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열왕기상

열왕기상 11:1-8 / 사랑이 지나가면

정인순 2025. 4. 30.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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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지나가면

 

이근호
2025년 4월 30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11:1-8

(11:1)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11:2) 여호와께서 일찍이 이 여러 국민에게 대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와 서로 통하지 말며 저희도 너희와 서로 통하게 말라 저희가 정녕코 너희의 마음을 돌이켜 저희의 신들을 좇게 하리라 하셨으나 솔로몬이 저희를 연애하였더라

(11:3) 왕은 후비가 칠백 인이요 빈장이 삼백 인이라 왕비들이 왕의 마음을 돌이켰더라

(11:4) 솔로몬의 나이 늙을 때에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 부친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으니

(11:5)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좇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좇음이라

(11:6)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 부친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좇음 같이 좇지 아니하고

(11:7)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 산에 산당을 지었고 또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을 위하여 그와 같이 하였으며

(11:8) 저가 또 이족 후비들을 위하여 다 그와 같이 한지라 저희가 자기의 신들에게 분향하며 제사하였더라

솔로몬의 통치 전반부에는 잘했는데 후반부에서 큰 과오를 저질렀다는 식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전반부를 도리어 신기하고 놀랍게 여겨야 합니다. 인간에게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여겨서야 합니다. 결국 솔로몬이 여자를 좋아하고 우상을 섬긴 것은 그동안 가리워진 하나님의 사랑이 제대로 드러나는 사례라고 보시면 됩니다.

솔로몬은 태어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이름이 지워집니다. 모세나 이삭처럼 말입니다. 그의 이름은 ’여디디야‘였습니다.(삼하 12:25) 즉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입었다’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입었으면 더욱 더 그 사랑에 증진하고 보답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일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하심을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가리고 모르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자기 사랑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자기 사랑에 미처 있습니다. 자기 잘난 맛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행동에 매료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한시도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지 않는 경우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서도 하나님께서 인간의 본질과 본성을 노출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솔로몬의 아버지 다윗은 부하의 아내인 밧세바와 간음하여 아기를 임신시켜 아기가 출산합니다. 그런데 그 아기가 아프기 시작합니다.

다윗은 아기 아버지로서 책임감을 다하기 위해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죄가 없는 아기를 죽이지 말고 자신을 죽여달라는 식으로 금식합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아기를 금방 죽이지 않고 아픈 상태를 이어가서 다윗으로 하여금 이 사태에 다윗과 관련성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인간적 생각같으면 다윗이 진심으로 죄를 자복했으면 죄없는 아기를 살려줄 만도 하는데 하나님께서 가차없이 아기를 죽입니다.

그런데 아기가 죽었다고 소식을 접하고 다윗은 태도가 돌변합니다. 무슨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일상에 복귀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아기가 내 쪽으로 오지 못하게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면 이는 내가 죽은 아기 쪽으로 가게 하신다는 뜻”이라고 정리합니다. 즉 다윗이 아무리 회개하고 반성한다 할지라도 죽은 아기의 운명을 변경할 수 없듯이 자신도 또한 같은 입장이라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언약 안의 세계 사정을 다윗에게 제대로 알려주십니다. 그것은 언약을 통해 주어지는 사랑은 인간의 그 어떤 선한 행동이나 반성으로 가리워져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차라리 언약은 기어이 인간의 죄악된 본성을 드러내게 하는 능력이 나타납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하며 새 아기가 나오는데 여기서 주어진 것은 ‘여디디야’ 곧 ‘하나님의 사랑을 입음’입니다.

이 아기는 다윗이 낳은 아기가 아닙니다. 다윗 언약에서 나온 아기입니다. 이삭처럼 말입니다. 언약이 제공되는 일방적인 그저 주시는 사랑이 인간의 잘남으로 가리워져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요한일서 4:10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원칙을 하나님께서 그 어떤 경우도 양보없이 드러내십니다. 어떤 노래에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그 사람 나를 보아도 나는 그 사람을 몰라요. … 그대 나를 알아도 나는 기억을 못합니다.” 사실 이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기억하고 알기에 상대가 자신을 보고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표현을 할까요? 그것은 사랑이 지나가고 나고 헤어지고 나면 그동안 상대가 자신을 일방적으로 사랑했음을 비로소 느끼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동안 상대의 사랑보다 자기 쪽에서 상대에게 보낸 그 사랑에 스스로 매료된 겁니다. 이단들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합니다.

“잘하고 있으니 끝까지 잘하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말합니다. “네가 잘하고 있는 듯하지만 언젠가는 불신앙으로 돌아설 것이다. 이를 기뻐하라, 너는 육이니까” 솔로몬은 이방여인들을 좋아했는데 신약에 와서 이런 것을 ‘육이 육을 좋아하는 것’으로 정리합니다. 솔로몬이 많은 여자들과 사랑을 나누고 내린 결론은 이러합니다.

“내 마음에 찾아도 아직 얻지 못한 것이 이것이라 일천 남자 중에서 하나를 얻었거니와 일천 여인 중에서는 하나도 얻지 못하였느니라”(전 7:28) 따라서 잠언에 나오는 식으로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잠 31:30)

그러니까 남자든 여자든 결국 늙으면 모두 무너지게 되니 그 전에 여호와의 말씀을 지켜라는 겁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 보면 이러한 솔로몬의 대책은 더욱 최종적으로 마무리됩니다. 그것은 바로 “육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는 원칙입니다. 육이 아니라 영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남자가 되었든 여자가 되었든 인간의 육적 욕망이 인간으로서 통제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시게 되면 인간은 육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곧 생명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뵐 수가 있습니다. ‘말씀의 다 이루심’ 때문입니다. 따라서 결혼은 육과 육의 만남이 아니라 말씀과 말씀의 교류의 연합입니다.

에베소서 5장에서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 5:30-32) 즉 예수님의 몸으로서 여자와 예수님 몸으로 남자로 예수님에 의해서 다루어집니다.

말씀의 능력, 주님의 다 이루심의 능력이 여자로 하여금 남자에게 복종하게 하시고, 남자로 하여금 여자를 사랑하게 합니다. 어떻게요? 자신의 죄를 경유해서 말입니다. 주님의 일하심을 가리는 나에 대한 자기 사랑을 죄로 규정하시는 능력이 작용하는 겁니다. 즉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이 신기하게 계속 하나님께 살려내고 있음을 놀랍고 고맙고 감사토록 해주시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님을 아는 게 곧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인 것으로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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