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예레미야

예레미야 38:18-23 / 드론 하나님

정인순 2025. 5. 25.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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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론 하나님

 

이근호
2025년 5월 25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8:18-23

(38:18) 네가 만일 나가서 바벨론 왕의 방백들에게 항복하지 아니하면 이 성이 갈대아인의 손에 붙이우리니 그들이 이 성을 불사를 것이며 너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38:19) 시드기야 왕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나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한 유다인을 두려워하노라 염려컨대 갈대아인이 나를 그들의 손에 붙이면 그들이 나를 조롱할까 하노라

(38:20) 예레미야가 가로되 그 무리가 왕을 그들에게 붙이지 아니하리이다 원하옵나니 내가 왕에게 고한 바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소서 그리하면 왕이 복을 받아 생명을 보존하시리이다

(38:21) 그러나 만일 항복하기를 거절하시면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신 말씀대로 되리이다

(38:22) 곧 유다 왕궁에 남아 있는 모든 여자가 바벨론 왕의 방백들에게로 끌려갈 것이요 그들은 네게 말하기를 네 친구들이 너를 꾀어 이기고 네 발이 진흙에 빠짐을 보고 물러갔도다 하리라

(38:23) 네 아내들과 자녀는 갈대아인에게로 끌어냄을 입겠고 너는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바벨론 왕의 손에 잡히리라 또 네가 이 성으로 불사름을 입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시드기야와 선지자 예레미야의 대화입니다. 시드기야는 두려움이 가득합니다. 그는 ‘만약의’ 경우를 생각합니다. 대화의 주제는 ‘바벨론이 진짜로 쳐들어오게 되면 나는?’입니다. 즉 시드기야는 ‘나’를 생각하고 그 어떤 경우라도 ‘나’를 비켜가지 않습니다. 이점으로 우리는 시드기야와 선지자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의 관심사는 계시의 전달과 성취성입니다. 왜냐하면 그게 진리이고 그 외는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선지자 입장을 이해합니다. 진리가 진리됩게 진행되는 것이 이 모든 세상이라면 이미 진리 안에 있는 자 입장에서 굳이 걱정할 일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일련의 마땅한 논리성입니다.

거짓이 거짓으로 드러나는 것에 대해 굳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진리인지 거짓인지 나중에 되어진 것을 그때 가서 정하겠다는 것은 그때까지 두려움과 염려는 당연히 따라옵니다. 마치 이미 시험에 합격했다는 정보를 미리 입수한 사람과 합격 여부를 모르는 자의 초조함과 마음 상태가 같을 리가 없는 겁니다.

오늘날 ‘내가 천국에 합격했다’로 편안함을 누리는 것이 성도가 아니라 ‘모든 것이 진리대로 된다’는 것을 알고 느긋함을 갖는 자가 성도입니다. 즉 진리의 진리됨에 있어 성도는 자기를 뺀 자를 두고 말합니다. 이러한 ‘자기 빼기’ 상황은 애초에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상황입니다.

여호수아 1:7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여기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말씀에 입각해서 이스라엘의 이동 모습은 오늘날 안목에서 보면 ‘열차 이미지’ 같습니다.

열차 이미지란 ‘선(線)line’ 같은 형태입니다. 폭은 없고 앞 뒤만 길게 뻗어나온 모습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이 광야를 이동할 때 언약궤를 중심으로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게 행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향성을 갖게 됩니다. 이는 시간적으로 표현하면 ‘전과 후’가 상호 연결되어 있는 식으로 성립하고 그리고 움직입니다.

즉 운동성을 띠게 된다는 겁니다. 이런 입장에서 오늘 본문을 보면 시드기야 왕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열차 뒤쪽에 해당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제시한 계시는 자꾸 이미 확정된 진리의 목표점을 향해 달려가는데 시드기야 왕은 자기 안위만 염려하고 있습니다. “나는 어떻게 돼?”

이미 구약 창세기 9장에서, 세상은 멸망의 대상으로 규정났습니다. 멸망 안 되겠다고 버티고 발악하는 것은 자신의 팔자 중심이지 진리 중심이 아닙니다. 따라서 시드기야는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반항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무지개처럼 자신이 멸망 후의 세상에서 지켜보고 이끄시겠다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의 선(線)구조는 다른 민족의 면적 구조로 다른 임무가 주어져 있습니다. 인간 세상에서 어떻게 해도 알 수 없는 ‘새로움’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구현하시겠다는 겁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잡혀 감’입니다. 이런 방식은 새로운 방식의 전과 후를 만들어 내십니다.

이스라엘 민족 자체는 선(線)-구조로 바꾸시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잘 사느냐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해서 앞/뒤, 그리고 옛 것/새 것을 어떤 식으로도 나타내시겠다는 겁니다. 구약  시절에서는 개인 신상에 대한 염려에 대해서 이해 줄수는 있다하지만 신약 입장에 와서는 보다 단호합니다.  

개인 사정은 진리에서 빠지고 복음에서 빠집니다. 마태복음 9:13에 보면,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긍휼’과 ‘제사’를 의도적으로 대립시키십니다.

이 두 개념을 대립시킨다는 말은 어느 한 개념이 다른 개념의 원인이나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제사의 원천은 인간의 행함, 즉 율법적 실천과 관계된다면 긍휼은 인간의 그 어떠한 시도와도 관련없습니다. ‘제사를 내가 원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평소에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것과 자비를 얻는 것과 연관있다고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게 긍휼을 드리면 되지 않느냐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긍휼을 드려서 긍율을 계속 공급받게 한다? 이것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인간들이 자기 걱정 중심으로 살기에 하나님께 바칠 긍휼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예수님의 조치는 ‘죄인을 부르는 일’입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6:3을 놓고 생각해 봅시다. “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구제’라는 자신 행위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그냥 네 안에서 통과시켜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구제 하라’가 모든 인간들로 하여금 죄인되게 합니다. 아무도 자신에 행한 것을 자기에게 잊거나 걷어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이 했다’를 ‘죄인이 죄를 지었다’로 바꾸시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긍휼을 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들은 내놓은 긍휼은 없고 죄만 내어놓는 처지가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예수님께서 조치하시는 것은 ‘옛것/새것’을 예수님의 실천에 의해서 성사시키기 위함입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마태복음 9:17) 복음은 결코 옛것에 담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포도주가 땅에 쏟아져 허망하게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가치를 담기 위해 복음은 반드시 ‘새 부대’에 담겨야 하는 겁니다. 하지만 새 부대은 인간에게 없습니다. 따라서 복음은 오로지 예수님에 의해서 만들어집니다. 새 부대에만 적합한 복음을 오직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실천을 해내실 수 있습니다. 교회란 무엇입니까 교회란 무조건 예수님에 의해서 성립됩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따라서 날마다 새로움이 나오는 바로 그곳에 옛것과 더불어 새로움이 같이 나오는 교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긍정성으로 인해 하나님의 죄사함을 방해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