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4:12 / 할 게 없음 / 250710
녹취:이하림
서울강의20250710a 요한일서 4장 12절(할 게 없음)-이 근호 목사
요한일서 4장 12절,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 했잖아요. 없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인간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본 사람이 없기 때문에 없는 거예요. 인간은 볼 때만 있는 거예요. 뭔가 보이는 것만 있습니다, 인간은.
인간은 보이는 것만 있거든요. 그러니까 12절에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은 없어요. 인간에게 없습니다. 한 번 적어볼게요. 인간에겐 하나님이 없어요. 참, 불신자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대로 성경에서 다 해줘요. 하나님이 없어요. ‘하나님이 없다. 없는 이유는? 본 사람이 없으니까.’ 하나님이 없는 이유는 본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기 때문에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없다면, 그럼 다 없느냐 아니면 있는 게 있느냐? 하나님은 없지만 있는 게 있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사람은 있다’가 되죠. ‘사람 없어. 왜? 사람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말은 반칙이죠. 그건 안 되죠. 사람은 있어요. 사람을 본 사람이 있기 때문에 있어요. 우리가 사람을 보고 있으니까 우리는 ‘있다’가 돼요.
그런데 하나님은 본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없다’가 됩니다. 요한일서 4장 12절은 그것부터 출발을 하는 거예요. 얼마나 정확한 출발점입니까? 정확한 출발점.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을 본 사람도 없는데 왜 하나님을 믿는다고 구라를 떠냐 이 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거짓말이에요. 하나님을 본 사람도 없는데 하나님이 있다 하니까 서로서로 속이기 대화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임금님은 옷을 안 입었어요. 그런데 신하들이 임금님한테 아부한다고 ‘임금님 옷 아주 멋있습니다.’ 할 때 어린아이가 뭐라고 했어요? 임금님 벌거벗었다고 노골적으로 이야기하잖아요. 출발점을 분명히 해야 돼요, 출발점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면 하나님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안 봐도 있다’라고 하는 것은 인간세계에서 통하지 않는 반칙입니다.
왜냐하면 “그럼 네 눈에 사람 보이냐, 안 보이냐?” “보인다.” “없는 하나님은 있다고 이야기하지? 그럼 있는 인간은 없다고 이야기해야 네가 앞뒤가 맞는 거야.” 이렇게 되죠. 그렇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있다면 현재 눈에 보이는 인간은 망상이다, 뭐 이렇게 되어야 균형이 맞잖아요. 일관성이 있고.
그런데 인간들은 뭐냐? ‘하나님도 있다. 인간도 있다.’ 이런 거예요. “하나님이 있는 이유가 뭐냐? 봤나?” “안 봤다.” “인간은 왜 있는데?” “봤다.” 그럼 ‘본 것은 있다’ 이 진리, 이 원칙이 계속 준수되려면 ‘보지 않은 것은 없다’가 되어야 돼요. 그래야 앞뒤가 맞는 거고 그 사람 생각이 일관성 있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계속해봅시다, 이 주제. 이것은 어려움을 능가해요. 12절 말씀은 어렵다 정도가 아니라 그걸 훨씬 능가합니다. ‘본 사람이 없다. 그럼 사람은 있다.’ 계속 나가봅시다. 사람이 있는 이유는 사람을 본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본 사람이 있다 이 말이죠. 그럼 그다음에 나오는 말이, 누가 봤는데? 사람이 있다는 걸 누가 봤는데?
‘보았기에 사람이 있다’를 주장하려면 그다음 질문. ‘누가 봤는데?’ 내가 사람을 보았기 때문에 사람이 있다고 주장할 때 ‘사람을 본 사람은 누구냐?’ 이 질문이 성립돼요. 누가 봤습니까? 내가 봤죠. 내가 보았다. 내가 본 거예요, 내가. 그럼 네가 있는 것을 네가 어떻게 아느냐? 내가 있다는 것을 내가 보았다. 언제, 어디서? 인간은 인간 자신이 있다는 것을 볼 수가 없어요. 볼 수가 없습니다.
거울을 두고 거울에 있는 모습이 네 거라고, 그게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내가 우기고 있는 거예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내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내 모습이라고 우기는 것이다. 제가 방금 우기는 거라 했죠? 정신과학자들은 이걸 ‘상상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정신과학자 빼놓고 모든 사람은 거울에 비친 모습이 내가 있기 때문에 거울에 비친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있으니까 거울에 비치잖아.’ 일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죠.
그런데 정신과학자들은 본다고 해서 다 있는 것이냐고 물어요. “본다고 해서 다 있는 것이냐?” “본다고 하니까 다 있지. 그게 무슨 시비 거리가 되냐?” 이렇게 나오죠. 꿈속에 누구를 봤다면 그 사람은 있어요? 돌아가신 아버지를 꿈속에 봤다면 아버지가 지금 실존해 있습니까? 없죠. 없다 이 말이죠. ‘아, 깨보니 꿈이었다.’ 이렇게 되거든요.
그런데 꿈에서 깨기 전에 꿈속에서 아버지를 보았을 때, 그때 아버지는 꿈속이기 때문에 실제로 있다고 인정하게 되죠. 꿈에서 안 깨어났으니까. 만약 꿈을 10분 동안 꾸었다면 그 10분 안에서의 세계에서 아버지는 살아있고 그 아버지를 본 나는 현재 나이가 60대라도 꿈속에서 나이가 30대로 바뀌어져요. 아버지가 60이 되려면 내가 30살이 되어야 되잖아요.
꿈속에 여러분의 모습은 굉장히 젊어요. 꿈속 모습은 젊은데 꿈속 모습이 젊었다는 것은 꿈속에서 작동하는 내 이미지는 젊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꿈 깨서 거울에 비춰보면 30대 아니에요. 전부다 그 이상이 되는 거예요. 그 이상이 되겠죠. 그걸 정신과에서는 ‘네 속에 상상하는 네가 따로 있다. 그 ‘있다’를 너는 자꾸 있다고 주장한다. 그 ‘있다’의 기초가, 상상한 네 자아를 있다고 하면서 네가 있다고 너는 우기고 있다.’ 이렇게 정신과에서는 주장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방금 이야기한 것에 대해서 우리 인간입장에서는 하등 문제가 없어요. 문제가 없는데 누가 나타나느냐 하면 여기에 예수님이 나타나요. 예수님이 나타나서 나한테 아버지가 있다고 이야기했어요. “나한테는 아버지가 있어요.” 그런데 그걸 보고 다른 사람이 “네 아버지 어디 있는데?” “하늘에 있다.” “너 거짓말하지 마라. 네 아버지 알아. 네 아버지는 목수잖아.” 이렇게 되는 거예요.
지금 말이 틀어지죠. 예수님 말씀하신 것과 예수님을 관찰하고 있는 그 당시 인간들과 지금 의사소통이 전혀 안 되고 있어요. 전혀 되지 않고 있습니다.
자, 그럼 인간들 생각해봅시다. “하나님은 있다.” “안 봤는데 어떻게 있어?” 물으면 “하나님은 내 마음속에 있다.” 이렇게 되죠. 내 마음속에 있다. “누구 마음속에?” “내 마음속에.” “네가 누군데? 네 마음속에 있는 것하고 저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하고 동일할까? 동일하지 않을까?” 이런 문제가 또 성립되는 겁니다.
사람 숫자만큼 하나님이 있어서는 안 되잖아요. 하나이어야 되죠. 이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사람은 여러 개성들이 있고 백 명이면 백 개의 개성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의 개성을 따르지 않습니다. 인간의 개성과 전혀 접촉 없이 단독으로 따로 계십니다.
따로 계시는데, 인간들은 자기 마음속에 하나님이 따로 있어서 남의 하나님과 견주어볼 때 이게 같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죠. 발견하면서 네 하나님은 엉터리고 내 하나님은 옳다고 이야기해버려요. 옳다고 이야기합니다. 너는 너대로 신앙생활 해. 나는 나대로 신앙생활 할 테니까. 내가 믿는 하나님이 옳으니까.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12절,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서로 사랑하면. 서로서로 다른 하나님을 믿는데 그 둘 사이에 사랑이 성립될까요, 안 될까요? 사랑할 리가 없습니다. ‘어, 너 잘났어, 너 잘났어.’ 이러고 헤어지겠죠.
지금 요한일서 4장 12절이 어려운 이유가 사람은 각 개성마다 다 다르고 과거가 다 다르고 자아성이 다른데 어떻게 그들의 생각들이 모아져서 이구동성 한 하나님만 동일하게 고백할 수 있느냐,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4장 12절 이야기는, 사람은 여럿이되 하나님은 하나이기 때문에 여러 명의 사람들이 아무리 하나님을 위해도 그 하나님에 대해 똑같은 고백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개성과 의견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계신 것 맞잖아. 왜? 인간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의견이 다르면 서로 사랑하지 않게 되어 있는데 각자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서로 사랑한다는 말은 동일한 하나님의 인식이 각자에게 동일하게 주어졌다는 이야기가 되거든요.
인간들 입장에서는 이 점을 해명하거나 설명할 길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설명할 길이 없어요. “네 취미가 뭔데?” “나 꽃꽂이.” “내 취미는 권투하기.” “야, 우리 둘이는 서로 마음이 맞아.” 뭐가 마음이 맞아요? 꽃꽂이하고 권투가. 천 명 중에서 아무리 모아보세요, 똑같은 마음이 있는가. 없어요. 똑같은 마음 없다고요.
“너 취미 뭐야?” “나 권투. 너 취미 뭔데?” “권투.” “야, 우리는 서로 사랑할 수 있다. 그런데 고향이 어디야?” “전라도.” “나는 경상도. 이건 안 돼. 헤어지자.” 하나하나 요소, 요인을 있는 대로 다 긁어보는 거예요. 긁어내는 거예요. 맞추기 위해 긁어낸 세월을 사자성어로, 내가 지은 사자성어입니다, ‘부부생활’이라 해요.
결혼하고 난 뒤에 부부생활 40년 동안 계속 공통점 찾기. 마음 맞는 것 찾기. 그런데 찾아보면 맞는 것보다 안 맞는 게 더 많이 미지수로 남아있어요. 도대체 언제 정복할지. 언제 안 맞는 걸 다 맞추나. 한 200년 살면 맞춰져요? 200년 살아도 안 맞춰져요.
출발점이 다르기 때문에. 아무리 억지를 부려서 양보, 양보해서 맞춰봤자 출발점이 다른 이상 맞을 리가 없습니다. 맞을 리가 없으니까 부부사이에는 항상 틈이 벌어져 있어요. 이걸 이 광조씨는 이렇게 이야기했죠. 가까이 하기엔 너무나 먼 당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통해서 이걸 보여줬습니다. 베드로가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지만 막상 예수님이 체포되는 그날 밤에 베드로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에 대해서 그 어떤 인간도 예수님과 마음 맞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던 겁니다. 증명하고 싶었던 거예요.
이걸 왜 증명하느냐? 이것이 증명되어야 ‘너희들 속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일체 없다.’가 증명되기 때문에. 아무도 하나님을 사랑한 적 없어요. 그래서 요한일서 4장 12절에서는 ‘어느 때에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따라서 아무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아무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에 너희들끼리도 하나님의 사랑이 없느니라.’라는 이 상황을 전제로 깔고 12절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어떻게 서로 사랑하게 되었느냐?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룬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능력으로 12절을 달성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이게 없다는 이야기에요.
사람들은 저한테 묻지요. ‘어떻게 하면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까?’ 이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어요. 잘못된 질문을 한번 적어볼게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예수님)을 믿습니까? 보통 질문을 이렇게 하잖아요. 그런데 이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에요. ‘무엇이 예수님을 안 믿는 겁니까?’ 이 질문을 해야 돼요, 이 질문을. 인간이 낼 수 있는 질문으로 이 질문을 해야 돼요. 자기의 본질에서 나온 질문이 딱 그 질문이기 때문에.
인간은 아무도 안 믿어요. ‘안 믿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질문을 해야 돼요. 다시 할게요. ‘안 믿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질문과 동일한 질문이 ‘내가 누구입니까?’ 내가 누구입니까? 이 질문은 유효한 질문이에요.
왜냐하면 내가 누구냐를 아까 초반부터 계속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은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을 거울보고 파악하죠. 그럼 이미 자기는 자기를 안다 하잖아요. 자기를 안다고 하는 거예요. 자기가 아는 것은 어디에 갇혀서 아는 겁니까? 내 안에서 나를 알아요. 내 안에서는. 내 안에서 나를 안다고요.
그런데 ‘내가 누굽니까?’ 하고 자기 안에 갇혀있지 않고 자기 바깥에 있는 외부인에게 묻는다는 자체가, 내가 내 안에 있을 때는 어떤 새로운 의미가 나올 리도 없고 나올 수도 없다는 거예요. 나는 나다, 이게 뭐에요? 같은 말의 반복이죠. 사람이 ‘내가 누굽니까?’를 누구한테 묻는다는 것은 이미 뭔가 외부에서 나를 해체시켜서 내 안에 갇혀있는 나를 빼낼 때나 이 질문이 성립되는 거예요.
이 질문을 한 사람이 또 베드로에요. 그러니 성경에서 제자들의 역할, 기능이 다 있다고요. 베드로가 고기 잡을 때 이상하게 그날따라 고기가 안 잡혔어요. 그런데 여기에 예수님이 오셔서 불쑥, 전문가도 아닌 분이 훈수를 해요. 배 오른 편에 던져라. 베드로 생각이 어떻겠어요? ‘뭐지? 당신 뭐야? 당신이 고기 전문가야?’ 전문가는 나죠. 자기 자신이죠.
그런데 ‘도저히 당신 말이 믿기지는 않지만 당신의 말에 의지해서 한번 해볼게. 배 오른편에 한번 던져볼게요. 밤새도록 했으나 안 잡혔는데 뭐 이판사판 버린 거 당신 말대로 한번 해볼게.’ 라고 했을 때 이미 그때 베드로는 뭐로부터 잠시 벗어났습니까? 자기 자신에게 갇혀서 ‘나는 나를 안다. 내 이야기하지 마. 난 나를 너무 잘 알아.’하는 것에서 빠져나왔죠.
빠져나와서 예수님의 명령과 지시와 말씀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오른편에 던졌더니만 어떻게 됐습니까? 고기가 잡혔죠. 고기가 잡혔습니다. 그때 베드로 하는 말이 ‘오? 당신 용하네. 고기 얼추 잡혔네. 뭐 어쩌다가 한번 해본 소리겠죠. 훈수 괜찮네.’ 이렇게 했습니까? 베드로가 무슨 말을 했습니까?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보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 했죠. 어디서부터 어디로 낚느냐? 내가 안다는 나로부터 내가 모르는 나로 끄집어내질 때 그게 바로 구원입니다. 그게 구원의 개시가 된 거죠. 나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도통 엉터리다.
이렇게 이야기해도 사람들은, 나는 예수님한테 물을 생각 없다. 나는 내가 아는 나로 평생 고집할거야. 끌고 갈 거야. 전혀 교회도 안 다니고 종교도 없이 살아가는 나이 70넘은 남자들에게 이런 특징이 있어요. ‘평생 나는 나의 최선을 다했다. 최선을 다했던 그런 나를 내가 끝까지 지키고 싶다. My way, 내 방식대로 살았다.’ 이게 불신가정이나 불교가정도 마찬가지고 이런 게 있어요. 소위 꼰대라 하죠. 꼰대. 당연히 누구 말도 안 듣죠.
자식들 보고 “너희들 나한테 훈수할 생각하지 마. 너희 어릴 때 내가 다 키웠어. 내가 고생해서 다 키웠어. 어디서 이게 좀 자립했다고 나한테 훈수질이야? 한번 아버지는 영원한 아버지야. 내 앞가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해. 한번 자식은 영원한 자식이니까. 나 아쉬울 때 나 필요할 때 용돈이나 많이 줘. 자주 전화하고. 내가 너를 위해 그렇게 고생했는데 그 정도 얻어먹어도 나한테 그럴 권한이 있다. 나는 나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한다. 끝!”
그럼 또 옆에서 평생 동안 순해빠진 자기 부인은 이러죠. “아이고, 여보. 자식들 오랜만에 왔는데 그런 소리 하지 말고… 좋게좋게 부드럽게 이야기해. 아휴, 저 양반 평생을 저런다니까.” 그럼 남편이 또 뭐라고 합니까? “시끄럽다! 어디 남편이 이야기하는데 아낙네가 끼어들고. 요새 세상 엉망이야. 세상이 다 버려놨어. 우리 옛날 어른들이 말할 때는 끽소리도 못했어. 요새는 남편이 이야기하는데 중간에 끼어들고 잘라먹고. 세상 완전히 말세야, 말세. 시끄럽다.” 그럼 자식이 있다가 “아버지, 그래도 엄마가 그만큼 고생했는데 그러는 게 아니죠.” “니도 조용히 해라! 부부 일에 끼어드는 거 아니다. 아이고, 안되겠다, 이제.” 문 탁 닫고, “술 한잔 먹고 자야겠다.” 그렇게 하죠.
자기로부터 자기가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내가 누굽니까?’를 물어본 적이 없어요. 늘 본인한테 물었기 때문에. 죽어도 이 고집 붙들고 죽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그걸 인생 성공이라고 착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믿으세요.”하면 “봤냐? 보지도 않은 걸 나한테 왜 들이대?” 그게 요한일서 4장 12절이잖아요.
그러니까 요한일서 4장 12절 이 말씀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각자 개성이 있는데 서로 사랑한다? 인간은 서로 사랑 못해요. 각자 고집들이 있어서 사랑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약간 양보는 하지만 양보는 사랑이 아니에요.
자, 그러면 요한일서 4장에서는 이 문제를 어떤 식으로 해결하는가? 예수님은 아버지가 유일하게 계시죠. 아버지를 보았고. 요단강에서 성령이 내려왔잖아요. 봤잖아요. 아버지와 함께 일하고 함께 움직이잖아요. 이 사실에 대해서 어떤 인간이 예수님 주변을 아무리 살펴봐도 그 근처에 하나님이 안 보여요.
그러니 예수님이 뭐라고 하면 ‘자기 혼자 자기 착각과 망상 속에 하는 이야기다.’ 주변 사람들이 봐도 그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분석하고 연구하고 탐색해도 예수님 뒤편에 아버지가 없어요. 그런데 계속해서 예수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겟세마네에서는 “아버지여,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이런 이야기를 했단 말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건 가짜 메시아다’라는 결론을 내렸어요.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어디까지 몰아넣느냐 하면 여기까지 몰아넣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아버지와 예수님 자신의 관계가 사랑의 관계라고 분명히 이야기했죠. 아버지가 나를 사랑한다. 세례 받을 때도 그랬고. 그런데 이 사랑을 죽음으로 데려갑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잘 죽었다. 말썽꾸러기 잘 죽었다.’ 했단 말이죠.
그런데 그 죽은 예수님을 사흘 만에 부활시켰어요. 누가? 아버지께서. 성령을 보내서. 아버지께서 성령을 보내서 죽은 예수님을 살렸습니다. 만약에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성령을 보내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부활될 수가 없었습니다. 죽은 예수님 플러스 추가되는 요소가 있을 때, 비로소 평소에 예수님이 아버지와 나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라는 말이 그 추가되는 요소에 의해서 증명이 되고 확인이 되어버렸죠.
추가되는 요소가 바로 성령입니다. 예수님께 주어진 아버지의 영. 13절 봅시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이렇게 되어 있죠.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그러니까 이 대목을 설명하면서 성령이 없다 치고 예수님이 없다고 쳤을 때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각자가 상상한 거짓된 하나님이라는 것이 확인될 수 있겠죠. 예수님이 이 땅에 온 적 없고 성령이 아예 오시지 않았다면 인간은 본인만의 하나님이에요, 본인만의 하나님.
본인만의 하나님일 때 타인과의 사랑의 관계는 성립이 안 되죠. 지금 사도 요한이 그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본인 혼자 ‘나 하나님 사랑합니다.’라고 했을 때 요한일서 3장 16절 다시 봅시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말로만 하지 말고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지 아니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이 개입한 사랑이 아니다, 이런 결론에 도달하죠. 16절에, 우리가 사랑을 안다면 형제를 위해서 우리의 목숨을 기꺼이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 기꺼이 목숨 버린다는 것은, 목숨 버리는 그게 뭐가 이상해? 당연한 거지.
형제를 위해서 목숨 버리면 다른 사람들이 말리죠. “야, 형제를 위해서 목숨 바치는 것이 착한 일인 줄은 아는데 그럼 네 목숨은 어떻게 돼? 네 목숨은 안 아까워?” “내 목숨이 뭐가 아까워? 내 목숨보다 사랑이 우선이지.” 그렇게 오히려 반문한다니까요. “그래? 네 목숨이 왜 안 아까운데?” “나는 이미 죽었어.” 내가 죽었다는 말은요, 내가 여기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사랑이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좀더 구체적으로 하면 사랑이란 내가 아무것도 못하게 된 형편이라는 것. 이게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사랑 안에서 나는 죽었기 때문에. 죽은 자에게 뭘 요구해요? 사랑은 나의 죽음을 요구합니다. ‘사랑은 나의 죽음을 요구한다.’ 이유가 뭐냐? 그게 바로 순수기 때문에. 순수 또는 순수한 거룩이기 때문에.
그동안 하나님의 거룩을 누가 훼방하고 누가 방해하고 누가 호작질하고 있었습니까? 내가 살아있다는 그게 원인이 되어서 ‘하나님 살아계시죠? 저도 살아있어요. 내가 하나님께 마음껏 영광돌리겠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었던 거예요.
이게 순수입니다. 하나님은 순수를 준비했고, 그 순수가 그동안 인간들에 의해서 훼방되었고 더럽혀졌거든요. 그럼 이 순수를 순수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천국의 백성 되기 위해서는 이 순수가 인간을 죽이는 겁니다. 죽이는 힘이 무슨 힘이냐 하면 바로 사랑의 힘이에요. 죽이는 힘이 사랑의 힘입니다.
내 존재를 능가하는 존재, 나의 존재를 능가하는 존재가 나로 하여금 나를 죽일 때 그때 하나님의 사랑이 왔다는 증거가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나 같은 질 더러운 인간하고 상대하면 주님의 순수가 더럽혀집니다. 나 같은 거 상대해서 더러워지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나 같은 죄인에게서 떠나는 것이 주께 합당합니다.” 이런 고백입니다.
주님보고 나를 떠나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주님을 실제로 만났다는 이야기에요. 실제로 만났다는 이야기. 내가 상상한 멋진 주님이 아니고 실제로 주님과 만났을 때 나는 주님과 상종할 가치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그 말은 주님보시기에 내가 어떻게 하든 주님의 순수 앞에서 더럽지 않은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거예요. 내가 뭐 찬물을 대접하고 무슨 찬양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순수를 더럽히는 짓이 되는 거예요.
순수가 순수답게 되는 것은 주님께서 나를 목 졸라 죽이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죽어, 죽어, 인간아!”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주님 손에 죽어가는 것, 이게 구원이잖아요. 내 손으로 나를 죽이는 자살 말고 주님 손에 의해 죽어가는 것, 이게 가룟 유다와의 차이점이죠. 가룟 유다는 자기가 자기를 죽였지만, 나머지 제자들은 주님의 성령이 그들을 죽였죠. 성령을 통해서 죽인 거예요.
사울을 죽인 분은 바로 성령이에요. 부활한 주님이 사울을 죽이고 바울 되게 했잖아요. 야곱을 죽인 분은 바로 이스라엘 되시는 주님이 얍복강에서 야곱을 죽였습니다. 아브람을 죽인 분은 아브라함으로 오신 예수님이 아브람을 죽였죠. 너의 이름을 묵사발내고 그 위에 덮쳐지는 그분이 바로 예수님 자신의 이름이 돼요. 그 사람에 해당되는 자신의 이름이죠.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각자 각자가 그동안 자기가 쌓아온 개성과 고집과 완고함과 나름대로의 주특기, 이런 것들이 다 있었는데 주님이 와서 그걸 다 죽음으로 없애버렸으니까 오히려 그걸 없앰을 통해서 그동안 내 것이라고 있던 그것이 다 말살당하는 거예요. 말살시킨 그 힘은 어떤 힘이냐? 순수한 힘, 순수한 사랑의 힘이 그 사람에게 덮쳤을 때 이 힘을 받은 사람들끼리는 형제가 되고요. 그 형제끼리 주님의 순수한 힘만 작용하는 그걸 사랑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야기 듣고 난 뒤에 여러분들은 대번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어요. ‘목사님, 그 사랑을 어떻게 합니까? 그 순수한 사랑을 어떻게 합니까?’ 이런 생각이 들 수가 있어요. 어디서 죽은 자 흉내를 내려고…. 죽었다는데 뭘. 다시 한번 할게요. 요새 문방구가면 손가락 모양 지휘봉 있는데 살까 하다가 참았어요. 너무 오지랖 떤다 싶어서.
사랑이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예요! 사람은 뭘 하게 되면 티를 내게 되어 있다니까요. 생색내게 되어 있어요. 생색내게 되어 있다고요. 사랑이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이유가 뭐냐? 겸손하기 때문에? 아니! 내가 아무것도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그래요. 그 나라 의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도 하면 되잖아요, 하는데 하면 순수가 더럽혀지죠. 순수가! 주님께서는 이 순수에 반대되는 것을 택하셔서 순수를 더욱 더 순수답게 빛내는 작업을 하시는 겁니다. 양 인자라는 작사가가 있는데 그 사람의 노래 가운데 이런 게 있어요.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그 겨울의 찻집’에 나오는 가사에요.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그다음 가사에 또 이런 게 있어요. ‘아름다운 죄 사랑 때문에’ 사랑이 죄라는 거예요. 아름다운 죄 사랑 때문에.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전부다 이건 반어법이잖아요, 반어법. 이게 중첩되어 있는 거예요. 성도한테만 이게 중첩되어 있어요. 성도에게만 일어나는 기이한 현상이에요.
살아있어도 죽어있는 거예요. 살아있어도 죽어있는데 그 죽은 것 때문에 내가 사는 게 아니고 내 몸을 통해서 주님의 살아있음이 펄펄 나타나는 표적, 현상, 징후 같은 것이 성도를 통해서 나타나는 거예요. 성도를 통해서. 이런 이야기하면 또 이런 생각해요. ‘목사님, 그걸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우리는 못해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못한다니까요.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못하면 그냥 말씀뿐이잖아요. 그래, 그게 제 말 아닙니까. 말씀만 나타나면 돼요. ‘말씀이 이렇다’만 이야기하면 되지, 나 이 말씀대로 실천하려고 꽤나 애쓰고 있다. 자기가 왜 거기에 끼어들어서 합니까? 이미 죽은 존재인데요.
사랑이란 더는 할 게 남아있지 않는 게 바로 사랑. 그걸 누리는 게 사랑이에요. 사랑이란 더 할 게 남아있지 않은 것. 더 할 게 남아있지 않다는 말은 사랑이 오는 순간 시간은 종결되었다는 거예요. 시간은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남아있지 않다는 말은, 더 이상 성도에겐 미래가 의미 없다.
그래서 성도는 미래가 아니라 원천, 원리, 과거 처음에 하나님이 수립한 그 원리 원칙을 반복하게 되어 있죠. 창세 전에 너를 택했다는 그 택함의 의미를 살아가면서 계속 그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더 아는 거예요. 에베소서 3장에 나오죠. 사도 바울이 기도하는 내용은 딱 하나였어요.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그 흐름 전체를 더욱 더 깊이 있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알고 있는 저 성도님들은 오직 날이 가면 갈수록 사랑의 깊이가 더 깊어지게 하옵소서.’ 이것은 본인이 어디로 움직여서 가는 게 아니고, 놓여있는 그 공간의 풍성함을 더욱 더 많이 만끽하게 해달라는 겁니다.
요한일서 4장 12절이 어려운 이유는요,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한다는 이 말씀을 딱 하게 되면 그때부터 우리는 이것을 숙제처럼 생각해서 5년 전에는 사랑을 안했는데 5년 후에는 사랑을 하고 10년 후에는 사랑을 더 할 거라는 식으로 자기 숙제를 따로 적립하려는 그런 경향들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면 이 말씀을 지금 제대로 이해 못하고 있는 겁니다. 할 게 없다는데 계속 뭘 하려고 하는 거예요. 우리의 존재 자체가 주님의 순수를 방해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의 순수를. 14절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
이것도 마찬가지에요.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냈다는 것을 이 세상 어느 인간도 자기 능력으로 이걸 받아들일 인간은 없습니다. 그냥 ‘예수님은 일반 사람 중에 왔다가 무슨 해프닝이 있어서 사형 당했다, 끝.’ 이것이 인간들 생각의 기본이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구주로 보냈다는 이것은 누구 의견이냐 하면 예수님 본인 의견이에요. 아무도 동의하지 않는 예수님 본인만의 주장이거든요.
본인만의 주장이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의 주장이 이제는 어디로 확산되었어요? 우리로 확산되었죠. 확산되게 된다는 말은 예수님이 죽음을 향하여 가면서 아버지의 사랑을 더욱 깊이 있게 아는 코스대로 우리는 이미 죽었고 그리고 우리의 육신도 아무짝도 소용없는 육신이었다는 것을 날마다 일깨우면서 죽어가고 있는 그 자체가 주님의 사랑의 능력이라는 겁니다.
보통 인간 대 인간의 사랑은 받은 만큼 남에게 돌려주고 보답을 하는 경향이 있어요. 인간과 인간의 사랑은. 미안해서 또는 고마워서. 이사 왔다고 떡 돌리면 나중에 수박 한 통 사서 수박으로 돌려주죠. 지난번에 떡 잘 먹었습니다. 쟁반 왔는데 빈 쟁반 돌려보내면 안 되죠. 쟁반에 수박 얹어서 돌려주고 하는 이게 인지상정 인간의 주고받는 정이잖아요.
그런데 사랑은 사랑하는 분에게 아무것도 할 게 없어요. 아무것도 안하는 게 사랑입니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이 해내지 못하는 것을 주님만이 해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그다음에 뭡니까? “사랑한 것이 아니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게 아니죠.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디는 가고 싶어요? 천국은 가고 싶고. 이거는 말도 안 되는 욕심이죠. 주님은 사랑하지 않으면서 천국을 가겠다는 것은 주님이고 뭐고 나는 내 사랑을 그냥 밀어붙이겠다는 억지고 고집이죠.
자, 이제 우리가 해야 될 것은 주님께서 이 사랑을 우리에게 심어주기 위해서 먼저 전제적으로 깔아놓는 배경 같은 게 있어요. 아까 인간은 살아있으면서 각자 개성을 고집한다 했죠. 자기 안에 갇혀 있다고 했죠? 자기가 믿는 하나님만 하나님이고 자기와 다르면 그건 이단이라고 우기죠. 이것을 완전히 깔아뭉개버리는 방법, 그 작업을 하나님께서는 구약 내내 했습니다. 신약 오기 전에 구약 내내 했습니다. 그게 뭐냐? 율법 앞에서는 남녀노소 구분이 없어요.
법 앞에서는 남녀노소 구분이 없습니다. 여호와를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갓난아이라 할지라도 가차 없이 그냥 절멸당해요. 멸절당해야 돼요. 마치 해충 잡듯이 해로운 벌레 잡듯이 성경 용어대로 하면 진멸해버리는 겁니다. 심지어 갓난아이, 응애~하고 태어난 그 아이라도 사정없이 죽여라. 그런 갓난아기 죽여서 주께서 얻고자 하는 것이 뭡니까? 율법의 엄중함이죠. 율법의 무서움이죠.
모든 살아있는 것은 율법 앞에서 죽었다, 이 사실이죠.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율법 앞에서 다 죽은 것이다.’ 하나님의 대원칙. 이걸 달리 표현하면 모든 눈에 보이는 것은 율법 앞에서는 없는 것이다. 모든 있음은 율법을 통해서 없음이 되어버리죠. 모든 있는 것들은 율법 앞에서 죽음이 되죠. 살아있는 것은 죽음이 되고 있는 것은 없음이 되고.
그게 율법이고 그 율법은 하나님의 대원칙이기 때문에 이걸 모세언약이라 합니다. 모세언약. 갓난아이든 누구든 간에 여자든 남자든 노인이든 관계없이 누구든지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면 저주를 받습니다. 십계명에 나오는 이야기죠. 왜 죽은 존재가 자꾸 살았다고 우기느냐 이 말이에요. 왜 없어지는 존재가 영원토록 있을 거라고 그렇게 고집을 부리느냐 이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12절, 13절, 14절, 15절, 16절까지 하는데 이 말씀이 어떤 게 어려우냐 하면 ‘인간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율법 앞으로 끌어당겨서 해석할 수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손잡이 달린 냄비가 있다면 이 냄비 속에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세상 모든 일 있잖아요, 그것을 이 냄비 속에 다 담습니다. 냄비에 다 담아서 하나님의 진노의 불로 밑에서 끓여버리면 여기서 다 죽음의 찌꺼기가 되죠. 이것을 하나님께서 원하고 계십니다. 이 일이 일어나는 장소가 번제단이죠. 제단이죠, 제단.
요한일서에서 사랑, 사랑하니까 인간 대 인간의 감정문제, 그냥 정서적인 문제처럼 그렇게 이해되죠. 여기에 구약에 있는 모든 율법, 제사법, 특히 제사법의 완성이 언약궤잖아요, 언약궤의 취지를 다 통합해서 지금 사랑이라는 열매를 위하여 사랑이라는 순수를 위하여 그동안 구약에서 율법을 줘왔다는 겁니다. 그걸 전제로 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한 냄비에 다 담는 거예요. 대통령 이번에 누가 됐고 트럼프가 관세를 50% 때리고 하는 그걸, 이건 종교와 상관없는 일이구나 하지 말고 다 끌어 모으는 거예요. 다 끌어 모아요. LG가 삼성을 8대 1로 이기고 이런 거 있잖아요, 프로야구. 다 가져와요. 내 아들이 드디어 삼성에 취직하고, 다 가져와. 이번에 손자가 수학 백점 맞아왔다, 그것도 가져와. 다 들고 와서 율법 앞에서 이것을 전부다 해석해보라고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해석해봐. 이 모든 일이 어떻게 모든 인간을 죽이는 것으로 해석 가능하냐? 하나님께서 이런 것을 다 죽임으로써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이 기쁨이 하나님의 준비된 사랑으로, 그 사랑에 준해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멸절하는 것을 그렇게 기뻐하시는 겁니다.
약간 더하고 첫째 시간 마치겠어요. 이 작업을 할 때 이 작업을 어떤 식으로 하느냐? 냄비에 집어넣는 방법을 어떻게 하는 것인가? 율법과 관련해서 이렇게 되는 겁니다. 구약 율법과 관련해서 내부권력과 외부권력으로 나누면 되겠죠. 외부권력은 이방민족의 힘이죠. 율법은 구약이니까. 내부권력은 뭐냐? 이스라엘 내부에서 올라오는 우상적 발상, 이게 내부권력이 되겠죠.
율법이 주어지게 되면 이 내부권력, 외부권력을 다 끄집어내게 돼요. 율법이 주어지면. 율법이라 하는 것은 모세 당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에게는 뭐가 있습니까? 이 말씀이 있죠.
이 말씀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아까 베드로가 뭐라고 했어요?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할 때 베드로 안에 뭐가 있었다는 것이 발각되었습니까? ‘내 안에 내 것, 나의 옳음과 나의 정당함을 그동안 아주 악착같이 지키려는, 나의 잘남을 지키려는, 난 고기 잡는 도사라는 그걸 지키려는 그것이 주님의 오심으로 난 들통 났습니다.’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율법은 내외적으로 전부다 밝히는 거예요. 외부권력은 뭐냐 하면 ‘나는 착한데 저 외부 쪽이 나를 공격하면 난 그동안 살아온 모든 것이 다 무너질 거고 무너지게 되면 나 어떻게 살지?’라는 거예요. 내 주변에 있는 외부환경이 나한테 해악을 끼치고 나 살기 힘들게 할까봐 겁을 내는 그 요소가 바로 외부권력이죠.
이스라엘에게는 뭐가 있었습니까? 외부권력도 있었고 ‘나 하나님보다 우상이 더 좋아.’하는 내부권력도 있었죠. ‘나의 의를 인정해주는 하나님이 나는 마음에 들어.’ 이거하고요. 외부권력은 여러분들 아시다시피 전혀 하나님을 모르는, ‘여호와’라 하면 ‘무슨 소리하는 거야? 난 모르겠고. 나는 너희들 침략할 거야. 너희들 농사지은 모든 걸 다 강탈할 거야.’라고 말도 통하지 않는데 일방적으로 쳐들어오는 거죠. 이게 구약 사사기에서 되풀이되었습니다. 사사기에서 이스라엘 괴롭히는 나라들이 어떤 나라였어요? 다 외부권력이었죠.
그럼 사사시대 지나면 뭐가 나오죠? 룻기 나오죠. 룻기 지나면 뭐가 나옵니까? 사무엘 상,하 나오죠. 열왕기 상,하 나오죠. 그때 이스라엘은 외부가 문제였습니까, 내부가 문제였어요? 내부가 문제였어요. 내부가 문제였죠, 내부가. 사무엘 선지자 시대 때 아까 안양강의에서도 했지만 내부가 문제였잖아요. 내외적으로 다 문제에요, 이게. 다 문제란 말이죠.
구약이 괜히 있는 게 아니거든요. 말씀을 대하게 되면 우리로 하여금 요한일서 4장 12절, 13절 이 말씀이 살아서 우리의 까발릴 것을 다 까발리는 거예요. 우리가 무엇 때문에 하루하루를 불안에 몸서리치며 살아가는지. 외부권력이죠. 그리고 외부에서 나를 터치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이렇게 사는 게 불만스러운지. 내부에 감사와 사랑이 나는 왜 없는지. 이것이 말씀을 통해서 전부다 나타날 거예요. 그 작업은 10분 뒤에 하겠습니다.
서울강의20250710b 요한일서 4장 12절(할 게 없음)-이 근호 목사
구약성경의 존재에 대해서 첫째 시간 마지막에 이야기했죠. 구약 앞에서 소위 추잡하고 더럽다는 것은 율법을 통해서 다 들추어내는 작업을 합니다. 그런데 그 추잡하고 더럽다는 것은 일부러 더럽게 살려고 한 것이 아니고 권세라는 말했잖아요. 내부권세, 외부권세. 어쩔 수 없어요.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가. 내 인생을 내가 만들어가는 게 아니고 내 인생을 내가 살아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만들어요.
율법은 우리한테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고 너도 네가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네가 인식하라 이 말이죠. 이 죄의 권세에서 우리가 풀려나올 수 없는 형편에 있다는 것을 네가 인식하라고 율법을 준 거예요. 그게 바로 이방민족과 이스라엘의 차이점이잖아요. 이방민족은 율법이 없기 때문에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늘 터지잖아요. 얻어맞는다고요. 똑같은 인간이지만 한쪽은 얻어맞기 때문에 때리는데 무엇으로 때리고 왜 때리냐를 알게 만드는 겁니다.
약속의 땅에 이렇게 하면 들어간다,가 아니라 왜 못 들어가느냐를 보여줘요, 약속의 땅에.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의 땅 들어간다고 플랭카드 걸어놓고 주께서는 못 들어가는 쪽으로 계속 유도합니다. 율법과 더불어서. 특히 광야에서 모세와 동행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면 갈수록 더욱 더 지옥 같아요, 사는 게. 그럼 가면 갈수록 무슨 생각 드느냐 하면, 이럴 것 같으면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는 게 낫다는 생각이 계속 치밀어 오르게 만들어요.
그들은 지금 하나님 문제가 아니고 율법 문제에는 관심도 없고 본인이 죽겠다는 거예요. 본인이. 하나님이고 뭐고 간에 나는 하나님하고 상대하기 싫고 모세 당신을 더 이상 지도자로 인정 못하겠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지도자를 뽑아서 인간이 해결할 수 있는 그러한 방식으로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 애굽으로 돌아가자.
그런 고백이 나올 수 있도록, 광야라는 죽음의 환경 속에서 일부러 그 고백이 나오도록 유도해내는 겁니다. 순수한 죄가 나올 수 있도록 유도하신 거예요. 성도에게만 특별히 주어지는 하나님의 특별 세팅이에요, 특별 세팅. 이방인들, 지옥 가는 사람한테는 이런 특별한 세팅, 무대장치를 안 해줘요. 성도이기 때문에 특별한 무대장치를 만들었습니다.
이 무대장치는 예수님이라고 예외가 안돼요. 예수님도 광야 40일 동안 금식하면서 광야에서 시험받았습니다. 일종의 정육면체 공간, 위도 아래도 옆도 사각형인 공간에 예수님을 가둔 거예요. 일종의 용광로 속에 고문실에 일부러 예수님을 가둬뒀는데 누가 그렇게 하느냐? 성령님이 그렇게 했어요. 성령님이 예수님을 광야 40일 동안 금식하게 하고 광야에 가두어놨습니다.
광야에 왜 가두어두는가? 고문하는 이를 만나기 위해서. 누가 고문하느냐? 악마가 나타나서 고문을 했죠. 악마, 사탄이 예수님을 고문했습니다. 그런데 그 고문 내용을 보게 되면 ‘죽여라, 죽인다.’가 아니에요. 그 고문내용은 이겁니다. ‘살려줄게, 이 양반아.’ 이거에요.
살려줄게, 이 양반아! 왜, 왜 금식하느냐? 왜 금식하느냐? 금식하니까 굶어죽게 되었잖아요, 예수님께서. “내가 있잖아. 여기 착한 우리가 있잖아. 살려줄게. 돈? 돈 줄게. 떡? 떡 줄게. 인기? 인기 줄게. 뭘 더 원해? 같이 살아, 같이 살자. 살기 위한 이 공간에서 살아야지, 왜 자꾸 죽을 생각만 하느냐?” 이게 사탄의 음성이었어요. 뱀의 음성이었다고요.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말을 왜 안 듣죠? 이 질문 자체가 중요한 질문이에요. ‘예수님은 사탄을 어떻게 물리쳤습니까?’ 지금 그 질문을 하는 게 아니고, 왜 예수님께서는 사탄에 대해서 반항합니까? 곱게 순응하지 않고. 살면 되는데. 살아서 메시아 활동하면 되는데 왜 그렇게 합니까?
인간은 어디에 갇혀 있는가? 그리고 갇혀 있는 공간에서 인간은 왜 못 빠져나오는가? 외부적으로 이미 사탄과 한 통속이기 때문에 그걸 드러내기 위해서. 그게 바로 죄였습니다. 죄의 순수성. 예수님을 통해서 죄의 순수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죄가 너무 순수하기 때문에 인간은 아무리 착한 일을 많이 해도 그 순수한 죄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어떠한 공로가 되지 못하는 형편에 놓여있습니다. 그것이 이 광야, 오늘날 이 세상입니다.
이 세상이 광야라는 것은 신자에게만 통하고 불신자한테는 이게 통할 리가 없습니다. 할 수만 있거든 자기가 출세하고 성공하는 것이 삶의 유일한 목표가 되는 이들은 그냥 교회 가서 기도하죠. 응답 누가 해주겠습니까? 사탄이 응답을 해주는 거예요. 사탄이 “성경 더 보고 기도 더 열심히 하고 헌금 더 하고 봉사하면 네 소원대로 될지어다. 믿씁니까?” 쌍시옷 들어가면서. “아멘 할렐루야.” 오케이. 아무 문제없어요. 아무 문제없는 거예요.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했단 말이죠. 심지어 사탄은 인간의 마지막 남아있는 불안요소, 다시 말해서 인간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인간의 죽음문제까지 사탄 쪽에서 이미 인간에게 그 해결책을 다 제공하고 있습니다. 하여튼 사탄은 완벽해요. 사탄이 순수하고 완벽한 죄기 때문에 인간이 어떠한 신학 공부를 하고 어떠한 노력을 해도 그 순수한 죄의 권세에서 빠져나올 길이 없습니다.
인간이 죽고 난 뒤에 어떻게 되는가 불안해하겠죠. 거기에 대한 사탄의 준비된 답변은 아주 간단합니다. ‘죽기 직전까지 불안하지, 죽으면 안 불안하다.’ 이겁니다. 죽기 직전까지 불안하지, 죽게 되면 죽은 게 뭐 걱정이 돼? 그러니까 괜히 쫄지 말라는 겁니다.
옛날부터 서양철학에서 나오는 이론이에요. 에피쿠로스 학파가 그 주장한 거예요. ‘죽기 전에는 아직 죽지 않아서 걱정할 필요 없다. 죽고 난 뒤에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 없다. 고로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 이야기. 이걸 불교에서도 그대로 인용하는 겁니다. 불교가 사탄의 종교니까.
그러면 ‘죽을 때 왜 불안하냐?’라고 하지 말고, ‘죽을 때 아쉽고 아까운 것이 있다.’ 이렇게 질문을 해야 맞다는 거예요, 사탄 쪽에서. 그동안 이렇게 공들이고 애썼는데 인간이 죽는 것이 너무 허무하다. 허망하다. 그것 때문에 자기 의에 스크래치 났죠. 죽을 때 뭔가 대단하게 죽으면 좀 보상이 되는데 자기가 이렇게 잘났는데 죽을 때 만약에 아무도 안 찾아오고 이러면 좀 섭섭한 기운.
거기에 대해서 또 사탄이 준비한 게 있어요. 멋진 장례식을 준비했어요, 멋진 장례식. 고인이 되면 멋진 장례식을 모르죠. 그래서 사탄이 준비한 것은 당신이 죽기 전에 멋진 장례식을 그려보는 것조차 위로가 되고 마음에 평안이 온다는 거예요. 나 죽거들랑 이렇게 해라, 멋진 장례식.
멋진 장례식에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요. 수목장도 있어요. 보람상조 아무나 오는 게 아니죠. 수목장도 있고 바다장도 있어요. 요새 무슨 장이 있느냐 하면 하늘장이 있어요, 하늘장. 하늘장은 나 죽고 난 뒤에 뼈를 헬륨 풍선에 달아서 공중 몇 미터 올라갔을 때 공중에서 뿌려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하늘장이 되는 거예요. 그것보다 더 재밌는 것은 드라이브 스루(drive-thru)장. 드라이브 스루장은 뭐냐 하면 내가 죽고 난 뒤에 친구들이 안 오면 안 되잖아요. 덥다고 나이 들었다고 안 오면 안 되잖아요. 오는데 편리할 수 있도록 수부(受付), 돈 받는 사람과 상주(喪主)가 창문에 앉아있으면 하객들이 차타고 와서 돈 내고 인사하고 그냥 집에 가면 돼요. 드라이브-스루 장. 일본에서 하고 있습니다.
죽을 때 외로움을 피하기 위해서 일본에서 만든 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가 묘지친구에요. 죽기 전에 묘지친구 계 모아서 다 같이 묘지 알아보고 돌아보면서 죽을 때를 대비하는 친구. 사자성어로 묘지친구. 또 이런 게 있어요. 관광버스 장례식이 있어요. 관광버스타고 그 후손들이 평소에 아버지가 좋아했던 장면을 추억하는 거예요. 아버지가 야구를 좋아했다면 관광버스에 아버지 유골 싣고 야구장 한 바퀴 돌고 나오는 거예요. 골프 좋아했다면 골프장 한 바퀴 돌고. 이것들의 원칙은 뭐냐 하면 ‘죽고 난 뒤에는 아무 고통이 없는데 죽기 전이 문제니까 여기에 돈 좀 쓰세요.’라는 뜻이에요.
자, 방금 이야기한 이러한 악마 속의 문제점은 이겁니다. 악마가 자신만만한 게 있어요. ‘인간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건 악마가 인간에 대해서 아주 장담하고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밥이었고 죽을 때까지 밥이다. 인간은 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악마는 자신만만하게 선악과 따먹으라 할 때 자신의 모든 걸 걸고 게임에 나섰어요. 무슨 게임이냐? 인간은 이미 내 밥이다.
하나님이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했던 그것에 죽음을 빼고 뭘 집어넣습니까?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을 인간에게 삽입시키면 그 삽입된 지식은 인간의 힘으로 벗겨낼 수 없다는 거예요. 모든 행동에 있어서 이것은 나를 의로운 존재로 보느냐, 아니면 나쁜 존재로 볼 것인가가 선험적(先驗的), 경험 이전부터 있던 바탕을 차지하는 거예요.
로마서 10장에서는 이를 간단하게 이야기해요.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3절)라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악마로서는 자신만만한 방어책이 뭐냐? 인간은 교회를 다니든 장로가 되든 집사가 되든 목사가 되든 어떻게든 인간 본질은 바뀌어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는가? 바뀌어지지 않으면 천국에 가질 못해요. 주께서는 바뀌지 않는 걸 바뀌는 것으로 전환시키는 작업에 나섭니다. 인간을 바꿔버려요. 인간요소에다 하나님의 언약의 요소를 삽입시키면 그때부터 인간은 바뀝니다.
어떻게 바뀌느냐? 그동안 악마 속에서 ‘나는 ~이다’가 돼요. ‘무엇이다’가 되는데 바뀌게 되면 ‘나는 뭔지 모르겠다’가 돼요. 모르겠다. 이 ‘모르겠다’를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서 ‘나는 죄인입니다. 내가 나를 규정하는데 주님 앞에서 나를 규정할 자신감이 드디어 없습니다. 내가 누군지 모르는 나 같은 거 상대하지 마시고 떠나셔도 무방합니다.’ 이런 이야기했잖아요.
내가 누군지를 모르는 거예요. 마귀나라에서는 이게 일종의 치매현상이죠. 내가 누군지 모르고 멍청하니 붕 떴다. 그런데 성령 안에서는 이게 바로 사랑이다. 왜? 자기 행함에 대해서 자기가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요. 내가 한 행위에 대해서 ‘내가 뭐 했다. 나 잘했지?’라는 말을 굳이 붙이기 싫어요. 이걸로 사람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지난 낮 설교에서는 나에게서 내가 서서히 떨어져나가는 해리 현상이 벌어진다고 했어요. 떨어져나간다. 나는 뼈하고 살이 붙어야 나 인줄 알았는데 살을 벗겨내니까 남아있는 것은 뭐냐? 도저히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뼈만 남아있는 거예요. 요셉은 뼈만 남아있는 내 모습이 진짜 내 모습인 걸 보고 박수치는 거예요. 고마워하고 감사해합니다.
쓰잘데기 없는 의미가 너무 많이 붙었어요. 쓰잘데기 없는, 아무 쓸모없는, 주님 앞에 아무 쓸모짝도 없는 ‘나는 이정도야. 나는 이렇게 해서 나 이렇게 살았어.’ 이런 게 너무 많이 있으니까 이걸 떼내는 거예요. 문제는 우리 힘으로 이걸 떼낼 수 없다는 게 문제가 돼요. 우리 힘으로 떼낼 수가 없을 때 주께서는 이걸 떼내는 작업을 합니다.
어떻게 떼내는지, 떼어내는 작업을 제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설명할 때 양자물리학에서 나오는 예시를 들겠습니다. 좌측 상방에서 우측 하방으로 가는 방향이 있다 합시다. 그런데 조건을 걸어요. 어떤 조건을 거느냐 하면 ‘남자는 출입금지다’ 이런 조건을 거는 겁니다. 남자는 출입금지라 하니까 남자는 조건을 건 그 지점부터 stop이 되고 여자만 갈 수 있겠죠. 그런데 가다가 조건이 또 걸립니다. 여자는 출입금지다. 그럼 그 이후부터는 아무도 통과하지 못하죠. 아무도 통과 못해요.
하나님께서는 천국, 거룩, 하나님의 의를 이야기하면서 조건을 이렇게 걸어버리니까 결국 천국에 도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희한하게도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고 이삭의 하나님이고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 내가 아브라함을 건졌고 하나님 내가 이삭을 건졌고 하나님 내가 야곱을 건지시면서 하나님 내가 어떻다는 것을 이 세상에 나타냈다는 뜻이에요.
이게 출애굽기 3장에도 나오고요, 6장에도 나와요. “하나님 누구십니까?” “나? 나 말이가?” “예.”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러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건질 때 원칙, 그 원칙을 실제로 옮기는 하나님이다. 이삭을 건질 때 실제로 옮기는 하나님이다. 야곱을 건질 때 그 원칙을 그대로 밀어붙이는 하나님이다.’ 이렇게 되겠죠.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이 인간들에 관여할 때 그 원칙을 간단히 말하면 이렇게 돼요.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 이 원칙을 공통적으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적용시켰기 때문에 그 결과가 아브라함도 천국, 이삭도 천국, 야곱도 천국이 된 거예요.
마태복음 17장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엘리야, 모세, 예수님이 영광 중에 있던 걸 봤죠. 여기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 특히 베드로가 이야기했죠. “오케이, 됐습니다. 이게 천국입니다. 뭐 더 갈 것도 없습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주저앉아서 제가 초막 셋을 지을 테니까 같이 삽시다.” 이렇게 나온 거예요.
지금 베드로는 무슨 원칙이 없었어요? 있는 것에서 천국 가고 산 데서 천국 간다, 이 원칙만 생각하지, 없음이라는 경로를 거쳐야 된다는 사실을 베드로는 지금 모르고 있고, 심지어 죽어야 산다는 이 원칙도 베드로는 지금 빼먹고 있어요. 빼먹고 있다고요.
다시 양자물리학으로 돌아와서,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학자들이 실험을 하면서 여기다 이걸 집어넣어요. ‘남자 출입금지’와 ‘여자 출입금지’ 중간에 ‘어른은 통과 못한다.’ 남자, 여자 나오다가 갑자기 중간에 어른은 통과 못한다 하면? 자, 남자로 시작했죠? 그럼 여자만 통과하겠죠. 그런데 어른은 통과 못하니까 여자아이만 통과하죠. 쭉 내려오다가 여자는 통과 못한다 하면 결국은 인간은 예상하기를 ‘아무도 통과 못한다’가 되잖아요.
그런데 과학자가 관찰해보니까 여기 통과하는 게 있어요. 뭐냐 하면 남자아이. 이 예화를 물리학자들이 어디에 사용하느냐 하면 파동이냐 입자냐 그 이야기할 때 파동인 동시에 입자가 중첩되어 있다는 이 사실을 이야기할 때 인간의 이성과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 이 자연세계, 미시세계의 특징이라고 설명하면서 이런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대목을 설명할 때 이렇게 설명하면 돼요. ‘서로 다른 매개변수가 작용하고 중첩되어 있다.’ 이걸로 설명합니다. 서로 다른 매개변수. 변수가 뭐에요? 변하게 하는 조건을 매개변수라 합니다. 주께서 매개변수라 할 때 이렇게 하면 돼요. “네가 사람이냐? 네가 사람으로 있나?” “있습니다.” “있는 건 통과 못해. 천국에 못가.” “네가 살았어?” “살았습니다.” “그럼 산 것은 통과 못해.” 이게 천국의 매개변수입니다.
그럼 아무도 통과 못하죠. 그런데 여기 예상 밖의 매개변수가 등장합니다. 뭐냐 하면 “자기가 죄인인 것을 모르는 사람은 천국에 통과 못해.” 이 매개변수를 딱 설치해버리면 나중에 아버지로부터 저주받은 분이 천국에 도착을 해버려요.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천국에 못 간다.’가 되어버리면 이 세상에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선악을 알기 때문에 어떤 경우라도, 모든 인간이 지옥가도 자기는 천국 갈만한 권한이 있다는 생각이 타고났거든요. 악마가 그렇게 했으니까. 이걸 걸러내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걸 걸러낸다고요.
모든 인간은 살아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죽인다. 살아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천국 못 온다. 본인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천국 못 온다. 그것만 해도 두 개죠. 한 개 더 보태면, 어떤 인간도 죄인인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천국 오지 못한다. 그러니까 어떤 매개변수든 인간 중에 그것을 지켜서 천국 갈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죠.
그런데 매개변수 그 자체가 새로운 피조물을 창조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 인간은 매개변수를 통과 못하는데, 매개변수 자체적으로 통과할 수 있는 창조의 기능에 의해서 없는 데서 새롭게 피조물로 만들어진다면 그것은 천국에 도달한 천국 백성이 되죠. 이걸 사용한다니까요.
보통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가 아니죠. 굉장히 중요하면서도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문제에요. 여러분에게 제가 하나 예를 들겠습니다. 전기는 +(플러스) 따로 있고 전기는 -(마이너스) 따로 있다. 전기는 플러스 따로 있고 마이너스 따로 있다. 맞죠? 그런데 자석은 N극과 S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붙어있다. 맞죠? N극, S극 아무리 잘라 봐도 또 N극/ S극 생기잖아요. N/S극은 붙어있다.
전기는 따로 있다는 것이 맥스웰 방정식(Maxwell's equations, 전자기학에서 전기장과 자기장에 관한 연립방정식) 1번이고 N극, S극 붙어있다는 것이 2번이에요. 맥스웰 방정식이 4개인데 3번, 4번이 뭐냐? 자기장으로 인하여 전류가 생긴다, 이것이 3번이고요. 전류에 의해서 자기장이 생긴다, 이게 4번이에요.
보세요. 전기가 따론데 N극, S극은 떨어지지 않죠. 자기의 특징은 N극에서 나와서 S극을 거쳐 도로 자기에게 돌아간다. 자기를 품는다는 거예요. +는 전기를 발산하고 -는 끌어 모은다, 응집시킨다 이 이야기에요. 이게 3번, 4번에 가서 자기장이 전류를 발생시키고 전류가 자기장을 발생시키면 결국은 ‘전기와 자기가 똑같다’가 되어버려요. 똑같다,가 되는 거예요. 여기서 물리학자들은 이 자연에 대해 신비를 느낍니다. 어떻게 그게 똑같지? 파동과 입자가 똑같다. 이게 어떻게 똑같지?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납득이.
결국 인간세계라 하는 것은 인간이 그렇게 알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인간은 점점 어떤 늪에 빠지는 거예요. 저도 어릴 때 그런 기억이 있는데요. 어머니께서 솜이불을 누벼서 천과 솜이 분리되지 않도록 바느질을 하잖아요. 그걸 보고 나도 그걸 하고 싶어서 해봤는데 이거는 바늘로 인하여 솜이 더 엉켜버렸어요. 아주 엉망이 되고 말았어요. 어느 게 솜인지 천인지 구분도 안 되고요. 솜이 막 천 밖으로 튀어나오고 난리도 아니에요.
내가 뭔가 구원받고자 몸부림치면 칠수록 구원이 되는 게 아니고, 대략 난감. 아무 대책이 없이 되는 거예요. 대책이. 인간이 내가 내 구원에 개입할수록 문제가 더 꼬이게 되는 거예요. 더 꼬여버려요. 왜냐하면 우리는 사는 것도 잘 살고 구원받는 것도 챙기고, 두 개의 변수를 내가 스스로 통합하려고 애를 쓰기 때문이에요. 살아있을 때 복 받고 죽어서는 천국가고.
주께서는 어떻게 하겠어요? 이 매개변수가 우리 중심으로는 통합이 안 되고 예수님 중심으로만 모든 게 정리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주께서는 광야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이 살려고 애쓰는 자체가 본인 구원에 전혀 도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광야를 통해서 알려줍니다. 이럴 것 같으면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자.
결과가 더욱 더 참담하게 되었어요.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뭔가 여운이 남고 소망이 생기게 되는데 소망은커녕 드디어 절망으로 가는 거예요. 대책이 하나도 없어요. 갈수록 난감해요. 예상치도 않은 적들이 와서 우리를 치고. 거기다가 하나님께서는 율법 어겼다고 사람들 죽이고.
민수기 25장 한번 봅시다. 민수기 25장에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이방신의 여자 제사장들하고 간음을 했다. 간음을 하니까 9절에 염병, 전염병이 퍼졌는데 죽은 자가 얼마냐 하면 이만사천 명이죠.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쳤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 입장에서 보세요. 우상을 섬겨도 죽고. 그럼 우상 안 섬기면 광야에서 살아남을 희망 있어요? 예?
여러분, 민수기 보면서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게임 자체가 성립 안 되는 게임에 이스라엘 백성이 말려들었다는 생각 안 듭니까? 뒤에는 애굽 군사고 앞에는 홍해바다고. 진퇴양난이잖아요. 여기서 무슨 탈출구가 있어요? 없어요. 그런데 탈출구가 없다는 게 매개변수라는 생각 안 들어요? 이게 구원의 방식이라는 생각 안 드십니까?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
제자들도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부자가 천국가기 힘들다면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제자들이 그만큼 구원에 대한 집착이 있었다는 뜻이에요. “죽으면, 우리가 순교하면 구원받겠습니까?” 라고 그런 이야기도 베드로가 했잖아요.
입자의 종류에 보손(bson)이라고 있어요. 보손 입자가 있고 페르미온(fermion) 입자가 있는데, 제일 작은 입자(양자역학에서의 기본입자)에요. 둘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한 바퀴 미치면 보손 되고 두 바퀴 미치면 페르미온 돼요. 양자물리학에 보면 스핀이라는 게 있는데 이게 한 바퀴 돌면 원상태 되는 것. 내가 순교해서 구원받는다면 내 목숨 바쳐 순교하겠습니다, 이게 한 바퀴 돌면 나는 구원될 수 있다는 그런 아이디어 있잖아요.
그런데 미친 데다가 한번 더 미쳐야 돼요. 이게 1/2스핀이라 하는 건데 이건 두 번 미치는 거예요. ‘내가 예수 믿어서 나는 죄인입니다.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습니다.’ 그렇게 나온다면 구원됩니까? 아니오. 그럼 거기서 한번 더 미치면 어떻게 돼요? 한번 더 미쳐보자. 그 자체를 뒤집어버리자. 그 자체를.
더 뒤집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이 할 수 있는 아이디어에 의해서 여기는 지옥이고 저기는 천국인데 천국 가는 방법은 뭐냐? 예수님이 주신 십자가를 따르면 되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이렇게 하면 되죠. 그런데 ‘자기를 부인하고’ 할 때 나를 부인할 수 있는 능력이 나한테 있기 때문에 주께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했다는 거예요,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
그런데 자기를 부인하고,가 안 된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인간은 매개변수가 나를 부인하면 구원될 수 있다고 그걸로 마감시키거든요. 인간이 자기 구원하는데, 자기를 부인하면 구원된다. 그런데 주께서는 자기를 부인한 것을 부인해보라고 요구한다면, 그게 부인이 됩니까? 부인은커녕 마누라도 안 된다. 그게 돼요?
네가 죽으면 살리라,할 때 그건 우리가 아는 거예요. 안중근 의사도 했잖아요. 대한국인 찍어서 죽으려고 했잖아요. 그런데 죽은 너를 죽여 봐라, 이게 됩니까? 그런 안중근 의사 봤어요? 산부인과 의사도 안되겠다. 죽은 데서 또 죽어라, 이게 말이 돼요, 그래?
인간은 왜 안 되느냐 하면 인간이 뭐하고자 할 때 인간은 이미 죄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말씀을 이해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죄 없으신 하늘에서 하신 말씀이에요.
요한복음 3장 봅시다. 지금 해결책이 요한복음 7장인데 그건 조금 있다 말씀드리고 3장부터 먼저 말씀드리면 3장 11절, 12절 읽어보겠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여기서 우리가 누구냐 하면 바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말하죠. 12절에 나옵니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자가 이야기한 것을 하늘에 올라가본 적도 없고 땅에서 태어나서 땅에서 사는 인간이 이 말씀을 나름대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최선의 노력을 하려고 애써봤자 그것은 말짱 소용없는 짓이에요. 그 소용없는 짓을 오늘날 교회가 이야기한다니까요. 오늘날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말씀대로 살자. 누구세요, 당신? 당신이 누군데 말씀대로 살아? 누군데 말씀대로 사냐 이 말이죠.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늘에서 왔다 했잖아요. 그런데 하늘에서 온 사람이 한 말에 땅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아무리 내가 이야기해도 본소속이 땅에 소속되었기 때문에 하늘에서 온 이야기를 그들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다는 것이 이미 확정된 사실이잖아요. 그 확정된 사실에 우리가 지금 속해 있잖아요.
니고데모보고 이야기한 겁니다. 그러니 니고데모가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이야기했죠. 니고데모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반문한 이유는 성령을 언급했기 때문에 그래요. 성령. 그리고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할 때 여기 또 뭐가 나오느냐 하면 믿음이라는 매개변수를 줬다 이 말이죠.
그럼 믿으라면 믿지, 뭐. 까짓 거 영생 얻는다는데 안 믿을 이유 없지. 믿지. 믿는데 믿는다는 자체가 이미 믿지 않음에서 나온 가짜 믿음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어둠에 속해서 어둠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진짜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야 진짜 믿음이에요.
요한복음 3장 18-20절, 21절.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나님이 행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야기한 것이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했다. 내가 했다.’로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했다’가 나오는 거예요. 그럴 경우에만 가능하다 이 말이죠.
그럼 지금까지 한 것을 요약하면 뭡니까? 하나님은 하나님 일을 하는데 그 매개체로 누구를 사용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나님 자기 일을 회수한다, 이렇게 돼요. 자기 일을 벌여놓고 그걸 회수하는데 그 통로 역할로서 인간을 사용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 일의 매개변수는 뭐냐? 인간이 알지 못하는 매개변수를 동원하는 거죠. 오직 예수님의 하신 일만이 구원에 이르는 능력이 된다. 예수님의 개입이에요. 예수님의 개입.
자, 그렇다면 아까 미뤄놨던 요한복음 7장 37-39절 보시고 그다음에 40절과 41절을 또 따로 보셔야 돼요. 요한복음 7장 37-39절,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또 명령하셔요. 인간이 지킬 수 없는 매개변수를 또 던져요. 조건을 던진다고요. 조건을. 그럼 우리는 넙죽 받죠.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도대체 예수님이 자기보고 이야기하는 건지 누구보고 이야기하는 건지. 나를 믿는 자는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에스겔 47장 성전에서 물이 나오는 거예요. 그 대목입니다. 초막절 행사할 때 성전에서 물이 나온다는 거예요.
그런데 유대인들이 물이 안 나오기 때문에 실로암 물가에서 떠가지고 이벤트를 벌인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벤트는 소용없다는 거예요. 실제로 나를 믿는 자는 이벤트가 아니고 실제로 말씀이 성취된다는 거예요. 그 사람을 통해서, 나를 믿는 자는. 그럼 사람들은 ‘믿습니다’ 이렇게 나오겠죠, 당연히. 자기 살 궁리 챙기니까.
39절에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이 대목이요. 성령을 주시는데 성령은 어떤 경우에 오느냐? 예수님이 영광을 받을 경우에만 성령이 온다는 거예요. 예수님만 영광을 받을 때.
그럼 그동안 예수님이 육신을 갖고 왔기 때문에 예수님의 영광을 누가 모독하고 누가 훼방했습니까? ‘예수님도 육신이고 나도 육신이니까 우리 막가자.’ 이런 생각이 예수님의 영광을 인간과 같은 영광 수준으로 치부한 거예요. 그래서 아버지께서 주님을 인간에게서 떼어놓으려고 하신 거예요.
매개조건을 거시고 그 조건에 대해서 인간이 손 타지 못하도록 따로 떼내서 그 조건을 예수님 본인이 다 성취해버리는 겁니다. 그럼 인간에게 영광이 남아있습니까, 안 남아있습니까? 인간은 뭐 한 게 있어야 영광이죠. 못하죠. 모든 영광은 예수님만 홀로 받는 거예요. 그 고백이 나온다면 이미 성령 받았다는 티를 내는 거예요. 성령 받은 자의 모습이 나오는 거예요.
성령은 뭐냐 하면 ‘인간이 어떻게 했다’가 아니라 인간 속에 인간이 지킬 수 없는 매개조건, 매개변수가 그 사람을 장악했다는 뜻이에요, 성령이 왔다는 것은. 인간이 이룰 수 없는 조건이 내 안에 들어오게 되면 그때부터는 그 조건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조건들은 다 거부당하죠. 이게 자기를 부인하는 거예요, 자기를 부인하는 것.
내가 스스로 나를 부인하는 것은 주님의 조건이 아닙니다. 지 혼자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 이건 인간들이 그 말씀을 오해해서 ‘야, 이거는 내가 할 수 있다. 스스로 나는 죄인이다 하면 되겠지.’ 하는 거예요. 그건 바리새인들이 매일 고난주간에 많이 했던 거예요, 그거. 가슴 두드린다고 구원받는 거 아닙니다. 바리새인한 것을 오늘날 교회도 하잖아요. 부족하다, 부족하다. 맨날 부족하다. 나는 이렇게 회개하는데 너는 뭐하고 있느냐? 이게 바로 같은 인간끼리 영광 받는 시합 벌이고 있는 환경 아닙니까.
자, 이렇게 말씀하시고 아직 영광을 받지 못했다는 점이 어떻게 해석되는지를 보세요. 40절,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혹은 이가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혹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이렇게 되죠.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말씀을 탁 던지니까 반응 따라서 두 부류가 발생됩니다, 두 부류가. 두 부류가 생겨요. 예수님이 선지자 맞다/ 아니다. 어떻게 선지자가 갈릴리, 어두움 출신이겠는가 하고. 42절,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이런 반응도 있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이런 뜻이에요. 인간 네가 알고 있는 걸 다 끄집어내는 계기가 돼요. 끄집어내는 계기. 이것은 성도 아니라 누구에게도 예외 없어요. 누구나 다 성도가 되려면 줄줄이 사탕처럼 다 나와야 돼요. 알알이 비엔나 소시지처럼 하나가 아니라 줄줄이 다 내장 끄집어내듯이 창자 끄집어내듯이 말씀이 다 끄집어내는 거예요. 여기까지가 끝인가보오? 아니요. 죽을 때까지 계속 나와요. 계속 끄집어져 나오는 겁니다.
계속 끄집어져 안 나오면 사람은 이것까지 해놓고 이걸 자기부인이라 쳐주세요, 이렇게 해서 자기 영광 챙기는 데에 또 생각이 거기 가 있어요. 이 정도까지 낮췄으면 이젠 너 합격이라 해주면 좋겠다 이런 식으로. 주께서 우리를 기계처럼 활용한다는 생각을 못하고 자꾸 이 정도 하면 내 것 괜찮은데 하면서, 자꾸 내 것 따로 챙기려는 의도가 계속해서 인간에게 있습니다. 인간 속에 그게 있어요.
그래서 여기 봅시다. 그다음 뭘 보느냐 하면 39절,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는 이 대목이 필히 들어가야 될 이유가 뭐냐? ‘하나님의 조건이 인간들로 인하여 (마치) 반대편에 속한 것으로 오인된다.’
인간들은 하나님이 주신 진짜 조건이 내가 원하는 세계의 적대세계(이단)에 속하는 것처럼 우리가 그렇게 느낀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제자들도 예외가 아니었죠.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치기 바빴습니다. 아까 이야기한 내부권세, 외부권세 때문에 도망치기 바빠요.
다시 말해서 예수 믿는 게 나한테 아무런 보탬이 안 되고 인생에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이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소시지처럼 올라오는 거예요. 항상 중간에 회계해요. 항상 이렇게 정산을 해요. 이만큼 믿었는데 가만있어 보자, 그동안 예수님한테 얻어먹은 게 뭐가 있지? 이런 거. 예수님한테 얻어먹은 거 빵하고 두유 있잖아요. 뭐 있지? 계속 자신의 의를 챙기려는 의도를 인간은 중지하지 않습니다. 중지하지 않아요.
그럼 우리는 탈락이잖아요,라는 걱정이 슬그머니 올라오죠. 그런데 인간이 못하는데 주께서 하시는 게 뭐냐? 이중부정이죠. 아까 매개변수를 두 개 설정한 거죠. 자기를 부인한 것을 부인해버리는 방법.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없죠. ‘최선을 다하여 나를 부인했습니다.’ 그걸 한번 엎어볼래? 그걸 엎으면 뭐가 되느냐? ‘주여, 저를 마음껏 갖고 노소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주님 마음대로 하소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걸 첫째 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게 뭐라고 했습니까? 그게 바로 사랑이잖아요. 나는 저 형제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때려죽어도 형제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 말을 들은 형제가 그걸 사랑으로 이해하게 만드는 게 중간에 주님이 개입했을 때 가능한 거죠.
‘이런 설교해도 은혜를 안 받아? 진짜 나쁘다.’ 이걸 뒤엎어보세요. ‘듣든지 말든지 난 모르겠어. 난 모르겠어. 난 오늘 헛소리만 했어.’ 했는데 “목사님, 은혜 받았어요.” 이러면….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는 일은 결국 뭐냐? 주의 일을 했다는 증거가, 내가 뭐? 아무 한 게 없는데,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아, 나는 완전히 쓰레기 되었구나. 그 결과를 두고서 상대방은 굉장히 기뻐하고 ‘아, 저를 이렇게 사용하셨군요.’ 하고 있는데 본인은 주님과의 관계에서 완전히 쪼다 되고 쓰레기 된 거죠.
끝으로 이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이웃사랑과 이걸 한번 비교해보세요. 이웃사랑 하라는 이 말씀과 에스겔 33장 7절 이 말씀을 비교해보세요. “인자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을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 파수꾼, 감시자죠. 이게 이웃사랑과 equal(=)됩니까? 동등해요? 그런데 성경은 이걸 equal되게 했어요.
이웃사랑이라 하면 형제를 위해서 쌀을 갖다 주고 위로해주고 ‘아픕니까?’ 묻는 이게 이웃사랑인데 이웃사랑을 어떻게 하라고요? 사랑을 지키고 진리를 지키고 길을 지키고 생명을 지키는 이것이 최고의 이웃사랑이에요.
남 사랑할 생각 하지 말고 네 꼬라지나 잘해라. 지킬 거나 잘 지켜라. 주제넘게 남 사랑할 생각 하지 말고. 네가 주님한테 다루어지면 그보다 더 큰 사랑은 없나니. 그보다 더 큰 사랑이 없어요. 앞으로 같은 교인이 죽었거든 드라이브 스루하세요. 내가 파악할 수 있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또 노래 가사 같네요.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김광석 노래죠. 내가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나는 십자가만 바라볼 뿐이다. 그게 최고의 이웃사랑입니다. 그게 어디 나오나? 갈라디아서 6장 4절, 이것은 다 같이 읽어보고 마치겠습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이제 아시겠죠? 니나 잘하세요! 너나 십자가만 자랑하세요. 남 사랑할 생각하지 말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랑할 것이 십자가밖에 없음을, 거기서 시선 떼지 말고 자꾸 엉뚱한 생각하지 말고 나 같은 쓰레기를 용서해주시는 십자가만 자랑하는 것, 이것보다 더 큰 이웃사랑이 없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