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4(기독교의 허상)

수치와 선택(로마서 11:25) / 250523

정인순 2025. 5. 23.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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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이하림

광주강의20250523a 로마서 11장 25절(수치와 선택)-이 근호 목사


『기독교와 허상』p.179에 <선택과 윤리>라고 되어 있죠. 그 중에서 하나의 핵심 문장을 뽑는다면 p.181 끝부분에 나옵니다. [교회 속에 이방인들이 초대되었다고 해서 구약 때부터 내려오는 선택의 원리가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이 문장에서 ‘이방인들이 초대되었다’라고 이야기하죠. 여기 나와 있죠. 선택된 자가 엄연히 이스라엘로 확정되어 있는 상태에서 이스라엘로 선택된 그 숫자가 왜 충족되지 못하는가? 하나님은 이스라엘 전체를 선택했어요. ‘나의 택한 야곱, 이스라엘아.’ 하나님이 이스라엘 전체를 선택한 배경에는 아브라함의 혈통적 자손은 아브라함의 선택으로 인하여 무조건 선택되게 되어 있어요.

아브라함이 선택될 때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습니다. 아예 자식 낳을 수가 없죠.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속에 선택된 자를 양성시키는 하나의 기계, 공장으로서 아브라함을 택했죠. 아브라함을 택할 때 원리가 들어있습니다. ‘아브라함 너를 축복한 자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한 자는 저주받는다.’

그러니까 이 말은 아브라함 내에 들어있는 선택된 자들의 단일체, 집단을 축복하면 복을 받고 그 집단을 저주하면 저주받는 걸로 하나님께서는 천국과 지옥 가는 사람을 그런 식으로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아브라함을 선택했다.’ 선택했는데 아브라함만 선택하면 아브라함만 구원받잖아요. 그렇죠? 그럼 하늘나라에 혼자밖에 못 가니까 심심하죠. 아브라함의 자손을 하나님이 선택하기로 했는데 아브라함의 자손에 대해서는 아브라함 스스로 이 자손을 만들 능력은 일찌감치 차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이것이 차단되었어요.

아브라함을 선택하되 아브라함 속에 선택된 민족,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는 선택은 그 선택의 주체자가 아브라함이 아니고 선택의 주체자가 따로 아브라함을 공장으로 사용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등장하죠. 아브라함의 자손이 야곱이에요. 이름이 바뀌면 뭡니까? 이스라엘이죠. 야곱이 얍복강 가기 전에 마하나임이라는 천사집단을 만나죠. 마하나임이라는 뜻은 ‘하나님의 군대’. 하나님의 군대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만드시고 그 군대를 축복하는 자, 그들이 하는 일이 정당하다고 여기는 자들은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주체의 세계화’에요.

주체의 세계화. 나의 주체가 세계화로 확장된다 이 말이죠. 인간세계에서는 이 주체의 세계화를 벌써 인간들이 실시하고 있어요. 나라는 개인이 있으면 내 영역이 확장돼서 영역이 크게 되고 나는 작게 되는 이것이 주체의 세계화가 되는 겁니다. 이 영역은 나의 세계죠.

지금 아브라함의 자손이 복을 받고 이스라엘로 확정된 입장에서 이스라엘 민족 외에 다른 복 받은 민족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없죠. 없는 거예요. 그런데 p.181 문장에 보면 이방인들이 초대되었다는 거예요. 이방인들이 초대되었다. 이것은 일종의 철벽이거든요. 철벽. 누구든지 이스라엘 되지 아니하면 복을 받지 못합니다.

특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몸에 문신 같은 것이 있는데 그걸 새기라 했어요. 그 문신이 뭐겠습니까? 할례죠, 할례. 하나님 보시기에 할례 받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 수치를 당하게 되는 겁니다. 할례 받지 못한 것이 수치를 당해요. 하박국 2장 16절, “네게 영광이 아니요 수치가 가득한즉 너도 마시고 너의 할례 아니한 것을 드러내라”

바벨론 나라는 할례를 받지 못한 이방나라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민족을 쳐버리겠다는 거예요. 어떻습니까? 하나님 하는 일이 굉장히 일관성 있으면서 명료하죠. 아브라함 자손이 아니면 모조리 저주받는다. 왜 저주받는가? 하나님 보시기에 이게 수치스럽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수치스럽다. 더럽다는 뜻이에요. 추잡스럽고 더럽다는 거예요, 하나님 보시기에. 그래서 복을 줄 수가 없죠. 더럽고 추잡스러운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준비한 것은 축복이 아니고 반대로 저주인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할 때부터 선택은 뭐냐? 철벽이다. 철벽은 뭐냐? 선택이다. 선택은 곧 철벽이 되는 겁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아브라함은 ‘나 깨끗하니까 선택해주세요’라고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요청한 적이 없어요. 요청한 적이 없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더러우려면 다 더러워야 되고… 왜 그중 하나를 택해서 하나님이 복을 주시느냐? 여러분, 이게 이해됩니까? 학교 학급 학생들이 전원 다 숙제를 안했는데 ‘한명은 됐고 나머지는 다 운동장 나가서 벌 받아.’하면 벌 받는 애도 납득이 안 되고 더구나 누가 납득 안 됩니까?

분명히 숙제를 안했는데도 불구하고 처벌받는 게 아니라 ‘거기 아이스크림 있으니까 꺼내먹어.’하고 복을 받아버릴 때 이 복이 굉장히 낯설게 느껴지죠. ‘내가 이 복 받아도 되냐?’ 이런 생각이 든단 말이죠. 괜히 벌 받는 애들 보기 미안스럽기도 하고요. 그런 현상이 일어나죠.

미안하면 돼요. 나 혼자 복 받아서 미안하다, 이러면 되는데 이스라엘이 ‘나는 복 받을만한 자격이 있다’ 이렇게 나오니까 이스라엘이 망한 거예요.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가 복과 저주, 저주와 복을 자기 자신과 연관시켜버리니까 이것은 본인 주체의 세계화가 되어버린 거예요. 나 중심의 세계화.

복이나 저주가 나의 어떠함과 나의 태도, 성격 이런 것하고 아무 상관이 없이 어디서 오느냐 하면 바로 ‘외부’에서 오게 돼요. 외부에서. 그럼 여기 어떤 학생이 있는데 걔는 숙제 안 해도 벌을 안 받았어요. 걔가 복을 받았다면 외부가 그 애 어디 속에 들어왔단 말입니까? 이 내부에 들어온 거예요. 내부에.

그럼 숙제 안 해서 벌을 받은 애들이 있다면 숙제 안 해서 벌 받는다고 해서 학교에서 걔들을 다 죽여 버립니까? 다시 집에 돌려보내죠. 일시적이잖아요. 숙제 안 해서 벌 받는다면 일시적이지만 저주받을 만해서 저주받는다면 이것은 집에 가나 어디 가나 늙어죽으나 이건 지옥 가는 거예요.

다만 숙제 안 했다는 것은 네 본질의 일부가 숙제 안함으로 드러날 뿐이지, 그다음부터 숙제 한다고 해서 본질이 바뀐다, 안 바뀐다? 안 바뀌는 거예요. 본질이 안 바뀌는 거예요. 왜냐하면 저주도 외부에서 오고 복도 외부에서 주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외부에서 왔다고 하면 외부 누구? 외부 누구가 바로 아버지로부터 선택받은 자의 등장. 아버지로부터 선택받은 자의 등장이 등장합니다. 요단강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 이사야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한 그 이야기, 선택했다는 이야기를 그대로 아들 예수님께 주죠. 부어줍니다.

이스라엘에게 했던 것을 예수님이 받았다고 하지만 예수님이 받아야 될 주님의 관계가 일시적으로 한시적으로 먼저 이스라엘에게 예언형식으로 주어진 거예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까불지 말라는 거예요. 네가 착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외부에 어떤 미지의 선택받은 자가 현재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동행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외부에서 온 이 외부가 내부로 들어왔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시대가 신약시대입니다. 특히 신약시대 가운데서도 예수님이 열두 제자와 있을 때 말고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난 뒤에 하늘에서 뭐가 오죠. 승천하셨기 때문에 와요. 그게 성령입니다. 하늘에서 뭐가 오죠. 성령이 오시잖아요, 성령이.

성령이 오신다면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영이 우리 내부에 들어오게 됩니다. 들어오게 되면 여기서 어떤 현상이 생기느냐? 아무 한 것도 성령이 와버렸단 말이죠. 그럼 지옥 가는 사람은 어떻게 돼요? 그 사람이 나쁜 짓해서 지옥 갑니까? 뭐가 안 왔기 때문에 지옥 갑니까? 성령을 안 받아서 지옥 가는 거예요. 성령을 안 받아서.

예수님이 선택된 분이거든요. 선택된 분이 내부에 꽂히면 그 사람은 천국, 선택된 분이 내부에 꽂히지 않으면 선택된 분이 내부에 없으면 그 사람은 지옥. 명료해요. 복잡하지 않아요. 아주 간단하고 일관성 있어요.

그런데 받은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저한테 올 필요도 없는데 왜 오셨습니까? 지옥 가는 사람은, 쟤한테는 가는데 왜 나한테는 안 왔습니까? 이게 지옥 가는 거예요.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다 지옥 가야 되기 때문에. 지옥 가는 사람은 자기 지옥 가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 사람이고, 구원 받은 사람은 지옥 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거예요.

TV 교육방송에 집 짓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젊은 커플이 서울 관악산 기슭 높은 언덕 위에 집을 지은 거예요. 그러니 건축가가, 집을 왜 이렇게 높은 곳에 짓습니까? 얼마나 불편합니까? 불편하기 짝이 없죠. 높은 곳에 배달도 안 되고 마트도 없고 편의점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 높은 곳에 집을 지었어요. 그런데 그 여자 분이 하는 말이, 창문이 많아서 창문 열면 언덕 위니까 집들도 안 보이고 관악산만 바로 보이면서 바람이 확 부니까 그게 그렇게 속이 시원하다는 거예요.

‘불편을 감수하고 지은 집’이 주제에요. 불편을 감수하고 지은 집은 창문이 많으면 바람이 많이 들어와서 속이 시원하다는 거예요. 그 프로를 보면서 성도한테는 창문 많은 게 속이 시원한 게 아니고 이 세상이 지옥이라는 것이 속이 시원한 거예요. 이 세상이 지옥이라는 게. 창문만 열면 다 지옥이니까.

지옥을 바라보면서 지옥을 더욱 더 지옥답게 느끼는 가운데 성도는 어떤 기분이 들겠습니까? ‘왜 저를 구원하십니까?’ 이렇게 나오죠. 성도가 갖고 있는 감사와 고마움은, 자기가 만들어낸 게 아니잖아요. 그냥 새벽 탁송처럼 그냥 자기한테 날아온 거잖아요. 이 기쁨이 있게 되면 세상에 소소한 슬픔이라든지 절망이라든지 불안, 공포 이런 것은 그 기쁨으로 인하여 전부 다 잠재워질 수 있는 거예요. 다 있지도 않은, 없는 시시한 것이 되는 거예요. 덮을 수 있으니까. 표정 보니까 별로 덮을 것도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 구원받은 사람이 선택된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할 게 없어요. 범사에 감사하고 고마워하라. 끝. 이렇게 되면 더는 뭐 이야기할 게 없단 말이죠. 막 좋아서 어쩔 줄 모르죠. ‘저와 왜 아무 의논도 없이 저를 천국 보내줍니까?’ 이 이야기 외에는 아무 할 얘기가 없어요.

따라서 선택을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뭘 이야기해야 되느냐? 바로 불신자들이 말하는 선택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성경은 이렇게 두꺼운 책이 되고 말았어요. 불신자들의 선택에 대한 반박, 이것이 두꺼운 책이에요. 이 책은 두껍기도 하고 무겁기도 해요, 심지어. 무겁고 두꺼운 책이 된 겁니다, 이 안의 내용이.

그러면 우리가 이 성경을 보라는 말은… 아까 성령 받은 성도가 뭐라고 합니까? ‘나는 지옥 가도 되는데 왜 이렇게 천국 가는 사람으로 확정을 시켜놨습니까? 이미 명료하게 다 끝내놨습니까?’라고 할 때 ‘나는 지옥 가도 되는데’라는 그 항목이 성경 전체 내용이죠. 내가 왜 지옥 가야 되는가를 알려주는 것이 이 성경책이에요.

그래서 지옥 가는 사람이 성경을 보게 되면 악으로 봐요. 왜? 이거 믿어야 천당 가기 때문에. 다 쓸데없는 짓이에요, 이거. 아무 소용없어요, 이거 봐도. 그런데 성도가 성경 보는 것은 볼 때마다 감사와 기쁨이 나옵니다. 내가 이런 짓까지 했었지. 내가 이것밖에 안됐지. 달고 오묘한 그 말씀이죠. 달고 오묘한 그 말씀. 딱 내 이야기다, 내 이야기. 바리새인 이야기부터 해서 가룟 유다 이야기, 어느 이야기든 내 이야기 아닌 게 없어요. 아주 신바람 이 박사에요. 신바람 난 거예요. 

그래서 지금 우리가 이야기할 것은, 지옥 갈 사람들은 하나님 선택에 대해서 어떻게 반감을 갖고 모독하고 대드는지. 아까 이방인들이 초대받았다 했잖아요. 다시 말씀드리면 이방인들은 아브라함 자손 아닙니다. 따라서 구원, 천국 못갑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쪽수는 채워야 되겠고… 이스라엘 여기서 빠진 자가 있어요. 빠진 자가 있으니까 보궐로 들어오는 거예요. 옛날에 ‘보궐’이란 말 많이 썼어요.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외부인에게 초청장을 주는 거예요.

마태복음 22장 봅시다.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라고 되어 있고 초청한 사람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안 갔죠. 그러니까 10절에 보면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아무나. “아무나 데려와, 아무나.” “그 사람이 악한 자인데도요?” “내가 얘기했지? 악한 자, 선한 자 따지지 말라 했어, 안 했어?” “따지지 말라 했어요.” “아무나 그냥 데려와.” 아무나 데려오는 거예요. 그 아무나가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아무나. 이름을 ‘이 아무나’로 바꿔야 돼요. 최 아무나. 아무나로 바꿔야 돼요.

주님 보시기에 아무것도 아니에요. 왜? 초청받을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왜냐하면 아브라함 자손이 아니잖아요. 아브라함 자손이 아니에요. 이거는 저주받아야 돼요. 나쁜 짓해서 저주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선택한 아브라함 자손에게만 복 준다.’ 그 원칙 바깥에 있기 때문에 바깥에 있는 아무나는 다 저주받는 아무나에요. 그런 사람을 데려오라.

초대받지 않은 초대자, 이게 이방인이에요. 이방인. 그러니 이방인들의 선택은 선택의 의미, 선택의 원리가 계속 유지돼요.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자기는 개코도 아니니까 아무것도 아니니까 선택의 원리가 계속 유지되면서 무엇이 빛나요? 하나님의 일방적 선택이 계속 그 의미가 살아있는 어떤 운반체, 그런 매개체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도 이 방법을 썼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있을 때 범죄 했잖아요. 그래서 추방되었죠. 바벨론에 포로 잡혀 갔잖아요. 바벨론에 포로 잡혀간 것까지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 예언되어 있어요. 너희들은 70년 만에 돌아오리라. 70년 만에 돌아온다는 말은 제발 아무것도 아닌 자로 그냥 돌아오라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자로.

그런데 이스라엘은 아무것도 아닌 자로 돌아와도 또 돌아오자마자 ‘자기가 잘나서 하나님이 선택했다. 이방민족은 율법이 없지만 우리는 율법이 있잖아.’ 또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터가 문제라, 터가. 약속의 땅, 터가 문제에요, 이게. 터 있고 땅 있고 좀 살만하니까 갑자기 자기한테 의미부여하는 거예요. 의미부여.

그런 드라마가 참 많이 있어요. 아무것도 없는 뼈대도 없는 하찮은 가문의 여자를 재벌 집 며느리로 들여놨으면 나는 어떻다? ‘이 아무것도 아닌 자에게 넓은 저택에 맛있는 음식에 편리한 문화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준 우리 시아버지, 시어머니께 너무나 감사합니다.’ 이렇게 지내면 되는데 여기서 슬슬 권력의 맛을 보고 ‘내가 누구고? 누구 집의 며느리!’해가지고 거기서 정치게임에 나선다면 가차 없이 퇴출당하죠. 인간은 고쳐 쓰는 법이 아니에요.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이깁니까. 돈 버는 사람이 뽑아주니 자기가 뭐 된 양….

지금까지 강의한 중에서 한 가지를 여러분들이 잊지 말라고 내가 당부한다면 이겁니다. ‘철벽’이에요, 철벽. 완전히 차단되어 있어요. 네가 선택될 이유를 찾지 마라. 그래야 선택이 산다. 네 안에서 계속 선택이 살아있는 거예요. ‘하나님, 회개하면 내가 구원받겠지요?’ 제발, 회개고 뭐고 간에 내가 구원받을 이유를 나에게서 찾지 말아달라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누굽니까? 성경이 왜 두껍습니까? 인간 내부에 뭐가 자리 잡고 있었어요. 자경단. 이름도 무시무시한 자경단. 내 마을, 내 고을, 내 마음은, 나의 모든 것은 누가 지킨다? 내가 지키는 거예요. 내가 자경단이에요. 나의 선택을 위한 자경단. 내 선택 자체의 의미를 지켜내는 자경단이 인간 속에 발생하게 되는 겁니다. 배후에 마귀가 이런 짓을 하죠, 마귀가. 이 자경단이 외치는 구호는 ‘정당성’이죠. 나의 정당성.

열왕기하 21장에 보면 므낫세라는 왕이 등장해요. 히스기야, 므낫세, 아몬, 요시아 이렇게 돼요. 남쪽 유다 계열이. 요시아 이후에 이제 네 명의 왕이 망해버리는데, 바벨론 포로 잡혀가는데요. 히스기야는 그때까지 유다 왕 중에서 최고의 왕이라고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열두 살 때 왕위에 오릅니다. 물론 아버지한테 많은 교육을 받았겠죠. 아버지 죽고 난 뒤에 므낫세가 왕이 되는데요.

산봉우리가 높으면 그만큼 뭐가 깊다는 뜻이에요? 골짜기가 깊다는 뜻이죠. 칭송을 받는 그 밑의 그림자는 더 짙게 되어 있어요. 그 므낫세가 저지른 세 가지 잘못이 성경에 나와 있는데 첫 번째는 무죄한 피를 많이 흘렸다는 겁니다. 열왕기하 21장 16절에 무죄한 피, 의인의 피를 많이 흘렸다.

두 번째는 전국 높은 산이고 뭐고 지방에 있는 사람들이 섬기는 모든 자리에 우상 제단, 앗수르 우상 신 뿐 아니고 각종 신을 섬기는 제단을 설치하라고 대통령령으로 비상계엄령으로 완전히 선포를 해서 모든 국민은 이제는 우상을 일치해서 섬기기로 한 겁니다. 법을 그렇게 만들었어요.

왕이 그렇게 한다고 여호와 믿던 백성들이 안 믿고 그런 거 아니잖아요. 그래서 자진해서 성전이 있는 곳에 앗수르 제단을 세우고 자기가 시범보인다고 앗수르 종교처럼 자기 자식들을 불 속에 태웠습니다. 아주 적극적으로 앗수르 우상을 섬기는 전도사 역할을 톡톡히 열심히 해댔습니다. 가장 악랄한 왕이에요. 가장 악랄한 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므낫세 왕을 앗수르 쳐들어오게 해서 잡혀가게 만들었어요. 잡혀갔는데 역대하 33장 13절에 보면 이 므낫세 왕이 잡혀서 옥에 갇혔는데 회개를 합니다. 회개를 해요. 회개해서 안 죽고 살아와서 옛날에 자기가 우상 섬기던 제단을 자기 손으로 다 철폐하고 여호와 제단으로 다 바꿔놓습니다.

그런데 그 왕의 아들이 나중에 왕이 되는데 아몬이에요. 아몬 왕은 아버지가 회개한 것을 알면서도 그는 아버지 못지않게 아버지와 같은 우상 섬기는 죄를 범했다고 되어 있어요.

여러분, 두 가지 이상한 점이 있죠. 아버지 히스기야가 그렇게 선했으면 애들이 교육을 잘 받았을 거 아니겠어요? 잠언서 22장에 보면 이런 말씀 나와요. 6절에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되어 있죠. 그러면 아버지가 자식한테 어릴 때부터 밥상머리에서 얼마나 말씀을 가르쳤겠습니까?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물론 이런 실험은 아직까지 진행 중입니다. 아직 안 늙었으니까.

히스기야가 이걸 했을 거 아닙니까. 그런데 왜 므낫세는? 그리고 므낫세가 회개했음에도 아들 아몬은 왜 아버지를 본받지 않죠? 자기도 회개할 줄 모르고 무엇이 옳은가 나쁜가도 모르고 나쁜 길을 왜 갑니까?

열왕기하 23장 24절에 보면 요시야 왕 때에 므낫세가 세웠던 산당이라든지 우상 숭배하는 것을 전부 다 철폐합니다. 므낫세가 와서 해봤자 얼마 못 살고 죽었기 때문에. 아몬이 또 그만큼 아버지 본받아서 전부다 우상을 섬겨놨기 때문에 그다음 요시야 왕이 우상을 다 제했어요. 그렇게 철저하게 소위 말하는 개혁이라는 것을 했죠.

열왕기하 23장 25절에 보면 요시야 왕처럼 이렇게 바르게 한 것은 전무후무 이런 왕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유다 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그대로 추진하는데 이유가 뭐냐? 므낫세가 저지른 죄가 너무 심했다는 거예요(26절). 너무 악해서 이 유다 나라는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한번 양적으로 생각해보겠습니다. 므낫세의 회개가 효과 없다고 한다면 회개를 어떻게 해야 다시 전화위복이 될 수 있는 그만한 힘이 발현되는 회개가 될 수 있는가? 그러면 므낫세가 회개를 건성으로 했는가? 건성으로 한 게 아니에요. 진심입니다. 진심으로 한 거예요. 진심으로 했는데 그 지은 죄를 원상회복시킬 만큼의 진정성은 못 됐다는 이야기거든요. 그럼 회복시킬 만큼 회개하면 되잖아. 그게 안 되는 거예요.

왜 그렇죠? 철벽입니다. 철벽. 그러니까 택한 백성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선택했다고 일방적으로 말씀하시고 난 뒤에 그 선택됨을 지키는 과정 속에서 어느 인간도 선택을 지킬 만한 그러한 시도의 효과가 인간에게는 나올 수 없다,를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증명해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책이 두꺼운 거예요, 이게.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실험을 다 해보는 거예요. 시도는 다 해보게 하는 거예요. 심지어 회개도 해보는 거예요. 회개. 반성, 회개 다 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유다 나라를 원상복귀 시키지 못합니다.

심지어 아까 잠언서 22장 6절처럼 ‘네가 자식에게 어릴 때부터 가르치면 늙어서는 그 마음을 돌이켜 돌아올 것이다.’ 그 말씀도 실패에요. 아니, 말씀이 실패하지는 않을 거예요. 말씀은 실패 없어요. 그런데 그 말씀을 받은 자는 애초부터 말씀과 화합하지 못하는 그러한 자기 모습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그러니까 선택을 인간이 가두어둔다든지 소유한다든지 간직할 수 있는 재주는 인간에겐 없습니다. 인간에겐 없어요. 선택한 자는 천국 보내는데 그 선택을 일평생 내내 유지할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처음에 선택 이야기 들을 때 굉장히 명료하고 간단했죠. 그런데 복잡하게 된 것이 누가 복잡하게 만들었느냐 하면, 우리 자신에게 선택이 되니까 이제 이 선택에 대해서 내 내부에 나의 선택을 위한 자경단, 스스로 자기 고을을 지키는 불법적인 단체가 이미 조직되기 시작한 거예요. ‘내 구원을 내가 지켜야지’ 또는 ‘내 믿음을 내가 지켜야지’ 이게 자경단이에요. 안됩니다. 이건 실패한 거예요.

그러면 선택은 철벽이라는 말이 다시 한번 확인된 거죠. 아, 선택은 철벽이구나. 여기서 선택은 인간이 간직하지도 못하고 인간이 선택의 이유를 자기에게서 뽑아내지 못하는 이유가 아까 잠깐 나왔는데 그 점을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자기 수치를 모르는 자=인간(人間)’. 자기 수치를 모르는 자가 인간이라는 하나님의 관점이 선택과 더불어서 주어집니다. 선택과 더불어서 자신의 수치, 지저분함, 더러움, 자기의 죄악 됨, 이것을 모르는 자에게 선택이 안겨지고 주어져요.

좀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겠습니다만 될 수 있는 대로 안 지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여호수아 5장 7-9절에 보면 거기에 할례를 행하고 난 뒤에 여호수아가 한 말이 있습니다. 여호수아 5장 7절, “그들의 대를 잇게 하신 이 자손에게 여호수아가 할례를 행하였으니 길에서는 그들에게 할례를 행치 못하였으므로 할례 없는 자가 되었음이었더라”라고 되어 있어요. 그래서 8절에서 할례를 행합니다. 9절,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이 말은 이스라엘 되기 전 히브리인들 중에 애굽 나라 살면서 내가 산다는 것이 수치스럽다고 느낀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이에요. 내가 이 땅에 태어나서 생일에 태어나서 이 땅에 사는 것 자체가 위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참 더러워서 못 보겠다는 주님의 심정을 아는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없어요. 자기 안에 자경단 있거든요. 나는 정당하다.

나의 선택은 정당하다. 인간이 태어나서 살아가면서 매 순간마다 선택해요. 선택할 때 어떤 선택을 하느냐? 이성적 선택, 감성적 선택. 감성적 선택을 기분 내키는 대로 기분 따라서 선택한다 하죠. 기분 따라서 선택하는 거예요. 기분 따라 안 사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선택은 하나님의 요지부동 일관성이에요. 그런데 선택을 받은 인간은 변화무쌍해요. 기분 따라 살아가요.

부부끼리 말싸움하다가 갑자기 기분 좋은 소식이 들려오면 언제 부부 싸움했나 싶을 정도로 확 달라지죠. 할아버지 할머니가 막 싸우고 있는데 갑자기 손녀가 들어와서 “할아버지, 오늘도 수학 백점 맞았어!”하면 “당신, 우리 싸우는 거 잠시 휴전하고 이 기쁨에 동참하자.”하죠. 부부 싸움하던 것은 날아가 버리고 손자 재롱떠는 데에 다 빠져버리죠.

인간이라 하는 것은 늘 새로운 기쁨 오기를 고대하면서 이렇게 감정적으로 살아가요. 기분이 밑바닥에 있고 그 기분을 조정한다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계산을 하는 게 이성적이에요. 인간의 선택 바닥에는 감정, 위에는 이성적 판단, 합쳐서 나의 선택. 나의 선택은 뭐하다? 정당하다. 나의 선택은 정당하다.

이것이 불신자들의 선택 개념이거든요. 자기 선택이 우선인 거예요. 여기에 대해서 성경말씀이 이야기하는 것은 굉장히 간단해요. 성경말씀은 굉장히 간단하게 이야기합니다. ‘말씀 없으면 죽는다.’ 다른 말로 하면 ‘너의 생명은 말씀 안에만 있다.’ 그럼 말씀 밖은 뭐라는 말입니까? ‘말씀 밖에는 죽은 상태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택이 올 때는 무엇과 동반하느냐? 말씀과 동반하죠. 말씀과 동반해요. 말씀과 동반하기 때문에 말씀과 동반함으로써 말씀 밖은 죽은 상태잖아요, 그러니 말씀이 오는 순간 말씀에서 조명들이 촥 비춘다고 봅시다. 드라마나 영화 보면 밤중에 아프가니스탄이나 미군들이 작전 벌일 때, 헬리콥터가 그냥 내립니까? 헬리콥터 밑바닥에 조명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조명을 촥 비추죠. 앞에 탈레반들, 테러 집단들 다 비추는 거예요. 보고 폭탄 때리면 되죠.

말씀의 헬리콥터가 오면서 밑에 말씀의 조명을 쫙 비춰버리면 모조리 전부다 죽은 자들이 꾸물꾸물 대고 있어요. 죽은 자들이. 말씀 밖에는 죽은 상태니까. 아까 나눠줬던 그림 있죠. 그림 한번 봅시다. 이 그림이 이때를 위함이죠. 자, 묻습니다. 이거 물어야 돼요. 이 그림에 보면 여기 사람들 사이에 해골이 있습니까, 해골 사이에 사람 있습니까?

이 그림을 그린 취지는 해골 사이에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마다 긴긴 옷을 입고 있어요. 옷은 평생 자기가 고생해서 이뤄놓은 업적을 신분으로 표현한 거예요. 그게 옷입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옷 입고 있죠. 어떤 기사는 아예 무기 들고 있잖아요.

그러나 그들이 죽음과 죽음 사이에 끼어들면, 누구하고 손잡았어요? 여기 산 사람하고 안 잡죠? 중간에 누가 낍니까? 해골을 끼고 해골과 손을 잡죠. 그러니까 산 사람이 어떤 옷을 입었든 간에 그들은 출발을 해골부터 해서 해골로 끝나는 일시적인 귀족이고 왕들이고 교황들이고 상인들이고 군사들입니다.

티벳 불교에, 라사가 티벳의 수도거든요, 티벳 불교의 총본산인 그곳에서 축제를 벌이면 오체투지(五體投地, 머리, 두 팔, 두 다리를 땅에 대고 하는 절)를 하는 거예요. 오체투지를 하면서 ‘옴 마니 반메 훔’이라는 주문을 외워요. 그게 동아시아 쪽, 중국, 한국, 일본 쪽으로 오면 ‘나무 아미타불’이에요. ‘미래의 부처에 대해 내가 귀의합니다’ 이걸 티벳 불교에서는 자비의 연꽃이라는 뜻으로 ‘나한테 자비를 베푸소서’라 해서 오체투지를 해요. 신체의 다섯 부분을 땅에 대서 엎드려 절하고 약간 걷다가 또 엎드려 절하는 거예요.

티벳 불교에서 그렇게 할 때 ‘그거 하고 난 뒤에 어떻게 갑니까?’ 물었어요. 기자가, 당신이 부처 만났으니까 집에 갈 때는 어떻게 갑니까? 다시 걸어간다는 거예요. 왜? 그 불교의 특징이 뭐냐 하면 출발점과 도착 지점이 동일합니다. 내가 오체투지를 하는 이유는 나만의 구원이 아니라 모든 인간, 중생들을 위해서 생명들이 복 받기 위해 내 한 몸 희생해서 그렇게 한다는 거예요. 이게 티벳 불교의 본질입니다.

그 선택 누가 했어요? 자기가 선택했죠. 신의 계시 아닙니다. 왜? 신의 계시는 철벽이거든요. 철두철미한 철벽이에요. 아무도 몰라요. 왜? 택한 자는 누구밖에 없기 때문에? 예수님밖에 없기 때문에. 철벽입니다. 낯선 거예요. 그 선택이 왔을 때 우리는 뭐냐? 제가 지옥 갈 사람이라는 것을 이제사 알았습니다. 10분 쉽시다.


광주강의20250523b 로마서 11장 25절(수치와 선택)-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으로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선택이 정리될 수 있는데 사실은 그 내부에 자신의 기분을 감추는 용도가 될 수 있어요. 들쑥날쑥한 감정을 신학이라는 합리성으로 억지로 억누를 때에 그런 일을 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미 해왔던 거예요. 꾸준하게.

아까 이 해골그림에 대해 정리한다면, 인간이 산다는 것은 죽음과 죽음 사이에요. 시작도 죽음이고 끝도 죽음이에요. 하나님의 선택은 새삼스럽게 이 세상은 지옥이고 죽음의 세상이라는 것을 알리면서 오는 거예요. 새삼스럽게. 세상은 죽었는데 거기서 윤회? 내가 산다 그런 것은 성경에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말씀 안에 있거든 더는 욕심내지 말라는 거예요. 왜? 말씀 안이 곧 생명 안이기 때문에. 말씀 밖에는 생명이 없어요. 죽은 목숨이죠. 그런데 말씀 안은 그냥 생명입니다. 복 받기로 선택되었기 때문에 그래요. 세상을 볼 때에 바로 하나님의 안목으로 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성령 받은 거죠.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사람들은 우리들보고 뭐라고 합니까? 미쳤다고 하죠. 미쳤다. 가족들은, 네가 어쩌다 이렇게 망가졌냐고 이야기할 거예요. 그럴 때는 여러분들이 이렇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일방적 선택에 대해서 세상이 모욕적인 언사를 줄 때는 이렇게 답변하면 됩니다. ‘나의 죄는 성령 받은 것뿐이다.’

이 말은 일방적 선택에 모욕하는 언사에 대해서 이성적으로 감정적으로 동의한다는 거예요. ‘너희들 무슨 말하는지 내가 모르는 게 아니고 알아. 내가 성령 안 받았으면 너와 똑같이 나도 욕했을 거야.’ 그 사람이 누굽니까? 사도 바울 아닙니까. 얼마나 열심 냈습니까? 주님 안 만났을 때 성령 안 받았을 때 얼마나 열심 내서 예수 믿는 사람 핍박했습니까.

사도 바울이 성령 받기 전까지는, 어떻게 하나님이 하는 일을 하나님이 엎을 수가 있느냐?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 받고 난 뒤에는 하나님이 엎은 게 아니고 그때 우리가 말씀에 대해서 우리 자신이 수치스럽다는 것을 몰랐을 때 그런 잘못된 이해가 나왔다는 거예요. 잘못된 이해가.

자기가 멀쩡하다고 생각한 겁니다. 멀쩡하다고 생각한 이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더러워서 못 보는 거예요. 수치스럽고 더럽고 추잡해서. 그 점에 대해서 이미 선지자가 많이 이야기를 했었어요. 시간 가더라도 제가 찾아 읽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성경만 들추면 됩니다.

이사야 1장 29절, “너희가 너희의 기뻐하던 상수리 나무로 인하여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요 너희가 너희의 택한 동산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할 것이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3장 24절, “그때에 썩은 냄새가 향을 대신하고 노끈이 띠를 대신하고 대머리가 숱한 머리털을 대신하고 굵은 베옷이 화려한 옷을 대신하고 자자한(아주 세미하게 상처받은) 흔적이 고운 얼굴을 대신할 것이며”

이 말은 뭐냐? 향 그리고 머리숱이 많은 머리, 화려한 옷, 고운 얼굴 이걸 인간들은 추구했죠. 이게 바로 이 그림에 나오는 화려한 옷이잖아요. 그 사람은 지금 해골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누가 해골을 사랑합니까? 아무도 사랑 안하죠. 그런데 그런 해골, 곧 수치스러움과 수치스러움 사이에 자기가 끼어있어서 결국은 수치로 태어나서 수치로 끝난다는 것은 본질 자체가 수치로 그동안 자기 내부에서 계속 작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거예요.

이걸 몰랐던 겁니다. 그냥 늙어 죽는다고 생각했지 더러워서 죽는다는 생각을 못한 거예요. 추잡하고 더러워서. 그걸 새삼스럽게 이사야 예언을 통해서 그 당시 이스라엘의 본모습을 이렇게 예언자가 보여주는 거예요. 나중에 그 이사야 어떻게 됐겠어요? 순교 당했죠 뭐. 그때 이사야의 잘못은 뭐냐? 자기가 성신 받은 게 잘못이죠.

이사야 30장 3절, “그러므로 바로의 세력이 너희의 수치가 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함이 너희의 수욕이 될 것이라” 여기서 이야기할 게 좀 있죠. 처음에 이스라엘은 어느 나라에 살았어요? 애굽에 살았죠. 애굽에 살면서 그들은 애굽에서 벗어났다, 구원받았다, 탈출했다, 이제는 애굽과 바이바이라고 생각했죠. 그러나 자기 내부에 애굽이 있었던 겁니다.

할례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몰랐던 거예요. 아까 여호수아할 때 여호수아가 뭐라고 합니까? 할례하고 난 뒤에 무엇의 수치가 떨어져나갔다? 애굽의 수치가 떨어져나갔다는 거예요. 애굽의 수치. 할례행할 때 애굽의 부끄러움이 떨어져나가는 징표로서 할례를 행했던 겁니다.

그런데 로마서 2장 29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네가 육신의 할례를 행한 것은 맞는데 마음의 할례를 안했으니까 여전히 수치스럽기는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야, 이거 육신의 할례 행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구나. 그럼 마음의 할례를 행해야 되는데 마음의 할례를 어떻게 행하지?’ 또 걱정이 늘어지겠죠.

그게 골로새서에 나옵니다. 2장 11절,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 이건 내가 나한테 할례를 행사하지 않고 외부에서 일방적으로 나한테 할례를 행했는데 그걸 누가 했다? 내가 한 게 아니고 내가 한 적 없고 내가 손댄 적 없는데 예수님이 친히 나한테 할례 행하는 일을 하셨다. 이게 바로 성령의 오심이죠. 이것이 그리스도의 할례에요.

그리스도의 할례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수치 당할 필요도 없는데 수치스럽게 오셨던 이유가 예수님께서 선택받은 것은 자기 백성의 죄를 지고 수치를 당했거든요. 자기 백성의 죄를 지고. 여기서 이제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게 등장하는데요. 죄를 짊어지도록 선택된 분이 예수님이잖아요. 따라서 주님의 수치가 벗겨지는 그 순간,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영광스럽게 된 순간, 우리의 수치도 벗겨지는 순간입니다.

양자 얽힘이죠. 저쪽에서 일어난 일이 동시에 이쪽에서, 같이 연결되어 있으니까 저쪽의 일이 이쪽 일로 징후가 되어버린 거예요. 하나의 증인, 옛날 말로 증좌(證左)가 되어버린 거예요. 증거가. 왜 저한테 성령 주십니까? 주님이 수치를 벗었거든. 따라서 너도 수치를 벗는 거야. 동시성. 다른 공간이지만 동시성이 일어나는 거예요.

결국 지금까지 한 것을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찾아오신 이유가 거룩과 관련해서 우리의 수치스러움을 없애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주님께서.

감정적이고 이성적으로 수치를 벗기려고 애쓴 독일의 문학가가 있습니다. 헤르만 헤세(Hermann Karl Hesse, 1877-1962), 노벨 문학상을 받았어요(<유리알 유희>로 1946년 수상). 헤르만 헤세가 쓴 <데미안>, 청소년 때 한 번씩은 맛보기로 내용을 본 기억이 나요.

그 내용에 보면 껍질을 벗겨요. ‘자기가 속해있는 세계의 껍질을 벗겨서 그동안 나를 압도하고 나를 통제하고 지배한 데서 벗어나지 아니하면 어른이 될 수 없다. 진정한 나의 구원이 될 수 없다.’ 그 주제였잖아요. 헤르만 헤세가 불교 쪽에 가까운 사람이거든요.

불교사상에 심취한 사람인데 이 불교 쪽이나 헤르만 헤세가 모르는 게 있어요. 인간이 쓴 가면은 벗겨지지 않습니다. 벗겨지지 않아요. 구원은 내 내부에서 이루어져야 되지, 가면 벗는다고 해서 구원이 되는 게 아니에요. 인간은 어떤 노력을 해도 가면을 쓸 수는 있지만 쓴 가면은 내 몸과 하나가 되어가지고 아무리 애써도 나의 가면은 벗겨지지 않습니다.

인간은 고쳐 쓸 물건이 아니에요. 이 죄악성, 추잡성은 죽을 때까지 계속 갑니다. 계속 가야지 범사에 감사하죠. 그렇지 않습니까? 어느 날 내가 구원받았다고 헤헤거리면 그건 감사가 안 나오잖아요. 그건 인간승리죠. 감사가 아니잖아요. 감사라는 것은 내가 어떤 노력을 한다 할지라도 이 더럽고 추잡한 악마의 탈, 탈이 아니고 악마 그 자체에요, 악마의 탈, 그리고 아담의 죄에서 어떤 노력을 해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함에서 오는 감격과 기쁨, 이게 성도고요.

불신자는 벗길 수 없는 것을 벗기려고 아주 애를 쓰고 악을 쓰는 그게 불신자의 모습이죠. 예를 들면 난 교회는 평생 안 나가도 늙으신 부모는 끝까지 내가 맏이로서 책임졌다 이런 거 있잖아요. 아이고, 장하다 그래. 아이고, 장하다. 그게 뭡니까? 정당성. 내가 한 나의 선택의 정당성. 자기 의죠.

그다음에 이사야 44장 9절,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 그들의 기뻐하는 우상은 무익한 것이어늘 그것의 증인들은 보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니 그러므로 수치를 당하리라” 11절에, “보라 그 동류가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그 장색들은 사람이라 그들이 다 모여 서서 두려워하며 함께 수치를 당할 것이니라”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우상을 만들 때 하나님이 우상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처음에 우상을 누가 만들었냐를 따지는 거예요. “우상 누가 만들었지?” “우리 대장장이가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거 가지고 와. 우상 불탈 때 함께 수치를 당할 거야.” 함께 수치를 당하는 거예요.

우상을 만들었다 하는 것은 인간이 인간하고 대화했고 상대했다는 겁니다. 이걸 한번 적어보면 ‘인간이 인간을 상대하면 거기에 마귀도 한몫 끼어든다.’ 보이는 인간과 보이는 인간이 상대하고 대화하면 거기에 보이지 않는 마귀가 끼어들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인간과 인간이 상대하면 여기에 합리성, 이성적 감정 완화 또는 감정을 내놓고 감정에 대한 조정단계, 너 양보할 거 양보하고 나도 양보할게, 이런 식으로 조정하는 거예요. 인간이 인간을 상대하는 이유가 거기 있어요.

인간과 인간이 상대할 때 지혜가 어디서 나왔어요? 인간에게 나왔죠. 인간에게 나왔다는 말은 거기에 악마도 낀 거죠. 인간이 내뱉은 모든 말은 마귀 말을 인간이 대신해서 스피커 노릇을 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이걸 달리 하면 ‘말씀에 관심두지 아니하면 악마가 개입하는 장소가 된다.’ 말씀에 관심두지 아니하면.

아까 말했듯이 말씀 안에는 생명이 있고 말씀 밖에는 뭐가 있습니까? 죽음이 있죠. 이걸 성경에서는 계속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면서 더럽다, 수치스럽다, 우상을 섬겼으니까 너는 수치스러우니까 더러우니까 더러움에 대해서 저주다, 하나님의 심판이다, 하나님의 분노가 주어졌다 하고 계속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다음에 이사야 61장 6-7절,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얻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열방의 재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며” 여기 보면 “너희가 수치 대신에 배나 얻으며 능욕 대신에 분깃을 인하여 즐거워할 것이라” 되어 있죠.

이 부분을 다니엘 12장 2절로 설명하면 설명이 잘 돼요.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수치)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되어 있죠. 그러니까 여기 수치스러움의 반대 상황이 뭡니까? 영생이에요. 그러면 영생 못 받는다는 말의 반대말이 뭡니까? ‘영원히 수치를 당한다’입니다. 수치를 당한다.

한때 귀족이었고 한때 왕이었고 황제였고 한때는 교황이었고, 그림에 교황도 있어요, 한때는 훌륭한 기사고 뭐 이런 사람이라지만 얼마 안 가서 해골로서 수치를 당하게 되는 거예요. 인간이 태어난 것은 수치를 영원히 당하기 위해서 예비단계를 거치고 있는 중인 거예요.

아까 인간을 상대하면 마귀가 끼어든다 했죠. 이걸 더 간추려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합치게 되면 ‘말씀하고 상대하면 살고 사람하고 상대하면 죽는다.’ 꺼진 불도 다시 보자. 오늘의 표어입니다. 말씀하고 상대하면 살고 사람하고 상대하면 죽는다.

죽는데 그 죽는 모습이 뭐냐? 앞에 ‘왕’자를 붙여서 왕짜증, 분노, 실망, 화. 화나 실망이나 분노나 같은 거죠. 경상도말로 ‘죽여뿌까’ 이런 거요. 서울말로 하면 ‘미워 죽겠어’ 이런 거. 왜 이렇게 불안과 초조와 공포가 있습니까? 대상이 있는 건 공포고 대상이 없는 건 불안이거든요. 그냥 두려워하는 불안은 대상이 없어요.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까? 왜 정신과 약 먹고 이러죠? 지금 누구하고 상대하기 때문에? 사람하고 상대했기 때문에 그렇죠. 자식이든지 남편이든지 아내든지. 그런데 이 말은 뭡니까? 더 정확히 말해서, 누구하고 상대 안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말씀하고 상대 안했기 때문에 그래요. 말씀하고.

말씀하고 상대 안하고 이런 결과가 나오니까, 미워 죽겠어. ‘미워 죽겠어’를 크게 써보면 ‘남 탓’. 남 탓이에요. 남 탓하는 거예요. 언제까지? 평생을 남 탓해요. 이 미워 죽겠어, 짜증, 분노, 남 탓의 반대말이 뭐냐 하면, 벌써 이야기했어요, 첫째 시간에, 뭡니까? 범사에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것. 모든 일에 대해서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짜증, 분노, 화내는 이런 사람 되지 말아야 됩니까? 아니죠. 사람하고 상대해야 돼요. 그래서 성도는 지옥에서 살아야 됩니다. 지옥에 살지 아니하면 복음이 안 나와요. 죄와 살지 않으면 등불이 있다는 걸 몰라요. 이건 성령 받은 사람에게 해당되는 겁니다.

세상 살면서, 등불이 뭐에요? 십자가 피가 뭐에요? 모르는 사람 있어요. 성령이 뭐에요? 모르는 사람 있어요. 그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지금 무조건 뭘 끄집어내요? 감사와 고마움을 끄집어내야 돼요. 이게 주께서 원하는 거잖아요. 주께서 기뻐하는 것은 뭐냐? 주님에 대해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거예요.

감사하고 고마워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어떤 상황에 집어넣습니까? 사람하고 상대하는 상황을 매일같이 겪게 하는 겁니다. 청소는 안하고 맨날 거짓말한다, 아까 이야기했죠? 지옥입니다. 그래서 대신 청소한다고 땀 뻘뻘 흘리며 다 청소해주고. 그거 하면서 얼마나 하나님께 원망할 수밖에 없겠어요? 참 원망하죠.

자, 지금까지 제가 쭉 이야기한 것은 바로 ‘저주받은 자들이 어떻게 선택을 생각하고 있느냐?’하는 거예요. 저주받은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의 선택 이전에 내가 결정하는 내 이성적 결정, 기분에 따라 결정하는 내 선택이 턱하니 자리 잡고 있죠. 이게 자경단을 구성하죠.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서 어떻게 합니까? 내 선택과 하나님의 선택을 모순되지 않게 이어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 짓을 한 자가 누구죠? 그 짓을 한 자가 바로 유대나라요 이스라엘이었습니다. 로마서 11장 보겠습니다. 11장 12절,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었다. 11장 4-5절,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어려운 이야기를 시작해야 돼요. 아까 므낫세 왕 이야기했죠. 므낫세 왕이 회개했는데 그게 결국 옆으로 엎어진 북한의 구축함을 바로 일으키지 못하듯이 옆으로 엎어 자빠진 유다나라를 다시 일으킬 수가 없었어요. 왜? 회개했는데?

오늘날 성도가 회개했다 하잖아요. 회개했다. ‘오늘날 성도가 회개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구원받았습니다.’ 그럼 이 말이 틀렸느냐? 이게 구약의 회개하고 신약의 회개가 달라요. 구약의 회개는 어디까지나 대상이 뭐냐? 어떤 효과를 내야 되는데 그 효과가 이스라엘의 정상화, 유다나라가 다시 정상상태로 올라가는 것이 회개의 목표가 되는 거예요.

그게 사사기에 보면 나오죠. 사사기에 사람들이 우상 섬기다가 하나님 앞에 된통 당하죠. 그래서 성신 받은 사사가 구원해주니까 그때 백성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이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는 줄 알겠구나, 해서 잠시나마, 얼마 가지도 않았어요, 잠시나마 제대로 하나님 위해 살았죠. 그렇죠?

열왕기상, 열왕기하, 역대상, 역대하에 보세요. 똑같이 왕이 잘못해서 회개하고 제대로 하니까 얼마동안은 나라가 정상적으로 가동되었잖아요. 그게 구약의 역사죠. 구약 역사. 그런데 구약 역사의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회개를 할 때 회개 목적이 어찌하든지 내가 살아남아야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회개를 한 거예요.

요즘 교회에서 뭐 부흥회 때 회개하고 반성하라 하잖아요. 그 부흥사가 ‘회개하고 반성하세요.’ 그다음 뒤에 ‘그러면’ 뭐가 나와요? ‘회개하고 반성하세요. 그러면 주께서 지금 여러분들을 하늘로 데려갑니다.’ 이렇게 나오던가요? ‘여러분, 앞당겨 죽을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나오던가요, 부흥사가? ‘여러분 회개하시면 오늘밤이라도 주께서 데려가주십니다. 기쁘지 않습니까?’ 이렇게 나오던가요? 아니죠.

‘회개하게 되면, 보이스 피싱한테 걸려서 돈 날린 거 다 갚아주고 집 나간 아내 돌아오고 자식 성적이 오르고 치매 걸려서 어쩔 줄 모르던 부모님이 제정신으로 돌아오고 그래서 온 가족이 나처럼 회개해서 전부다 한 가족으로 다 같이 예수 믿어서 신앙인의 가정이 되었다.’ 이걸 경품으로 걸어놨어요.

1등상은 온 가족이 천국 가는 거, 7등상은 뭐냐 하면 지난날에 사업하다 망해서 날렸던 3억 보상받기 이런 거. 3억 보상받아서 다시 내 가게 찾는 거 그게 7등상이에요. 그거 쭉 경품 걸어놓으면 사람이 자기가 골라잡아서 지금 내가 공무원 취직해서 살만하다 싶으면 7등은 제키는 거예요, 이제. 7등에서 5등, 4등까지 가는 거예요. 우리 애가 공부 잘해서 서울대학 간다 이런 거 있잖아요. 그쪽으로 막 바로 가죠. 밥 못 먹고 사는 거 아니니까. 그러니까 보고 회개의 강도를 정하는 거예요. 오늘 2시간 기도할까, 3시간 기도할까를 보고 하는 거죠.

결국 그 마지막은 뭡니까? 그래서 어쨌단 말입니까? 그래서 나는 잘먹고 잘산다는 거예요. 행복. 행복은 1순위가 건강해야 돼요. 건강하지 않으면 모든 걸 잃는다고 식품 공장이나 회사에서 많이 이야기하잖아요. 그다음에 2.가정화목, 3.여유 있는 재산. 행복은 뭐냐? 4.구원보장, 이게 4순위쯤 돼요.

가정화목이라 하는 것은 자식들 각각 자기 갈 길 잘 풀리고 취직도 하고 결혼도 하고 그렇게 보고 싶다는 손자까지. 취직했다고 개만 있고 애 없으면 안 되잖아요. 손자손녀 까부는 것까지 보고 싶은 그런 거까지 다 되는 거, 이 조건을 이루었을 때 뭡니까? 이게 행복이죠. 이 행복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내가 살아있다’가 되죠.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이 행복은 누구 것이 된다? 살아있는 나의 것이 된다. 이걸 사람들은 복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 우상 섬긴다 해가지고 그거 부처 뭐하려고 섬기나 이러죠. 그거는 자신의 수치를 몰라서 그래요. 아무리 이론적으로 복음으로 무장하고 아무리 기본적으로 하나님 은혜 안다하지만 답답한 일 있으면 저절로 무릎 꿇고 두 손 모으게 되어 있어요.

이게 왜 그러느냐 하면 내가 예상한 모든 불운에 대해선 다 커버를 했어요. 보험 5개 넣어놨으니까 커버를 했는데, 무릎 꿇고 빌 때는 어떤 경우냐 하면 내가 선택한 이외의 상황이 벌어졌을 때, 내 선택사항에 포함되지 않는 상황이 벌어졌을 때 그때는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죠. 도움을 요청할 때 그 심보가 뭡니까? ‘여기서 끝내주세요. 내 인생 끝내주세요.’ 이거 하는 게 아니고 문제해결 해달라 하잖아요, 문제. 문제해결 해달라는 거죠.

50대인데 머리카락 빠진다. 50댄데 머리숱 빠진다고 주일 낮 예배, 공예배 때 기도로 ‘내 머리가 빠지니까 머리가 나게 해달라’ 이렇게 기도 솔직하게 하면 될 걸, 그걸 빙빙 돌려가지고 우회적으로 ‘주여, 저의 뜻 말고 아버지의 뜻만, 복음만 나타나게 하옵소서. 십자가만 믿게 하옵소서.’ 백날 해봐야 진짜 자기의 본심은 뭡니까? 아까  했잖아요. 걱정, 불안. 머리카락 빠지는 거죠.

자, 머리카락 빠지면 왜 안 됩니까? 공부 백날해도 소용없어요. 복습해야 돼요. 내 머리카락 빠지면 왜 안 됩니까? 왜 안돼요? 머리카락 빠지면 사람과 상대할 때 상대방의 죄를 짓게 만든다는 거예요. 왜? 머리 빠진 거 보고 상대방이 차마 머리 빠졌다 소릴 못하고 ‘애들은 잘 크죠?’ 이렇게 이야기해놓고 ‘아휴, 머리 빠졌다는 이야기를 할 걸.’ 자기 집에서 죄를 짓게 만든다고요. 상대방에게 죄를 짓게 하기 전에 주께서 머리카락부터 나게 하신다면 우리가 더 좋은 관계로 부담없이 “아, 건강하네요.” “건강하죠.” “어? 머리는?” “머리 안 빠지지. 이 나이에 왜 머리 빠져, 오십인데 뭐.” 이렇게 해야 되는데 내 쪽에서 머리 빠져서 상대방을 미안하게 만드는 죄를 짓게 하지 않기 위해서 머리 좀 나게 해달라.

이건 뭐냐? 모든 인간은 자기를 바라볼 때 타인의 평가를 전제로 해서 그 평가가 나의 평가가 된다는 거예요. 복습해봅시다. 사람하고 사람이 상대했죠. 누구하고 상대 안했어요? 말씀 상대 안했죠. 말씀은 안 봐요. 말씀 신경 쓸 시간이 어디 있어요. 드라마 봐야지. 폭싹 속았수다 그런 거 봐야지. 상대방하고 상대한다고 말씀 안 봤죠.

그런데 우리 안에 이미 들어있는 무조건적인 일방적인 축복, 무조건 천국행 성령이 있으면 성령이 어떻게 해요? 회개케 합니다. 회개. 회개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수치+희생물’이에요. 이게 신약의 회개에요. 신약의 회개=수치+희생물. 수치스럽다. 이유가 뭐냐? 내가 아직 살아있는 줄 착각해서. 내가 아직도 산 인간인 줄, 뒤에 생략된 말은 ‘착각해서’.

그림 또 보여줄게요. 누구하고 손잡아요? 내가 죽은 자의 부모로부터 태어나서 잠깐 살다가 죽은 부모가 가는 해골의 세계에 합류한다는 그 중간지점에 우리가 놓여 있잖아요. 어떤 사람은 가까이 간 사람도 있지만 아직 덜 가 계신 분도 있어요, 여기에. 거의 다 온 사람도 있어요.

어쨌든 간에 세상에 이 해골을 자랑질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 중간부분을 자랑하잖아요. 중간부분을 자랑하도록 누가 격려합니까? 똑같은 산 사람끼리 만나서 이렇게 마음정리가 되는 거예요. 나는 잘났다, 또는 나는 못났다. 이정도 하면 내가 남한테 욕 얻어먹지 않을 정도로 내가 착실하게 바르게 살았다는 거예요.

지난 강남강의에서 썼던 문장을 하나 쓰겠습니다. 그때 칠판에 이렇게 썼어요. ‘성실? 누구를 위한 성실인가?’ 누구를 위한 성실이겠어요? 누구를 위한 성실입니까? 나를 위한 성실이죠. 나를 위한 성실이에요. 굉장히 성실하게 살아요, 인생을. 평생. 틈만 나면 일하고 내가 보탬이 되는 존재, 가정에 보탬이 되고 자식들에게 보탬이 되고 보탬이 되어서 그 혜택을 입은 사람들로 하여금 ‘참 성실하고 제 값 다 하네. 사람이 존재값을 하고 당신이 당신 자리에서 당신 할 수 있는 역량과 당신의 존재가치를 다 빛내고 있습니다.’하는 그런 소리를 노리면서 그 소리 듣기를 원하면서 얼마나 그동안 여러분들이 성실하게 살아왔습니까?

그런데 끝에는 누구를 위한 성실입니까? 누구를 위해서 댕~ 종을 울려요? 헤밍웨이 본인도 몰라요, 누구를 위해서 종을 울리는지. 헤밍웨이 장편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스페인 내전에 관한 이야기죠. 누구를 위한 성실이었던가요? 나잖아요, 나. 나의 선택으로 직장 구했고 나의 선택으로 결혼했고 나의 선택으로… 모든 것에서 나의 선택이 끊어진 적이 없어요. 한 순간 순간 선택하기, 결정하기, 제대로 된 판단하기 그걸로 성실하게 왔는데 결국 뭡니까? 이 나의 본질은 해골이죠, 해골.

하나님이 이것을 수치스럽게 본다는 말은 나의 선택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분노하신다는 거예요. 화를 내고 계신 거예요. 이걸 바로 성령 받고 난 뒤에 알 수 있는 겁니다. 내 모든 선택은 하나님의 분노 가운데 있다. 아마 죽을 때까지 내가 선택하는데 여기에 대해서 주께서 화를 내시는구나. 그럼 이게 수치스러운 거죠.

플러스 뭐가 있어요? 플러스 이게 중요해요. ‘회개=수치+희생물’에서 플러스 누가 있어요? 희생물. 누구죠? 예수님의 십자가.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해서 이미 다 씻을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주님의 희생을 보여주기 위해서 수치스러운 우리에게 성령을 꽂아준 겁니다. 주님의 영이, 십자가의 능력이 꽂아준 거예요. 네 평생 하나님이 분노하는 이런 선택이 네 육신이 있는 한 멈추지 않는다는 겁니다.

로마서 11장에서 이스라엘을 선택했죠. 그 이스라엘의 선택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무너졌죠. 분명히 망가졌죠. 완전히 망가진 건 아니지만 남은 자는 있지만 어쨌든 무너졌잖아요. 그 이스라엘이 왜 무너졌습니까? 왜 무너졌죠, 이스라엘? 무너질 수밖에 없죠. 왜? 육신을 가지고 있으니까. 육신이 있는 인간은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거기에 이방인들, 초대받지 않은 자들이 초대되었죠. 그럼 이방인들은 안 무너집니까? 이방인도 무너지죠. 이스라엘도 무너지고 이방인도 무너졌다는 말은 사도 바울에 의하면 이방인들이 은혜를 입어서 무너진 장막을 세운다 이렇게 하죠. 무너진 자리에 들어옴으로써 누구로 하여금 자기의 본질을 발견케 합니까? 처음 선택받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우리가 하나님께 선택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을 알도록 유인책, 또는 자극제로 이방인들을 집어넣었다는 거예요.

그럼 그다음 이야기, 이스라엘 중 돌아온 자가 있다면 이번엔 누가 자극돼요? 우리 이방인들이 자극이 되어야 되겠죠. 시리아,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아프가니스탄 그들 속에 성령 받은 성도가 있다는 걸 아십니까? 99%가 히잡 쓰고 다니는 그 나라 속에 예수님 이름으로 예수님 말씀 붙들고 몰래 말씀 공부하는 그룹이 있어요. 그런다고 다른 나라, 기독교 나라 이민가고 그런 거 없어요. 그 나라 살면서. 북한에도 있다고 하는데 그건 난 안 믿고요. 그건 선교사들이 자기들한테 돈 내라는 소리로밖에 안 들리니까 믿고 싶지 않아요.

서기 576년 경 마호메트(무함마드)가 있는데 마호메트는 25살 때 40살 된 과부와 결혼합니다. 그때까지 마호메트는 배운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일찍 아버지 어머니 돌아가시고 친척이 마호메트를 키웠는데요. 키웠다는 말은 뭐냐 하면 무임금 일꾼으로 어린 마호메트를 부려먹었다는 말이에요. 친척이 뭐하는 사람이냐? 공사하는 사람이에요. 돌아다니면서 공사하는 사람인데 돈도 안 주고 밥만 먹여주면서 일 시킨 거예요. 다시 말해서 지극히 가난하게 살았어요.

그러다가 마흔 된 어느 과부 집 공사를 했는데 마호메트가 젊으니까 둘이 눈 맞아서 결혼했어요. 부자 과부에요. 그다음부터 마호메트가 일 합니까, 안합니까? 돈 많은데 뭐하러 일해요. 돈 많은데 일할 필요 없죠. 그런데 마호메트 동네가 어디냐 하면 메카라는 동네 근처였어요. 메카 근처가 고향이었어요.

아라비아 근처 종족이 360개 이상인데 각자의 신들이 있어요. 뱀 신, 돌 신, 해 신, 초승달 신 등등 신들 종족 회의에서 신들을 한 쪽에 모아가지고 메카에 우상들을 박물관처럼 모셔놓고 한 번씩 와서 우리 동네 우상, 우리 집안 우상 잘 있는가 돌아보는 그러한 종교행사들이 있었어요, 그 당시에. 온갖 360개 우상들을 다 모아놓은 거예요, 메카에. 보통 메카라는 말을 쓸 때 본부, 원조 이런 뜻이잖아요.

그런데 마호메트가 있는 동네의 신은 초승달 신이에요. 이슬람 깃발에 보면 초승달 있죠. 이슬람 쪽에서 적십자는 초승달 모습이 들어있죠. 마호메트가 할 일이 없으니까 ‘여러분, 저 뱀 신 그런 것 좀 섬기지 말고 나무 신 섬기지 말고 우리 조상 신 초승달 신 섬기라’ 그렇게 전도를 하는데 개종자가 안 나와요. 왜? 자료가 빈약해서 예, 예 해놓고 가버려요.

그런데 마호메트가 우연히 예수 믿는 유대인을 만났어요. 만나서 성경 전체 이야기를 듣게 되었어요. 나이 많은 노인 할아버지를 만나서 이야기를 듣게 되니까 마호메트는 아무것도 배운 게 없어서 말을 해도 말을 이어갈 수 없었는데 이 이야기를 듣고 자기가 나름대로 알게 된 구약성경을 가지고 자기 종족의 초승달 신하고 결합해서 그때부터 전도하니까 사람들이 구름떼같이 개종자가 몰려서 교주되었어요.

마호메트의 코란에 보면, 아브람에서 아브라함 되는 게 아니고 애초부터 아브라함이고 아브라함의 아들 이름이 이삭이어야 되는데 이스마엘로 되어 있어요. 전부다 바꾼 거예요. 우리 아라비아 종족의 정통성을 위해서 바꾼 거예요. 섞은 거예요. 그럼 천주교는 어떻습니까? 천주교는 태양신과 섞었어요. 상표 바꿔치는 포대갈이. 중국산을 포대 갈아서 한국산으로 바꾸듯이 그 당시 이미 익히 알고 있던 자신의 종교심에 부합되도록 성경의 모든 해석을 다 바꿔치기한 겁니다. 그게 바로 천주교입니다. 전부다 태양신, 미트라라는 태양신과 관련된 절기와 섞은 거죠.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잖아요. 애굽에서 나올 때 애굽의 전통을 버렸습니까? 아니죠. 여차하면 어디로 갑니까? 애굽으로 돌아가죠. 왜? 자기의 본성, 내가 복 받았다 하는 자기 내부의 수치성을 아무리 감추고 감춰도 자기 내부를 더 이상 감출 수 없는 거예요. 결국 어떤 계기가 되고 상황이 되면 자기 본성을 드러내게 되어 있어요.

아까 이야기했지만 데미안은 껍질을 벗는다 했죠. 어떤 인간도 자기 껍질을 벗을 수 없어요. 껍질을 벗을 수 있는 위인은 한 명도 없어요. 자기가 자기를 벗기면 아파요. 아픈 짓을 왜 합니까? 절대로 안 해요. 그래서 모든 인간은 우상숭배자며 자신의 선택을 신봉하는, 자신의 결정과 판단과 거기서 나오는 정당성을 신봉하는 마호메트, 종교인들이에요. 인간은.

따라서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 마태복음 제일 마지막에 있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그다음에 뭡니까? 다같이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리라.

‘너 구원받았으니 너 알아서 살아라. 너 잘 살 수 있어.’ 이런 거 없습니다. 세상 끝날까지 주님께서 한 번 들어온 성령께서 계속해서 함께 합니다. 뭘 분노하기 위해서? 나를 위한 성실함. 나를 위한 종교를 내가 만드는 것을 막지는 않아요. 만들게 해놓고 그것과 무엇과 만나게 합니까? 십자가 피와 만나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날이 가면 갈수록 십자가 피, 모든 말씀 안에 들어있는, 예수님 십자가로 향한다는 그 말씀의 내용이 십자가 피가 말씀 안에 들어있으니까 그건 성령께서 십자가 피가 들어있는, 주님의 선택이 들어있는, 아버지의 선택받은 아들이 들어있는 그 세상을 성령은 떠나지 않게 해주시죠.

수치스러운 모습이지만 그 세계, 하나님이 선택한 세계를 떠나지 않게 할 때 우리의 기쁨과 고마움과 감사는 뭡니까? 주께서 알아서 선택해주셨습니다, 하는 은혜에 고마워하는 거죠. 이것이 주께서도 원하시는 바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매일 우리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얼마나 우리가 지독하게 나 잘났고 나는 옳다는 것을 우기는지. 그런 성깔밖에 내놓을 수 없는 우리 자신인 것을 십자가 앞에서 그게 도리어 기쁨과 감사의 원리가 되고 바탕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