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33:19-22 / 언약적 기능
언약적 기능
이근호
2025년 3월 9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3:19-22
(33:19)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33:20)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능히 낮에 대한 나의 약정과 밤에 대한 나의 약정을 파하여 주야로 그 때를 잃게할 수 있을진대
(33:21) 내 종 다윗에게 세운 나의 언약도 파하여 그로 그 위에 앉아 다스릴 아들이 없게 할 수 있겠으며 내가 나를 섬기는 레위인 제사장에게 세운 언약도 파할 수 있으리라
(33:22) 하늘의 만상은 셀 수 없으며 바다의 모래는 측량할 수 없나니 내가 그와 같이 내 종 다윗의 자손과 나를 섬기는 레위인을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투가 인간들의 현재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위반하고 있음을 전제로 해서 나오신 말투입니다.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 무게를 두고, 그리고 중심으로 해서 삶의 패턴을 이룹니다. 변함없는 것으로 그들이 누구도 동의하는 것은 낮과 밤이 주는 질서입니다.
낮과 밤은 보이는 해와 보이는 달에 의해서 갖추어진 상황입니다. 따라서 자연의 법칙에 대해 인간들은 자연스럽게 신뢰를 하고 있는데 그 신뢰가 최우선적입니다. ‘변하지 않고 한결같음’의 표준으로 낮과 밤의 교대 질서를 거론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이 자연원칙에서 나온 안정성에 마음을 두고 사는 것을 염두에 두시고 하나님의 뜻을 제시하십니다.
너희들이 보기에 결코 달라지거나 바뀔 리가 없는 이 대자연의 원칙이 바뀌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것보다 훨씬 확고하게 하나님께 밀어붙이시는 원칙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레위언약’이요 ‘다윗언약’입니다. ‘다윗언약’은 왕의 출현에 관한 약속입니다. ‘레위언약’은 그 왕이 지상에서 하시는 기능에 관한 겁니다.
왕이란 전면적인 지배와 통치에 관한 존재이고 레위언약은 그 왕이 지상에서 행하실 기능에 관한 겁니다. 그 기능이란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의미있고 가치있는 죽음을 생산하는 겁니다. 이 지상의 기능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왕적인 기능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입니다. 레위인들은 왕을 모시는데, 그 레위인들이 모실 왕은 인간의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왕적 기능에 대해 모시는 겁니다.
역대상 23:25-28 보면, “ 다윗이 이르기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평강을 그 백성에게 주시고 예루살렘에 영원히 거하시나니 레위 사람이 다시는 성막과 그 가운데서 쓰는 모든 기구를 멜 것이 없다 한지라 다윗의 유언대로 레위 자손이 이십 세 이상으로 계수되었으니 그 직분은 아론의 자손에게 수종들어 여호와의 전과 뜰과 골방에서 섬기고 또 모든 성물을 정결케 하는 일 곧 하나님의 전에서 섬기는 일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레위인들은 ‘어깨에 매는 일’을 하는 자들입니다. 그들 어깨에 무엇이 매일까요? 그것은 성전에서 해야 될 일과 관련된 기구들과 사물들을 어깨에 맵니다. 언약궤도 물론 어깨에 맵니다. ‘어깨에 맨다’는 것은 자기 고유의 이상이나 사적인 이득과는 전혀 무관한 일에 매진하는 자들이라는 겁니다.
곧 ‘자기를 위한 자기’가 성립될 수는 없는 자들이 바로 레위인들입니다. 이들 레위인들은 다윗이 왕이되고부터 왕의 지배와 통솔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왕이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왕되심의 기능을 위해 수하에 레위지파 사람들을 소유하고 있는 셈이 됩니다. 이런데 이러한 정치제도가 오래가지를 못했습니다.
여전히 왕다운 왕이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왕되심을 받아야 될 왕들이 백성들의 눈치를 보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무관한 외국 민족과의 관계를 고려한 겁니다. 이미 그전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레위들에게 돌아갈 십일조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레위언약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능력껏 살면 된다고 생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하늘의 해 법칙보다 밤의 달의 법칙보다 더 운행되는 게 각자 인간들 속에 있었던 겁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자신을 위해 사는 법칙’인 겁니다. 비록 가끔 남을 도와준다고 자부하지만 그것이 자기을 우선적으로 챙기고 그 다음 남입니다. 이스라엘은 ‘언약된 왕’을 원한 것이 아니라 그냥 ‘일반적인 왕’을 원했습니다.
따라서 레위인들의 짊어질 대상도 백성들의 관심사에서 떨어져 나갑니다. 즉 백성들이 그다시 애타게 원하지 않는 일에 대해서 백성들을 십일조로 지원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 겁니다. 민수기 18:20-22에 보면,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의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이후로는 이스라엘 자손이 회막에 가까이 말 것이라 죄를 당하여 죽을까 하노라” 바로 원칙에 대해서 백성들의 반응이 시큰둥 한 겁니다. 관심도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은 망합니다.
이스라엘이 망하고 난 뒤에 에스라, 느헤미야는 ‘제사장들만으로 지배를 하는 체계’를 염두에 두고 옛날 이스라엘 땅에서 성전을 재건합니다. 비록 성전이라는 건물이 대충 다시 만들 수는 있어도 레위인들만의 세계는 결국 성사시킬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인간들의 마음들이 각자 자신에게 꽂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떠 있는 하나의 태양으로 대낮에 모든 인간들이 혜택을 입고, 밤 되면 하늘에 떠 있는 하나밖에 없는 달의 혜택을 집단적으로 입듯이 하나님이 제시한 원칙은 결코 개인적인 행복용으로 주어진 것이 아님을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인간들의 문제점은 근본적으로 마음의 방향이 틀렸다고 말입니다.
마태복음 6:19-21에 보면,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사람들의 마음이 땅에 두고 있습니다. 비록 과학적으로 태양이 가만히 있고 지구가 그 태양을 돈다고 해서 세상 중심이 지구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야께서 태양에 오신 것이 아니라 지구에 와서 활동을 마무리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예수님 재림 때에는 지구 뿐만 아니라 온 우주가 무너집니다.
즉 지구 외에 그 어떤 장소도 우주의 중심이었던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왕으로 오셔서 레위언약을 죽음으로 완성하신 주님의 일은 성도의 마음 중심을 바로 십자가에 두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마음을 십자가 두게 되면 바로 그곳이 하늘의 모든 일이 집중되어 있는 곳입니다.
개인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변화에 매우 신경을 씁니다. 하지만 기껏 살아봤자 100년이라는 시간 간격에 해당될 뿐입니다. 영원한 원칙을 인간의 제한된 시간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언약완성으로 확정되는 겁니다. 우리 마음을 그 중심되는 십자가에 둡시다. 그곳이 하늘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각자 자신의 가치를 내세우지말고 오직 하나뿐인 영원한 가치를 내세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