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사도행전

사도행전 3:21 / 2+0 / 250520

정인순 2025. 5. 21.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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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홍민희

강남-사도행전 3장 21절 (2+0) 250520a-이근호 목사



오늘은 사도행전 3장 17절에서 26절까지 하겠습니다. 내용에 보게 되면 성령께서 베드로를 통해서 이렇게 설교 하셨다고 보면 돼요. 설교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내용이 나와 있는데 여기 주인공이 누구냐 하면은 예수님이 주인공이고요, 하나님이 주인공이 아닌 이유는 배후에 계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예수님을 보냈다는 겁니다. 20절에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여기서 예수님에게 일어나는 일을 이야기하는데 여기에 그전에 선지자를 보냈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선지자가 이 땅에 출현했다는 말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하고 싶었던 그 마음에 대해서는 이미 확정되었지요. 하나님이 어떤 뜻을 갖고 있느냐. 마태복음 17장 5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나님 뜻 알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하나님이 누구신가 찾지 말라는 겁니다. 너희가 나를 찾아오지 말고 내가 내 뜻을 듬뿍 담은 분을 이 땅에 보낼게. 그러면 되잖아. 구태여 네가 높은 곳에 올 생각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보낼게. 보낼 때 꾸준히 선지자 보냈고 최종적으로 하나님 아들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베드로가 설교에 담아서 한 거예요.


그런데 그 예수님이 오실 때 예수님이 메시아인지 메시아가 아닌지 과연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 맞는지 안 맞는지 확정된 증거가 뭐냐? 그 증거가 18절에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 어떤 분이 되게 고생하신다. 고생을 되게 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확정적으로 보여주신 바로 그분이다. 자, 하나님의 뜻은 뭐냐? 내가 어떤 분을 보낼 텐데 그 분이 해 받게 되는 것, 고생되게 하고 죽게 되는 것 이 안에 아버지의 뜻이 모두 함축되어 있다. 함축되어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에게 누가 해를 끼쳤습니까? 예수님 당시에 있던 바리새인, 서기관, 장로들 그들에게만 해를 받았습니까? 아니면 모든 인간에게 해를 당했습니까? 겉으로 보면 주동자들이 있었지요. 그런데 그리스도가 해를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 사함을 받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해 받으심이라는 이 공식, 방정식 안에 이들이 들어와야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은 그리스도가 아니지요. 그리스도의 해 받으심. 그리스도께서 피해를 입으신다는 공식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라면 구원받게 될 사람들은 이 공식 안에 들어오게 돼요. 들어오게 되면 그리스도를 해코지한 자에서 본인이 제외되는 겁니까? 포함이 되는 겁니까? 이 공식 안에 들어올 때. 공식밖에 있을 때는 모르지만 공식 안에 있다면 그리스도 해 받으실 때 자기도 그리스도에게 해를 준 사람이 되요? 아니면 빠집니까? 어느 쪽입니까? 내가 어떻게 구원받는가 그건 문제가 아니고 공식 자체를 살리는 것이 하나님의 함축된 뜻인데 그러면 이 공식에 누가 딱 걸려들면 걸려든 사람은 구원을 받아요? 그리스도께서 어려움을 당했다는 말은 어려움을 준 자가 있을 거 아니겠습니까? 그 준 자의 구원받을 사람에 포함이 되느냐? 안 되느냐 이 이야기입니다. 침묵으로 일관하실 거예요? 이 공식 자체가 살려면 해 받으심이 살려면 해코지한 사람도 결합이 되어야 이 공식 자체가 빛이 나잖아요.


그러면 이미 강의 내용이 벌써 결정이 났습니다. 내가 구원받게 되면 나는 왜 도대체 그리스도에게 해악을 끼치는 존재로 여기에 개입이 되어 있느냐. 우리가 무슨 짓을 했기에 그리스도는 나로 인하여 해악을 당하시는 분이냐 오늘 공식으로 일관할 거예요. 내가 내린 내 평가 속에는 주님의 일이 내용으로 합류되지 않는다. 내가 평소에 남들에게 나 이런 사람입니다 또는 대인관계에서 우리는 뭐를 뺍니까. 주님의 일을 내용으로 넣지를 않아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남편이 저녁에 퇴근해가지고 남편이 오늘 아침에 설거지 누가 했어? 부부 사이 사는데 자기가 안 했으면 누가 했겠어요. 뻔한 거잖아요. 설거지 한 것 좀 봐. 밥풀이 묻어 있네. 이걸 어떻게 먹겠느냐 라고 남편이 했을 때 그 문장에 예수님이 포함되어있어요? 안 되어있어요? 포함이 안 되어있지요. 당신이 설거지 했고 그릇 포함되어있고 나는 따지는 사람이고 이렇게 구성되어있지요.


세상에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예수님의 일이 흔히 포함됩니까? 안됩니까? 포함이 안 되지요.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는요 네가 잘 했나 내가 잘 했나 그것만 우리 정리정돈하고 넘어가자 이것뿐이에요. 모든 자식과 부모, 아내와 남편 모든 스승과 제자 관계 만나는 모든 관계는 지금 이 상황에서 누가 정당하느냐 그게 이슈입니다. 누가 정당하냐. 내가 잘했어 네가 잘했어? 이런 거. 또는 내가 못했어 네가 못했어? 그게 전부예요. 어떤 말을 한다는 것은 네가 보기에 내가 정당한 거 맞지?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 말을 건네는 거예요. 만약에 아내가 남편한테 맨날 잔소리만 한다면 그다음부터 남편이 아내에게 말을 하겠어요 안하겠어요? 안합니다. 말해봤자 욕 얻어먹으니까 말을 안 하지요. 대화를 안 합니다. 욕 얻어먹을걸 왜 하겠어요. 그런데 언제 말을 하느냐 하면은 자기가 승진했을 때. 설마 이 말까지 끄집어냈는데 내 욕할까? 당신 잘했어. 칭찬하겠지. 자기의 평가가 좋게 날 경우에만 먼저 말을 던져요. “여보 나 이번에 부장되었어. 어때? 당신 남편 괜찮은 남편이지? 그렇지?” 그러면 평소에 잔소리만 하던 아내가 뭐라고 합니까? “좀 하네?! 오랜만에 남편 구실하네”


그러면 남편이 내게 줄 칭찬이 그것뿐이냐? 그렇게 씁쓸해하면서도 내심 기분이 괜찮아요. 왜? 비로소 나의 남편 됨을 아내로부터 인정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처음에 말을 끄집어낸 성과는 건진 거죠. 우리 어릴 때 초등학교 때 교장선생님이 훈화하는데 애들은 왜 안 듣습니까? 교장선생님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애들은 느낌상 자기 정당화로 일관된 거예요. 교장선생님이 대선 나오면 대통령될 것 같아요. 자기 자랑만 하니까. 왜 부모가 다 큰 자식들에게 훈화를 못합니까? 너 좀 앉아봐라 내가 오늘 할 말이 있다 이러면 자식들이 뭐를 짐작해요? 오늘도 엄마의 정당성이 어떻게 펼쳐질지 보자. 인간 대 인간의 대화는 자기 정당성을 재차 확인하기 위해서 말을 끄집어내요. 그럼 상대방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네 말만 하지 말고 내 말 좀 들어봐라 해가지고 저쪽 말 들어줬으니까 자기도 피곤하잖아요. 자기 기분도 쇄신되려면 자기도 칭찬 받아야 할 거 아닙니까. 주고 받는 거예요. 내가 나의 평가에서 주의 일이 포함되어 있습니까? 안 되어있습니까? 포함되어 있지 않죠. 이걸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거짓말’.


공식 하나 또 나갑니다. 인간이 제 정신으로 사니까 거짓말만 한다. 그러면 사도 요한 사도 베드로는 뭡니까? 미친 거죠. 오늘 사도행전 본문은 뭐냐? 한마디로 미쳤다. 그리고 사도 베드로가 전하는 예수님도 이 땅에 해를 받은 이유가 미쳤기 때문입니다. 귀신 들렸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정황은 예수님 돌아가시고 난 뒤에 지금까지 계속됩니다. 계속 돼요. 왜 성경공부 참석 안 했느냐? 제 정신으로 살려고 악착같이 버틸려고 하기 때문에. 미쳐버리는 것이 너무 큰 모험 같아서 망설이게 되죠. 왜 미치면 안 됩니까? 미쳐버리면 남들한테 내가 정당하다는 소리를 못 들어요. 성령 받은 사도 베드로 사도 요한은 이 세상에서 성령을 통해서 미쳤기 때문에 예수님도 미쳤고 사도도 미쳤어요. 미쳤기 때문에 마음에 평화가 왔어요. 제 정신은 아닌데 마음에 평화가 와요. 그게 어떤 원리냐 하면은 야고보서 1장에 나오는 원리입니다.


야고보서 1장 6절에서 8절 보면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세상에서도 정당하다는 소리 듣고 싶고 하나님에게도 정당하다는 소리 듣고 싶은데 문제는 그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보낸 예수님이 뭘 당했어요? 사람들에게 해코지를 당한, 이게 함축된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셔서 그냥 해를 받지 않고 그냥 갔으면 세상 사람들에게도 정당하다는 소리 듣고 하나님께도 정당하다는 소리 듣고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데 하나님의 함축된 뜻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모독을 받고 억울함을 당해서 분통터지는 일만 당하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거든요. 이미 하나님의 뜻이 확정된 거예요. 확정되었으니까 남한테 좋은 소리 듣고 싶고 하나님한테도 신앙인 되고 싶은 사람한테는 서로 상반되는 대립되는 두 가지 원리를 같은 내 마음에 담을 수가 없어요. 미치든지 멀쩡하든지 둘 중에 하나에요.


다른 말로 하면 계속 거짓말을 하든지 아니면 진실된 말을 하면서 자기 자신을 그 말씀 앞에 용해하든지. 용해라는 말은 녹는 거예요. 자기 자신에서 벗어나든지. 진실을 이야기해서 자기 자신에서 벗어나든지 아니면 거짓을 이야기해서 남들로부터 나 정상인 맞지? 라는 그런 좋은 평가를 받는 쪽으로 살아가든지 그 둘 중에 하나를 해야 하는데 둘 다 놓치기 싫어요. 그래서 안 미쳤는데 마음에 평화가 없어요. 자기 마음이 둘로 쪼개졌으니까. 예수님께서 사람에게 해를 받는 그것으로 하나님한테 주로 인정받았다면 인간은 육의 생각에서 떨어져 나옴으로서 한쪽을 포기해야 돼요. 그렇다면 이 세상일과는 상관없이 어디 안에 들어있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뜻 안에 이미 그 안에 들어온 사람이죠. 그래서 제가 방금 이야기한 이 점을 실감나게 이야기하기 위해서 육의 생각이 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육의 생각이라는 것은 남들 보기에 제 정신으로 사네. 정상적으로 사네. 이게 육의 생각인데 이 육의 생각의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여러분 들어보시면 저것이 육의 생각이구나 실감나게 아시게 될 거예요. 스페인 이야기입니다.


1998년도 스페인에 이민자 수가 1.6%였어요. 그런데 2022년도에 이민자 수가 19.8%입니다. 그들이 다 어디로 가는가. 마드리드, 바로셀로나 그런 대도시에 몰립니다. 거기에 일자리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면 그 원래 스페인 국민들은 이민자가 늘어나가지고 인구증가가 되었어요. 인구증가가 된 상태에서 가장 쉽게 돈을 벌수 있는 방법은 은행에서 값싼 금리로 대출을 받아서 부동산 투기를 하게 되면 쉽게 돈을 버는 거예요. 부동산은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그걸 진리로 여기는 거죠. 그리스도께서 해를 당했다 이게 진리가 아니고 부동산 사 놓으면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면 은행에 대출받아서 사가지고 한 채 두 채 세 채 네 채 계속 부동산을 사는 거예요. 처음에 산 것을 비싼 값에 팔아서 그 여분의 것으로 집을 사고 그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그럼 여기 집 지으려면 어떻게 하느냐? 국가에서는 외국의 투자자들이 스페인에 와가지고 돈이 여기서 많이 들어오게 되면 경제가 활성화되기 때문에 투자 금융 투자 건설투자에 대해서 스페인 정부가 개방을 했어요. 트럼프가 70억만 내면 시민권 준다는 제안을 검토 중이래요. 미국 시민권 70억 있으면 돼요. 이미 스페인에서 실시했어요. 포르투갈도 그렇게 하고 있어요. 돈을 내면 시민권 주니까 돈을 낸 사람들이 가만 있어요? 돈 낸 만큼 벌이를 수입을 창출하겠습니까? 수입을 창출하지요. 건설 투기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2007년도부터 2009년도까지 스페인이 스페인의 기적이라고 해가지고 돈을 많이 벌었어요. 그런데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투기한 게 빚이 되고 대출 금리 올라가고 전부 다 담보로 잡히고 이게 뭐냐? 부채 위에 성장한 거예요. 남의 돈 위에 성장을 한 거예요.


그러면 부동산이 팔리느냐? 안 팔려요. 그리고 스페인의 촌에는 빈집이 늘어나고 대도시에는 집 살 돈도 없고 그리고 젊은 사람들이 취직을 못해요. 너무 비싸서 살 집이 없어요. 방 하나에 월세가 120이니까. 그리고 그 많은 부동산 투기가 중국이라든지 다른 데서 와가지고 그 사람들이 전부 다 장사합니다. 특히 스페인 관광객들을 위한 임대주택을 해가지고 연금 받는 사람들은 연금으로도 못 살아요. 주택값이 너무 올라서. 중산층들은 집세 내기도 힘들고 젊은이들은 취직을 해도 살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청년들은 쫓겨나고 노인들은 연금으로 못살고 중산층들은 투잡 쓰리잡 파이브잡 그렇게 해야 살고 있다면 화목한 가정생활은 없지요.


그래서 원래 살던 사람이 자기 고향을 다 떠나서 촌으로 밀리고 도시는 외국에 있는 투자자들이 돈 많은 자들이 스페인의 대도시에 부유층을 차지하고 있어요. 그럴 때 일반 사람들은 성실하게 일 했어요. 성실. 누굴 위한 성실이죠? 열심히 살면 살 수 있다. 스페인은 열심히 해도 못 살아요. 계속 집값이 상승되니까. 있는 사람이 집 없는 사람 봐주면 되지 않겠는가. 스페인 본 국민이 집을 갖고 있는 사람이 40%밖에 안돼요. 좀 봐주면 되지 않느냐. 봐 주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요 스페인에 투자한 자기 본전 못 찾잖아요.


자기 이익이 먼저입니까? 타인의 이익이 먼저입니까? 누굴 위한 성실입니까? 없는 사람이 성실한 겁니까? 아니면 자기 만족을 위해서 성실한 거예요? 자기 만족을 위해 성실하지요. 이렇게 잘 사는 사람들 남들이 욕하겠습니까? 부러워하겠습니까? 부러워하지요. 부러워한다는 말은 우리가 원래 원했던 제정신으로 산다는 뜻이에요. 제정신으로 사는 거예요. 지금 방금 제가 이야기한 스페인 이야기가 무슨 뜻입니까? 이게 바로 우리의 뜻이에요. 우리의 뜻. 내가 노력한 만큼 더 많은 수익을 얻겠다는 것이 우리의 뜻이라고요. 그러니까 사도행전 3장에 베드로가 설교해봐야 먹히겠어요? 안 먹히겠어요? 안 먹히죠. 왜? 이유가 뭐냐? 세상 모두가 인간 대 인간 관계로 의미가 마감이 되었어요. 끝났습니다. ‘의미 마감’. 더는 의미 찾지 마세요. 모든 의미는 어디서 나온다고요? 인간 대 인간 관계에서 마감이 되었어요.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로 모든 의미가 마감이 되어버렸다고요.


첫째 아들 잘 살고 둘째 아들 잘 산다. 셋째 아들 집구석 기어들어왔다. 너 요새 뭐해? 놉니다. 나가라! 내 자식도 아니다. 니 형님 봐라. 월 50만원씩 따박 따박 자동이체 하잖아. 둘째 형 봐라. 30만원씩 주잖아. 나는 연금하고 그거 보태가지고 산다. 넌 뭐야? 나가 인간아. 니 형 공부할 때 너도 공부 좀 하지. 그런 어른에 대해서 누가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누가 돌을 던져요? 인간은 인간 대 인간으로 구성된 세계에서 인간은 떠나지 못합니다. 탈출 안됩니다. 못 벗어나요. 그런데 거기에다가 베드로와 요한이 지금 설교를 합니다. 사람들에게 먹힐까요? 안 먹힐까요? 이게 성경 말씀이 인간에게 먹힌다는 것 자체가 이게 미친 짓입니다. 이 세상에 안 먹히게 되어 있어요. 그래야 그리스도가 모든 인간한테 해를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이거든요. 특정인에게만 미움 받는 게 아니고 모든 인간에게 미움 받는 분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는 사람들의 세계에서 지금 베드로와 요한은 성령을 받고 그들을 향하여 예수님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다른 이야기 안해요. 하나님의 함축된 뜻은 예수님에게 다 모여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사도행전 3장에서 하고있는 거예요. 설교한다는 자체가 제정신 아니지요.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에 거짓말이 안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베드로 설교를 듣고 19절에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베드로 설교를 듣고 진짜 그런 일은 없는데 만약에 회개하고 돌이킨다면 그 사람은 이미 마음을 정한 사람이죠. 마음을 정했지요. 어떻게 정했습니까? 이제 미치자. 미치기로 정한 거예요. 미치지 않으면 악마에게서 못 벗어나요. 예수님의 존재 자체가 인간이 알고 있는 시간과 공간, 이걸 시공간이라고 합니다. 시공간에서 제거 되신 분이에요. 그래서 예수님 또는 하나님은 인간이 언어에 정신이 팔려있다는 것을 알아도 제대로 아시고 너무 잘 알아요. 특히 오늘 본문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 21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받아 둔다는 것, 이 말을 왜 했을까? 받아 둔다는 것이 어떤 뉘앙스. 어떤 느낌을 우리에게 제공하기 위해서 그분을 묘사했을까? 받아둔다는 것. 가만 있어 내가 출동하기 전까지 가만 있어. 이게 받아주는 거잖아요. 아버지에 의해서 보호받는. 그 본질은 손상되지 않고 유지되면서 보호받는 거예요. 잘했어. 그 본질, 언젠가 쓸모 있을거야 가만 있어봐. 내가 다시 출동할 때까지 기다려봐 이게 받아주는 상태잖아요.


사도행전 7장 끝에 보면 스데반 집사가 나오는데 59절에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내 영혼을 받아주시옵소서. 스데반 집사는 지금 성령이 충만했어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죽을 때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이 나에게 어떤 일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지금 스데반이 죽으면서 고백하는 가운데 나타났어요. 예수님은 스데반 집사를 받아주려고 해요. 이 표현들은 결국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면은 집결 속, 어떤 집합 되어있는 공간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집결 되어있다. 너도 올라왔어? 너도 받아줄게. 너도 받아줄게. 하나님께서 받아준 사람들끼리의 하늘 안에 특정한 공간에 소복히 한 곳에 모여 있는 그러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지요. 그러면서 뭔가 준비되어있는 느낌도 들거든요. 집결 되어있으면서 심심하니까 아래쪽을 보는 거예요.


세상을 보면서 옛날에 자기가 세상에 살았던 그 모습이 알 수 있겠죠. 그때 자기가 전에 살았던 것은 예수님 이야기가 주가 아니었고 그냥 사람 대 사람 이야기가 대세였습니다. 돈 좀 있는데 살기 좋다는 날씨 좋다는 스페인 가서 살까? 스페인은 70억까지 필요 없어요. 한 3억 있으면 시민권 나온다는데 포르투갈도 마찬가지예요. 영구히 그 나라의 시민 되는 거예요. 3억 가지고 뭘 하느냐? 관광하는 투숙객을 위한 집을 지어가지고 그들에게 숙소 제공하면 되지요. 스페인 관광 한국 사람들 많이 가잖아요. 야고보 사도가 순례했던 그 노선이 있어요. 성지순례. 야고보 사도가 스페인에서 죽었대요. 그것을 다이어트 삼아 유투브도 찍어가면서 한국 사람들 천주교 신자도 아니면서 얼마나 나온다고요. 성지순례를. 골인하는 지점에 숙소 있잖아요. 중국 사람들 외국 사람들이 투자해서 만든 숙소란 말이죠. 현지인들은 없고. 어떻습니까? 제정신이죠. 투자한 만큼 이익을 얻겠다는데 그게 제정신이지. 자선 사업할 것도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성경을 본다는 게 도대체 인간 세계에 사는 우리가 평소에 제정신으로 사는 우리에게는 전혀 나올 수 없는 생각들이 이 말씀 하나 하나에 다 포함 되어있어요. 사람 이야기에서 바로 예수님 이야기로 전환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오늘 강의에서 함축되어 나오는 문장은 이겁니다. 소유보다 예수님과의 연줄이 더 중요하다. 더 우선적이다. 내 소유로 사는 게 아니라 예수님과의 연줄, 예수님과 관계. 시골의 운치 있는 카페 보면 손님 오면 손님 오는 거 어떻게 알아요? 딸랑딸랑하고 하죠. 안에서 자고 있다가 소리 나면 후딱 앞치마 두르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나오잖아요. 자고 있었지만. 그게 왜 소리났죠? 손님은 모르는 어느 줄에 연줄에 걸린 거죠. 신호와 접선이 된겁니다. 그것을 발견하는 거예요. 발견하면서 죽음의 연줄과 생명의 연줄이 서로 다르다는 것, 다르면서 이 세상에 같이 섞여져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지옥은 어떻게 가느냐 하면 지옥 가는 방법 알려드리겠습니다. 빠져나오지 않고 행복 행복 행복 행복해하면 지옥 갑니다. 세상의 연줄에서 빠져나오지 않고 되게 행복해. 행복하면 어디가요? 지옥. 왜? 이 세상의 연줄에서 안 빠져 나왔으니까 제정신에서 제정신으로 계속 이어지는 그 연줄에서 못 빠져 나왔으니까 어떠한 순간도 미친 적이 없어요. 항상 제정신이에요. 사람들 만나면 나 정당해 아이고 세상 잘 사시네요. 이런 소리 듣고 싶어 하고. 내 소유보다 생명의 연줄 딸랑 딸랑이 닿아야 되는데 너무 행복해. 굳이 안 미쳐도 되고 이 세상 안 빠져 나와도 행복한데 그걸로 족하지요. 그게 바로 지옥 가는 겁니다. 왜? 하나님의 뜻은 그리스도가 해를 받았기 때문에. 행복이란 말을 개인 요소를 집어넣으면 호강입니다. ‘호강’. 나의 호강이 이게 미친 짓이었다. 어떤 사람은 결혼은 미친 짓이다 하는데. 내가 호강한다는 자체가 주님이 죽으신 이 세상에서 이거는 내가 지금 미친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해야 돼요.


호강하는 것을 일부러 싫다 이런 짓 하지 마세요. 그건 제정신입니다. 그건 제정신이고 미쳐야 돼요. 미친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내게 주어진 이러한 모든 것이 이게 내 성실함과 내 노력과 무관하게 나온 결과라는 사실을 알아야 돼요. 모든 인간은 자기의 정당성에서 못 빠져나오거든요. 비록 돈 몇 푼 없어도 거지처럼 살아도 자기 정당성은 못 빠져 나와요. 교도소 7번 갔다 왔어도 그래도 자기가 정당해요. 내가 교도소 왔다 갔다 하는 것은 다 부모 탓이고 사회 탓이고 남 탓이지 나는 심성은 착하다는 거예요. 심성은 착하다는 겁니다. ‘폭싹 속았수다’ 그 드라마 보게 되면 해녀 하시는 그 분이 어린 딸을 키우는데 하소연을 해요. 내 몸에 지게가 있는데 이 지게에 온 식구들 다 여기에 실린다고. 담배 피는 남편도 실리고 지게 지는 이 무게가 점점 더 증가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해녀가 모르는 게 있어요. 뭐냐 하면은 모든 인간은 남을 지는 게 아니고 본인의 자존심의 무게가 그 무게예요. 본인의 정당성, 자기 의로움 그 무게가 그만큼 무거운 거예요. 자기 지게에 나 잘났다가 그만큼 들어가는 겁니다. 나는 누가 뭐래도 나는 정당하고 누가 뭐래도 나는 미치지 않았다 나는 제정신이야. 이 무게가 엄청난 무게에요. 나중에 자기 무게에 찔려서 자살합니다.


그런데 초반에 드라마에 보면 해녀가 남자한테 가서 행패를 쳐요. 고기 들고 가서, 이게 발작이거든요. 발작은 뭔가 숨길 것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 숨긴 것을 본인이 감당이 안 되니까 외부로 쏟아내는 거예요. 발작을. 내가 숨긴 것이 뭔지를 몰라요. 숨긴 것이 뭔지도 모르면서 나는 정당하다 나는 제정신으로 산다. 내가 정당한 것을 너희들의 입으로 나에게 이야기 좀 해줘. 내가 당신한테 최선의 노력과 희생을 다 할 테니까 그 대가로 당신이 돈은 없지만 훌륭합니다 당신은 정말 착실합니다. 조금이라도 걸리는 장점거리를 다 나한테 이야기해서 내가 이 땅에 힘든 세상에서 살 수 있는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날 수 있는 격려 좀 해줘. 이게 인간의 하루하루 살아가는 보람이잖아요. 그러니까 그 모든 원인은 뭐냐? 그게 바로 제정신이고 그게 바로 거짓말이에요. 인간에게 나오는 말은 다 거짓말이에요. 다 거짓말. 왜? 세상을 모르고 일방적 자기 정당화만 골라서 접시에 담는 거예요. 자기 접시에다가 자기 맛있는 음식만 담아놓고 나는 세상의 모든 음식의 맛을 다 안다. 이게 거짓말 아니고 뭡니까? 이게 거짓말이에요. 자기를 옳게 보이기 위해서 그 필요한 것만 접시에 담아 놓고 이런 것이 바로 내가 가치 있는 인간임을 증명해주는구나 이러고 있다고요.


당신이 모든 것을 알아? 모르지요. 어느 세월에 그걸 다 알아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러면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칩시다. 그만큼 그 사람은 정당합니까? 정당하지 않아요. 왜냐 하면은 진짜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은 이 땅에 와서 미친 사람 소리 듣고 처형당했기 때문에. 이게 함축된 완전히 응축된 유일한 하나님의 뜻이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이게 베드로 설교에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럼 목사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냥 성실하게 사세요. 무엇을 위해서? 부동산 투기, 투자한 만큼 벌어야 될 거 아닙니까. 벌어야지. 그게 세상 사는 원리고 누굴 위해서? 당신을 위해서 성실하잖아 당신을 위해서. 당신의 모든 인생은 누굴 위해서? 오직 나를 위해서 살잖아요. 그렇게 사세요. 단! 이게 바로 미친 짓이고 이게 주님 보시기에 거짓말의 영이에요. 거짓말의 영이 시키는 대로 하는 거짓말이 마구잡이로 나옵니다. 마구마구 나와요. 10분 쉬고 두 번째 시간에는 이걸 할 겁니다. 그렇다면 성령 받은 성도는 관심사가 뭐냐? 여기에 소유보다도 예수님과의 연줄, 딸랑딸랑. 연줄 닿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이겁니다. 역시 하나님의 뜻의 연장선이에요. 함축된 뜻은 뭐냐 하면은 네가 예수님의 고통을 아는가? 10분 쉽시다.


강남-사도행전 3장 21절 (2+0) 250520b-이근호 목사



첫 번 째 시간은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는 사람들은 서로가 제 정신이라고 새롭게 인정해줘요. 미칠 수 있는 그러한 기회를 안 줍니다. 인간들의 만남. 그런데 인간들의 만남은 제 정신을 유지시켜주는데 타인들의 지혜와 타인들의 협조가 필요하다. 이런 식으로 하는 거죠. 근데 그 인간의 뜻이란 뭐냐? 자기를 위한 성실이잖아요. 열심. 자기를 위한 희생. 자기 밖에 못 나가요. 내가 멀쩡해야 되기 때문에. 실제 사업 망해도 나는 멀쩡해야 돼요. 보통 일할 때 어떤 일하면 미친 듯이 일하라 하잖아요. 근데 그건 미친 듯이 일하는 것은 미친 게 아니에요. 미친 듯이 일하면 제 정신으로 돌아온다는 가능성이 있어요. 그런데 그런 사람이 어떤 말이 '예수를 믿는다' '성경에서 예수 믿었다' 이건 거의 발작 수준입니다.


그때부터는 타인의 관계가 아니고 자기를 예수 믿게 하신 그 보이지 않는 영의 힘과 본인의 관계가 형성됩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과의 연줄을 건드린 거예요. 딸랑딸랑 건드린 거예요. 성령님을 건드리고 만난 거예요. 만나게 되면 그 연줄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뭐냐면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예수님이 죽었다 이 말이죠. 예수님이 이 땅에 떠날 때 자연사하신 게 아니에요. 늙어 돌아가신게 아니고 사건에 의해서 돌아가셨거든요. 그것도 죽는 사건이죠. 그것도 고통받는 사건. 그래서 이 세상에서도 이런 원리는 통해요. 공부한다는 것은 우리가 아는 상식에 공부한다는 것은 '짐승으로부터 벗어남'이거든요. 이 말은 공부 안 한다는 것은 뭐에 머물러 있다? 그냥 짐승이다. 충동 육적 욕구 거기 머물러 있다. 공부한다는 것은 흔히 점잖해진다. 그 인격이 고매해진다. 품위가 있다. 또는 참을성이 있다.


이런 말인데 더 정확히 말씀하면 곧 공부한다는 것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니까 짐승이라 하는 건 철저하게 자기 충동이죠? 자기만을 위해서. 근데 공부를 하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면 여기서 뭐가 일어나겠어요? 양보가 일어나게 돼요. 양보. 그래 내가 당신 같아도 그럴 때 내 이해해 준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품위가 있다. 교양이 있다. 세상 보는 눈이 넓다. 이게 바로 공부한다는 거예요. 저 인간 세계에서도 이런 게 있어요. 인간 세계에서.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은 그동안 몰랐던 사실에 직면하게 하는 겁니다. 성령은 십자가 사건이 아니면 우리에게 오지 않았어요. 그러면 성령이 온다는 말은 이미 앞에 무슨 사건이 터졌습니까? 십자가의 고통 사건 있고 난 뒤에 그 고통에 그게 진앙지가 되어서 그 지진 여파에 의해서 딸랑딸랑 연줄이 십자가의 연줄이 우리한테 도달된 거, 고통이 도달된 거예요. 그게 성령이다. 이거예요.


성령이 오게 되면 주님의 고통이 우리에게 전달되잖아요. 신호가 시그널이. 고통이 전달되어 버리면 이 고통은 무슨 고통을 삼키느냐 하면은 나의 고통을 오히려 그걸 삼켜 버려요. 나의 고통을. '이 시시하게 문제 끝난 것 가지고.. 네가 지금 울고 짜고 이게 뭐 그것도 고민거리냐?' 이런 거. '주님의 고통 앞에 네 고통은 고통도 아니야. 이게 호강에 빠져 가지고 말이야.' 뭐 이런 식이 되는 거예요. 근데 인간이 주님께서 그렇게 주님의 고통을 알려고 소개하고 거기에 참여시키기 위해서 인간의 고통으로 하여금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인간의 모든 고민거리를 절망의 상황에 몰아넣습니다.


이 절망의 상황을 친히 경험한 집단이 있습니다. 그 집단이 뭐냐? 12 제자들이에요. 내 청춘 돌리도. 주님 앞에 헌신했고. 베드로 한 말 그대로 내 모든 재산과 그 주님을 위해서 모든 걸 다 버렸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다 버렸으니 주께서 우리에게 줄 게 뭐가 있을게 아니겠습니까? 줄 거 주고 받을 거 받겠습니다. 하는 뜻이었어요. 근데 주님의 답변은 이거였습니다.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릴 것이다." 사람이 애초부터 예수를 모르고 예수를 버린들 그게 아프지 않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밀당을 한 거예요. 마치 네가 원하는 이상으로 다 줄 것 같이 주께서 땡겨 놓고 혼자 맥없이 돌아가셔 버렸어요. 무책임하지요. 내 인생을 책임질 것 같은데 책임 없이 책임자가 날라가 없어졌어요.


뭐 큰 회사 한다고 해 가지고 그 직원들도 뭐도 모르고 보증금까지 하면서 취직했는데 사장 돈 몇 천 해먹고 도망가고 투자자들은 직원 붙들고 돈 해놔라 하고 그 직원들 뭐 어떻게 할 수가 있습니까? 사장은 건물 지어 놓고 오피스텔 건물 지어 놓고 직원들 해가지고 쪽지 거리에 나와 가지고 쪽지 주면서 방 두 개 임대합니다. 쪽지 받았어요 아까? 요 근처 우리가 체험한 거예요. 사장 날아가 버리면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절망이죠. 특히 나이 많은 사람이야 그런 일이 허다하지만 젊은 첫 시작을 여기에 바탕을 두고 이걸 마중물로 해 가지고 한번 일어서보려고 살아온 22살의 청춘의 뜻 그 모든 걸 다 걸고 회사 취직했다든지 뭐 이렇게 촌에 가서 부모한테 "엄마 나 취직했어 기쁘지?" 해 가지고 잔치까지 벌이고 가 가지고 사기꾼한테 사기 당해 버리면 어떻게 돼요? 있는 그 보증금 다 날리고 이래 되지요. 자칫하면 그 죄 지은 것도 없이 대리 대신 해가지고 감옥갈 수도 있는 거죠.


"잡아라. 그 갈릴리 사람들 잡아라." 지금 지명수배 떨어졌어요. 지금 베드로는. "어 너네?" "아니다." "너 맞잖아? 내가 아는데" "아니야" "아니란 증거를 대라." "내가 예수님을 저주한다. 됐냐?" 옆에 자고 있던 닭이 꼬꼬댁~ 하니까 "거짓말이지? 어디서 구라 떨고 있어" 주님께서 닭으로 CCTV를 깔아놓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다 지켜보고 있었지요. 너는 나를 버린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이 예수를 버린다는 말은 너희들이 희망했던 너희 자신의 미래가 나와 더불어 완전히 다 날라갔다는 겁니다. 이것에 대해서 바둑 용어가 좀 멋진 용어가 있어요. 이런 절망 상황. '외통수' 어디 피할 곳이 없어요. 딱 갇혀 버렸어요. 그래서 물러날 곳도 없어요. 완전히 걸려들었어요. 외통수에 딱. 왜? 수 하나만 딱 놓으면 내거 다 죽어요. 그 지경에 놓입니다. 외통수에.


바로 누가 자기 백성을 외통수에 몰아넣는가? 성령님이 그렇게 했어요. 그 스데반 집사도 그랬지만 사도 바울에게도 외통수를 치는 거죠. 심지어 사도 바울은 뭐 가는 순간순간에 외통수예요. 그걸 사건의 위치라 하는데 그 모든 위치가 세상과 작별해야 돼요. 세상과 작별해야 될 매 순간이 작별하는 순간으로 맞이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딸랑딸랑 주님과 연줄에 걸렸던 자들은 예수님이 지상에서 당했던 그 죽음 체험을 죽음의 고통을 이미 본인 안에 본질로 같이 스며들고 한통속이 되는 거예요. 뭐 주님이니까 뭐 당당했겠지.. 주님이라고 당당하지 않았습니다. 늘 절망과 절망의 연속이었어요. 그때마다. "아버지여 그 다음 스케줄은.." "아버지여 그 다음 스케줄은.." 하나님께서 "스케줄 알잖아? 너 십자가 죽어야 돼" "그러나 지금은 때가 아니야. 때가 되면" 때라는 그 징검다리를 하나하나 밟아가면서 기어이 자기 아들을 죽음에 내어 주기까지 주께서는 몰아 붙였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은 인간들은 구원될 수 없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구원될 수 없다. 그리고 내 아들 예수 너도 구원될 수 없다. 산 채로 구원을 보겠다? 아니다. 끝까지 너는 산 채로 구원되지 못한다 어느 누구도. 죽는다고 해서 구원되는 보장은 더더구나 없다. 그다음부터 누구 소관이냐? 일단 죽자. 죽어라. 그리고 건져내면 누구 소관이냐?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성령이 예수님을 건져 줄 때 예수님은 구원되었습니다. 이 이야기예요. 이거는 모험 정도가 아니에요. 도박 정도가 아닙니다. 미션 impossible. 불가능한 사명을 한 거예요. 빰빰빰빰 이제 끝났지만 불가능한 사명을 주님이 했습니다. 자기와의 싸움이죠.


이 어느 정도 불가능한지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이게 원래는 어느 정도로 불가능한지 예수님은 지금 모든 사람에 앞서서 미리 성령을 받았지요. 그렇죠? 성령 받은 예수님. 그러면 예수 성령 받는다는 말은 요한복음 5장의 말씀처럼 아버지가 나와 함께 있고 나는 지금 아버지의 일을 하고 있다. "아버지를 보이라 하지 말라" 요한복음 14장에서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다" 이렇게 되죠. 뭐 5장 8장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말은 '어떤 사람이 길에서 뺨을 맞으니까 86km에 떨어진 어떤 사람의 뺨에 흉터가 생겼다.' 여러분 이게 가능합니까? 중첩 돼 있죠. 아버지와 아들이 중첩 돼 있죠.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는 아버지의 고통이 그대로 예수님의 고통으로 현실화 된 거예요.


어떤 사람이 강남에서 뺨 맞았는데 북악산 꼭대기 위에서 어떤 사람이 뺨이 얼얼한 거예요. 그럼 두 사람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거죠. 물리학 양자의 얽힘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거예요. 한쪽이 결정되면 자동적으로 한쪽이 결정 돼요. 빛보다 더 빠른 정보의 관계에 의해서 그게 아까 내 소유보다 예수님과 연줄이 닿았다는 개념이 이 개념입니다. 이걸 어떻게 신학교 공부해서 이걸 알고 어떻게 노력해서 기도해서 이걸 얻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이런 현상이 이거는 상상도 못한 현상이에요. 예수님께서 어린 양의 죽음이 그대로 하나님의 언약에 하나님의 성전에 그 영원한 희생이 있잖아요. 그 희생이 지상에 일어나는 현상, 지상의 그 현상의 토대가 되는 거예요. 주께서 먼저 앞서서 십자가 지시고 하늘나라 갔다면 그 십자가의 고통과 연계되어 있지 아니하면 어느 누구도 이 세상에 구원될 수 있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다시 말해서 구원의 근거는 내 노력도 기도도 아니고 뭐냐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었다는 그 사건. 사건만이 구원의 근거가 되는 겁니다. 이거는 인간의 지혜에서 안 나오기에 인간은 이걸 보고 어리석다고 이야기해요. 그러나 구원받는 사람에게는 뭡니까? 어리석은 건 맞지만 어리석은 건 맞아요. 맞지만 본인도 설명 안 돼요. 어리석어서. 본인도 설명하려면 너무 어리석어. 이게 설명이 안 되잖아요? 하지만 이게 뭐냐? 구원의 능력이에요. 이게 수련회에 하는 내용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온 내용입니다. 그전에 하늘과 땅은 대립관계였어요. 죽이고 죽음을 당하고 떠났고. 그렇게 되면 어떻게 돼요? 영원히 구원은 없어요. 서로 원수지간이기 때문에.


그런데 중보자 매개자가 등장하게 되면 이 대립 구조를 한 몸에다가 장착한 그분에 의해서 대립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넘어가는 생각이 있어요. 벽이 있음에도 벽을 넘어가서 존재하는. 벽이 있는데 이 벽은 도저히 넘을 수가 없어요. 여기에 있는데 나중에 보니까 여기에 있는 사람이 어디가 있다? 여기에 가 있는 거예요. '양자 터널 효과' 이게 양자에 의해서 파동에 의해서 넘어가는 수가 있어요. 못 넘어가는데 에너지로서는 이 넘어가는 수가 있어요. 양자 터널 효과입니다. 이것 가지고 최신에 원자도 측정할 수 있는 현미경을 이렇게 양자 터널 효과로서 만들어내고 양자 터널 효과 가지고 찍어 버리면 원자도 사진으로 찍혀져 나와요. 벽이 있는데도 어떻게 빠져나오는지를 몰라요. 확률 상 이게 저쪽에 가있는 확률이 발생 돼 버린 거예요.


유명한 마술사 있잖아요. 카퍼필드. 카파필드가 우리나라 TV에 중계가 됐어요. 만리장성에 섰는데 이 그림자만 보이고 점점 더 들어가더니만 나중에 그림자 다 지나고 조명 꺼지니까 저쪽 만리장성 저쪽에 서 가있는 거예요. "어떻게 통과했지?" 아무도 몰라요. 요새는 마술사 다 할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그때는 처음으로 했기 때문에 깜짝 놀랬어요. 뭐 자유의 여신상 사라지는 거. 그것보다 더 놀란 것이 막힌 벽을 통과하는 거예요. 이런 그 희한한 현상을 그 외통수에다가 집어넣었다 했잖아요. 근데 사도 바울은 뭐라고 하냐 하면 외통수에 절망한다 에서 더 밀어 버려요.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절벽 위에서 사진 찍다가 실수해 가지고 균형 잃고 막 떨어지려고 해요. 그때는 뭡니까? "잡아당겨 주세요. 살려 주세요" 하잖아요. 보통 인간 세계에서 손 잡고 살게 되면 "후 살았다" 이렇게 되잖아요. 성령께서 어떻게 하냐면 하나 더 밀어버려요.


하나 더 밀면 어떤 효과가 있느냐 하면은 나는 죽음이라는 벽을 저쪽에 넘어가면 그때부터는 죽음이 없는 산 사람이 되는 거예요. 영생의 사람이 되는 거예요. 주께서 하신 일이 하나 더 미는 거예요. "죽겠나이다" "더 죽어" "진짜 곧 죽을 것 같은데요?" "조금 더 가. 그러면 너는 죽을 수 있어" 이 능력이 어디서 나오는가? 말씀에서 나와요. 나를 살려주겠다는 말씀처럼 그렇게 현혹되는 그 말씀이 나를 도리어 살려주는 게 아니고 나를 죽이고, 죽이고 난 뒤에 죽은 나를 살리는 말씀으로 나올 때 내가 살았다가 아니라 나를 통해서 말씀이 살았다 로 나오게 되는 겁니다. 그 방식을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은 하나의 수식으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2는 2+0과 같지 않다. 2는 2+0과 같지 않아요. 수학에서는 2=2+0이 되잖아요. 그러나 이 0이라는 것이 추가가 돼 있는 거예요. 2가 2로 살다가 2+0이라는 거 다시 말해서 나의 죽음과 더불어 사는 거예요. 나의 죽음과 더불어서 살게 되면 더 이상 간극점이 2라는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사망 속에 같이 계시는 주님을 증거하고 주님을 돋보이고 주님의 능력을 앞장세우는 주의 증인으로서의 삶이 2+0입니다.


이걸 "나에게는 나를 초과하시는 분이 계시다" 이렇게 돼요. 나에게는 나를 초과하는 분이 계신데 이 초과하시는 분이 이 땅을 그냥 하늘에서 오신 분이 아니고 하늘에서 그냥 돌아보시는 분이 아니고 실제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다녀가시는 분이잖아요. 다녀가실 때 어떻게 다녀갔습니까? 분명히 아기로 태어나 성장했는데, 12살까지 말씀이 나오고 12살 이후부터 30살까지는 내용이 안 나옵니다. 12살 때 뭡니까?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이야기했잖아요. 성전에서. 그 다음부터는 30살에 세례 요한에 세례 받을 때 등장했잖아요. 그 사이에 어디 갔어요? 이디오피아 갔습니까? 인도 갔습니까? 어디 갔어요? 온갖 가짜 뉴스가 다 있어요. 이디오피아의 성경에 보면 여기에서 유명한 지혜자의 도사들을 많이 만나서 똑똑하게 되었다. 그리고 전통적인 교회에서 뭐라 합니까? 아버지 밑에서 목수 일 했다. 뭐 이래요. 알 수 없는 것은 그냥 비워놓고 30살 때 와서 예수님 점점 본격적으로 했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의 우리가 아는 삶은 어린 나이였다. 12살. 이게 끝이에요. 그다음부터는 뭡니까? 추락하는 거죠. 십자가 죽기까지. 추락, 떨어지는 거예요. 아버지의 뜻은 내가 죽는 것이었다. 이렇게 아버지의 뜻은 내가 죽는 것이다. 왜? '내가 죽음으로써 이 세상이 폭발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라 하는 것은 그냥 믿기만 되는 게 아니고 내 존재를 통해서 계시가 새롭게 생산된다. 제가 오후 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어요. 세례 요한이 그 요한복음 1장 15절에 운수 보니까 초반 운수, 끝발이 개끝발이에요. 초반에 성령 받아서 많은 사람이 돌아왔다 할 때 누가 봐도 그 큰 교회 목회자 당장 되는 거죠. 그런데 돌아가실 때 어떻게 돌아갔습니까? 모녀간의 철딱서니 없는 자기 위신만 생각하는 그 모녀에다가 자기 권위만 아버지까지 합세해 가지고 누가 희생물 되었어요? 선지자가 희생물 됐죠? 성령 받아서 하늘에서 권세 받았다던 선지자가 꼴랑, '아이고 결국 이것밖에 안 돼?' 말 몇 마디에 그건 모가지 달아나가지고. 인생 끝이죠. 인생 그렇게 끝난 거예요. 근데 그게 뭐라고요? 선지자. 그게 선지자예요.


선지자는 자기에 의해 사는 사람이 아니고 말씀에 의해서 사는 사람이에요. 누가 또 이사야 8장 20절에서 22절 한번 읽어 보세요.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주릴 것이라 그 주릴 때에 번조하여 자기의 왕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위를 쳐다보거나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 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중으로 쫓겨 들어가리라" 아침도 보지 못하고 주리니까 인간의 뜻은 자기 정당성이죠. 존재할 이유죠. 근데 존재할 이유가 에너지가 뭐죠? 양식이 없어.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까? 내 탓이다? 아니죠. 누구 탓이에요? 하나님의 탓이죠. 하나님께 분노 분하지 않으면 참을 수가 없어요. 하나님을 저주하죠.


저주하는데 저주하다가 결국은 흑암 속에 빠져들어가죠. 이게 이 땅의 운명이고 정코스예요. 가야 될 그 코스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역사적 사명을 통해 이 땅에 태어났어요. 이 땅에 이 저주받을 땅에 태어난 거예요. 어둠은 없다. 어느 누구도 말은 안 하지만 다들 하나님을 저주하고 있는 그게 대세가 되어 있는 그게 인간의 분위기가 되어 있는 그 세계. 그 세계에 우리가 태어나서 살아갑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들이 생각하는 건 뭡니까? 이 세상으로부터 우리가 인정받는 사람 되기를 지금 환장했죠. 나 잘났다고 누가 좀 이야기해 줘. 그냥 나는 외치면 돼. 그런 노래 있어요. 하여튼 외치면 돼. 나는 내 갈 길 간다고 외치면 돼. 그런데 이 율법을 누가 전하겠어요? 그 당시 율법을 뭐 전하는 사람 있어야 할 거 아닙니까? 그 전하는 사람이 바로 선지자예요. 오늘 사도행전 3장 아까 먼저 와서 읽어본 사람들은 여기에 선지자 말이 굉장히 많이 나오죠. 18절에 나오지요. 그다음에 21절도 나오지요. 22절도 나오지요. 23절에도 나오지요. 24절에도 나오지요. 25절에도 나오죠. 그러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선지자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요. 해야 돼요.


이제 선지자 이야기입니다. 선지자. 선지자를 잘 보여주는 게 누구냐? 놀랍게도 발람 선지자. 민수기 23장에 나오는. 22장 23장 24장 특히 23장에 나오는 그 발람 선지자. 이 발람 선지자를 성경에 사람들이 보면서 납득을 못 하고 있어요 이해가 안 돼요. 이스라엘 운명을 왜 이방 나라의 선지자가 그 모압 나라 선지자가 왜 이스라엘의 예언을 하냐 이 말이에요. 자기 집이나 잘 단속하지. 발람 선지자 특징은 남의 민족에 대해서 예언한다는 거. 두 번째 그 민족을 저주하는 게 아니고 그 민족을 오히려 축복한다는 거. 세 번째 그 민족을 저주하도록 본인의 나라 모압 나라에서 그 선지자에게 뇌물을 줬다는 거. 뇌물 준 거예요. 6월 3일날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하는데 선거 유세를 합니다. 만약에 어떤 대선 후보가 나와서 이제 연설을 하면서 "여러분 제가 대통령 된다면 이 나라 전체를 우리 김정은 지도자에게 바치겠습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저에게 표를 몰아주신다면 3개월 내에 북조선 이민 공화국 중심으로 통일시키겠습니다. 그리고 민주주의 자본주의 다 없애고 다 공산주의로 만들겠습니다. 우리 김정은 지도자 민족의 태양이십니다. 만세. 막 이렇게 한다면 국가 보안법에 걸리겠죠. 안 그래도 누가 대통령 되면 또 공산주의가. 압력을 넣으면 안 되지만 제가 말한다고 압력이 되겠습니까? 발람 선지자 이 사람 이런 희한한 짓을 한 거예요. 그래서 발람 선지자 보면서 어느 누구도 이해를 못 하는 거예요. 이게 성경을 보면서. 왜? 이 짓을 왜 합니까? 나중에 뭐 예를 들어서 그다음에 발람 선지자는 자기 민족을 버리고 기생 라합처럼 '나는 이스라엘에 속한다. 나는 이스라엘 선자로 살겠다. 이 영광스러운 하나님 백성 하겠다.' 이렇게 나오면 앞뒤가 맞아요. '회개했구나. 역시 하나님의 예언을 전하고 하나님 말씀 전하니까 이건 회개 할 만하지’


근데 그게 아니고 어떻게 됐어요? 더 큰 뇌물을 받고 자기가 축복하라고 이미 확정된 그 민족을 발람 선지자가 그 민수기 25장에 보면 그들을 오히려 시험케 해서 이 우상을 섬기게 해 가지고 이스라엘 내부를 아주 작살을 내놔버렸어요. 그때 죽은 자가 25장 9절에 보면 24,000명이 죽었어요. 모압하고 전쟁해서 전사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자체적으로 하나님께 벌받아 염병으로 죽은 자가 24,000명이에요. 그러니까 자체적으로 염병으로 죽은 자가 2만4천이라는 자체가 발람이 예언한 것과 안 맞을 뿐더러 특히 이 24,000명을 죽도록 유도한 자가 누구냐? 이스라엘을 번영하여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어느 민족도 건드리지 못하고 결국은 승리할 것이라고 예언한 그 당사자 선지자가 이렇게 2만4천명을 죽도록 죽이도록 내부적으로 이렇게 파괴되도록 조종을 했다 이 말입니다. '이스라엘? 약점은 내가 알고 있지 그들 우상 섬기면 그들의 하나님이 가만 있지 않아.' 이걸 발람 선지자가 알고 그대로 해서 이스라엘의 2만4천명을 죽게 했다 이 말이죠. 사람들 2만4천이 죽었다는 말은 군사력이 그만큼 약화됐다 이 뜻이에요.


그러니까 이게 지금 발람 선지자에 대해서 풀어나올 게 그 난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왜 발람 선지자가 동시에 또 변신을 하는데? 왜 변신을 해? 그리고 발람 선지자가 변신할 수도 없는 게, 해서는 안 되는 게 민수기 22장에 보면 발람 선지자가 저주하기 위해서 뇌물 받고 저주하러 가는데 거기에 누가 등장합니까? 나귀가 등장하죠. 발람 선지자가 나귀 타고 갔다. 그 뭐 갈 수 있죠. 자가용 없으니까 나귀 타고 갈 수 있죠. 그래서 나귀 타고 가는데 나귀가 버텨서 안 나갔다. 아 그럴 수 있죠. 피곤하니까 그럴 수 있다. 그런데 나귀가 매를 맞았다. 뭐 그럴 수 있지. 마귀가 나도 좀 쉽시다. 나도 5일 근무제 합시다. 뭐 이래 가지고 쉴 수도 있는 문제예요. 그런데 나귀가 인간하고 말을 했다. 이거는 그런 시나리오를 누가 집어넣었습니까? 그다음에 더 놀라운 사실은 나귀가 그 정도 지적을 했으면 선지자가 근원적으로 뭐 해야 돼요? 인간적으로 근원적으로 해결해야 되지 않습니까? '야 여호와 살아 계시는구나. 이제부터 여호와 진짜 대해야지.' 이렇게 나와야 뭐 앞뒤가 맞는 이야기다 이 말이죠.


실제로 민수기 23장 네 개의 예언을 해요. 23장 25절 발락이 왕이죠. 발락이 발람보고 자기의 선지자 보고 그들을 저주하지도 말고 축복하지도 마라. 전에 저주하라 했잖아요. 그러니까 저주하니까 축복하니까 그냥 "그럼 입 다물고 있으면 안 되겠어?" 벌써 이것이 두 번째 예언을 하고 난 뒤에 했어요. 그럴 때 26절에 "발람이 발락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자 이 문장 딱 보면 지금 발람 선지자 회개했다? 회개 안 했다? '야, 이게 철저한 주의 종이구나' 그러면 철저한 주의 종인줄 알았으면 25장에서 철저히 주의 종으로 그냥 가야 될 거 아닙니까? 왜 25장에서 갑자기 또 자기 나라 모압 편을 들어 가지고 이스라엘을 저주가 안 되는 나라를 왜 저주해서, 저주를 안 된다는 저주했으면 저주가 안 먹혀야 되는데 25장에 보면 저주가 먹혔어요? 안 먹혔어요? 먹혔지요. 도대체 이건 또 무슨 일입니까?


이걸 한꺼번에 푸는 공식이 있습니다. 간단해요. 어디서 들어봤을 거예요. '0' '영의 기능' 영의 기능은 네 민족 내 민족이 아니고 말씀 위주로 0에 계신 분이 일하십니다. 너 피, 내 피 없어요. 오직 발람 선지자에게 예언을 하신 것은 발람 선지자에게 예언을 한 것이 아니고 발람 선지자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 속에 들어가서 하나님 말씀 주신 분이 그 사람 속에 있는 말씀을 겨냥해서 말씀대로 실시할 뿐이에요. 말씀을 실시하면서 2가 문제가 아니고 2라는 이스라엘이 문제가 아니고 주도권이 2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속한 내 민족 내 가정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말씀에 있고 내 가정 중심 내 중심 내 나라 중심이 아닌 그것에 아무 데에도 소속되지 않은 0이 2를 내 것이라고 내 축복받을 거라 생각하는 이것을 주의 말씀대로 다루게 되는 거예요. 다룬다는 겁니다. 어느 정도로? 이방 선지자까지 다룰 정도로. 이방 선지자가 하는 말이 틀린 말이라도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루어지는데 이스라엘은 아니에요. 이스라엘은 아니에요.


두 번째 예언 민수기 23장 21절 "여호와께서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고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신다" 돼 있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않는다는 말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어떤 짓을 해도 하나님께서 벌 주지 않는다. 그런 뜻이거든요. 이스라엘 범죄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그걸 염두에 두지 아니하시고 그냥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떤 누구로부터 저주받지 않은 상태에서 복된 상태에서 그대로 구원한다 그 뜻이잖아요. 이게 예언이에요. 근데 25장에 보면 분명히 이스라엘이 당했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예언 안에 있는 이스라엘은 이 지상의 이스라엘의 어떤 나라가 없습니다. 더 감춰서 이야기하면 하나님은 말씀에 의하면 사람을 구원해요.


그런데 구원받는 인간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구원받는 사람 없어요. 없는데 그 양자 터널처럼 없는데 천국 가니까 집결소 소복이 모여 있어요. 어디서 왔게요 그들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선지자, 모세, 엘리야 많은 성도들, 그 많은 숱한 성도들이 어떻게 해서 천국에 갔을까요? 히브리서 12장 22-23절에 보면 제가 읽겠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 이렇게 되어 있죠? 집결소 아닙니까? 구원받은 천국의 집결소죠. 스데반 집사도 포함될 거예요. 많은 성도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신앙의 선배들 그 다 있다 이 말이죠. 달려갈 길 달려갔던 그들. 그들이 어디서 나왔느냐 이 말이에요.


두 가지의 정답을 낼 수 있어요. 하나는 그들이 죽었다가 왔습니다도 정답이 되고 더 정확히 말해서 그들은 죽은 예수님에게서 나왔다. 죽은 예수님에게서 나온 사람들이에요. 그 단절성이 이들 속에 들어있는 거예요. 단절성. 나는 구원받지 못하고 나는 구원받았습니다. 되는 거예요. 나는 구원받지 못하고 나는 구원받았습니다. 여기 선지자가 오늘 사도행전에서 선지자들 이야기했잖아요. 선지자가 자기 이야기해요. 예수님 이야기해요. 예수님 이야기하죠. 근데 예수님이 이 땅에 없는 거예요. 왜? 죽었으니까 없는 거예요. 예수님이 죽어서 다른데 살림 차린 거예요. 집결소. 이 땅 말고 다른 곳에 천국을 만들었다 이 말이죠.


그러나 사람들은 그 민수기든 모든 예언을 볼 때 이 땅에 뭘 받는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만든다고 생각한 거예요. 이 땅에. 이 땅에 만들게 한 메시아는 적그리스도입니다. 그는 허경영이에요. 허경영. 내 눈을 바라 봐~ 나를 만나면 병이 낫는다 주님께서 병 고치러 왔습니까? 말기 암, 할렐루야 기도원 원장입니까? 자식들 공부 잘하라고 온 거예요? 제가 어느 날 설교했죠? "죽어! 죽어! 죽어! 씨 전부 다" 전부 다 죽이기 위해 오는 거예요. 뭘로? 율법으로. 이사야 8장에 있는 말씀으로. 너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죽어 있다는 거예요. 죽어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거. 사람들은 그걸 거북해서 네나 죽으라 해가지고 예수님을 도로 죽였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해를 입은 것이 하나님의 함축된 뜻이잖아요. "좀 죽어라. 내 말씀으로 살려줄게" 그러면 사람들이 "말씀대로 죽었는데 안 살려주면 그때 책임지실 거예요?" "그거 봐" 살아 있는 모습 봐요. "내가 죽을라 하는데" 그런 생각이 죽어야 돼. 그런 생각을 죽여야 돼요. 그게 뭐냐? 패스예요. 패스. 통과. 나를 관통하는 거예요.


나를 관통하는 아주 멋진 구절이 마태복음 6장 3절에 나와 있습니다. 관통하는 것은 주일 낮에 약간 언급했지요.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가 소유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뚫고 지나가는 거다. 죽을 때까지. 그러니까 서브웨이 샌드위치 붙조각 속에 각종 해물하고 야채 어떻게 치즈는 뭘로 하시고? 소스는 달콤한 걸 합니까? 새콤한 걸 합니까? 이태리식으로 할까? 미국식으로 할까? 묻지요. 물어봤자 나중에 깨지면 관통하는 거죠. 부르심이 관통하게 되면 우리는 나의 구원이 아닌 걸 알게 되고 그야말로 솔개를 쫓아내고 제물을 쪼개 놓고 밤중에 하나님의 횃불이 아브라함이 쪼개놓은 그 창세기 15장 이야기에요. 그걸 통과하는 그 사건이 오늘날 우리 몸을 가지고 반복시키는 사건이죠. 내가 구원받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이렇게 구원하셨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6장 3절에 "너는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라" 이게 통과 아닙니까? 내 몸인데 오른손도 내 거죠. 왼손도 내 거잖아요. 둘 다 몰라. 육은 모르는 일을 주께서 미션 임파서블 해내신 거예요. 주께서 2+0으로 일하기 때문에 2는 0이 없이는 자기 존재 의미가 없는 거예요. 의미라 하는 거는 외부에서 오는 거예요. 내가 성실하면서 내 의미가 차곡차곡 누적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걸 전부 다 박살내는 의미는 외부에서 오는 거예요.


'아이고 이제 죽으면 그만이지' 죽으면 그만 아닙니다. 내가 살아 있을 때 죽어야 돼요. 죽고 난 뒤에 죽으면 소용없어요. 살아 있을 때 나는 살았고 너는 죽었다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 우리 안에 실현 돼야 돼요. 우리는 둘로 쪼개져야 되고 김장 갈 때 그 김치 담글 때 배추 어떻게 합니까? 통배추 합니까? 중간에 쪼갭니까? 짜개죠. 짜개야 거기에 속 가지고 묻히잖아요. 가죽 장갑 끼고 거기에 젓갈 넣고 주님의 벌건 피로 우리의 배추를 하잖아요. 하게 되면 그 벌거벗은 그 배추 잎사귀에 다 숨어 들어가고 바깥으로는 허옇게 멀쩡한. 그렇게 되죠. 인물 좋게. 우리 집사님 저 뒤에 집사님처럼 인물 좋아요. 주께서 통과하신 거 같아요.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속에는 누가 어떤 고통? 주님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씀과 그 삶이 자기 배추 속 속에 스며들듯이 우리 인생에 스며들지요. 스며듭니다.
자 인간의 육에 대해서 정신 분석학에서 그들이 나름 공부를 해요. 공부를 한 게 뭐냐 하면은 '어릴 때는 상상' 어릴 때는 상상해요. 동화책 보고 백설공주 뭐 상상하잖아요. 어릴 때부터 죽을 때까지 계속 가요. 계속 이어진다. 커서는 뭐냐 하면은 '티내는 것' 있는 척 아는 척 티내는 거 이걸 뭐냐 하면 있는 듯 한 걸 갖고 있는 자기를 묘사하는 걸 뭐라 하냐면 '심볼' '상징' 그래서 인간의 정신병은 뭐냐? 상상한 것을 상징이라고 이꼴 시키는 데서 정신병 옵니다. 이게 어릴 때 상상은 중간에 없어지면 참 좋겠는데 그게 아니고 계속 가는 거예요. 계속 가니까 정신병 생기는 거예요. 내가 이런 대우 받을 인간이 아닌데.. 때려치우고 사업이나 카페나 차릴까.. 이런 몇 푼 받을라고 내가 이 더러운 취직해서 이렇게 사나.. 때려치울까? 뭐 맨날 자기를 어떤 백마 탄 왕자나 이쁜 공주로 여기는 거예요. 볼록소매 입고 잠 잘 때도 볼록 소매 입어야 돼요. 상상한 거예요. 상상하니까 세상은 그걸 안 들어주죠. 안 들어주니까 중간에 뭐가 있냐면 언어가 있는 거예요 '언어'. 다른 말로 쉽게 말하면 '발작'.


폭싹 속았수다에 나오는.. 우리 딸이 37표로 반에서 급장해야 되는데 17표 받은 남자 아이가 왜 급장하느냐? 막 딸이 발작하니까 엄마가 가서 돈하고 떡하고 해 가지고 갖다 뇌물 바치잖아요. 그걸 자식을 위해 참으면서 그게 바친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상상한 딸을 세상에 적응하도록 인간은 네 마음도 되는 게 아니다. 사회라 하는 곳은 그런 게 아니야. 양보할 때 양보해야 돼. 네가 하나의 이 사회의 주체자로서 남들이 '어 너 거기 있네. 너는 쓸모 있네' 하는 주체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 하나의 사회가 요구하는 심볼 하나의 상징계가 돼야 돼요. 거기에 대해서 네가 날 설득해야 돼. 네가 난 원래 똑똑한데 조금만 있으면 한 몇 년 만 있으면 나 성공할 거야. 네가 너를 설득해. 그게 내 내부 속에 내가 나를 설득하는 언어입니다. 이게 무거운 짐이에요. 인생의 모든 무거운 짐은 되지도 않는 환상을 쫓아가는 겁니다. 환상을 그걸 억지로 쫓아가는 겁니다. 그 누가 뭐 이렇게 "네 죄인이라" 하면 그때 발작을 일으켜 가지고 "내가 왜 죄인인데?" 이런 식으로, "얼마나 내가 정당한데?" 이렇게 되죠.


그래서 인간의 악은 자기의 뒤쪽에 있기 때문에 뭔가 악에 의해서 물리는데도 불구하고 찾을 수가 없어요. 자기 뒤쪽에 있으니까 침대 밑에 악어처럼. 뭐 대상이 없는데 불안해. 뭘 성공해도 또 무슨 일이 있을까? 불안한 거예요. 그것은 바로 주님의 고통을 우리가 잠시 잊어버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러면 이제 오늘 본문 사도행전 다 끝났어요. 3장 끝까지 다 끝났어요. 선지자가 그 역할 하는 거예요. 어떤 역할? '미쳐라' 다시 말해서 매가지 돌려버려요. 태극기 바라보고 있는데 매 팍 돌려가지고 십자가 다시 봐 그게 함축된 뜻은 네 잘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게 함축된 뜻이 있고 예수님의 그 능력이 파생되어서 연줄로 딸랑딸랑 주님의 성령의 연줄로 건드려 가지고 네가 이제 모든 선지자부터 시작해서 너 말고 보이지 않지만 너와 함께 있는 분으로 인하여 너는 이미 구원되었음을 그것을 가지고 예수 안에서 부르심을 입은 성도라, 예수 안에서 부르심을 입은 성도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아이고 성도 참 그 성도의 팔자가 이 세상에서 참 피곤합니다. 그냥 크림빵이나 먹고 이 말은 뭐냐면 빨리 떠나라 이 말이죠. 사도 바울처럼 빨리 떠났으면 좋겠는데 이 지옥에서 그래도 저는 모르지만 주께서 맡기시는 일들이 있을 거예요. 가정적으로. 하면서 초과적은 초과적이고 예수님의 관점에서 그건 아니다. 이게 진리다 라고 알 수 있는 그런 사명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불가능한 미션 임파서블 가능치 않는 사명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뜻이 아닌 줄로 압니다. 주께서 함께 하셔서 주의 뜻을 못난 저희를 통해서 다 성취되었음을 알릴 수 있고 나타날 수 있도록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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