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12:1-5 / 다양성과 두 노선
다양성과 두 노선
이근호
2025년 5월 28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12:1-5
(12:1) 르호보암이 세겜으로 갔으니 이는 온 이스라엘이 저로 왕을 삼고자 하여 세겜에 이르렀음이더라
(12:2)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전에 솔로몬 왕의 얼굴을 피하여 애굽으로 도망하여 있었더니 이제 그 소문을 듣고 오히려 애굽에 있는 중에
(12:3) 무리가 보내어 저를 불렀더라 여로보암과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와서 르호보암에게 고하여 가로되
(12:4) 왕의 부친이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이제 왕의 부친이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왕을 섬기겠나이다
(12:5) 12:5 르호보암이 대답하되 갔다가 삼 일 후에 다시 내게로 오라 하매 백성이 가니라
솔로몬이 죽고 난 뒤에 르호보암이 왕이 되었을 때에,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평소에 솔로몬에 불만이 있는 요소를 차기 왕이 들어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백성들의 요구와 충돌되는 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하야 선지자의 예언입니다. “그 즈음에 여로보암이 예루살렘에서 나갈 때에 실로 사람 선지자 아히야가 길에서 저를 만나니 아히야가 새 의복을 입었고 그 두 사람만 들에 있었더라
아히야가 그 입은 새 옷을 잡아 열두 조각에 찢고 여로보암에게 이르되 너는 열 조각을 취하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주고 오직 내 종 다윗을 위하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뺀 성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솔로몬에게 주리니”(왕상 11:29-32)
이 예언의 내용에 대해서 르호보암이나 이스라엘 백성 그 누구라도 변경시킬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언은 발표 즉시 실행에 돌입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역사 속에서 같은 인간들끼리 대조하면서 누가 나쁘고 누가 옳은가를 가려낼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같은 인간들과 비교해서 자신을 옳은 자라고 간주하고 싶어합니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자기 관점을 출발점으로 삼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의 관점을 갖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이란 계시가 나타난 즉시로 실행에 돌입하기 때문에 자기 관점을 고수하면서 자기 삶을 추진하는 자로서는 계시와는 간격이 벌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은 단순히 피해자처럼 보이고 가해자는 포악한 르호보암 왕으로 보이겠지만 둘 다 계시에 대해서 거리를 두는 한계를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언은 어디까지나 예언대로 되어질 뿐이기 때문입니다.(왕상 12:15) 즉 인간들 중에 그 어느 누구도 옳은 존재는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들의 다양성의 형편을 뛰어넘을 안목을 갖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어려서부터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처해있는 시공간에서 순응하고 적응하기를 이어갈 뿐입니다. 그렇게 해서 다들 각자 자기 삶을 만들어 나가는 것처럼 자신도 자신만의 인생을 어떻게든 형성하고 싶어합니다.
이렇게 되면 함부로 타인의 삶에 대해서 평하거나 간섭하지 못하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다양성을 최종 분류할 기준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여전히 모든 것의 최종성에 도달될 수 없는 상태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하지만 예언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언(=계시)는 주어지는 즉시 그 완성도를 실행하게 됩니다. 그러면 예언 안에는 최종적 내용이 품어져서 서서히 풀러져 나오게 됩니다. 함부로 주저없이 타인들의 다양한 삶을 공격한 인물이 신약에 나옵니다. 바로 세례요한입니다. 그의 신성한 오지랖을 들어봅시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침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마 3:7-10) 세례 요한이 이렇게 함부로 타인에 대해서 논할 수 있는 이유는 천국, 곧 종말이 가까이 왔기 때문에 나오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그런 세례요한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요단강 세레받는 현장에 오셔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받겠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죄도 없으신 분이 죄 씻어주는 세례를 받을까요? 이 세상의 모든 다양성에 대해서 최종적인 평을 내리시는 분이 세례 요한에서 예수님으로 옮겨집니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은 아무리 다양함이 있더라도 두 노선으로 최종 정리가 내려집니다. 선악과만 따먹은 자와 선악과+ 생명나무 따먹은 자로 나뉘어집니다. 선악과만 따먹은 자는 최종 하나님의 안목을 갖추지 못한 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르호보암 같은 인물입니다. 이 사람은 젊은 자기 친구들과 의논해서 솔로몬 이후의 이스라엘을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를 결정했습니다.
그런 지난 솔로몬과 함께 일했던 정치 원로들의 말을 거절했습니다. 원로들의 조언은 이러했습니다. “왕이 먼저 백성들의 종이 되신다면 우리 백성들도 기꺼이 왕의 종이 되겠습니다”입니다. 하지만 르호보암은 이러한 솔로몬 시절의 신하들의 의견을 솔로몬 통치가 자기 시대에 깔끔하게 정리된 상태가 아닌 증거로 보았습니다.
르호보암은 솔로몬과 비교합니다. 자신의 새끼 손가락이 아버지의 허리보다 굵다고 큰 소리치면서 이스라엘에서 과거 아버지의 흔적을 지우고 온전한 장악력으로 발휘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르호보암의 주장도 모두 아히야에게 내려주신 하나님의 계시 실행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관점에서 이스라엘에게 남기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의 정신을 계속 유지하는 겁니다. 출애굽기 1:8에 보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요셉을 통해 애굽에 은혜를 주신 그 하나님을 거부하는 바로왕이 등장했습니다.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대응은 유월절 양의 희생으로 나타납니다. 즉 히브리인들은 피해자요 바로왕은 가해자라는 것이 아니라 그 어느 인간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만한 자는 아무도 없음을 아는 자가 진정한 하나님의 계시 안에 있는 유월절의 의미를 아는 자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어느 누구도 진정한 왕이 아닙니다.
그리고 인간들이 하늘에 계시다는 생각하고 있는 하나님도 제대로 왕 개념을 구현한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만이 왕입니다. 이 왕은 하나님의 계시 실행에 통해서 성취됩니다. 이 계시 앞에서 그 어느 누구도 온전한 자는 없습니다. 따라서 이미 천국에 와 있는 자에게만 이 성경과 이스라엘 역사를 읽은 이유가 생겨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순응과 적응으로 자기만 삶만 챙기려고 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