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설교, 강의(이근호)/히브리서

히브리서 11:6-7 / 방주 안의 세계

정인순 2025. 5. 11.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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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주 안의 세계 

 

이근호
2025년 5월 11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1:6-7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하나님을 기뻐시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저없이 강행하신 전면 물 홍수 심판에 대해서는 속시원한 감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즉 모든 인간은 물에 빠져서 죽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하나님의 일관성을 발견하는 자가 믿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금지를 인간에게 내렸습니다.(창 2:17)

이 금지령에 대해서 인간들은 위반으로 나왔습니다. 마귀의 속성이 반영해서 그러했습니다. 즉 하나님만 알고 우리 인간들이 모르는 것이 있음에 대해서 인간들은 반항한 겁니다. 이 위반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위반으로 맞서십니다. 이 두 번째 위반이란, 인간들이 자기들만의 세상을 구성하면서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법을 따로 마련해두기 때문입니다.

이런 법체계, 혹은 인간들 나름대로 진리체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위반되는 방식으로 쳐들어가시는 겁니다. 이 또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야 인간 세계는 근원적으로 자신들에게 옳고 그름을 판정한 최종 기준을 세울 자격이 없음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위반에 대한 위반’이 새로운 금지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인간을 심판하시고 구원될 자는 다른 조치에 의해서 건져내시는 방식입니다. 노아도 하나님에 의해서 마땅히 심판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노아에게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요소’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방주’입니다. ‘방주’가 곧 상(賞)입니다.

즉 전면적인 심판장을 통해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요소’를 그 심판 안에 기입시키신 겁니다. ‘심판 외의 구원’이 아니라 ‘심판 한가운데의 구원’입니다. 따라서 구원에 속한 자들은 왜 하나님께서는 전면적인 폭력을 통해서 세상을 재편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모든 인간을 죽이는 방식 없이는 상(賞)도 없고 영생도 없습니다.

노아 식구가 탄 방주 안에서 전면적인 물 심판 끝나고 재편될 질서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피 중심’의 세상입니다. “다만 고기를 피째 먹지는 마라. 피에는 생명이 있다. 너희가 생명의 피를 흘리면, 내가 반드시 복수를 할 것이다.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것이 짐승이든 사람이든 피흘리게 한 사람의 형제이든 간에 내가 복수를 할 것이다.”(창 9:4-5)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피는, 그 연기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희생 제물의 피입니다. 이는 인간은 이미 심사가 끝났다는 말입니다. 홍수 안에서 마땅히 죽은 자들임이 명확합니다. 그들은 생각하는 바가 어려서 다 악합니다.(창 8:21) 악하디 악한 인간들을 모조리 제거하고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는데 있어 하나님의 창조 결정체가 필요합니다.

그 창조 결정체가 창세기 7:2-3애 나옵니다. “모든 깨끗한 짐승은 암컷과 수컷 일곱 마리씩, 깨끗하지 않은 짐승은 암컷과 수컷 한 마리씩 데리고 들어가거라. 하늘의 새도 암컷과 수컷 일곱 마리씩 데리고 들어가거라. 그래서 그들의 종자를 온 땅 위에 살아 남게 하여라.”

정결한 것을 더러운 것들과 방주 안에 동승시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뻐시게 하는 것을 더러운 제물이 아니라 정결한 제물의 희생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일련의 작업은, 이미 인간들은 죽어 마땅하기에 인간들이 내세우는 그 어떠한 거룩이나 믿음도 하나님의 기쁨하심의 이유가 될 수가 없습니다.

동승한 정결한 짐승의 잡아 죽임으로서 제물이 된 정결한 피에 앞으로의 재편된 세상의 주도권이 모아지게 됩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믿고자 해도 그 믿음을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지 않는 이유는, 믿음이란 없는 데서 생기고, 죽은 데서 살아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는 데서 믿음이 나타나는 것은 인간들의 몫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9:24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자존심이 있고 인간은 그 자존심을 돌파하지 못합니다. 마치 인간들이 대자연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대자연적인 규모로서 이 세상을 몰살하셨습니다. 그동안 인간들은 대자연 속에 갇혀 있었던 겁니다. 대자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집단뿐만 아니라 각 개인별로 하나님에 의해서 저주받아야 합니다. 자기 백성을 골라 천국에 넣어주시는 대책은 하나님 자신의 체험을 공유코록 하는 겁니다.

상(賞)이란 예수님의 체험에 의해서 동일 체험자를 포집하는 기능을 지닌 새로운 공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아버지가 주시는 시험 속에서 지내오셨습니다. 이는 마치 구약 요나 선지자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 있는 처지와 같습니다. 요나는 자신이 죽기 위해 자신의 겅력한 요구에 의해서 바닷물이 뛰어들었습니다.

그것으로 자신이 죽은 줄로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살았습니다. 물고기 배속에서 살았습니다. 이는 곧 ‘이미 죽은 자로서 살아 있음’입니다. 그는 다시 물고기 배속에서 빠져 나갈 수 없는 불가능함을 산 채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성도님의 형편도 이와 같습니다.

이미 존재하는 자는 다시 무존재로 돌아갈 수 없고, 이미 살아 있는 도로 죽을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자신에게 믿음이 생길 그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갈등보다 심각한 갈등이요 번민을 안겨줍니다. 하지만 이러한 갈등은 인간들로 하여금 ‘나를 쳐다 보며 살거냐 아니면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보며 살거냐’라는 갈등 공간 속에 이미 들어와 있음을 말해주는 겁니다.

즉 복음으로 인한 갈등은 주님께서 이 세상에 다녀가신 코스는 동일한 노선에 들어와 있음을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실 상(賞)은 이러한 주님께 겪었던 시험 속에서 생겨나는 겁니다. 이 시험을 통해서 자신이 더 이상 자신에게 의미있는 게 나올 게 없음을 알게 됩니다.

마치 누가복음 14:12-14에 보면,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갚을 것이 없다’는 말은 더는 자신을 돌아보고 자기 신앙이나 행함에 의미두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마치 중풍병자가 중풍병만 낫게다고 주님께 왔지만 주님께서는 예상 못한 ‘죄사함’을 주는 식으로(마 9:5) 성도가 예상 못한 희열을 이 세상 삶을 통해 제공해주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땅에 태어남 자체가 죽기 위해 태어났음을 기쁘게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