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설교, 강의(이근호)/히브리서

히브리서 10:37-39 / 앞 뒤 경로

정인순 2025. 4. 13. 16:34

음성 동영상

앞 뒤 경로 

 

이근호
2025년 4월 13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0:37-39

10:37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10:38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0: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천국은 ‘달라지지 않으면’ 못 들어가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주인공으로 마련하신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어디서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뒤로 나아가면’ 안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뒤쪽에 이미 하나님께서 심판으로 허물어 버리는 식으로 자기 백성을 앞쪽으로 몰아세우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여기서 어떤 경로가 발생됩니다. ‘앞-뒤’로 형성된 경로 말입니다. 그런데 보통 인간들 입장에서는 이 경로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디에 있든지 머물고 있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앞이 되었든 뒤가 되었든 그게 인간들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라 여기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중요시 여깁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은 굳이 안 달라져도 상관없다고 여깁니다. ‘내가 여기 있음’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존개한다는 것이 제일 순위가 되는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앞-뒤 경로’가 인간의 존재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시가 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4:16-17에 보면,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믿는 자’라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특이성이 그들 자신에게도 일어나는 자가 믿는 자 계열 속에 들어가 있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특이성으로 인해 신앙인은 ‘달라지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 특이성이란 바로 ‘없는 데서 있게 되고, 죽은 자가 살아 난’바로 그 특이성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 것은 바로 ‘이삭’에게 일어난 변화입니다. 이삭은 없는 데서 생겨났고 죽은 데서 살아났습니다. 이 현상은 바로 아브라함 자신이 변화된 자 되었음과 연관있는 현상이었습니다.

이삭에게 일어난 효과가 아브라함 자신에게 은혜와 믿음이 선물로 주어지게 했다는 겁니다. 이점은 아브라함의 관련된 조카 롯의 가정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누가복음 17:32-33에 보면, “롯의 처를 생각하라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롯의 처가 뒤돌아 본 것은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본능에서 나온 행동이었다는 겁니다. 롯의 처는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됨으로 구원되는 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기존의 자신의 존재를 지키는 식으로 구원을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롯의 처가 죽는 지점은 소돔과 고모라가 아닙니다.

거기서 벗어나는 죽었습니다. 소위 구원되고 난 뒤에 멸망당한 겁니다. 어떻게 이런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롯의 입장에서, 아브라함과 관련된 언약의 원리가 바로 ‘없는 데서 있게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즉 언약에 의한 구원이란 자신을 육신을 살리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특이성 자체의 구원입니다. 롯은 여기에 참여된 겁니다.

뒤로 가는 것은 안 되고 앞으로 계속 나아가 특이성 있는 경로를 나타내는 것이 믿는 자의 역할이라는 겁니다. 이 경로는 민수기 광야 생활을 통해서 잘 나와 있습니다. 민수기 11:5-6에 보면, “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 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이러한 이스라엘의 불만과 원망을 가볍게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지금 애굽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겁니다. 이 마음을 누가 함부로 원망할까요? 민수기 14장에 보면 노골적으로 그들의 집단 마음이 노출됩니다. “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지라  그 땅을 탐지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그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하는 동시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민 14:4-7,10)

여기서 대다수의 백성들은 폭력 성향을 드러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앞으로도 아니고 뒤로도 아니다. 지금 자신의 존재를 살리겠다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의 의사를 방해하면 돌로 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곧 지금 그들의 본심은 자신들이 죽을 지경이라는 겁니다.

이러한 절박함을 오늘날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원합니다. 건강하고 돈이 풍성하고 아무런 고난도 없기를 바할 뿐입니다.(시 73:3-5) 하나님 챙기고 하나님 고려하는 것은 그 다음 순번일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생각해 놓은 뒤쪽은 심판이 집행되면서 따라옵니다. 여리고성은 무너뜨리고 그 여리고성에 무슨 개발을 하려는 자는 집안의 자식들이 죽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수 6:26)

하나님의 뜻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에 담겨 있는 이런 심판의 사건을 최초의 범죄 사건과 연관지어 그 경로 안에 담아 두시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도저히 인간이 구원될 수가 없지만 언약이 주는 은혜로 인하여 ‘없는 자를 있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방식’으로 천국 백성되게 하신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 온전히 복종하는 순간, 인간이 행하는 모든 것은 의미없고 소용없는 일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 따라서 구원을 얻은 자에게는 이처럼 최초의 죄와 최후의 구원이 함께 배합되어, 눈에 보이는 이 세상과 구별되는 경계선 역할을 하게 하시는 겁니다.

로마서 7장에서 사도는 선과 악이 함께 있는 육신으로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가 바로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성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5)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주시는 특이성을 품고 움직이는 주님의 촉수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