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예레미야

예레미야 39:4-10 / 성령이 매개체

정인순 2025. 6. 1.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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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매개체

 

이근호
2025년 6월 1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9:4-10

(39:4) 유다 왕 시드기야와 모든 군사가 그들을 보고 도망하되 밤에 왕의 동산길로 좇아 두 담 샛문을 통하여 성읍을 벗어나서 아라바로 갔더니

(39:5) 갈대아인의 군대가 그들을 따라 여리고 평원에서 시드기야에게 미쳐 그를 잡아서 데리고 하맛 땅 립나에 있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로 올라가매 왕이 그를 심문하였더라

(39:6) 바벨론 왕이 립나에서 시드기야의 목전에서 그 아들들을 죽였고 왕이 또 유다의 모든 귀인을 죽였으며

(39:7) 왕이 또 시드기야의 눈을 빼게 하고 바벨론으로 옮기려 하여 사슬로 결박하였더라

(39:8) 갈대아인들이 왕궁과 백성의 집을 불사르며 예루살렘 성벽을 헐었고

(39:9)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성 중에 남아 있는 백성과 자기에게 항복한 자와 그 외의 남은 백성을 바벨론으로 잡아 옮겼으며

(39:10)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아무 소유가 없는 빈민을 유다 땅에 남겨두고 그 날에 포도원과 밭을 그들에게 주었더라

사람이 도망친다는 말은, 자기가 가진 것으로 자아를 계속 구성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남은 자투리라고 건져서 내가 원하는 나를 계속 살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 끝까지 따라와서는 나의 계획을 와장창 무산시킨다는 겁니다. 추잡고 더럽고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잘게 부셔서 그 쪼가리들로 완전한 자기 백성을 만드십니다.

이 일을 벌리시는 현장에서 시드기야는 두 눈이 뽑히고 자신의 장래를 성장할 자식들이 다 몰살합니다. 즉 더는 시드기야의 미래는 없습니다. 그동안 자신의 인생을 살기 위해 수시로 판단을 내리고 평가를 내기게 한 그의 두 눈, 즉 ‘보고 판단내리는 행위’는 말살되었습니다. 남은 것은 그저 하나님의 조치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습니다. ‘도망치지 않고 잡혀버려라’입니다. 이것조차도 하나님의 벌리시는 일의 일관성에 해당되는 상황입니다. 여기서 시드기야가 오해한 것은 원인을 자기쪽에 있다고 여기는 자세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누군가가 지속적으로 실행해온 일들의 결과일 뿐입니다.

이솝 이야기 중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여우가 포도나무 밑을 지나가다가 잘 익은 포도에 푹 빠졌습니다. 포도를 따먹기 위해 모든 시도를 해보지만 결국 실패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떠나면서 하는 말이 이러합니다. “아마 저 포도는 도저히 못막을 정도로 신 포도일 거야”라고 말입니다.

이 여우의 형편은 제대로 성공하지 못함에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실패하지 못함에 잘못이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변수에 대해서 인간들은 다 헤어리고 대처하지 못합니다. 도리어 인간들 각자는 알지 못한 원인들에게 밀려온 파도에 늘 휩싸인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즉 인간들은 늘 결과로 들이닥치는 한 모퉁의 파도결입니다. 난처하고 힘든 상황에서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은 땟목을 타고 가면서 땟목을 수리하는 식으로 인생 여정을 보내고 있습니다. 당연히 수리한 데를 또 수리해야 할 것이고 그러다가 결국 물에 침몰하게 됩니다.

전면적으로 손대지 말고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말씀과 약속의 일관성에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를 하시면서 모든 피조물에다 시간을 할당하셨습니다. 이 시간이 끝나는 날 한데 만나자는 겁니다. 현대 물리학에서 모든 우주 사물들은 동일한 속도로 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어떤 경우든 변함이 없는 빛의 속도, 즉 1초에 300,000km로 달리고 있다는 겁니다. 다만 서로들 사이에 속력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시간축 말고 공간축으로도 달리고 있기 때문이랍니다. 곧 어떤 공간에서 살았던 시간이 끝나는 날, 즉 모든 것이 주님으로 인해 멈추는 날이 곧 약속이 완성된 날이 됩니다.

시간축 달리기를 멈추는 그 순간을 미리 경험하고 품고 산 사람이 신약에 나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도망치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결코 도망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주님의 완성된 공간에 삼킴을 당하여 주님과 더불어 움직였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사도 바울 근처에 있는 사람들은 혼선을 유발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20:22-25에 보면,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보라 내가 너희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지금은 너희가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심령에 매임’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성령에 의해서 사도는 각 성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이 사도의 일관성을 토를 달지 말아야 합니다. 존중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21:4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드디어 사도 바울은 유다 땅에 왔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을 기다리던 제자들이 성령에게 받은 소식이라고 하면서 극구 예루살렘을 들어가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뿐만아니라 사도행전 21:8-14에 보면,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니라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여러 날 있더니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마치 성령님 내부에서 의견 충돌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만 사도의 관심사가 이미 복음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조금도 귀히 여기지 않는 점에서 어떻게 하든지 자신이 살 경우에 사도는 관심이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혹은 복음의 매개자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야고보서 1:15에 보면,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기 인생을 조절하거나 조정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죄를 지배하는 것과는 반대로 죄가 통과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의 관심사가 중요합니다.

어떻게 신상을 유지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일관성에 몸을 맡겨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그냥 놔두지 않고 주의 일을 맡겨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