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36:20-26 / 말씀의 죽음
말씀의 죽음
이근호
2025년 4월 20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6:20-26
(36:20) 그들이 두루마리를 서기관 엘리사마의 방에 두고 뜰에 들어가 왕께 나아가서 이 모든 말로 왕의 귀에 고하니
(36:21) 왕이 여후디를 보내어 두루마리를 가져오게 하매 여후디가 서기관 엘리사마의 방에서 가져다가 왕과 왕의 곁에 선 모든 방백의 귀에 낭독하니
(36:22) 때는 구월이라 왕이 겨울궁전에 앉았고 그 앞에는 불 피운 화로가 있더라
(36:23) 여후디가 삼편 사편을 낭독하면 왕이 소도로 그것을 연하여 베어 화로 불에 던져서 온 두루마리를 태웠더라
(36:24) 왕과 그 신하들이 이 모든 말을 듣고도 두려워하거나 그 옷을 찢지 아니하였고
(36:25) 엘라단과 들라야와 그마랴가 왕께 두루마리를 사르지 말기를 간구하여도 왕이 듣지 아니하였으며
(36:26) 왕이 왕의 아들 여라므엘과 아스리엘의 아들 스라야와 압디엘의 아들 셀레먀를 명하여 서기관 바룩과 선지자 예레미야를 잡으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그들을 숨기셨더라
말씀을 무시하는 세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말씀에 대해서 강한 적개심으로 가득 차 있는 세상에 대해서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온갖 분노와 비난을 자진해서 불러일으키는 일이 됩니다. 예레미야나 바룩이 여호야김 왕에게 말씀을 전하고 들리게 한다는 그 자체가 참으로 위험한 일이 됩니다.
마치 다니엘 세 친구가 불 속에 들어가야 하는 법의 존재를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우상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평소에 왕이 세상을 어떠한 자세나 태도를 갖고 있느냐를 뻔히 알면서도 바룩은 구애받지 않고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모습은 왕이 품고 있는 본심을 밖으로 터트리는 계기가 됩니다.
말씀을 대하는 자세가 평소에 그 사람이 어떤 식으로 세상을 살고 있느냐를 유감없이 반영해주게 됩니다. 사람은 자체적으로 판단력과 세상에 대한 이해력을 갖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평생토록 자신은 자신에게서 나오는 판단력으로 무사히 살아가고 있고 자신에 대한 신뢰성에 충성을 보냅니다.
따라서 사람이 성경을 끌어당겨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성경에 대한 실효성과 유혀성은 어디까지나 본인이 판정내린다는 전제 하에 그렇게 됩니다. 즉 말씀은 듣고 보되 말씀 자체의 활동이나 작용력에 대해서 전혀 믿을 의도가 없는 겁니다. 참고는 할 수는 있지만, 전적으로 성경에다 목숨을 마음을 걸 생각은 추호도 없는 겁니다.
성경 말씀을 존중해주겠지만 성경 내용을 평생 살아온 자기 인생관보다 더 소중하게 여길 마음은 없습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결집되어 여호야김은 분노는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 앞에서 반응이 극히 정상적인 현상이 아닐까요?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왕 뿐만 아닙니다. 신하들까지 말씀을 비웃고 말씀 제거에 찬동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말씀 없이 잘 살아온 데서 오는 자신감 아닐까요? 쉽게 말하면, “나는 그동안 말씀없이도 잘 살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것은 말씀에 대해서 엄청나게 오해한 겁니다. 말씀은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겁니다. 즉 “나는 그동안 말씀을 사랑했지만 어태껏 살아있다. 정말 이상하다”라고 이 상황을 해석되어야 합니다.
즉 말씀은 말씀 쪽에 선 자들은 말씀과 더불어 죽이는 일을 유발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생겨난 결과는 조기 죽음이었습니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요 10:16-17)
예수님의 말씀 해석은 그 안에 구원자의 죽음이 들어 있어 거기서 나오는 해석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핍박했던 유대인들의 해석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으로 그들이 잘 살기를 원했던 겁니다. 그 어떠한 고난과 핍박도 하나님께서 면해 줄줄 알았던 겁니다. 서러움없이, 오해없이 잘 그냥 넘어갈 줄 알았던 겁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 앞에 설 때, 예수님의 육신과 활동 그 자체가 말씀이요 해석이었던 겁니다. 유대인들은 말씀을 잘 해석해서 그대로 실천에 옮기면 심판되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모세 율법은 바로 자신이 잘 살고 행복할 조건을 전제로 말씀 해석하는 자들을 도리어 심판하신다는 것이 예수님의 해석입니다. (요 5:45)
‘살겠다’는 인간의 본심이고 본능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성경을 모독하는 것은 일관성있는 그들의 본질입니다. 그 예가 마태복음 22:24-34에 나옵니다.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 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즉 말씀 안에 십자가가 들어 있고 부활의 능력도 들어 있는데 인간들은 이것을 빼고 해석한 겁니다. 왜 이 요소를 빼버린 걸까요? 그것은 다들 살아 생전에 살았던 그 방식을 자신의 행복조건으로 고수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죽기 싫은 것은 기존의 것 안에서 못벗어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부활은 ‘새로움’입니다. 자신이 상상도 못한 새로움입니다. 말씀 안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너는 벌써 죽었기에 너는 네가 죽었다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자로 부활되었다”는 겁니다. 곧 성도는 죽음의 대기자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이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그동안 살아왔던 방식, 곧 대인관계로 형성된 삶이 아니라 예수님에 의해서 살려냄을 당한 방식의 세계로 진입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영원까지 이어집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8) 즉 사랑이란 부활의 능력에서 생겨난 것이기에 사랑은 죽음마저 이깁니다. 성도가 사랑을 갖고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성도를 가집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편지, 곧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고후 3:3) 이 사랑의 편지는 그저 문자 해석으로 고갈되는 것이 아닙니다.
백지로 보낸 편지처럼 ‘읽어도 읽어도 끝이 없이 새로움’이 솟아나옵니다. 그리고 주님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이 땅에 살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겁니다.(고후 5:8)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이미 죽은 적이 있는 사랑의 편지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