기만 들고, “나, 참 멋진 인생이야!” 뭐 있나? 없는데. 내용이 없는데 무슨 멋진 인생이야. 자꾸 사람들은 세월만 가고 봄여름가을겨울 그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봄여름 지나고 가을겨울 온다네. 아름다운 세상~ 대전강의에서 살짝 불렀어요. 오늘도 유행가 안 나오는가 했는데 또 나와 버렸지요. 김정미가 불렀던 <아름다운 강산> 신중현 작곡, 작사.

이게 서로 연결된 언약 안에서의 시간의 경과가 의미가 없어요. 나 몇 살 먹었다, 인생 어떻다 그게 아무 의미가 없다고요. 어릴 때도 콘이었고 나이 오십, 구십 돼도 콘이었어요. 내용이 있어야지, 내용이요. 형식만 들고 세월만 보내면 뭐예요?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머리가 그런 데 돌아간다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유대 가정에 뭐냐 하면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죽이려고 했단 말이죠. 명예살인이죠. 너 같은 것 우리 집안에 우사다, 했는데 하나님은 어느 편이냐? 다말 편에 섰어요. 의로운 하나님이 다말이 의로워요. 다말이 의롭다는 말이 의로운 다말 보고 욕하는 죽으라고 했던 유다는 뭐다? 의가 아니고 죄에 속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언약의 계통은 뭐냐 하면 자진해서 창녀가 돼야 된다는 그 방식이 하나님의 언약이 이 땅에 투입하는 방식이에요. 세리와 창기가 천당 가는 거예요. 그게 원판입니다. 아스테이지, 아까 이야기한 셀로판지, 지도와 셀로판지가 있다. 선생님이 뭐라고 주느냐 하면 지도 위에 투명한 비닐을 놓고 그걸 고대로 베껴라.

그럼 원판은 누구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원판이에요. 그러면 안에 깔려 있는 건 뭐냐? 우리 인생입니다. 우리 인생과 원판 된 주님과 대조해서 이게 유사점이 있는지 보라 이 말이죠. 그게 바로 말씀이잖아요. 유다가 땅이 몇 평이고 소가 몇 마리인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유다에 어떤 며느리가 시집 왔는지 이게 중요하다 이 말이죠. 유다에 어떤 며느리가 시집 왔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이라면 자발적으로 창녀 되겠다는 여자가 시집 온 거예요.

이거는 기존에 잘난 체하는 모든 인간으로부터 창녀라고 욕 얻어먹을 수밖에 없는 그 배척의 자리, 더러운 거리, 거부당한 자리, 죽음의 자리, 불로 죽이라 했으니까, 그 죽음의 자리를 소위 살아야 되겠다는 우리 안에다 삽입시키는 그 기능을 주님께서 하시는 겁니다.

비룡그룹 회의할 때 중간 중간에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자알 돼야 될 텐데……” 이러지요. 잘 될 턱이 있나, 하고. 이번 추석에 만났잖아요. 만나서 말은 안 해도 주고받는 눈짓 속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비룡그룹 들어있어요. “조카야, 자알 돼야 될 텐데.” 주님 뭐라 하느냐 하면, “잘 될 턱이 있나.”

참 멋진 인생이야, 하고 자기가 원판이고 자기가 복사판이에요. 인간은 원판이 없어요. 지금 인간들은. 성령을 받지 않으면 원판이 없어요. 자기가 살아온 인생이 원판이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그것 가짜에요. 엉터리가 엉터리와 비교하면서 너는 이름도 희한한 뭐, 화천대유, 대장금도 아니고 대장동, 하여튼 세상의 모든 뉴스들이 가짜와 가짜들이 대결하고 있는 거예요. 진짜는 없어요, 거기에.

교회 온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들이 예수 믿고 하나님 믿고 하지만 교인들의 원하는 것은 뭐냐 하면 결국 천국 같은 지옥을 원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내가 멀쩡하게 나를 잘났다고 해줘야 천국이라고 사람들은 인정해요. 왜냐하면 그동안 일련의 사태들이 일련의 내용들이 누굴 위해서 했습니까? 나 중심으로 계속 이어져오다가 죽고 난 뒤에 천국도 나 중심의 천국이에요. 나 중심이에요, 나 중심.

내가 생각한 이상적이 나와 현실의 나와 DNA 이중나선구조로 꼬여져있어요. 꽈배기처럼 꽉꽉 꼬여져있다고. 떨어지지 않아요. 아침 눈만 떠도 안 떨어져요. 오늘은 자알 돼야 될 텐데, 이러고 있단 말이죠. 그러다가 목숨 데려가 버리면 죽어버리면 인간들이 원했던 천국은 내가 잘된 곳이에요.

이 천국을 사모하는 인간들이 여기서 누굴 쫓아냈습니까? 예수님을 쫓아낼 때 그냥 쫓아냈습니까? 죽어 버렸지요. 죽여서 만든 나라가 무슨 나라입니까? 진짜 천국이잖아요. 그러니까 그 나라가 주님이고 천국이 따로 있으니까 이쪽 천국은 뭐냐? 이게 지옥이 돼요. 지옥이 되니까 사람들은 천국 같은 지옥으로 가고 있어요. 주님은 지옥 같은 천국을 이루었습니다.

지옥이란 말은 힘들다, 아프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아예 포기하자고, 나에 대해서 나의 희망과 기대에서 포기한다면 그 지옥도 천국입니다. 가벼워요. 나의 운명은 나한테 달린 게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나를 죄인이라고 십자가의 능력이 성령의 능력으로 침투해버리면 주님의 운명이 확장되었어요, 여기까지. 주님 안에 내재된 작용이 이제는 확장되어서 주님의 운명적 작업이 내 안에서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어느 것 하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하게 하셨지요, 뭐든지. 그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그 다음에 역대상 2장 7절 읽어보겠습니다. 역시 유다지파에 속한 족보입니다. “가르미의 아들은 아갈이니 저는 마땅히 멸할 물건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자며” 이렇게 돼있어요. 아갈이란 사람은 여호수아 7장에 보면 아간이에요.

여호수아 7장 16절에 보면, “이에 여호수아가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그 지파대로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가 뽑혔고 유다 족속을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세라 족속이 뽑혔고 세라 족속의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삽디가 뽑혔고 삽디의 가족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이요 삽디의 손자요 갈미의 아들인 아간이 뽑혔더라”

아까 송유관 하나 C지점에 구멍 뚫렸지요. 아간 고마운 줄 알아야 됩니다. 당첨됐어요. 인간에 내재된 선악과 따먹은 그 저주를 보여주기 위해서 당첨된 거예요. 본인이. 아간의 잘못이에요. 아니지요. 아간의 잘못이라면 아간만 죽이면 되는데 아이 성 칠 때 여기 7장에 들어가서 여리고 성 무너지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아이 성이에요. 아이 성은 여리고 성보다 성이 작아서 사람들이 우습게 본 거예요. 우습게 봐서 사람들의 36명 죽었어요. 7장 5절에. 아이 사람들이 삼십육 인 쯤 죽였다고 돼있어요.

자, 여러분 물어보겠습니다. 삼십육 인 죽는 게 아깝습니까, 아간 하나 돌에 맞아 죽는 게 아까운 거예요? 똑같지요. 왜? 죽음이 죽음으로 드러나는 데 새삼스럽게 죽었다고 이야기할 필요 없지요. 이게 물이란 말이죠. “이게 물이야.” 사람들은, “그래서 뭐?” 물을 물이라 하는데 뭐가 문제에요. 문제없지요. 그런데 만약에 예수님께서, “이거는 포도주야.” 사람들이, “물인데 무슨 딴소리하고 있어?” 주님이 포도주라 하니까 물이야.

인간은 물이고, 예수님은 포도주잖아요. 예수님이 개입하니까 물이 뭐가 됐어요? 가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 됐잖아요. 주님이 개입하지 않으면 구원 못 받습니다. 천국 못 갑니다.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성경은. 성경은 죄부터 출발해서 주님의 약속, 십자가의 약속이 개입되면 그 약속이 담겨진 사람은 언약이 담겨진 사람으로 간주되어 구원받는다 이 말입니다. 아간이 구원받았다는 말이 아니고요.

이것은 아간의 역할, 다윗의 역할도 마찬가지고 유다의 역할도 마찬가지고. 그건 뭐냐 하면 언약에는 반드시 무슨 사건? 죽음 사건을 유발하면 언약이 주어진다. “언약은 반드시 죽음 사건을 동반한다.” 태풍 치면 비 옵니까, 안 옵니까? 비 오지요. 태풍 불 때 뭘 동반한다고 합니까? 비를 동반하잖아요. 비는 하나에 징조잖아요. 태풍은 기호에요. 어휘라고 단어라고요. 태풍 온다는 소리 듣고 태풍이 막 옵니까? 아니죠.

단어란 인간끼리 하는 것이에요. 태풍이 그 말 듣고 오지는 않잖아요. 바람과 세찬 비가 오잖아요. 사람들은 그걸 뭐라고 표현합니까? 태풍이라고 이야기하고 폭풍이라고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니까 기호 또는 언어는 뭐한다? 사물을 죽이고 무의미하게 하고 우리의 의미를 일방적으로 갖다 붙인 거예요. 인간의 언어의 의미라는 것은. ‘개’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붙인 거지 개가 선생님들 우리끼리 이름 짓겠습니다, 하고 ‘개’라고 지은 게 아니지요.

사물 자체가 뭐라고 하는 것은 완전히 개 무시하고 인간들이 자신의 의미됨을 위해서 우회적으로 그 사물에 명칭을 붙인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이름을 붙이든 그 이름은 인간의 이름에 종속되고 복종하게 돼있어요. 왜냐하면 아담이 이름을 붙이거든요. 사람이 이름을 붙였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름을 붙인 모든 것들은 아담에게 복종하게 돼있어요. 창세기 2장에서.

그런데 마지막 아담, 두 번째 아담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잖아요. 예수님이 이름을 붙였다는 말은 너는 네 자신의 인생은 이제는 없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불러낸 겁니다. 제가 전에 광주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는데요. 예수님은 대선후보가 아니라 했지요. 예수님은 대통령 후보감이 아니에요. 왕이에요. 백성은 왕이 선택할 때만 백성 되지 백성이 왕을 뽑지를 않습니다.

예수님은 왕이지 우리가 믿고 안 믿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일방적으로 왕이 이리 와, 하고 데려온 거예요, 그냥. 그게 이스라엘이고요.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의 잠재 속에 언약이 흐르고 있는 겁니다. 흐르고 있는 것이 역대상이에요. 그런데 그 아간이 죽는다는 사건 전후를 보게 되면 일련의 연관된 사건들이 있어요. 그게 뭐냐? 여리고 성이 함락되었다는 겁니다.

여리고 성이 함락되어 신났지요. 아아 이런 수도 다 있구나. 제가 강남강의에서 그런 강의한 적이 있어요. 이스라엘 백성 남자만 육십만 왔을 때 그들은 홍해를 건너왔잖아요. 홍해를 건너지 않고 죽음을 건너온 사람은 딱 두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갈렙과 여호수아. 다른 사람은 홍해 건너왔다고 생각한 거예요. 갈렙은, “아니야. 우리는 죽음을 건너왔어.” 다시 말해서 나를 건너왔어요. 살고자하는 나를 건너온 거예요. 살고자하는 나는 이제는 나와 빠이빠이입니다. 헤어졌어요.

따라서 앞의 주께서, 그러면 내가 나를 주관하지도 못하지요. 죽었으니까요. 내가 죽었으니까 나를 주관하지 못하고 주께서 나를 주관한다면 주님의 스케줄이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 스케줄 하나가 뭐냐 하면 바로 약속의 땅에 정탐하라 하는 거고 정탐했을 때 그걸 보고하라는 거예요. 약속의 땅의 상황은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애굽 군대에게 좇기는 홍해 상황과 딱 닮았어요. 왜? 진퇴양난이니까. 애굽 군대는 막강하고 앞에 가니까 바다가 가로막혀 있고 사람에게 죽느냐, 물에 빠져 죽느냐? 죽기는 마찬가지거든요.

자연적으로 원망이 터져 나오지요. 애굽에 돌아가서 고생하나 광야에서 먹을 게 없으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바로 이스라엘로 하여금 광야에서 열 번이나 하나님께 원망하게 만들었습니다. 갈렙과 여호수아 빼놓고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인도한다는 것은 그저 원망, 원망의 연속이에요. 내가 꾸미고 싶은 내 영역, 내 생활공간에 계속 주님께서 초를 치거든요.

짬뽕이 먹고 싶은데 짜장면을 강제로 시켜서 왜 나는 되는 일이 없는가? 다음에 또 짬뽕 시켜보지요. 나는 운도 없어 왜 짜장면이 더 먹고 싶은지 모르겠네. 이게 뭔 뜻이냐 하면 인간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사태가 진행되고 난 뒤에 알게 돼요. 원망으로 나와요. 인생은 원망하기 위해서 살은 겁니다. 신에게 하나님께 원망하기 위해서. 그게 인생의 죄인의 모습이에요.

다시 적어보겠습니다. “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사태가 진행해봐야 안다.” 결국 나는 뭐냐 하면 후회하는 것 외에 나는 할 게 아무것도 없다. 인생 내내 후회하는 것 외에는 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왜? 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사태가 지나봐야 아니까요. 전에 예를 들었는데 좀 지겹더라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남녀가 처녀총각이 연애하고 좋아한다, 사랑한다고 입에 발린 이야기하는데 좀 사귀면서 슬슬 아가씨가 남자친구한테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는 남자 너 보면 답답해.” 그 남자, “왜 그런데?” “내가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원하는지 니가 왜 나한테 안 가르쳐주느냐?” 이 말은 뭐냐? 나는 뭔가 갈급한데 무엇이 갈급한지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남자 쪽에서 이벤트를 벌여보면, “봐라 그거였어. 내가 원하는 건 그거였어.” 새삼스럽게 내가 모르는 욕망을 욕구를 네가 알려주는 그런 멋진 남자친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요구하게 됩니다.

말이 어려운데 쉽게 하게 되면 제발 매일같이 새로운 걸로 나를 즐겁게 하라 이 말이에요. 그런데 즐겁게 한다는 말이 뭐냐? 기존 것으론 안 즐거워요. 왜? 이미 다 해봤기 때문에. 그런데 새로운데 역겨운 새로운 건 또 안 돼. 그러니까 새롭더라도 기쁘게 하는 새로움을 누가 개발해야 되는가? 상대방이 개발을 해줘야 내가 너와 계속 사귀고 있는 보람이 있을 게 아니냐. 그러니까 남자 쪽에서 나를 기쁘게 하는데 애 좀 써봐라 이 말이에요.

이게 연애할 때만 그런 줄 알아요. 결혼하고 난 뒤에 이런 것 없습니까? 없구나. 사는 재미를 나한테 느끼게 해봐라. 서프라이즈, 풍선? 그건 돈도 얼마 안 드는 그런 것은 이십 대에 해봤고 그것 말고 삼십 대에 명품가방, 그것도 해봤고 그것 말고. 그럼 남자가, “뭘 원하는데?” “그걸 니가 알아맞혀야지. 내가 뭘 원하는지. 나도 모르겠어.” 참 돈 안 벌고 집구석에 앉아서 시간 보내니 남편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뭣도 모르고 니가 그렇구나, 라고 남편들은 짜증을 내지요.

여리고 성을 함락할 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자기편인 줄 알았어요. 그들은 이것보다 더 큰 기쁨이 계속 기다릴 줄 알았지요. 과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예상 못할 큰 기쁨을 줬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도저히 예상 못한 기쁨이 뭡니까? 너희들은 여기서 끝났어. 아이 성 여기서 끝났어. 애굽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진퇴양난. 이제는 아이 성을 점령할 수도 없고 앞길도 막혔고 뒷길도 막혔고 여기서 땡볕에 굶어죽는 그것밖에 안 남았어요.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이스라엘이 딜레마에 빠진 거예요. 죽음이죠.

인간이죽을 때 그냥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원망합니다. 그게 죄의 원판이었어요. 원판이 그거에요. 하나님께 원망하는 것. 악마가 들어있으면서 악마는 자기 정체를 감췄는데 살기 힘드니까 이판사판이라 해서 하나님께 욕하자 해서 설교시간에 이야기했거든요. 욥기 2장 9절. 욥의 아내가 욥에게 하는 이야기가, 하나님께 욕하고 죽어라. 남자들이 보기에 여자들은 착해요. 착한데 여자들이 죽어요. 그것도 고생고생해서 죽어요. 남자들은 고생 안 하고 일찍 죽지만 여자들은 오래 살아서 죽어요.

도대체 여자의 죄가 뭡니까? 뭐 예쁜 것은 무죄라 하는데. 여자의 죄가 뭐냐? 여기서 남자, 여자 구분 자체가 이게 형식입니다. 그러나 내용에선 남자나 여자나 동일한 내용을 갖고 있어요. 남자, 여자 몸이 다르니까 형식적으로 다르니까 다른 존재로 생각하지만 원판을 보게 되면 동일한 인간이에요.

인간의 죄는 뭐냐 하면 선악과 따먹을 때 이미 들통 났어요. 이겁니다. 가지고자 하는 것. 여리고 성을 가지고자 하는 것, 아이 성을 가지고자 하는 것. 가져서 방향을 어느 쪽으로 비축합니까? 나에게. 그게 바로 아간의 죄에요. 여리고 성에서 전리품 얻었잖아요. 그걸 아간은 하나님께 드려야 되는데 방향이 어느 쪽이었습니까? 나도 적들 치는데 고생깨나 했다고 자기에게 끌어왔지요.

아가씨들이 결혼할 때 저 순진한 아가씨가 무슨 죄가 있느냐 하지만 죄가 있어요. 왜? 남들한테 자랑할 만한 남자를 그 다음에 뭐한다? 내 것, 하는 거예요. 뭐 성질이 더럽다, 난폭하다, 그것도 죄지만 근원적인 죄는 뭐냐 하면 내가 여기 있음에 그 다음에 나오는 순서는 뭐냐?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확보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 뭔가 외부의 것을 가져서 내 것으로 전환시키는 것, 그래야 내 존재는 확고해지거든요.

선악과 따먹는 거예요. 내 것 만드는 거예요. 여리고 성 전리품? 내 것 만드는 겁니다. 그게 어느 지파에서 했다고요? 역대상 2장 7절에서 족보가 어느 족보라고요? 그게 바로 유다족보에요. 그 유다족보 자손 중에서 누가 나왔습니까? 로마서 1장에? 예수님 나오잖아요. 어떻게 나옵니까? 멀쩡하게 태어나서 돌아가실 때는 피투성이 되어 돌아가시잖아요. 피투성이 되든 말든 메시아는 유다지파에서 나오지요.

그럼 유다지파는 어떤 지파냐? 가장 죄를 궁극적으로 보여주는 지파가 유다지파지요. 왜냐하면 이스라엘 나라가 이름이 뭐로 바뀌었습니까? 유다. 가장 근접한 거리에서 가장 근접한 데서 메시아를 죽였습니다. 그게 파이프 구멍 낸 거예요.

여호수아 7장에 보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했다고 돼있거든요. 그렇다면 여리고 성은 분명히 정복할 때 이스라엘이 아주 신바람 나고 기분 좋아했잖아요. 기분 좋아했다, 신바람 났다는 자체가 아이 성에 패배하고 난 뒤에는 다시 자기 자신을 돌아봐야 됐어요. 우리가 내 것도 아닌데 좋아했는지 스스로 자문해봐야 돼요.

십자가 믿었다. 좋다.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 했을 때 오해의 소지가 개입되지요. 뭐냐? 그 예수님의 액체 있잖아요. 예수님의 몸 내부에 흐르는 액체를 구원받기 위해서 신비로운 마법의 힘이 있는 양 그 피를 내 것 만들었지요. 그 피를 내 것 만들어 내가 그 죄를 찢으면 나는, “주님 고맙습니다. 수고했습니다.” 해놓고는 구원은 누가 받아요? 내가 구원받는다는 그런 계산을 하겠지요.

평소에 하는 모든 것이 괜찮은 것은 다 어디로 끌어 모은다? 내 것으로 끌어 모으는 거예요. 그게 아간의 죄라니까요. 남자나 여자의 죄는 뭡니까? 가지고 싶은 거예요. 내 것. 여러분 피는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내 것을 빼앗는 겁니다. 지난 강남강의에서 사람이 빼앗김으로써 은혜의 가치를 알고 죽음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생명의 귀함을 안다고요.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목사님, 우리 집에 강도나 도둑 들어온 적 없습니다.” 이렇게 하는데 주님께서 매일같이 나의 가치를 빼앗아요. 우리 재산 지키고 이게 아니고 재산 지켜도 내 재산 아니에요. 그것이 주의 것이고 내 몸도 사나죽으나 죽의 것이다. 아프든 건강하든 내 몸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하는 식으로 내 것을 빼앗아서 내 중량 내 무게를 가볍게 하십니다. 내가 아이스크림에 있는 가벼운 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늘 확인시켜 주는 것, 이것 복 받은 거예요.

지 인생문제, 어려운 문제 해결하셔서 영웅이다. 이것보다도 주께서 내 것 다 가져가서 자동차든 옷이고 뭐든 간에 내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숨 쉬는 것, 힘까지 다 내 것 아니고 주님의 것이다. 이렇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감사요 기적입니까.

자꾸 여기 성경 보면서 언약이 나왔을 때 결과적으로 잘 먹고 잘 살았다, 그것만 쳐다보지 마시고요. 그것 생각난다. “다리만 쳐다보시지 마시고요.” 내레이터 모델들 하는 멘트에요. 성경 보면서 여기 있는 아간이나 유다의 이런 성질 급함, 자기 며느리 다말을 죽이라고 이렇게 우리 집안을 명예를 훼손했다고 하는 그 성깔머리, 그것 전부 다 누구 이야기에요? 우리로 하여금 유다 되게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아간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작업 중이에요.

여러분들이 건설회사 보게 되면 간판 하나 붙은 것 볼 거예요.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고 돼있지요. 우리 안에 관계자가 주님밖에 없고 나도 관계자 아니에요. 주님께서 출입하셔서 어느 것 하나 내 것이란 게 없게 만들어요. 많음에도 불구하고 다 주님의 것이에요. 그럴 때 주님이 주시는 십자가의 원판과 현재 그런 상태의 내 복사판과 비교해보세요. 공통점이 많지요. 예수님도 사나죽으나 나는 내 일이 아니고 아버지 일이라 하고 나도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니까 공통점이 있잖아요. 늘 대비, 대조하라고 성령께서 오신 거예요.

그 다음에 역대상 2장 11절 봅시다. “나손은 살마를 낳았고 살마는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누굴 낳았습니까? 다윗을 낳았지요. 아마 여러분들은 사무엘상에서 다윗이 여덟 번째 아들인 줄 알고 있지요. 그런데 아마 역대상이 나중에 나온 족보거든요. 아들이 하나 중간에 소아마비로 죽든지 있겠지요. 몇 번째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다윗을 낳았다는 겁니다.

그럼 이 다윗의 해석을 아까 아간 해석처럼 다시 해봅시다. 아간 해석 원리로 가는 거예요. 아까 했던 걸 다시 하게 되면,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사태가 진행돼봐야 비로소 자기가 그런 존재인 줄 알잖아요. 다윗도 처음에 왕일 때 자기가 왕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럴만한 근거는 있어요. 골리앗을 이겼으니까요. 어느 강의 때 했는데 여기서도 해보겠습니다.

자, 이 문장을 보세요. “나는 하나님과 함께 있다.” 함께 산다, 함께 지낸다, 함께 교제한다, 같은 말. 나는 하나님과 함께 있다, 할 때 상당히 긍정적 문장이지요. 이것 칭찬받을 만하다고 생각되겠지요. 다윗이 골리앗 이길 때 다윗은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나는 지금 하나님과 함께 있다. 이번 전쟁은 내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 전쟁이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과 함께 있다가 대외용이에요. 남에게 나타내 보이는 용도가 되는 이유가, 내가 나를 쳐다보는 용도에 하나님을 거론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이 갖고 있는 욕망이라 하는 것은 이게 뭐냐 하면 타인의 응시, 타인의 눈총을 감안해서 인간은 욕망하게 돼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쳐다보게 되면, 여러분들이 만약에 기차역에 갔다는 주위 사람들이 갑자기 나를 보게 되면 무슨 생각합니까? “뭐, 뭐, 뭐 문제 있어?” 이렇게 하지요. 인간의 행동이나 행위, 마음이라 하는 것은 그동안 줄곧 주위 가까운 사람, 학교 선생님이나 그 이전부터 가족이죠. 가족에 의해서 나한테 너는 이러한 욕망을 가져야 돼, 라고 강요받은 일들을 해요. 그럼 이 욕망은 본인에게 원래 있던 욕망입니까, 남의 욕망입니까? 남의 욕망이 나한테 안긴 거지요. 강요한 거예요.

두 살도 넘었는데 말도 못하네. 아빠, 엄마, 이. 오. 그것밖에 못해. ‘누나’라고 해봐라. 그럼 애가, “아빠빠바바.” 누나라고 말하기 전에. 계속 주위에서 나한테 요구하는 게 있어요. “주부라면 주부답게 해야지. 주부라면서 전도 못하느냐?” 이런 것. “김치 담글 줄 알아?” “모릅니다.” “아이고, 그동안 뭐 했노? 시집 와서. 살긴 뭘 살았어.” 그러면 그걸 외계인 말로 듣습니까? 아니면 속으로 내 멋대로 살면 안 되겠구나, 이런 생각이 자연 들지요.

다윗에 뭐가 흐르고 있느냐 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죄가 흐르고 잠복돼 흐른다 했습니다. 송유관처럼. 제목을 죄의 송유관. 죄의 송유관처럼 일 년 내내 흐르고 있단 말이죠. 그런데 주께서 언약으로 침투하지 않으면 이것이 자기에 이런 죄가 흐른다는 것, 저주가 흐른다는 것 인간은 몰라요. 침투해야 돼요. 성령이 말씀으로 골수를 쪼개야 돼요.

쪼개버리면 그동안 내가 나 가진 것으로 나를 구상한 모든 것이 폭발해버려요. 그러면 나는 가볍습니까, 무겁습니까? 가볍지요. 폭발했는데요. 그동안 고민거리가 고민거리도 아니에요. 남들의 욕망이에요. 주님의 욕망이 아니고. 주님의 욕망은 뭐냐? 네 껍데기를 해체하라 이 말이에요. 너는 죄밖에 없으면서 그걸 껍데기로 둘러쌌다고 뭔가 의인 양 행세하지 마라. 넌 뭘 해도 죄야. 그게 니 모습이야. 나쁜 짓했다는 말이 아니고 내 본성은 내가 어떻게 조절할 수 없다 이 말이죠. 그걸 깨닫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다윗이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칭송받고 그때 기름부음 받고 왕이 됐잖아요. 왕은 껍데기에요. 자, 다윗은 왕이다. 대부분의 백성들은 다윗을 볼 때 하나님이 함께 있는 다윗이기 때문에 왕 될 자격이 있다고 이야기하겠지요. 그렇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보는 게 아니고 그 백성들 마음속에 잠복돼있는 죄를 다윗이 대표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다윗은 이스라엘 왕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번제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다윗이 대표로 고백하게 만들었어요.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제사도 아니고 번제도 아니고 그 다음에 네 자의 단어? “상한 심령” 다윗이 밧셋바를 얼마나 귀히 여기겠습니까. 그래서 다음 왕후는 정해졌어요. 가비가일도 아니고 다말도 아니고 누구다? 밧세바가 자기의 정식 왕후가 되면서 차기 왕은 밧세바와 다윗 사이에 난 아들 솔로몬이 차기 왕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다윗과 밧세바의 이중나선구조가 찢어졌고 그 안에서 주께서 준비하신 사랑이 주님의 나오거든요. 긍휼하심.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죄를 드러내는 자체가 너에게 사랑의 표시였다는 겁니다. 네 죄를 내가 뭔가 내 것을 가지겠다는 자체가 평생 가도 못 고치는 그 죄가 오히려 사랑이 나한테 임했다는 걸 보여주는 하나의 증후, 징조로서 우리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이 자기 자신을 살피면서 얼마나 가볍겠습니까? 내가 하는 것은 죄밖에 없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는 용서밖에 없구나. 나는 죄 지은 것밖에 없는데 주님께서는 용서하심만 주시는 거예요. 그게 뭐냐? 그것을 보여준 게 십자가지요. 아버지께 죽임을 당했지만 사흘 만에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아서 부활됐잖아요.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부활됐지요. 죄인이 바로 의인되지요. 똑같잖아요. 예수님의 경우가 똑같이 우리한테 적용됐잖아요.

이걸 지식으로 받아들이십니까, 라고 묻는 게 아니고 실제 우리에게 주어진 현재 상황이 바로 주님의 작업이다 이 말이죠. 죄를 더욱 더 죄 되게 함으로써 죄가 있는 곳에 뭐가 넘친다? 은혜가 확실하게 넘치고 있다는 것을 우리로 확인시켜서 가벼운 마음으로 가볍게 사랑의 대상으로 주님을 감사케 하는 그 작업, 그저 주님의 성령에 의해서 여러분 송유관 뚫렸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가 넘치도록 흘러내리는 그래서 세상 사람과 같이 나 멋진 인생이다가 아니라 정말 나 멋진 죄인이다. 내가 감사할 것은 주님밖에 없다고 그렇게 주께서 살려주시는 그 한도 내에서 그 기간 내에서 마음껏 원 없이 주님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다시 성경을 보게 하옵소서. 십자가 중심으로 다시 성경을 찾아보면서 선악과 따먹은 죄가 잠복되어서 흘러내리고 있음을 우리가 애써 감추었던 추가적인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발견해서 그것마저 십자가로 다 들춰주시는 은혜를 고마워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