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예레미야

예레미야 34:8-11 / 주님의 노예

정인순 2025. 3. 23.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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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노예

 

이근호
2025년 3월 23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4:8-11

(34:8) 시드기야 왕이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백성과 언약하고 자유를 선언한 후에 여호와께로서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34:9) 그 언약은 곧 사람으로 각기 히브리 남녀 노비를 놓아 자유케 하고 그 동족 유다인으로 종을 삼지 못하게 한 것이라

(34:10) 이 언약에 참가한 방백들과 모든 백성이 각기 노비를 자유케하고 다시는 종을 삼지 말라 함을 듣고 순복하여 놓았더니

(34:11) 후에 그들의 뜻이 변하여 자유케 하였던 노비를 끌어다가 다시 복종시켜 노비를 삼았더라

힘의 서열화로 구성되어 있는 이 세상에서 자신을 절대적 노예로 인식하는 것을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나타나는 노예정신이, 이 세상 그 누라도 자신을 주인으로 생각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곧 이스라엘이 전에 살았던 애굽 나라와 거기서 빠져나온 후 생겨날 나라와의 본질이 차이가 남을 뜻하는 겁니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가 어떤 모습을 마땅히 보여야 하는지를 설명하시려는 겁니다. 구약 이스라엘에 있어 소위 율법을 안다고 자부하는 시드기야 왕은 율법에 준해서 같은 이스라엘 동족의 노예를 풀어주라고 명령합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전에 풀어주었던 그 노예를 다시 자신의 노예로 삼았습니다.

율법에서는 노예를 두 종류로 나눕니다. 여호와를 모르는 이방민족의 노예와 여호와로 인하여 민족인 이스라엘 동족에서 얻은 노예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노예들에 대해서 다른 률을 적용하라는 겁니다. 우선 레위기 25:44-45에 보면, “ 너의 종은 남녀를 무론하고 너의 사면 이방인 중에서 취할지니 남녀 종은 이런 자 중에서 살 것이며 또 너희 중에 우거한 이방인의 자녀 중에서도 너희가 살 수 있고 또 그들이 너희 중에서 살아서 너희 땅에서 가정을 이룬 그 중에서도 그리 할 수 있은즉 그들이 너희 소유가 될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신명기 15:12에서는 이스라엘 노예에 대해서 달리 언급되어 있습니다.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육 년을 너를 섬겼거든 제칠년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것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다같은 노예임에도 불구하고 달리 취급해야 되지요?

그것은 이방민족에서는 인간이 인간에 대해서 주인의식으로 대하게 마련이라는 점입니다. 즉 이방세계에서는 힘과의 위계질서가 잡혀 있어서 힘이 있는 자가 합법적으로 힘 없는 자에 대해서 주인이 될 수 있는 관계를 허락하는 사회입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그 어느 누구도 인간이 인간에 대해서 주인행세를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을지라”(출 22:21-23)

즉 이스라엘은 남의 민족에서 얹혀 살았다는 겁니다. 결코 자신들이 주인노릇을 할 수 없는 세계에서 종이 된 채 400년을 지내온 겁니다. 이는 그 누구도 그 누구의 주인이 될 수 없음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들 중에 그 누구도 그 누구를 애굽의 힘 질서 체계를 붕괴시키고 빼낼 수 있는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있다면 오로지 하나님뿐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법을 세운 겁니다. 반면에 세상에서 인간의 만남은 각자 법과 계약을 만들어 가지고 만나게 됩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당신이 이렇게 해주시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계약에는 필연적으로 벌칙 조항이 만들어집니다. 이 벌칙조항을 실제로 행사하는 과정에서 누구 주인이며 누가 종인지 드러나게 됩니다.

이로 보건대 누가 주인이며 누가 종인지는 자체적으로 법을 제정하지 않는 쪽은 종이되고 자체적으로 법을 제정하게 되면 주인이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드기야 왕이 ‘이스라엘의 노예에 대해서는 풀어주라’고 명령을 합니다. 그런데 그 명령을 들어주는 척하면서 도로 예전 종이었던 자를 도로 종으로 삼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 내부에서 ‘종 신분을 통해서 나타나는 자유의미’가 구현되지 못합니다. 예를 들면, “저는 왕의 말대로 종을 풀어주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율법을 제대로 지킨 것 맞지요?”라고 나올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뜻은, ‘네 자신이 철저하게 나의 종이 될 수 있느냐?’입니다.

풀어준 종을 다시 거두어드렸다는 말은 힘의 질서 체제에 있어 여유분의 힘 가진 자들은 여유분의 힘을 노리는 자들을 노예질서 안으로 끌어당길 수밖에 없는 겁니다. 주인이 원해서 그러하지만 노예된 자들이 더 적극적으로 옛 주인의 노예가 되고 싶은 겁니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의 본 취지가 나타날 때까지 ‘노예를 7년 만에 풀어주라“는 뜻을 제대로 반영될 수가 없습니다.

신약에 나타나는 종과 주인의 개념, 즉 최종적인 종과 주인의 개념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마태복음 25장, 소위 ’달란트 비유‘라는데 나옵니다.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마 25:19,24-27)
여기서 악하고 게으른 종이 나옵니다. 당연히 주인은 격분하고 그 종을 종답지 못한다는 이유로 단호하게 심판해 버립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은 여전히 자신을 자기에게 주인으로 간주합니다. 곧 주인을 대하면서 자기를 지키려는 법과 계약을 가지고 주인에게 다가갑니다. 하지만 이 종은 주인의 의지를 전혀 몰랐던 종으로 낙인찍힙2니다.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 봐야 될 사실은, 한 달라트를 가지고 악한 종이 땅에 묻었다는 겁니다. 그것은 한 달란트를 보이지 않게 처리했다는 것은 주인의 존재가 종 자기 존재를 방해가 된다는 것을 뜻입니다. 즉 주인의 부재(不在)가 금전의 부재로 묘사되고 있는 겁니다.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사전에 주인께서 종들에게 자신의 원칙과 처벌 기준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즉 미리 한 달란트를 받은 종에서 ”혹시 힘들고 이익이 남기기가 어렵거든 차라리 그 한 달라트를 은행에 맡겨 이자라도 챙기게 하라“고 사전에 지시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 말은 종에게 그 어떤 법과 계약할 자격조차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아는 자가 제대로 된 하나님의 종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전적으로 우리 자신을 종으로 다루시는 그 주인님의 존재 자체만으로 고마움과 감사됩니다. 왜냐하면 종의 인생은 끝내 주인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이게 진정한 자유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행할 수 있는 법 말고 새로운 법에 의해 종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