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예레미야

예레미야 34:2-5 / 한 가지 소원

정인순 2025. 3. 16.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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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소원

 

이근호
2025년 3월 16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4:2-5

(34:2)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는 가서 유다 왕 시드기야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성을 바벨론 왕의 손에 붙이리니 그가 이 성을 불사를 것이라

(34:3) 네가 그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반드시 사로잡혀 그 손에 붙임을 입고 네 눈은 바벨론 왕의 눈을 볼 것이며 그 입은 네 입을 마주 대하여 말할 것이요 너는 바벨론으로 가리라

(34:4) 그러나 유다 왕 시드기야여 나 여호와의 말을 들으라 나 여호와가 네게 대하여 이같이 말하노라 네가 칼에 죽지 아니하고

(34:5) 평안히 죽을 것이며 사람이 너보다 먼저 있은 네 열조 선왕에게 분향하던 일례로 네게 분향하며 너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슬프다 주여 하리니 이는 내가 말하였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오늘 본문에 한 인물이 나옵니다. ‘시드기야’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누구에게 지목하여 연급하신다는 말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과 관련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어떤 점에서 관련있는가 하며는 언약을 버리면 ‘이렇게 망한다’를 보여주는 것으로 관련있습니다. 이는 인간은 아무리 애써도 언약을 성취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세계는 부단히 전쟁을 벌리고 있습니다. 전쟁에서 초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의 두 가지로 인하여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자원’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한정된 자원을 두고 끊임없이 그 자원을 획득하여 부를 일구어나가기 때문입니다. 자원을 부족하다는 것은 자신의 종족들의 목숨이 위태로운 겁니다.

따라서 가만 앉아서 죽어나 나가 싸워서 조기에 죽으나 다른 선택지가 없는 겁니다. 대학입시나 공무원 시험, 취직 시험도 마찬가지이고 아파트 청약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번째로 전쟁을 하는 이유는 명예 때문입니다. 창세기 4장에 그 예입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는 것은 형 본인의 명예가 손상되었기 때문입니다.

시드기야가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고 바벨론 앞에서 버틴 것은 그 당시 정치 기류가 바벨론 외의 국가들이 연맹을 조직해 같이 대들면 바벨론을 이길 수 있는 기대 때문입니다. 그 중심에는 애굽나라가 있었던 겁니다. 따라서 시드기야도 어쩔 수 없이 주변에 전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의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홀로 점잖고 착하고 조용스레 살 수가 없습니다. 자원(=돈)을 잔뜩 모아놓았다고 해서 안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잠언 13:24에 보면,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돈에 해당되는 걸까요 아니면 명예에 관련 일일까요? 명예에 관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자식은 부모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파괴할 의사가 없습니다. 자기에게 명예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차마 자식을 때리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말씀을 안 자는 하나님과 대적되는 사이가 됩니다.

즉 “자식을 못 때리겠다”, “아니야 자식을 때려야 해”를 두고 양보없는 투쟁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시드기야가 망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준 상대가 율법을 거부하는 경우가 일어났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율법대로 시드기야와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시므로서 언약이 궁극적으로 승리하게 된다는 사실을 드러내게 됩니다.

즉 시드기야의 존재는 본의 아니기 하나님의 율법을 명백하게 잘 나타나는 역할을 감당한 바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 세상에서 전쟁을 없을 수가 없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 세계 전체를 언약과의 전쟁터로 몰아세우시려 하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언약이 일찍이 충분히 예언하셨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28:25과 31-35에 보면, “ 여호와께서 너로 네 대적 앞에 패하게 하시리니 네가 한 길로 그들을 치러 나가서는 그들의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할 것이며 네가 또 세계 만국 중에 흩음을 당하고…네 토지 소산과 네 수고로 얻은 것을 네가 알지 못하는 민족이 먹겠고 너는 항상 압제와 학대를 받을 뿐이리니 이러므로 네 눈에 보이는 일로 인하여 네가 미치리라 여호와께서 네 무릎과 다리를 쳐서 고치지 못할 심한 종기로 발하게 하여 발바닥으로 정수리까지 이르게 하시리라 여호와께서 너와 네가 세울 네 임금을 너와 네 열조가 알지 못하던 나라로 끌어가시리니 네가 거기서 목석으로 만든 다른 신들을 섬길 것이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양상의 예언의 결말이고 그 과정을 전쟁을 통해서 진행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즉 전쟁은 인간들이 늘 공포로 다가옵니다. 좀 평안하고 살고 싶어도 이미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서 있는 입장에서 그 누구도 이 전쟁에서 벗어날 자가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미리 언약을 받았던 이스라엘의 역할을 무엇일까요?

그것은 전쟁을 마주하면서 이 모든 전쟁이 자원 확보와 인간들의 명예심과 관련된 일이 아니라 예언된 언약의 내용과 관련된 사항인 것을 증거해야 될 자들이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겁니다. 즉 이스라엘이 망하면서도 그 끝 모습까지 남김없이 예언된 대로 진행되는 겁니다. 따라서 나의 명예와 내가 살 자원(=돈) 확보와 상관없이 언약만이 돋보이면서 그것으로 족하다는 자들이 발생됩니다.

나의 이익과 상관없이 언약의 활발한 활동에 충실하게 호응하는 것을 원하는 자들이 출현된다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언약에 충실하는 방식에 대해서 이미 출애굽을 통해서 하나님께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유월절 양의 살을 먹고 그 피를 문설주를 바라는 방식입니다. 자신에게 넘쳐나는 욕망을 인정하고 자신의 욕망으로 언약에 나서는 것이 아니라 유월적 대신 죽음에 자신을 합류해서 세상에 나서는 겁니다.

전쟁을 통해서 도리어 언약의 활발성을 즐겁게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 모습은 시편 27:1-4에 나옵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나의 대적, 나의 원수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이 사람이 조금도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삶의 목적이 언약적으로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전에 사모하는 것’에 마음이 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아무리 전쟁이 치열해도 그 치열한 모든 전쟁 양상도 성전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한 전쟁으로 이해합니다. 즉 사적으로 실패해 보여도 언약의 완성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러한 언약의 효력을 이미 죽고 난 뒤에 분명해집니다. 잠언 15:11에 보면, “음부와 유명도 여호와의 앞에 드러나거든 하물며 인생의 마음이리요” 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죽고 난 뒤에 모여져 있는 그 세계에서 비로소 언약이 얼마나 소중한 복음인지가 드러나는 겁니다. 성도는 이 사실을 생전에 이미 부여받은 자를 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전쟁의 요란함을 도리어 언약의 분주함으로 이해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