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11:26-33 / 솔로몬 속의 타자
솔로몬 속의 타자
이근호
2025년 5월 14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11:26-33
(11:26) 솔로몬의 신복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또한 손을 들어 왕을 대적하였으니 저는 에브라임 족속인 스레다 사람이요 그 어미의 이름은 스루아니 과부더라
(11:27) 저가 손을 들어 왕을 대적하는 까닭은 이러하니라 솔로몬이 밀로를 건축하고 그 부친 다윗의 성의 무너진 것을 수축하였는데
(11:28) 이 사람 여로보암은 큰 용사라 솔로몬이 이 소년의 부지런함을 보고 세워 요셉 족속의 역사를 감독하게 하였더니
(11:29) 그 즈음에 여로보암이 예루살렘에서 나갈 때에 실로 사람 선지자 아히야가 길에서 저를 만나니 아히야가 새 의복을 입었고 그 두 사람만 들에 있었더라
(11:30) 아히야가 그 입은 새 옷을 잡아 열두 조각에 찢고
(11:31) 여로보암에게 이르되 너는 열 조각을 취하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주고
(11:32) 오직 내 종 다윗을 위하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뺀 성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솔로몬에게 주리니
(11:33) 이는 저희가 나를 버리고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과 모압의 신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신 밀곰을 숭배하며 그 아비 다윗의 행함같지 아니하여 내 길로 행치 아니하며 나 보기에 정직한 일과 나의 법도와 나의 율례를 행치 아니함이니라
여로보암이 등장합니다. 그는 솔로몬 밑에서 일꾼을 감독하는 사람입니다. 어릴 때부터 부지런함을 보였기에 솔로몬이 감독직을 맡겨주었습니다. 하지만 여로보암은 왕이 아닙니다. 그저 왕이 하는 일에 동원된 종일 뿐입니다. 여기서 왕이라는 자리와 종이라는 자리 사이에 차이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왕이란 일반 백성들이 왕을 세우면 언제든지 세울 수 있고, 백성들이 반대하면 얼마든지 왕이라도 그 자리에서 끌어낼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이런 사고방식은 일반인들이 자기 자기를 평소에 바라보는 사고방식입니다. 언약에 의해서 지정받은 자리는 인간들에 의해 세워지고 끌어내려지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 어떤 경우이든지 언약이 여전히 생생하게 작용하고 있는 현상으로 나타나야 하는 자리가 왕 자리입니다. 집안의 개와 종의 차이는, 개는 기르는 것이지만 종은 부리는 대상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여로보암의 인식이 솔로몬 왕의 인식과 차이납니다. 여로보암은 선지자 아히야가 찾아오기 전까지는 자신을 위한 자신이 아니라 왕을 위한 존재인 줄 알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우상을 섬기게 되자, 하나님쪽에서 언약의 실제성을 유감없이 드러내야 될 상황을 조성하셨습니다. 선지자 아히야를 보냈습니다. 이 선지자는 새 옷을 입고 나타났습니다. 선지자가 걸친 새 옷이 가차없이 찢어집니다. 여기서 우리는 누가 나쁘고 누가 옳다로 이해해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그 어떤 경우나 언약의 본질은 여전히 작용하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솔로몬이 과오로 인해 숨어있는 언약의 본질이 차갑게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선지자의 새 옷이 찢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의 아픔을 말해줍니다. 왕의 자리란 언약과 관련되어 있지 결코 민중들의 요구조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솔로몬이 우상을 섬기면서 솔로몬의 자리는 참된 언약의 왕의 자리에서 떨어져 나가서 일반인들이 생각한 왕의 자리로 전락하고 만 겁니다. 이 잘못된 왕의 자리는, 힘의 세기와 권력의 집중력으로 조성되는 그런 자리라고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었던 바가 이스라엘 내부를 통해서 들추어지게 된 겁니다.
솔로몬이 그동안 앉았던 왕 자리는 다윗 언약을 통해서 규정된 다윗 왕의 자리의 연속입니다. 여로보암 같은 경우, 자신이 왕족 출신이 아니라 아예 왕됨을 포기하고 있었는데 선지자가 계시를 들고 자기에게 찾아오는 순간부터 그는 왕의 자리가 곧 힘 있는 자의 왕으로 굳히게 됩니다.
이는 언약의 특별남이 삭제된 왕 개념입니다. 다윗의 경우,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이 진정 이스라엘 왕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한 경우가 바로 시편 51:3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즉 다윗은 출생 자체가 죄와 더불어 있는 처지였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죄인을 이스라엘을 왕으로 세워주신 하나님의 취지와 관련있습니다. 시편 32:1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이 말씀은 신약의 로마서 4:6-8은 이렇게 적용합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즉 ‘불법의 자리’로부터 출발하지 아니하면 ‘사하심’의 의미가 사라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불법’은 과연 무엇일까요? 불법이란 내 이산, 내 공간에서 벌어진 내 삶이 나를 위한 삶이라고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곧 여로보암의 삶을 말합니다. 솔로몬이 우상을 섬길 때, 잠자는 여로보암의 요소가 깨어난 겁니다.
즉 힘이 있고 권력 있으면 누구라도 왕이 될 수 있는 인식 말입니다. 왕은 다윗 언약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쟁취될 수 있는 자리라는 겁니다. 솔로몬이 다윗 언약의 복을 받아 온 나라가 번성하고 강대해지자 그 대단한 이스라엘을 솔로몬 자신을 위한 나라라고 여긴 겁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은 종에 불과한 여로보암이 왕이 자리를 넘보는 심보와 동질임을 알려주시는 겁니다.
다윗언약에 준해서 이스라엘 왕인 다윗이나 솔로몬은 진정한 언약적 종의 자리에 앉은 왕입니다. 솔로몬 이후 성경에 나와 있는 진정한 하나님의 종의 모습은 이 지상에서 형편없이 망가지는 모습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사 52:13-14)
하나님의 뜻을 충실히 받으시는 종이 왜 형편없는 몰골이 된 겁니까? 그것은 이사야 53:11에 나옵니다.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어떻게 그들의 죄악을 담당할까요?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사 53:7-8)
이 구절에서 하나님께서 반문하십니다. ‘누가 나의 종의 망하짐이 자신의 허물을 인함이라고 고백할 자가 있겠느냐’는 겁니다. 즉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즉 그분이 찔림으로 인하여 우리에게는 우리가 처리할 수 없는 허물과 우리가 손댈 수 없는 죄악된 존재라는 인식이 발생한다는 겁니다. 솔로몬이 여로보암과의 차이점은 솔로몬 본인이 망가지므로서 비로소 자기 안에 계속 다윗이 나타나므로서 솔로몬은 더는 자기를 위한 삶은 없습니다.
솔로몬은 선지자가 되었고 예언자가 된 겁니다. 마치 약속의 땅에서 만나가 그치면서 떡으로 사는 것이 생명이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것이 생명임을 드러내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 누가 성도일까요? 자신이 세상에서 애써서 얻어낸 모든 것을 내 것이라는 여기는 바로 이것이 불법인 줄 아는 자가 성도입니다. 속에 있는 영원한 언약에 의해서 한시적인 우리 것은 늘 갉아 먹혀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밥값한다고 해서 불법이 아닌 것이 아님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