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예레미야

예레미야 34:17-22 / 쪼개진 하나님

정인순 2025. 3. 30.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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쪼개진 하나님

 

이근호
2025년 3월 30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4:17-22

(34:17)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나를 듣지 아니하고 각기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언한 것을 실행치 아니하였은즉 내가 너희에게 자유를 선언하여 너희를 칼과 염병과 기근에 붙이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너희를 세계 열방 중에 흩어지게 할 것이며

(34:18) 송아지를 둘에 쪼개고 그 두 사이로 지나서 내 앞에 언약을 세우고 그 말을 실행치 아니하여 내 언약을 범한 너희를

(34:19) 곧 쪼갠 송아지 사이로 지난 유다 방백들과 예루살렘 백성들과 환관들과 제사장들과 이 땅 모든 백성을

(34:20) 내가 너희 원수의 손과 너희 생명을 찾는 자의 손에 붙이리니 너희 시체가 공중의 새들과 땅 짐승의 식물이 될 것이며

(34:21) 또 내가 유다 왕 시드기야와 그 방백들을 그 원수의 손과 그 생명을 찾는 자의 손과 너희에게서 떠나간 바벨론 왕의 군대의 손에 붙이리라

(34:2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그들에게 명하여 이 성에 다시 오게 하리니 그들이 이 성을 쳐서 취하여 불사를 것이라 내가 유다 성읍들로 황무하여 거민이 없게 하리라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사람들은 대단히 궁금해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쪼개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쪼개짐’을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이해하는 신이란 자신의 멀쩡함과 우수함을 확인해주고 격려해지고 칭찬해주는 그런 신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자연스럽게 우상을 선호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상의 특징은 ‘쪼개짐’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멀쩡한 것처럼 하나님도 멀쩡하기를 원합니다. 건강하고 우수하고 온전한 존재끼리 서로 통하게 있다고 믿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편 135:16-18에 보면, “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그 입에는 아무 기식도 없나니 그것을 만든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것과 같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굳이 우상의 눈과 귀가 코와 입이 살아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을 만든 인간에게 눈과 코와 귀와 입이 있으면 그것으로 충당되기 때문입니다. 즉 주도권은 어디까지나 신을 만들어 믿는 인간 자신에게 있으면 된다고 여깁니다. 신이란 인간에게 있어 자기 내면을 투영해서 상상의 대상입니다.

‘만든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같다’는 말은 인간이 곧 자신에게 우상이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의 뜻은 송아지를 갈라놓고 그 가운데로 들어서라는 겁니다. 쪼갠다는 것은 그 안에 틈을 마련하는 것이고 그 틈에서 비로소 새로운 것이 나오는 겁니다. 즉 쪼개지지 아니하면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랑이란 것이 바로 이런 겁니다. 사랑이란 대상을 통해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 겁니다. 그런데 기존에 것에 묶여 살던 자는 그 새로움에 기꺼이 굴복하게 됩니다. 이전에 내가 몰랐던 바가 상대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은 신을 섬기는 모든 인간들의 자연적인 자세요 태도입니다.

하지만 제물이 쪼개지고 그 쪼개진 사이, 틈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만나자는 것은 신을 섬기는 그 인간도 쪼개져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쪼개짐이 없이는 참 하나님과 만나지를 못하는 겁니다. 이런 사례가 구약 요나서에 나옵니다. 요나 4:5-9에 보면,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 하니라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 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씹게 하시매 곧 시드니라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나는 자칭 하나님의 충실한 종이라고 자부했습니다. 하나님의 동역자이기에 자신의 생각이 곧 하나님의 생각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에 대한 생각을 변경시켰습니다. 이 변경에 의해서 요나의 본심이 여지없이 들통났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에게 화를 냅니다.

이런 식이라면 하나님과 함께 일하기가 곤란하다고 말입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여깁니다. 요나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마음이 쪼개지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해도 자기 마음을 자신이 쪼개지 못합니다. 이럴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식으로 시간과 공간을 사용하십니다.

인간들은 나름대로 자기를 위한 자기만의 역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는 시공간을 통해서 자기만의 세계를 구성하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규정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쪼개지므로서 이 세상의 모든 시공간을 통해서 예수님만을 솟구치게 하십니다. 하나님 말씀의 현실만이 참된 현실임을 알리십니다.

요나는 이점을 몰랐습니다. 그가 진정 하나님의 종이라면 하나님과 더불어 일하시면서 필히 자신의 쪼개짐이 발생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요나의 자리에서 ‘송아지 사이와 틈’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의 사례를 들면 이러합니다. “저희가 두 사람을 천하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저희가 기도하여 가로되 뭇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의 택하신 바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저가 열한 사도의 수에 가입하니라”(행 1:23-26)

왜 하나님께서 하나님께 알고 계시는 맛디아를 바로 지정하지 아니하시고 ‘제비뽑기’를 위해 다른 후보자를 세우시는 겁니까? 이것은 그 어떤 인간의 판단과 결정과 선택이 결코 하나님의 뜻을 대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새로움으로 인하여 인간은 자신의 속이 깨어져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서 여기에 관해서 보편적인 원칙이 세워집니다.

하갈은 잉태했고, 이스마엘은 태어났습니다. 아무런 문제될 게 없어보입니다. 하갈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본인이 얼마나 황당하게 느낄까요? “너는 왜 잉태했고 너는 왜 해산하면서 배가 아파했는가?”라고 말입니다. 자신이 있기 위해 필히 잉태해서 해산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참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어보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4:26-28에 보면,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왜 너는 사라처럼 잉태치 못했느냐”고 하갈보고 따진다면 하갈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어처구니 없이 느낄 겁니다. ‘잉태치 못했기에 비로소 약속의 자녀’라는 겁니다. 이는  쪼개지지 않는 인간에 의해서 가리워진 실제 현실을 ‘잉태치 못하고 태어난 자’로 인하여 다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더 이상 내가 원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모든 선택권을 앗아가서 일방적으로 결정하신 하나님은 나의 쪼개짐을 유도하고 그 현장에 조성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여전히 몰랐던 주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날마다 우리 자신이 쪼개져서 나를 포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